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30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포유동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난 새끼가 어미의 젖을 먹고 크는 동물이라고 말이다. 물론 오리너구리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포유류는 그렇다. 그리하여 포유류는 배꼽을 가지고 있다. 어미의 자궁 속에서 산소와 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성장하기 위한 생명줄이 탯줄이며, 탯줄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배꼽이다.

포유동물의 아기들은 종종 태어나는 과정에서 탯줄이 목에 감겨 죽곤 한다. 여태까지는 생명선 노릇을 했던 탯줄 때문에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고 마는 것이다. 한 번 끊어진 탯줄은 다시는 복원될 수 없다. 태어나는 것은 곧 이별이다. 탯줄을 제때 끊지 못하면, 그것이 목에 감기기라도 하면, 새로운 생명은 탄생할 수 없다.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화를 나눌 때, ‘걔는 탯줄을 잘 잡아서’ 같은 표현을 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탯줄을 잘 잡았다니, 무슨 말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누리고 부족함 없는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소리다.

궁지에 몰린 자신에게, 마치 동화 ‘햇님 달님’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청년 세대는 철저히 체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 탯줄을 잘못 잡으면 떨어지고, 탯줄을 잘 잡으면 올라간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탯줄 결정론’이라고 명명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호응을 얻는, 최근 들어 퍼지기 시작한 삐뚤어진 사고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혹은 지구 전체의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을 지배해왔던 관념일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양반과 상놈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 기타 등등.

탯줄 결정론을 극복하기 위해 박혁거세는 본인이 포유류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했다. 포유동물이 아니라 난생동물이라고, 알에서 태어났다고 탄생 설화를 퍼뜨린 것은, 그의 부계 혈통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똑같이 나라를 세웠어도 백제의 비류와 온조는 부여의 왕족임을 천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탯줄을 잘 잡은 비류와 온조는 탯줄을 과시했지만, 탯줄을 잘못 잡았던 박혁거세는 스스로를 반인반신으로 포장해야 했을 터이다.

그 후로는 탯줄 달고 태어나는 포유동물의 역사였다. 비로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고, 남쪽은 미국을 등에 업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났다.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핵우산을 포함한 군사적 안보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값싼 공산품을 생산하여 주기를 원했다. 북한과 맞서기 위해 경제와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박정희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했다. 고도성장이 시작되었고,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것만 같았다.

2014년은 단기로 4347년이다. 4347년에 걸친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대다수의 인구 구성원들이 탯줄 결정론을 부정할 수 있었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면 ‘팔자’가 달라진다고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문제는 그 예외적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요구해야 할, 당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일 테지만,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 너는 탯줄을 잘 잡았구나, 너희 집이 원래 부자라서 그런가보구나, 비아냥거리고 냉소하는 젊은 세대의 태도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로, 그들의 목에 감긴 탯줄로 인해 질식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튼튼하고 좋은 탯줄을 잡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승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예정된 그런 포유동물들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탯줄에 목이 졸려 죽어갈 때, 다른 이는 좋은 탯줄을 잡고 그들만의 천국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4000년의 부조리와 불공정한 질서가 돌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이여, 탯줄을 끊어라.


2014-03-25

[북리뷰]인터넷 속 인공지능 갖춘 가상 존재

[북리뷰]인터넷 속 인공지능 갖춘 가상 존재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테드 창 지음·김상훈 옮김·8800원·북스피어

과학 학술 전문지 <사이언스>에 나온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의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고 사회적 기술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에 놓여 있는지 곧바로 파악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그런 능력을 길러준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연구는 그 소설의 범위를 고전에 한정지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가 그 고전들이 쓰여졌던 19세기나 20세기 초와는 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능력을 키워주는 소설의 목록 역시 꾸준히 업데이트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리얼타임으로 ‘현대의 고전’ 목록을 새로고침하고 있다면, 테드 창의 작품들은 그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테드 창은 ‘수줍은’ 작가지만, 셀린저처럼 한 편의 히트작을 내놓은 후 영영 종적을 감추는 그런 식의 은둔자가 아니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꾸준히 중편이나 단편을 발표하며, 그렇게 소설을 내놓을 때마다 SF(과학소설) 분야의 주요 문학상을 휩쓰는 사람이다.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글로 먹고 살기 위해 원치 않는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자신의 생업을 유지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한 사람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바로 그 테드 창의 최신작이다. 그는 이른바 ‘하드 SF’적인 엄밀한 설정과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캐릭터의 선택과 감정을 한 겹씩 포개놓는다.

소설 속 세계의 인터넷은 현재 우리가 쓰는 것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마치 2000년대 초 인기를 끌었던 사이버 스페이스 게임인 ‘세컨드 라이프’처럼, 자신의 아바타를 설정해 가상 공간에서 대화하는 ‘데이터어스’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는 세상이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 애니는 그 ‘데이터어스’ 속에서 작동하는 디지언트(digient), 즉 인공지능을 갖춘 가상 존재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원래 그는 동물원에서 근무하는 유인원 사육사였지만, 일하던 동물원은 폐쇄되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컴퓨터 인공지능, 가상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가상 존재의 인공지능이 마치 유인원의 그것처럼 감정적 교류와 정서적 교감을 통해 발전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게놈 엔진이 개발됐다.

애니는 이제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데이터어스에 접속하지 않으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하지만 자신을 엄마처럼 믿고 따르며 아기처럼 말을 배우고 더듬거리며 애정을 요구하는 ‘소프트웨어 객체’를 길러야 한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오늘날 아이폰 사용자들은 ‘시리’와 대화를 나누고, 구글 검색창은 우리가 검색하고 싶어할 내용을 미리 파악해서 눈앞에 던져준다. 인공지능,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모사하는 컴퓨터, 그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착 등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닌 것이다.

한국은 수천만 건의 개인 정보가 유출된 후 USB를 돌려받았다는 이유로 ‘개인 정보를 회수했다’고 발표하는 기술맹(盲) 사회다. 소설의 범위, 인문학의 범위, 고전의 범위를 SF까지 확장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업데이트’는 요원할 듯하다. 독자들께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3180950001&code=116

2014-03-10

[북리뷰]신의 이름으로 장부를 기록하다
2014 03/11ㅣ주간경향 1066호

<1494 베니스 회계>
루카 파치올리 지음·이원로 옮김·다산북스·2만3000원

루카 파치올리는 15세기에 활동한 수학자이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였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지식인 계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단히 재산이 많아서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읽고 쓰고 공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했다.

세속으로부터 가장 먼 삶을 살아야 할 기독교 수도사가 가장 세속적인 주제라 할 수 있는 상인의 장부 기록법에 대한 책을 쓴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Summa de Arithmetica, Geometirica, 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라는 책을 토스카나어와 베네치아어로 써냈다.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시피 <Summa>는 대수학, 기하학 등 수학의 각종 영역을 넓게 다루어 집대성한 책이다.

문제는 그 중 포함되어 있는 ‘Treatise de Computis et Scripturis’라는 부분이다. 번역하자면 ‘상업적 계산과 기록’이라는 뜻이며, 말 그대로 상인에게 필요한 계산 및 기록법이 적혀 있다.

그 ‘계산과 기록’이란 다름 아닌, 괴테가 “인간의 지혜가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고 극찬하기까지 한 복식부기법이다.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을 앞두고 나경원 후보와 박원순 후보가 논쟁을 하면서 때아닌 화제가 되기도 했던 복식부기는 어떤 거래가 있을 경우 그것을 원인과 결과에 따라 나누어 동시에 기록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신용카드로 7000원을 내고 국밥을 한 그릇 사먹었다고 해보자. 그것을 ‘-7000원 국밥’으로 적어둘 수도 있겠지만, 복식부기 방식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저녁식대 7000 // 미지급금(신용카드) 7000.’

이 차이는 명백하다. 단식부기가 아니라 복식부기를 택함으로써 내가 쓴 7000원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명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식부기식으로 적어두면 지금 사용한 7000원이 나중에 신용카드 결제일에 또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며 혼란을 겪게 되지만, 복식부기를 해놓으면 그럴 우려가 없다.

그래서 15세기의 수도사는 “누구라도 한눈에 거래내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인(돈을 꾼 사람)과 대인(돈을 빌려준 사람)으로 정리·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러나 <1494 베니스 회계>는 오늘날의 실용서들과는 퍽 다른 인상을 준다. 모든 재산을 기록하고 목록으로 만들며 그 경제적 가치를 파악하라는 내용은 극히 세속적이지만, “상인은 그의 모든 장부의 첫 머리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내용은 영락없는 종교 서적이다.

세계 최초로 복식부기에 대해 설명하고 기록하는 <1494 베니스 회계>에는 이렇듯 종교적인 가르침과 경건한 태도가 한껏 스며들어 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결코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닌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장부를 적는 상인의 경건함과 정직함이 없다면, 서로의 신용을 걸고 거래하며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자본주의는 거대한 투전판으로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모든 사안을 이중으로 기록함으로써 기록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출발점인 셈이다. 회계 조작으로 경영 손실을 만들어내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가 공부해야 할 책이다.

<노정태 번역가/자유기고가>

2014-03-07

시사통 김종배입니다 [14.03.07.am] B급 첩보영화 찍냐?

2014년 3월 7일 금요일 오전 방송 내용입니다. 정치학의 고전인 <절반의 인민주권>을 다루고 있습니다.


▶ 팟빵 : http://www.podbbang.com/ch/7260
▶ 아이튠즈 : https://itun.es/kr/LI5mX.c
▶ 시사통 홈페이지: http://sisatong.net/

다루고 있는 책의 구체적인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E.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저는 9분 45초 무렵부터 출연합니다. 많은 호응 바랍니다.

2014-03-02

[논객시대] 좌담회 (1) - 박해천 선생님과의 대화

『논객시대』의 출간을 기념하여 세 번의 좌담회가 열립니다.

3월 7일 금요일에는 그 중 첫 번째 시간으로, 『인터페이스 연대기』,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을 쓰신 박해천 동양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님과의 좌담이 있습니다. 장소는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이며, 시간은 오후 7시입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만든 홍보용 이미지(요즘은 '웹자보'라는 표현도 더러 씁니다만)를 첨부합니다. 2강과 3강도 예정되어 있음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은 여기서 하실 수 있습니다.(http://blog.aladin.co.kr/culture/6904597)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은 이런 곳에 있습니다.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이나 1호선 회기역을 통해 오시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