2008-02-22
타자의 언어와 한글의 덫
한국어를 연구하고 한글 표기를 뜯어고쳐서 '조국 근대화'에 일조하겠다는 발상의 역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은 것이다. 일제의 강점 당시 서구의 학문 체계를 흡수한 지식인들이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하는 제1의 대상은 당연히 한국어였다. 한국어를 연구하지 않으면 한국어로 문학 작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 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한 기본적인 정서였던 것이다. 충남의 천재 홍명희는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그 아들 홍기문은 국어 연구를 하다가 북한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역해낸다. 이것은 비단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의 유입을 겪는 사회의 지식인은 그 충격을 자국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선 흡수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독일 시절부터 스와힐리어 복권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한글 표기법을 영어 발음에 맞게 뜯어고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고, 인터넷은 발칵 뒤집혔으며, 그에 대한 이러저러한 반론들이 덜컹덜컹 생산되었다. 그 내용들은 대체로 '외국어와 외래어는 다르다' 내지는, '오륀지라고 써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다' 정도로 형성되었고, 급기야는 '영어 발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은 국가 경쟁력과 무관하다'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었다. 영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외국어와 자국어 사이의 갈등에 대한 문화적 고찰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그 내용들은 대체로 옳다. 하지만 그것은 이 상황과는 무관하게 원래 옳은 내용이기 때문에, 영어 교육을 위해 한글 외래어 표기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 되지도 못한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결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이경숙은 과연 '오륀지'를 발음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수 있다. 이경숙이 발음한 그것을 '오륀지'라고 표기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 표기를 통해 이경숙이 한 발음을 복원해낼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논의의 90% 이상이 그 영상을 직접 보지 않았거나, 봤더라도 사태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러므로 우선 밑에 링크된 참고 영상을 보고 이후의 내용을 전개하도록 해보자.
"혼선의 주역?", MBC 뉴스투데이, 2008. 02. 01
나는 이경숙이 '오륀지'를 발음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경숙이 발음한 것은 [ˈorӕndʒ]일 뿐이다. 대부분의 사전에 orange의 발음이 [ˈorindʒ]로 표기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이경숙의 발음은 표준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아무튼 발화하는 내용을 유심히 들어보면, 모음의 변화가 아닌 강세의 부여가 영어 화자의 발음 이해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이내 알 수 있다. 굳이 한글로 표기하자면 ['오린쥐]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어퍼스트로피에 유의하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경숙이 말하는 발음의 문제는 우리가 orange라는 단어를 읽을 때 각각의 모음을 어떤 음가로 소화하느냐가 아니라, 첫 번째 음절에 강세를 찍느냐 찍지 않느냐에 따라서 갈라지는 언어적 문제이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가 한글 표기가 아닌 영어 발음에서의 강세에 대한 인식과 적응이라는 것을, 심지어는 그 말을 하는 이경숙 본인도 철저하게 몰랐다는 데 있다.
오랜지를 '오린지' 혹은 '오륀지'로 써놓는다고 해서 이경숙이 말하는 바 '미국인이 알아듣는 발음'이 절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그 뉴스 영상 38초에서 40초 사이에 기자가 그 표기를 한국어 식으로 읽으면서 즉각 폭로된다. [ˈorindʒ]와 '오린지'의 간극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모음 하나를 발음하기 위해 주둥이를 어떻게 옴쭉거리느냐 하는 차원이 아니다. 언어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이 바뀌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 단어에는 강세가 있다. 그것은 영어 화자들이 단어의 정확성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이경숙이 [ˈorindʒ]를 '어랭재'로 읽었다 하더라도, 첫 음절에 강세만 정확히 찍혀 있었다면, 눈 앞에 오랜지가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은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음 [r], [n], [dʒ]과 모음 [o], [i]의 발음이 완벽하다 해도 강세가 없다면 영어 화자가 그 단어를 이해하는데에는 곱절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에 오랜 기간 체류하면서 '한국인이 하는 영어 발음'에 숙달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대체 왜 신문과 방송에서는 '오린지'가 판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아까도 말했듯이 이경숙 본인부터가 자신이 무슨 발음을 했는지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세를 표시하는 차원으로까지 한글 표기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되지도 않을 것을 다짜고짜 '오랜지라고 써 있으면 외국인이 못 알아듣는다'라고 넘겨버린 탓이 크다는 것이다. 둘째, 언어의 음성적인 차원과 문자적인 차원을 혼동하고 있는 발언을, 정말 곧이곧대로 '한글 표기법을 바꾸자'라는 내용으로 보도해버린 언론의 편의주의가 이 논의의 혼탁함에 한 몫을 더했다.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은 이경숙 위원장이 자신의 그 애틋한 사연을 말하는 과정에서, 그가 발음한 내용이 어떻게 지지고 볶아도 한글로는 표기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인수위원장은 영어 발음에 맞도록 한글 표기를 고치고 싶어하는구나'라고 곧이곧대로 이해한 다음, 영어 사전에서 [ˈorindʒ]를 찾아보고는 그것을 '오린지'라고 적었다. 말하는 사람에게도 그것을 받아 적는 사람에게도 교양이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ˈorӕndʒ]는 '오린지'로 다시 태어났다. 그 어디에도 [ˈorindʒ]는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화적 경향과 맞닥뜨릴 수 있다. [ˈorindʒ]를 발음하기 위해 '오랜지'라는 외래어 표기를 뜯어고치자는 이경숙이나, 그걸 또 사전 뒤져서 '오린지'라고 적어놓는 언론이나, 모두 영어를 한국어의 틀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국어로서 영어가 갖는 기본적인 성격, 즉 한글로는 절대 표기할 수 없는 강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 것은 양자가 똑같다. 언론에서 써 놓은 신문 기사만 읽고 설레발치며 세월을 보낸 네티즌들도 마찬가지다. 이경숙의 '오린지' 사건의 본질은, 우리가 영어를 한국어와 완전히 별개의 것인 외국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영어 공교육이 실패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불어를 처음 가르칠 때 교사들이 악상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 것과 달리, 영어 교육 현장에서는 [θ], [ð], [r] 처럼 개별적인 음소의 발음을 다듬는 것에만 집중한다. 정작 중요한 개별 단어의 강세 표시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는 단어 사이의 연음, 즉 혀 굴리기를 연습하느라 혀 뿌리의 근육을 자르는데, 단어의 강세를 발음하지 않으면서 연음을 굴리는 것은 앉은뱅이가 달려가겠다고 하는 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는 미련한 짓이다.
특히 영어에 환장하는 한국어 화자들은, 영어가 타자의 언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영어를 구성하는 방식은, 자음과 모음의 발음부터 단어마다 찍히는 강세, 그리고 문법에 이르기까지 한국어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르다. 하지만 그들은 영어에 대한 '정확한 한글 표기법'이라는 성배를 찾아 헤맨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대신, 그들은 '모든 언어를 완벽하게 표시할 수 있는 한글'이라는 숭고한 대상(이 표현 쓰는데 재미 들렸다)에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국어를 하는 도중에 영어 단어를 정확한 발음과 함께 섞어서 쓴다면, 그것은 한국어 문장의 전체적인 흐름을 심각하게 저해한다. 애초에 표현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어 단어를 섞어 쓸 때마다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강세, 장-단 모음의 구분 등을 무시하고, 그것은 결국 그 단어를 한국어의 일종이 되게끔 한다. 영어로 말하다가 한국어 단어를 섞는 경우도 그와 유사하다.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던 와중에 한국어 단어 한 두 개를 매끄럽게 녹여낼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두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체계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할 수 있었던, 바꿔 말하자면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훨씬 영어를 잘 배웠고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사례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미국에서 의사로 잘 먹고 잘 산 서재필, 미국인들에게 하도 전화질을 해서 부아를 돋굴 정도였다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 영어로 일기를 쓰다 한국말로 쓰다 한자로 쓰다 할 수 있었던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 등이 모두 그렇다. 그들은 모두 한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책에 써 있는 내용을 입으로 옮겨 발음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고, 가령 '치킨나라' 같은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영어사전에 표시된 발음 기호 그대로 그 책의 내용들을 읽었다. 세 사람 모두 엄청난 속도로 영어를 배웠고 그 실력은 평생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개별적인 인자가 우수해서일 수도 있지만, 영어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지금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해방 이후 맹꽁이 배처럼 부풀어오른 '한글에 대한 자부심'에 충만해 있다.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언어인지 떠벌이는 떡밥은 요즘도 잊을만 하면 인터넷에 올라온다. 하지만 한글은 세종대왕에 의해 만들어지던 순간부터 불완전했다. 최세진이《훈몽자회》에서 한자의 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며 절감했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자음과 모음이 사용되었던 그 당시에도, 외국어인 중국어는 한글로 온전히 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의 언어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한문 고전과 함께 들어온 유교 계통의, 혹은 불교 계통의 한자 어휘들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섞어 쓰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외국어로 쓰여진 외국의 고전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고전 한문을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조선 사대부들은 사서삼경을 줄줄 외우고 다닐지언정 중국어로 대화를 할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지금이야 고전 한문과 만다린의 격차가 넘을 수 없을 정도로 크지만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한자를 '외국어'로 받아들여 중국어의 4성조와 발음을 익히지 않았을 뿐이다. 한자 문화권의 커뮤니케이션은 그 덕분에 주로 필담에 의지하게 된다.
자신에게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국가의 언어를 타자의 언어로 인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선과 현재의 대한민국은 나름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한글이라는 '숭고한 언어'(한글이 언어가 아닌 문자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도외시하고 있으니 그냥 이렇게 써놓도록 하자)가 끼어들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한글은 일제시대에 '우리 민족'의 넋을 지켜낸 그릇이요, 우리가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영어를 표기해서 읽는다면 그 발음은 미국인의 귀에도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불완전한 외래어 표기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 한글은 너무 위대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교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극도로 심각한 분열증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은 한글을 숭배하면서 멸시하고, 칭송하면서 폄하한다. 그 이면에는 '영어'라는 언어가 타자의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혹은 영어를 쓰는 힘 센 미군 샘 아저씨와 똑같아지고 싶다는 달성 불가능한 욕망이 존재한다. 그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글은 '완전한 문자 체제'가 되는데, 문제는 그 이데올로기가 영어 학습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한글은 불완전하다. 우리가 너무도 우습게 아는 일본어도 한글로 완벽하게 표기될 수 없다. 한글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을 구분하는 음가 표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로 한국어를 완전하게 표기하는 것조차도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놓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숭고한 한글'에 대한 숭배에, 앞서 언급한 '국어를 통한 민족 개조'라는 전통적인 맥락이 더해지면서, 나라 걱정하는 애국지사 이경숙은 '영어 단어의 강세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을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로 치환하여 온 나라를 들쑤셔놓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 지 감을 잡지 못한 기자들은, 앞서 말했듯이 사전에 등장하는 발음 기호를 강세 표시만 쏙 빼놓고 한글로 옮겨 지면에 표시하였고, 그러자 마치 이경숙이 [오린지]라는 발음이 미국에서 통용되는 것처럼 말했다는 듯 이야기가 와전되어버렸다. 그 잘못된 정보에 기반하여 우리의 네티즌들은 벌떼같이 일어났는데, 문제가 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에 대한 바라봄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두루뭉수리하게 '옳은 소리'나 하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 떨어지게 되었다.
애초에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자들이, 경찰로 치자면 초동수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사태의 논점을 명확하게 잡고 있었더라면, 논의가 불필요한 방향에서 불타오름으로써 정치적인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글로 영어를 표기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대신, 네티즌 중 상당수는 '오뤤지'니 '오뢘지'니 하며, 마땅한 별명을 짓기가 곤란할 때 가령 '노정태'를 '노줭퇘'라고 발음하며 시시덕거리는 고등학교 1학년 유소년들처럼, 극도로 유치하게 자신들의 '반 MB 감정'을 표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직도 영어가 타자의 언어임을 깨닫지 못한 채, 숭고한 글자인 한글의 덫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2008-02-21
자기 아니면 우주
요컨대 민족국가의 정치적인 관점에서만 해석돼온 친일이란 문제는 생활사라는 큰 틀 속으로 흡수돼가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을 벗어나 다각적인 사고와 조명이 가능해질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동시에 국가 민족 표준어 등 근대의 큰 틀이 깨지면서 소설 역시 그 역할을 잃어버렸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상상력을 보십시오. 그리고 일본 만화를 보세요. 자기, 아니면 우주입니다. 소설이 담당해왔던 중간항인 역사나 사회는 빠져있지요. ‘창공의 별’은 사라지고 아주 유치한 동물적 단계와 아주 높은 우주적 단계만 남아있습니다.”
김윤식, “향후 100년 문학의 화두는 ‘우포늪에서 우주 상상하기’”, 경향신문, 2008년 2월 21일, W2면
‘이 작가’란에는 젊은 소설가 김애란을 초대했다. 김애란은 첫 창작집『달려라, 아비』를 통해 한국 소설의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바 있다. 이번에 출간된 두번째 창작집 『침이 고인다』 역시 이 작가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의 소설이 새로운 서사적 밀도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 사회의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동시대 젊은이들의 궁핍한 실존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면서, 특유의 ‘우주지리학’을 펼쳐 보이는 이 작가의 문학적 기량은 2000년대 문학의 아이콘으로서의 김애란의 뜨거운 위치를 새삼 확인하게 만든다.
『문학과사회』겨울호를 엮으며, 『문학과사회』80호
"일본 만화를 보라"는 김윤식의 지적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모닝구무스메의 "Love Revolution" 가사에서 아무 이유 없이 '지구' 타령이 나오는 것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던 일이 문득 기억난다. "The stars, my destination."이라고 선언하는 걸리버 포일은 현존하는 사회적 인간 관계를 손수 파괴하겠다는 뜻을 밝힘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질서를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한 반면, '우주적인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다 먼지에 불과해'라고 쉽게 나불거리는 일본 만화 속의 캐릭터들은 결국, 자신의 유아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냉소해버린다. 글이 잘 풀리지 않으니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2008-02-15
한국판 CSI
채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좁혀진데는 방화 현장에서 발견된 일회용 라이터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경찰은 전했다.
일회용 라이터는 춘천의 한 노래방 홍보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는데 채씨의 거처가 있는 강화도 장정리 마을 주민들이 지난해 말 춘천에 단체로 놀러가 그 노래방에서 유흥을 즐긴 것으로 확인됐다. 노래방 주인은 강화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경험이 있어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복원하면 되잖나” 태연한 범행 재연…숭례문 현장검증", 경향신문, 2008년 2월 16일.
완전범죄란 없다.
2008-02-14
메신저와 이메일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메신저를 활용하는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뭔가 재미있는 것을 읽을 때 그 링크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기능을 활용하고자 할 때 더욱 유용한 것은 메신저가 아니라 이메일이다. 이메일은 당장 그 순간에 보지 않을 수도 있고, 지메일 같은 경우 매우 빠르게 검색이 가능하기도 하며, 명확한 기록이 남는다. 메신저 대화도 잘 찾아보면 대화 기록이 자동으로 저장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순간적으로 흘러가는 대화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이메일은 남는다.
물론 메신저로 링크를 찍어줄 때 그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당장 그것을 보고 그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뭐 그러자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끼리, 지금 당장 반응을 듣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그런 것들만 보낸다는 것은 그다지 보기 좋은 일이 아니다. 이메일
2008-02-13
칭얼칭얼의 왕국
흥인지문 감지기 꺼놨었다…"너무 자주 울려서"
[SBS 2008-02-13 21:19:55]
<8뉴스>
<앵커>
더 기가 막히는 일도 있습니다. 동대문, 즉 흥인지문도 KT 텔레캅에서 경비를 맡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아예 야간 적외선 감지기를 꺼 놓았던 것으로 SBS 취재 결과 확인됐습니다. 너무 자주 울려 귀찮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박세용 기자입니다.
<기자>
숭례문에 앞서 지난해 9월 흥인지문의 야간 무인경비 업무를 맡은 KT 텔레캅은 흥인지문 주변에 적외선 동작 감지기 15개 조를 설치했습니다.
순찰이 없는 저녁 6시부터 아침 9시까지 작동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설치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적외선 감지기를 고의로 꺼버렸습니다.
사람들이 흥인지문에 자꾸 드나들어 수시로 경보가 울렸고 관리주체인 종로구청과 경비업체에서 매번 출동하다 보니 짜증이 났다는 것입니다.
[KT텔레캅 직원 : 거기(흥인지문) 하도 사진을 많이 찍는데 이용객들이 그래서 (감지기에)자꾸 걸리는 건데. 우리는 매일 (출동) 가다시피, 하루에도 몇 차례 가야 되고.]
그러다가 숭례문이 불타 무너지는 걸 보고 나서야 꺼놨던 적외선 감지기를 부랴부랴 살렸습니다.
[ KT텔레캅 직원 : (감지기) 신호가 많이 발생돼서 해당 구청에서도 너무 많이 (출동을) 오니까. 센서를 정지시켜 놨다가 어제(11일) 또다시 요청해가지고 다시 센서를 살려 놨다고.]
대문 정면의 감지기들만 꺼놨다며 별일 아닌 듯이 대답하는 종로구청.
[종로구청 직원 : (측면 계단으로 가지 않고 정면으로 들어갔을 때는 감지기가 안 울리는 상태죠?) 그렇죠. 정면 부분에서는 저희가 안 울리게 해 놓았었죠.]
아무나 보물 제1호에 침입해 불을 지를 수 있는 무방비 상황을 만들어 놓은 것은 바로 보안 책임자들이었습니다.
인용된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 신경 쓰지 말고, 굵은 글씨로 강조된 부분의 뉘앙스를 느껴보도록 하자. 대한민국은 칭얼칭얼로 망할 것이다.
2008-02-12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인터넷에 떠도는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남대문에 불 싸지르겠다고 노숙자가 궁시렁' 같은 언어들이, 바로 방금 전까지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 악플을 싸지르고 다니던, 하지만 남대문이 불길에 휩싸임과 동시에 졸지에 선량한 '시민'이 되어버린 네티즌 님들의 주둥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나밖에 없단 말인가?
물론 사태가 일대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한나라당이 200석 이상의 득표를 할 가능성보다는, 이회창이 몰고 올 신당과 국회를 분점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노숙자들에 대한 명료하지 않은 공분은 결국 전반적인 사회적 약자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회창의 신당은, 대선 당시 내걸었던 '따뜻한 보수' 같은 구호 대신, '질서를 바로잡자'는 식으로 한 술 더 뜨는 극우파적 행보를 시작할 것이고, 한나라당 또한 서울을 깨끗하게 '청소'하자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갈 것임에 분명하다. 인수위의 '꼴통스러움'을 욕하던 '네티즌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노숙자를 '청소'해내는 일에 과연 찬성할까, 반대할까?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판국 속에서 좌파 신당은, 설령 총선 전에 완벽하게 창당된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서세영은 한 때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쟁이와 빨갱이가 없으면 노숙자들 밥은 누가 주니?' 자, 이제 예수쟁이들은 속세의 권세로 넘어갔고, 빨갱이들은 사분오열하여 바지에 똥을 싸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 서울의 노숙자들은 죽거나 혹은 죽는 것보다 나쁘거나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을 보며 9/11을 연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잠재적인 범인으로 지목될 것임에 분명한 서울역의 속죄양들을 쓸어내는 인수위 혹은 이명박 정부의 행보를 못 이기는 척 찬성할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과연 '네티즌 시민'들의 알량한 반MB 감정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상식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속죄양을 잡으면 이제부터 진짜 카니발이 시작된다.
나도 제발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2008-02-11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서 나는 지젝의 '통찰'이 아니라 '안목'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랜 세월동안 즐기며 영화를 봐 온 사람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요소들이 이 짧은 글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인 논의에 동의하고 말고는 그 다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젝의 이론들이 '옳은 이야기를 괜히 빙빙 돌려서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그의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다는 말에 반만 동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지젝에 반대하는 '좌파'들은 대부분 완전히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과 대립하는 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간단하다). 하지만 《300》에 대한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인 통찰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영화광이 내놓을 수 있는 신선한 시각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내용은 그 다음이다.
또한 지젝은 소설광이기도 하다. '하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단정적일 수 있겠다. 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무언가 매우 탁월한 지점이 있다고도 한다. 자꾸 소문의 벽 너머로 후퇴하게 되는 것 같으니, 다소 비슷한 뉘앙스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읽어본 에코를 예로 들어보자. 에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학 노년이다. 본인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그랬다. 수 개 국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이 할 줄 아는 언어로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잘난 척을 하기도 했다. 루카치 같은 철학자는 애초에 문학평론가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미국의 법경제학자 리차드 포스너도,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어떤 소설의 발문을 써주기 위해 그 작품을 읽다가 필을 받고 《성과 이성》이라는 두텁고 무게감 있는 이론서를 써냈다. 이런 사례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지젝은 소설광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아무튼 지젝은 소설광이다.
지젝이 영화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빛나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렇듯 그가 실제로 그것들을 즐기며 살아가는 데 기인하고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나는 이걸로 논문을 써야지'라고 작심하고 붙잡고 본 영화에 대해 그토록 발랄한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는 도착증 환자일 것이다. 지젝은 문화연구가이기에 앞서 대중문화를 즐기는 한 사람이고, 바로 그 점이 지젝의 대중적 인기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서도 머리 좋은 놈이 열심히 하는 놈 못 이기고, 열심히 하는 놈이 즐기는 놈 못 이긴다고 하였듯이, 대중들은 즐기면서 글을 쓰는 지젝의 진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어 화자인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된다. 지젝을 섬기는 사람도 많고, 그러한 '지젝빠'들을 까는 사람도 적잖게 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인문돌이'들이 차려놓은 블로그나, 혹은 그들이 흔적을 남기는 게시판 등을 들여다보면, 과연 지젝만큼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맥락을 향유하고 있는 이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소설 따위 읽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 놓고 자랑스레 떠벌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영화 볼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완장을 차고 좋아라 하는 이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특히나 '소설 볼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기도 차지 않는다. 적어도 지젝에게는 인터넷 할 시간이 없으면 없지 소설 볼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개봉관을 서둘러 찾는 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문화비평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화 향유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화 컨텐츠를 논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자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그것'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짓고, '대중'이나 '광기', '문화적 흐름'이나 '도치', '향락', '재발견'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글에서 다루는 부분은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어 결정적인 한 지점을 콕 하고 찔러내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통찰이 아니라 안목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그의 이론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려운 문화적 소양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 워》를, 《칼의 노래》를, 혹은 2002 월드컵을 논할 때 과연 우리는 그 대상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었을까.
이러한 문화적 소양의 결여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혹자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일 야근을 하는 통에 '즐길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인구가 1억 명이 되지 못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소설책 한 권을 사서 볼 돈도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종합되어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문학을 한다고 하는, 혹은 비평의 언어를 생산한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종의 엄숙주의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이, 혹은 한 번 읽고 더 안 볼 책 사보기는 아깝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즐기는' 것이 '금지된 쾌락'에 속하는 것일까? 흠, 이런 가설은 한 번쯤 세워봄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의 9페이지에 실린 한 어구의 내용을 적절하게 차용해보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자.
한국에서 지적 엔터테인먼트는 오랫동안 금지된 쾌락에 속했다. 한국인에게 이 금지된 쾌락은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대상으로 현신한다. 불가능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열망은 쾌락은 쾌락이되 고통스러운 향락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 대상이 채우고 있는 빈자리, 그 결여의 지점에 완전무결한 지젝은 숭고 대상으로 존재한다.
말을 하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다. 지젝을 즐기기 위해 지젝이 즐기는 것들을 즐기는 것은 지젝의 광신도들에게, 심지어는 그들을 논박하는 이들에게도 '금지된 쾌락'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젝이 봤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씨네마테크를 향하거나 DVD를 구입하거나,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는 대신,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의 진실을 놓고 하염 없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오,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정녕 알지 못하나이다.
2008-02-08
지구를 뒤덮은 슬럼에서 퀴즈쇼에 참여하다
. . . 《Q & A》는 현대 인도 사회에 대한 일종의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그것이 주마간산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사는 독자인 우리는 그저, 점점 평평해지면서 작아지는 세계의 가장자리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정도를 기억하면 된다. 나 자신도 아차하는 순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굳이 떠올리지는 말기로 하자. 그런 '통찰'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퀴즈쇼》를 펼쳐보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다.
리뷰 전문을 읽으실 분은 여기로.
2008-02-05
왕도정치의 실용성과 그 방법론
도를 이룬 자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많고 도를 잃은 자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적다. 도와주는 이가 극단적으로 적은 경우에는 친척조차 배반하고, 도와주는 이가 지극히 많은 경우에는 천하 사람들이 따른다. 그러면 천하 사람들이 따르는 나라를 가지고 친척이 배반하는 나라를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싸우지 않지만 싸우게 되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다.73쪽, 《맹자》 (서울: 책세상 2002)
. . . 필자들은 연구 대상을 확대해, 1816년 이래 벌어진 전쟁 80개를 추가해 조사해 보았다. 해당 국가의 사회 계층화 정도는 당시 문헌을 조사해 판단했다. 분석 결과, 전쟁 당사국 중에서 사회적으로 더 평등한 구조를 가진 국가가 전쟁을 이긴 경우는 80%인 것으로 나타났다.13쪽, "평등한 나라가 이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2007년 11/12월호, 통권 163호
용감무쌍한 전투력과 사회 평등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둘 사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할 수 있다. 국민개병제 체제로 구성된 군대의 내부 결집 정도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 불평등한 사회의 군대는 종종 국내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다는 점, 이런 사회에서는 적에게 심정적으로 이끌리는 가난한 병사들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론"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통한 '사회 통합'일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가령 그 유명한 양혜왕 상권의 1장을 살펴보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다툰다면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15쪽, 같은 책)이라는 이유로 맹자는 이익을 말하는 양혜왕을 꾸짖는다. 임금이 인仁을 보여주면 신하와 백성들도 그것을 따라할 것이므로 임금은 이익 대신 인의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 구상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단순한 행동 모형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국민국가의 구성원이 충실한 애국심을 느끼고 있을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굳이 위에 인용한 FP의 기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먼저 본을 보여야'처럼 한국어 화자들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나오는 표현들은, 이렇듯 의외로 단단한 사상적 연혁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좀 더 정밀한 분석 및 역사적 고찰을 요한다.
김규항에 대한 벤야민의 코멘트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던 나의 소망을 접고 입대했다. 그곳에서 세 번의 살인과 세 번의 자살을 생각했고 김씨 성을 가진 여자를 떠나보냈으며 김씨 성을 가진 창녀에게 구혼했다.김규항, "교회", 《씨네 21》, 1998년 12월.
매춘부에 대한 사랑은 상품에 대한 감정 이입의 신격화이다.발터 벤야민, 《아케이드 프로젝트》, 조형준 옮김 (서울: 새물결 2005), 1154쪽.
2008-02-04
[낮은 목소리로]“군대 가면 영어 잘하게”
지난 번 글에서 필자는 군대를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곳, 지식사회의 최고 공헌집단으로 변화시킬 기회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 방안으로 국방부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지정하고 지식 중심의 군대로 재편할 것을 제안했다. 군 복무기간 동안 모든 군인은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즉 국방부의 시계를 영어로 돌리는 것이다.
군대가 가진 최대의 장점과 최고의 강점은 격리된 집단생활이다. 시간을 통제하고, 언어를 통제하고, 생활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정확하게 알아들었는지를 복창으로 확인하는 유일한 조직이다.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있는 조직, 영어만 사용하게 하는 절박한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다. 이런 강제력을 가진 조직이 군대 외에는 없다. 어느 사단을 정해서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고 차차 확대해 나가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2년 동안 영어만 쓰는 군대생활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조직이 될 것이다. . .
이강백, [낮은 목소리로]“군대 가면 영어 잘하게” 경향신문, 2008년 2월 2일, 34면.
너무 골때려서 지금은 코멘트 불가.
추가) 이 칼럼의 저자 이강백 씨는 아름다운가게의 집행위원이라고 한다. '뒤집어 쓰면 영어로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철모' 같은 아이템도 거기서 파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2008-01-28
매체로서의 책,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책
첫째 반론에 대한 답변을 해보자. 나는 이론과실천을 포함한 여러 인문서 출판사에서 강유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원고를 올려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달인》의 원고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출판사에서 올리지 말라고 요청을 했거나, 올렸더라도 곧 내렸음을 시사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출판 관계자들이 그 게시판을 검토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사실 자체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두 번째 반론과 세 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을 검토해야 한다.
'출판사의 양해를 구했다'라는 말이, 너무도 손쉽게 '그러므로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책의 판매에 영향을 주지 않거나, 주더라도 미비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비약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책의 판매에 당연히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내 블로그에서 답변을 달아 주신 분들, 혹은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사례를 예시로 드신 분들과는 달리, 나는 파일로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글을 굳이 책의 형태로 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독자군의 일원이다. 내가 문제의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원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사려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홈페이지에 원고가 올라와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도서구입비로 적어도 십만 원은 쓰지만, PDF 파일을 가지고 있는 책 값으로 7천 원을 지불하는 것은 적어도 내 입장에서 볼 때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다.
문제는 나와 같은 입장에 서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는 데 있다. 물론 텍스트 파일을 구해도 책을 사는 사람이 있고, MP3를 실컷 다운받은 다음 CD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카피레프트'로 인해 장르를 불문하고 컨텐츠 시장이 초토화된 현실을 놓고 볼 때, '물건으로서의 책이 갖는 매력'만을 놓고 '그러므로 책을 살 사람은 파일이 있어도 산다'는 말로 원고 공개를 옹호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입장이다. 책은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구입하는 조제약이 아니다. 원고가 인터넷에 떠돌건 말건 반드시 사 보는 사람들만이 간신히 남아 있기 때문에 한국의 출판계가 매년 단군 이후 최후의 불황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원고 공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면, 책을 구입하는 것은 책이라는 물건에 대한 자신의 각별한 애정과 그 책의 저자들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일을 대체로 수반하며, 결과적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일종의 기념품으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원고를 공개하고 있음에도 《책과 세계》라던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알라딘 기준으로 볼 때 비교적 잘 팔린 것 같다. 그것은 저자의 이름이 강유원이기 때문이다. 원고를 인터넷에 공개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출판사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렇듯 강유원이 어느 정도의 판매량은 보증할 수 있으며 잘 될 경우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저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분들이 리플에서 지적하신 정민 교수나 신영복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출판사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에게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아 저자와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발생할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해 저자들의 원고 공개를 승낙한다. 한마디로 그러한 경우 저자가 갑이고 출판사가 을인 것이다.
반대로 저자가 무명이거나 이름값이 미약한 경우, 그가 원고의 아주 일부분만을 요약·발췌해서 공개하더라도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포스트를 작성한 후 주변 지인들에게 수소문해본 결과, 자신이 옮긴 원고에서 몇 단락을 발췌해서 블로그에 올렸을 뿐임에도 포스트를 삭제하라는 요청을 받은 번역자의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그렇다. 자신들이 저자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강유원, 신영복, 정민 등 이름난 저자들은 그들의 원고가 인터넷에 떠돌건 말건 책을 사보는 일종의 '사수대', 혹은 고정 판매량이 있기 때문에, 딱 그만큼의 판매량만이라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언급된 이들 중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 이상의 판매를 거의 보증하는 저자들이다. 출판사에서는 이들이 달라고 한다면 간이라도 빼 주어야 할지에 대해 기획회의를 하게 된다.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한다고 해서 책의 판매량이 반드시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두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의 사례, 또한 전반적인 컨텐츠 시장의 황폐화를 근거로 하여,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책의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내 견해에 반대하시는 분들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산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강유원 등 이름난 저자들의 경우 이미 원고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내 블로그에 와서 리플을 달아주시는 분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는 열혈 독자들이 그러한 저자들의 곁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일부 유명 독자들이 출판사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위를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승낙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특히 인문서적의 출판시장 자체가 그러한 열혈 독자층에 기대지 않고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도 없을 만큼 척박해져 있기 때문이다. 원고 공개를 허락하는 출판사는 울며 겨자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판사에서 허락했으니 문제 없다'는 첫 번째 반론과, '출판사에서 허락하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원고 공개는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두 번째 반론은 모두 논거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원고 공개는 그 원고를 공개하는 저자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동시에 인터넷에 원고를 무료로 공개하거나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스캔 혹은 타자로 옮겨 퍼뜨리는 행위는 출판 시장을 포함한 컨텐츠 업계를 휘청거리게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 나는 이 사회에 후자의 분위기가 너무도 만연해있는 것을 비판하며, 강유원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잘못된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그 덕에 강유원의 팬덤은 유지되고 있고, 그리하여 그를 섭외한 출판사는 최소한의 판매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낙엽 줍기'에 출판사가 의존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원고를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는 강유원 홈페이지의 방문객들께는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책의 물건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책을 사는 자신을 특별한 누군가로 생각하는 그러한 소비자들의 속성이야말로, 현재 출판 시장을 이 모양 이 꼴로 몰아가는 주범 중 하나임을 강조하고 싶다. '젊은 여자들이 지적인 척 하려고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책으로 유명했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단 한 권을 사도 뽀대나는 하드커버가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고, 사 온 다음에는 굳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그러한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자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강유원 선생님의 책이라면 원고를 파일로 가지고 있어도 삽니다. 이 종이의 향기, 하악~'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자. 책을 정보를 담는 매체가 아닌 그 무언가로 소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류의 소비자가 가지고 있는 간극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나는 그러한 두 종류의 경향이 지니고 있는 유사성을 지적하고 싶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의식 없이는 출판시장의 불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내가 굳이 강유원의 '카피레프트'를 문제 삼는 이유를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차원에서, 내 블로그에 달린 리플 중 손병권 님이 달아주신 것에 대해 차근차근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이 리플에 다른 리플들에 제기된 논점들이 모두 담겨있다.
"책은 프린트물이나 파일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책이 예뻐서, 또는 종이 냄새가 너무 좋아서' 책을 사기도 하니까요. 또 프린트물로 읽었어도 책의 내용이 맘에 들면 나중에 들춰보기 위해서나 아님 '가오'를 잡기 위해서 책을 사기도 하는 것이죠."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길게 설명하며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본다. 물론 책은 물건으로서 아름다운 것이고 소유할만한 가치를 지니지만, 매체로서의 성격을 도외시하면서까지 '소장'하게 되는 사치재는 아니라고 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점 그러한 성격으로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의 서적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지만, 나는 그러한 시장의 변화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운로드 받고 그것으로 만족할 독자라면 그는 이미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입니다. 관심은 가지되 돈을 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다운로드 서비스가 없다면 도서관이나 옆집 친구에게 빌려 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니 출판 노동자의 밥벌이와는 크게 상관 없는 경우라고 봐야겠지요."
이 반론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본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경우를 살펴보면, 나는 한 달에 인문서적 구입비로 근 십만 원을 쓰고, 그래서 그 예산 중 일부를 문제의 그 책에 할애할 생각이었지만, 인터넷에 원고가 공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그럼 나는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인가? 공개된 원고를 굳이 구입하는 이들만을 '인문학의 소비자'로 이해하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인문학의 시장적 저변을 축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강유원의 팬이어서가 아니라, 엥겔스가 쓴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사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터넷에 공개된 원고만으로 만족할 것이다. 강유원의 원고 공개가 그러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을까?
"저는 인문학 시장이 커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80년대식 출판운동의 방식일 수도 있겠고, 아님 강유원님과 같이 자기 방식으로 '참호'를 굳건히 지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500~1500부 정도의 책을 팔아 서로 나눠 가질 몫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듣던 '성장론'의 재탕인 듯 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인문학 출판 시장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인식이 유효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우리는 책이 갖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보를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전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는 매체로서의 책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껏 몇 백 명의 팬을 믿고 마케팅을 해야 하는 비굴한 출판업이 아닌, 책의 내용으로 놓고 보건대 어느 정도의 판매량이 떨어지겠다는 계산을 하는, 미디어로서의 출판업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강유원도 1만 부 2만 부씩 팔아치워서 책만 써서 먹고 살 수 있고, 그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도 도전적인 저작을 낸 후 최소한의 용돈 벌이를 하며 다음 책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강유원의 원고 공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된 일련의 소동이, 책이 매체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성격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혹은 자신들이 책을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며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짐으로써, 한국의 출판 시장과 인문학적 기반에 대한 재고찰을 요구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강유원의 지지자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강유원은 당신들의 '선생님'이 아니어도 책의 판매 수익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할 사람이다. 강유원도 그렇다. '철학공부 하려면 무슨 책 봐야 하나여 ㅋㅋㅋ' 따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 것이 지겹다면, 인터넷을 통한 정보 공개를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매체 시장이 올바르게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에 눈을 떠야 한다.
출판 노동자의 수익과 관련된 반론에 대해 답변하며 이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단 하나의 출판사만을 놓고 본다면, 또한 지금과 같은 문란한 출판 시장을 움직이지 않는 전제로 놓고 본다면, 강유원은 계속 원고를 공개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출판사에 최소한의 판매고라도 안겨주는 편이 그나마 그 회사의 출판 노동자들에게는 이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어가 제 발 끊어먹는 근시안적인 처방일 뿐이다. 출판 노동자라는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원고를 공개하고 있는 강유원의 홈페이지 운영 방침은, 저자의 이름값에 의존하여 계약을 맺고 책을 내야 하는 작금의 경향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러한 움직임이 책을 매체가 아닌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부정적인 시선을 고착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한들, 그것은 옳지 않다.
2008-01-23
외국의 맥락과 창작물의 독창성
저 마지막 결론 속에 한윤형에게 했던 이야기에 대한 내용도 이미 포함되어 있다. 외국에서 장르 문학을 포함한 창작의 영역이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외국에서 이러저러한 창작품이 나오고 있는 그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맥락을 적어도 대강이라도 알고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한국 문화의 현재성에 충실할 수조차 없다.
가령 한국의 영화지망생 갑돌이가 '나는 삐까번쩍한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부유층 여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각색한 영화를 찍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장 '클루리스나 보고 말하자'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중세 유럽풍의, 마법을 최소화 한 세계관을 전제로 한 대규모의 정치 로망을 쓰겠다고 하는 청년의 용기를 북돋워줄 필요는 없다. 우선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를 손에 쥐어주고 나서 이야기를 해보던가 말던가 할 일이니 말이다. 이런 굵직한 작품들의 예를 드는 것이 반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지하게 창작을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자신이 쓰려고 하는 무언가가 남들이 이미 해놓은 것과 겹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그렇지 않고서야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의 중복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붓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일단 그게 먼저고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어'라고 한국의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이런 소리를 많이 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만큼 순진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작가들은 어디까지나 독창적이고 또 독창적인 존재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혼쾌히 인정할만한 대인배를 찾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한 거장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작가들은 그만큼의 자의식을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난 나야, 리바이스' 같은 광고 카피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 휩쓸려 '외국의 맥락을 검토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윤형이 다소 맥락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외국의 시시콜콜한 작품까지 죄다 검토한 다음에야 창작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고, 또 어느 정도 무지를 전제하고 들어간 작품들이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가 인용하고 내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류 보편적인 주제의식은 다양한 각도에서 꾸준한 탐색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천착이 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외국의 맥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간파한다'는 것이 빠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작가'들이 매우 많다. 판타스틱 편집부에 매일 같이 날아오는 독자 투고만 보더라도, 그러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 90% 이상은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는 자의식에 함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한 마인드를, 부정적인 뉘앙스를 한껏 담아 '지망생 마인드'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지망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에 함몰된 나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또한 자신이 창작하려 하는 장르의 발전을, 전혀 연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윤형이 말하는 작가라는 것이, 이러한 '지망생'중 운이 좋고 재주가 좋은 일부를 칭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대한민국에 작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린 수동 트랙백)
2008년 1월 22일
수험생활을 잠시 접고 직업의 세계에 몸담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 다음으로 느끼는 것은 출판과 인쇄라는 두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상호 소통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집단의 지적·문화적 괴리는 가히 놀랍다. 인쇄소 사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필자였고 편집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떠올리고 있던 나의 관념이 최근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책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일화는, 그 당시의 신화 중 하나일 뿐이었을까.
원고를 주는 이와 원고를 받는 이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또한 눈에 띈다. 구체적인 사건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건대 일부 상식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수의 저자들은 출판 노동자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또한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의 원고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오류를 근거로 그들의 지적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이 되도 않는 자존심이나 세운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고, 반면 저자들은 출판사에서 걸핏하면 인세를 떼어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일면이 쉽게 드러난다. 저자들은 '출판사', 즉 자본에게 해야 할 화풀이를 노동자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자의 원고의 내용을 폄하하거나 그의 인격적인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 약한 개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우선 한쪽 편을 들고 보자면,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글쟁이들은 자신이 어떤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서 자본론을 다시 쓰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그의 사상이야 어떻건, 그의 노동은 출판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는 저술 작업일 뿐이다. 마감은 지켜져야 하고, 문법과 맞춤법 또한 편집자가 다시 써야 하는 수준으로 엉망진창이어서는 안 된다. 출판 노동자, 혹은 잡지 편집자들이 원고를 다듬는데 괜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필자들은 아무튼 자기 개발을 하면서 그들보다 앞선 정보를 취합하며 필자로서의 입지를 지킨다.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완벽한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편집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일단 잡지로 범위를 좁혀보자. 외국의 경우, 유력 매체의 에디터들은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인맥'을 통해 자신이 속한 매체에 원고를 끌어오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는 곧 그들이 쓰는 글 자체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사회에 유통되는 언어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은 덜 지우고 대신 각자의 글 수준을 높이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그렇지 않다.
매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지적이고 우아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한국의 잡지계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잡지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절감하면서, 한국인 필자에게 글을 받을 필요가 없는 《Foreign Policy》니까 내가 기꺼이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년 하반기부터 20대 필자들을 모아 매체를 굴려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조금씩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 그런 것 같다. 매체를 운용함으로써 한국어의 흐름에 인상적인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이상이, 스스로의 에고를 굳이 억누를만큼 내게 강하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택광 선배의 추천으로 알게 된 《London Review of Books》는, 아직 실물을 만져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매체인 것 같다. 특히 커버가 아주 아름다운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낮에 한윤형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던졌는데, 결국 결론은 테리 이글턴 같은 필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맺어졌다. 하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미래의 테리 이글턴'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소년 소녀들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정중하게 사양하련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 테리 이글턴은 됐고, 일단 나는 한 주에 한 편 이상의 서평을 쓰겠다. FP 마감에 임박해있다면, 하다못해 그 매체의 기사 내용을 토대로 한 매체 비평이라도 반드시 올리도록 하겠다. 필자를 구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원고를 편집할 궁리를 하고 있느니 그냥 내가 쓰고 말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꼬박꼬박 알라딘 서재에 올릴 생각인데,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블로그에 공지를 올릴 터이니 방문자분들의 환호성 섞인 리플을 부탁한다. '왜 업데이트가 없느냐'라는 질책도 감사히 받겠다(물론 공지에 써놓은 바와 같이, '별도로 명시되지 않는 삭제 기준'에 어긋나면 지울 수도 있다).
사실 이 포스트처럼 '2008년 모월 모일'이라는 식의 일기를 적어도 사흘에 한 편 정도 올리면서 스쳐 지나가는 기사와 책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니 웹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코멘트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평을 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일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책과 서평에 대한 감식안이 쌓이고 그것들을 온당하게 비평하기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마련한다면, 먼 훗날 언젠가 LRB 같은 매체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일은 정말 지각하면 안 되는 날이다. 자야지.
2008-01-21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강유원이 그러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의 maunscript라는 메뉴에서 말 그대로 '손으로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긴' 원고들을 게재하는데, 문제는 그 중 일부가 이미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다운로드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신 번역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인데, 링크가 걸려있다고 해도 굳이 알라딘이나 다른 인터넷 서점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마시라. 강유원 홈페이지에 가면 원고와 역자 후기가 모두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받아서 아크로뱃 리더로 읽은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7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었으면 한다. '나는 책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다'는 관점으로 그러고 있는 거라면 그따위 발상은 기둥에 묶어서 불로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책은, 저자에게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꿈과 희망의 표현이지만, 출판 노동자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동의 결과물이다. 번역자로서 인세를 포기하고 싶거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입맛에 맞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빌딩 위에서 흩날리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불태워버리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근거로 책의 판매에 해가 될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이 안 팔리면 번역자의 수당만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 '저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은 기고나 다른 책의 원고료 등으로 구멍난 수익을 벌충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책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본, 타인의 소득을 짓밟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에 속한다. 태안에서 기름 쏟은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하다. 그건 그나마, 과실이건 중과실이건 '과실'이지만, 이건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은 기껏해야 1500부 미만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원고가 실려있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1000이 넘는다. 1월 21일 오후 8시 8분 현재 다운로드 수는 810회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문어 제 발 끊어먹기도 이런 경우는 없다. '나는 내 지식을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이오'라는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수 명의 출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위해를 가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파일로 올리는 것, 그와 관련된 강의 자료까지도 정성스럽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강유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 포드캐스팅을 이렇게 철저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해서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주어캄프'의 번역자가 번역 원고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보 공유 정신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약'이라는 것이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를 우선 지키자는 말을 하고 있다.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인문 출판계의 목줄을 이런 식으로 조르는 필자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를 잡는 이러한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200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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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설팅의 비밀 | Weinberg, Gerald M | 2007.01.12 |
(컬트 브랜드의 탄생)아이팟 : 소비자가 만들어 낸 새로운 문화코드 iPOD | Kahney, Leander | 2007.0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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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는가 | Ferguson, Niall | 2007.0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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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파일 | 한학수 | 2007.02.05 |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 Granin, Daniil Alexandrovich | 2007.02.06 |
사생활의 역사 | Aries, Philippe | 2007.02.09 |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 Gawande, Atul | 2007.02.14 |
청갈색책 | Wittgenstein, Ludwig | 2007.0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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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가치 | Wittgenstein, Ludwig | 2007.03.08 |
(한국은행의)알기쉬운 경제이야기 . [4] , 일반인을 위한 | 한국은행 . 경제교육센터 . 경제교재편찬위원회 | 2007.03.08 |
제2의 성서 : 아포크리파 : 신약시대 | 이동진 | 2007.03.14 |
니코마코스 윤리학 | Aristotle | 2007.03.15 |
요한복음강해 | 김용옥 | 2007.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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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 : 천 가지 성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 | Leonard, George Burr | 2007.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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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자다: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 Bourdieu, Pierre | 2007.11.19 |
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 Sokal, Alan | 2007.11.21 |
역사론 | Hobsbawm, Eric J. | 2007.11.28 |
블랙 다알리아 | 제임스 엘로이 | |
퀴즈쇼 | 김영하 | |
88만원 세대 | 우석훈 | |
멋진 징조들 | 테리 프레쳇, 닐 게이먼 | |
화차 | 미야베 미유키 | |
용의 이 | 듀나 | |
성자와 학자 | 테리 이글턴 | |
슬럼, 지구를 뒤덮다 | 마이크 데이비스 | |
슬픔의 냄새 | 이충걸 | |
정상적인 바보가 되지 마라 | 크리스토퍼 시 | |
경성기담 | 전봉관 | |
스나크 사냥 | 미야베 미유키 | |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 김상환 | |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우석훈 | |
성스러운 테러 | 테리 이글턴 | |
우리 까페나 할까? | 김영혁, 김의식, 임태병, 장민호 | |
5대에 이어진 철 이야기 | 토마스 로터 | |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 로버트 D. 헤어 | |
한국의 연쇄살인: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수사와 심리분석 | 표창원 | |
화차 | 미야베 미유키 | |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은 작년과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구입하여 읽은 책들이다. 독서 목록이므로 순수한 도서만을 범주에 포함시켰고, 따라서 잡지나 신문 기사, 성서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서 읽은 책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지 다소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총 72권이며 두 번 읽은 책은 목록에서 제외하였는데, 그러한 원칙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다.
확실히 작년에 비해 목록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 이유는 대략 4월 무렵부터 페이퍼하우스에 출근하며 이런저런 업무를 전전하였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를 오가다보니 책을 빌리고 읽을 시간적 여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버는 돈을 책 사는 일에 더욱 할당했어야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한 자료구입비의 상당 부분을, 작년 말까지 대체로 잡지 구입을 위해 썼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보문고로 달려가 《The Economist》를 구입한 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것이, 외무고시 수험생으로서 확고한 자각을 지니고 있던 시절 내가 누리던 허영이며 호사였다.
하지만 잡지는, 내가 잡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는 정보값의 손실이 상당히 큰 매체이다. 평범한 언어로 말하자면 철 지난 잡지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 그걸 다시 꼼꼼하게 읽고 어쩌고 하는 건 그리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한 주에 책 한 권을 사는 습관을 들였어야 한다. 이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다. 말 꺼내놓고 보니 대단히 그럴싸하게 느껴지는데, 현재 예산 구조를 확인해본 후 새해 목표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대뜸 '하겠다'고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서 얻는 할인 효과가 은근히 크기 때문이다. 특히 가격이 2만원을 넘는 물건이라면 더더욱).
책을 사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학부를 졸업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비록 지금 당장이야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대학 도서관'을 또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졸업하고 나면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전부 적어놓지 않는 한 내 머리 속에는 그저 '책에 대한 추억'만이 남아있게 된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 읽었던 책들이 다 그런 식이다. 흥미롭게 바라보았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팩트들은 대체로 기억에 남았지만, 그 책에서 정말 곱씹어야 할 부분들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나 그거 읽었소'라고 자랑할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 올해 도서구입비의 절반은 한 번도 안 읽은 책에, 나머지 절반은 이미 읽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구입하는 데에 쓰겠다.
표의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책들이 바로 사서 읽은 것들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 읽은 것들이 적지 않으니, 도서관에서 대출받지 않은 것들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저것들 중 일부는 언제 읽었는지 그 날짜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일을 사적인 차원에서 하고 싶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은 그것을 그대로 첨부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가령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와 《88만원 세대》는 우석훈의 다른 책을 뭉터기로 보던 시절에 읽은 것이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이 있지만 그건 개별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007년의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88만원 세대》였다. 그 책은 지금껏 문제작이었으며 앞으로 적어도 5년간은 문제작일 수밖에 없다. 목록을 다시 확인하다보니 도서관에서 빌려읽기도 했다는 사실이, 즉 중복기재되어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것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이미 읽은 책을 번역하는데 예산의 반을 할당하겠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올해부터는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읽은 경우라도 독서 리스트에 포함시킬 계획이기 때문이다(그러고보니 가지고 있는 책의 목록과 책을 읽은 기록 자체는 별도로 관리해야 하는군).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에 대한 트뤼포의 말은 무엇보다 책에 대해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튼, 매우 늦었지만, 이렇게 2007년의 독서 목록을 결산한다.
추가) 누락된 책 세 권을 목록에 추가한다. 특히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다. 이택광 선배에 따르면 이글턴은 퇴임한 후 한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한다.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루어낼 지적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
추가2) 또 누락된 책 세 권이 있었다. 《진단명: 사이코패스》를 다시 꺼내서 만져봤는데, '윤리적 절대 자유'가 낳는 귀결은 결국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한다. 그들은 모든 규율로부터 '탈주'한다. 소유하기 위해 훔치는 도둑은 바로 그 훔치는 행위를 통해 다이아몬드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라고 체스터튼이 말했다. 사이코패스들에게는 그러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 없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천성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약탈하는 군인들'처럼 살아갈 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있다.
《화차》의 결말은 말 그대로 '쩐다'. 영화 판권이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일본 대중문학에서 애용하는 '한 줄로 평가하기'가 싫어서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빠져들어 끝까지 읽게 되었다. 하층민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망자 명단에서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대까지 사랑으로 버텨오던 부잣집 도련님은 이별을 통보하고 만다.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일본을 중산층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부당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2007년에 두 권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읽었는데, 인물에 대한 화자의 '한 줄 평가'가 드물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는 《스나크 사냥》이 좋았지만, 스토리텔링과 주제의 흡입력 등에서는 아무래도 《화차》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두 권 모두 한 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2008-01-10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예전 노트
법철학 강요
2002. 12.12. 18:38
* 헤겔에게 '개념'은 자기발광체이다.
* 헤겔과 칸트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빛의 이미지를 진하게 지닌다. 헤겔만 놓고 보면, 즉자적인 것은 스스로를 이성의 빛으로 비춘다는 뜻이고, 대자적인 것은 다른 이성의 빛이 반사되어 비춰진다는 뜻이다. 하긴 계몽 자체가 enlighten 이니.
"현존재와 개념, 육체와 영혼 - 이 일치성이 이념이다."
"의지는 어떤 특수한 방법의 사유이다. 즉, 사유가 자기를 현존재로 번역하는 방법, 자기에게 현존재를 주려고 하는 충동으로서의 사유인 것이다."
"(α) 의지는 자아의 전혀 무엇이라고도 정해져 있지 않은 순수한 무규정성, 즉 오로지 자기의 속에 반절하는 순수한 자기반성이라는 요소를 내포한다.
"(β) 자아는 또한 구별이 없는 무규정성으로부터 구별 세우기에의 이행이고 규정하는 것에의, 그리하여 어떤 규정된 자세를 내용과 대상으로서 정립하는 것에의 이행이다. - 그리고 이 내용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이든 정신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이든 상관없다.
"(γ) 의지는 이 (α)와 (β)의 양 계기의 일체성이다. 말하자면 특수성이 그 속에 절반(折返)되고 이 일에 의해 보편성으로 환원된 자세, 즉 개별성인 것이다."
* "자아는 이렇듯 자기 자신을 어떠한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것에 의해 현존재 일반 속에 들어간다. - 이것이 자아의 유한성 혹은 특수화라는 절대적 계기이다."
* "개념의 운동원리는 보편적인 것이 특수화된 온갖 자세를 단지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산출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나는 이를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 즉,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심물논변의 문제가 여기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맑스는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에서, 헤겔이 잠정적으로 개념의 손을 들어준 것에 반발한 것 같다.
* 자신을 비추는 개념 - 거울 두 장을 마주보게 하여 그 안에서 빛이 무한반사하는 장면을 상상할 것.
* 개념도 서사의 지배를 받고, 현존재로서의 육체도 서사의 지배를 받는다.
* 이성과 서사의 차이 - 이성은 인간의 도구인데 [반해] 서사는 인간의 환경(nature)이다. 인간이 서사대로 행한다고 할 때, 본성을 따라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분방함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이성의 손전등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태양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떠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자유롭다.
2008-01-07
2008년 1월 7일
사무실에서 나와 잠시 친구와 차를 마신 후 그를 집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겪은 일에 대하여. 아파트 주민이 '너희들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치 아파트 앞뜰이 자신의 정원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이 아닌가(1층에 사니까 자신이 그런 소리 할 수 있다고 우겼지만, 8층에 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목소리를 높이면 동네 사람들이 깨니까, 나름대로 조용하게 아주머니 집에 들어가시라고 권유를 했는데, 남편이라는 자가 나와서 시위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가 막혔다. 그 치들을 곱게 들여보내고, 분노하고 있던 그를 달랜 후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잠시 통화를 한 후, 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의 내용을 곱씹었다. 이 책이 애초의 기대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한국인들이 왜 아파트를 이렇게까지 선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다소 무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 불어닥치고 있는 아파트 열풍이 가지고 있는 사회심리적인 성격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겪은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아파트 한 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희망이요 빛이며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현관 밖으로, 심지어는 단지 전부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렇기에 '더 넓은 평수' 혹은 '더 높은 층수'에 사는 누군가에게 야코가 죽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심리를 좀 더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모든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 단지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아파트 단지는, 주민의 숫자를 n이라고 할 때 n만큼의 행위자가 동시에 영역으로 삼고 있는 전쟁터인데, 이는 최악의 경우 (n+1)!/2, 즉 {(n+1)*n*(n-1)*(n-2)* . . . 1}/2 만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아파트 단지에서 싸움이 괜히 많이 나는 게 아니다. 이렇듯 수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자신이 어떤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정서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자랑인 사람은 그것 외에는 별다른 자랑거리나 즐길거리가 없는 사람이므로,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 아파트 한 채 사놓고 버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사회는 정서적으로 각박해지고 문화적으로 천박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 더 높은 평수와 층수로 올라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나 말고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같은 이득을 누리게 되므로, 자신의 상대적인 지위가 적어도 그 단지 내에서 올라갈 수는 없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물론 다른 듣보잡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야 떼돈을 번 것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평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이익을 보는 사람과 스스로를 견주어본다면 배고픔보다 더욱 지독한 배아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주택만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것의 가격 상승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이겨낸다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역시 다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론과 논리의 바깥에 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FP로 돌아와보자. 교정을 위해 원고를 읽고 또 읽는다. 번역도 하는데, 하면서 나의 한국어 어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양놈들이라고 다들 잘나서 그러는 건 아니고 유의어사전, 말하자면 Thesaurus가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는데, 한국어에서 그러한 종류의 것은 오직 《비슷한말 반대말 사전》뿐이다. 그나마 어휘가 한자어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표제어가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알라딘 보관함에 넣었는데 언제 구입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전과 관련해서는 이 마이리스트가 괜찮은 것 같다.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또 교정지를 훑어야겠다. 돈이 너무 없던 시절 늘 염원하던 그 물건, 캐틀벨을 드디어 집에 들여놓았다. 오늘 오전에는 트레이너 레벨 캡악력기도 왔는데, 다섯 번을 넘기면 그때부터 힘이 달린다. 한 손에 스무 개씩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 겸 좀 더 하다가 자야겠다.
2008-01-04
2008년 1월 3일
회사로 오가는 지하철에서 로마서를 7장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율법과 죄와 죽음"이라는 소제목으로 편집되어 있는 7장 7절 이하가 로마서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오로가 보여주는 내적인 반성, 철저하고도 치밀한 고찰, 광기어린 죄의식에의 몰입과 그것을 신앙심으로 극복하며 육체에 죄를 떠넘기기까지의 과정은, 몇 권의 책으로 주석을 붙여도 모자랄만큼 문제적이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로마서의 독해에서 출발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7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에서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8 이 계명을 빌미로 죄가 내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사실 율법과 상관이 없을 경우 죄는 죽은 것입니다.
9 전에는 내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1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13 그렇다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16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FP 편집 마감이 끝나지 않았지만, 《드라마틱》에서 맡긴 포커스 원고가 더 급했다. 〈이 바보야, 진짜 경제가 문제야? - 서울 아빠들의 경제 인질극과 신 지역주의〉라는 제목으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서울 유권자들의 '경제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제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그대로 통과될 모양이다. 전문을 공개할 수는 없고, 주요 단락과 문장을 인용한 후, 기사에서 못다한 내용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 . . 요컨대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발독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이명박에게 몰표를 주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아니 그 전에 게으른 생각이다. 선거결과를 논하고 그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별 득표율과 그 현황을 짚어보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번 선거에서 그에게 몰표를 몰아준 집단은 경상도에 사는 6~70대 노인들이 아닌, 서울에 사는 4~50대 남성들이다. . .
. . . 전국에 꾸준히 아파트를 짓고 분양가를 높이는 정책은, 사실상 서울시민 중 집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또 하나의 지역주의이다. . .
. . . 앞으로도 인구가 늘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강원도 태백시에도 십층이 넘는 아파트가 여러 단지 건설되고 있다. 대체 거기 누가 들어가서 살 것인가? 분양되지 않아 결국 버려지게 되는 폐건물들은 그 자체로서 범죄의 온상이 되며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은찬이 아빠에게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우리 아들 학원비 내느라 허리가 휘는 와중이니, 일단 내 집값부터 확실하게 올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 .
. . . 문제는 이들의 지역주의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그 속에서 주식이나 펀드나 아파트로 크게 한탕 친 다음 해외로 이민을 가겠다는 투전꾼 같은 발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등장한 서울 사는 은찬이 아빠의 경우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기러기아빠’니 뭐니 하는 미사여구로 자신들의 행위를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대한민국 내에서 상위 계층에 올라갈 수 있도록, 혹은 대한민국을 떠나버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삐뚤어진 교육열을 올리고 있다. . .
. . . 지역주의의 시대가 끝났다고 함부로 단언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경제’를 테마로 놓고 움직이는 거의 모든 담론들은, 단언하건대 서울 시민들의 이기적 지역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서울의 중산층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지역주의를 둘러댈 때, ‘그것은 경제가 아니야’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구 지역주의가 아예 종식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처럼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유권자가 자신들의 특수한 계급적 이익을 위해 일치단결한 서울 중산층들에게 휘말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표방하는 '경제'라는 구호가 그다지 경제적이지도 않으며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층위에서 지역주의를 재편성하고 있을 뿐이라는 전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구 지역주의를, 서울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엘리트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그들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 되는 지역으로 확장되어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정의해보자. 노무현의 민주당 분당과 대연정 제안 등은 모두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까발리고 나자 아직까지 계급정치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균형추가 모두 엉클어졌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이명박은 국민의 3분의 1의 지지만을 얻고도 정동영을 민주화 이후 최대 득표차로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계급정치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또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해야 할 당이 북한의 정치적 엘리트의 논조를 따르는 일파에게 점거당한 시점에서, 서울과 그 외 지역간의 격차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개념틀은 결국 지역주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급적이면 25일 이후 《드라마틱》 2월호가 나온 후 그것을 사 보시고 심도 깊은 비판을 해주시면 참 좋겠다.
지난달 월급을 받자마자 알라딘에서 책들을 주문하였는데, 그 중에는 토마스 프리드먼의 《The World Is Flat: Further Updated and Expended | Release 3.0》이 포함되어 있다. 어제 저녁에 회사에서 나가기 전, 자신이 페이퍼백 에디션을 왜 또 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Introduction을 읽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인간은 2005년 4월에 초판을 내고, 다음해 4월에는 재판을 내고, 그 이듬해 4월에 또 재판을 냈다. 그것을 시치미 뚝 떼고 Release 3.0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세상이 워낙 빨리 바뀌고 있고 출판업계의 속도도 그에 발맞추어 빨라졌기 때문에, 즉 해야 하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다. 매해마다 새로운 판을 내면 판매 수익을 더 높일 수 있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법대 교수들이 괜히 교과서 판갈이를 하면서, '변화하는 우리 법의 속도에 발맞추어'라고 둘러대는 것을 연상케 한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최근 칼럼을 보면 신선한 발상과 내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아무튼 그는 정말 쉽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가 두 가지인데 그 중 전자도 바로 그 문장 때문이다. 후자는 이 책이, 아무리 여기저기서 까이고 있다고 한들 세계화 시대의 아젠다를 설정한 몇 개의 주요 도서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아직 본격적으로 내용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므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언급하기로 한다.
2008-01-03
르네상스맨이 되지 말자
'르네상스맨'들의 열의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수만권의 책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고,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만큼, 한국어로 직접 글을 쓰는 필자의 수는 늘어날수록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가 유한계급의 지적유희를 치장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는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는 지금의 문화 풍토를 나는 지적하고 싶다.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 그 이면에는 바로 그렇게, 다재다능한 천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그동안 묻혀있었던 그리스 철학의 원전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 전까지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도 아랍어 중역본을 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이 간직하고 있던 그리스어 원전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는 근대 철학이 고대 철학을 극복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도 본질적인 바탕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근대의 예비 단계이자, 동시에 인류 문명 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가 되게끔 한 원동력은 바로 그러한 원전을 향한 탐구에 있었다. 물론,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천재가 되고 싶은 기분에 취해있는 저자들을 굳이 뭐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들의 욕망이 한국 지성계의 어떤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동시에 그들의 그러한 다방면적인 저술 행위가, '너 전공이 뭐야?'라는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는 한국 학계의 '박사학위주의'를 깨뜨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문제삼을만 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르네상스맨들이 결국 부유한 가문에 고용되어 있는 기능인일 뿐이었듯이, 현대 한국의 '르네상스맨'들은 학계의 관성을 타파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이런 저런 책들을 내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2008-01-01
2008년 1월 1일
경향신문은 연초부터 최장집 인터뷰를 거하게 했다. 나는 1월 1일자를 가판에서 구입하였는데, 1면 하단에 최장집과 이명박 두 사람의 사진을 대칭되게 배치한 그 편집 센스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지난 블로그에서 추천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글을 권하고 싶다. 민주화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할 가치로 놓는 그의 정치관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을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분할하여 점유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볼 때 그것이 실천적으로 반드시 옳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최장집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가장 명료한 발언을 내놓는 사람이므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최장집도 민주노동당 분당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괄호 치고 아주 작게 껄껄껄 이라고 쓰는 기능이 내 블로그에 있다면 좋겠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의 단편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다. 새해 첫날 아침 겪은 개인적인 일로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 참에, 좋은 위로를 받으며 감동적인 소설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두 가지 모두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도행전을 읽었다. 16장에서 주목할만한 부분들을 발견했다. 내용이 옳더라도 이런 식으로 떠벌이는 것은 타인을 언짢게 한다.
16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17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8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
또한 27절에서 31절 사이의 내용에 주목해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당마다 걸려있는 저 문구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여기서 간수가 말하는 바는 체포당하여 처형되지 않고 가족의 안전과 생계를 지켜낼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구원'에 더욱 가깝다. 적어도 내게는 이 대목이 당시의 초대 교회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도망자의 위치에 처하게 될 이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어차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항변하면 탈옥 소동을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35 날이 밝자 행정관들은 시종들을 보내어, "그 사람들을 풀어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36 그래서 간수가 바오로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 "행정관들이 여러분을 풀어 드리라고 시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37 그때에 바오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공공연히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슬그머니 내보내겠다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38 그 시종들이 이 말을 전하자,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불안해하며,
39 그들에게 가서 사과하고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다.
40 이렇게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 리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 격려해 주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