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30

이사

지난주 금요일에 이사를 했다. 서울 중구 약수동(신당 2동)에서 이태원으로 옮겼다. 다행히도 비교적 싼 값에 좋은 방을 구할 수 있었다. 컴퓨터와 핸드폰을 연결하는 케이블이 집에 있어서 지금 사진을 올릴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전망이 좋고 바람이 잘 불어온다. 2005년 1월 무렵부터 약수동에 살았으니, 3년 반 넘게 그곳에서 터를 잡고 있었던 셈이다. 많은 것을 버리고 이태원으로 건너왔다.

달랑 보증금 500만원 들고 월세방 구하러 다니면서, 이사 예정일은 다가오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 날이 많았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보증금을 마련했고, 월세도 낸다는 것이 뿌듯하다. 하지만 약 2주일 가량, 매일은 아니지만, 부동산을 들락거리며 뺨을 맞고 돌아다닌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나에게 집이란 가을이와 입동이가 기다리는 곳을 의미하지만, 집주인들에게는 한낱 '짐승'에 불과하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갓 튀어나온 것 같은 집주인의 그 표정과 목소리를 잊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고생을 했지만 아직도 나는 '부동산 6계급'이다. 아무리 열심히 모으고 살았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반지하 아니면 옥탑이었고, 그나마 옥탑이 훨씬 드물었다. 바람과 햇빛만큼은 넉넉하게 갖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게 아닐 테니까. 이태원 크라운 호텔 너머에 있는 주택가에 살게 되었다. 강철같은 체력은 남의 일인 듯하다. 이사를 끝낸 후 주말이 지나도록 입안에 헐어있는 곳이 낫지 않는다. 오늘은 입술이 부르트고 있다. 신경을 너무 써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삶은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지고 있다.

2008-09-28

중산층을 위한 감세 정책

middle class라는 단어의 번역어를 '중산층'으로 할 것인가 '중간계급'으로 할 것인가는 이 논쟁에서 쟁점이 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튼 그 번역된 단어가 대한민국의 상위 2~5%에 속하는 강남 거주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리고 그것을 '잘~ 하는 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풍자'로서 적합한가, 그런 담론적 전략에 대해 재고찰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가 등이 될 것이다.

이 모든 논점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하기에 앞서, 비슷한 차원의 '중산층을 위한 감세' 논쟁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은 금융 위기 때문에 쟁점에서 빗겨나 버렸지만, 오바마와 매케인은 부시의 대규모 감세안을 유지할 것인가 폐기할 것인가를 놓고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오바마는 부시의 감세안을 원점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했고, 매케인은 후보가 되기 전까지는 오바마와 같은 입장이었지만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지명된 후에는 부시 감세안을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기서 매케인이 사용하는 수사법 또한 'middle class'를 위해 감세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기준선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오바마는 연봉 15만 달러 이하, 한국돈으로 (지금은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대강 1달러당 1000원으로 잡았을 때) 1억 5천만원 이하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이 middle class라고 보고, 그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에 대한 세율을 다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매케인은 "5백만 달러?"라고 농담을 했다가, 자신이 그 누구의 세금도 올리지 않을 거라며 어려운 주장을 회피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논쟁과 한국에서 벌어지는 '중산층' 논쟁의 유사성을 즉각 확인할 수 있다. 지난번에 내가 인용한 기사에서 나오는 바와 같이, "근로소득세 과세표준 8800만원은 총급여가 1억 2000~1억 3000만원에 달해야 나올 수 있는 수치"이기 때문이다. 즉 오바마와 강만수는 같은 지점에서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middle class'라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상류층 중 하위층이 자신을 'middle class'라고 주장하는 현상은 동일하게 발견된다. 폴 크루그먼의 8월 22일 칼럼인 "Now That's Rich"의 일부를 인용해보자.

When we think about the middle class, we tend to think of Americans whose lives are decent but not luxurious: they have houses, cars and health insurance, but they still worry about making ends meet, especially the time comes to send the kids to college.

Meanwhile, when we think about the rich, we tend to think about the handful of people who are really, really rich -- people with servants, people with so much money that, like Mr. McCain, they don't know how many houses they own. (Remember how Republicans jeered at John Kerry for being too rich?)

The trouble with Mr. Warren's question was that it seemed to imply that everyone except the poor belongs to one of these two categories: either you're clearly rich, or you're an ordinary member of the middle class. And that's just wrong.

우리는 중산층을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사치스럽게 살지는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집, 차, 건강 보험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야 할 때 돈 걱정을 하게 되는 사람들 말이다.

반면 우리는 극소수의 매우 매우 부유한 사람들만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인을 부리고, 자신이 몇 채의 집을 가졌는지도 모르는 존 매케인처럼 돈이 많은 그런 사람들 말이다. (공화당원들이 존 케리가 너무 부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비난을 퍼부었는지 기억하는가?)

워렌 목사의 질문에 담긴 문제는 빈곤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단지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같은 함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명백하게 부자가 아니라면, 당신은 평범한 중산층의 일원이다.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미국에서 현재 통용되는 영어 맥락에서, middle class의 번역어는 '중산층'이며, 그것은 전혀 '쁘띠 부르주아'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지 않다(물론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쁘띠 부르주아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함으로써 개념의 혼돈을 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둘째, 인용문에서 말하는 middle class를 '중간계급'으로 바꿔도, 뭔가 어색하긴 하지만 글을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사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지만 사치스럽게 살지는 못하는', '자녀들을 대학에 보낼 때 돈 걱정을 하게 되는 사람들'을 중간계급이라고 부르는 것은 너무도 타당한 일처럼 보인다.

따라서 나는 middle class의 번역어를 '중간계급'으로 쓰자는 주장까지는 이택광님의 글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1억 2000만원보다 '많이' 버는 사람들을 중산층이라고, 즉 중간계급이라고 간주하는 강만수의 주장에 대한 '풍자'가 그 글의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는 "한국 사회에는 중간계급에 속하지 못하면서도 중간계급 의식을 소유한 '서민들'이 참으로 많다.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감세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다는 건 이를 반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세표준 8800만원 이하인 사람들은, 이택광 스스로는 뭐라고 '풍자'를 하고 있건, 이택광과 강만수 양자에 의해 '중산층 혹은 중간계급이 아님'이라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내 논지를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중산층이라는 단어가 워낙 복잡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으니, 차라리 '중산층'을 이명박이 말하는 그것으로 설정하고 대신 '서민'을 강조하자'. 문제는 그 '중산층'이, 그렇게 되면 결코 'middle class'의 번역어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폴 크루그먼의 칼럼으로 돌아가보자.

In his entertaining book “Richistan,” Robert Frank of The Wall Street Journal declares that the rich aren’t just different from you and me, they live in a different, parallel country. But that country is divided into levels, and only the inhabitants of upper Richistan live like aristocrats; the inhabitants of middle Richistan lead ample but not gilded lives; and lower Richistanis live in McMansions, drive around in S.U.V.’s, and are likely to think of themselves as “affluent” rather than rich.

Even these arguably not-rich, however, live in a different financial universe from that inhabited by ordinary members of the middle class: they have lots of disposable income after paying for the essentials, and they don’t lose sleep over expenses, like insurance co-pays and tuition bills, that can seem daunting to many working American families.

그의 재미있는 저서 "리치스탄"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의 로버트 프랭크는 부자들이 나와 당신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평행 우주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나라는 몇 개의 층으로 나위어 있고, 오직 상위 리치스탄에 사는 사람들만이 귀족처럼 산다. 중위 리치스탄에 사는 사람들은 넘쳐나는 부를 가지고 있지만 금박 입혀진 인생은 아니며, 하위 리치스타니안들은 맥맨션에 살고, S.U.V.를 몰며, 자신들이 부유하다기보다는 그저 "살만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자 아닌 사람들'도, 그러나, 중산층의 평범한 구성원들과는 완전히 다른 금융 우주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지출을 하고도 사용할 수 있는 다수의 수입원을 가지고 있으며, 다수의 일하는 미국 가정들을 괴롭히는 보험금 납입이나 수업료 등으로 인해 잠 못 이루지도 않는다.


하지만 매케인이 주장하는 바 부시의 감세안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이렇듯 '하위 리치스타니안'들에게서 세금을 걷지 않는 대신, 중산층과 빈곤층에게 그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라고 폴 크루그먼은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현대 미국 영어'에서 'middle class'는 우리가 아는 '중간 소득을 버는 사람들'이지 '쁘띠 부르주아'가 아니다. 적어도 폴 크루그먼은 그 구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고 있고, 반면 존 매케인과 그 선거본부는, 마치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과도 같은 '중산층' 논쟁을 벌여 하위 리치스타니안들의 호주머니를 불려줄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차이를 도표로 그려보자.

폴 크루그먼

존 매케인

강만수

노정태

상위 리치스탄

부자

부자

부자

하위 리치스탄

중산층

중산층

(강남)쁘띠

중산층

중산층

서민

중산층

빈곤층

빈곤층

빈곤층

빈곤층




이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나는 '하위 리치스탄'의 한국 버전에 해당하는 강남의 아파트 부자들을 '중산층' 대신 '쁘띠 부르주아'라고 직설적으로 부르자고 주장하고 있다(좋은 욕 놔두고 어렵게 말할 필요가 뭐가 있나).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명박 정부의 '중산층을 위한 감세 정책'이라는 말이 전적으로 허위의 것임을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서민'이라는 단어가 야기하는 개념적 혼동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편 존 매케인은 중산층의 범위를 하위 리치스탄까지 확대함으로써, 리치스타니안을 위한 감세안이 마치 진짜 중산층과 서민층에게까지 이익이 되는 것처럼 호도한다(주어를 이명박이나 강만수로 바꾸어도 큰 무리가 없다).

나는 이택광이 '풍자'를 통해 택하는 담론적 전략이 그다지 현명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이유야 도표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택광과 같이, 엄연히 middle class의 번역어인 중산층을 하위 리치스타니안의 자리에 분류하고, '한국에서 중산층이라는 게 그렇지'라고 냉소하는 전략을 택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한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세계 제1의 군사, 경제대국에서 벌어지는 논쟁과 보조를 맞추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거나 할 수 없고, 도리어 '서민'이라는 막연한 단어 안에 포함되어버리는 또 다른 개념적 혼돈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서민과 중산층, 중간계급의 구분으로 넘어가보면 개념적 혼돈은 한층 더 심화된 양상을 보인다. 만약 한윤형이 지난 글의 리플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대충 '중산층'='쁘띠 부르주아'의 번역어구요. '중간층'은 '미들 클래스'의 번역어"라고 하면, 이택광이 말하는 '서민'이야말로 '중간계급'이 될 것이고, 중산층은 중산층의 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이택광은 '중간계급'을 '중산층'의 대체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유층-중산층-중간계급-빈곤층'으로 사회 계층 구도를 보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한윤형은 이택광을 옹호하겠다는 건가 옹호하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한국 사회의 '좌파'들이 대체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해왔는지, 그 속에서 어떤 쟁점을 어떻게 잡아왔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그리 큰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중산층'이라는 단어에 대해 강력한 혐오를 보이는 것은, 그것이 '노동자' 내지는 '민중'과 친화성이 없는 어휘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인용한 프레시안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쁘띠 부르주아'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일반적인 용법에서 벗어난다. 문제는 그 방언 집단이, 하나는 이명박의 경제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좌뇌와 우뇌가 고루 발달'한 '좌파'들이라는 것이다.)

이미 상대방이 설정해놓은 개념적인 틀거리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은 전략적으로 현명하지 않은 선택이며, 특히 '한국에서만은 '쁘띠 부르주아'가 '중산층'이고 'middle class'의 번역어는 '서민'이다'라는 용어표를 만들어내는 것은 국제적으로 고립만을 자처하는 더욱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나는 '폴 크루그먼이 부시의 감세 정책을 비판하듯, 그것은 중산층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택광과 한윤형은 훨씬 더 멀고 어려운 길을 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서로 열심히 '풍자'해가며 그 고단함을 이겨내시길 희망한다.

2008-09-25

중산층, 중간계급, 소자본가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막대한 개념적 혼돈이 있다면, 그것은 '중간 정도의 소득을 올리는 사람'과, '작은 규모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소득을 얻는 소자본가'가 모두 한 단어 안에 혼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집값이 올라갈 거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서민'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다고 할 때, 그 '중산층'은 분명히 '소자본가'를 뜻한다. 반면 강남에서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고, 최근 수년간의 집값 상승을 통해 그 해만큼의 연봉보다 많은 돈을 번 사람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스스로가 소자본가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중간'임을 표명하고자 하는 의사의 표현일 터이다. 이 양자를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으면 적지 않은 개념적 혼돈에 맞닥뜨리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단을 읽어보자.

물론 이런 논의와 별도로,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경제수준을 중간계급으로 볼 건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최근 이명박 정부가 여기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제공했다. 감세정책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말이다. 정부는 "감세 효과의 53%가 서민, 중산층, 중소기업에 돌아간다"고 큰소리를 치면서 과표구간으로 연소득 8800만원, 실제 소득 1억 2000만원의 연봉을 '중산층'으로 설정했다. 여기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드높지만 이른바 '글로벌 스탠다드'로 보자면 맞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는 중간계급에 속하지 못하면서도 중간계급 의식을 소유한 '서민들'이 참으로 많다.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감세정책에 대한 지지가 높다는 건 이를 반증한다.
(이택광, "중간계급", 2008년 9월 13일, WALLFLOWER)

과연 그럴까? 물론 이명박 정부가 설정한 바로 그 사람들만을 '중간계급'으로 보기로 했다, 이런 차원이라면 논의가 더 진행될 여지도 없다. 하지만 연소득 8800만원, 실제 소득 1억 2000만원의 연봉이 '중산층'으로 설정될 수 있고,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합치하는 일일까? '중산층'을 '소자본가'로 놓고 본다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택하고 있는 화용론은 그것을 겨냥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허리를 구성하는 중간 소득 계층이 감세로 이익을 보게 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안타깝지만 연봉 1억 2000만원이 '중산층'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 . . OECD에서는 빈곤층, 중산층, 상류층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을까. OECD는 가구소득을 기준으로 중위소득의 50~150%에 해당하는 계층을 중산층, 그 미만에 해당하는 계층을 빈곤층, 그 이상에 해당하는 계층을 상류층으로 구분하고 있다.

OECD의 이 구분법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우리나라 근로자들 중 소득 상위 20%는 상류층에, 중위 60%는 중산층에, 하위 20%는 빈곤층으로 분류될 수 있다. . .

. . . 국세통계연보(2007)에 의하면 2006년 연말정산 대상 근로자(대기업 임원 등 포함) 1259.5만 명 중에서 상위 5.2%인 66.2만 명의 평균급여는 9482만 원이고, 그 과세표준은 5677만 원이다. 과세표준이란 총급여에서 각종 소득공제를 제외한 과세대상 소득을 의미한다.

이 통계는 우리나라 전체 근로자 중 상위 5.2%의 근로소득 과세표준 평균이 5677만 원이므로, 과세표준 5677만 원에 해당하는 총급여를 받는 사람은 상위 2.6%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
(홍헌호, ""MB 정부, 스스로 일본 전철 따르나"", 2008년 9월 16일, 프레시안)

과세표준 5677만원에 해당하는 총급여를 받는 사람이 상위 2.6%에 해당한다면, 과세표준 8800만원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그보다 더 낮은 퍼센트를 점유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해 '중간계급'이라고 칭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상위 2.6퍼센트에 속하는 중산층이라는 말은 동그란 네모라는 말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엄연히 소득상으로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칭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한국인들의 '평등에의 요구'의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한 담론적 회피 기동이다. '나는 상류층이지만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배알이 꼴려서, 내가 잘 산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면 맞아죽을까봐 겁이 나니까, '에이, 잘 살긴 뭘, 그냥 먹고는 살지'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나처럼 어중간하게 돈 있으면 그게 더 괴로워!'라고 역지랄을 하는 전법도 즐겨 사용되는 것 같다. 중요한 건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뭐라고 규정하건, 연봉이 과세표준으로 5677만원을 넘는다면 대한민국 상위 2.6%안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이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칭하는 것과, 97년 외환위기 전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이 자신을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중산층'이라 칭하던 현상을 같은 층위에서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양자 모두 자신을 안전한 '중간'에 배치하고픈 일종의 회피 심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할지 모르겠으나, 그 허위위식을 비판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간계급의 경제적 붕괴를 도외시하는 것은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OECD의 구분법에 따르면 한국에서 근로소득을 올리는 사람 중 중위 60%가 중산층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만큼의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칭하는 것은 그리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과세표준을 적용해서 총 급여액이 1345.6만원 이상 4036만원 이하면 중산층이다. 이것은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을 분류할 때 적용될만한, 그런 종류의 계급 구별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제 기구에서 중산층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기준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서민'이라고 칭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중산층이고, 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계면쩍은 표정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상류층이다. 다만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상류층에 속한다는 사실을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하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신을 상류층의 일원으로 파악하면 그만큼 상대적인 박탈감이 커지기 때문이다. 강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같은 동 사람들끼리 서로 비교하고 살면 고만고만한 '서민' 행세를 할 수도 있지만, 한남동의 저택 소유자들과 자신을 견주면 즉각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내가 겪어본 강남 주민들은 자신의 '중산층 됨'을 한남동과의 비교에서 찾는다. 내 위에 누가 있으니까 나는 중산층이다, 이런 논리이다.

혹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본 후, 내 주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도 있다. 이것은 경제적 중산층과 계급적 중산층을 혼동하는 견해라고 말이다. 계급적 중산층이라는 말보다는, '중산층'이라는 일종의 허위의식과 사회 소득 분포의 배분 비율로서의 중산층을 설정하는 편이 낫겠다. 아무튼 이런 주장에 대한 나의 반박은 이렇다. 우선 그 '중산층'의 허위의식부터가 단일하지 않다. 엄연히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하는 '위로부터의 중산층'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빈곤층에 속하는 이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칭하며 '아래로부터의 중산층'을 구성할 수도 있다(하지만 연간 총 급여가 1345.6만원도 안 되는 사람이 과연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볼까).

이렇듯 적어도 한국 사회를 논함에 있어서, 내적으로 정교하게 설정되어 있지도 않은 '중산층'을 비판하기 위해, '경제적 중산층'이 몰락하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KDI의 2008년도 추산에 따르면 중산층 비중은 2000년 61.9%에서 2007년 58%로 4%포인트 줄어들었다. 흔히 '서민 경기가 얼어붙었다'로 표현하는 그 현상은, 실상 중산층의 경제적 몰락이며 그것은 분명히 큰 문제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떳떳하게 '중산층'이라 말하는 소득 낮은 사람들의 숫자는 줄어들고, 대신 소득분위상으로는 부유층에 속하면서도 '그냥 먹고 산다'고 말하는 허위의 중산층이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기사를 살펴보자.

간식배달업체인 ‘우리비’를 경영하는 윤광욱(38) 사장은 국내 최초의 초고속인터넷 통신망 회사인 두루넷의 공채 1기 출신이다. 두루넷이 코스닥에 상장했을 무렵 그는 대리급이었지만 우리사주로 받은 주식이 적지 않아 한때는 평가액이 20억원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회사가 부실해지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손해를 보고 주식을 판 뒤 그는 조그만 중소 통신업체로 옮겼다. 그러나 이 회사도 1년 뒤 부도가 났다.

우 여곡절 끝에 집을 담보로 잡히고 간식 배달 사업에 뛰어들었다. 직원을 20명이나 채용하며 공격 경영에 나섰지만 1년여 만에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친척과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버티던 그는 한 컨설팅업체의 도움을 받아 회생의 계기를 잡았다. 지금은 연 매출 20억원 규모로 성장했고 그의 가정도 중산층으로 복귀했다.
("'양극화 해소' 외친 노 정부때 중산층 되레 줄어", 중앙일보, 2008년 7월 5일)

여기서 중앙일보는 "중산층으로 복귀했다"라는 절묘한 수사법을 통해, 두루넷 공채 1기 출신이며 평가액 20억 상당의 주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그 당시에 '중산층'이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실제로 강남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바로 이런 이유로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주장한다.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마치 중산층을 위한 것인 양 혼동하게 만드는 주범이 바로 이 계층, 부유층의 사다리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다.

'한국인들은 자기가 중산층인 줄 안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중산층'을 비아냥거리는 맥락을 띌 때, 결국 강남 상류층(중 밑바닥)들의 징징거림에 편승하는 행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하지만 재벌 2세 나오는 드라마 보고 대사 따라한다고 해서 재벌 2세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강남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그들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러하듯이) 중산층이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강남 사람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들이 진정 중산층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건 그저 '강남 쁘띠'들의 프레임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해법은 '중간계급'과 '소자본가'를 명확하게 갈라서 생각하는 것이다(앞서도 말했지만 이 글에서 나는 '중간계급'을 OECD 기준으로 사고하고 있다). 강남의 따라지 상류층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지칭함으로써, 그들만을 위한 종부세 개편 등을 '중산층을 위하여'라고 부르는 기만적인 언어 사용을 막아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산층'이라는 개념의 혼탁함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대신, '자기가 중산층이라는 허위의식에 빠져있는 사람들' 같은 표현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중산층'이라는 단어를 '소자본가'라는 뜻으로 풀어서 읽는다면 저 표현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OECD 기준으로 본다면, 중산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소득이 중간인 사람들이 중산층이다. 따라서 소득이 중간인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보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것보다는, 엄연히 상위 5%, 2% 안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칭하며 '중산층을 위한 종부세 감세'를 요구하는 바로 그들의 지배 전략을 폭로하는 편이 더욱 올바른 일일 것이다. '중산층'에 대한 허위의식이 존재한다고 해서, 한국 사회 내 중산층의 존재 자체가 허위라고 보는 것은 그야말로 오류추리이다. 좌파정치가 지켜내야 할 '서민'들도 결국은 그 중산층 아닌가.

8800만원 버는 사람들을 '중산층'이라 칭한 이명박 정부의 개념 분류법을 '옳은 소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직 자신들만이 '중산층'으로 분류되기를 바라는 강남 거주자들의 언어적 프레임에 그대로 갇혀버린 담론이다. 차라리 그들을 떳떳하게 '쁘띠'라고 부르자. 그럼으로써 우리는 '중산층'이라는 언어를 진정한 중산층의 것으로 수복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즈니스 프랜들리

개인고객을 상대하는 비즈니스와 기업고객을 상대하는 비즈니스는, 사안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규모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여준다.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가 매출이나 수익 면에서 더 크고 잘 조직되어 있게 마련이다. 지금 줄줄이 피를 보고 있는 미국의 '투자 은행'들도 개인고객이 아닌 기업고객을 주 타겟으로 잡고 있던 회사들이다. IBM은 노트북 및 PC 제조가 기업용 사무용품이 아닌 개인용 일상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PC 사업부를 중국의 레노보에 매각했다.

성매매 논쟁이랍시고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중요한 차이를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채 진행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성매매가 노동인가 아닌가, 성매매 여성에게 직업적 선택권이 있는가 없는가, 성매매 여성들은 자발적인가 아닌가, 뭐 이런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언제나 담론은 맴돌게 마련이다.

저 개별적인 질문들에 대답하기에 앞서 현실을 검토하자면, 물론 나는 낙관주의자이지만 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개인이 성을 판매하는 행위를 근절시킬 수 있는 해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P2P로 성매매하는 것을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어도, 국가의 정책으로 막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도리어 그러한 종류의 단속은 경찰과 포주의 유기적 밀착을 음성적으로 강화할 가능성도 크다. 비록 나는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특히 성을 사는 수요자들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입장에 서고 있지만,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지는 성매매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고객을 상대로 하는,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바로 그 '성매매'가 지금처럼 활개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또 추진되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성매매가 문제인 이유를 논하려거든, 성매매 여성의 자발적 선택에 대한 끝도 없는 논의에 빠져들지 말고, 성을 구입하는 이들의 소비 방식에 대해 먼저 고찰해봐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들 성매매가 합법화되어있는 네덜란드를 운운하곤 하는데, 그 네덜란드에서는 '접대'라는 명목하에 법인카드를 들고 가서 집단 성매매 결제를 하는 문화가 있긴 할까? 이에 대해서는 통계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겠지만, 추측건대, 한국의 성매매를 지탱하는 것은 기업고객들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수요는 각 기업들의 경영 합리화를 통해 통제될 수 있을 것이다.

성매매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오직 '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성매매는 어디까지나 성에 대한 매매이며, 그것은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매매되고 있다는 그 자체로서 인간의 존엄에 대한 폭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든 시장은 정부의 적절한 개입에 의해 통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정부가 대한민국의 기업 문화를, 거래를 성사시기키 위해서는 '거래'를 해야만 하는 문화를 바꾸기 위한, 단편적 캠페인을 넘어서는 구조적 노력을 기울인다면, 성매매의 '기업고객'을 감소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정책적으로 노려볼만한 목표가 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현재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한국의 성매매 산업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효과를 노려볼만하다.

하지만 이명박은 '성매매 사범의 무차별적 단속을 자제하라'는 발언을 하고야 말았다. 단속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못생긴 마사지걸들이 못내 눈에 밟혔나보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이명박이, 철저하게 한국적인 의미에서, 'CEO형 대통령'으로 보인다. 룸싸롱이 없어지면 사업은 어디서 하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이러면 안 되지. 이것이야말로 한국적인 '비즈니스 프랜들리' 아닐까.

2008-09-22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

《Foreign Policy》가 자랑하는 코너 중 하나가 바로 ‘Think Again’입니다. 한국어로는 ‘…를 다시 생각한다’라고 번역되는 그 코너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이슈의 반대편에서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이번호 한국어판의 표제 기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편집부는 잠시 토론을 거쳤습니다. 한국의 실정을 놓고 볼 때, “김정일과의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가 더욱 적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나름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어판 편집부는 《Foreign Policy》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부시는 재평가될 것이다”를 이번호의 표제 기사로 선정했습니다.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프럼은, 그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부시 행정부에서 다져놓은 길을 전적으로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부시가 민주주의를 밀어붙이며 국제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과의 대화를 놓고 보면, 그 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대화의 상대방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일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김현식에 따르면, 자신이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일부러 고위직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김일성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이 된 것은 1993년 북핵 위기 당시 가장 큰 목소리로 강경 대응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의 ‘보도 기사’를 북한의 언론인들은 미리 써 놓고 있었습니다. “김정일과의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비화(秘話)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이렇듯 두 명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와 재평가, 회고와 전망이 담겨 있는 기사 외에도, 이번호 《Foreign Policy》는 허약한 정치, 부실한 경제 윤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Prime Numbers의 “쓰레기 지구”와 “죽음을 만드는 사람들 - 가짜 약의 세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기사입니다. 중국과 인도처럼 급성장하는 나라에서는,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 동시에 가짜 약품들도 마구 생산됩니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의약품을 단속해야 할 정부가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할뿐더러 타국 국민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FP Index의 테러리즘 지수 수치가 예년에 비해 낮아졌다고 해도 세계가 안전해졌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나쁜 치세는 호랑이보다, 테러리스트보다 더 무섭습니다.

《Foreign Policy》는 질문과 답을 한 권에 담는 매체입니다. 레이먼드 피스먼과 에드워드 미구엘은 “상식만 알아도 ‘부패’가 보인다”에서, 경제학적 기지를 발휘해 부패를 추적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자들은 마치 ‘지식과 정보를 통해 나쁜 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 같습니다.

임기 말을 향해 달려가는 문제적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는 독재자에 대한 폭로가 동시에 담겨 있는 매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부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인척 비리와 간첩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정국입니다. 과거가 되어 있을 현재를, 훗날 긍정적인 시각에서 재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번호 《Foreign Policy》는 평가와 반성, 회고와 성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을 그 지성의 토론장으로 초대합니다.

-한국어판 편집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9/10월호 편집자의 말입니다. 책은 지난주에 나왔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호에 대해서도 블로그 방문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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