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3-31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 군가산점과 청춘

제1회 여정남학교 초청 강연 원고입니다.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신 행사 주최측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북대학교 학생 여러분들과 뜻깊은 논의의 시간을 갖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강연문의 내용은 실제 강연장에서 한 발언과 다를 수 있습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나 - 군가산점과 청춘

1.

안녕하세요. 제1회 여정남학교의 초대를 받아 이 곳에 온 강연자 노정태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군가산점과 청춘'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군가산점을 요구하는 일부, 혹은 대다수 남성들에게, 그렇게 해서는 본인의 청춘에 대한 올바른 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군가산점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특히 남자들이 손가락질하고 권리를 요구해야 할 대상은 여성가족부가 아니라 국방부라는 이야기도 할 것입니다.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논의의 과정에서, 향후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 한국 사회가 그렇게 바뀌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그 과정에서 본인의 청춘이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빛나게 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부족하게나마 대답해보고자 합니다.

일단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자신의 신원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저는 2010년 10월 11일 논산훈련소를 통해 입대하여 2012년 7월 18일 제대했습니다. 칼럼을 쓰거나 할 때에는 대체로 자유기고가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지만, 수많은 한국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육군 예비역 병장이라는 신분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제가 1983년생이니까, 제대하던 해에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었습니다. 남들보다 훨씬 군대에 늦게 갔고, 최선을 다해 무난한 군생활을 한 덕분에, 그나마 영창을 가거나 하는 일 없이 제 시간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카투사였습니다. 동두천에 위치한 미군부대인 Camp Hovey에 자리잡고 있는, 미2사단 1여단 산하 BSTB Bravo 중대 소속이었죠. 주특기는 통신이었습니다. Bravo 중대는 통신에 특화된 집단이었습니다. 저 하늘 어딘가에 미군에서 띄워놓은 인공위성이 있는데, 그 위성을 통해 보안 처리된 인터넷을 연결해주는 것이 저와 동료들의 주 임무였습니다. 말하자면 인터넷 기사 아저씨였던 것인데, 그래서인지 미군 동료들은 제대하고 난 후 그쪽 업계로 많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뭐 인터넷 기사가 되는 것이죠.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사실 군대 얘기라는 게 하는 사람도 딱히 재미있거나 하지 않지만 듣는 사람은 몇 배로 재미가 없으니까 더이상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논의와 관련된 것만 말하도록 하죠. 제가 있던 부대는 카투사의 수가 약 10명 내외로 유지되었습니다. 미군은 간부 사병 부사관 다 합쳐서 50여명 가량이었고요. 나름 중대지만 규모가 작았는데, 그래서 모든 구성원들이 서로의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고 그랬습니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학급 같은 분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처음 신병으로 들어와서 병장으로 나갈 때까지, 카투사들은 대략 세 가지 집단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첫째, 유학생 그룹. 둘째, 서울에 사는 명문대생 그룹. 셋째, 지방 출신 그룹. 저는 그 중 무엇도 아니었죠.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군대에 갔으니까요. 그래서 더욱 관찰자로서의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보이더군요. 가령 이른바 '군대 놀이'를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셋 중 유학생 그룹입니다. 한국 내의 연줄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에 조바심을 느껴서 '위 아래 관리'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더라고요. 서울에 사는 명문대생들이 가장 편안한 태도를 보입니다. 반면 지방에서 온 카투사들은,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많은 경우 제대한 후 뭘 어째야 할지 상대적으로 훨씬 더 고민하고 여러가지 자격증 시험 등에도 몰두하는 성향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다들 기본적으로 토익 750점은 넘는 사람들이니까,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은 그럭저럭 잘 하는 친구들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카투사는 미군부대에서 생활을 하는데, 미군은 사병의 경우에도 부대 내에서 2인 1실 혹은 가끔은 1인 1실 생활을 합니다. 또, 일과 시간이 끝나고 나면 사생활에 대한 간섭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후 전방의 주한미군 전투부대들이 대거 다른 곳으로 배치되었고, 동두천은 텅텅 비었습니다.

이런 소리를 대체 왜 하느냐, 지금부터 본론입니다. 덕분에 저는 상병 때부터 저 혼자 방을 썼습니다. 1인 1실. 지금 제가 사는 집에서 주로 생활하는 방보다, 당시 부대에서 제공되던 방이 더 큽니다. 업무 시간이 끝나고 나면, '짬'도 높아졌고 나이도 많고 하니까, 그야말로 자유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 되짚어보니, 모두의 군생활이 그렇듯 제 경우도 좀 공허한 느낌이 듭니다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계획이 없어서 그러지 않았습니다만, 작심하고 공부했다면, 공무원 시험 같은 걸 준비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이었던 것입니다.


2.

오늘의 강연 제목을 다시 살펴봅시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 있나 - 군가산점과 청춘"이라고 써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우에는 해준 게 많은 편이겠죠. 한국이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고, 카투사라는 이상한 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덕분에, 저는 2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1년 반 가량 아주 밀도 높은 어학 연수를 경험한 셈이니까요. 물론 그게 영어마을 캠프 같은 것은 아닙니다. 군 생활이었습니다. 한국군에게도 신병 때 좀 혼도 나고(군대 용어로는 '갈굼을 먹는다'라고 하겠죠), 미군들에게도 많이 배우고 기 싸움도 하고 그랬습니다. 동두천에서 카투사 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다들 아시겠지만, 많은 경우 1주일에 한 번씩 군장을 매고 행군을 합니다. 대략 서너시간 가량 그 넓은 부대 내를 돌아다니는 걸 매주 합니다. 훈련은 다 해서 10번 넘게 나갔던 것 같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열흘 넘는 것들이었습니다. 한 달이 넘는 영외 훈련도 물론 있었고요.

그래도 제 군생활은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었습니다. 영어는 읽고 쓰기밖에 못했는데 입과 귀도 틔였고, 경험의 폭이 확 넓어졌습니다. 신병 기간 끝나고, 훈련이 없고, 부대 내에서 누가 사고를 치지 않았다면, 주말에 외박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설령 외박이 불가능하다 한들 2인 1실, 그 다음에는 1인 1실 생활이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저는, 다른 카투사들과 마찬가지로, 작심하고 하려고 했다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편하게, 여름이면 긴팔 윗도리를 입는 게 좋을 정도로 강하게 에어컨을 틀어주는 저 혼자만의 방 속에서 말입니다.

더 중요한 건 제가 카투사 중에서는 상당히 '빡세게' 군 생활을 한 축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100명의 예비역이 있으면 100개의 군생활이 있으니 함부로 단정짓기는 어렵습니다만, 대체로 카투사들 중에서는 동두천 가는 게 가장 힘든 축에 속한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아무튼 제게는, 같은 시간대에 같은 방식으로 군인 신분이었던 수많은 동지들과 비교해볼 때, 0.01%에 속하는 모종의 특권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자, 이제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모든 예비역들에게 공무원 시험에 있어서 군가산점을 부여한다면, 그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강한친구 대한육군에 명실상부하게 소속되어, 전방에서 '개고생'하는 사람들일까요? 그보다는, 아마 저처럼 카투사가 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이른바 '땡보직'을 타고 앉아서 공부할 시간을 하염없이 확보할 수 있는, 그런 군생활을 한 사람에게 훨씬 유리한 결과가 발생할 것입니다.

이것은 두 번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고생하는 사람 따로, 시험에서 가산점 얻는 사람 따로. 가끔 '군대에서 사법시험 합격' 같은 뉴스가 나옵니다. 그런 경우, 윗선에서 어려운 시험 준비한다고 따로 시간과 여유를 챙겨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7급이나 9급 공무원 시험은 합격한다고 해서 딱히 언론에 보도될만한 자랑거리가 아니니 그런 특혜를 누리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아무튼 군가산점 제도가 부활하면 이익을 볼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전방이나 기타 근무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고생한 사람들이 아니겠지요. 저처럼 개인 여가를 전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만한 여건에서 군생활을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혜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군가산점 폐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역차별'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옵니다. 남자들이 2년의 청춘을 바쳐서 나라를 지키고 오는데, 여자들에게도 출산이 의무로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억울해하고, 여자들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김치년' 같은 욕을 먹지 않기 위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일단 그런 모든 모습을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런데 정말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왜 남자들은, 그렇게 2년의 군생활이 억울하다면서, 자신이 받아야 할 보상을 생판 모르는 '땡보'들에게 퍼주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것일까요?


3.

1999년 12월 23일, 그 세기말의 현장으로 돌아가봅시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다가 떨어졌던, 혹은 준비중이었던 다섯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했던 한 사람의 남성 장애인도 있습니다. 이들이 낸 위헌법률심판청구의 사건번호는 98헌마363.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 등 위헌확인 소송입니다. 그 유명한 '군가산점 위헌 판결'입니다. 군가산점 부여가 어떤 제도인지 확인하려면, 그것이 왜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폐지되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2012년 신검 규칙이 개정되기 전까지, 발기부전이나 무정자증에 걸린 남성은 현역 판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신체의 다른 부분이 전부 건강하다 해도 발기부전이면 4급이었습니다.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리고 사격을 아무리 잘 한다 해도, 고환에서 정자가 생산되지 않으면 역시 4급이었습니다. 키가 196센티미터 이상인 경우에도 현역 군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2012년 신검 규칙이 개정되면서 이들은 모두, 현재로서는 다른 신체적 이상이 없는 한 3급 판정을 받고 현역 군인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딱히 '장애인'이 아닙니다. 물론 무정자증이나 발기부전은 장애가 맞고, 키가 지나치게 크면 일상 생활에서 불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통념적으로 생각하는 지체장애나 정신장애 등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발기부전, 무정자증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러한 장애가 없는 사람에 비해 공무원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발기부전을 이유로 수행할 수 없는 '공무'라… 네, 그런 건 없습니다.

하지만 98헌마363 판결이 없었다면, 수많은 발기부전 및 무정자증 환자들은 결코 공무원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코' 될 수 없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겠군요. 하지만 난이도가 매우 높아집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도 쉽게 짐작하실 수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위헌심판의 대상이었던, 다행스럽게도 폐지된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과 그 시행령은, 6급 이하의 공무원 시험 혹은 사기업 입사 시험에서, 그 필기시험 과목별 만점의 5퍼센트 내지는 3퍼센트를 오직 현역 복무자에게만 가산해 주도록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군대에 가고 싶어도 발기부전이나 무정자증 때문에 군대에 갈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같은 조건 하의 현역 복무자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되지 않냐고요?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들이고, 다들 열심히 공부합니다. 한 문제 차이로 당락이 갈리는데, 심지어 군가산점이 도입되면 100점이 아닌 103점이나 105점이 커트라인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 경우 무슨 수를 써도 군대에 안 갔다 오면, 당연히 100점을 넘는 점수는 받을 수가 없으므로, 절대 공무원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폐지된 법의 내용을 더 살펴보면, 심지어 군대에 가더라도 의가사제대를 한 사람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동법 시행령 제9조 제1항에 이렇게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① 법 제8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제대군인이 채용시험에 응시하는 경우의 시험만점에 대한 가점비율은 다음 각호의 1과 같다.
1. 2년 이상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한 제대군인:5퍼센트
2. 2년 미만의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한 제대군인:3퍼센트

군가산점의 문제를 '남자 대 여자'의 대결 구도로 놓고 보면, 큰 그림을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군 복무를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모든 남자들을 위해, 그 외의 경우를 차별하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땡보' 이야기를 해봅시다. '땡보'들은 잘 다치지도 않습니다. 본인이 축구를 하다가 무리하지 않는 한 결코 다칠 일이 없다, 그것이 '땡보'를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반면 고생하는 군인들은 늘 부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자칫하면 의가사제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렇게 군복무 중 부상당한 이들에게 더 많은 보상을 해주기는 커녕, 오히려 군가산점에서 차별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법이 과연 정당합니까?


4.

헌법재판소의 논리를 순서대로 짚어봅시다. 대한민국헌법 제39조는 국방의 의무에 대해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9조 ①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②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여기서 제2항은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않음'을 규정하고 있지, 병역의무를 이행했다 해서 추가적인 이득을 얻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와 '이익을 얻는다'는 분명 다릅니다. 앞의 것은 국가에게, 누군가 군대에 갔다 왔거나 군 복무중이라고 해서 특별히 불이익을 가하지는 말라고 명령하는 내용입니다. 가령 현역 복무중인 군인이 일과 시간 이후 '싸이버 지식 정보방'에서 웹서핑을 즐긴다고 해봅시다. 그 군인이 특별히 군 기밀을 유출할 위험이 심각하고 현저하지 않는 한, 그런 개인적 행복 추구를 가로막을 권리가 군에게는 없다고 헌법은 말합니다. 제39조 제2항은 그런 의미입니다. 군인이라고 해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을 당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헌법 제39조 제2항이, 군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인 그의 권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헌법 제32조 제4항은 여성의 노동권에 대해 '적극적 보호'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제32조 전체를 읽어보면 그게 어떤 맥락인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제32조 ①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②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③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
④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 고용·임금 및 근로조건에 있어서 부당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⑤연소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⑥국가유공자·상이군경 및 전몰군경의 유가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우선적으로 근로의 기회를 부여받는다.

제32조 제1항이 있으니 걸스데이의 혜리 씨가 광고에서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5580원'이라고 홍보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다. 아무튼 "여자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으며"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판에, 장교로 자원입대하지 않는 한 여성의 군복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군가산점이 유지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장교로 자원입대하면 그건 애초에 6급 이하 공무원시험을, 적어도 당분간은 응시할 상황도 아닙니다. 헌법재판관 전원이 일치된 의견을 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은데, 98헌마363은 예외적입니다. 그 이유는, 약간의 법적 상식을 가지고 있다면, 너무도 뻔한 것이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근로에 있어서 여성을 보다 더 보호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군가산점은 헌법 제25조에 규정되어 있는 공무담임권, 즉 조건이 갖춰진다면 공직자가 되어 공공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합니다. 결국 그 모든 차별은 헌법 제11조, 법 앞의 평등에 위배된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성 뿐 아니라 '영 좋지 못한 곳에 총을 맞은' 심영 씨, 그 외 다양한 장애인들이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실질적으로 가로막아버리는 악법이었습니다. 판결문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있으므로 우리 법체계의 기본질서와 체계부조화성을 일으키고 있다고 할 것이다.

요컨대 제대군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회정책적 지원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다른 집단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할 균등한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되는데, 가산점제도는 공직수행능력과는 아무런 합리적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는 성별 등을 기준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의 사회진출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5.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이 대목이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5580원이며 그것은 최종적으로 헌법에 의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군인의 월급은 어떻습니까? 2015년 기준 이병 12만 9400원, 일병 14만원, 상병 15만 4800원, 병장 17만 1400원 입니다. 이걸 시급으로 나누면 아주 작은 금액이 나올텐데, 과연 군인의 근무시간을 하루 8시간으로 혹은 10시간으로 계산하는 것이 타당할지 아닐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10시간으로 가정한다면, 한 달을 30일로 놓았을 때, 병장은 시간당 571.3원을 받습니다. 최저임금의 약 10분의 1인 셈입니다.

여성부나 '이대 나온 김치X'들이 군인들로부터 군가산점을 빼앗아간 게 아닙니다. 국방부가 군인들의 노동력을 빼앗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청년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송두리째 바치는 젊은이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말 그대로 동전 몇 푼씩 쥐어주고 있습니다. 그 불만이 점점 커지자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겠다며 군가산점 제도를 도입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온 것처럼 군가산점 제도는 여성들과 장애인을 부당하게 차별하며, '고생하는 사람 따로 혜택 보는 사람 따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태생부터 불공평한 제도입니다.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키는 이 나라에 '군대 안 갔다 온 여자들'이 무임승차하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일부 남성들이, 왜 내가 고생했는데 남이 공무원 시험 가산점 받는 그런 종류의 무임승차에는 분노하지 않는지 말입니다.

모든 군인들에게 군 복무에 합당한 보상을 해주는 방법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떤 방향에서 검토하더라도 적절합니다. 사병들의 월급을 대폭 높혀주고, 그들의 영내 복지 혜택도 강화하여, 넉넉하게 쓰고 싶은 사람은 풍족한 군 생활을 하고, 돈을 모으고 싶은 사람은 전역할 때 두둑한 통장을 들고 나올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말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달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라고들 합니다. 그 냉소적인 시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많은 경우, 정말 대부분의 경우, 가장 보편적인 보상책은 결국 돈을 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택하지 않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려고 드는 단 하나의 진정한 요구 역시 바로 그것입니다. 어디 정부 뿐인가요? 기업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려 들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정신 세계는, 알바비 떼어먹으려고 눈을 번뜩이면서, '이것도 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라는 몰지각한 알바 고용인의 그것과 사실상 동일합니다. 구구절절한 덕담이니 힐링이니 다 필요없고, 일단 일한 만큼 돈을 주면 되는데, 죽어도 그것만은 싫다고 합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2012년, 사병의 월급이 최저임금에 훨씬 못 미치고, 직업군인과 비교해도 훨씬 부족하다는 소송에 대해, 만장일치로 소극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2011헌마307 공무원보수규정 제5조 중 별표 13 등 위헌확인 소송입니다. 최저임금, 군인 월급 등의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런 헌재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장일치로, '군인은 최저임금보다 못 받아도 된다'라니, 군가산점 폐지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헌재는 군인을 무시한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더군요.

실상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하고, 어떤 면에서 난삽합니다. 언론 보도만 봐서는 알 수 없고 직접 헌재 결정문을 읽어봐야 하는데, 그 심판의 청구인은 말하자면 '군대의 문제아'였습니다. 군복무 중 상관을 폭행하여 1년 6개월간 별도의 수감 생활을 하던 중, 자신에게 불이익이라고 여겨지는 요소들을 모두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죠. "월 급여에 대하여 최저시급제나 최저임금제를 정하여 지급하지 아니한 행위, 남성에 한한 병역의무 부과, 군교도소 미결수용 중 학습기기 반입금지, 군교도소 미결수용 중 전화사용 제한, 정신과 병원 수용 중 전화사용 제한과 사지억제 행위, 병영생활관에의 학습기기 반입금지, 병의 휴대전화 소지 및 사용 금지를 다투는 취지"를 내세웠습니다.

2011헌마307 소송의 청구인에게 어떤 개인적 사정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만, 그가 내세우는 논리는 뒤죽박죽이고 사실 정확히 뭘 요구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청구인이 누구냐'에 따라 헌재 재판관들의 편견이 개입되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한 차례 실패하긴 했지만, 군인의 월급 문제에 대해 제대로 법적 공방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6.

정리를 해봅시다. 첫째, 군가산점 제도는 군 복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이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 공무담임권 등을 침해하는 불평등한 제도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만장일치로 폐지되었습니다.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를 벗어나보면, 그 제도가 수많은 이들에게 족쇄가 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설령 군가산점 제도가 시행된다 해도, 그 제도로 이익을 볼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땡보'들이 혜택을 독점합니다. 반면 위험한 환경에서 고된 군생활을 하는 젊은이들은, 내가 고생해서 남 시험 점수 퍼주는 결과를 맞이합니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가산점에 대한 찬성과 반대, 여자들과 남자들의 대립, 국방의 의무냐 출산의 의무냐, 이런 가짜 대립 구도를 벗어나, 예비역과 예비 군인들이 집결하여 자신들의 청춘에 대한 올바른,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본격적 시도는 아직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군대를 갔다 왔거나 갈 예정인, 혹은 가지 못한 수많은 남자들에게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제 군가산점 논란으로부터 벗어납시다. 그것은 당신과 나와 앞으로 군대에 가야 할 수많은 남자들의 청춘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이 되지 못하는 제도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군가산점 '떡밥'을 물고 파닥거리는 동안, 국방부는 군인의 처우 개선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압박을 덜 받게 됩니다. 아주 흔한 수법입니다. Divide and rule. 분할하여 통치하라. 애꿎은 여자들을 상대로 피해의식을 폭발시키는 동안, 국방부는 빙긋이 웃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고, 저는 이 자리에서 단 한 명이라도, 올바른 방향의 분노를 느끼기를 희망합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나'라는 억울함이 솟아오를 때, '돈으로 갚아라'라고 함께 외칠 수 있는 그런 주체들이 들불처럼 번져가기를 바랍니다. 물론 흘러간 청춘이 돈으로 다 보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합쳐 국가로부터, 그 소중한 세월의 댓가를 정당한 수준까지 받아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국 남자들의 청춘이 가장 빛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80년대의 대학생들이 국가를 민주화시켰듯이, 2010년대의 대학생들은 그들이 갔다 왔거나 가야 하거나 친구들을 보내야 하는 군대를 민주화시키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간곡히 요청합니다.

특히 군 입대를 앞둔 남자들이 핵심입니다. 만약 단 100명, 아니 50명이라도, 똘똘 뭉친 군 입대 연령 남자들이 '우리는 시급 500원짜리 인생이 아니다, 최저임금 보장없이 군복무 불가하다'라고 선언하고 드러누워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당사자들은 대한민국 전체와 '맞장'을 떠야만 할 것입니다. 아주 외롭고 힘겨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사방팔방에서 비아냥과 손가락질이 쏟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싸움의 편에 서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도록, 저부터 앞장서서 설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군가산점 문제'를 던져, 한창 서로 눈 맞추고 웃고 사랑해야 할 남자와 여자를 싸우게 만드는 대한민국의 지배세력과 진정으로 맞서는 싸움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청춘이기에 시작할 수 있는 싸움. 가장 많은 청춘이 당사자로서 동일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싸움. 그것이 바로 군인들의 처우 문제이며, 그 처우 중 핵심이 바로 급여 문제입니다.

이미 '30대 논객'이 되었고, 이 강연을 처음 시작할 때 말했던 것처럼 사회 평균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군 생활을 했던 저는, 그 싸움의 당사자가 되기 곤란한 입장입니다. 그것은 제가 '청춘'으로부터 하루하루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가는 수많은 제 또래들과 함께, 새로운 청춘들이 싸움을 시작하기를 소망합니다. 언제나 여러분의 편에 함께 설 준비를 한 채 말입니다.


* 2015/03/30 오후 7시, 경북대학교 사회과학대학교 132호에서 강연한 원고.

2015-03-26

대기업 사내유보금 과세, 지금 아니면 너무 늦다

'몹쓸 비유'를 해보자. 나라 경제 무너질까봐 투자도 줄이고 고용도 줄여가며 사내유보금만 쌓는 대기업들은, 배 가라앉기 전에 자기 먼저 탈출하겠다고 퇴선 명령 안 내리던 세월호 선장과, 사실상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국가가 침몰하기 전에 그들이 돈을 풀게 하는 것이다.

낙수효과는 실증된 바 없으며, 결국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야 실물경제가 살아날 것이라는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기업'이라 통칭되는 어떤 집단만큼은 그 현실을 부인하며, 끝까지 현찰만 붙들고 있으려 한다.

물론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위기가 닥쳐왔을 때 현금이 없으면 기업이 무너진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가 쓰러졌을 때 헐값에 나오는 자산을 주워담으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내유보금을 잔뜩 쌓아둔 채 고용을 늘리지 않고 '파국에 대비'하는 기업들의 행위는, 사실상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기업이 이기적으로 경제 파국에 '대비'할 수록, 실제로 경제가 고꾸라질 가능성은 더욱 커지니 말이다.

경제 위기에 '대비'한다며 과도한 사내유보금으로 국가경제 전체의 발목을 잡는 기업들은, 사실상 그 경제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여론을 조성하고 법적 근거를 확실히 만들어서 과세해야 한다.

기업 곳간에서 썩어나는 돈을 풀어야 나라가 산다. 아직 배가 기울어지지 않았다. 내가 먼저 탈출하겠다고 안내방송을 하지 않은 혐의로, 세월호 선장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인 지금, 우리는 같은 비극이 전 국가적 차원에서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만 한다.

2015-03-24

[북리뷰]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김영란이 말하는 ‘김영란법’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
김영란, 김두식 지음·쌤앤파커스·1만5000원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3월 3일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후 정확히 일주일 후였던 3월 10일, 김영란법에 대해 김영란 본인이 입장 발표를 한 것이다. 김영란은 이미 2013년에 김영란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힌 바 있다. 심지어 그것을 위해 책을 한 권 펴내기까지 했다.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법조인들의 ‘이너서클’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김두식 교수에게 연락을 해 만남을 갖고, 법조계를 포함한 공직사회 전반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변화를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김영란법이 지향하는 바에 동의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선 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가 주도하여 1997년 만들어진 청소년보호법, 이른바 ‘청보법’이 낳은 폐단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보법이 시행되면서 수많은 만화들이 청소년 유해매체물로 지정되었고, 당시 IMF로 위기를 겪고 있던 출판만화 시장은 결정적인 철퇴를 맞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도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법으로 다스리려 할 경우, 그것이 원하는 효과를 이룬다 하더라도 그에 상응하거나 어쩌면 더 큰 역효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청보법이 한국 만화계에 재앙을 불러왔듯, 김영란법이 어딘가에 무슨 영향을 미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으므로, ‘원칙에는 찬성하나 결과를 우려하는’ 회의적 입장에서 ‘어디 나를 설득해봐라’는 태도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김영란 본인은 이러한 비판을 많이 들어봤고, 또 익숙한 듯하다. “저더러 과격하다고 하는데 뭐랄까, 자코뱅(Jacobins) 같나요?(웃음) 그래도 속은 시원하지 않나요?”(167쪽) 그렇다.

비판자들은 ‘너무 과격하다’고 말한다. 마치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단두대로 승화시켜 수많은 이들의 피를 흘리게 만들었던 자코뱅파처럼, 김영란법 역시 수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줄 것이라고. 반면 김영란법에 대한 찬성 의견은 일차적으로 ‘속 시원하다’는 감각적 반응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나 같은 회의주의자들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은 나는 회의주의자에서 일종의 모험주의자로 입장을 바꾸고 싶어졌다. 김두식은 김영란이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하자면 ‘치기 좋은 공’을 연거푸 던져준다. 김영란은 그 기회를 십분 활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다. 그 설명은 때로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가령 “이것은 정말 상징적인 법규일 뿐, 이 법 때문에 처벌이 무한정 늘어나리라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지만, “이건 공무원들을 위한 법, 공무원들이 부담스러운 청탁을 거절할 수 있는 법”(258)이라는 부연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말이다.

아직도 나는 회의적이다. 국회를 통과한 김영란법을 보면 더욱 그렇다. 법의 적용 대상을 민법상 규정된 가족에서 본인과 배우자로 축소시킨 것이 가장 뼈아픈 후퇴라고 생각한다. 이해관계 충돌 금지가 빠진 것 또한 그렇다. 이 법이 처벌 이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공직자들의 윤리를 다잡기 위한 것이었다면, 법이 통과되기 전에 좀 더 많은 홍보가 이루어졌어야 한다. 김영란법은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이야기인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161610081&code=116

2015-03-22

[별별시선]밥이 공부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발언이다. 무상급식이냐 의무급식이냐, 보편복지냐 선별복지냐 등으로 해묵은 논쟁이 되살아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홍준표의 발언이 지니고 있는 더 큰 함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643억원의 무상급식 지원비를 서민 자녀 지원사업에 투입한다는 것이 홍 지사의 입장이다. 그런 그가 ‘공부’와 ‘밥’을 대비시킬 때, 과연 그 ‘공부’는 무엇인가? ‘개천의 용’이 사라진 시대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노라는 홍 지사.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검사, 국회의원, 도지사까지 승승장구한 자신의 ‘휴먼 스토리’를 슬며시 포개어 놓는다.

요컨대 홍준표에게 ‘공부’란 남을 이기는 공부, 남보다 더 높은 시험성적을 얻어내어 판검사 되는 공부, 그래서 ‘개천’ 출신들이 ‘용’되어 개천을 탈출하기 위한 공부인 셈이다.

왕년의 학생 홍준표는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도 붙으면 속된 말로 ‘팔자 바꾼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입시제도가 턱없이 복잡해진 탓에 사교육 시스템이 제공하는 온갖 정보를 동원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루트로 명문대 입학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역균형선발로 대학에 들어오면 ‘지균충’,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입학하면 ‘기균충’, 학생들은 끝없는 차별에 부딪힌다. 명문대 입학했다고 어깨 쭉 펴고 다닐 수 있던 그런 시절은 진작에 끝났다. 명문대를 졸업하면 명문대 나온 취업준비생이 될 뿐이다.

“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밥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는 홍준표는 여전히 개발독재시대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아침마다 울려퍼지는 새마을노래를 들으며 굶주린 배를 안고 학교에 가서 공부하면 명문대 가고 판검사 될 수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희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현실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본인 스스로가 ‘개천의 용’으로서, 20세기의 가난을 자기 힘으로 극복한 사람이니,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 있다. 과연 그 20세기 ‘개천의 용’ 모델은 지금까지 유효한가?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누군가가 배고픔을 참고 공부해서 명문대 가고 사법시험이나 기타 취업 관문을 통과하면, 안정과 풍요가 보장되는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나는 나의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저소득층 학생에 대한 교육비 지원은 부질없는 짓이며, 따라서 시행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교육에 대해, 그 교육을 통해 배분되는 직업들 사이의 소득 형평성에 대해, 각 가구의 자산 불평등에 대해 총체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학교 교육과 국가고시를 통해 엘리트를 선발하고, 그 엘리트들에게 부와 권력을 집중시켜주는 방식으로 수십년간 유지되었다.

이제 그렇게 만들어진 격차를 개인의 노력으로는 극복하기 어렵다. 그 와중에 무상급식을 철회하며 ‘공부해’라고 윽박지른다 한들, 학생들이 희망을 느낄 성 싶은가?

‘개천의 용’을 위한 공부, 한 사람의 승자를 위해 아흔아홉 명의 패자를 만드는 교육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홍준표가 전국적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무상급식 발목잡기’에 나섰다면 그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 같지만, 정작 그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개발독재 시절에나 통했던 ‘개천의 용’ 타령을 되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홍준표의 ‘공부론’은 시대착오적이며, 자아도취적이기도 하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부’는 그런 게 아니다. 계약서 쓰는 법, 노동3권 보장받는 법,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고 지키는 법, 협상하고 합의하는 법 등 기존의 교육 과정에서 무시되었지만 실은 반드시 필요한, ‘내 밥그릇 지키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밥 먹는 곳이어야 한다. 특히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그렇다. 이제는, 밥이 공부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3222051205&code=990100&s_code=ao122

2015-03-10

[북리뷰]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위대한 페미니스트의 일대기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브누아트 그루 지음·백선희 옮김·마음산책·1만2000원

“여성해방에 남성이 반대해온 역사가 이 해방의 역사보다 더 말해주는 바가 많다.”(21쪽)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다. 이성과 합리에 따라 근대 국가를 만들겠다고 나선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조차, 콩도르세라는 단 한 명의 예외를 빼고 나면, 모두 여성들의 주체적 권리 요구를 싫어하고 반대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는 바로 그 시대에, 자신과 수많은 여성들의 보편적 인권을 요구하고, 그 대가로 단두대에 올라 목숨을 잃은 위대한 페미니스트, 그리고 어쩌면 최초의 ‘꼴페미’의 인생을 기술하고 그가 남긴 글을 모은 책이다.

일단 주인공의 일생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그는 문필가인 귀족 아버지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올랭프 드 구주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올랭프 드 구주는 열여섯에 시집을 갔고 열일곱에 아들을 낳았으며 그로부터 몇 달 후 남편과 사별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온갖 사회적 비난을 감내하면서, 남편 없는 여자의 자유를 죽는 그날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극작가로 명성을 날렸고 정치적 팸플릿을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뛰어들었다.

올랭프 드 구주가 최초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노예제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었다. 1788년 2월, <흑인들에 대한 성찰>을 출간하면서 그는 온갖 비아냥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1791년, <왕비에게 헌정하는 여성 권리 선언>이 출간되었다. ‘왕비에게 헌정’이라는 말은 일종의 농담 같은 것이었지만, 훗날 권력을 잡는 자코벵 파는 그것을 빌미 삼아 올랭프 드 구주에게 왕당파의 혐의를 덧씌운다. ‘인권선언’의 ‘인간’은 당연히 남자고, 여자는 자연스럽게 배제되었던 당시의 프랑스에서, 올랭프 드 구주는 이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남자여, 그대는 정의로울 능력이 있는가? 이 질문을 그대에게 던지는 건 여자다. 적어도 이 권리만큼은 여자에게서 빼앗지 말아달라.”

프랑스는 1791년도 아닌 194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다. 무려 두 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올랭프 드 구주가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두 번째 여성이 되기까지는 2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처형된 지 보름 후인 1792년 11월 3일의 일이었다. “근본적인 견해까지 포함해서 누구도 자신의 견해 때문에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 여성은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 마찬가지로 그 의사 표현이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흐리지 않는 한 연단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 ‘여성 인권 선언’ 제10조의 당당한 요구는 그렇게 왜곡된 방식으로 실현되면서, 결국 오랜 세월 묵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의 ‘무뇌아적 페미니스트가 IS보다 위험하다’는 칼럼으로 인해, SNS에서는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그렇게 김태훈이 한국 중계 해설자에서 물러난 2015년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파트리샤 아퀘트는 <보이후드>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모든 여성들에게 동일한 임금과 기회를 제공하라는 페미니즘적 연설을 내놓았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02162724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