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29

[북리뷰] 일본의 발전, 그 뿌리를 찾아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 저·뿌리와이파리·1만5000원

'조선은 임진왜란때 망했어야 마땅한 나라다.' 조선의 패망과 일본에 의한 국권 침탈 등을 논할 때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망할만한 나라'였다면, 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한 일본은 '성공할만한 나라'라고 불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한국 사회는 일본이 오랜 전란 끝에 통일되었던 그 시기, 즉 에도시대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공직을 박차고 나와 우동집 '기리야마 본진'을 차린 것으로 유명한 전직 외교관 신상목의 책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화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일본의 근대화 성공에 기여한 '축적의 시간'이자 '가교의 시기'로서의 에도시대에 주목한다. 에도시대에 어떻게 근대화의 맹아가 태동하고 선행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주제이다."(17쪽)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 정도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내막은 훨씬 복잡하고 의미심장하다. 도쿠가와 가문의 당시 본거지는 슨푸(시즈오카)였지만, 도요토미는 도쿠가와가 교통의 요지에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에도(도쿄)로 쫓아냈던 것이다.

오늘날의 도쿄를 보면 '에도로 쫓아냈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신들과 함께 자리잡았던 그 무렵, 에도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강 하구 습지에 불과했다. 에도 성이 있었지만 낡아빠진 상태였다. 우물을 파면 소금물이 나오는 그런 척박한 땅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괴롭힘에 굴하는 대신 가신들과 철저히 단결하여 에도를 발전시켰다. 치수(治水) 사업을 통해 "1)인공의 물길을 뚫고, 2) 자연 물길의 흐름을 바꾸고, 3) 수면을 메워버리는 대토목공사"(36쪽)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렇게 척박한 에도를 교통과 상업의 허브이며 옥토로 바꾸는동안, 부질없는 전쟁에 몰두한 도요토미는 몰락하고, 버려졌던 땅 에도를 기반으로 삼아 발전시킨 도쿠가와 가문이 패자가 되었다. 에도시대는 계획도시 에도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출현 과정을 조선왕조의 건국 이야기와 비교해보자. 이성계는 풍수지리에 능한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쩔 수 없이 자리잡은 터를 본인과 신하들의 힘으로 '개척'해내고 기반으로 삼았다. 건국 영웅담의 이면에 작동하는 사고의 체계부터 이미 확연히 다르다.

한층 더 대담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이른바 '자생적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영조가 청계천 준설 공사를 벌인 것을 '조선판 뉴딜 정책'이라고 칭하곤 한다.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일본의 '자생적 근대화'는 에도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다시 말해 우리보다 약 170여년 빨랐다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에도 개척의 역사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하는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책장을 넘길수록 낯설지만 우리의 한반도 중심 세계관을 뒤흔드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독자에 따라서는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막연한 거부감과 우월감만 앞세우던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합병당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면, 우리가 잊지 말고 배워야 할 역사는 '우리'의 역사만이 아닐 것이다.

2017.08.29ㅣ주간경향 1241호

2017-08-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환경주의의 다양성

환경주의는 넓은 개념이다. 가령 최초의 동물 보호 운동을 벌였던 것은 사냥꾼들이었다. 자신들이 사냥을 하다보니 생태계 균형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환경주의자'는 반드시 '탈원전'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환경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으니 말이 나온 김에 분류를 해보기로 하자.

1) 반인간적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만약 위 문장에서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굉장히 극단적인(혹은 '래디컬'한) 입장인 셈이다. 영화 〈12 몽키즈〉에 나왔던 것처럼,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그런 반휴머니즘적 환경주의의 길을 택하는 것이니 말이다.

2) 문명 퇴행을 수용하는 환경주의: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길어진 기대 수명, 풍요로운 식생활, 청결과 위생,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구조, 법치주의 등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래야 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반 문명적' 태도에서 환경주의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웃간에 정감 넘치는 생활을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철학자' 강신주 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함께하는 진보 진영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는 생각이다.

3) 현대 문명과 함께하는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하는 대신, 우리가 가진 과학과 문명의 도구를 최대한 발전시켜야 하는가? 나를 포함해 원자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환경주의자들이 택하는 입장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서비스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그 활용도를 더 높여야 한다.

현재 '탈원전' 논의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2)에 속하는 이들이 3)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일에 너무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3)에 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2)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방사능 공포를 부추기면서,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벌어질 기후 변화의 충격을 나몰라라하는 이기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일종의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할까?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 그리고 우리의 솥단지

우리가 누리는 풍요를 그들이 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환경주의의 이름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우리는 개발도상국이 급격하게 화석 연료의 사용을 늘림으로써 기후 변화의 충격이 더욱 강하게 몰아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도 안 된다. 결국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기저부하를 공급할 수 있는, 현재로서의 유일한 해법인 원자력 발전을 더욱 확장하는 것만이 해법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누렸던 행운도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재획득했고, 그렇게 얻은 정치적 동력을 바탕으로 영남권의 공업 단지에서 요구하는 전력 수요에 따라 해당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를 대거 건설할 수 있었다.

오늘날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도시 거주민들은 원전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결국 문재인 정권의 급격한 탈원전 드라이브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대체 왜 해당 지역에 그렇게 원자력 발전소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지역에 대한민국의 핵심 중공업 단지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공업 단지들의 존재로 인해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은 높은 경제 수준을 향유하고 있으며, 더불어 대한민국의 경제도 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고리1호기를 내팽개쳤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가 수십년 동안 밥을 해먹은 솥단지인 것이다.

아무리 원전이 싫고 미워도 그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말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24시간 생산해내는 원자력의 힘으로 대한민국은 가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문명화된 삶을 누리고 있다.

선진국 환경주의자들의 이기적 폭력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에너지 복지를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전지구적 기후 변화가 세계인들의 거주지를 뒤흔들고 건강과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지금, 원전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가.

무턱대고 방사능의 공포를 외치며 반대하는 그런 식의 환경주의는 1960-70년대 가장 풍요롭고 잘 살던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들은 자발적 가난을 칭송했다. 단 한 번도 굶주려본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거리낌없이 녹색혁명을 비난하고 화학비료의 사용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환경을 위해서는 인류의 숫자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멜서스주의적 세계관 역시 그 무렵 환경주의자들이 유포한 것이다. '인구 폭발'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도덕적 당위인 양 포장되면서, 서구의 임신중절기술이 한국, 중국, 인도 등의 개발도상국에 도입되었으며, 그 결과 무수한 여아들이 선별낙태당했다.[1] '에너지 사용을 늘리지 말고 인구를 줄이자'는 발상은 이토록 반인륜적이다. 줄어드는 '인구'는, 당연히,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반성하고 있다. 〈판도라의 약속〉에 출연한 마크 라이너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통스럽게 실토한다. 환경주의자들이 무턱대고 원자력에 대한 증오심만을 불러일으킨 결과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력발전의 공해로 목숨을 잃었다고. 환경주의자들은 그러한 판단 착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더 이상 원자력혐오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한 사람, 1960-70년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창시자 중 하나인 스튜어트 브랜든은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시화를 반대하고 시골 생활이 좋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정작 시골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내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환경주의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전혐오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이기에, 그것을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또 바꿀 수 있었으리라.

지구를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면 냉장고를 없애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먹자는 소리를 할 턱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환경을 걱정한다면서 사람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그런 환경주의에 나는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이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말이다.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떠냐'고 으스대거나 '에어컨 안 틀어도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진 자의 여유일 뿐이다. 그 몇 푼의 전기요금도 내지 못해 여름에는 헐떡이고 겨울에는 덜덜 떠는 그런 이들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와 에너지 정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건 보수라고 생각하건, 더 많은 이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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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구 폭탄'론의 유포, 아시아권을 향한 서구의 산부인과 기술의 급속한 전파, 그로 인한 여아 선별 낙태에 대해서는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를 참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은 「주간경향」 1151호(2015.11.17)에 게재되었으며,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7-08-15

[북리뷰] 현해탄의 군함도, 오호츠크해의 게공선

게공선
고바야시 다키지 저·양희진 역·문파랑·1만원

『게공선』은 1929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될 때부터 화제를 불러모았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걸작이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부터 새삼스레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의 말에 따르면 게공선의 새로운 바람은 "일본 매스컴이 일본 사회의 빈곤 현상을, 워킹 푸어(Working Poor)와 〈게 공선〉의 작품 세계를 연결해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196쪽)다고 한다. 그 열풍은 『88만원 세대』의 출간을 계기로 청년들의 빈곤 문제에 대해 논의가 한창이었던 한국으로도 이어졌다. 나는 그때 이 책을 한 번 읽었고, <군함도> 논란이 뜨거운 지금 다시 펼쳐들었다.

책으로 들어가보자. 1920년대 일본, 홋카이도의 도시 하코다테(函館)에서 게잡이 공선 하쓰코호가 출항하는 장면에서 작품은 시작된다. 공선(工船)이란 수산물 가공 설비를 갖추고 있는 어선이다. 가령 참치캔 같은 어류 가공품의 상당수가 공선에서 만들어진다. 공선에서 곧장 어류를 가공하면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고 제품을 보관하기에도 용이하다. 하지만 『게공선』에서 말하는 바, 당시 공선을 운용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게 공선은 '공장선'으로 '선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는다."(41쪽) 그 결과 하쓰코호는 선장이 아니라 노동자를 관리하는 감독이 지배한다. 하지만 바다에 떠 있기에, 혹은 작품 내에서 설명하지 않는 다른 이유로, 게 공선은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은 달리 없었다."(42쪽)

어선이면서 공장이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어선이 받아야 할 규제도 공장이 받아야 할 규제도 받지 않는 치외법권. 그것이 게 공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노동 착취는 일본 제국의 경제적 성장과 궤도를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 "내지에서는, 노동자들의 힘이 커져서 무리하게 일을 시킬 수 없게 되었고, 시장도 대부분 개척해버리자, 자본가들은 '홋카이도, 사할린으로' 갈고리 같은 손톱을 드러냈다. 그곳에서 그들은 조선과 대만의 식민지와 똑같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노동자를 '혹사'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자본가들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83쪽)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름이 아니라 특징으로 기술되는 익명의 노동자들은, 스스로 연대하고 투쟁하는 법을 배워나가 동맹파업에 이른다. 자신들의 편일 줄 알았던 해군이 오히려 파업을 진압하는 광경을 목도하며 "우리에겐, 우리 말고는, 같은 편이 없어. 이제야 알았다"(180쪽)고 절규한다. 그리고 또 다른 투쟁을 결의하면서 작품이 끝난다.

식민지 뿐 아니라 자국의 하층민들 역시 일본의 자본주의는 철저히 착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저항은 제국주의적 무력으로 억눌렀다. 『게공선』은 단 한 줄의 '이론적' 서술도 없이 피와 오물을 뚝뚝 흘리는 자본의 원시축적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그려낸다.

고바야시 다키지는 <덧붙이는 말>에서 "이 한 편의 글은 '식민지에 있어서 자본주의 침입사'의 한 페이지이다"(185쪽)라고 말하고 있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은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횡포와 뒤엉켜있다는 사실을 1929년의 그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보다 섬세하게 입체적으로 심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군함도>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게공선』을 다시 거론하게 되는 이유다.

2017.08.15ㅣ주간경향 1239호

2017-08-10

여성의 폭력과 법 앞의 평등

나의 검열삭제 경험담

2016년 10월 11일의 일이다. 경향신문 오피니언팀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오피니언팀을 담당하던 부장님 전화였다.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소위원회에서 8월 1일자 칼럼 "'물뽕'과 부동액"에 대해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시정 권고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된 문단을 삭제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이다.

2008년 무렵부터 신문 지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언론중재위원회의 연락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이미 작성한지 두 달이 넘은 글을 두고 무슨 소리냐 싶었다. 나에게 거부권이 없는 상황이므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검열삭제'를 경험한 것이다. 성행위를 뜻하는 은어로서의 검열삭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생각과 말을 제약당하는 검열삭제 말이다.

그렇게 잘려나간 문단은 다음과 같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경향신문, 2016년 7월 3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312051005&code=990100#csidxbdbdec283bdaff7aafb36493d4a385b 삭제되지 않은 원문은 내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asil83.blogspot.kr/2016/08/blog-post_4.html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저 고급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자동차 부동액은 무색무취하기 때문에 타인을 독살하기에 아주 좋다는 정보는 SBS의 인기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서 저런 논의가 오간다는 사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가령 이런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말이다.

‘부동액 커피’ 사건은 지난 6월 워마드에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용어)을 재기시켜도(죽게 해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이거 먹여라’는 글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이 글에는 1일 1회 5ml씩 희석해서 먹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명시돼있으며 부동액은 마트에서 구매할 때 현금 결제를 해야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당부도 담겨 있다.

전종선, “남성에 부동액 타 먹였다” 워마드 경찰 수사 착수에 네티즌 “암덩이들 도려내야”, 서울경제, 2016년 7월 28일. http://www.sedaily.com/NewsView/1KZ1J58KL3

이제 두 문단을 비교해보자. 내 칼럼에 실렸다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권고를 받고 잘려나간 문단과,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잘 남아있는 위 기사의 문단에서, 정보의 차이가 있는가? 1일 1회 5㎖라는 구체적인 용량까지 동일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당시 쏟아져나온 수많은 언론 보도를 보고 저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언론중재위원회는 내 칼럼을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똑같은 내용이 담긴 다른 기사들에 대해서는 시정 권고 조치를 내리지 않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위 기사를 포함해 당시 워마드의 게시물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워마드를 '꾸짖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던 반면, 내 입장은 달랐기 때문이다. 삭제된 문단을 포함한 전문을 다시 올려보도록 하겠다. 검열삭제된 문단은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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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2015년 11월 중순, 서울 성동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단강간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소라넷에 올렸다. 술 혹은 약물에 의해 정신을 잃고 벌거벗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작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라를 잘 안 해서 랜덤 채팅 양톡으로 여태 3분 정도 와서 질사하고 가셨는데 ㅋㅋ 오늘은 소라에서 한번 해볼까요?”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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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죽이러 가겠다'는 경범죄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2017년 8월 현재까지도 법 앞의 평등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8월 9일 새벽, 아프리카 BJ 김윤태는 생방송을 진행했다. 유튜브 스트리머 갓건배의 집 주소를 알았다며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경기도 부천, 서울 성북구 둘 중 하나라며 차를 타고 나가던 그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7000여 명에게 중계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울 성북경찰서에만 이날 새벽 1시30분께부터 총 3차례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해당 BJ는 스트리밍을 하면서 "그 주소에 갓건배가 살지 않아도 여성이라면 목졸라 죽이겠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 방송을 본 이들의 증언이다(링크). 특정한 피해자의 신원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분풀이 삼아 여성을 살해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명하였고, 어떤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여 현장으로 향하던 중이다.

과연 이 사람에게 형법상 살인예비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관련된 대법원 판례(2009도7150)는 다음과 같다.

형법 제255조, 제250조의 살인예비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형법 제255조에서 명문으로 요구하는 살인죄를 범할 목적 외에도 살인의 준비에 관한 고의가 있어야 하며, 나아가 실행의 착수까지에는 이르지 아니하는 살인죄의 실현을 위한 준비행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준비행위는 물적인 것에 한정되지 아니하며 특별한 정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범행의 의사 또는 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보아서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

김윤태가 흉기를 준비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 갓건배가 살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를 목졸라 죽이겠다'고 발언했다. 흉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갓건배를 살해하겠다는 의도가 없었고, 살인의 준비 행위가 없었다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방송을 보는 이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갓건배가 살고 있을법한 위치를 좁히고 실제로 차를 타고 나갔다는 사실은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가?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태는 "한 파출소로 임의동행돼 아침까지 조사를 받았고,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 행위로 범칙금 5만원 통고처분을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이 사건이 "형사과로 넘기기에는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시킨 후 귀가시켰다"고 설명했다."(이효석, ""죽이러 간다" BJ 생방송에 경찰 수사 소동…BJ에 범칙금 5만원 ", 연합뉴스, 2017년 8월 10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8/10/0200000000AKR20170810151500004.HTML)

설령 백번 양보해서 김윤태의 방송 행위가 살인예비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미 지난달 벌어진 '왁싱샵 살인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소위 '1인 미디어'가 생산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폭력은 쉽사리 전염되기 때문이다. 김윤태의 방송을 보고 '나도 갓건배 죽이러 가겠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작년 8월에 쓴 칼럼이 10월에 검열삭제된 사건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래서이다. 한국 사회와 그 사회의 법 체계는, 여성의 일탈에 유독 민감하고, 더 강한 처벌의 잣대를 들이댄다. 실제로 처벌이 불가능하다 싶어보여도 일단 경찰 수사를 해서 겁을 준다. 반대로 남성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을 휘두르면 가장 엄격한 죄형법정주의와 절차중심주의를 통해 최대한 그 벌을 가볍게 한다.


여성들이 법 앞의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앞서 내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워마드 부동액 사건을 되짚어보자. 부동액을 먹고 사람이 죽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었다면 경찰이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대략 알면서도 겁주기용으로 워마드 수사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반면 인터넷을 통해 남자들이 '인증'하려고, '리플' 받고 관심 끌려고 범죄 모의를 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진다. 가령 지난 2월, 일간베스트(일베)에 자신을 39세 일용직 노동자라고 밝힌 누군가가 선화예고 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해당 학교는 2월 5일까지 임시로 학교 시설을 폐쇄했고, 서울 광진경찰서는 학교 인근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며 게시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는 BJ의 행동이 범행을 불러온 사례가 최근에 또 있었다. 7월 초 한 남성이 왁싱샵에서 홀로 일하던 여성을 찾아가 살해하고 금품을 챙기며 강간까지 시도했던 사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는 한 유명 BJ가 피해자의 가게에서 브라질리언 왁싱 시술을 받는 것을 소재로 한 자극적인 영상물을 보고 범행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서울 역삼동 주택가에서 대낮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당하는 폭력이 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남성의 폭력을 모방하여, 남자들에게 뭐가 폭력인지 가르쳐주기 위한 어떤 퍼포먼스가 있다. 그런데 법은 양자를 똑같이 '폭력' 취급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법의 눈이 둔감하다고, 남성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 언론중재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당한다. 그것이 내가 작년 10월에 겪었던 일이다.

2016년 강남역에서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졌지만, 2017년에는 역삼역 인근에서 혼자 일하는 여성이 살해당한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이들이 한 여성을 붙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어도 고작 범칙금 5만원 처분을 받는다. 법 앞의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2017-08-09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탈원전과 핵잠수함, 쌀밥과 파스타

유럽 선진국들이 앞장선다는 그 '탈핵'. 특히 대대적인 탈핵 실험을 진행중인 독일이 많이 거론되며, 스위스도 가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국내 언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탈원전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나라들은 핵잠수함 도입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사방이 내륙인 스위스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U-보트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독일 역시 핵잠수함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핵잠수함이란 가압형 경수로를 탑재한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즉, 탈핵과 핵잠수함 도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탄수화물 줄이기 위해 쌀밥 끊고 파스타 먹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라는 게 있습니다

지난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어때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주제파악을 못하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대중적 인식과 청와대의 의사 결정 수준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핵잠수함을 보유한 나라, 그리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것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핵잠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핵탄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NPT 공인)
핵탄 보유 선언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
핵탄 보유 추정국: 이스라엘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핵확산금지조약(NPT)상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다섯 나라는 모두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들은 동시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퀴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어떤 나라들일까?

정답: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아주 간단한 문제다. 왜 어떤 나라는 핵을 가져도 되고 어떤 나라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지 아닌지 감시를 당해야 하는가?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면적 국제전에서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 질서를 이겨내고 싶다면, 인도나 파키스탄 혹은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감수하고 NPT에서 탈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거나, 3차 세계대전을 벌인 후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고사하고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심지어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 식자층은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도 몰랐기 때문에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미국 앞에서 핵무기 타령하지 말라

핵무기 보유의 국제정치학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국이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고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안 되나?'라고 하는 행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에 어떻게 보일까? 아파트 한 채 샀다가 값 올랐다고 수백억 수천억 부자들 앞에서 돈자랑하고 '나 무시하냐?' 이러는 강남 중산층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자는 소리다. 우리는 기껏해야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고, 그나마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선진국 클럽에 들어가기에는 체급이 딸리는, 태평양 북서쪽에 붙은 자그마한 사실상의 섬나라일 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좀 팔리고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히트 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싶은데, 현재 대한민국은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의 반열에 들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나라들이, 최소 20%에서 최대 90% 이상 농축한 우라늄-235을 연료로 쓰는 가압형 경수로를 잠수함에 탑재하면, 그게 바로 핵잠수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도 돈 좀 벌었으니까 어깨에 힘 좀 주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구나 싶다.

군용 원자력 잠수함이지만 군사 목적의 원자력은 아니라구요

핵잠수함은 원자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원자력 잠수함이 연료 보급 없이 긴 시간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한다. 핵탄두를 만드는 것과 원자력 잠수함 연료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핵탄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공개적으로 핵잠수함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 핑계를 대면 우리가 핵탄두(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국제 사회가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추진력으로 사용할 뿐이니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보이는데, 한미원자력협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를 읽어보자.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 금지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①핵무기 또는 어떠한 ②핵폭발 장치, 어떠한 ③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④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해군과 정부, 그리고 청와대 및 야권의 핵무장론자들은 우리가 잠수함에 탑재하는 것이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 조항의 문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폭발하는 방사성 물질과 그 연구 개발은 ①에서 ③까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터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군사적 활용'은 ④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군용 잠수함은 군사적 목적으로 움직인다. 군함이기 때문이다. 그 잠수함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④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놓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지금 대통령 포함 해군과 정치권에서 마구 하는 중이다. 한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는다니까 핵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라고 완곡어법을 써가며 옹호한다. 미국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장난하냐?

눈앞의 북핵을 핑계로 언젠가 완성될 비밀 핵개발?

북한의 핵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떨어지기 전에 격추시키는 종말고고도지역방어시스템, 즉 사드(THAAD)가 필요하다. 이미 '임시 배치'되어 있지만 몇 기 더 배치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쏜다면 즉각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실한 위협 수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입각해 미국의 전략핵무기를 다시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해보지도 않은 '자체 핵개발'을 대응책으로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배치할 수 있고, 확실히 날아가서 터진다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전술핵 배치야말로 '대북 억제력'으로서 유의미하다. 원자력 잠수함을 설령 몰래 만든다 한들 그걸 언제 완성할 것인가? 핵잠수함을 국제 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들어서 몰래 실전 배치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억지력이 필요하면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전략핵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주체적 핵개발' 좋아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놓자고 하면 또 드러눕고 난리 피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자력 잠수함 추진에 대해서는 별 말 없던 온갖 '평화 지킴이'들이 드러눕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무궁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고 싶다는 군국주의적 열광

자체적 혹은 '주체적'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버블 호황기' 비슷한 것을 누리던 시절, 상업화된 민족주의적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퍼져나간 군국주의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풍 열광이 몰아닥쳤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핵무장마저도 '재평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핵무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 인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자는 뜻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데프콘』 같은 대중적 소설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국주의적 열광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걸 일본에게 쏜다 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모든 국민의 삶은 군국주의로 인해 피폐해질 것이다.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삶도 황폐해졌듯이 말이다.

무궁화 꽃은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풍요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으로 향하는 첫 단추인 원자력 잠수함에 집착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핵폭탄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무궁화 꽃을

정부는 원전 폐로 등에 연구를 집중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차세대 원전의 개발을 뒷전으로 미룰 태세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선박용 원자로는 만들고 싶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원자력 잠수함을 정 만들고 싶다면, 민간용 원자력선인 무츠를 만들어서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던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탈핵합니다! 그런데 핵잠수함 만들고 싶다 핵 핵핵핵' 하는데 미국이 대체 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꿔준단 말인가? '사우스와 노스 모두 코리아는 핵에 미쳤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핵폭탄을 가진 가난한 나라. 북한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마저 짓고, 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체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깨끗하게 접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것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