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3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을 회상할 때, ‘미리엘 주교의 용서로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몇 년 후 막대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라고만 기억한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19년간 징역을 살고 돌아온 장발장이라는 한 사내가 단지 ‘삐뚤어진 내면’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였노라고, 그래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가 만든 이야기와 다르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을 용서해준 순간, 크게 놀랐지만 당장 개심하지는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놓친 동전을 발로 밟아 빼앗은 후 자신은 은그릇을 훔친 것도 용서받았으면서 어린애의 돈이나 강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가. 위고가 묘사하는 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번 징역을 살고 나면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예 다른 색깔의 신분증이 발급되며, 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요컨대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토록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호관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감옥 밖의 세상으로부터 또 한번 탈출한다. 우리가 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자베르가 쫓아와 다시 도망가는 장발장’은, 애초에 그가 보호관찰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캐릭터이다. 지금의 현실에 억지로 대입해본다면, 전자발찌를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로 내몰고 범죄자들을 결코 다시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계속 쫓겨다니는 선량한 사람. 이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다. 파업을 해서 전과자가 되고 손해배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는 사회 밖으로 간단히 추방된다. 관객들이 ‘도망친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에게 감정이입할 때, 그들은 또 한번 잊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에게 그의 장발장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장발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시 우리 사회로 끌어안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힐링’은 값싼 자기 위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3-01-02 20:54:14ㅣ수정 : 2013-01-02 22:59:56

2012-12-31

2012년 독서 목록

  1. 20120112 - 프리드리히 키틀러, 윤원화 옮김,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 예술, 기술, 전쟁』(서울: 현실문화, 2011)
  2. 20120114 - Terry Eagelton, /The Meaning of Lif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3. 20120118 -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서울: 책세상, 2011)
  4. 20120120 - 에릭 A. 해블록, 이명훈 옮김, 『플라톤 서설』(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1)
  5. 20120125 -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서울: 문학과지성사, 1999)
  6. 20120127 - 리처드 플로리다, 이원호, 이종호, 서민철 옮김, 『도시와 창조 계급』(서울: 푸른길, 2008)
  7. 20120131 - 서형, 『부러진 화살』(서울: 후마니타스, 2012), 개정판.
  8. 20120206 - Chris Hedges, /Death of the Liberal Class/ (New York: Nation Books, 2010)
  9. 20120208 - 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서울: 을유문화사, 2009)
  10. 20120212 - Roy F. Baumeister, John Tierney /Willpower: Rediscovering the Greatest Human Strength/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11).
  11. 20120226 - 맥스 브룩스, 장성주 옮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서울: 황금가지, 2011)
  12. 20120228 - 아룬다티 로이, 최인숙 옮김, 『생존의 비용』(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13. 20120306 - 브룩 글래드스톤 글, 조시 뉴펠드 그림, 권혁 옮김, 『미디어 씹어먹기』(서울: 돋을새김, 2012)
  14. 20120319 - 조너선 스턴, 윤원화 옮김,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서울: 현실문화, 2010)
  15. 20120325 - 조너선 샤프란 포어, 송은주 옮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서울: 민음사, 2011)
  16. 20120326 - 제임스 길리건, 이희재 옮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서울: 교양인, 2012)
  17. 20120326 - 리처드 윌킨슨, 김홍수영 옮김, 『평등해야 건강하다』(서울: 후마니타스, 2008)
  18. 20120409 - 페리 앤더슨, 안효상, 이승우 옮김,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 카를 슈미트에서 에릭 홉스봄까지』(서울: 길, 2011)
  19. 20120418 - 류짜이푸, 임태홍, 한순자 옮김, 『쌍전: 삼국지와 수호지는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2)
  20. 20120418 - 제임스 R. 베니거, 윤원화 옮김, 『컨트롤 레벌루션: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기원』(서울: 현실문화연구, 2009)
  21. 20120421 - 박성민, 강양구 대담, 『정치의 몰락』(서울: 민음사, 2012)
  22. 20120429 - 정준호,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서울: 후마니타스, 2011)
  23. 20120511 - 셰리 버먼, XXX 옮김, 『정치가 우선한다』(서울: 후마니타스, 2011(?))
  24. 20120512 - 이영준, 『페가서스 10000마일』(서울: 워크룸프레스, 2012)
  25. 20120513 - 카를 슈미트, 나종석 옮김,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서울: 길, 2012)
  26. 20120521 - 막스 베버,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소명으로서의 정치』(서울: 후마니타스, 2011)
  27. 20120524 -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서울: 꾸리에, 2012)
  28. 20120528 - 포시디우스, 이연학, 최원호 옮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경상북도 대구: 분도출판사, 2008)
  29. 20120531 - 루돌프 파이퍼, 정기문 옮김, 『인문정신의 역사』(서울: 길, 2011)
  30. 20120603 -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알리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독재자의 핸드북: 사상 최악의 독재자들이 감춰둔 통치의 원칙』(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2)
  31. 20120603 -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경기도 파주: 창비, 2012)
  32. 20120604 - 강영안,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경기도 파주: 한길사, 2012)
  33. 20120613 - 세라 손튼, 이대형·배수희 옮김, 『걸작의 뒷모습』(서울: 세미콜론, 2011)
  34. 20120617 - 노라 에프런, 김용언 옮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서울: 반비, 2012)
  35. 20120827 - 사사키 아타루,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서울: 자음과모음, 2012)
  36. 20120831 -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서울: 김영사, 2012)
  37. 20120906 -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옮김, 『지적 생활의 발견』(경기도 고양시: 위즈덤하우스, 2011)
  38. 20120909 -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옮김, 『지적으로 나이드는 법』(경기도 고양시: 위즈덤하우스, 2012)
  39. 20120912 - 김용언, 『범죄소설 - 그 기원과 매혹』(서울: 강, 2012)
  40. 20120920 - 히가시노 게이고, 양억관 옮김, 『용의자 X의 헌신』(서울: 현대문학, 2007)
  41. 20120923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위로하는 정신: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경기도 파주: 유유, 2012)
  42. 20120925 - 찰스 다윈, 이한중 옮김, 『찰스 다윈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서울: 갈라파고스, 2003)
  43. 20121017 - 티에리 크루벨리에, 전혜영 옮김, 『자백의 대가: 크메르 루즈 살인고문관의 정신세계』(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2)
  44. 20121018 - 김종배, 『30대 정치학』(서울: 반비, 2012)
  45. 20121025 - 장우철, 『여기와 거기』(경기도 파주: 난다, 2012)
  46. 20121101 - 위화, 김태성 옮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2)
  47. 20121112 - 이반 투르게네프, 최진희 옮김, 『첫사랑』(서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48. 20121118 - 프란츠 폰 리스트, 심재우, 윤재왕 옮김, 차병직 해제, 『마르부르크 강령』(서울: 강, 2012)
  49. 20121123 - 브뤼노 라투르,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경기도 고양: 사월의책, 2012)
  50. 20121126 - 김어준, 지승호 엮음, 『닥치고 정치』(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1)
  51. 20121127 - 김어준, 『건투를 빈다』(경기도 파주: 푸른숲, 2008)
  52. 20121129 - 김규항, 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쾌도난담』(서울: 태명, 2000)
  53. 20121210 - 셸리 케이건, 박세연 옮김, 『죽음이란 무엇인가』(서울: 엘도라도, 2012)
  54. 20121217 - 이진, 『원더랜드 대모험』(서울: 비룡소, 2012)
  55. 20121220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 - 고전적 자본주의 옹호론』(서울: 나남출판, 1994)
  56. 20121226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1』(서울: 민음사, 2012)
  57. 20121227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2』(서울: 민음사, 2012)
  58. 20121231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3』(서울: 민음사, 2012)



    상반기는 군생활, 하반기는 밥벌이. 여러모로 아쉬웠던 한 해였습니다.

    2012-12-12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이 사건의 경우 '이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겁을 주는 일이, 두 방향 모두에서 가능하다. 국가정보원이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악성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제보를 받고 강남의 한 오피스텔을 경찰과 선관위, 기자들이 급습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국가정보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찰', 혹은 '권력기관의 권한 남용'이 언제든지 당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그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퇴근 후에 집에서 익명으로 악성댓글을 달고 있다고 해서 경찰이 문을 따고 쳐들어오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편다.

    스스로를 어떤 주체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입장은 갈라진다. 자신을 여당 혹은 현 정부의 대립하는 '야당적 주체'로 바라본다면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매우 경악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공권력'의 반대편에 있는 한 '개인으로서의 시민'으로 본다면, 고작 인터넷에서 악성댓글을 단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집에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 사건이 지리멸렬하게 전개되면서 정치적으로 악영향 혹은 반작용만을 불러일으킬 경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우려가 동시에 현실화될 수도 있다. 요컨대 현재의 '야권'은 계속 검찰과 국정원 등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그와 정비례해서 시민적 자유에 대한 침해도 커지는 것 말이다. 해당 사안을 두고 벌이는 언론플레이의 수준과 사건의 전개 과정을 놓고 볼 때, 사태는 더욱 비관적이기만 하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당신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도록 되어가는 것 같다.

    2012-12-11

    [2030 콘서트]재능기부와 개똥 먹기

    [2030 콘서트]재능기부와 개똥 먹기

    경제학자 두 명이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다. 경제학자 A가 B에게 제안했다. 자네가 저 개똥을 먹으면 내가 100달러를 주겠네. B는 고심 끝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100달러를 벌었다. 좀 더 가다보니 개똥이 또 하나 나왔다. 이번에는 B가 A에게 같은 제안을 했고, A가 개똥을 먹어서 100달러를 B로부터 받았다.

    정산을 해보자. 두 사람 모두 개똥을 먹었고, 100달러씩 벌었지만 또 100달러를 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개똥만 먹고 한 푼도 못 번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달러씩 서로 두 번 거래를 한 셈이어서, GDP(국내총생산)는 200달러 올라간다. GDP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과 삶을 제대로 반영해주지는 못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할 때 경제학자들이 인용하곤 하는 경제 우화 중 하나다.

    이 지저분한 이야기는 그러나, 모종의 깔끔한 ‘상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 한다. 업무를 완수하면 ‘요즘 경기가 통 안 좋아서’같이 구질구질한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B가 A의 제안을 받아들여 본인도 100달러를 벌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들에게는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다.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상 속에 두 명의 경제학자와 두 개의 개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A와 B가 100달러를 매개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A의 제안을 받았을 때 B는 100달러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구강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100달러를 벌게 된 B는 또 반대로,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고,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담뱃불을 붙이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A에게 같은 제안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 시점에서 말하자면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B이다. 그에게는 100달러가 있지만 A에게는 없다. 100달러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A가 아니라 B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돈은 곧 힘이다. A는 B에게 개똥을 먹이는 대신 그만큼 자신의 ‘힘’을 넘겨준 것이다.

    여기서 우화의 형태를 조금 바꿔보자. 갑은 모종의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고, 을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다. 이 조합이라면 갑이 을에게 ‘젊은 벗의 재능을 기부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또한 을이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써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그 일을 수락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논의의 공정함을 위해 갑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이 정말 좋은 곳이어서, 을의 재능기부는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을 스스로가 그 이익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본래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갑은, 동료에게 짓궂은 내기를 제안한 경제학자 A와 달리, 을에게 자신의 돈, 즉 ‘힘’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이 월급을 받아서 전액을 다시 갑의 ‘사회적기업’에 기부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갑의 돈은 을의 통장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기부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을에게는 없다. 을은 재능기부를 함으로써 ‘기부’ 그 자체뿐 아니라, 다른 그 어떤 행위도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건 마지못해 하는 일이건 일은 일이다. 좋아하던 것도 직업으로 삼으면 힘들긴 매한가지다. 개똥을 먹고 돈을 받는 경제학자들의 비유는 어쩌면 우리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사랑해도 매 순간 충만하고 행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물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처 다 파악하지도 못한 20대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제아무리 ‘좋은’ 포장지로 감싸도 노동착취일 뿐이다. 이 구조적 모순에 온몸으로 맞서는 후보에게, 이번 대선에서 나는 한 표를 던진다.

    입력 : 2012-11-28 21:24:44수정 : 2012-11-28 21:24:44

    2012-11-22

    『마르부르크 강령』에 대해 몇 가지





    이와 같이 트위터에 쓰자, 다음 답변이 돌아왔다.


    뭔가 취지가 잘못 전달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어서 첨언을 한다. 내 논점은 다음과 같다.

    1. 리스트의 목적사상이 형법과 법철학에 대단히 큰 자취를 남긴 업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고, 차병직이 해제에 쓴대로 그것은 오늘날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 그러나 국내에서는 목적론적 입법론에 기반하여 사회보호법과 보호감호를 시행하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 법의 역사상 큰 치욕 중 하나로 기억된다.
    3. 2의 맥락을 소개하지 않고 오직 1에만 치중하는 차병직의 해제는 (고종석 등 일부의 찬사와 달리) 비판적으로 독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형법이 특정한 법익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하며, 법익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가령 동성애에 대한 차별법 등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논리 전개가 리스트의 법철학에서 도출된다.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가 법익을 침해할 경우, 그것도 '상습적'으로 침해할 경우, 리스트의 법철학이 지니는 '인간적' 풍모는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리스트는 범죄자를 다음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눈다.

    1) 개선이 가능하고 개선을 필요로 하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개선.
    2) 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범죄자에 대해서는 위하.
    3) 개선이 불가능한 범죄자에 대해서는 무해화. (98쪽)

    그렇다면 '개선 불가능한 범죄자'는 어떻게 정의되고 또 어떤 대우를 받는가? 리스트는 요즘 유행하는 '사이코패스' 따위가 아니라, "걸인, 부랑자, 매춘부, 알코올중독자, 사기꾼, 뚜쟁이, 정신이나 육체가 퇴폐한 자" 등을 "모두 사회질서에 철저히 반하는 무리들이고,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집단이 바로 상습범들"(100쪽)로 바라본다. 그런데 범죄통계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누범자가 범죄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또 개선 불가능한 자가 누범자의 다수를 차지"(101쪽)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상습범에 대한 리스트의 궁극적 해법은 다음과 같다.

    개선 불가능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사형을 원하지 않고, 범죄자를 귀양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남은 방법은 평생 동안(또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감금하는 것뿐이다. (104쪽. 굵은 글씨는 원문, 밑줄은 인용자)

    우리는 사형을 '원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사형제가 언젠가는 폐지될 수 있겠지만, 리스트가 '개선이 불가능한 상습범'으로 몰아붙이던 이들의 자리에 '인간이 아닌 사이코패스'가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을 죽여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더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범죄자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발상은, 물론 그 말을 하는 사람이나 그 주장을 이어받는 이들의 개별적인 도덕성으로 인해 중화될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보호감호 사례를 하나만 들어보자. 절도 혐의로 구속된 지강현은 징역 10년에 보호감호 7년을 선고받았다. 당시의 사법기관들은 그를 "개선 불가능한 자들"의 일부로 보았고, 그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강현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그는 외쳤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한국 사회에 목적론적 법철학이 소개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거나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던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도 좋고 훌륭한 (법)철학들이 한꺼번에, 그 논쟁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우상(idol)으로 수입되는 것이 문제이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제들이, 정작 '원문'을 번역해서 제공하지는 않고, 자신들이 유학 시절 떼어온 책을 찔끔찔끔 찢어서 논문만 쓰는 식으로 전반적인 지성계를 소외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논의는 더욱 추잡해진다.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칸트, 들뢰즈, 헤겔, 스피노자가 무엇인지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이다.

    『마르부르크 강령』의 재출간은 바로 그 구태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사건이다. 목적론적 법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번역해 출간함으로써, 법학을 배우거나 법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도 이제는 그 실체를 어느 정도는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점에서 만족해도 되는 것일까? 차병직의 해제를 읽으며 새삼스러운 실망감을 느낀 것은, 내가 이 짧은 글에서 지적한 거의 모든 논의를 그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맥락에서 목적사상이 어떤 식으로 오용되어왔는지, 그에 대한 한국과 독일 및 기타 대륙법계 국가에서의 지적 반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전혀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2년의 리스트가 한국어로 출현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1882년의 리스트가 1988년의 지강현에게 도합 17년의 수감생활을 선고하게 된 그 맥락을 설명하고, 바로 그런 문제로 인해 리스트의 법철학조차 '문명화'되는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는 것을 말했어야 한다. 그런 고민과 배려 없이 학생과 대중들에게 그저 '쉽고', '재미있게', '고전'을 소개하려고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적 태만의 증거일지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싶다.

    프란츠 폰 리스트 지음, 차병직 옮김, 『마르부르크 강령』(서울: 강,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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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리스트의 법철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한계를 해제에서 전적으로 지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리스트의 견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위험한 면도 포함되어 있다. 교화의 필요성에 따라 형벌이나 보안처분이 지나치게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무용한 인간은 사회에서 완전히 쫓아내야 한다는 단호한 생각도 그대로 수용하기 쉽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알게 모르게 나치 정권에 이용되기도 했다. (161쪽)
    그러나 '단점'을 지적하는 것과, '역사적' 텍스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같지 않다. 오히려 전자의 활동을 통해, 특정 시대의 어떤 텍스트가 탈역사화되고, 우상이 되는 경우를 적어도 나는 너무도 많이 봐왔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 글에서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그러하다고 결정지어져 있는) '좋은' 글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과연 얼마나 타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지성계의 오랜 관성이며, 그 관성에 거스르고자 하는 자는 '엘리트주의자'라고 비판당하고 매도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누군가 그것을 하지 않거나 못한다고 해서 '지적 태만'등의 용어를 쓰는 것은, 내 강퍅한 심성의 발로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