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07

[2030 콘서트]지상 위의 방 한칸

[2030 콘서트]지상 위의 방 한칸

입력 : 2013-02-06 21:22:09수정 : 2013-02-06 21:22:09

이 신문이 하나의 건물이라고 생각해 보자.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1층이 1면이고, 맨 마지막 페이지의 광고는 건물 옥상에 얹혀져 있는 옥외광고라고 연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설은 꼭대기층에 놓여있는 펜트하우스 같은 것일 테고, 비슷한 방식으로 이런 저런 지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비유를 연장해보자. 어떤 신문이 필자에게 칼럼을 쓰게 해준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이해해 보자면, 어떤 공간을 임대해 준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건물주는 임대료를 받는 반면 신문사는 원고료를 준다. 하지만 건물주가 자신의 건물에 들어올 업체의 성격, 종류, 매출 규모 등을 세심하게 따지듯, 언론사 역시 ‘외부 필자’들을 선별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이 지면의 이름은 ‘2030콘서트’이다. 본인을 포함해 다섯 명의 젊은 필자가 돌아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바로 그 지면의 속성과 내력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리는 작년말 대선과정 및 ‘멘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0대 담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2008년 무렵이다. <88만원 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촛불시위 과정에서 ‘촛불소녀’로 불리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솟아올랐으며, 반대급부로 역시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명박 찍어놓고 등록금 올랐다고 울먹거리는 바보들’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불쌍해서건, 피터지는 ‘스펙’ 싸움을 해야 해서건, 자기들이 정권 뺏겨놓고 20대 투표율이 낮아서 졌다고 우기는 386에게 매도를 당하고 있어서건, 20대는 어떤 식으로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른바 ‘20대 논객’들이 몇명 거론되고, 그들을 한데 묶어 신문 지면을 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 활동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20대 논객’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나이를 먹어 30대에 접어들자 ‘20대 논객’은 ‘2030 논객’이 되었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비슷한 구성원들이, 필자가 군 입대로 인해 2년여의 공백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하나의 공간을 함께 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신문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자면, ‘20대 필자’들 혹은 ‘2030 논객’들은 여전히 고시원 혹은 자취방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30 논객들이 신문지상의 방 한 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모습은, 바로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세대의 현황을 거의 완벽하게 은유하고 있다. 고시원에 사는 20대가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지 않듯, 2030 필자들이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 역시 어떤 형식의 일상이 되었다.

20대 담론의 이름으로 제기된 수많은 문제들 중 유독 반값등록금만이 사회적 의제로 자리잡은 것은, 그것이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인 20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 등록금을 내거나 최소한 보증이라도 서줘야 할 그들의 부모가 얽힌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모들은 몇몇 보수적 일간지의 적극적인 여론몰이에 힘입어, ‘하우스푸어’라는 불행의 완장을 차고 선거 국면을 주도했다. “우리 집값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너희들 등록금이라도 내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소비자 주권의식 하에 두 세대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거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것은 ‘일하는 20대’의 신음소리요, 살아남은 것은 ‘돈 내는 20대’의 함성이었다. 20대 담론은 막을 내린 것이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절필 선언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 다만 함께 생각하면서 다음 단계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불쌍한 20대’ 그 너머의 무언가를.

2013-01-03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을 회상할 때, ‘미리엘 주교의 용서로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몇 년 후 막대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라고만 기억한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19년간 징역을 살고 돌아온 장발장이라는 한 사내가 단지 ‘삐뚤어진 내면’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였노라고, 그래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가 만든 이야기와 다르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을 용서해준 순간, 크게 놀랐지만 당장 개심하지는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놓친 동전을 발로 밟아 빼앗은 후 자신은 은그릇을 훔친 것도 용서받았으면서 어린애의 돈이나 강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가. 위고가 묘사하는 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번 징역을 살고 나면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예 다른 색깔의 신분증이 발급되며, 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요컨대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토록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호관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감옥 밖의 세상으로부터 또 한번 탈출한다. 우리가 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자베르가 쫓아와 다시 도망가는 장발장’은, 애초에 그가 보호관찰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캐릭터이다. 지금의 현실에 억지로 대입해본다면, 전자발찌를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로 내몰고 범죄자들을 결코 다시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계속 쫓겨다니는 선량한 사람. 이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다. 파업을 해서 전과자가 되고 손해배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는 사회 밖으로 간단히 추방된다. 관객들이 ‘도망친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에게 감정이입할 때, 그들은 또 한번 잊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에게 그의 장발장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장발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시 우리 사회로 끌어안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힐링’은 값싼 자기 위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3-01-02 20:54:14ㅣ수정 : 2013-01-02 22:59:56

2012-12-31

2012년 독서 목록

  1. 20120112 - 프리드리히 키틀러, 윤원화 옮김,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 - 예술, 기술, 전쟁』(서울: 현실문화, 2011)
  2. 20120114 - Terry Eagelton, /The Meaning of Lif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3. 20120118 - 홍기빈, 『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서울: 책세상, 2011)
  4. 20120120 - 에릭 A. 해블록, 이명훈 옮김, 『플라톤 서설』(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1)
  5. 20120125 - 프란츠 카프카, 이재황 옮김,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서울: 문학과지성사, 1999)
  6. 20120127 - 리처드 플로리다, 이원호, 이종호, 서민철 옮김, 『도시와 창조 계급』(서울: 푸른길, 2008)
  7. 20120131 - 서형, 『부러진 화살』(서울: 후마니타스, 2012), 개정판.
  8. 20120206 - Chris Hedges, /Death of the Liberal Class/ (New York: Nation Books, 2010)
  9. 20120208 - W. G. 제발트, 『아우스터리츠』(서울: 을유문화사, 2009)
  10. 20120212 - Roy F. Baumeister, John Tierney /Willpower: Rediscovering the Greatest Human Strength/ (New York: The Penguin Press, 2011).
  11. 20120226 - 맥스 브룩스, 장성주 옮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서울: 황금가지, 2011)
  12. 20120228 - 아룬다티 로이, 최인숙 옮김, 『생존의 비용』(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13. 20120306 - 브룩 글래드스톤 글, 조시 뉴펠드 그림, 권혁 옮김, 『미디어 씹어먹기』(서울: 돋을새김, 2012)
  14. 20120319 - 조너선 스턴, 윤원화 옮김, 『청취의 과거: 청각적 근대성의 기원들』(서울: 현실문화, 2010)
  15. 20120325 - 조너선 샤프란 포어, 송은주 옮김,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서울: 민음사, 2011)
  16. 20120326 - 제임스 길리건, 이희재 옮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서울: 교양인, 2012)
  17. 20120326 - 리처드 윌킨슨, 김홍수영 옮김, 『평등해야 건강하다』(서울: 후마니타스, 2008)
  18. 20120409 - 페리 앤더슨, 안효상, 이승우 옮김, 『현대 사상의 스펙트럼: 카를 슈미트에서 에릭 홉스봄까지』(서울: 길, 2011)
  19. 20120418 - 류짜이푸, 임태홍, 한순자 옮김, 『쌍전: 삼국지와 수호지는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2)
  20. 20120418 - 제임스 R. 베니거, 윤원화 옮김, 『컨트롤 레벌루션: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기원』(서울: 현실문화연구, 2009)
  21. 20120421 - 박성민, 강양구 대담, 『정치의 몰락』(서울: 민음사, 2012)
  22. 20120429 - 정준호,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서울: 후마니타스, 2011)
  23. 20120511 - 셰리 버먼, XXX 옮김, 『정치가 우선한다』(서울: 후마니타스, 2011(?))
  24. 20120512 - 이영준, 『페가서스 10000마일』(서울: 워크룸프레스, 2012)
  25. 20120513 - 카를 슈미트, 나종석 옮김,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서울: 길, 2012)
  26. 20120521 - 막스 베버,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소명으로서의 정치』(서울: 후마니타스, 2011)
  27. 20120524 - 김상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서울: 꾸리에, 2012)
  28. 20120528 - 포시디우스, 이연학, 최원호 옮김,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경상북도 대구: 분도출판사, 2008)
  29. 20120531 - 루돌프 파이퍼, 정기문 옮김, 『인문정신의 역사』(서울: 길, 2011)
  30. 20120603 -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알리스테어 스미스 지음, 이미숙 옮김, 『독재자의 핸드북: 사상 최악의 독재자들이 감춰둔 통치의 원칙』(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12)
  31. 20120603 - 김두식, 『욕망해도 괜찮아』(경기도 파주: 창비, 2012)
  32. 20120604 - 강영안,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경기도 파주: 한길사, 2012)
  33. 20120613 - 세라 손튼, 이대형·배수희 옮김, 『걸작의 뒷모습』(서울: 세미콜론, 2011)
  34. 20120617 - 노라 에프런, 김용언 옮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서울: 반비, 2012)
  35. 20120827 - 사사키 아타루, 송태욱 옮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서울: 자음과모음, 2012)
  36. 20120831 -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서울: 김영사, 2012)
  37. 20120906 -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옮김, 『지적 생활의 발견』(경기도 고양시: 위즈덤하우스, 2011)
  38. 20120909 - 와타나베 쇼이치, 김욱 옮김, 『지적으로 나이드는 법』(경기도 고양시: 위즈덤하우스, 2012)
  39. 20120912 - 김용언, 『범죄소설 - 그 기원과 매혹』(서울: 강, 2012)
  40. 20120920 - 히가시노 게이고, 양억관 옮김, 『용의자 X의 헌신』(서울: 현대문학, 2007)
  41. 20120923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위로하는 정신: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경기도 파주: 유유, 2012)
  42. 20120925 - 찰스 다윈, 이한중 옮김, 『찰스 다윈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서울: 갈라파고스, 2003)
  43. 20121017 - 티에리 크루벨리에, 전혜영 옮김, 『자백의 대가: 크메르 루즈 살인고문관의 정신세계』(경기도 파주: 글항아리, 2012)
  44. 20121018 - 김종배, 『30대 정치학』(서울: 반비, 2012)
  45. 20121025 - 장우철, 『여기와 거기』(경기도 파주: 난다, 2012)
  46. 20121101 - 위화, 김태성 옮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2)
  47. 20121112 - 이반 투르게네프, 최진희 옮김, 『첫사랑』(서울: 펭귄클래식 코리아, 2008)
  48. 20121118 - 프란츠 폰 리스트, 심재우, 윤재왕 옮김, 차병직 해제, 『마르부르크 강령』(서울: 강, 2012)
  49. 20121123 - 브뤼노 라투르, 이세진 옮김, 김환석 감수,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경기도 고양: 사월의책, 2012)
  50. 20121126 - 김어준, 지승호 엮음, 『닥치고 정치』(경기도 파주: 푸른숲, 2011)
  51. 20121127 - 김어준, 『건투를 빈다』(경기도 파주: 푸른숲, 2008)
  52. 20121129 - 김규항, 김어준 대담, 고경태 정리,『쾌도난담』(서울: 태명, 2000)
  53. 20121210 - 셸리 케이건, 박세연 옮김, 『죽음이란 무엇인가』(서울: 엘도라도, 2012)
  54. 20121217 - 이진, 『원더랜드 대모험』(서울: 비룡소, 2012)
  55. 20121220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 - 고전적 자본주의 옹호론』(서울: 나남출판, 1994)
  56. 20121226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1』(서울: 민음사, 2012)
  57. 20121227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2』(서울: 민음사, 2012)
  58. 20121231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3』(서울: 민음사, 2012)



    상반기는 군생활, 하반기는 밥벌이. 여러모로 아쉬웠던 한 해였습니다.

    2012-12-12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이 사건의 경우 '이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거나 겁을 주는 일이, 두 방향 모두에서 가능하다. 국가정보원이 문재인 후보를 비방하는 악성댓글을 다는 방식으로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제보를 받고 강남의 한 오피스텔을 경찰과 선관위, 기자들이 급습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국가정보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찰', 혹은 '권력기관의 권한 남용'이 언제든지 당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반대로 그 사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퇴근 후에 집에서 익명으로 악성댓글을 달고 있다고 해서 경찰이 문을 따고 쳐들어오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실질적으로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편다.

    스스로를 어떤 주체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 입장은 갈라진다. 자신을 여당 혹은 현 정부의 대립하는 '야당적 주체'로 바라본다면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매우 경악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공권력'의 반대편에 있는 한 '개인으로서의 시민'으로 본다면, 고작 인터넷에서 악성댓글을 단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집에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 의혹이 있더라도 말이다.

    이 사건이 지리멸렬하게 전개되면서 정치적으로 악영향 혹은 반작용만을 불러일으킬 경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우려가 동시에 현실화될 수도 있다. 요컨대 현재의 '야권'은 계속 검찰과 국정원 등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그와 정비례해서 시민적 자유에 대한 침해도 커지는 것 말이다. 해당 사안을 두고 벌이는 언론플레이의 수준과 사건의 전개 과정을 놓고 볼 때, 사태는 더욱 비관적이기만 하다. 결국 이 모든 일들이 당신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도록 되어가는 것 같다.

    2012-12-11

    [2030 콘서트]재능기부와 개똥 먹기

    [2030 콘서트]재능기부와 개똥 먹기

    경제학자 두 명이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다. 경제학자 A가 B에게 제안했다. 자네가 저 개똥을 먹으면 내가 100달러를 주겠네. B는 고심 끝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100달러를 벌었다. 좀 더 가다보니 개똥이 또 하나 나왔다. 이번에는 B가 A에게 같은 제안을 했고, A가 개똥을 먹어서 100달러를 B로부터 받았다.

    정산을 해보자. 두 사람 모두 개똥을 먹었고, 100달러씩 벌었지만 또 100달러를 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개똥만 먹고 한 푼도 못 번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달러씩 서로 두 번 거래를 한 셈이어서, GDP(국내총생산)는 200달러 올라간다. GDP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과 삶을 제대로 반영해주지는 못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할 때 경제학자들이 인용하곤 하는 경제 우화 중 하나다.

    이 지저분한 이야기는 그러나, 모종의 깔끔한 ‘상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 한다. 업무를 완수하면 ‘요즘 경기가 통 안 좋아서’같이 구질구질한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B가 A의 제안을 받아들여 본인도 100달러를 벌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들에게는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다.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상 속에 두 명의 경제학자와 두 개의 개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A와 B가 100달러를 매개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A의 제안을 받았을 때 B는 100달러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구강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100달러를 벌게 된 B는 또 반대로,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고,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담뱃불을 붙이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A에게 같은 제안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 시점에서 말하자면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B이다. 그에게는 100달러가 있지만 A에게는 없다. 100달러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A가 아니라 B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돈은 곧 힘이다. A는 B에게 개똥을 먹이는 대신 그만큼 자신의 ‘힘’을 넘겨준 것이다.

    여기서 우화의 형태를 조금 바꿔보자. 갑은 모종의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고, 을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다. 이 조합이라면 갑이 을에게 ‘젊은 벗의 재능을 기부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또한 을이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써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그 일을 수락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논의의 공정함을 위해 갑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이 정말 좋은 곳이어서, 을의 재능기부는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을 스스로가 그 이익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본래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갑은, 동료에게 짓궂은 내기를 제안한 경제학자 A와 달리, 을에게 자신의 돈, 즉 ‘힘’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이 월급을 받아서 전액을 다시 갑의 ‘사회적기업’에 기부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갑의 돈은 을의 통장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기부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을에게는 없다. 을은 재능기부를 함으로써 ‘기부’ 그 자체뿐 아니라, 다른 그 어떤 행위도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건 마지못해 하는 일이건 일은 일이다. 좋아하던 것도 직업으로 삼으면 힘들긴 매한가지다. 개똥을 먹고 돈을 받는 경제학자들의 비유는 어쩌면 우리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사랑해도 매 순간 충만하고 행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물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처 다 파악하지도 못한 20대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제아무리 ‘좋은’ 포장지로 감싸도 노동착취일 뿐이다. 이 구조적 모순에 온몸으로 맞서는 후보에게, 이번 대선에서 나는 한 표를 던진다.

    입력 : 2012-11-28 21:24:44수정 : 2012-11-28 21:2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