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08

돌출 행동을 수습하는 방법에 대하여

1. 돌출 행동 - 미국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하다보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 십상이다. 특히 모종의 정치적인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집단의 경우, 그로 인한 갈등은 쉽게 커지고 종종 조직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기까지 한다. 그 집단이 어떤 정치적 '선'을 추구하는 단체라면, 게다가 내부에서 구성원을 통제할만한 적절한 권위적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단체라면, 돌출 행동으로 인한 위험을 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레디앙에 기고된 목수정의 글이 공개되면서 벌어진 파장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돌출 행동'으로 설정해보자. 여기서는 글이 공개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글을 보낸 목수정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지, 아니면 레디앙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지 등 세부적인 '팩트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만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하도록 하겠다.

정명훈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목수정의 글이 레디앙을 통해 공개되면서, 레디앙 독자의견, 진보신당 당원게시판, 그리고 이글루스(외의 다른 블로고스피어에서 이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에서 목수정은 극심한 반대 여론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반대 의견들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목수정이 괜히 정명훈을 건드린 탓에 합창단원들의 복직이 더욱 힘들어졌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초점이 합창단에서 목수정으로 옮겨지면서 정작 그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진보 블로거'들은 이 사안에 대해 입을 다물고 넘어가기로 작정한 듯하다. 목수정을 옹호하자니 여론에 휩쓸릴 것 같을 뿐더러 논거를 만들어주기도 쉽지 않고, 옹호하지 않자니 같은 당원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이런 입장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캡콜드님 같은 경우 목수정의 행동 원인을 '지사정신'으로 단정하고, 자신은 언제나 그것을 비판해 왔으며, 굳이 연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내용의 포스트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전략, 잠잠해질 때까지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보는 전략은 과연 현명한 전략일까? 그 지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미국 민권운동의 대부, 사울 알린스키가 바로 그 소수 중 한 사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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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소위 급진주의자들 중 다수가 보여주는 정치적 무감각과 기회상실의 한 예가 시카고 7인의 재판*중에 일어난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주말 동안 전국 각지로부터 온 150여 명의 변호사가 호프만 판사가 내린 변호사 4인에 대한 구속조치에 항의하는 연방정부 빌딩 앞의 시위에 참석하기 위해 시카고로 모여들었다. . . . (중략) . . . 10시경이 되자 성난 변호사들은 연방정부 건물 주변을 행진하기 시작했으며, 그곳에는 수백 명의 급진주의적 학생들, 몇 명의 흑표범단원들 그리고 백여 명 이상의 푸른 헬멧을 쓴 시카고 경찰들이 모여들었다.

정오가 되기 직전에, 시위 중이던 변호사들 중 40명 정도가 입구 옆의 유리벽 옆에 붙어 있던, 연방정부 건물 내에서의 그와 같은 시위를 금지하는 켐벨 판사의 서명이 들어간 경고문에도 불구하고, 피켓을 들고 연방정부 건물 현관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변호사들이 진입하자마자, 검은 판사복을 입고 연방 보안관, 속기사, 법원 서기를 동행한 켐벨 판사가 로비로 내려왔다. 그들 자신이 한 무리의 경찰과 연방 보안관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성난 변호사들에게 에워싸인 켐벨 판사는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재판에 착수하였다. 그는 시위대가 즉시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들을 모욕죄로 고발하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렇게 하고 나서 그는 이번에는 그들의 모욕죄가 재판정에서 일어났으므로 즉결처분을 틀림없이 내릴 것이라 경고하였다. 하지만 그가 이 사실을 공표하자마자, 군중 속의 한 목소리가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외쳤다.

잠시 동안의 긴장된 침묵 후에 군중의 환호가 이어졌고, 경찰들은 눈에 띄게 어색해졌으며, 켐벨 판사가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변호사들 역시 로비를 떠나서 보도에 있던 시위대에게 돌아갔다.

-제이슨 엡스타인, 《거대한 음모의 재판》The Great Conspiracy Trial, Random House, 1970


시위 중이던 변호사들은 전국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자기 손으로 버리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판사로 하여금 논쟁을 계속하도록 만들고 사건의 쟁점이 유지되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중 속의 한 목소리가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외친 후에 ①변호사들 중 한 명이 켐벨 판사에게로 걸어나가 그들은 개인에 대한 욕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②모든 변호사가 한목소리로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고 함께 외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방법 중 그 어떤 것도 실천하지 않았다. 이는 주도권이 그들에게서 판사에게로 넘어가도록 하였고, 변호사들은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pp. 43-45] 사울 D.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박순성 박지우 옮김 (서울: 아르케, 2008)

* [역주] '시카고 7인의 재판(The Chicago Seven Trial)'은 시카고 시 반전시위 주동자들과 관련된 재판을 가리킨다. 베트남 전 반대 시위가 확산되자 상원이 1968년 4월 반폭동법(Anti-Riot Act)을 통과시킨 가운데,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개최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추어 급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반전운동이 조직 전개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곱 명(처음에는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제외됨)의 급진주의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은 1969년 9월에섯 1970년 2월까지 진행되었으며, 다섯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1972년 11월 상소심 판결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http://www.law.umkc.edu/faculty/projects/ftrials/Chicago/chicago7.html 참조.
(위 원문자 번호는 인용자가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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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수정 사건과 '진보 블로거'들의 대응

이 사례와 현재 목수정 사건의 차이가 있다면, 돌출 행동으로 인해 야기된 '잠시 동안의 침묵' 후에 '군중의 환호'가 있느냐 아니면 '군중의 야유'가 있느냐 뿐이다. 참, 차이가 하나 더 있다. 법정에 진출했던 변호사들은 군중 속으로 돌아간 후 '켐벨 판사는 엿이나 먹어라'라고 외친 누군가를 찾아내 추궁하거나 훈계를 하거나 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의 '진보 블로거'들은 목수정 끌끌끌, 목수정을 지금 왜 옹호하고 그러시나, 노정태님 실망이에요~ 이러고 있다.

여기서 도출된 교훈을 우리의 사례에 대입해보자. 레디앙에 실린 목수정의 기고문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파장이 커졌을 때, 목수정은 다시금 진보신당의 이름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서울시향 음악감독 정명훈은 엿이나 먹어라!'라며 소리를 꽥꽥 지르고 나섰다.

알린스키에 따르면, 이렇듯 누군가 돌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며 침묵을 지키는 것은 주도권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두 손을 모아 쥐고 '주님, 저 팩트 골룸들에게 속히 신선도 높은 일용할 떡밥을 주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전략은 그 하이에나들에게 새로운 먹이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관련자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효율적인 것이 된다. 촛불시위 당시 청와대를 틀어막고 있으면서도 정부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명박의 입을 막을 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적인 정당 내에서 그러한 행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온라인에 글을 쓰는 것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더욱 그렇다.

게다가 맞으면서 참는 모습은 결코 기존의 지지자들에게도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왕 이명박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 때의 경험을 좀 더 되살려보자. 현재 이명박의 지지율은 30%대로 나온다. 반면 촛불시위 당시에는 10% 이하로도 떨어졌다. 왜 그때에는 그렇게 지지율이 떨어졌을까? 이명박에 대한 지지율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진압과 함께 성장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태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촛불시위 당시 이탈했던 20%는,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이명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것이다.

'진보신당 당원이 어떻게 잠재적 유권자를 조롱할 수가 있나'고 많은 이들이 내 지난 포스트를 보고 따지듯이 물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당하는 진보신당, 진보신당 당원이 당 이름까지 들먹였는데 아무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그따위 진보신당, 댁 같으면 찍어주고 싶겠는가? 완전 호구 집단으로밖에 안 보이지 않을까? 이것은 '정당정치' 이전의 논리이다. 인간의 집단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국외자였다면, 목수정이 다구리당하도록 방치하는 이따위 정당에는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이 입장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팩트 골룸들이 지칠 때까지, 실컷 물고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참고 버티겠다는 전략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매저키즘적이며, 결정적으로 진보신당의 지지자 확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목수정을 찍어내라, 진보신당 찍어주마'라고 외치는 자들을 지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여기서 '올바름'이란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이익의 문제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진보신당은 당원들의 행동을 일일이 미시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비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돌출 행동의 발생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에 속한다.

따라서 인민재판을 즐기는 자들, 비정규직 문제의 기초도 모르면서 일단 맘에 안 드는 캐릭터가 나오면 까고 보는 '소비자'들을 '마케팅'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해가 되는 수가 있다. 견인합성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말을 빌자면, '쉰 밥 먹고 체하는 수'가 있다는 말이다.

둘째, 목수정이 다구리당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진보신당의 모습은, 앞으로 소수자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충성도를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미안한 말이지만, 소수자 운동은 오래 하면 할 수록 '쿨'해질 수가 없다. 당연한 일이다. 소외된 자신을 끝없이 확인하면서, 자신이 억압의 주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과 맨몸으로 부딪쳐야만 하는 일이 바로 소수자 운동이기 때문이다.

목수정이 이번에 보여준 '비매너'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돌출 행동'을 한 누군가를 당원들이 전혀 챙겨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렇듯 경험적으로 확인되면, 소수자들은 움추려들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모든 열린우리당 지지자 출신 진보신당 당원들을 폄하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소수자 운동 당사자들이 돌출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들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휘두르게 내버려둔다'는 전략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가학적인 행동을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 털릴 때까지 털리겠다, 참는 자가 이기는 자다, 이런 식의 대응은 당위적으로도 또 전략적으로도 옳지 않다.

게다가 이번 사안의 경우, 진보정당의 운동을 하면서 벌어질 수 있는 돌출 행동에 대한 '잘못된 이론화'까지 등장한 것이 큰 문제였다. 나 자신도 목수정의 문제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온라인 대중들이 젠더 혐오증에 걸려있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것을 교정할 수 없다는 것도 이미 몸으로 겪어서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폭력적인 반감을 일종의 '귀찮은 부탁에 대한 거절 모델'로 치환시킨 sonnet님의 설명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야만보다 더 나쁜 것은 오직 단 하나, 이성으로 포장된 야만 뿐이다. 사태가 이쯤 꼬였다면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정치적'인 것과 '정치인적'인 것

'진보신당 표 떨어지는 소리 들리네요' 같은 익명의 리플, 그 대중적인 반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해야 할 말을, 옳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정치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이지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지점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과 '노빠 혐오자'들이 극적인 타협을 이루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한 글자가 빠졌다.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이 상황에서 가장 '정치적'인 행동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 인식에 바탕하여 정치 행위를 펼쳐나갈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라는 최장집 교수의 견해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나 소나 다 정치가인 양, 정치인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글러먹은 짓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흔히 말하는 '노빠'진영과 '노까'진영의 타협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블로거들이 목수정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데에 그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울 알린스키는 말한다. 침묵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이며, 약한 개들은 한 마리가 짖기 시작하면 다 같이 짖어야 한다고.

그게 사실 아닌가? 진보신당은 약한 개들의 무리이다. 그러므로 더욱 한 마리씩 짖다가 잡아먹혀서는 안 된다. 목수정의 기고에 문제가 있었건, 레디앙의 게재에 문제가 있었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 내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것이 전제가 되었을 때, 진보신당의 전체적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두 가지일 것이다.

'목수정 씨가 다소 무례하게 서명을 요구했다고 정명훈 씨가 받아들였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한국 음악계의 문제에 정명훈 씨가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진보신당의 차원에서 같은 요구를 그에게 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 선택지는 반드시 당 차원에서 이루어질 필요도 없다.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전면적이고 전폭적인 발언의 포문을 열어젖히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보 블로거'들은 입을 닫았다. 입을 닫고 손을 씻고, 뒷짐을 지고 한참 이리 저리 걸어다니다가 '어어, 목수정 저러면 안 되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운동 하루 이틀 하나?' 같은 훈수를 찍찍 내갈기기 시작했다. 혹자는 '훈수를 두지 말자, 그리고 이러이러하게 하자'며 일종의 재귀적(再歸的) 훈수를 두기도 했다. 훈수 두는 거라면 노빠들이 빠질 수 있나. 젓가락 숟가락 들고 이 케이스에 덤벼들었다.

진보신당 당원들은 언제나 노빠들이 '집권하려면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고 훈수를 두는 행위에 치를 떨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보신당 당원들이 서로 훈수를 두고 있다.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바이러스에 걸려 있는 꼴이다. 이 사안에 대해 진걱모, 즉 '진보신당을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유독 극심하게 창궐한 이유는 딴 게 아니다. 입을 다물고 눈을 돌리고 비를 피하는 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미 저들은 물기 시작했고 피 맛을 봤다. 피 맛을 보게 냅두면 냅둘수록 하이에나를 쫓아내는 일은 더욱 힘들어진다. 멍청한 개들은 '쟤만 잡아먹고 물러가겠지, 우리는 살 수 있겠지'라고 말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 인정하자. 그 전략은 틀렸다.

합창단을 위한 전면적인 홍보전을 펼칠 요량이었더라도 '참는 자가 이기는 자' 전략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쇠는 뜨거울 때 때려야 하고 떡밥은 쉬기 전에 먹어야 한다. 내가 마지막 희생자가 될 것이고, 이제 온라인 대중들은 다른 떡밥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정말 합창단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정보를 전달하고 홍보 행위를 하고 싶었다면, 목수정으로 인해 이목이 집중되었던 그 때, 목수정을 내버리지 않으면서 그 논의를 진행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정치적'인 행위이며, 빨갱이 논란의 한가운데에서 평화통일론을 내세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천재성이 드러난 것도 바로 그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였다. 반면 '정치인적'으로 행위하는데 여념이 없는 '진보 블로거'들과 전직 노빠들은, 공교롭게도 이명박과 같은 생각을 한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


4. 엎질러진 물, 돌출 행동의 수습

돌출 행동이 벌어진 시점에서 그것을 없던 일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숲에서 곰을 만났을 때, 먼 거리에서 쫓아내지 못한다면, 절대 도망가지 말고 싸우라는 내용이 미국의 국립공원 안내 표지판에 써있다고 한다. 곰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어떤 수를 써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그 곰을 쫓아내거나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게 '대중적인 반감'으로 인해 반드시 실패하기만 하는 전략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목수정이 이른바 '뉴비 비호감'이라면, 비호감 중의 비호감, 비호감계의 모차르트, 강의석의 경우를 반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작년 국군의 날 강의석이 탱크 앞에 시원하게 벗고 곧휴를 드러내며 과자로 만든 총을 쏘고 '군대?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라는 퍼포먼스를 저질렀을 때, 진보신당 계열 블로거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강의석의 사진을 올려놓으며 '나는 강의석의 퍼포먼스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물론 강의석 본인이 워낙 비호감일 뿐더러, 한국 남성들의 군대 문제에 대한 정서적 저항감도 매우 극심해서, 욕을 아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충분히 'damage control'이 되었다. 상대방이 살살 봐줘서가 아니라, 이쪽에서 확실히 세게 나갔기 때문이다.

'강의석의 저러한 행동은 평화 운동에 도움이 안 되고...'같은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묻혔고, 강의석은 살아났다. 50000쯤 먹을 욕을 24380 정도만 먹고 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강의석같은 역사와 전통의 비호감이 저지른 극도의 비호감질도 이토록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할진대, 어찌 목수정같은 극히 알려지지도 않았던 사람의 입장에 대한 옹호가 불가능하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게다가 강의석을 옹호하던 사람들 모두 강의석을 결코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을텐데?

돌출 행동이 저질러지면 누군가는 수습을 해야 한다. 혹자는 목수정을 고문관에 비유하기도 하더라만, 어차피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고 고문관질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목수정을 옹호하면서도 합창단 문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뭐가 잘못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고 넘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나 또한 이 사태에 개입한 시점이 너무 늦었다. 우리는 모두 틀렸다. 나는 이 말을 함으로써, 알량하게도 조금이나마 마음 편히 잠을 자고자 한다.

2009-03-26

시장이라는 사회적 제도

정확한 표현을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맥락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빵을 팔지 않는 사회보다는, 차라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유대인에게도 돈만 주면 빵을 파는 사회가 낫다고. 복거일의 말이었다. 이후 영어 공용화론 등으로 인해 복거일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그는 일종의 공적이 되고 말았지만, '시장을 통해 긍정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언제나 복거일의 그림자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복거일의 주장은 큰 맹점을 지니고 있다. 시장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재화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제도에 비하면 진입 장벽이 낮은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는 노씨니까, 전주 이씨의 제삿상에 끼어들 수는 없다. 하지만 전주 이씨 문중의 누군가가 땅을 팔겠다고 내놓았다면, 충분한 돈이 있을 경우 나는 입찰할 수 있고 시장 원칙에 따라 가장 높은 값을 부른 후 낙찰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전적인 시장 질서를 전제하고 있을 때, 혹은 구시대의 다른 질서와 시장 질서를 견주어볼 때에나 성립할 수 있는 논리이다. 모든 것이 단일한 시장 질서하에 편입되어버린 현대(적어도 20세기 이후)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이런 주장은 맞지 않다. 1960년대까지 미국의 흑인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다른 버스 좌석에 앉아야 했다. 당신이 노숙자라면 5000원을 낸다 해도 강남역 인근의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을 수 없다. 입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장이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따라서 '수구적 가치'와 대립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시장 그 자체가 '구분짓기'의 요소를 충분히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늘 확인하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베블런이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시장 질서가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준다는 믿음에 결정적인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은 본성상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외의 타인들과는 구분짓고 싶어한다.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시장 질서를 이용하여 시장 질서의 무차별성과 평등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태원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걸어가면 한남동이 나온다. 한남동에는 다들 알다시피 재벌가의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개별적인 저택들의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시장 가격'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정도 규모가 되는 저택들은 철저히 1:1로 매매된다. 따라서 '누가 집 내놓았다더라'는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그것을 살 수 없다.

부촌은 그냥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품위'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타워팰리스 거주자들은 로또파와 비 로또파로 나뉘어 반상회도 따로 갖는 것이고, 성북동에서는 갑자기 돈을 번 누군가가 저택을 구입하려 하자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하던 주민들이 돈을 모아 문제의 주택을 공동으로 구입해버린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시장 질서는 다른 질서에 비하면 무차별적일지 모르지만, 그 자체가 평평한 세계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도, 또 사회적 강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도인에게는 1등석을 팔지 않는다'는 차별, 혹은 '너같은 졸부는 우리 동네 주민이 될 자격이 없다'는 차별, 이런 차별에 대해 '나도 돈 있다'고 항변하는 것은 우습고 치졸한 일일 뿐이다.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가 바로 그런 소리를 했다가, 두들겨 맞고 아까 맞은 데 또 맞고 각성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마하트마 간디로 거듭났다. 시장 원리는 무차별적일 수 있고, 그래서 돈 있는 내게 유리할 수도 있지만, 그 시장을 운영하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구별짓고 차별하고 멸시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장 원리 내에서, 혹은 시장 원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시장 원리 또한 사회적 질서의 일부분이다. 시장에서 개인들이 자유롭게 가격을 형성하고 매매하는 것까지 사회가 간섭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고 없는지, 또 그 규칙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등은 전부 시장에 내재된 법칙이 아니다. 그러한 규칙들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

'흑인은 같은 값을 지불하더라도 다른 칸에 앉아야 한다'는 것은 인종차별일 뿐이라고, 즉 시장 원칙에 반하는 사례일 뿐 시장 원칙의 적용 그 자체는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가격에 다른 상품을 제시받는다 해도 거래가 꾸준히 성사되고 있는 이상, 그 경우에도 시장은 '작동'하고 있는 것이며, 시장 원리는 그 이상의 도덕적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돈을 냈으니까 나도 같은 칸에 앉겠다'는 주장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경우 '시장 원리'에 따라 해법이 도출되었다면, 같은 값을 낸 흑인에게 같은 자리에 앉게 해주는 버스 회사가 등장하여, 그 버스 회사의 버스만 흑인들이 타고 다녀서, 차별적인 좌석제를 유지하는 버스 회사가 망해버리거나 정책을 변경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일까? 애초에 법적으로 흑인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의 벽이 무너진 것은 시장 원리 때문이 아니었다. 로자 팍스라는 꼬장꼬장한 여성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들을 이끌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로자 팍스가 처음 내세운 것은 시장 원리에 따른 평등이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이들의 가슴을 뒤흔든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평등이었다.

수구세력과의 대결을 위해서 '진정한 시장주의'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익숙하면서도 식상한 것이다. 그런 주장은 이미 재작년 말에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실컷 써먹은 레퍼토리를 변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명박은 '노무현 정권 심판'을 위해 시장주의를 내세웠고, 지금 시장주의 타령하는 분들은 '이명박 정권 심판'을 위해 시장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상황은 몹시도 희극적이다. 두 정치 세력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사회상을 뒤에 감춰둔 채 시장의 입을 빌려 말하려고 들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도구일 뿐이다. 망치가 못을 박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듯, 시장 또한 재화를 효율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도덕적 망치'를 기대할 수 없듯, '건전한 톱'을 바랄 수 없듯,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또한 형용모순일 뿐이다. 정치적인 문제, 도덕적인 딜레마, 사회적인 갈등은 그 자체의 논리 내에서 합의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글루스에는 '수구세력 vs. (진정한) 시장세력'의 대립구도를 상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한 주장의 근본 동기가 결국 '한미 FTA를 졸속 추진한 노무현 옹호'임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거짓 대결 구도는 그저 한숨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국산 망치가 도덕적일 수 없듯이, 미제 망치도 쿨할 수 없다. 한미 FTA의 동기는 '시장을 통한 수구 견제'라는 노짱의 심모원려가 아니다. 외교부의 특정 세력에게 포위된, 준비되지 않은 집권 세력의 휘둘림이 그 사태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

미국산 시장주의를 도입하여 한국의 덜 된 시장질서를 교정한다는 발상은 우습고도 한심할 뿐이다. 이미 삼성은 한미 FTA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사장급인 글로벌 법무책임자로 영입한 상태이다. 한미 FTA를 통해 재벌을 어떻게 견제하겠다는 건가? 재벌 중의 재벌인 삼성은 이미 다 빠져가날 구멍을 만들어놓은 상태인데. 삼성이 하면 다들 한다. 다른 곳에서도 외교부 전직 직원들의 몸값을 한껏 올려놓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백 번 양보해서 '노짱의 심모원려'를 사실로 인정해준다 해도,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말자는 말이다.

시장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지하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각은, 순진할 뿐 아니라 이념적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발상이야말로 이념적이다. 어떤 이념도 택하지 않겠다는 이념,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낮게 보는 이념, 노동자가 제 몫을 찾는 것을 어떤 식으로건 폄하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념,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시장 원리'를 드높여 강조하는 분들의 이면에 깔린 이념이다. 미국 경제 위기로 인해 '글로벌 스탠다드'가 바뀌고 있는 이 시점에, 아직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시장의 세계화가 아니라 사상의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2009-03-13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문제적 개념 - 의회 불신의 난감한 산물…외부 여론이 방향타돼야

여야간의 합의로 ‘사회적 논의기구’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기술해내지 못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여야는 서로 합의하지 않은 채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었다.’

3월 13일 오전 2시 현재까지 ‘사회적 논의기구’에 대해 합의된 것은 세 가지 뿐이다. 첫째,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인다. 둘째, 한나라당에서 10명, 민주당에서 8명, 선진과창조의모임에서 2명을 추천한다. 셋째, 100일 후에 없애버린다. 첫째와 둘째 조항만을 놓고 보면 이게 ‘사회적 논의기구’인지 친목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 번째 조항이 더해지면서, 게다가 그 친목회는 시한부 친목회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 친목회의 어깨에 언론관련법 등 쟁점법안의 미래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 13일 국회에서 열린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김우룡, 강상현 위원장이을 비롯한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위원회 위원장, 나경원 한나라당 간사, 전병헌 민주당 간사, 이용경 선진과창조모임 간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여의도통신  

민주당이 잠시 ‘야성’을 되찾았다가 ‘이성’을 회복한 후, 2월로 넘어온 국회에서 언론관련법 등의 처리에 대해 내놓은 해법이 다름 아니라 이것이다.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어서 공론을 모은 후, 100일 후에 표결처리한다. 민주당은 ‘공론을 모은다’에 방점을 찍었겠지만, 한나라당은 ‘표결처리’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 기구의 성격과 지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합의되지 않은 ‘논의기구’만이 덩그러니 튀어나와 버렸다.

이 논의기구의 성격을 둘러싸고 한겨레와 조선일보는 극명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겨레의 경우 ‘사회적 논의기구’의 역할이 자문기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조선일보는 주호영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의 기고문을 통해 그 성격을 ‘자문기구’로 한정한다는 입장을 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 스스로는 여야의 합의를 ‘거대여당의 자승자박’이라는 식으로 한층 더 낮게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일보가 싫어한다고 해서 정당성을 역으로 추출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당 또한 자승자박을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적 논의기구’가 그저 자문기구에 머무를 뿐이라면, 그 협의 내용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한나라당은 무시하고 표결에 임하면 그만이다. 반면 ‘사회적 논의기구’의 결정 내용에 국회의원들이 따라야 하는 강제성이 부가된다면, 그것은 국회의원을 통한 국민의 의사결정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되므로 위헌 소지가 매우 높아진다.

   
  ▲ 13일 국회에서 열린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방송위원회 고흥길 위원장이 위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여의도통신  

정치적인 계산을 뒤로 접어두고,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만 본다면 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고작 20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 의해, 국회의원이 양심과 신념에 따라 법안에 동의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좌우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국회의원도 국민이 뽑았다’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국회의원의 표결권이 침해되는 것은 곧장 국민주권이 침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설령 그것이 미디어법 관련 악법에 대한 것이어도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사회적 논의기구’ 결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기구가 국회의원의 결정권을 좌우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내 초헌법적 기관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해서 고작 100일간 시간을 끄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손쉬운 길은 일종의 음모론을 채택하는 것이다. 어차피 합의는 결렬되게 되어 있으므로, ‘왜 너희들은 사회적 협의기구의 견해도 존중하지 않느냐’며 한나라당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과연 그 ‘전략’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같은 음모론적 입장에서 따져보자. 홍준표 원내대표를 포함한 한나라당의 소속 의원들은 진작부터 ‘사회적 논의기구는 자문기구일 뿐’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어차피 결렬될 협상’에 대한 고려는 이쪽 뿐 아니라 저쪽에서도 하고 있다. 상대를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현재 구성된 ‘사회적 논의기구’의 면면보다는, 그것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사회적 논의기구’는, 정치인에 대한 혐오, 정치적 합의 과정에 대한 폄하, 정치적인 것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우리 시대의 경향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미 국회 자체가 ‘사회적 논의’를 위해 구성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또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고, 그 구성원에서는 정치인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능 마비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토론도 다른 사람이 하고, 합의도 다른 사람이 하고, (민주당에서 암시하는대로) 표결권도 다른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면, 대체 국회의원은 뭐하러 뽑는단 말인가? 격투기 보려고 4년에 한 번씩 투표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대한민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이렇게 파행적으로 운행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인의 참여를 막고, 이른바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보니, 변모씨 같은 인물이 그 20인의 원로원에 한 다리 끼어들게 되는 비극적인, 아니 희극적인 상황마저 연출되고 있지 않은가. 뉴라이트 국회의원 신지호는 그나마 ‘싱크탱크’를 운영해오기라도 했지, 변희재는 대체 뭘 했다고 국회에서 이 중요한 논의를 하게 된단 말인가.

무슨 말이냐고? 한나라당에서 변희재를 ‘사회적 논의기구’의 패널로 추천했다, 이런 말이다. 만약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다면, 그 권한의 20분의 1은 변희재가 갖게 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예로부터 민중들은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라고 말해왔다.

우리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를 비난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응원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난감함을 우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에 따라 여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지금 시민사회가 내놓을 수 있는 정치권에의 대답은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노정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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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지식인, 광대, 개념인

신해철의 학원광고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유승준의 병역문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들 중 하나다. 두 사건은 비슷한 구조 하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경우 모두에서 해당 연예인보다는, 그들에게 열광한 후 다시 열광적으로 매도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쪽에도 책임을 묻고자 한다. 역사는 역시나 두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유승준과 신해철 모두, 한국 특유의 현상으로 보이는 '개념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발견한 후, 그것을 적극 자신의 인기를 위해 사용하다가 역풍을 맞은 사례이다. 내가 생각하는 '개념인'이란 이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충 동의하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 이야기를,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게 주창하고 나서서 그들의 지지를 획득할 때 그는 '개념인'이 된다.

유승준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자. 한국에는 '남자라면 군말없이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라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군대 문제 자체가 국가의 폭력과 결부되어 있으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의 피해의식이 포진해 있기 때문에 연예인이 군대와 관련하여 함부로 농담을 하거나 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이럴 경우 가장 현명한 선택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누가 말을 시키더라도 가장 소극적인 답변만 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죠, 헤헤...'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런 것 말이다. 유승준은 거기서 혁신적인 마케팅 방식을 찾아냈다. 아예 적극적으로 '군대를 가고자 하는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이미지 구축에 나선 것이다. 유승준 개인이 지니고 있던 확실한 스타성에, 그러한 '개념'이 덧붙여졌을 때 그 효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역풍도 확실히 불어닥쳐서, 지금도 유승준은 인천국제공항을 통과하지 못하는 국제 미아 신세가 되어 있는 처지이다. 내가 유승준이라면 가수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정치적 이유에서의 망명 신청'을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일이다. 대체 그게 뭐가 죽일 일이라고? 물론 정언명법에 따르면 또 십계명에 따르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거짓말도 하고, 걸리기도 하고, 연예인의 경우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 후 용서받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유승준만은 예외이다. '개념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승준에 대해 아직도 분노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심리에는, 유승준을 철저히 연예인으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연예인의 범주 바깥에 있는 수준의 윤리 의식을 요구하는 양면성이 포진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여 죽여도 '용서'받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군대 간다고 했다가 한국 국적 포기하는 것은 안 된다. 류시원은 '개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이었고, '개념인'이었다. 평가의 기준이 확 달라진 것이다.

신해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승준보다야 신해철의 '개념 발언'들이 비교적 낫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도 자신이 '개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분노할 뿐'이라는 말이 언제나 양념처럼 덧붙여졌다. 그 유보 조건이야말로 '개념인'을 개념인이게끔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 말에 동의하는 당신은 '안전'하다,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으면 '개념인'의 발언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해철은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노무현을 지지했고, '비상식적'이라는 이유로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해명 차원에서 내놓았던 첫 번째 요소가 '각하가 주신 용돈'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념인'으로서의 자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내놓은 답변에서도 마찬가지 코드가 좌르륵 나온다. '절라디언', 하지만 '알고보면 깨끗'한 사생활. 그런 것들로 방어벽을 쳐놓고 나서야 신해철은 공교육과 사교육을 분리하여,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공교육일 뿐 사교육에 반대한 적은 없다는 해명을 내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해명의 문제점이 아니라(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본다), 그 해명에 앞서 등장한 온갖 '개념인 코드'들이다. 너무도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그 말들. 너무도 '상식적'이지만 아무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그래서 개념찬 발언을 해주는 신해철이 너무도 고마워지게 했었던 그런 것들.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과, 신해철이 머리에 담고 있는 '개념'이 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사실만을 적어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더 깊숙히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개념인으로서의 연예인'이라는 통념에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가 있다면, 대체 왜 문제인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나는 '개념인으로서의 연예인'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지식인과 예능인,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광대'의 입지 모두를 좁히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식인들과 예능인들이 공히 각성해야 하겠지만, 예능인들이 개념인 행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분위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신해철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있지만, 그것 뿐이다.

앞서 말한 '개념인'의 코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들은 그냥 '상식적'이다. 그냥 한나라당이고 이명박이다. 그냥 조선일보고 그냥 강남이고 그냥 사교육이다. '개념인'이 툭툭 던지는 '개념찬 발언'에는 '왜?'가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이, 혹은 쉽게 잘 이해되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껄끄러운 그런 진실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개념인은 지식인을 구축한다.

신해철과 같은 '개념인'들이 용산 참사같은 진짜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명박이니까 잘못된 거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러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크고 두려운, 진짜 참여와 사유를 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사건이 터졌을 때, 그들의 (그리고 어쩌면 당신의) '상식'은 불현듯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명박이 경찰을 함부로 부리는 것은 잘못한 것 같지만 직접 명령을 내렸을 리도 없고 세입자들이 딱한 것도 같지만 연 매출이 억단위라고 그러고 찬 물을 끼얹은 게 잘못이긴 한데 전철연이 개입하고 있었고... '상식'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팩트'만이 난잡한 시장판을 벌이고 있다.

악순환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지식인은 멸시하고 폄하하지만 개념인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예비 지식인들은, '대중성'이라는 명목 하에 본래의 역할을 포기해버린다. 누군가를 개념인으로 만들어주는 그 '개념'이 상식과 통념이라면, 지식인 또한 결코 개념인일 수가 없다. 다들 알지만 쉬쉬해오는 것을 폭로하는 사람,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회의하게 만드는 사람, 상식과 통념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를 위협한다고 모함당하지만 결국은 그에 기여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면 분명히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판기에 200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듯 질문이 들어온다. 나는 그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손쉬운 대답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그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런 욕망에 굴복하고, 그것을 잘 충족시켜준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으면 나 또한 '개념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개념인이 아니다. 대체 지식인이 뭐냐고 나에게 물으면, 실은 나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지향하고 있고,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

개념인이라는 개념은 옳지 않은 개념이다. 그것은 진지한 탐구와 고민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한 두 줄로 요약되는 '어록'을 집어넣고, 사유를 마비시키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믿는 대중을 양성한다. 개념인이 있고, 그 개념인의 발언에 열광하는 내가 있다면, 나 또한 개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손쉬운 삼단논법은 정말 어려운 문제들,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마주봐야 하는 문제들을 상대할 수 없다.

용산 참사가 터졌다. 그렇다면 재개발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 것인가? 수많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답변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론 수용층의 입맛이 이미 '개념인'이라는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이명박을 깔 때에만 사랑받는다. 그때만 '개념인'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한국 정치의 불균형한 정당 구조를 토로하고, 미디어와 현대 사회에 대한 '머리 아픈' 논의를 늘어놓을 때에는 진중권 또한 그저 '지식인'에 불과한 누군가로 강등된다.

연예인의 경우에도 '개념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발언 한 두 개만 해도 졸지에 타고 싶지 않았던 무등을 타야 한다. 유재석이 정치에 대해 한 마디 했다고 쳐 보자. 난리가 날 것이다. 오오 개념인, 혹은 오오 알고보니 꼴통, 등등.

조지 클루니 일당처럼 '쿨'하게 정치적인 지향성을 드러내는 연예인이 나올 수 없는 이유는, 그런 발언을 하는 순간 대중들이 자신을 '개념인'으로 소비할 것임을 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한 마디 하려면, 연예인은 자신의 직업 생명을 걸거나, 아예 컨셉을 바꿔야 한다. '광대니까 넘어가자'는 식의 중재안이 먹힐 수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예술과 정치 사이에 길고도 깊은 구렁이 파이고, 그 강을 건너간 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유승준이 그랬고, 신해철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개념인이라는 개념을 붙들고 있는 것은 대단히 개념 없는 짓이다. 따라서 그러한 가치 판단의 기준 하에 신해철을 비판하는 것에 나는 원론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포지션을 충분히 활용해 온 신해철에게 개인적인 실망을 느끼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도 없다. 다만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특히 신해철이 두 번에 걸쳐 해명한 글에서 나온 그런 '개념 넘치는 단어'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숙고하고 고민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개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당신은 '개념인'들이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드디어 지식인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쾌락을 주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주지도 않는다. 지독하게 머리를 굴리고 나면 화끈하게 놀고 싶어진다. 그럴 때에는 광대를 찾아가면 된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해법은 이런 것이다.

2009-02-24

자료 수집 및 관리 방법 - zotero

zotero라는 공개 소프트웨어가 있다. 파이어폭스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확장 기능으로, 미국의 조지 메이슨 대학에서 개발하고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는 무료 프로그램이다. 서지 정보를 입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웹 페이지를 캡처하고 날짜 시간 및 작성자 따위의 정보를 기입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에 추가적인 노트를 첨부할 수도 있게 해준다. 이게 무료라는 사실이 참 놀랍다.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읽은 다음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대학교 새내기 무렵에는 그냥 노트에 샤프로 책의 내용과 감상을 옮겨 적었다. 기본적으로 악필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하나의 색만 이용해서 정리를 하면 내 생각과 책의 본래 내용이 구분되지도 않는다.

'독서 일기'도 비슷하다. 일종의 자기 수양으로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 '일기'를 바탕으로 2차 저작물을 생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정확한 인용과 서지 정보를 쌓아놓을 수 있는 방법론을 찾아내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마다 온갖 방법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관리한다. 이게 무서운 것이, 애초부터 신경을 안 쓰고 살았다면 모를 일이지만, 한 번 어떤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하면 '혹시 내가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이것보다 더 좋은 어떤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자기관리 중독자, 다이어리 광들이 '어떻게 해야 더 시간관리가 잘 되는 다이어리 구성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maximizer가 되고자 한다면 끝없는 불안과 회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료 수집 및 정리 체계를 갖출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식으로 정보를 습득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주로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다. 이공계와 인문계는 저널에 논문이 올라오는 속도와 주기 자체가 다르다. 빨라야 분기 단위로 연구가 진행되는 인문계에서는 RSS를 통한 실시간 저널 구독이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반면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에 주석을 다는 기능은 훨씬 더 중요하고 절실해진다. 그래서 많은 인문계 대학원생들이 Endnote를 사용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다. 서지정보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는 그리 큰 의미가 없으며, Endnote는 노트 정리 기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문과쪽 학생들은 그냥 복사물을 쌓아두는 식으로 자료를 수집한다.

조테로의 경우 서지정보 관리와 노트 수집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상당 수준 이상 충족시켜 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2월 23일 1.5 베타가 공개되면서 '노트 정리'가 진일보했다. 그 전까지는 Only Text로만 관련 정보를 정돈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밑줄을 긋고 굵은 글씨를 쓰고 불릿 마크를 다는 식의 편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일일이 손으로 html코드를 입력해서 강조 지점을 만들었던 내 입장에서도, 아주 마음에 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zotero에 저장된 서지 정보(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그 서지 정보에 추가된 인용 노트(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조테로가 지닌 최고의 장점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웹에서 본 것을 그대로 저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조테로는 자체 내장된 웹 스크린샷 기능을 제공한다. 그것은 이 프로그램을 '학술 연구' 등의 고상한 목적이 아니라, '인터넷 논쟁'이라는 저열한 차원에서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리플을 지우고 도망가는 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에서 의견 교환을 일삼는 자라면, 한번쯤 파이어폭스를 다운받고 조테로를 설치해볼만 하다.

아, 공부해야 되는데...




관련 사이트
zotero 영문 홈페이지
zotero 한글 홈페이지
Clio님의 zotero 소개

2009-02-16

용산 참사에 대한 주교회의의 입장

다음 내용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공식 사이트에서 퍼온, 용산 참사에 대한 주교회의의 공식 입장입니다. 발표 날짜는 2월 5일 목요일입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을듯 하여 미리 말씀드리면, 주교회의는 한국 천주교회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입니다.


용산 철거민 희생자 추모와 책임자 처벌 촉구

-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임시총회 열려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최기산 주교)는 지난 2월 4일 14시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대회의실에서 ‘한국경제의 현황과 과제’라는 주제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현 시국에 대해 우려하며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았다.



용산 참사에 대해 정부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5층 상가 건물 옥상에서, 합당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농성중인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을 경찰이 폭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6명이 목숨을 잃고, 30여 명이 부상당한 참사에 대해 놀라움과 분노를 금치 못하며, 고인과 유가족 및 피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근원적인 원인의 파악과 올바른 해결책 마련을 정부에 촉구하기로 하였다.

- 특히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 공권력이 오히려 특공대를 투입하여 과잉 폭력으로 진압하고, 유족들의 동의와 참여 없이 시신 부검을 강행한 것, 그리고 경찰과 철거 용역의 폭력은 덮어둔 채 농성 철거민의 폭력만 부각시키며 책임을 전가시키는 편파 수사로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정확한 진상 파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하게 촉구하기로 하였다.

- 가난한 이들이 밀려나고, 세입자의 생존권과 재산권이 무시된 채 무리하게 추진되는 뉴타운 재개발의 문제점이 이번 참사로 극명하게 드러났으므로, 정부는 앞으로 제 2의 용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재개발정책을 수정해야 하며, 더 이상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지 않는 물질 중심, 개발 중심의 경제 정책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책의 추진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2009년 1월 1일) ‘빈곤 퇴치와 평화 건설’에서 말씀하셨듯이 가톨릭교회는 윤리적 빈곤 퇴치와 가난한 자의 아픔에 함께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정부도 경제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데 있어서 우선 약자의 권리가 존중되고 사회 정의가 공정하게 지켜져야 진정한 인간적인 삶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을 제대로 섬기는 정부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촉구하기로 하였다.

2009. 2. 5.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오늘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아멘.

2009-02-15

인간에 대한 예의, 신에 대한 예의

"명동성당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노정태)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자그니님)



내가 지난번 포스트에 쓴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놓고 불필요한 리플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 말의 맥락을 좀 더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았는데, 자그니님의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거리로 나가자, 키스를 하자, 2009년 2월 13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사회를 전제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약자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강자에게 도움이 될까?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며 가톨릭 교회가 진보진영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군부가 가톨릭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 세계에 지부가 뻗쳐 있는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 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를 건드릴 경우 발생하게 될 저항의 크기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한 가지 본질적인 사항을 전제로 한다. 한국과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신앙심이다.

경찰이 신부를 때리건 말건, 경찰이 성당을 수색하건 말건, 나는 그냥 성당에 와서 성체 받아먹고 갔으니 이번 한 주도 무사히 예수님 땡큐, 신자들의 분위기가 이런 식이었다면 경찰은 명동성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때리건 말건, 안방 장농을 뒤지건 말건,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오늘도 무사히, 대통령 각하 땡큐, 이런 사람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1000만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은 명동성당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글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회의 일원'인 나의 우월함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야 하는 목적의 우월함이다.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경찰이 원천봉쇄했을 때, 효자동 등 궁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는 경찰의 요구에 바로 내 반응과 같이 대응했다. 그들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그 길을 막아서면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들에게 분노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주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고자 할 때 경찰이 막아서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그보다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신앙심보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가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신앙심은 그 무엇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는 사회 정의를 함께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정의로운 가톨릭'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에 대해 직접적인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일부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을 불러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대해 되짚어보자. 그 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의 이름으로 이럴 수가!'라고 경악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천주교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 천주교회를 '진보적인 사회단체'중 일부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양자들 중 실질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럴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천주교가 이럴 수 있습니까!'가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에서 일부 '진보적'인 블로거들이 취하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다소 야비할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그니님이 쓴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를 살펴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 중 지금은 다소 멀어진 이라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끝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를 지닌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홍길똥'이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 다. '냉담자인 나는 신자가 아니라는데, 당신들 지금 나 내치는 거?'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세례를 받으면 파문을 당하지 않는 한 천주교회의 일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자그니님은 파문까지 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서의 종교 생활과 진보적인 스스로의 지향성을 조율하고자 노력하는 다수의 신자들이 볼 때, 이런 태도는 '진보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만을 불러올 뿐이다. 그의 글 제목에 담긴 질문에 대해, 자격은 없지만 내가 대답해보겠다. 내쫓는 것은 가톨릭이 아니다. 하지만 반박하는 것은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이단과, 종교 자체를 비아냥거리는 이들 모두에게 반박해 왔다. 바로 그 신앙심과 충성심이 명동성당을 성지로 만들어온 진짜 원동력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특별한 패션인 양 목에 두르는 손수건처럼 천주교인의 소속을 들먹거릴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당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단 말이다.

천주교회는 소외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회적 선행이 단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 즉 신앙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강남성모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비난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가톨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강남성모병원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완전'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성당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라는 식으로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조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한다. 성당에서 조용히 해야 하고, 성물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미사 시간에 조용히 해야 하는 등의 기본적인 '예의'가 만약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라면, 우리는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납득해야만 한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자 환자들이 비싼 돈을 내고 입원했는데, 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것은 그 '인간들'에 대한 예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때로, 강자들에게만 유리한 무기로 사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남성모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윗사람'들이 보기에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 도리어 그 반대로, 정당한 노동에 대한 요구를 펼치는 이들을 때리고 쫓아내고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종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신앙심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향의 논의를 아예 시작할 수도 없다.

미사 시간에 확성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부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실로 신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명동성당과 관련한 문제를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보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이지도 않다.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경찰은 성당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같은 이유로 시위대는 성당측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들은 그 신앙심 자체를 함부로 비아냥거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체스터튼의 글을 인용하면서 내 부족한 논의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18세기의 사회적 계약이론은 우리 시대의 여러 섣부른 비평에 나타나 있다. 모든 역사적 통치기구의 이면에는 찬성과 협동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옳았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익을 의식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질서나 윤리를 얻고자 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틀렸다. 도덕성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도덕성에는 그러한 거래의 흔적이 아니라, 두 사람이 "우리는 성스러운 곳에서 서로를 때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흔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도덕성을 얻었다. [127쪽]
G. K. 체스터튼, 『오소독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경기도 파주: 이끌리오, 2003)
73p. Orthodoxy (San Francisco, U.S.: Ignatius Press, 1995)

2009-02-13

명동성당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요청을 두고 이글루스 내에서 논쟁이 뜨거운 것 같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명동성당이 경찰에게 '시설물 보호 요청'을 한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명동성당의 권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성당측에 집회 사실을 먼저 알리지도 않고 일단 그쪽으로 향한 대책위의 행동에 대해서도 나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우선 대책위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프레시안의 기사에 따르면, 대책위는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할 생각이면서 명동성당측에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다.

사회단체로 구성된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 진압 범국민 대책위원회'는 이날 오전 11시 기자 회견을 가진 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철야 농성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죄와 진압의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 원세훈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 처벌, 그리고 검찰의 재수사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동성당에는 경찰이 먼저 도착해 모든 입구를 봉쇄했다.

경찰은 "성당 측에서 시설 보호 요청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성당 관계자는 "(농성을 하면) 성도들에게 피해가 가고, 촛불 집회를 하면 화재 위험이 있다"며 "시설 보호 요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책위 관계자는 "급하게 결정하고 우리가 성당 쪽에 미처 알리지 않았던 농성을 성당에서 먼저 알고 경찰에 연락했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며 "경찰이 먼저 성당에 농성 일정을 알려줬을 것"이라고 질타했다.

결국 경찰보다 먼저 도착한 20여 명의 대책위 대표자는 봉쇄한 경찰들 뒤 들머리에, 10여 명은 경찰 앞에 서서 기자 회견을 시작했다.
강 이현. “80년대로 돌아간 명동성당…경찰 '원천 봉쇄'.” 프레시안, February 11, 200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11163232§ion=03.

촛불시위가 게릴라 시위로 변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책위 차원에서 움직이는 공식 행사마저 그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고 운영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이 어떻게 시위대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되물어보고 싶다. 명동성당이 '성지'일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이다. 경찰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명동성당은 시위자들이 도망칠 수 있는 소도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요컨대 공권력이 천주교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혹은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기 때문에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당측에 연락하지도 않고 일단 진입부터 하려고 든 대책위의 행동이 과연 '존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행간에 묻어나는 뉘앙스를 보면, 대책위는 '성당측이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적잖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성지를 진정 '성지'로서 존중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 성지가 경찰로부터 존중받기를 바란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대책위가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성당이라면, 경찰은 더 쉽게 들어와서 그들을 체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명동성당의 권위는, 종교의 권위는, 결국 사회 전체의 존경과 존중으로부터 나온다. 교단에서 사병에 가까운 '경비'를 세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대 국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령 『사하촌』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깡패들을 절이나 교회, 성당에서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시설경비요청을 부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대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필립 풀먼의 소설 『황금나침반』에 등장하는 옥스포드 조단 칼리지를 떠올려보자. 조단 칼리지는 그 자체가 (리라가 사는 세계 속에서) 손꼽히는 부자이며, 거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영토에서는 국왕의 법보다 조단 칼리지 자체의 법이 우선한다. 그러므로 만약 대학은 당당하게 공권력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 소설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68혁명 당시 소르본느 대학은 경찰이 진입하려 하자 '소르본느는 소르본느가 다스린다'며 그들을 쫓아내고 학생들을 거두었다. 대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도 대학 구내에 경찰들이 들락거리는 것 같지만, 본디 '거대 조직'은 그처럼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공권력과 대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바티칸의 경우도 그렇다. 바티칸이 독립된 국가라는 것이 뭘 뜻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교회는 원래 국가와 대립하는, 또한 세속적 차원에서 동등한 차원의 힘을 가지는 무장 집단이기도 했다. 명동성당과는 달리 성 베드로 성당은 이탈리아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시절이니까 그들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주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만,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당장 군인이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 맥락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존중받는 이유가 단지 '사회의 존경과 존중'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동성당에 어느 정도 확실한 힘을 가진 무력집단이 있고, 그래서 그들이 군사독재시절에는 경찰들의 난입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면서 수배자들을 지켜주었다고 말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리는 마구 들락거릴 수 있지만, 경찰만 못 들어오는 민주화 성지'라는 식의 잘못된 관념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당이 무장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명동성당에서 시설보호요청을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금 인용한 프레시안 기사에 따르면, 성당 입구를 막아선 경찰이 신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후 입장시켜주었다는데, 이건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로서 참을 수 없을만큼 모욕적인 일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처럼 공권력보다 천주교회의 권위를 더욱 존중하고, 따라서 성당 땅에 경찰이 들어오는 꼴을 눈 뜨고 참아주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성당이라는 곳 자체가 공권력의 공백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나는, 사전연락도 없이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나온 대책위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양자가 모두 진입 요청을 한다면 당연히 경찰은 안 되고 대책위는 환영이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고자 한다면 둘 다 안 된다, 이게 교회의 입장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배타적인 것, 단호한 것, 규율을 내세우고 사람을 선별하는 것, 무차별적이기 이전에 확고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보수적'이라느니 '수구 꼴통'이라느니 하는 딱지를 붙인다면, 명동성당은 앞으로도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찰에게) 배타적이었고, (경찰에게) 단호했으며, (국가에게 종교적인) 규율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라는 요구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그래서 굳이 '개톨릭'이니, '수구화'니 이런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나? 이건 뭐 중학생들도 아니고. 관광지에 있는 이국 종교의 사원에 들어갈때에는 신발을 잘도 벗는 사람들이, 한국 땅에 있는 우리의 성지에 들어갈 때에는 너무도 무례한 것 아닌가?

정리해보자. 교회가 단독으로 무장을 하거나 실력행사를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권위, 천주교회의 권위는 오직 사회의 존경심으로부터만 나와야 한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명동성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집회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올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라는 공공재의 가치가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명동성당측과 최소한의 사전 연락도 없이 집회를 열고자 했던 대책위를, 이번만큼은 비판한다. 하지만 굳이 경찰을 불러서 교회의 문을 틀어막은 처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세상에서, 가톨릭 교회만큼은 그 권위와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위대가 무단으로 시위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경찰이 신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전자에 다소 화가 났지만, 지금은 후자에 더 화가 난다.

우석훈 필화사건에 대하여

오늘자 경향신문에 관련 기사가 나왔다. 전문을 인용해보자.

우석훈씨 “靑서 비판글 쓰지말라 경고” (경향신문, 2009년 2월 13일)

ㆍ‘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씨 주장 파문 ㆍ“필화 사건… 굴복안해 충돌 불가피 할듯”

<88>의 저자 우석훈 박사(41·연세대 문화인류학 강사·사진)가 정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정부 비판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12일 밝혔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에 이어 정부가 본격적인 ‘비판 언로(言路) 차단’에 나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 박사는 1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10일 정부 고위 인사로부터 정부 비판 글을 자제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정부 관계자가 직접 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인사는 ‘청와대 홍보실에서 글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도 했다”면서 “사실상 청와대가 원 소스이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나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때도 몇 번 경고를 들었지만 ‘오해가 있으니 풀자’는 수준이었다면,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쓰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경고 수위가 높았다”며 “글 쓰는 것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덧붙였다.

우 박사는 지난 5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칼럼이 직접적으로 문제가 된 것 같다면서 정부측 인사가 “이런 식으로 쓰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우 박사는 ‘녹색성장이라는 사기극’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녹색 본래의 의미는 ‘반핵’인데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원자력 위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라서 ‘녹색’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반녹색”이라며 “기괴한 토건자본의 ‘그린 워시’, 즉 녹색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녹색 마케팅이 바로 녹색성장”이라고 비판했다.

우 박사는 “(경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인들의 피해가 걱정돼 말하기 곤란하다”면서 “내가 글 쓰는 기조가 있고 글은 계속 쓸 것이므로 어찌됐든 앞으로도 충돌은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11일 오전 1시33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필화 사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난 정권에서도 나는 청와대에 눈엣가시였는데, 본의 아니게 주변 지인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필화 사건에 대한 거의 마지막 경고를 오늘 받은 듯싶다. 모르겠다…. 감옥 보내려면 보내라…”고 적었다.

우 박사는 2006년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2007년 <88> 등을 출간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20대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다. 현 정부 들어서는 <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 <직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작과 기고문을 통해 경제정책을 비판해왔다.

이에 대해 송경재 경희대 교수는 “모니터링이 여론수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감시와 통제의 수단으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글 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도록 하고 언로를 막는 흐름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정인·조미덥기자 jeongin@kyunghyang.com>


이럴 때에는 다들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당사자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 '당사자 운동'의 좌파 버전과 우파 버전이 또 나누어질 수 있으며 변듣보가 잘해보면 좋겠다고 말한 우석훈의 실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계급론에 세대론이라는 당의(糖衣)를 입혔다는 공저자의 설명은 참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386과 유신세대는 착취를 멈추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쨌건 이런 일이 터졌는데 우석훈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을 혼자 아는 것과, 글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가령 나 같은 경우에도 작년 12월 25일에 관련 내용으로 칼럼을 하나 썼지만 청와대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건을 저지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어쨌건 글쟁이는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보낸 원고에서 문장 하나가 잘렸는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것을 복원시켜보자.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적으로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르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방사능 폐기물이 뿜어내는, 돌연변이 괴물의 징그러운 녹색이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핵폭탄과 구공탄들" (경향신문, 2008년 12월 25일)


핵발전소 추가 건설이 친환경정책이 아니라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들 알 법한 내용이다. 고작 그런 내용을 칼럼에 썼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외압이 들어오는 것은 명백한 언론탄압이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나는 우석훈에 대한 정부의 외압에 반대한다.

2009-02-12

용역과 용병

그런데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방어하는 데에 사용하는 무력은 그 자신의 군대이거나, 아니면 용병(mercenario, mercenary)이거나 외국의 원군, 또는 이 세 가지가 혼합된 혼성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병과 원군은 무익하고 위험합니다. 자신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서 용병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토를 결코 안정되고 안전하게 통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병이란 분열되어 있고, 야심만만하며, 기강이 문란하고, 신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있을 때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강력한 적과 부딪치게 되면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 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한 약속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당신의 파멸은 적의 공격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지연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전시에는 당신의 적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이유는 그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으며, 너무나 하찮은 보수 이외에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전쟁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은 기꺼이 당신에게 봉사하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거나 탈영합니다. 기실 이탈리아가 최근에 겪은 시련은 다른 어던 이유보다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용병에 의존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이 용병들의 일부는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다른 용병들과 싸울 때 용맹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군의 침입이 시작되었을 때, 일거에 그들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샤를 왕은 이탈리아를 백묵 하나로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이러한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진리를 말한 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믿은 죄악이 아니라 제가 적시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이는 군주들의 죄악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처벌을 받았습니다. [84-85쪽] (강조는 인용자)

Niccolo Machiavelli. 『군주론』. 강정인, 김경희 옮김. 제3판 개역본. (서울: 까치글방, 2008).

용역들이 'Policia' 방패를 들고 날뛴 사건이 경찰들에게도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경찰 방패는 '싸제'도 있다던데? 허허, 싸제가 더 좋지 않나?' 이런 소리를 하니까 전경들 몇몇의 눈이 번뜩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경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 하에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용역'이라는 사병의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반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레디앙은 용역의 배후에 삼성물산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물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공권력이 사적 폭력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사적 폭력은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라는 거다.

법대에서 숨을 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안다. '법은 불법에 조응하지 않는다.' 법은 절대 정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얻어진 증거를 법정에서 채택하지 않는다. 법은 절대 정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단체와 연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이 남긴 교훈도 그것이다. 아무리 그 녹음에서 명백한 선거법 위반 사실이 나왔다고 해도, 불법도청을 통해 얻어낸 증거인 이상 법정은 그것을 받아줘서는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주거침입죄'로 관련자들을 처벌해버린 엽기적인 판례가 나왔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법은 불법에 조응해서는 안 된다. 정의는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경찰은 조폭과 연합해서는 안 된다.

한편 불법도청을 통해 얻어낸 증거를 통해 재판이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명백히 면책특권을 지니고 있는 국회의원이 그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명박 시대에 들어와서 세상이 딱히 더 나빠진 게 어디 있냐는 사람(가령 '미스터 불온')은 세상 물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다. 권력조직은 다들 '알아서 기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금 고삐 풀린 규제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만이라도 돌아가는 세상과 그마저도 안 되는 세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17-18세기에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한 이유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폭력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정치적 과정을 통해 통제할 수 있도록 폭력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용역의 폭력, 용병의 폭력은 그렇게 통제될 수가 없다. 이것은 《Foreign Policy》2009년 1, 2월호에 실린 한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군대가 좀 더 약한 화력으로 작전을 수행한다면, 전투 지역에 있는 다른 부문들도 여기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 특히 사설 경비업체들이 그렇다. 필자 중 한 사람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설 경비업체의 호위를 받는 무장 수송대 차량을 타고 잘랄라바드 부근의 어두운 고속도로를 지나다 끔찍한 경험을 했다. 경찰이 설치한 검문소들을 무시하며 질주하던 수송대는, 승객이 가득 찬 채 길가에 정차해 있던 미니 버스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중무장을 한 SUV에 받힌 버스는 그 충격으로 길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러나 경비업체 요원들은 차를 세우고 부상자를 구호하라는 우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적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프간 시민은 이처럼 위압적인 물리력을 쓰는 게 군대인지 사설 용역업체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에 대한 반감이 곧 현실적 위협으로 나타나는 지금과 같은 전쟁판에서, 그 결과는 오로지 우리가 덮어쓰게 된다.

30-31쪽. 너새니얼 C. 픽, 존 A. 네이글, "미 육군 해병대 - 반전 대응용 야전 교범 아프가니스탄 특별판" (Foreign Policy 한국어판, 2009년 1/2월호)


"그들은 동료들과 있을 때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강력한 적과 부딪치게 되면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문제는 용산에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던 용역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데 있다. 무전기 통신의 내용을 통해 추측해보자면, 만약 용역이 호스를 잡고 있었다면, 경찰측에서 '신나는 물로 못 끈다, 물 그만 뿌리고 소방차 불러라'라고 할 때 용역은 어떤 식으로 대응했겠는가? 지금 내가 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가정'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당신의 파멸은 적의 공격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지연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전시에는 당신의 적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이유는 그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으며, 너무나 하찮은 보수 이외에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 유지광과 이정재를 다시 불러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2009-02-10

[인터뷰] 무신경함때문에 시민들은 화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친구들에게 궁금한 게 있다면?

“저는 진짜 쇼프로가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20대들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방식이 쇼프로를 모방하고 있어요. 대여섯 명이 모이면 누구 하나가 큰 목소리로 사회자가 돼요. 그리고 막 역할을 부여해요. 얘는 찌질하고 쟤는 소심하고 너는 엉큼하고… 이런 식으로 좁은 틀로 몰아넣어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면, 열혈정태라고 붙여버리고 역시 열혈정태야, 열혈정태, 오늘도 분노? 무슨 쇼프로 자막 붙이듯이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정말 재미없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이것은 20대뿐아니라 30~40대도 마찬가지죠. 대중문화에 쇼프로를 빼면 다른 오락이 없기에 TV에만 의존하게 되는 거고 그러다보면 세상 보는 게 좁아지는 거죠. 문제는 재미로 보고 있다는 건데, 그게 정말 재미있냐는 거죠.

사람들이 쇼프로를 모방하면서 사람관계를 맺고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맥락에서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고요. 요즘 유행하는 오락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이 노는 형식을 본 따서 극화시킨 거잖아요. '패밀리가 떴다'에 대본이 있다 없다를 놓고 난리가 났었는데, 그게 TV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놀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픽션이라고 드러나니까 그걸 못 참는 거잖아요. 픽션이나 논픽션이냐를 떠나서 자기들도 그런 역할놀이를 하는 걸 알지 못해요.

"무신경함때문에 시민들은 화난다"(꺄르르, 노정태 인터뷰. 2009년 2월 10일 게시)


오마이뉴스 블로거기자 꺄르르님과의 인터뷰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인터뷰는 지난주 수요일(2월 4일) 오후 2시 상수역 인근 비하인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장황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정리해준 인터뷰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009-02-06

시대착오에 대하여

잘못된 시대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올해로 한국 나이 스물 일곱이 된 나는, 정말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세계들이 내게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그것들이 멀어지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향해 다가가고 있지 않아서도 아니고, 또 그것들이 나로부터 부러 멀어지고 있어서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어떤 세계, 단정한 문장 속에 뜨거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가 점점 흐릿하게만 보이는 것은, 그것이 통째로 부서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황혼을, 청춘의 한복판에서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저널리즘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동시에 지식인의 위기 또한,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2000년대부터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전자가 사실을 직접 발굴하여 의견을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면, 후자는 이미 만들어진 텍스트 속에서 다시 언어를 발굴해내고 다듬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지식인일 수 있고, 지식인인 동시에 저널리스트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어쨌건 둘 다 언어를 일구어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미국인의 시민사회가 국부로 섬기는 사람은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죽을 때 자신의 묘비명을 A Printer라고 새겨달라고 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을 익혔고, 신문 기사를 쓰며 자신의 관점을 남에게 전달하는 법을 배워나갔다. 저널리즘과 지식인의 성장이 서로 얽혀있는 것은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기관지를 편집했다. 당시의 편집자들은, 지금도 종종 그렇지만, 펑크난 기사를 자기 손으로 채워넣어야 하는 노가다꾼 역할까지 해야 했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상황》을 창간한다. 한편 네오콘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위클리 스텐다드》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아주 넓게 보자면, 특정 분야의 학문 연구자들 또한 대단히 제한된 의미의 저널리스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들 또한 어떤 '저널'에 글을 쓰기 위해 그 모든 연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Kant Studien》은 칸트에 대한 독일어권의 연구를 다룬다. 한편 《Nature》는 포괄적인 자연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한 최신 소식을 담아내는 저널이다. 그 '잡지'에서 다 다룰 수 없는 내용들은 개별적인 저널들에 실린다. 어느 저널에 어떤 논문을 실었는가, 그것을 읽은 이들이 다른 저널에 또 기사를 쓸 때 자신의 글을 어느 정도 참조하는가에 따라 학자의 인생이 갈린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저널리스트'들이 대중을 상대로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학자들은 해당 저널에서 다루는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동료 학자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저널'에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사람들을 뒤흔들어놓는데에는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을 꾸준히 모아내고, 다듬고,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정기간행물이 필요하다. 《뉴욕 타임즈》를 읽지 않는 뉴요커 지식인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Medline이 저널 이름인지 DB이름인지도 모르는 심리학도를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저널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준다. 그 저널에 글을 쓰는 것은 그 사람이 여느 '독자'는 아님을, 하나의 완결된 순환 체계를 갖춘 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저널리즘에는 황혼이 드리워지고 있다. 저널리즘의 왕국이라 할만한 미국에서도 이미 여러 개의 적신호가 켜진 상태다. 《Time》지의 편집장인 월터 아이작슨은 "How to Save Your Newspaper" (2009년 2월 5일)에서, 이미 미국에서조차 신문을 돈 주고 사서 보는 사람보다 온라인에서 공짜로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고, 심지어 자신마저도 뉴욕타임즈의 정기구독을 해지했다고, 가판 판매와 정기구독, 광고 수입의 세 다리로 버티고 있던 앉은뱅이 의자가 쓰러질 상황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신문 기사를 많이 읽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돈을 내고 읽지는 않는다. 신문 기사를 공짜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바그다드에 특파원을 보내거나 르완다에 프리랜서 리포터를 보내는 일이 공짜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뉴욕타임즈 또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데이빗 스웬슨과 마이클 슈미트는 "News You Can Endow"라는 기고 칼럼을 통해, 차라리 이 수익성 없는 사업을 공공 기금이 운영하는 공적 사업으로 전환해버리자는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물론 공공 기금이 신문을 운영하게 된다면, 지금처럼 '정치적 의견'을 담은 칼럼을 실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미 블로그와 인터넷 공간에 그런 '의견'은 넘쳐나는데 뭐가 문제인가? 그들의 주장은 이런 것이다. 저널리즘의 핵심은 사실을 추적하여 그것을 보도하는 데 있다. 그 기능만큼은 온전히 살려 놓아야 시민사회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마련된다. 하지만 지금처럼 전통적인 저널리즘이 죽어가고 있고, 그마나도 인터넷 광고주에게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공익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도발적인 주장에 대해 수많은 독자 편지가 답래했고, 그것은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라는 제목의 독자 편지란으로 집결되었다. 다양한 해법을 독자들이 제시하였고, 그 중에는 '아하' 하며 무릎을 치게 하는 것도 종종 있지만, 저널리즘을 뒤덮고 있는 우울한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은 죽어가고 있다. 동시에 지식인이라는 존재 또한 시장 논리에 의해,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시장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상황으로 인해, 입지를 잃어가고 있다.

사르트르 가 말한 것처럼, 지식인이란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탄생하는 사회적 존재다. 문제는 과연 그 '전문가'가, 자신의 영역 밖으로 목소리를 낼 때, 어떻게 그가 '상식적'인 선을 지키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상식을 바꾸어낼 수 있는가이다. 여기서 저널리즘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좋은 저널리즘이 튼튼하게 버티고 있지 않다면, 전문가는 자기 영역 밖의 문제에 대해 말을 꺼낼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지식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마이크 데이비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나는 방금 책꽂이에서 그의 칼럼 모음집 In Praise of Babarians(HaymarketBooks, 2007)를 꺼냈다. 그리고 가장 뒷 페이지를 펼쳐 참고문헌 목록을 들여다보았다. 제일 처음 등장하는 인용 매체는 다름 아닌 《The New Yorker》다. 두 칸 내려가면 WSJ가 나오고, 8번 각주는 LA Times가 차지하고 있다. 나는 마이크 데이비스의 스칼라십을 문제 삼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국내 저자들 또한(특히 강준만의 경우) 국내 매체를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쳐낸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굳이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거리에 대한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마르크스는 최초로 정부 발행물을 학술적 저작물에 인용하기 시작한 학자였다.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른바 '주류 언론'의 기사를 인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흔히 말하는 '중심부 국가'의 전문적인 학자들이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는 데에는, 이렇듯 신뢰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 그 뒤를 받쳐주고 있다는 것 또한 이유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과 의견은 명료하게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매체의 논조를 탐탁찮게 여긴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사실만을 추려내어 자신의 입장을 구성할 수 있다. 공연히 '진실 게임' 따위에 말려들 필요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상식'은 그야말로 '상식'으로서 단단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그와 정 반대이다. 언론은 사실과 의견을 전혀 분리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신문을 읽고 세상에 대해 논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참여'가 아니라, 복덕방 노친네의 '꼰대질'로 전락하기 일쑤다. 심지어 신문 기자들마저도 서로의 신문에서, 혹은 자신이 속한 회사에서 만들어낸 신문의 내용이 사실을 충실하게 담고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모든 사실은 왜곡되어 있고, 그 왜곡은 모두 정치적이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그래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고급 정보'를 손에 넣고자 다들 방방 뛴다.

미네르바를 둘러싼 헛소동을 돌이켜보자. 그 사건은 그 미네르바가 가지고 있던 '정보'가 고작 인터넷 서핑질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는 '진실'이 폭로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언론들은 그것을 통해 그가 '대한민국 1%'가 아니라고, 진짜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깎아내렸다. 물론 그의 경제학적 지식의 기본적 소양이 부족하다는 비판은 타당하고 옳다. 하지만 정보의 출처가 고작 '인터넷 뉴스'라고 깎아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WSJ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방 언론이 무료로 컨텐츠를 공개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첩보원'들이 하는 일도 결국 그것과 유사하다. 상대방 국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모든 일간지와 정기간행물 및 서적을 훑어보며 그것을 재가공해서 '정보'로 만드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탐닉하는 '고급 정보'는 물론 어떤 국면에서 중요하지만, 오픈되어 있는 정보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문제는 과연 그 열린 정보가 '정보'로서의 가치를 지니느냐이다.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사회와 그럴 수 없는 사회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갈라진다.

저널리즘의 몰락은 세계적인 추세로 전개되고 있다. 학자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결국 한 사람의 학자가 되고자 하는 나로서는, 그 몰락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다. 한국어로 만들어지는 저널리즘은 그 수준에 도달해보지도 못한 상태로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으면서 한나라당과 싸우고 싶지, 조선일보가 '진실 게임'으로 용산 참사의 프레임을 몰고 가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고 싶지 않다. 논조야 어찌 되었건 담백한 정보가 우선 전달되는 저널리즘이,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는 성립한 적도 없었고, 수익 모델이 박살나고 있는 현 상황을 놓고 볼 때 앞으로도 그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NYT와 Times는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해 '공영화', 'iTunes식의 클릭뷰' 같은 해법을 내놓는다. 반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방송법을 뜯어고쳐서 방송사를 집어삼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면 한국 증시는 감기에 걸린다. 미국 저널리즘이 다리를 절면 한국의 신문사들은 개처럼 기어다니며 풀을 뜯기 시작한다. 저널리즘에 대한 불신과 그 산업의 붕괴가 한국만의 일이라면 훌쩍 털고 도망가겠다는 꿈이라도 꿀 수 있겠지만, 이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상념에 빠져들게 된다.

아도르노에 대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에세이는 그런 우울에 빠져드는 내게 잠깐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사이드에 따르면,

아도르노는 일차적으로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란 그에 따르면 "대상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것에 관심을 두는" 형식이며, "내밀한 형식적 법칙은 이단이다." 아도르노의 의미로 볼 때 에세이스트라는 존재는 당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영원히 맞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보통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한다. (강조는 인용자) 
140-141p.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즉 에세이를 쓰고자 한다면 언제나 시대착오적이어야 한다. 이 말은 잠깐의 위로가 된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러므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해법을 내가 나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에드워드 사이드는 아름다운 문장과 차분한 해설력을 갖춘 지식인 비르투오조답게,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작가와 알지도 못하는 곡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독자를 유혹하고, 설득하고, 주먹을 꼭 쥔 채 책을 덮게 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시대착오적인 에세이는, 같은 의미에서 배은망덕한 것이기도 하다. 귀를 기울이는 독자들에게 불협화음을 들려주고,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러 추한 것과 끔찍한 것을 현시한다. 당혹스러워하는 독자를 향해 지식인은 피식 비웃는다. '아무튼 너는 내 글이 실린 잡지를 산 거야. 독자님, 감사합니다.' 지식인의 삶의 양태를 지탱해주는 물질적 토대가, 원고지 한 장에 얼마씩이라도 온전히 주어지던 시대에는, 그런 배덕자들 또한 얄팍한 지갑의 틈바구니에 숨어 시민권을 보존하고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나약한 20대라서 이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느끼는 그대로 말해보도록 하자. 공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공짜가 아니면 보지 않는 이 세상은, 바로 그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더욱 가혹하다. 나는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것 같다.




언급된 기사와 책들


Isaacson, Walter. “How to Save Your Newspaper.” Time, February 5, 2009. http://www.time.com/time/business/article/0,8599,1877191-4,00.html.

Swensen, David, and Michael Schmidt. “News You Can Endow.” The New York Times, January 28,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28/opinion/28swensen.html.

“Imagining Newspapers of the Future.” The New York Times, January 31, 2009, sec. Opinion. http://www.nytimes.com/2009/01/31/opinion/l31endow.html.

Davis, Mike. In Praise of Barbarians: Essays against Empire. Haymarket Books, 2007.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10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마티

2009-01-30

간단한 설문 조사

"구경꾼의 구성"에서 몇 분의 방문자들이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리플을 달고 있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생각한다. 적극적 참여자인 A와, '민주 시민'으로서 경찰의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많은 C가 주를 이루는 구경꾼 집단은, '오지라퍼'인 B보다 훨씬 철거민 문제에 적극적이며 또한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 내 주장이다.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간단한 설문조사를 진행해보자. 메모장같은 간단한 프로그램을 띄우거나, 메모를 할 수 있는 종이를 준비하면 좋다. 어제 그린 표를 다시 인용한다.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이 표를 1분간 잘 살펴본 후, 자신이 어느 사분면에 속하는지 적어두자. 나 같은 경우, 말하는 건 C에 가깝지만 실상은 A에 속한다. 철거민들이 받았던 보상금이 턱없이 부족했으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물론 난 이 블로그에서 그것을 '입증'할 생각도 없고, '반증'하겠다는 사람에게 대응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아래 계좌 번호를 그 메모장에 적는다.

농협 067-02-302163 예금주 이종회

용산 철거민 문제 대책위원회의 후원계좌 주소가 바로 이거다. 다 적었으면, 이 계좌에 후원금을 입금한다. 적어도 1만원은 되어야 하겠다. 대개의 경우 결혼식이나 장례식의 축의금/부의금처럼, 3만원에서 5만원 정도가 적정선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알고 있다. 입금을 해보자.

그리고 자신이 입금한 시간을 (액수는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굳이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까 그 메모장에 적는다. 그러면 이런 정보가 나올 것이다.

이름 | 구경꾼 유형 | 후원금 입금 일시

가령 나 같은 경우, 이름은 노정태고, 구경꾼 유형은 A이며, 후원금은 2009년 1월 28일에 입금했다. 내 짐작이 맞다면, 후원금을 이미 입금하였거나 앞으로 그럴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A나 C에 속할 것이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나는 철거민들이 받는 보상금이 너무 적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을 후원한다"고 말할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내 가설에 대해 살아있는 반례를 제공하기 위해 후원금을 보낼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사분면 B에 속하는 구경꾼보다는 C에 속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주네 마네 하는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언술을 보며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이지, 값싼 동정과 적선이 아니다.


* 이미 입금하신 분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입금하신 분들, 모두 리플을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제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구경꾼의 구성

"구경꾼의 역할"(sonnet)에 트랙백


sonnet 님은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이 세웠던 전략을 '구경꾼 끼워들이기'라는 큰 틀에서 설명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에 따르면, "모든 갈등의 결과는 이에 관여하는 구경꾼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며, 또한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위 두 가지 명제는 모두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강한 경쟁자는 자신이 상대방을 구경꾼들로부터 고립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데 주저할 수 있다"는 샤츠슈나이더의 말은 매우 타당하다. 용산 철거민들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농성전을 시작한 것은 '구경꾼'으로부터 고립되지 않기 위한 행동이었다. 반면 경찰은 구경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새벽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해산 작전에 돌입했다.

이 지점까지는 sonnet님의 분석에 나 또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sonnet님은 "사적인 갈등에서 경쟁자들 간 힘의 관계는 언제나 불평등하기 마련이므로, 당연히 가장 강력한 특수이익은 사적인 해결을 원한다" 는 사실에 주목하여, "보상금의 액수와 보상 방식 등은, 개발 조합과 세입자들의 협의를 통해 결정되었어야 할 사항"이라는 내 주장을 검토한다.

내가 말한 대로 보상금 문제를 당사자간의 문제로 취급한다면, '용산구청의 수수방관'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며, 구경꾼을 더 확보하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했던 철거민들의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문단을 길게 인용해보자.

이 문제가 개발조합과 세입자들의 사적 협상을 통해 결정되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용산구청에 저런 강력한 비난과 책임을 묻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반대로 구청이 세입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사적 협상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빛을 잃게 된다. 사실 사적 협상에서 한 쪽의 협상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쪽만 잘 정의된 재산권을 갖고 있는데, 양 쪽의 협상력이 대등하다면 그게 신기한 일이 아닐까?


여기서 sonnet님은 두 가지 요소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구경꾼'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용산 철거민의 보상금 문제 중 실질적인 부분, 즉 권리금과 기타등등 금전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과, 용산구청 또는 전철연처럼 협상 당사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실제 협상 과정에 개입하고 영향을 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법정 객석에 앉아있는 방청객과도 같고, 후자는 원고나 피고의 옆에 앉아있는 변호사와 마찬가지이다. 내 글 "당신들의 인민재판" 의 취지는 '거기, 방청석 좀 조용히 합시다'였지, '변호사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가 아닌 것이다. 가령 "철거 문제 자체를 고민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나, "정작 문제가 터지고 나면 이런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신문 몇 줄 찾아 읽은 고시생들이 '전문 지식'을 활용하여 인민재판을 주도하기에 바쁜 듯하다"는 비아냥을 통해 의도한 바도 그런 것이었다.

'인터넷 사용자들은 '팩트'를 운운하는 인민재판을 멈추어라'는 주장은, '용산구청은 세입자들의 편에서 개입했어야 한다'는 주장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 하나는 구경꾼들의 입장과 관련된 정치적 발화인 반면, 다른 하나는 공권력의 작동에 대한 시민적 발화에 더욱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지점에서 이상적인 '구경꾼 만들기'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샤츠슈나이더의 말처럼, "약한 쪽은 구경꾼을 많이 동원할 경우에만 커다란 잠재적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입장을 취해야 가장 이상적인 구경꾼을 구성할 수 있을까?

 
경찰의 공권력 남용, 공공의 선
 
관심 있음
관심 없음
갈등의 축
사적 이익 배분 및 조정 문제
관심 있음
A: 적극 참여자
B: 오지라퍼
‘진실 게임’
관심 없음
C: ‘민주 시민’
D: 방관자
‘꼭 투표하세요’
 
갈등의 축
진짜 진보 논쟁
그 글쎄...
 


위 표를 통해 1월 20일 화재 발생 이후 이 사건의 구경꾼들을 분류해보도록 하자. 경찰의 공권력 남용, 또는 공공의 선, 넓게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 표현 등에 관심이 있는지 여부를 가로축에 놓는다. 철거민들이 받은 보상액의 크기, 전철연의 폭력성, 용산구청 공무원들의 짜증 등에 대한 관심 여부를 세로축에 놓는다. 이 경우 우리는 2*2짜리 표를 하나 얻을 수 있다.

두 가지 사항에 모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A에 해당한다. 우리는 그들을 '적극 참여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건 열성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한편 경찰이 컨테이너로 망루를 흔들어서 불이 났건 말건,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3000만원이면 충분한 것 아닌가', '권리금이란 무엇인가?' '적절한 보상 액수가 얼마가 되어야 하는가?'등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B에 속한다. 나는 그들을 편의상 '오지라퍼'라고 부르겠다.

반면 철거 대상 지역의 세입자들이 받았어야 할 보상금의 액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고, 경찰이 사람 잡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좌파'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이 가능하다. 철거 문제는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며, 이명박 정부만 사람 잡은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 말이다. 그 모든 의미를 종합하여, C에 속하는 사람들을 '민주 시민'이라고 해보자.

마지막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아침에 용산역 부근 지나갈 때 차가 막혀서 짜증이 났을 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D라고 하고, 그냥 '방관자'라고 이름을 붙여 놓는다.

이 경우 조선일보를 포함하여 '팩트'를 유포하는 신문들이 구성하고자 하는 구경꾼은 B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신문들은 경찰이 과잉진압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거론되지 않거나, 거론되더라도 철거민의 보상금이 애초부터 넉넉했는데 더 달라고 지랄하다가 죽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sonnet 님의 표현대로 "해산 작전이 실패하고 사람이 여럿 죽게 되어 갈등의 전면적인 사회화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러므로 구경꾼의 수를 그냥 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조선일보는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구경꾼인 B를 형성하는데 주력할 것이다(실제로도 그랬다).

'당신들이 '팩트'에 집착하는 것은 인민재판과 다를 바 없다, 공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주목하라'는 주장은,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A에 속하는 구경꾼과 B에 속하는 구경꾼 사이에서 벌어지던 논쟁, 이른바 '진실 게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구경꾼에 속하지 않고 있었던 이들을 추가적으로 C로 포섭할 수 있는 가능성도 점쳐볼 수 있다.

내 포스트가 올라온 후, 기존에는 다소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던 블로거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바로, 그들이 C의 구경꾼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의 축이 계속 A-B에 머물러 있다면, 공권력 남용 문제에 관심이 있다 해도 그들은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 B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꾸 다른 '팩트'를 들이대며 '진실 게임'을 하자고 나서기 때문이다.

'전철연, 과연 6000만원으로 무엇을 했는가?' 이따위 질문이 날아오면 '6, 70먹은 노인들이 골프공 좀 던진다고 그렇게 나와야 하냐?'라는 대답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아마 B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철연이 투석전 훈련도 시켰다'느니 운운할테고, 논쟁은 바로 이 수준에서 벌어진다. 이건 참 피곤한 일이다.

sonnet님이 인용하는 맥락을 보면, 샤츠슈나이더는 '구경꾼이 더 많이 참여할수록 사회적 약자의 협상력 강화에는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비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A-B의 갈등 구조, 즉 '진실 게임'은 본질상 쉽사리 식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B에 속하는 구경꾼들은 잠깐 머릿수를 불려주는 것 같지만 금방 분위기를 깨뜨리고 판을 망가뜨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런 식의 '사회적 관심'이 냄비처럼 끓어올랐다가 식어버린 사례를 수도 없이 알고 있다.

반면 B에 속하는 구경꾼을 해산하고 C에 새로운 구경꾼을 집어넣는다면, A-C에서 갈등의 축이 형성될 수 있다. A에 속하는 이들은 C에 속하는 '민주 시민'들을 바라보며, '너희들은 이명박을 까기 위해 철거민 문제에 관심있는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아냥거린다. 반면 C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명박이 싫지만 꼭 그래서만은 아니고...'라고 말하다가, '민노당 진보신당 이래서 안 돼, 쯧쯧'하고 혀를 찰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수없이 접해온 '진짜 진보', 또는 '개혁세력'에 대한 논쟁의 틀과 일치한다.

재미삼아 우리는 C-D의 갈등축, 그리고 B-D의 갈등축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C에 속하는 '민주 시민'은 D에 속하는 '방관자'에게 '그러니까 다음번 선거는 잘 하자, 그런데 당신은 XXX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운을 띄울 것이다. 노골적으로 한 후보만 지지하면 너무 속이 뻔히 보이니까 '꼭 투표하자 씨발' 이러면서 문장을 마무리지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B-D의 갈등축은, 과연 그게 생기긴 할지 잘 모르겠다. D에 속하는 사람이 B를 보고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고 하지 않을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미 용산 철거민 문제가 사회화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볼 때, A-B의 갈등 구조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해산하고, 대신 A-C로 이루어진 구경꾼 집단을 구성하는 것이 철거 피해자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A나 C에 속하는 사람들이 '철거민 편'에 속할 가능성은, B나 D에 속하는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높다. 게다가 공권력과 공공성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내 문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점에서, 이후 구경꾼을 더 끌어들이는데에도 훨씬 유리하다.

내가 어떤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그 문제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은 분명히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 A-C의 갈등 라인으로 구경꾼을 형성하고자 한다면, 후자의 가능성을 모든 이에게 개방함으로써 한층 폭넓은 구경꾼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길게 표를 그리면서 설명하였지만, 이것은 간단하게 보자면 한없이 간단한 문제이다. 철거 문제에 대한 '본질적 해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일단 이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라면, 경찰의 폭력에 분노하고 용산구청의 '생떼거리' 간판에 치를 떠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더 확고한 구경꾼으로 붙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B에 속하는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과연 손실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은 갈등의 범위와 관련되어 있다 … 갈등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싸움에 구경꾼을 끌어들이거나 배제하는 데 성공하느냐에 따라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방향으로 논점을 정리하는 것을 "갈등을 사회화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왔던 세입자들의 주된 관심사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보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다. 시위 참가자들이 구속, 연행되는 지금도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더 많은 보상금의 확보'에 머물러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에게 유리한 구경꾼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더욱 사회화해야 하고, 또 그 갈등의 축은 공권력의 집행을 중심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

2009-01-29

어떤 일

25일 밤부터 가을이가 화장실에 너무 자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26일, 27일 이틀동안 엄청난 양의 모래를 방바닥에 흩뿌리며, 5분에 한 번 꼴로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찔끔 소변을 보고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 혹시나 싶어서 수요일 오전에 병원에 데려갔다. 역시나 방광에 결석이 생겨 있었다.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팔 수 있는 사료를 먹이고 있자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과 달리 고양이는 말을 할 수 없다(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소리를 통해 표현할 수 있는 범위가 개에 비해 현격하게 좁기 때문에, 아파도 제대로 낑낑거리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만 하기 일쑤다. 가을이도 그랬다. 방광이 쓰라렸을 텐데, 칭얼거리지 않고 꾹 참고 있었다.

병원에 갔다 오고 나니 사태가 호전되고 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어제 아침에 비해 훨씬 화장실에 덜 들락거렸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다행이다.

2009-01-23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는가(경향신문, 2009년 1월 22일)


1월 20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인해 용산구 철거민 여섯 명이 사망했다. 이런 세상이다. 20대가 '왜' 보수화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그 참사를 겪고 난 다음에도, 용산구청은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적힌 현판을 떼지 않고 있다.[1] 돈 없으면 구청에서 민원을 해도 '생떼거리' 취급을 당하고,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한겨울에 철거당하고 빈 건물로 내몰린 다음 목숨을 잃게 된다. 순우리말 '생떼거리'의 어감이 이토록 징그러울 수가 없다.

20대 문제에 대해 올바른 답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질문을 고쳐 물어야 한다. 20대는 '어떻게' 보수화되고 있는가? 지금의 20대는 투쟁의 주역에서 '투정'의 주역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용한 것이 바로 현 정부의 대선 캠프였다. 부산 사는 청년 백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영민씨. 그는 이명박 후보 지지 연설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직장을 잃었고, 어머니가 시장 바닥에서 반찬을 파는 것으로 가정의 생계가 간신히 유지되고 있다며 울먹였다.[2]

이명박 후보에 대한 이영민씨의 지지 연설은, 청년 실업 문제가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포괄적으로 드러내준다. 그는 "어서 정권이 바뀌어서, 누가 어머니께 '당신 아들 어디 다니냐'고 물었을 때 어머니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3]는 소망을 피력했다.

대기업 또는 공기업에 입사하거나, 공무원이 되지 않는 한 이 소원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컨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소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다. 반면 '삼성전자'나 '조선일보'에 다닌다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당당하고 말고는 개인의 태도 문제겠지만, 사회적인 대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연봉으로 환산해보면 1125만원이 나온다. 종업원 300인 미만의 536개 중소기업에 들어간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초봉 평균은 1977만원이지만, 500대 기업에 들어갈 경우 평균 연봉은 3102만원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이다.[4] 처음에는 1125만원으로 시작하지만 소득 격차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주상복합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는 사람과, 삶의 터전을 잃기 싫어서 '생떼거리'를 부리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의 차이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그 '번듯한 직장'에서 사람을 뽑는 방식이다. 공직자를 선발하는 과거제도의 역사는 고려 광종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조선왕조 600년을 거쳐 일제시대를 통해 현대 한국에까지 고스란히 승계되고 있다. 사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대기업은 중소기업에서 유능한 경력사원을 선발하는 것보다는, 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뽑는 것을 선호한다. 이 시험들의 공통점은 응시자의 이력서를 꼼꼼하게 본다는 것과, 최후의 관문인 면접시험이 있다는 것이다.

20대는 바로 그 면접관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도록 길들여지고 있다. 사법시험의 경우 올해는 10명, 작년에는 11명이 심층 면접에서 떨어졌다.[5]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기 검열'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체포되어 경찰 기록이 남기라도 한다면, 분명히 불이익이 돌아올 테니까. 대기업 입사시험을 준비하고 있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재벌 그룹들은 나름의 인성 평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금산분리 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같은 질문 앞에서, 젊은이는 소신대로 답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회사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해야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통박'을 굴려야만 한다.[6]

20대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에서 적절하지 않다. 20대는 비굴해지고 있다. 한 손에는 월급 통장을, 한 손에는 물대포와 곤봉을 들고, 우리 사회는 20대를 '꺼삐딴 리'로 만들어가고 있다.





1. 안수찬.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민원인은 생떼쟁이?." 한겨레21, November 28, 2008.
2. 3. 변진경. "'청년 백수' MB맨 어디서 뭐하나 ." 시사IN, January 12, 2009.
4. "대졸자 초임 양극화 심화…대기업이 중소기업 1.5배 | 관점이 있는 뉴스 -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15115453§ion=02.
5. 서동욱. "사법시험 3차 심층면접, 10명 탈락." 머니투데이, November 25, 2008.
6. 송형석. "[취업! 길은 있다] 인성·적성검사‥회사와 궁합맞는 인재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한국경제, September 16, 2008.

2009-01-20

서울 속 팔레스타인


1월 20일 새벽, 용산 현장 (서울=연합뉴스)


이스라엘은 탱크와 헬리콥터와 최신식 무기를 가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힘을 등에 업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발사하는 로켓을 단순한 '폭력'으로 치부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방패와 물대포와 최루탄과 몽둥이를 가지고 있으며, 최후의 경우 총을 쏠 수도 있다. 경찰은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는 집단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 없듯이, 경찰도 시민을 상대로 싸워서 질 수가 없다.

화염병을 썼으니까 죽어도 싸다는 사람들, 정말 역겹다. 이스라엘 쪽으로 로켓을 쏘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어도 좋다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습격은 미국의 정권 교체와 맞물려 책임 추궁이 늦어지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경찰청장 교체기에 벌어진 이 사건의 책임 추궁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

폭력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비폭력을 외치는 사람들이 현존하는 폭력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들의 비폭력에 반대한다.

2009-01-18

소액금융, 한국에서 성공하기 힘든 이유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에 트랙백

그라민 은행의 성공 사례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국내에서도 소액금융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그 각각은 그다지 큰 재미를 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원인은 간단하다.

소액대출은 그 성질상 신용대출일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신체포기각서라도 받지 않는 한) 채무액에 상당하는 담보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대출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그라민 은행이 취한 것 같은 구조는 현재 한국 및 기존 개발국가에서 성립하기 어렵다.

그라민 은행의 신용대출 방식은, 굳이 말하자면 '오가작통법'에 의거하고 있다. 다섯 명의 대출자가 서로 연대보증을 서주는 방식이다. sonnet님이 요약한 내용에 따르면,

그라민은행은 기본적으로 대출 희망자가 나타나면 다섯 명의 대출희망자를 모아 그룹을 조직할 것을 요구한다. 일단 그룹이 결성되면 이들에게 그라민 은행과 그들이 받는 대출에 대해 교육시킨다. 그리고 그룹원 다섯 명을 개별적으로 면접하고 구두 시험을 통해 이들이 내용을 숙지했는지를 평가하여 합격했을 경우에만 대출을 진행한다. 이 과정에서 은행 측은 개개인의 가난 극복과 자립에 대한 의지를 면밀히 관찰한다. 대출 과정 또한 독특하다. 그라민 은행은 일단 다섯 명 중 한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어 두 사람에게 융자를 준다. 6주 동안 원리금 상환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이 확인되면 마지막 두 명에게 융자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채무불이행이 발생하면 그룹 멤버 전원에 대해 대출이 중단된다.
"두 은행 이야기: 정보와 인센티브 관점에서"(a quarantine station, 2009년 1월 18일)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그룹은 십중팔구 같은 마을에 살거나, 친척이거나,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혈족의 유대감, 지역 공동체 거주민들끼리의 유대감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대 한국에서 위와 같은 구조는 성립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친척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까운 거리에 살거나 하지 않는다. '친척에게 연대보증 서주었다가 쫄딱 망하는' 괴담이 횡횡하고 있는 사회가 현대 한국 사회인 것도 사실이다. 친척이란 한 해에 두 번, 설날과 추석에 만나는 사람들이지, 경제적인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가 아니다.

덧붙여 한국의 산업 구조가 이미 고도화되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유누스가 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가 지금 내 손에 없어서 정확한 인용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책에 등장하는 성공 사례들은 대부분, 한 마리의 암소를 사서 잘 기르거나, 몇 마리의 암탉을 사서 알을 뽑아내거나, 또띠아 포장마차를 열어서 장사를 하는 등, 소농을 포함한 소액 사업들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이미 발전한 산업사회의 경우, 그런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돈을 빌리는 것은 굳이 친척들의 도움과 감시를 필요로 할만한 일이 아니다. 가령 붕어빵틀을 빌리는 것. 수십만원이면 가능하고 그것은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인보증을 요하지 않는 신용대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미 '마이크로 크레딧'은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은 규모의 사업을 해서 그 돈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산업이 고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사업의 수익성은 날로 약화되고 있다. 그것은 자본 투입으로부터 회수까지의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동네 구멍가게라도 하나 차리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한데, 그것은 소액금융에서 염두에 두는 그런 작은 빚의 범주를 넘어선다. 사업을 할만한 돈을 빌리는 것은 이미 소액금융의 범주를 넘어서는 액수에 해당한다.

최근 시작된 '인터넷 대안금융'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것은 확실해진다. 이 기사("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금융'이 떴다", 한겨레)에서 인용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소액금융은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외면하는 이들에게 급한 돈을 빌려주는 ‘현대판 품앗이’"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 인용된 사례는 이런 것이다. 오빠의 수술비를 대야 하는데,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있어서 사채를 빌렸다. 그 사람이 사채빚을 갚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신이 올린 사연을 보고 평가할 다수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돈을 빌린다.
김씨는 이런 사연과 함께 가계 수입·지출 내역, 자신이 부담할 이자율과 몇 달에 나누어 갚을 것인지를 올렸다.

글을 본 회원들은 김씨가 돈을 제대로 갚을지를 두고 사이버 투표를 벌이고, 게시판을 통해 당사자에게 질문을 하고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회원 38명이 2만~4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빌려줬다. 이 사이트에선 한 사람이 보통 100만~200만원을 빌리지만,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30~50명이다. 돈을 갚을 능력이나 의지가 의심돼 대출자들을 못 모으면 빌릴 수 없다. 김씨가 다달이 내는 원리금은 사이트를 통해 대출자들에게 분배된다.
"인터넷 대안금융 ‘품앗이 대출’ 떴다", 한겨레

기사에서 인용된 것 같은 사례에서, 대출자가 그 돈을 갚을 수 있을만한 여력이 있는 경우, 혹은 고정적인 수입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라민 은행이 애초에 염두에 두었던 사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금융은 '급전을 막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것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종합해보면, 한국에서 방글라데시와 같은 그런 소액금융은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한국 뿐 아니라 여타 산업적으로 이미 발전한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것은 지나친 고액의 부채를 갚기 위한 소액금융인데, 그것 또한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성공적인 소액금융의 구조는, 전통적인 사회 구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2009-01-16

누가 타인의 비극을 평가하는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간인 피해와 그 참상에 대해서는, 이 한 장의 그래프면 충분할 것 같다.


출처: “Is Israel guilty of war crimes in Gaza?: But is it a crime?,” The Economist, January 2009, http://www.economist.com/world/mideast-africa/displaystory.cfm?story_id=12957301&fsrc=rss.

UN 학교에 민간인들이 모여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몰랐을 리가 없고, 또 그곳을 '실수로' 공격했을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이스라엘을 ICC로 끌고갈 수도 없고 설령 기소한다 해도 유죄를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정말이지, 끔찍한 범죄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유태인들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가 과연 그렇게까지 엄청난 비극인가?'라는 식의 비아냥 내지는 회의주의가 없잖아 있는 듯하다. 나는 그런 시각에 절대 찬성할 수 없다.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만행을 고발하는 것과, 그들이 국가 건설 이전에 당했던 비극을 폄하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가령 허지웅님의 이 의견을 살펴보자.

또 2차 세계대전 이야기다. 또 유태인 학살 이야기다. 또 유태인을 지켜낸 영웅 이야기다. 어휴 지겨워. 유태인 학살이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자 기억되어야만 할 기록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세계사의 그 숱하게 많은 학살을 다 외면하고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은 볼수록 지루하고 의도가 짜증스럽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분쟁, 그리고 미국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다.
"디파이언스, 살아남는다는 사실의 숭고함", ozzyz review, 2009년 1월 16일.


'중요한 사건', '기억되어야만 할 일' 정도의 수식어를 붙여줬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온주의자들은, 본디 800만명 정도의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겪으며 (최대치로 추산해볼 때) 600만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은 예상만큼 쉽게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홀로코스트로 인해' 생긴 나라가 아니라, '홀로코스트에도 불구하고' 탄생한 나라인 것이다(참고: "이스라엘을 다시 생각한다",《Foreign Policy》, 2008년 5/6월호). 유태인 자본이 영화계에 손을 뻗치고 있고, 그래서 그렇게 지겹게 홀로코스트니 유태인이니 나치의 잔혹함이니 하는 이야기가 반복된다는 설명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말 끔찍한 일을 겪고 살아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비극을 논함에 있어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인간적인 품위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유독 유태인의 희생만 숭고한 듯 꾸준히 복기하는 할리우드의 도덕률"이라는 표현의 이면에 담긴 정서를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너만 슬퍼? 세상에 당한 사람이 너만 있는 줄 알아?'라고 핏대를 세우는 그런 광경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피해자 정서'라는 것이 있고, 한국인들의 징그러운 질투심은 그 피해자 정서에마저도 적용된다. 나도 피해자인데, 나도 당했는데, 누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힘들다, 괴롭다, 당했다'라고 토로하는 광경을 보면 곱게 넘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기어이 한 마디를 덧붙여야 직성이 풀린다. '너만 괴로운 거 아니야. 유난 떨지 마.'

홀로코스트를 보며 미국 이주민들의 인디언 학살이라거나, 한국전쟁 당시에 자행된 양민 학살, 또는 그 외 세계사의 숱한 학살 사례들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불편해진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으로 인류사에 만연한 학살을 보며 괴로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즐겨 보는 헐리우드 영화에, 유태인'만' 피해자인양 묘사되는 것을 마땅치 않아 하고 있을 따름인 것 같다. 게다가 그 유태인들이 세운 인공국가 이스라엘은 세계 최고의 학살 주범이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은 좌파적, 진보적, 도덕적이며 심지어 쿨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을 비판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평가'하려고 들고, 다른 비극과의 경중을 논하려 드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상 벌어진 학살들은 각각의 이유와 전개와 논리와 수수께끼를 포함하고 있다. 일부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에 대해 지대하다 해서, 하나의 가치가 다른 것에 비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저평가당하는 것도 아니다. 도덕적인 관심과 학문적, 또는 예술적인 관심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인해 가자 지구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성과 어린이 사망자 수의 그래프를 인용했다. 나는 현대 국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희생자 정서'를 드러내며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다른 것에 비해 과도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둥, 유태인이라서 그렇게 관심받는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이스라엘의 만행을 비판하고 싶거든, 스스로 먼저 인간의 기본을 지켜야 한다. 가해자로 돌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서 또한 결국은 '피해자 정서'에 불과하다. 자신들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는 이유는, 반유대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범죄 단체를 소탕하다가 민간인의 피해가 생기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비일비재했지만, 하필이면 자신들이 유태인이기 때문에 그게 도드라져 보인다, 이런 논리를 구사한다.

유태인이라서 홀로코스트가 더 주목받는다는 논리나, 유태인이라서 가자 지구 폭격이 더 비난받는다는 논리나, 둘 다 인종주의이면서 동시에 발화 주체 각각의 피해자 정서를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다. 한국인들은 (사실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역사상의 학살을 빌미로 유태인들이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저울질한다. 한편 유태인들은 (다소 극화되어 있는) 유태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토대로,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가자 지구의 비극을 가볍게 넘기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누가 감히 타인의 비극을 그런 식으로 저울질한단 말인가?

2009-01-15

하이데거, 스티븐 킹, 앙드레 고르

스티븐 킹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실은 등장한다고들 하는), 외딴 길에서 어두운 밤 자동차가 고장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는 그 순간 문명으로부터 고립되면서, '초자연'의 힘 앞에 노출된다. 그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스멀스멀 다가오고, 죽을 만큼의 공포를 느끼면서 죽거나 그냥 죽거나 죽도록 고생하고 간신히 살아나거나 하게 된다.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는 '내가 타고 있는 한 대의 차'가 멈추면서 공포가 시작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타고 있는 모든 차'가 멈췄을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것을 만들고 부품 공장에서 일하고 수리하고 타이어를 갈아주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오가며 일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동차는 '도구' 중 하나다. 우리가 이동을 위해 사용하는 운송 수단이므로, 그것은 당연한 말이다. 즉 우리는 자동차를 이동"하기 위해" 도구로 이용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며 그것을 인식하는 것을 '둘러봄'이라고 규정한다. 우리는 도구를, 곤충학자가 나비를 관찰하듯 '바라보지' 않는다. 도구 그 자체, 그리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우리의 생활환경을 '둘러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리 손안에 들어와 있는 도구, 그 존재를 의심해본 적도 없는 도구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전화기는 발명되어 있었고, 자동차도 발명되어 있었다. 그것이 전파된 시점은 각기 다르겠지만, 아무튼 '신기한' 물건은 아니다. 자동차튼 타고 다니는 도구, 전화기는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도구, 기타등등.

문제는 그 도구가 사용 불가능해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이다. 가령 망치를 들었는데 못이 없는 경우, 우리는 비로소 손 안에 들어있는 망치의 존재를 살펴보게 된다. 망치는 '있다', 하지만 못은 '없다'. "이러한 사용불가능성의 발견에서 도구는 눈에 띄게 된다."(106쪽) 자동차를 뽑긴 했는데 같이 타고 다니면서 으스댈 여자친구가 없다고 해보자. 자동차라는 도구는 아주 눈에 잘 띄게 된다.

그렇다면 도구가 고장나서 원래의 사용관계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 때, 비로소 '망치로 못을 박아야 했던 집', 즉 세계를 인식한다.

하 나의 도구가 사용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하기 위한'이 '그것을 위한'을 가리키는 그 구성적 지시가 방해를 받고 있음이 놓여 있다. 그런데 지시의 방해 속에서--어디에 사용할 수 없음에서--지시가 명백해진다. . . . 지시가 그때마다의 '그것을 위한'을 가리킴을 일깨워주는 이러한 둘러봄과 더불어 이 '그것을 위한' 자체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작업연관이, 전체 "작업장"이, 그것도 그 안에서 배려함이 언제나 이미 체류하고 있는 그곳으로서 시야에 들어온다. 도구연관이 그전에 한번도 보아진 적 없는 전체로서가 아니라, 둘러봄에서 항시 애초부터 이미 보아진 전체로서 빛나게 된다. 이러한 전체와 더불어 세계가 자신을 알려온다.(108-109쪽)


자동차에 대한 애초의 논의로 돌아와보자. 자동차가 고장나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막대한 산업의 복합체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의 3장에서 인용해보자.

자동차의 역설은 이렇다. 겉보기에 자동차는 그 주인에게 무한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자동차 덕분에 차 주인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기차와 같거나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자율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의존이 도사리고 있다. 말이나 수레나 자전거를 탄 사람과 달리 자동차를 탄 사람은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리고 조금만 파손이 되어도 수리를 위해 카뷰레터(기화기), 윤활장치, 조명, 표준 부속품의 교환, 이런 분야들의 전문가와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차 주인의 자율성은 실상 이렇게 근본적인 의존을 내포하는 것이다.
80쪽,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


말이 죽거나 자전거 바퀴가 완전히 휘어버리면 마찬가지 아니냐, 이런 반박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저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자전거나 동물과 달리 자동차는 그 뒤에 엄청난 양의 '산업'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차가 고장나버리면, 자연 혹은 초자연속에 버려진 스티븐 킹의 주인공은 불현듯 '인간 문명' 자체를 실감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문명으로부터 동떨어진, 동시에 스스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법칙 속에 내던져진 자신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공포의 시작이다.

문제는 그러한 공포가, 앞서 말한 것처럼,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데 있다.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미리 대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우리는 사라져버린 '운송 수단'으로 인해,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 환경' 자체의 존재를 뼈저리게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급작스레 '삶'이 파괴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이데거의 전체적인 철학적 구도 안에서 '환경 보호'는 아예 성립할 수도 없다. 앞 포스트를 쓰다가 앙드레 고르의 자동차에 대한 논의를 인용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이데거의 도구성 논의가 떠올라서 짤막하게 남겨 보았다. 이것은 거친 스케치에 가까운 논의이므로, 혹시라도 '하이데거가 환경운동 했다'는 말로 이해하시진 마시길.


존재와 시간 - 10점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까치글방

추운 겨울,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1. 흔히들 '환경'에 대한 논의라고 한다면, 당장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 혹은 정치 경제적으로 어설픈 지식 하에 기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환경'문제의 범주를 조금 더 넓혀서, 현재 사용하는 에너지와 그 대체 에너지에 대한 것까지 포괄한다면(그러면 이미 환경에만 국한될 것은 아니겠지만), 대단히 실감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파이프라인이 막혀서 나무를 떼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의 사진 중 하나를 골라봤다. 크로아티아, 2009년 1월 중순. 이미지 소유권은 Getty에 있고, 원본 주소는 여기.

그 래서 예상 외로 중국은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수단 같은 나라의 민주주의를 다 망가뜨려가며 석유를 독점 수입하고자 하는 것과 별개로, 에너지 문제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치는 나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이다.


2. 앙드레 고르의 『에콜로지카』(생각의 나무, 2008)를 다 읽었다. 좋은 책이다. 특히 3장, 「자동차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착착 와닿는다. 마르크시즘 이론에 대해 논하는 2장은 별로 재미가 없는데, 이건 내가 그런 '이론'적 토론에 큰 흥미가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3장은 정말 최고다.

자동차의 역설은 이렇다. 겉보기에 자동차는 그 주인에게 무한한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자동차 덕분에 차 주인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으로, 기차와 같거나 더 빠른 속력으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자율성의 이면에는 근본적인 의존이 도사리고 있다. 말이나 수레나 자전거를 탄 사람과 달리 자동차를 탄 사람은 에너지 공급을 위해, 그리고 조금만 파손이 되어도 수리를 위해 카뷰레터(기화기), 윤활장치, 조명, 표준 부속품의 교환, 이런 분야들의 전문가와 상인들에게 의존하게 된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의 옛날 주인들과는 달리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의 관계가 아니라 오직 제3자만이 공급할 수 있는 수많은 유료 서비스와 산업제품들을 소비하고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요하게 된다. 겉으로 보이는 차 주인의 자율성은 실상 이렇게 근본적인 의존을 내포하는 것이다. (80쪽)

문명 속에서가 아니라, 문명의 요소가 '없음'을 실감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그 '산업문명'의 본질이 떠오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설명하기로 하자. 아무튼 이 책은 3장만으로도 구입할만한 가치가 있다.


3. 생태주의자들은 현실의 문제에 대해 둔감하고, 특히 실물경제에 어둡다는 식의 비판이 있어 왔다. 나는 생태주의자를 자처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을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 생태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드레 고르는, 오랜 세월 다양한 매체의 국제면과 경제면을 담당해온 전문 저널리스트로, 대단히 명민한 현실 인식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는 2005년에 세계가 부동산 거품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거품이 다른 거품으로 채워지지 않을 경우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올 것임을 예상했다.

로버트 브레너의 「새로운 붐인가, 새로운 거품인가」에서 인용된 로베르트 쿠르츠의 말이다. 쿠르츠는 자본주의의 변모와 자본주의의 현재 위기에 대한 최고의 비판이론가로서, 최근 저서 『세계자본』의 상당부분을 금융거품이 자본주의 존속을 위해 담당하고 있는 역할에 바치고 있다. 금융거품은 금융자산을 부풀려 형성된다. 쿠르츠의 표현을 따르자면, 금융거품은 "신기한 화폐제조기"이다. 새로운, 보다 커다란 거품이 형성되지 않는 한, 거품은 가라앉으면서 종국에는 연쇄파산을 불러오고야 만다. 이리하여 주식시장의 거품을 인터넷 거품이 이어갔다. 인터넷 거품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역사상 최대의 거품"인 부동산 거품이 이어가고 있다. 3년 동안, 이러한 거품으로 부동산 주가는 20조에서 60조 달러가 상승했다. 그 누구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거품이 클수록, 거품이 가라앉을 경우 발생할 금융시스템과 화폐시스템의 붕괴가 더욱 무시무시해질 것이다. 각주 43. 157-158쪽.

이 내용은 에콜로지카 5장에 수록되어 있다. 2007년 아내와 함께 자살한 그가, 살아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어떤 말을 했을지 궁금하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반드시 환경 문제나 생태주의가 아니어도,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다면 『에콜로지카』를 권하고 싶다.


에콜로지카 Ecologica - 10점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생각의나무

2009-01-11

어떤 마감 하나

대학원 수업 기말 레포트를 6시 30분쯤 다 써서 보냈다. 1월 10일 마감이었는데 11일 새벽에 완성을 했다. 나는 갑자기 조금 센티멘탈한 기분이 들어서, 연애시대 OST중 '보내지 못한 마음'을 찾아서 듣고, 너저분하게 필기된 노란 종이들을 정리한 다음, 바닥에 누워있는 가을이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지금도 가을이는 칸트의 철학적 신학 강의를 베고 누워 있다. 나도 이제 자야지.

2009-01-09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비교 및 평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말이 많지만, '팩트'를 보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 또한 그런 자료를 직접 접해보지는 못했는데, 마침 다음과 같은 요청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런 답변이 달렸다.



덕분에 나도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접속해 보았다. 통신비밀보호법과 관련하여 네 가지 개정안이 눈에 띄는데, 그 각각의 내용을 짚어보고 검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일단 문제가 되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작년 10월 30일 이한성의원등 12인에 의해 제안된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의안번호는 1801650이며, 클릭해보면 누구나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이 포스트에는 PDF 파일을 첨부하도록 한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한성의원등 12인 발의, 2008년 10월 30일)1801650.pdf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15조 2항이다. 일단 현재의 법안을 살펴보자.

제15조의2(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의무) ①전기통신사업자는 검사·사법경찰관 또는 정보수사기관의 장이 이 법에 따라 집행하는 통신제한조치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제공의 요청에 협조하여야 한다.

②제1항의 규정에 따라 통신제한조치의 집행을 위하여 전기통신사업자가 협조할 사항, 통신사실확인자료의 보관기간 그 밖에 전기통신사업자의 협조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개정안은 이렇게 생겼다.

제 15조의2(전기통신사업자등의 협조의무) ①전기통신사업자등은 ---------------------------------------------------------------------------------------------------------.

② 전화서비스를 제공하는 전기통신사업자, 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기통신사업자는 이 법에 따른 검사·사법경찰관 또는 정보수사기관의 장의 통신제한조치 집행에 필요한 장비·시설·기술 및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


말하자면 KTF와 SKT에 통진제한조치 집행에 필요한 장비 시설 기술 기능이 모두 구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법에서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 도청장치를 모두의 귀에 꽂아놔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필요에 의해 수사기관이 개입하여 그것을 설치하기 전에, 이미 개별 사업자가 그런 장비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법으로 정하겠다는 것인데, 이건 뭐...

이한성 의원등이 제안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과는 달리, 박영선의원등 7인이 제안한 개정안은 다른 모습을 띄고 있다. 제안일자는 11월 11일이며, 제안번호는 1801881이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박영선의원 등 7인 발의, 2008년 11월 11일)1801881.pdf

박영선의원의 개정 제안은, 전기통신 내용의 압수, 수색, 검증이 형사소송법에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는 그러한 법적 보호조치 없이 우리의 통신 내역이 수사기관에 넘어갈 수 있었는데, 그것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第3條(通信 및 對話秘密의 보호) ① ~ ③ (현행과 같음)
④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의 내용을 지득·채록하기 위한 압수·수색·검증은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한다.

제 9조의3(압수·수색·검증의 집행에 관한 통지) ① 검사는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하여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경우 그 사건에 관하여 공소를 제기하거나 공소의 제기 또는 입건을 하지 아니하는 처분(기소중지결정을 제외한다)을 한 때에는 그 처분을 한 날부터 30일 이내에 그 대상이 된 전기통신의 송신자 및 수신자에게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② 사법경찰관은 송·수신이 완료된 전기통신에 대하여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경우 그 사건에 관하여 검사로부터 공소를 제기하거나 제기하지 아니하는 처분의 통보를 받거나 내사사건에 관하여 입건하지 아니하는 처분을 한 때에는 그 날부터 30일 이내에 그 대상이 된 전기통신의 송신자 및 수신자에게 압수·수색·검증을 집행한 사실을 서면으로 통지하여야 한다.


이한성의원의 개정안에 반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박영선의원의 개정안의 취지에 호응하고 그것에 힘을 실어주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최문순의원 등이 제안한 세 번째 개정안의 내용은, 말하자면 어떤 수사기관이 우리의 ID 정보 등을 열람했을 때 그 사실이 우리에게 1달 내에 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다. 그에 대한 규정은 현재 전기통신사업법에 규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통신비밀보호법으로 옮겨 법적 보호를 강화하고자 하는 취지가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작년 마지막날 발의된 박민식의원 외 11인의 통신비밀보호법 일부개정안은, 불법감청설비탐지업의 등록 취소에 대한 규정 사항을 대통령령이 아닌 법률에 규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적용 대상이 넓은 법 개정안은 아니다.

이 비교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인 것 같다. 첫째, 언론에서 문제로 삼는 법 개정안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국회 의안정보시스템(http://likms.assembly.go.kr/bill/jsp/main.jsp)에 접속하면 된다. 둘째, 현재 상정된 네 개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중 크게 문제가 될만한 것은 첫 번째 것이고, 거기에는 통신사업자가 통신제한조치 집행에 필요한 장비를 선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셋째,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작은 법 개정안들이 국회 내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특히 세 번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나는 민주당의 '중립적'인, '중도적'인 태도를 대단히 경멸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유의미한 원내 입법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이번 경우에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통신비밀보호법이 개정되는 것을 막으면서, 수사기관이 통신사업자에게서 얻은 정보를 사용할 때 형사소송법의 제약을 받도록 법조문으로 못박아두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박영선의원과 그 외 7인을 지지한다.

Think Again: 미네르바 현상

'미네르바'로 추정되는 네티즌이 1월 8일 긴급체포되었다. 그의 정체를 놓고 대한민국 1% 상류층, 은퇴한 50대 증권사 애널리스트, 심지어는 'C급 경제학자' 우석훈까지 거론되었지만, 검찰은 그가 갓 서른살이 되었으며 직업을 가지지 못한 청년이라고 발표했다. 그를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 스승'이라고 추켜세우던 경제학 교수가 있는가 하면, 자신은 진작부터 미네르바의 빈약한 지식을 간파했다고 우쭐거리는 네티즌도 있다. '다중지성'의 부작용을 중화시킬 수 있는 지성계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은 미네르바의 발생과 긴급체포에서 공안정국의 기운을 감지한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저지하는 것이다.



* 미네르바의 체포는 불법이다

아니다. 적어도 '허위사실유포'에 대해서만큼은 합법적이다.
미네르바는 자신이 정부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알고 있다고 적시했고, 그것을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려 놓았다. 허위 내용을 인터넷에 유포한 혐의로 긴급체포했다는 김수남 서울중앙지검 3차장의 말을 통해 유추해볼 때, 검찰은 형법 제314조(업무방해)의 2를 적용하여 그를 기소할 예정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조문에 따르면 "[컴퓨터등] 정보처리장치에 허위의 정보 또는 부정한 명령을 입력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정보처리에 장애를 발생하게 하여 사람의 업무를 방해한 자도 제1항의 형[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과 같다"고 규정되어 있다.

미 네르바가 12월 29일에 게시판에 올린 "(정부가) 주요 7대 금융 기관 및 수출입 관련 주요 기업에게 오늘 오후 2시30분 이후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라는 취지의 글은, 안타깝게도 위 법에서 규정한 '허위의 정보를 입력'하는 요건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긴급체포는 지나치다는 평가와는 별개로, 그가 명백히 범법을 저질렀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추가: 검찰은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을 적용하여 미네르바를 기소했다하 겠다고 발표했다. 그 법에 따르면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公然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업무방해를 적용할 것이라는 내 예상은 틀렸다. 하지만 전기통신기본법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이후의 논지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지적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 미네르바가 허위사실유포죄라면 이명박도 체포해야 한다.

불가능하다. 이명박은 희망사항을 말했을 뿐이다.
미네르바를 체포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던 검찰이 그를 잡아넣지 못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경제에 대한 예측이나 희망사항의 표현 등은 허위사실유포죄에서 말하는 '사실'에 해당하지 않는다. 미네르바는 경제를 예측했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 아니라, '정부가 주요 금융 기관에 달러 매수를 금지하라는 공문을 보냈다'라는 허위사실을 유포했기 때문에 체포된 것이다.

'주가 3000 간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은 허위사실유포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식이었다면 '주가가 반의 반토막 난다'고 말한 그 순간 미네르바를 체포했어야 한다. 실제로 그의 신병을 파악하고 체포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허위사실을 유포하지 않았다면 검찰은 미네르바를 체포할 수도 없었다.

국가의 경제 정책에 관한 한, 이명박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는 경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가가 3000 간다고 했다가 못 갔다고 해서 그것을 '허위사실'의 유포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는 허황된 욕심을 국민들에게 불어넣기 위해 되는대로 숫자를 불렀을 뿐이다. 예측이나 정책 목표 설정 등은 그 죄의 구성요건에 포함되지 않는다.



* 미네르바의 체포는 형평성에 위배된다.

맞다. 하지만 '공평한 긴급체포'는 더 나쁘다.
미네르바의 체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긴급체포'라는 점에 있다. 12월 29일에서 1월 8일까지 고작 열흘이 흘렀다. 그의 신병을 확보하고 수사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급체포하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포함된 수사권의 남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형법 제314조의 2는 컴퓨터 해킹을 통한 전산망 침공 등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조문이다. 만약 미네르바가 해킹을 통해 국가의 기반 시설을 망가뜨리고 있었다면 긴급체포는 합당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고작 다음 아고라에 글을 써서 올리고 있을 뿐이다.

일단 용의자를 잡아넣은 다음 수사하면서 여죄를 밝히는 수사 관행이 이 지점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체포가 불법은 아니지만, '긴급체포'를 통해 사회적 이슈를 들쑤시고 밤샘수사를 벌이는 것은 옳지 않다. 검찰이 이 긴급체포를 통해 노리는 효과도 바로 그것이다. 네티즌들은 자신 또한 불현듯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체포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사실 그정도 허위사실유포를 놓고 긴급체포에 강제수사를 하는 것은 과도한 수사이며, 다른 허위사실유포자들과 비교해볼 때에도 형평성에 어긋날 소지가 크다. 하지만 노동부는 '정규직 해고를 쉽게 해서 비정규직과의 격차를 줄이겠다'고 방침을 세운 상태다. 미네르바에 대한 긴급체포에서 '형평성'을 요구하면, 검찰은 그 형평성을 위해 다른 네티즌들도 줄줄이 긴급체포하겠다고 나설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

미 네르바가 체포된 이유인 '허위사실유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미네르바와 같이 온갖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았던 인터넷 논객들, 가령 SDE 같은 사람은 체포되지 않았으며 체포되지 않을 것이다. 있지도 않은 공문을 꾸며낼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네티즌들도 마찬가지다. 공공연히 드러날 거짓말만 하지 않으면, 긴급체포될 일도 없다.



* 미네르바를 위해 촛불이 타오를 것이다.

어쩌면. 하지만 그리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12월 31일 종각 시위에 나가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한겨울의 시위는 매우 춥고 힘들다. 촛불을 들고 서 있어도 얼어붙은 손가락이 저려오는 추위를 이겨내고, 시민들이 미네르바를 위해 나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애초 에 미네르바가 인기를 얻게 된 이유를 고려해보면 이 비관적인 예측은 설득력을 얻게 된다. 네티즌들은 미네르바가 주가와 환율을 예측했기 때문에 추앙하기 시작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은 '돈'과 관련되어 있었고, 그 예언을 믿었더라면 지금처럼 큰 손해를 보지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그 경제적 이기심이 네티즌들의 숭배 뒤에 숨겨진 원동력이었다.

미네르바가 '대한민국 1%'가 아닌 '30대 무직'이라고 선언되어버린 지금, 그 네티즌들이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말보다 미네르바의 예측을 믿어야 할 이유 또한 사라져버렸다. 현재 인터넷을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미네르바와 미네르바 현상의 의의를 폄하하고 새삼스레 침을 뱉는 모습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패배자'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열한 모습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시민사회가 미네르바를 위해 싸우기 위한, 제대로 된 명분을 찾아내는 일 또한 쉽지만은 않다. 미네르바의 긴급체포가 과도한 수사권의 남용이라는 것 말고는 논점이 없기 때문이다. 미네르바가 '반 이명박'의 아이콘이긴 하다. 그러나 검찰은 충분한 언론 플레이를 펼치고 있고, 그것은 '무직'이라는 두 글자와 함께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다.

12월 31일의 시위에도 사람들은 그리 많이 나오지 않았다. 이 겨울에 '30대 무직 남성'을 위해 촛불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천여 명 정도가 모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흔히 말했던 것처럼 '미네르바를 체포하면 민란이 발생하는' 일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다.

특히 '그래서 어떤 주식을 사야 할지' 궁금해서 미네르바의 글을 읽고 그를 숭배하던 네티즌들 중 상당수는 이미 미네르바를 버렸거나 버리고 있다. 그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미네르바를 위해 싸워줄 사람들은, '형사소송법 개정'이나 '수사관행 개선' 같은 인기 없는 주제를 붙들고 묵묵히 늘어졌던 시민단체와 '운동권', 혹은 골수 촛불시민들 뿐이다.



* 미네르바는 이명박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명박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명박 정부가 미네르바에 대해 과민반응을 보인 사례들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공식선상에서 일개 네티즌의 이름을 거론했고, 그가 부정적이며 부정확한 예언을 내뱉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었다. 미네르바를 여러 네티즌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었다면 저런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미네르바는 이명박 정부의 과민반응에 의해 이명박 정부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갔다'. 미네르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내용들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고 엄청나지도 않았다. 몇 개의 패가 잘 맞아들어갔고, 그 앞에는 강만수 경제팀의 실책이 언제나 놓여 있었기 때문에 후광효과가 두드러져 보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미네르바에게 쏟아진 찬사들은 대체로 이명박에 대한, 혹은 제도권 경제학과 애널리스트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성균관대 김태동 교수가 미네르바를 자신이 "아는 한 가장 뛰어난 국민의 경제스승"이라고 칭송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으로 재직하던 4년 동안, 뛰어난 엘리트들도 경제 지표를 예측하지 못하는 현상을 목격해왔고, 미네르바의 예측력에 감탄했다.

다음 아고라의 네티즌들이 미네르바를 찬양하게 된 맥락도 마찬가지다. 가령 미래에셋의 박현주 사장이 턱없이 낙관적인 경제 전망만을 내놓고 있을 때, 그는 정 반대방향의 예측을 내놓았고 적중시켰다. 지금도 네티즌들 중 미네르바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그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과 비교한다.

하지만 미네르바가 상징하고 있던 '반 주류 경제학', '반 애널리스트', '반 이명박'은 하나의 구심점을 형성하기 어려운 주제들이었다. 그러한 정서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폭발력을 갖기 어려웠다. 미네르바에게 강의석같은 이슈메이커 자질이 있었더라면 그가 반 이명박의 상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 미네르바의 예언은 소 뒷걸음으로 쥐 잡기에 불과하다.

그럴지도. 하지만 댁보단 낫다.
현재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박 모씨가 진짜 미네르바라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미네르바의 예언은 '30대 무직 남성'이 독학으로 배운 경제학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미네르바의 일부 예측들의 정확도를 폄하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예측의 목표는 예측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김태동 교수의 발언이 말하는 바도 바로 그것이다. 다가올 경제 위기를 파악하고 예측하는 능력만으로는 이론적인 경제학자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이 현재의 경제학을 빅토리아 시대의 의학과 비교했던 것처럼, 경제학은 대단히 실용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그가 적중시킨 몇몇 예측의 가치는 그리 쉽사리 폄하될 수 없다.

미네르바같은 아마추어 경제학도가 아니라, 누리엘 루비니같은 경제학자가 국내 경기에 대한 예측을 내놓고 그것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장이 필요했다(내가 알기로 국내 언론 중 누리엘 루비니의 예언을 10월 이전에 진지하게 다룬 매체는 《Foreign Policy》 한국어판 뿐이다). 그것을 지성계라고 칭한다면, 국내의 지성계는 실종된 상황이다.

국내 에는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교환하고 서로 비판하는 지성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 현황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연구 또한 대단히 미비한 수준이었다. 미네르바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경제학의, 저널리즘의, 학계 전체의 빈곤을 깨달아야 한다. 뒷걸음질로 여러 마리의 쥐를 잡은 미네르바라는 소는, 그런 의미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하나의 증상이다.

이른바 '집단지성'을 찬양하는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이번에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인터넷이 옳으냐 애널리스트가 옳으냐 하는 이분법적 논쟁을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국내의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 자체가 드물었고, 설령 있었다고 해도 그들의 연구 성과를 대중적 여론으로 이끌어내어줄 저널리스트와 저널리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집단지성'의 과도한 열정과 어리석음을 식혀줄 '지성계'가 탄생하지 않는 한, 미네르바 현상은 다른 형태로 계속 반복되어 나타날 것이다.



* 미네르바의 체포는 네티즌 공안정국의 시작이다.

뒷감당이 더 중요하다.
미네르바의 체포가 아니라, 현재 한나라당이 추진하고 있는 법 개정이 더 중요한 문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행법상에서는 미네르바처럼 명백히 드러나버릴 거짓말을 하거나, 특정 연예인에 대한 악플을 주구장창 달아서 고소를 당하지 않는 한, 인터넷에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긴급체포되거나 할 일은 없다.

하지만 한나라당에서 추진하는 미디어법 개정안 중 '사이버모독죄'가 신설되고 친고죄 조항이 빠진다거나,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된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진다. 모든 휴대전화 통화 내역과 통화자 위치정보등이 1년 이상 보존되며, 통신사업자들은 감청장비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고, 인터넷 이용자들의 접속 기록도 보관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사를 위한 법이다.

미네르바의 체포를 통해 정부와 한나라당은 위 두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논점이 되어야 한다. '제2의 미네르바'를 막기 위해 사이버모욕죄와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드높일 그들에게 맞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의 체포가 아니라 그 뒤에 불어닥칠 후폭풍에 대비해야 한다.



- 이 글은 《Foreign Policy》의 코너 "Think Again"의 포멧을 빌어 작성되었습니다.

2009-01-08

아마추어 법이론가

누가 어디서 어떤 사이비(似而非) 합의를 보았건 간에 결단코 침해할 수 없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며 기본적 인권이며 사적 소유권이다. 이것에 대한 침해는 어떤 합의든 원천무효다.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법치주의의 접점이 있는 것이다.
정규재, "법은 사회적 합의라는 오해" (한국경제, 2008년 12월 29일)


하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에 따르면,
제119조

1.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2.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경제에 대한 규제와 조정"에는 당연히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제한이 들어간다.


또는, 토지수용법 제1조를 보자.
제1조 목적
이 법은 공익사업에 필요한 토지의 수용과 사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여 공공복리의 증진과 사유재산권과의 조절을 도모함으로써 국토의 합리적인 이용, 개발과 산업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71·1·19]


법에 대한 사이비(似而非) 논의들이 참 많다.

2009-01-04

번역 한 권, 저술 두 권, 그리고 석사논문

작년부터 큼지막한 일거리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총 네 개. 그 중 하나는 이미 거의 다 끝냈고, 세 개가 남았다. 번역할 책이 한 권, 써야할 책이 두 권 있다.

처음 번역한 책은 《아웃라이어》인데, 곧 인쇄에 들어갈 예정이다. 정말 잘 썼다. 저자가 워낙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터라, 여러 가지 일과 겹쳐서 진행하는 가운데 힘들긴 했어도 지루하거나 고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두 번째 번역은 훨씬 어려운 책이다. 내용 파악이 힘든 것은 아니지만, 복문이 많고 어려운 단어가 줄곧 사용되고 있다. 제목을 공개하기엔 다소 이르다.

번역을 하고 있다 보면 자기 책을 쓰고 싶어진다. 번역자는 한국어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지만 기왕 책임을 질 거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의 정확성이나 매끄러움이 아니라 내용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20대와 문화에 대한 책 한 권이 계약되어 있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단행본 작업을 논의중이다. 전자의 경우 가제까지 붙여놓은 상태지만, 역시 공개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철 들면서부터 나는 산문가, 영어로 말하자면 에세이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은 내 성향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단정지어버린 다음이었다. 몇 편의 시를 써 보았지만, 다들 좋다는 기형도를 읽으며 왜 그렇게까지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로부터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지금도 종종 해방 이후의 시들을 읽곤 한다. 이 평가의 정확한 의미를 나도 설명해줄 수 없지만, 십중팔구 한국어로 쓰여진 시들은 '너무 작다'.

글을 읽고 쓰는 것과 관련하여 올해 해야 할 일은 크게 네 가지 정도이다. 한 권의 번역과 두 권의 저술, 그리고 석사논문. 그리고 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내년 1학기와 2학기에도 휴학 없이 대학원 수업을 들어야 함은 물론이다. 짧은 분량의 원고 청탁이 정기적으로 있고, 비정기적으로도 들어온다. 오늘도 주말이지만 책상 앞에 앉아있다.

일을 줄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최선을 다하되 무리하지 말자, 8할만 하자'는 생활 신조로 살아왔고, 그래서 시험 전날에도 밤을 새는 일 따위 전혀 없었지만, 올해는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달아올랐을 때 두들겨서 꼴을 잡아놓아야 한다. 책꽂이에는 읽지 못한 책들이 쌓여가고 있지만, '아무 일 없이 그저 책을 읽는 행복'은 불완전한 이상에 불과하다. 그렇게 살고 있을 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써먹을 수 없는 지식을 잔뜩 축적해나가는 것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아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파악해내기 위해서는 구성하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매주 쓰는 칼럼은 폴 크루그먼의 정신을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몇 편 쓰지도 않고 바닥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너무 많지만, 그것은 그들이 팔을 휘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를 건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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