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1

한 편의 글을 남들 앞에 내놓는 데 가장 필요한 것

한 편의 글을 남들 앞에 내놓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뻔뻔스러움'인 것 같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게 될수록 자기의 지식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를 파악한 연후에야 그것을 발표해야 한다면 그 누구도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단 한 줄의 글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를 구실삼아 감히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3쪽, 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서울: 푸른나무, 1992)

2013-04-09

[2030 콘서트] 당시의 관행, 지탄만 할 건가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3월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새 정부가 야심차게 구상한 부처 개편도 이루어졌고, 4월9일 현재 아직 해양수산부 장관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자리가 공석이긴 하지만 대략 인선도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장관 인사가 끝나면 그 아래로 줄줄이 인사 개편이 이루어질 것이고 비로소 마비 상태였던 국정 업무가 수행될 수 있을 터다.

이중국적 문제로 낙마한 김종훈 후보자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아무튼 독특한 논점을 제시했다. 그와 달리 다른 경우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그만큼 지리멸렬한 소재들로 검증받았다.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의무 이행 여부, 논문 대필, 법인카드 유용 등이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넣고 필터링을 해보니,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무려 장·차관급 7명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을 놓고 봐도, 그것은 그들이 절대적으로 깨끗해서가 아니라, 그저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수준이기에 용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내놓는 핑계에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고. 돈이 생기면 지방에 땅을 사는 것, 그것은 관행이었다고. 실소유자인 본인이 아니라 미성년자인 자녀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것 역시, 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하고 있는, 관행이었다고. 그렇게 가갸거겨를 배우기도 전에 땅부자가 되어 있던 아들이 병역 면제를 받도록 슬쩍 힘을 쓰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관행대로 한 것뿐이라고.

이토록 인간적인 핑계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잃고 분노하지 말고, 그 내면의 논리를 잘 살펴보자. 아마도 저 해명의 방식은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실한 답변일 것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다. 다들 그렇게 해왔던 것이니만큼 내가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사청문회에서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다양한 사례에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냥 하던 대로 집 앞 차도를 무단횡단하고, 카드로 계산하면 6500원인 백반집에서 현금으로 6000원만 내는 그런 사소한 탈세를 한다. 그 상황에서 국세청 직원에게 붙들리면 아마 나나 당신도 거의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들 이러는데,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전에 없이 수많은 후보자들이 거론되고, 그들이 모두 하나같이 오늘날의 도덕성에는 맞지 않음이 드러났으며, 그 이유를 과거의 관행에서 찾고 있는 이 모습에서 ‘박근혜 정부의 부도덕성’을 탓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이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법과 도덕이 21세기의 현 시점에 부합할 만큼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이 당시 관행대로 위장전입을 하고, 탈세를 하며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해온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다 그렇게 했다고 치자. 그런데 오늘날 도덕적 기준이 바뀌었다면, 그것에 대해 응분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단지 ‘낙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후보자들뿐 아니라 당시의 관행에 편승한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면죄부를 받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관행대로 했다는 개인들을 불러놓고 면박을 주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봐야,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방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공직에 나서서 검증당하는 과정을 회피할 유인동기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시절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에 대해 조금 더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눈에 띄는 사람들만 비난하고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관행을 이겨낼 수 없다. 단호하고 적극적인 부동산 세제 개혁이 해법일지 모른다.


입력 : 2013.04.09 21:18:4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092118435&code=990100&s_code=ao051#csidxa0b659565e4781aad68f9d76c3b97ce

2013-03-06

[2030 콘서트] 내가 보수논객이다

지금보다 열살가량 어렸던 시절, 한창 혈기 넘치던 나는 지워버린 블로그에 이런 내용을 적어두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이 박힌 젊은이는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안보를 걱정하는 좌파로 살 것인가, 분배를 근심하는 우파로 살 것인가.”

이런 식의 ‘자기 인용’이 대단히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보니 저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일간지들의 사설을 검토해보자. 이른바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쪽이건 그 반대편이건, ‘유능한 재외동포가 국내에 들어와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우리가 박탈한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국민국가 체계 속에 살고 있다. 국민국가 시스템의 핵심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며, 국민은 국가의 일원으로 그 ‘공적 폭력’의 일부가 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국민 중 군복무에 지장을 주는 장애를 갖지 않은 남성은 징집 대상이 되며, 그 외 국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경우 그 깃발 아래 적국의 국민을 죽이거나 그 일에 협력한다는 뜻이다. 미 해군에서 군복무를 한 김종훈 전 후보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 해군의 수병들과 함께 ‘Sailor’s Creed’를 수도 없이 복창했을 것이고,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충성 맹세(Oath of Allegiance)”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모국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전투 및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이 그 선언문 속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참조: http://deulpul.net/3932189).

이것이 국민국가의 본질이다. 언제라도 다른 국민국가와 전쟁을 할 수 있고, 그에 대비하는 무력집단이 바로 국가다. 그리고 국적은 어떤 사람이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 여부를 지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신분상의 지표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혈맹’이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며 특히 국제정치는 더욱 그렇다. 지금도 한국의 국익은 미국의 그것과 자주 충돌한다. 외국인에게 외교, 안보, 국방과 관련한 고급정보가 수도 없이 오가는 내각의 문호를 개방하는 처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스스로 ‘편협한 국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이 사안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른바 진보진영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반대로, 가령 본명이 로버트 할리인 귀화 한국인 하일씨가, 심지어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미국에서 장관 후보로 지명되는 모습을 진지하게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광경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한국 국적조차 없었던 누군가를 장관으로 뽑으려다 실패하는 것은 왜 ‘안타까운 일’로 간주되는가?

미국인으로서 충성 맹세를 하고 30여년을 산 사람이, 단지 한국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적도 없는 상태에서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어떤 한국인이 이른바 ‘코시안’ 혹은 ‘다문화’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미국인이 단지 한국계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장관 후보가 되는 것은 인종적 편견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한쪽에는 불이익을, 다른 쪽에는 특혜를 주고 있지만, 둘 다 인종차별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관을 미국인 중에서 뽑는다. 상식선에서 반대하면 충분한데, 그걸 지적하는 이석기 의원은 무책임하게 ‘CIA 스파이설’을 퍼뜨렸고 진보언론이 편승했다. 하지만 그는 CIA의 스파이가 아니어도 한국의 장관 후보로 부적절했다. 한국계 미국인은 국적상으로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국가관이 이 모양인데, 국가정보원 직원은 유머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보수논객 변모씨는 그 국정원에서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이 ‘넓은 의미에서’ 북한 추종자라고 강연한다. 촛불시위에 꼬박꼬박 나갔던 진보논객이 나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스무살의 고민은 서른살이 되어도 여전하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보수논객 해야겠다.


입력 : 2013.03.06 21:31:56 수정 : 2013.03.06 23:29:4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62131565&code=990100&s_code=ao051#csidxc053004a959f015a2ad9f881c450edd

워즈니악이 제주 여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상이 되는 글은 여기. "美 컴퓨터 고수, 제주 女고생에 e메일로 ‘격려 답장’"

워즈니악 본인이 말을 꼬아서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이 한 번역에 이러저러하게 토를 다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부분은 중요한데 오해의 여지가 있어 첨언한다.

어플리케이션들은 마치 가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틀을 만들지 않는 이상 무한한 종류의 가구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미래에 커다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의 맥락이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위에 링크된 기사의 마지막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저것은,

Apps are like furniture. There are infinite variations until we have a few standards that change little. So this is a huge opportunity in the future.

의 번역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은 '우리가 그다지 바꿀 게 없는 몇몇 표준형을 갖게 될 때까지, 무한히 많은 변종들이 있(었ㅅ)읍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문장도 말이 된다.

우리의 삶이 '앱', 혹은 컴퓨터과 맺는 관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가구로 뭘 할지 이제 대충 다 안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의자에 앉고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고 등등. 우리는 '책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책상'이라는 단일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저기서 말하는 "standard"일 것이다.

반면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지금도 계속 새로운 소프트웨어, 혹은 서비스의 범주가 창출되고, 또 사라진다. 사람이 컴퓨터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표준안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 혼란과 부정형성이 아직 '열린 기회'의 역할을 한다고, 그러니 앞질러 좌절하지 말라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그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컴퓨터 혁명이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하고 있고,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음을 뜻한다. '당신이 잡스랑 같이 애플을 만든 워즈죠? 그럼 저는 당신같은 슈퍼스타가 될 수 없겠네요?'라는 가상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소리.

그러니까 이렇게 착하게, 시제도 묘하게 어긋난 문장을 써가며 제주도의 한 고등학생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편지를 읽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선량한 사고와 친절한 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을 어느정도 역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2013-02-07

[2030 콘서트]지상 위의 방 한칸

[2030 콘서트]지상 위의 방 한칸

입력 : 2013-02-06 21:22:09수정 : 2013-02-06 21:22:09

이 신문이 하나의 건물이라고 생각해 보자.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1층이 1면이고, 맨 마지막 페이지의 광고는 건물 옥상에 얹혀져 있는 옥외광고라고 연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설은 꼭대기층에 놓여있는 펜트하우스 같은 것일 테고, 비슷한 방식으로 이런 저런 지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비유를 연장해보자. 어떤 신문이 필자에게 칼럼을 쓰게 해준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이해해 보자면, 어떤 공간을 임대해 준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건물주는 임대료를 받는 반면 신문사는 원고료를 준다. 하지만 건물주가 자신의 건물에 들어올 업체의 성격, 종류, 매출 규모 등을 세심하게 따지듯, 언론사 역시 ‘외부 필자’들을 선별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이 지면의 이름은 ‘2030콘서트’이다. 본인을 포함해 다섯 명의 젊은 필자가 돌아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바로 그 지면의 속성과 내력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리는 작년말 대선과정 및 ‘멘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0대 담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2008년 무렵이다. <88만원 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촛불시위 과정에서 ‘촛불소녀’로 불리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솟아올랐으며, 반대급부로 역시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명박 찍어놓고 등록금 올랐다고 울먹거리는 바보들’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불쌍해서건, 피터지는 ‘스펙’ 싸움을 해야 해서건, 자기들이 정권 뺏겨놓고 20대 투표율이 낮아서 졌다고 우기는 386에게 매도를 당하고 있어서건, 20대는 어떤 식으로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른바 ‘20대 논객’들이 몇명 거론되고, 그들을 한데 묶어 신문 지면을 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 활동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20대 논객’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나이를 먹어 30대에 접어들자 ‘20대 논객’은 ‘2030 논객’이 되었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비슷한 구성원들이, 필자가 군 입대로 인해 2년여의 공백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하나의 공간을 함께 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신문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자면, ‘20대 필자’들 혹은 ‘2030 논객’들은 여전히 고시원 혹은 자취방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30 논객들이 신문지상의 방 한 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모습은, 바로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세대의 현황을 거의 완벽하게 은유하고 있다. 고시원에 사는 20대가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지 않듯, 2030 필자들이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 역시 어떤 형식의 일상이 되었다.

20대 담론의 이름으로 제기된 수많은 문제들 중 유독 반값등록금만이 사회적 의제로 자리잡은 것은, 그것이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인 20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 등록금을 내거나 최소한 보증이라도 서줘야 할 그들의 부모가 얽힌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모들은 몇몇 보수적 일간지의 적극적인 여론몰이에 힘입어, ‘하우스푸어’라는 불행의 완장을 차고 선거 국면을 주도했다. “우리 집값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너희들 등록금이라도 내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소비자 주권의식 하에 두 세대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거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것은 ‘일하는 20대’의 신음소리요, 살아남은 것은 ‘돈 내는 20대’의 함성이었다. 20대 담론은 막을 내린 것이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절필 선언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 다만 함께 생각하면서 다음 단계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불쌍한 20대’ 그 너머의 무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