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8

매체로서의 책,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서의 책

지난번에 작성한 포스트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에 달린 많은 수의 리플에 답변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강유원 홈페이지의 게시판에서 링크를 타고 넘어오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한 분들과 강유원 본인의 반응을 종합하여 보면 내 글에 대한 반박 논지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강유원은 출판사의 양해 하에 홈페이지에 원고를 게재하고 있으므로 내 글이 전제로 하고 있는 팩트는 잘못되었다. 둘째,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행위가 반드시 책의 판매를 저해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그러한 이유로 강유원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 셋째, 설령 그러한 행위를 통해 책이 잘 팔리지 않게 된다고 해도 출판 노동자들의 수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 강유원에 대한 윤리적 비난은 옳지 않다.

첫째 반론에 대한 답변을 해보자. 나는 이론과실천을 포함한 여러 인문서 출판사에서 강유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원고를 올려놓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달인》의 원고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출판사에서 올리지 말라고 요청을 했거나, 올렸더라도 곧 내렸음을 시사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출판 관계자들이 그 게시판을 검토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사실 자체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였다.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두 번째 반론과 세 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을 검토해야 한다.

'출판사의 양해를 구했다'라는 말이, 너무도 손쉽게 '그러므로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책의 판매에 영향을 주지 않거나, 주더라도 미비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비약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책의 판매에 당연히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내 블로그에서 답변을 달아 주신 분들, 혹은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자신의 사례를 예시로 드신 분들과는 달리, 나는 파일로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글을 굳이 책의 형태로 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독자군의 일원이다. 내가 문제의 글을 쓰게 된 이유도, 원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사려고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홈페이지에 원고가 올라와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삭제하는 과정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도서구입비로 적어도 십만 원은 쓰지만, PDF 파일을 가지고 있는 책 값으로 7천 원을 지불하는 것은 적어도 내 입장에서 볼 때 합리적인 소비가 아니다.

문제는 나와 같은 입장에 서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는 데 있다. 물론 텍스트 파일을 구해도 책을 사는 사람이 있고, MP3를 실컷 다운받은 다음 CD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분별한 '카피레프트'로 인해 장르를 불문하고 컨텐츠 시장이 초토화된 현실을 놓고 볼 때, '물건으로서의 책이 갖는 매력'만을 놓고 '그러므로 책을 살 사람은 파일이 있어도 산다'는 말로 원고 공개를 옹호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은 입장이다. 책은 처방전을 받아 약국에서 구입하는 조제약이 아니다. 원고가 인터넷에 떠돌건 말건 반드시 사 보는 사람들만이 간신히 남아 있기 때문에 한국의 출판계가 매년 단군 이후 최후의 불황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가? 원고 공개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면, 책을 구입하는 것은 책이라는 물건에 대한 자신의 각별한 애정과 그 책의 저자들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일을 대체로 수반하며, 결과적으로 '책'이라는 매체를 일종의 기념품으로 전락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물론 원고를 공개하고 있음에도 《책과 세계》라던가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은 알라딘 기준으로 볼 때 비교적 잘 팔린 것 같다. 그것은 저자의 이름이 강유원이기 때문이다. 원고를 인터넷에 공개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조건에 출판사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렇듯 강유원이 어느 정도의 판매량은 보증할 수 있으며 잘 될 경우 그 이상도 할 수 있는 저자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분들이 리플에서 지적하신 정민 교수나 신영복 교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출판사는 그들의 그러한 행동이 자신들에게 긍정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용납하지 않아 저자와의 관계가 틀어질 경우 발생할 불이익을 회피하기 위해 저자들의 원고 공개를 승낙한다. 한마디로 그러한 경우 저자가 갑이고 출판사가 을인 것이다.

반대로 저자가 무명이거나 이름값이 미약한 경우, 그가 원고의 아주 일부분만을 요약·발췌해서 공개하더라도 대부분의 출판사에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 포스트를 작성한 후 주변 지인들에게 수소문해본 결과, 자신이 옮긴 원고에서 몇 단락을 발췌해서 블로그에 올렸을 뿐임에도 포스트를 삭제하라는 요청을 받은 번역자의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출판사가 그렇다. 자신들이 저자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하는 행위를 허락하지 않는다. 반면 강유원, 신영복, 정민 등 이름난 저자들은 그들의 원고가 인터넷에 떠돌건 말건 책을 사보는 일종의 '사수대', 혹은 고정 판매량이 있기 때문에, 딱 그만큼의 판매량만이라도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들의 행동을 용납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언급된 이들 중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 이상의 판매를 거의 보증하는 저자들이다. 출판사에서는 이들이 달라고 한다면 간이라도 빼 주어야 할지에 대해 기획회의를 하게 된다.

'인터넷에 원고를 공개한다고 해서 책의 판매량이 반드시 떨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두번째 반론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가보자. 나는 나 자신과 내 주변 사람들의 사례, 또한 전반적인 컨텐츠 시장의 황폐화를 근거로 하여, 원고를 공개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책의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내 견해에 반대하시는 분들은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산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실제로 강유원 등 이름난 저자들의 경우 이미 원고를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내 블로그에 와서 리플을 달아주시는 분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는 열혈 독자들이 그러한 저자들의 곁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일부 유명 독자들이 출판사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위를 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승낙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은, 특히 인문서적의 출판시장 자체가 그러한 열혈 독자층에 기대지 않고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도 없을 만큼 척박해져 있기 때문이다. 원고 공개를 허락하는 출판사는 울며 겨자 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판사에서 허락했으니 문제 없다'는 첫 번째 반론과, '출판사에서 허락하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원고 공개는 판매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두 번째 반론은 모두 논거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원고 공개는 그 원고를 공개하는 저자의 명성을 유지하는 일에 기여할 수 있다. 동시에 인터넷에 원고를 무료로 공개하거나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스캔 혹은 타자로 옮겨 퍼뜨리는 행위는 출판 시장을 포함한 컨텐츠 업계를 휘청거리게 만든 주범이기도 하다. 나는 이 사회에 후자의 분위기가 너무도 만연해있는 것을 비판하며, 강유원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는 방식으로 그러한 잘못된 분위기에 편승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물론 그 덕에 강유원의 팬덤은 유지되고 있고, 그리하여 그를 섭외한 출판사는 최소한의 판매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낙엽 줍기'에 출판사가 의존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원고를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사는 강유원 홈페이지의 방문객들께는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책의 물건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며 책을 사는 자신을 특별한 누군가로 생각하는 그러한 소비자들의 속성이야말로, 현재 출판 시장을 이 모양 이 꼴로 몰아가는 주범 중 하나임을 강조하고 싶다. '젊은 여자들이 지적인 척 하려고 핸드백에 넣고 다니는' 책으로 유명했던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같은 작품들을 떠올려보자. 단 한 권을 사도 뽀대나는 하드커버가 아니면 지갑을 열지 않고, 사 온 다음에는 굳이 사진을 찍어서 올리는 그러한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자는 말이다. 그리고 '나는 강유원 선생님의 책이라면 원고를 파일로 가지고 있어도 삽니다. 이 종이의 향기, 하악~'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자. 책을 정보를 담는 매체가 아닌 그 무언가로 소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종류의 소비자가 가지고 있는 간극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나는 그러한 두 종류의 경향이 지니고 있는 유사성을 지적하고 싶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의식 없이는 출판시장의 불황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내가 굳이 강유원의 '카피레프트'를 문제 삼는 이유를 짐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는 차원에서, 내 블로그에 달린 리플 중 손병권 님이 달아주신 것에 대해 차근차근 검토하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자. 이 리플에 다른 리플들에 제기된 논점들이 모두 담겨있다.

"책은 프린트물이나 파일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책이 예뻐서, 또는 종이 냄새가 너무 좋아서' 책을 사기도 하니까요. 또 프린트물로 읽었어도 책의 내용이 맘에 들면 나중에 들춰보기 위해서나 아님 '가오'를 잡기 위해서 책을 사기도 하는 것이죠."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길게 설명하며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본다. 물론 책은 물건으로서 아름다운 것이고 소유할만한 가치를 지니지만, 매체로서의 성격을 도외시하면서까지 '소장'하게 되는 사치재는 아니라고 본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점점 그러한 성격으로 책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고, 그래서 터무니없는 가격의 서적들이 속속 출현하고 있지만, 나는 그러한 시장의 변화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운로드 받고 그것으로 만족할 독자라면 그는 이미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입니다. 관심은 가지되 돈을 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다운로드 서비스가 없다면 도서관이나 옆집 친구에게 빌려 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니 출판 노동자의 밥벌이와는 크게 상관 없는 경우라고 봐야겠지요."

이 반론에 대해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을 했다고 본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경우를 살펴보면, 나는 한 달에 인문서적 구입비로 근 십만 원을 쓰고, 그래서 그 예산 중 일부를 문제의 그 책에 할애할 생각이었지만, 인터넷에 원고가 공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그럼 나는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인가? 공개된 원고를 굳이 구입하는 이들만을 '인문학의 소비자'로 이해하는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이 인문학의 시장적 저변을 축소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강유원의 팬이어서가 아니라, 엥겔스가 쓴 그 책의 내용이 궁금해서 책을 사려고 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터넷에 공개된 원고만으로 만족할 것이다. 강유원의 원고 공개가 그러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왜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을까?

"저는 인문학 시장이 커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80년대식 출판운동의 방식일 수도 있겠고, 아님 강유원님과 같이 자기 방식으로 '참호'를 굳건히 지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500~1500부 정도의 책을 팔아 서로 나눠 가질 몫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듣던 '성장론'의 재탕인 듯 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인문학 출판 시장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인식이 유효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우리는 책이 갖는 '본질적인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보를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전달하는, 유구한 역사를 지니는 매체로서의 책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기껏 몇 백 명의 팬을 믿고 마케팅을 해야 하는 비굴한 출판업이 아닌, 책의 내용으로 놓고 보건대 어느 정도의 판매량이 떨어지겠다는 계산을 하는, 미디어로서의 출판업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강유원도 1만 부 2만 부씩 팔아치워서 책만 써서 먹고 살 수 있고, 그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도 도전적인 저작을 낸 후 최소한의 용돈 벌이를 하며 다음 책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강유원의 원고 공개에 대한 문제 제기로 시작된 일련의 소동이, 책이 매체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성격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가, 혹은 자신들이 책을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며 어디에 포진하고 있는가를 되짚어보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짐으로써, 한국의 출판 시장과 인문학적 기반에 대한 재고찰을 요구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강유원의 지지자 분들께 말씀드리자면, 강유원은 당신들의 '선생님'이 아니어도 책의 판매 수익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할 사람이다. 강유원도 그렇다. '철학공부 하려면 무슨 책 봐야 하나여 ㅋㅋㅋ' 따위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야 하는 것이 지겹다면, 인터넷을 통한 정보 공개를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에서 벗어나 매체 시장이 올바르게 형성되어야 할 필요성에 눈을 떠야 한다.

출판 노동자의 수익과 관련된 반론에 대해 답변하며 이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단 하나의 출판사만을 놓고 본다면, 또한 지금과 같은 문란한 출판 시장을 움직이지 않는 전제로 놓고 본다면, 강유원은 계속 원고를 공개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그리하여 출판사에 최소한의 판매고라도 안겨주는 편이 그나마 그 회사의 출판 노동자들에게는 이익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문어가 제 발 끊어먹는 근시안적인 처방일 뿐이다. 출판 노동자라는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원고를 공개하고 있는 강유원의 홈페이지 운영 방침은, 저자의 이름값에 의존하여 계약을 맺고 책을 내야 하는 작금의 경향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러한 움직임이 책을 매체가 아닌 '현시적 소비'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부정적인 시선을 고착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 한들, 그것은 옳지 않다.

2008-01-23

외국의 맥락과 창작물의 독창성

지난 포스트를 통해 나는, 이미 존재하는 명작과 주제의식이 중복된다는 이유로 창작을 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다. 도스토예프스키 이후에도 인간의 죄의식에 대한 탐구는 계속되어야 하며, 제인 오스틴의 명작들이 아무리 영상물로 재생산되고 있다 한들 누군가는 꾸준히 로맨스 소설을 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창작물은, 성의 있게 만들어졌을 경우, 아무리 진부한 소재와 주제를 반복하고 있더라도 창작자가 속해 있는 세계의 모습을 충실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 마지막 결론 속에 한윤형에게 했던 이야기에 대한 내용도 이미 포함되어 있다. 외국에서 장르 문학을 포함한 창작의 영역이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외국에서 이러저러한 창작품이 나오고 있는 그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맥락을 적어도 대강이라도 알고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한국 문화의 현재성에 충실할 수조차 없다.

가령 한국의 영화지망생 갑돌이가 '나는 삐까번쩍한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부유층 여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각색한 영화를 찍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장 '클루리스나 보고 말하자'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중세 유럽풍의, 마법을 최소화 한 세계관을 전제로 한 대규모의 정치 로망을 쓰겠다고 하는 청년의 용기를 북돋워줄 필요는 없다. 우선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를 손에 쥐어주고 나서 이야기를 해보던가 말던가 할 일이니 말이다. 이런 굵직한 작품들의 예를 드는 것이 반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지하게 창작을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자신이 쓰려고 하는 무언가가 남들이 이미 해놓은 것과 겹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그렇지 않고서야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의 중복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붓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일단 그게 먼저고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어'라고 한국의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이런 소리를 많이 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만큼 순진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작가들은 어디까지나 독창적이고 또 독창적인 존재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혼쾌히 인정할만한 대인배를 찾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한 거장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작가들은 그만큼의 자의식을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난 나야, 리바이스' 같은 광고 카피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 휩쓸려 '외국의 맥락을 검토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윤형이 다소 맥락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외국의 시시콜콜한 작품까지 죄다 검토한 다음에야 창작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고, 또 어느 정도 무지를 전제하고 들어간 작품들이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가 인용하고 내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류 보편적인 주제의식은 다양한 각도에서 꾸준한 탐색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천착이 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외국의 맥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간파한다'는 것이 빠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작가'들이 매우 많다. 판타스틱 편집부에 매일 같이 날아오는 독자 투고만 보더라도, 그러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 90% 이상은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는 자의식에 함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한 마인드를, 부정적인 뉘앙스를 한껏 담아 '지망생 마인드'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지망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에 함몰된 나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또한 자신이 창작하려 하는 장르의 발전을, 전혀 연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윤형이 말하는 작가라는 것이, 이러한 '지망생'중 운이 좋고 재주가 좋은 일부를 칭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대한민국에 작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린 수동 트랙백)

2008년 1월 22일

서울북인스티튜트에서 진행하는 '편집, 디자인, 마케터를 위한 출판 제작 과정'의 제2강을 들었다. FP 한국어판은 단행본 출간을 기획하고 있는데, 어차피 인력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이므로 나는 그 업무도 총괄하게 된다. 편집장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면 출판 제작 과정을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다. (주)포린폴리시코리아의 최환서 사장은 내가 이러저러한 매체의 제작에도 관여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 나름대로는 완곡하게 전달했다. 나는 제작 과정을 꿰고 있는 편집장이고 싶지 편집 일을 도맡아 하는 제작자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험생활을 잠시 접고 직업의 세계에 몸담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 다음으로 느끼는 것은 출판과 인쇄라는 두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상호 소통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집단의 지적·문화적 괴리는 가히 놀랍다. 인쇄소 사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필자였고 편집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떠올리고 있던 나의 관념이 최근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책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일화는, 그 당시의 신화 중 하나일 뿐이었을까.

원고를 주는 이와 원고를 받는 이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또한 눈에 띈다. 구체적인 사건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건대 일부 상식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수의 저자들은 출판 노동자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또한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의 원고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오류를 근거로 그들의 지적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이 되도 않는 자존심이나 세운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고, 반면 저자들은 출판사에서 걸핏하면 인세를 떼어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일면이 쉽게 드러난다. 저자들은 '출판사', 즉 자본에게 해야 할 화풀이를 노동자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자의 원고의 내용을 폄하하거나 그의 인격적인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 약한 개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우선 한쪽 편을 들고 보자면,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글쟁이들은 자신이 어떤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서 자본론을 다시 쓰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그의 사상이야 어떻건, 그의 노동은 출판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는 저술 작업일 뿐이다. 마감은 지켜져야 하고, 문법과 맞춤법 또한 편집자가 다시 써야 하는 수준으로 엉망진창이어서는 안 된다. 출판 노동자, 혹은 잡지 편집자들이 원고를 다듬는데 괜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필자들은 아무튼 자기 개발을 하면서 그들보다 앞선 정보를 취합하며 필자로서의 입지를 지킨다.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완벽한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편집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일단 잡지로 범위를 좁혀보자. 외국의 경우, 유력 매체의 에디터들은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인맥'을 통해 자신이 속한 매체에 원고를 끌어오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는 곧 그들이 쓰는 글 자체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사회에 유통되는 언어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은 덜 지우고 대신 각자의 글 수준을 높이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그렇지 않다.

매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지적이고 우아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한국의 잡지계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잡지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절감하면서, 한국인 필자에게 글을 받을 필요가 없는 《Foreign Policy》니까 내가 기꺼이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년 하반기부터 20대 필자들을 모아 매체를 굴려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조금씩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 그런 것 같다. 매체를 운용함으로써 한국어의 흐름에 인상적인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이상이, 스스로의 에고를 굳이 억누를만큼 내게 강하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택광 선배의 추천으로 알게 된 《London Review of Books》는, 아직 실물을 만져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매체인 것 같다. 특히 커버가 아주 아름다운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낮에 한윤형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던졌는데, 결국 결론은 테리 이글턴 같은 필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맺어졌다. 하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미래의 테리 이글턴'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소년 소녀들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정중하게 사양하련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 테리 이글턴은 됐고, 일단 나는 한 주에 한 편 이상의 서평을 쓰겠다. FP 마감에 임박해있다면, 하다못해 그 매체의 기사 내용을 토대로 한 매체 비평이라도 반드시 올리도록 하겠다. 필자를 구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원고를 편집할 궁리를 하고 있느니 그냥 내가 쓰고 말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꼬박꼬박 알라딘 서재에 올릴 생각인데,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블로그에 공지를 올릴 터이니 방문자분들의 환호성 섞인 리플을 부탁한다. '왜 업데이트가 없느냐'라는 질책도 감사히 받겠다(물론 공지에 써놓은 바와 같이, '별도로 명시되지 않는 삭제 기준'에 어긋나면 지울 수도 있다).

사실 이 포스트처럼 '2008년 모월 모일'이라는 식의 일기를 적어도 사흘에 한 편 정도 올리면서 스쳐 지나가는 기사와 책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니 웹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코멘트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평을 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일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책과 서평에 대한 감식안이 쌓이고 그것들을 온당하게 비평하기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마련한다면, 먼 훗날 언젠가 LRB 같은 매체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일은 정말 지각하면 안 되는 날이다. 자야지.

2008-01-21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나름의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그 댓가로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르주아'적인 우아함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더 큰 죄악이다. 그나마도 진짜 부유한 사람이 그러고 있다면 모를까, 가진거라고는 자존심밖에 없는 사람의 경우라면, 자신의 그 알량한 체면을 위해 다른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야 할 노동의 댓가를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유원이 그러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의 maunscript라는 메뉴에서 말 그대로 '손으로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긴' 원고들을 게재하는데, 문제는 그 중 일부가 이미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다운로드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신 번역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인데, 링크가 걸려있다고 해도 굳이 알라딘이나 다른 인터넷 서점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마시라. 강유원 홈페이지에 가면 원고역자 후기가 모두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받아서 아크로뱃 리더로 읽은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7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었으면 한다. '나는 책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다'는 관점으로 그러고 있는 거라면 그따위 발상은 기둥에 묶어서 불로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책은, 저자에게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꿈과 희망의 표현이지만, 출판 노동자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동의 결과물이다. 번역자로서 인세를 포기하고 싶거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입맛에 맞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빌딩 위에서 흩날리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불태워버리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근거로 책의 판매에 해가 될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이 안 팔리면 번역자의 수당만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 '저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은 기고나 다른 책의 원고료 등으로 구멍난 수익을 벌충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책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본, 타인의 소득을 짓밟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에 속한다. 태안에서 기름 쏟은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하다. 그건 그나마, 과실이건 중과실이건 '과실'이지만, 이건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은 기껏해야 1500부 미만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원고가 실려있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1000이 넘는다. 1월 21일 오후 8시 8분 현재 다운로드 수는 810회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문어 제 발 끊어먹기도 이런 경우는 없다. '나는 내 지식을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이오'라는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수 명의 출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위해를 가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파일로 올리는 것, 그와 관련된 강의 자료까지도 정성스럽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강유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 포드캐스팅을 이렇게 철저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해서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주어캄프'의 번역자가 번역 원고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보 공유 정신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약'이라는 것이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를 우선 지키자는 말을 하고 있다.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인문 출판계의 목줄을 이런 식으로 조르는 필자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를 잡는 이러한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2008-01-14

너드 테스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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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