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30

김재권(1934-2019)

김재권 교수가 세상을 뜨셨다. 현대 영미 철학계에서는 드물게도, 섬세하고 명료한 문체를 구사하던 분. 고인의 책 <심리철학>을 도서관에서 빌려 걸어다니며 읽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리계 안에서의 마음>은 아직도 책꽂이에 잘 꽂혀 있다.

그분의 초기 이론인 수반론에 따르면 김재권이라는 사람의 육체가 소멸하였으니 그에 수반하던 정신도 사라졌을 것이다. 후기에는 물리주의로 기울었고, 그 경우에도 그의 정신은 사망 후 존속할 근거가 없다. 하지만 그의 저서와 논문들은 철학을 공부했고, 공부하고 있으며, 공부할 모든 이들에게 좋은 지표와 귀감으로 남을 것이다. 부고는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19-11-07

세대의 이름: 88만원 세대, 혹은 김지영 세대?

1.

1983년생인 나와 내 또래들이 속한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을 붙이기 위한 시도는 숱하게 있었다. 88만원 세대, 에코 세대, G세대, 기타등등. 88만원 세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들으면 헛웃음이 난다. 내 세대를 규정짓기 위한 수많은 실패작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88만원 세대>의 성공으로 우리 세대는 그 책의 제목을 고스란히 이름으로 가질 뻔했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의 제목을 4년제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할 예정인 우리가 감히 가져다 쓸 수 있느냐'는 반성과 회의 때문에 우리 세대는 스스로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지 못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2000년대 후반부터 소위 '젊은 논객', '청년 논객'등의 이름으로 공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는 영광을 누려왔기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 세대는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는 행위 자체를 꺼려왔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사고방식 때문인데, 이는 좋게 말하자면 윤리의식이나 염치라고 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배짱과 자신감 혹은 대표의식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구조와 변화를 설명하는데 가장 많이 동원되고 있는 수사법이다. 너무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하며, 익숙한만큼 당연히 옳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산업화 세대만 산업화를 한 것도 아니고, 민주화 세대만 민주화에 기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산업화 세대'라는 말부터 따져보자. 1950년 이후에 태어난 1차 베이비부머를 산업화 세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 태어나 극빈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60년 어린이로서 4.19를 겪었고, 철 들 무렵부터 그들의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동시에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하지 않거나, 대학에 진학한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이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며 뼈가 부서져라 일해서 오늘날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세대라는 것이 사회 일반의 관념이다.

얼핏 보면 산업화 세대의 성장 과정과 민주화 과정의 변곡점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4.19가 일어날 당시 그들은 10대 초반 혹은 열 살도 안 된 나이였다.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반면 1980년 광주항쟁이 벌어지고 이후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한 투쟁이 벌어지던 무렵 그들은 이미 사회에 자리를 잡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활인이었기에 '제대로 된 투쟁'을 하지 않은 세대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386세대 내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해는 386세대의 자부심 혹은 오만에 의한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6.29 선언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386세대의 투쟁만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시민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미국은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우려하여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미감정이 확산되었다. 그래서인지 87년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군 동원을 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일설에 따르면 CIA는 미8군의 탱크를 빌려와 수도방위사령부 앞에 세워두고 무력 시위를 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6월항쟁의 성공 과정에 미국이 우호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광주학살 미국 방조설'에 비하면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수준이다. 이는 역시 미국측에서 내정간섭 논란 우려로 인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6월 항쟁의 과정에서 '산업역군'들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이다.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5공 세력의 정책결정권자들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반발이었다. 시위가 단지 대학생이나 사회소외계층 뿐 아니라 중산층 전반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신군부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넥타이 부대'란 누구인가? 대학생, 혹은 갓 대학을 졸업한 386세대, 즉 '민주화 세대'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들보다 윗세대인 산업화 세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넥타이 부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 항쟁이 386세대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의 승리이기도 하다면, 386세대가 민주화 세대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3.

1990년대 당시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그들. 이른바 386세대 중 엘리트에 속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기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1987년 이루어진 직선제 개헌의 산물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는 것은 두 가지 맥락을 지니게 된다. 첫째, 그들은 50대 중후반을 넘어서는 지금까지도 스스로를 '민주투사', 다시 말해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을 체제를 유지하며 보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구성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둘째,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1987년 체제의 출발과 함께하는 기본 세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기꺼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87년 체제의 출발에 대해 386세대가 '민주화 세대'를 참칭함으로써 자신들이, 혹은 자신들만이 현 민주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양 이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 마치 1960년의 4.19가 '4.19 세대'만이 아닌, 당시 사회를 구성하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의지가 모였기에 벌어진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세력화한 특정 세대, 연령 집단 중 같거나 유사한 사회적 단위 속에서 동질적인 세대 경험을 한 이들이 거대한 사회 변화에 큰 기여를 할 수는 있으나, 어떤 집단만이 전반적 사회 변화를 대변하거나 그것을 자신들의 것인 양 포장하는 일은 옳지 않다.

소위 '산업화 세대'가 민주화에 기여한만큼, '민주화 세대' 혹은 그 세대에 속하는 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철수, 이재웅, 이찬진 등 소위 '벤처 1세대' 역시 모두 80년대 학번이다. 그들은 현재 정치권에 포진하고 있는 386세대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 반미투쟁, 혹은 통일운동 등에 투신하는 대신, 그들이 청년기를 보내던 당시 막 움트기 시작한 IT 산업의 태동과 변화에 주목하고 그 흐름에 탑승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그리고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동차를 수출해 우리에게 필요한 석유 등 천연자원을 수입하여 먹고 사는 나라가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아직 실리콘벨리에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 어느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놓고 보더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IT 선진국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운동권은 아니었던 그들, 말하자면 '386 우파'들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김대중 정권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벤처 창업 열풍에 탑승하여 새로운 산업 영역을 창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 면에서 월등하고 인프라 또한 비교할 수 없이 튼튼한 일본에서도 이런 식의 대대적인 산업 변화를 이끌지는 못했다.

삼성전자와 소니의 위상이 변화하게 된 것은 단지 두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가전제품'이라는 영역이 위축되고 'IT'가 떠오르게 되었던 거대한 산업적 변화 및 그에 대해 양국이 산업정책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여부와 맞물려 있다. 일본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한국은 성공했다. 그리고 한국의 성공에는, 90년대에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이지만 '민주화 세대'는 아닌, '386 우파'의 역할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요컨대 386세대라고 해서 모두 민주화 세대는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무렵 대학에 다닌 이들이 자신들을 민주화 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 전체가 나름의 기여를 해서 이루어낸 87년 민주 체제에 대해 자신들의 몫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은 산업화 세대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의 노고와 헌신이 2차 산업 중심의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3차 산업, 4차 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변하고 있는 지금, 1950년대생만을 일컬어 산업화 세대라 부르는 것은 역사적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4.

다시 우리 세대로 돌아가보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은, 그 개념이 등장했던 노무현 정권 무렵부터 가시화된 비정규직의 일상화를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시의적절했고 유의미했다. 지금도 우리 세대 뿐 아니라 더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로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 그러면서도 장래를 보장하기 어려운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기에 그것을 한 세대가 자신의 것으로 삼아 깃발처럼 휘두르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은 오래도록 고심해왔다. 그와 같은 토론들은 대부분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석에서 이루어졌기에 쉽게 인용 가능한 출판물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많은 논의에 참여해온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1980년대생들은, 특히 1960년대생들이 자신들을 대뜸 '민주화 세대'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대범함 혹은 뻔뻔함을 갖지 못했다. 물론 그러한 고민과 주저함에는 윤리적 근거가 없지 않다. 대학생 혹은 사회적 발언권을 인정받는 고학력층으로서 스스로가 특권 계층임을 자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는 88만원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꼭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힘을 갖지 않는 것, 권력을 쥐지 않고 공백을 창출하는 것은, 과연 그 자체만으로도 윤리적인가. 2019년의 나는 회의적이다. 가령 미국이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병력을 축소하고 철군시키자 그 힘의 공백을 타고 러시아의 개입이 커졌으며, 희대의 학살자이며 독재자인 아사드 정권의 폭정이 심해졌고, 내전이 심화되면서 대대적인 난민이 발생한 최근의 국제 정세를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다. 어떤 힘의 존재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힘, 권력의 오용과 남용이 문제이고, 그 오남용 중 가장 나쁜 형태의 오남용은 바로 권력의 공백이다. 진보적인 지향을 잃지 않고 있지만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88만원 세대'의 대표 주자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 부르지 않기로 하였다. 이는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고 세력화함으로써 권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니 그렇기도 하거니와 당시로서도 그와 같은 전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세대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들은, 권력을 포기하고 대신 한 줌의 도덕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담론의 주도권은 정작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할 세대의 손에서 벗어나버렸다. 대신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선과 도덕을 독점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들, 즉 자칭 민주화 세대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 광주항쟁을 자신들의 세대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그들에게 비정규직 및 국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볼 때, 미국에 대한 분노와 저항보다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던 용어를 빌리자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충돌할 때, 자칭 민주화 세대는 늘 민족모순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개성공단은 올곧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찬성이 아니라 반대의 대상이어야 한다. 외국의 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이용, 혹은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여건 속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칭 민주화 세대 및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현재의 진보 담론 구조 속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계급모순'이 '민족모순' 앞에 입을 다물고 마는 형국인 것이다.

'88만원 세대'가 자체적인 의제 생산 구조를 갖추고 진보의 갱신에 나서서 성공했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약간의 사회적 인지도 외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 사회적 인지도라는 것 역시 자칭 민주화 세대의 세계관 속에서 작동하는 무언가였으니, 88만원 세대가 가진 운신의 폭은 지금 회고조로 짚어보는 것보다 훨씬 좁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세대가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권력을 갖기 위한, 혹은 권력 투쟁에 나서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주체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5.

201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역사는 다시 한 번 1980년대생을 호명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모두가 아는 그 책,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주의에 입각해 쓰여진 소설이지만 동시에 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의 집단적인 경험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80년대생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아아 우리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88년 올림픽부터 1997년 IMF까지 약 10여년의 기간은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역동적으로 경제적 힘이 용솟음치고 문화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기성세대'의 자리를 '신세대'가 빼앗아가던 무렵이기도 하다.

이런 세상을 보며 자랐기에 80년대생들은 자신들이 성인이 된 후에 살아갈 사회도 똑같은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어느 정도의 민주적 구조와 평등은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삶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투쟁하되 자칭 민주화 세대처럼 싸우지 않는다. 일하되 타칭 산업화 세대처럼 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풍요와 어느 정도의 제도적 민주화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모순'은 물론이거니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경제적 목표 의식 따위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와닿을 리 없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이 제공하는 문제의식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싱싱한 지금의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동시에 김지영은 소위 명문대에서 교육받은 고학력자이기도 하다. 높은 학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쌓아온, 혹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온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임신, 출산, 육아 그 자체의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만큼이나, 그러한 과정에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혹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경력 단절이 문제인 것은 사람이 스스로의 가치를 노동과 노동에 따른 보상을 통해 찾는 선순환의 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여성들은 전적으로 어머니와 주양육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모든 여성에게 그러한 역할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큰 문제다. 하물며 '아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80년대생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는 <밀레니얼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바, 인적자본으로 길러졌지만 노동시장에 속하지 못하는 밀레니얼들의 사정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그 위에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사회학적인 용어를 사용해보자. 한국의 노동시장을 정규직, 공무원으로 구성된 1차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및 불안정노동으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으로 나누어보면, <88만원 세대>는 후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은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려 하거나, 진입했거나,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다시 배제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두 책이 다루는 대상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같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경제적, 사회적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약 10여년의 시차를 두고, 베스트셀러를 넘어 한 시대를 규정짓는 책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6.

<82년생 김지영>은 <88만원 세대>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80년대생들을 사회적 맥락에서 호출하고 있다. 이는 그 세대 집단의 주체화를 요청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질문은 주체화의 요청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과연 그 부름에 응할 것인가, 응한다면 이제 80년대생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기 시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세대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는가, 스스로에게 어떤 이름을 허락하는가의 문제는, 해당 세대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행보를 좌우하는 사안이다. 잠시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구분으로 돌아가보자. 저 수사법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히 자칭 민주화 세대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현행 민주주의 체제에 상당히 많은, 혹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양 주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호칭이 옳지 않고, 역사적 맥락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앞서 우리는 확인했다. (개인적으로는 50년대생과 그 앞뒤의 세대를 '도쿄올림픽 세대', 60년대생부터 70년대 초반생까지를 '서울올림픽 세대'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30대인 80년대생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한일월드컵 세대'가 되겠다. 이 호명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2000년대 말, 당시 20대였던 우리 세대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는 이름 하에 주체화했다면 어땠을까. 비정규직 저소득층 청년의 문제를 고학력 4년제 대학생들이 대리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비정규직과 노동시장의 이분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동력을 우리 세대가 잠시라도 손에 넣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었을테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대담한 가정을 해볼 수 있다. 80년대생 여성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의 재구성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와 같은 정체성의 구성과 주체화가 이루어진다면, 80년대생 여성들은 스스로를 '김지영 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중년 남성으로 이루어진 정치권은 자신들을 지지하지도 않는 냉소적인 젊은 남자들을 끌어안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젊은 여성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청년들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김지영 세대'라고 부른다면, 그 세대 혹은 우리 세대는 자체적인 의제를 찾고 확보하는 일, 특히 386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며 자신들의 활동 반경을 확보하는 일에 과연 관심이 있는가?

<밀레니얼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미국 뿐 아니라 한국처럼 산업화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고, 경제 개발의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 중년층이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나라의 청년들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젊은 노인들'은 당장 취직을 걱정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사이, 체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마저도 '늙은 청년들'의 전유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맬컴 해리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책을 마무리지었다. 번역자로서 나 또한 과도하게 정치적인, 혹은 모종의 정치적 결집과 실천을 요구하는 말을 역자 후기에 담지는 않았다. 저자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책은 출간된 후 몇 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별도의 자리가 마련되고 나니, 한때의 '청년 논객'으로서 다양한 술회가 떠오른다. 그 회한의 폭풍 속에서,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최악의 위기와 갈등이야말로 다시금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여본다.

2019년 11월 6일
서울, 팟빵홀




일러두기: 이 글은 2019년 11월 6일 서울 팟빵홀에서 있었던 <밀레니얼 선언> 북토크 발제용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2019-09-29

'과거를 청산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독일 재벌 가문 중 ⅓ 가량은 자손이 성년(16세-18세)이 될 무렵 서약서를 쓰게 한다. 지분 소유와 경영 개입이 주된 골자지만, 종교적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산다거나, 공적으로 사진 찍혀 노출되지 않는다거나, SNS를 안 한다거나,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된다.

사실 독일은 미국 중국 다음으로 슈퍼리치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이렇듯 부자들이 극히 몸을 사리는 문화로 인해 존재감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독일이 잘 사는 나라니 부자가 많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짜 질문'은, 대체 왜 독일 부자들은 미국 부자들과 달리 자기현시욕을 억누르며 살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만 간단하다. 1세대 부호들이 탑 랭커인 미국과 달리 독일 부자들은 대부분 기존 자동차/부품/유통업체의 상속자들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기업들은 직간접적으로 나치 시대에 협력자였다.

독일 (특히 북부) 특유의 경건한 개신교 분위기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나치 시대부터 재벌이었던 가문의 자손들이 바로 독일의 현재 상위 부호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 가능한 사실이 두 개 있다. 첫째, 독일을 '나치/과거 청산'의 모범적인 사례인 양 떠들어대는 국내의 분위기는 사실과 제대로 부합하지 않는다. 구체제에 협력하거나 그 일부였던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가 전쟁 이후에도 거의 같거나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고 살았던 것은 독일, 일본, 그 외 모든 전범국에서 마찬가지였다.

둘째, 돈의 역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역사적 죄악'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 영역이 생겨나고 자본주의가 역동적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보다 낫다고 볼 여지가 있다.

IPO로 한탕 하고 '엑싯'하는데 혈안이 된 젊은 사업가들이 득시글거리는 자본주의 소굴 미국을 고까워하는 이들은 유럽, 독일을 어떤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처럼 칭송하곤 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등은 모두 자신이 창업자로서 부를 쌓은 1세대 슈퍼 리치이며, 이런 이들이 큰 부와 사회적 발언권을 확보한 나라가 미국이기도 하다. 이는 남의 눈을 피해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나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내려온 부를 간직하며 암암리에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독일식 부자 모델보다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를 정답으로 이끌어주는 원칙은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람이 노력한만큼 벌어서 먹고 사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다. 물려받은 부가 대대로 이어져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세상은 나쁜 세상이다. 혹은, 나쁜 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과거를 '청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특히, 자본주의의 역동적 힘이 끓어오르지 않는다면, 대를 이어 내려오는 '묵은 돈'이 젊은 창의력과 에너지를 짓누르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참고 기사: “Germany’s business barons are finding it harder to keep a low profile”. The Economist, 2019년 6월 15일.

2019-09-25

번역 신간 소개: 『밀레니얼 선언』

번역한 책이 나왔습니다. <뉴 인콰이어리> 편집자 맬컴 해리스가 쓴 『밀레니얼 선언』입니다. 1988년생 저자가, 사방팔방 욕먹고 비난당하는 본인 세대의 정치경제학적 형성과 구조에 대해, 마르크시즘적 관점을 가미해 해부한 책입니다. 1983년생 번역자가 한국어로 옮기고 해제를 붙였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다 아는 바와 같이, 미국 또한 '자유로운 교육'은 개뿔이죠. 대학을 향해 끝없는 돈놓고 간판먹기 게임을 벌이는데, 설령 입시 경쟁에서 이긴다 해도 수만 달러씩 빚을 지고 인생의 출발선에 서는 것이 미국 밀레니얼의 삶입니다. 한국의 청년층의 그것과 너무도 닮은꼴이라 하겠습니다.

현재 미국(과 한국) 사회는 자기 재능을 떨치고픈 이에게 작업, 샘플 제작, 홍보, 기회 비용 등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오직 젊은 재능의 성공만을 '공유'합니다. 이 책에 따르면, 래퍼 치프 키프는 음반을 25만장 못 팔면 이후 앨범 출시 계약이 취소되는 조건을 걸고서야 메이저 레이블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수많은 아이돌 '연습생'들의 처지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다양한(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사례와, 그것을 관통하는 이론적 시각을 갖춘, 밀레니얼 세대 당사자가 쓴 밀레니얼 세대론은 미국에서 거의 처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늘 책이 나왔고 서점에 배본은 빠르면 내일, 늦어도 이번주 내로 완료될 예정입니다. 그때 링크를 첨부하고, 날짜를 바꿔 다시 업로드하도록 하겠습니다.

2019-09-06

희망의 인문학, 절망하는 인문학자들

    • 이 글은 2010년 10월 18일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죽은 철학자의 사회'…'희망의 인문학'은 없다!"의 원고입니다. 편집부에서 수정, 교열을 한 글을 읽고 싶으시다면 앞서 제시된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 원고들을 읽어나가던 중, 9년 전에 쓴 글이지만, 아직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하여 블로그에 올리고 공유합니다.



  • 1.

    자신이 대단한 아이디어 뱅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있다. 그는 선출직 공직에 당선된 직후부터 본인의 '끼'를 마음껏 발산해왔다. 가령 이런 것이다. 날이 갈수록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고, 그래서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선자의 생각을 묻자 그는 대번 대답했다. "쌀로 국수를 만들어서 먹으면 되지!"

    이 선출직 공무원이 대한민국의 현직 대통령이라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일 것이다. 쌀 생산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말하는 자리에서, 현실적으로 통용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이익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으로 갈 것이라고 보장할 수도 없는 '아이디어'만을 내놓는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혀를 찼다. 2008년 초, 이 대통령이 아직 당선자 신분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같은 논리 구조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를 둘러싼 담론에서도 사실상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쌀 농사가 힘들면 쌀국수를 먹으면 되지, 라는 말처럼, 인문학이 위기라면 '희망의 인문학'을 하면 되지, 라는 대답이 돌아오고 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 논리 구조는 대동소이하다. 구조적 변화에서 비롯한 위기 앞에서 '시장성'의 재고를 강조하는 것 말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위기'라는 현상 그 자체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 담론들의 모습이 더욱 문제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그 위기에 대한 이 반응만큼은 분명히 한국적이며, 그 자체가 사실상 더 큰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야기를 좀 더 풀어놓기 위해서는 『희망의 인문학』을 펼쳐들 필요가 있다.

    2.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하게 사는가? 이 해결되지 않는 질문 앞에서 『희망의 인문학』의 저자인 얼 쇼리스는 한 가지 답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라고 정의내린 후, 그는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층의 삶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55쪽)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참석한 향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길 위에서 만난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액자 형식의 작품인 『향연』에서, 정작 작품의 주제를 전달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그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나눈 여사제 디오티마였듯이, 얼 쇼리스 역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어떤 여성의 입을 통해 전달한다. 그는 비니스 워커라는 여성 제소자의 발언에서 힌트를 얻어, 가난한 이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클레멘트 코스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 핵심적인 부분을 펼쳐보자.

    비니스는 대화의 주제가 실제로 자녀 문제로 넘어갈 수 있도록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빠르지만 리듬감 없는 어투로 입을 얼였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moral life of downtown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중략)… "그렇게만 하면, 그 애들은 더는 가난하지 않게 된다니까요!" …(중략)… "길거리에 방치된 그 애들에게 도덕적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168쪽)

    일반적으로 볼 때, 가난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노동이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혹은 정당한 대가를 받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적·도덕적 고양. 클레멘트 역시 그와 같은 긍정적 효과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이미 '무력(force)'에 의해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하면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빈곤의 포위망 안에서 하는 노동은 무질서하기 짝이 없"으며, "그런 식의 노동은 또 다른 무력을 낳게 되고, 포위망 안의 혼돈은 점점 더 심해져 가"(117쪽)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에 대한 해법은 노동 혹은 노동운동을 통한 단결이 아니다. 중산층과 같은 정서적·도덕적(moral) 힘을 기름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부유하고 자유로운 개인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러한 결론을 정당화한다. "내가 만났던 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모두 무력의 포위망에 대해 일종의 창조적 대항, 적극적 대응을 했으며, 이것은 계급투쟁이라는 개념보다는 운명에 대항하는 자유의 성장과 더 많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161쪽, 강조는 인용자. 이 지점에서 얼 쇼리스가 드러내는 반 노동적인 서술에 대하여 논의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겠으나 이 지면에서는 일단 논점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사상적 기반 하에서 출발한 클레멘트 코스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졸업 뒤 6개월이 지났을 때 정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두 가지 다 해당하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는 "뉴욕 라디오 방송국에 비정기적으로 원고를 쓰면서 바드대학에 다시 한 번 지원할 준비를 하고 있"(269쪽)었다. 말하자면 클레멘트 코스를 이수한 모든 사람들은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정규직이 되었다. 예외는 단 한 명 뿐인데, 그나마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발적 실업'에 속한다.

    빈민들이 개인적으로 삶의 원동력을 얻고 그것을 유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적어도 이 책 『희망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례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고 모범적이다.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일군의 사회운동가 및 학자들이 한국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어 운영중이다.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글쓰기 교수인 최준영에 따르면,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1기와 2기 졸업생 20여명 중 대부분은 노숙생활을 청산했으며 "앞으로 최소한 자기 자신만큼은 책임지는 삶을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되었다"(참고링크: http://www.ggcf.or.kr/books/iframewebzineview.asp?ino=2076 )고 한다.

    이와 같은 개인적인 자립은 한낱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다. 얼 쇼리스의 책으로 돌아가보자. 그는 "빈민들이 합법적 권력의 범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러고 나서 게임의 잔혹성과 맞선다면, 그들은 기존에 확립된 사회 질서에 진정한 위협이 될 것"(428쪽)이라고 확신한다. 자존감을 회복한 빈민들이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위험'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얼 쇼리스가 주창하는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의 위기'에 맞서 현재진행중이다.

    3.

    얼 쇼리스는 레오 스트라우스가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 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로서, 주로 고대 그리스 고전을 해석하여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모두 그리스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스승이 한 그대로 고전을 읽고 번역하는 것을 자신들의 주된 과업으로 삼았다. 그 제자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앨런 블룸(Allen Bloom)이며 그와 얼 쇼리스는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녔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 줄여서 '스트라우시안'(Straussian)들은 몇 가지 사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앞서 말했듯 그리스 고전에 대해 대단히 큰 경외심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플라톤을 열심히 읽는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레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비의적(秘儀的)인 방식으로 엘리트주의적인 정치사상을 감춰두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외형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한들, 실질적으로 국가를 지배해야 한다는 내용이 플라톤의 텍스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플라톤을 그렇게 해석하였고 그의 제자들은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얼 쇼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스트라우시안들이 가지고 있는 인문학, 혹은 철학에 대한 입장에 부정적이지만, 그것은 완전히 비교가 불가능한 위치에 서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기보다는 어떤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의미에서 부정적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스트라우시안이나 얼 쇼리스나 모두 고대 그리스를 이상적인 삶이 구현될 수 있었던 공간으로 간주한다. 그 속에서 살았던 한 사람, 즉 소크라테스를 어떤 전인(全人)적 삶의 원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후대에 기록으로 남긴 플라톤에 대한 입장 정도일 것이다. 스트라우시안들이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비의적으로 숨겨진 엘리트주의를 찾아내려 할 때, 얼 쇼리스는 '순수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찾아내고 엘리트주의자였던 플라톤의 흔적은 애써 무시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호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떤 의미에서의) 플라톤주의자인 앨런 블룸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할 겁니다. 『변명Apology』, 『크리톤Crito』의 일부분, 『파이돈』에서 몇 쪽, 아마 이런 식으로 시작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학생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을 것입니다."(234쪽) 전통적으로 '에우티프톤', '변명', '크리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한묶음으로 취급되어왔다. 동시에 플라톤을 읽을 때에도, 초기작(에우티프톤)부터 중후기의 걸작(파이돈)까지 고루 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플라톤의 텍스트가 널리 읽히기 시작한 이래 위 네 대화편을 한꺼번에 읽는 일은 언제나 장려되어온 철학적 학습법인 것이다.

    거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몇 쪽, 일부분'만 읽고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얼 쇼리스는, "우리는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플라톤 철학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행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읽겠다는 목적이 너무도 잘 드러나고 있다. 플라톤에서 시작한다면서 이렇게 플라톤을 안 읽기도 쉽지가 않다. 보다 못한 디오티마, 아니 비니스가 한 마디 첨언한다. ""뭔가 빠뜨린 게 있는데요." …(중략)… "'동굴의 비유'요. 그걸 빼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철학을 가르치려고 하죠? 동굴이 바로 빈민지역이고, 빛이 교육인 거죠. 가난한 사람들은 분명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234-235쪽)

    쇼리스가 플라톤의 핵심 저작인 『국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인 '동굴의 비유'를 빼놓았던 동기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과 중기 대화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는 전적으로 플라톤의 작품일 뿐 소크라테스의 실제 행적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니스가 올바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상대가 가난한 사람들이건 아이비리그의 귀공자들이건) 플라톤 철학을 가르치면서 동굴의 비유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얼 쇼리스가 플라톤, 혹은 플라톤을 비의적으로 해석하고 숭배하는 앨런 블룸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희망의 인문학』중 12장 '급진적 인문학'은 통째로 앨런 블룸의 인문학에 대한 입장을 비판하는데 할애되어 있다. 인간이 공적인 삶, 정치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인문학이 갖는 역할을 서술하고, 그것을 부정한 앨런 블룸을 비판하는 것이다. 플라톤을 읽으면서도 플라톤의 생각이 아닌 오직 소크라테스의 행적만을 추적하려 하는 쇼리스의 행동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블룸은 플라톤의 『국가』를 교육에 관한 위대한 저작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플라톤의 사상 가운데 반 민주주의 부분만을 편식했고, 그것에 기초해서 사회와 대학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었다"(187쪽)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비판은 앨런 블룸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 중 하나로 특별히 언급할 것이 없다. 하지만 "소피스트가 시에 관한 토론이 인간 교육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지만 근본주의자 블룸은 그 말을 들으려 조차 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 버렸기 때문"(189쪽)이라고 고발할 때, 그는 뭔가 잘못 짚고 있다. 그가 비판하는 앨런 블룸이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을 쓴 그 앨런 블룸이 맞다면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정치철학』은 처음부터 시와 정치의 관계를 고찰하는 챕터로 시작한다. 플라톤의 시인추방령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단지 일종의 엄숙주의로만 받아들일 때, 우리는 플라톤이 고대의 서사시 전통과 벌였던 진지한 지적 투쟁은 모두 망각한 채 그저 '착한 소크라테스와 그것을 왜곡한 플라톤'이라는, 19세기에 이미 충분히 논박된 도식적인 철학 이해에 발목을 잡혀버린다.

    책 자체의 내용과 크게 상관 없어 보이는 이런 서술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얼 쇼리스의 활동, 그의 헌신, 그가 철학에 대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애정과는 무관하게, 상아탑에 안주하는 철학과 세속에서 활동하는 철학을 구분하고 후자의 가치를 전자에 비해 높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특정한 맥락 속에서 도출된 '하나의 입장'이라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얼 쇼리스의 활동에 대한 존경과는 별개로, 우리는 '인문학'적으로 그의 입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보내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고전에 대한 편향된 강조, 그 속에서 도드라지는 플라톤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 칸트와 소크라테스를 비교하며 "두 철학자 모두 진리와 도덕, 아름다움의 문제에 관심을 뒀지만, 칸트는 세상과 떨어져서 살 수 있었고, 소크라테스는 누구보다 세속적인, 즉 '세상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29쪽)다고 내리는 평가 등은 결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아니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을 자신의 논적으로 삼고 있으며 스트라우스에게 배운 그리스 철학의 맥락을 채 지워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얼 쇼리스의 인문학에 대한 입장이 비로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광야의 지식인이고 칸트는 상아탑의 노예라는 발상, 그것 역시 하나의 '입장'일 뿐이다.

    4.

    이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인문학을 배우는 것이 누군가의 내면적 주체성을 북돋워줌으로써 그를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왜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보다 인문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자살하고 있을까?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왜 '희망의 인문학'이 승리하고 있는 가운데, 인문학자들은 절망하고 좌절하여 목숨을 끊고 병에 걸리고 눈물을 삼켜야 하는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클레멘트 코스를 수강하는 그 누구보다도 인문학에 푹 빠져 산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건 미국에서건 마찬가지이다. 매우 기초적인 삼단논법에 따라 생각해보자. 대전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힘'을 가진다. 소전제: 인문학자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결론: 인문학자는 '힘'을 갖는 사람이다.

    물론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 반대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솟아오르는 동안, 정작 인문학의 근간이 되는 연구를 수행하는 소장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며 문자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다.

    7월 4일 세상을 뜬, 대표적인 하이데거 전문가 신상희 연구교수의 사례를 살펴보자. 그는 하이데거만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번역해온 사람으로, 후기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숲길』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들을 우리 말로 옮겼다. 하지만 대학들은 인문학 교수의 정원을 줄여나가기만 할 뿐이었고, 그는 늘 교수 임용에서 고배를 마셨다. 오랜 절망 끝에 헤매던 그는 50세의 이른 나이에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둔다. 교수신문에 따르면 고 신상희 교수의 "아내는 남편의 깊은 사색 저편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가 오랫동안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대신 이 한 사람의 인문학자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대학들이 인문학과의 정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있으며 그래서 인문학 연구자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문학 교수들의 철밥통이 깨지는 것'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지금까지 인문학자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잃었고, 그 결과 인문학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 혹은 훈수도 빠지지 않는다. 문제의 원인을 그와 같이 파악한다면, 클레멘트 코스와 같은 대중적인 인문학 강연의 수를 대폭 늘림으로써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사실이 그러할까?

    앞서 살펴보았듯이 클레멘트 코스에서 전제하고 있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줄 수 있도록, 그와 같은 목적으로 편집된 인문학이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인문학적 관점이겠지만 그것이 전체 인문학을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희망의 인문학'을 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갈 때, 고 신상희 교수와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인문학을 교육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을 때, 과연 나치에 협력한 혐의를 안고 있는 하이데거만을 연구해온 사람과 그의 작업들은 어떻게 공정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얼 쇼리스의 입장과 같은 '하나의 인문학'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문학이 통째로 사라진 세상만큼이나 끔찍할 수 있다.

    애초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논의의 프레임 자체가 잘못되었다. 인문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기초학문의 연구가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돈이 되는 학문, 돈이 되는 학과로만 정부 및 대학들의 지원이 쏠린다. 해당 분야 내에서 충분히 인정받는 연구 실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더라도, 해외의 연구지에 등재되지 않으면 성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식의 협박이 횡횡한다.

    이것은 인문학의 위기지만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기초학문 전체의 위기를 놓고 연대의 범위를 넓혀나갈 때 비로소, 한국 사회 내에서 대학이 갖는 위상과 그 대학 속에서 학문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고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우선 '인문학의 위기'라는 단어가 너무도 '핫'하게 떠올라버렸다. 그리고는 그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어떤 하나의 인문학적 해석 및 방법론이 마치 모든 문제의 해법인 것처럼 논의되고 주창되고 도덕적 우월성을 지니는 명제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이여, 고매한 상아탑에서 벗어나 대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라!' 얼마나 쉽게 대중들의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문구인가. 그리하여 인문학의 위기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대중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닌 연구실에서 파고들어야만 하는 철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은 쓸쓸히 잊혀지고 생계를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5.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책 자체가 지니는 가치는 쉽사리 폄하될 수 없는 것이다. 학문과 세상이 맺어야 할 올바른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고, 그것을 실천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책갈피마다 끼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린 '인문학의 위기'는 훨씬 더 크고 본질적인 사태이며, 『희망의 인문학』은 그 문제 중 일부에 대한 해답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전체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문제는 오직 이 책만을 혹은 이 책에 대한 소개만을 읽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내뱉는 목소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듯, 『희망의 인문학』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촉발된 국내의 담론들은 한층 더 문제적이다. 고매한 상아탑의 학자들이 대중들과 지식을 나누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중, 그 연구자들이 적절한 수준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식 나눔', '배움의 공유' 같은 그럴싸한 단어들이 횡횡하는 가운데, 오랜 세월과 노력을 들여 얻은 지식을 무료로 배포하라는 목소리만 높을 뿐이다.

    얼 쇼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희망의 인문학』을 읽고 감동받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인문학자들에게 무턱대고 지적 자원봉사를 요구할 때,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얼 쇼리스는 못을 박는다. "…(중략)… 자원봉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름지기 대학 수준의 강의는 자원봉사자가 할 수 있는 성질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 교수들은 일류 대학의 조교수들이 받는 수준의 대우를 받는다."(23쪽)

    인문학 하는 너희들이 지금까지는 너희들끼리만 통하는 소리 하고 시시덕거렸으니 좀 굶어도 싸다, 굶기 싫으면 '소통'해라, 이런 식의 폭력적인 요구가 적어도 『희망의 인문학』에는 담겨있지 않다. 국내에서 시행되는 '좋은 활동'들 중 상당수가 참여자들의 인내와 고통을 전제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인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도 '상아탑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얼 쇼리스는 책의 도입부에서부터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국내에서 통용되는 '희망의 인문학'에 대한 논의에 이와 같은 현실적 고려가 담겨있긴 한가?

    필자는 한 선출직 공무원이 쌀농사에 대해 내놓은 '아이디어'를 비판하면서 이 서평을 시작했다. 쌀이 잘 안 팔리면 쌀로 국수를 만들면 되지. 이 발상은 현실성이 없다. 쌀로 국수를 먹은 사람이 또 밥을 먹는 게 아니니까, 전체적으로 쌀 소비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쌀국수를 만드는 쌀과 우리가 밥을 해먹는 쌀은 종(種)이 다르다. '희망의 인문학'이라는 설익은 담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평생을 바쳐 어떤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 너 고매한 상아탑에서 머물지 말고 '희망의 인문학' 해봐 라고 말하는 것은 농민들에게 벼 뽑고 안남미 심으라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문제에 대한 해법이 아니며, 오히려 문제를 가중시킬 뿐이다.

    『희망의 인문학』은 인문학에 대한 국내의 담론에서 한 이정표가 되는 책이다. 이 책의 성공과 그 파장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은 매우 다양하고 중층적이다. 나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하는 것 자체는 대단히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미약한 빛이 비춰지고 오직 그것만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해법처럼 이해될 때, 누군가는 굶고 절망하고 죽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윤리가 아닌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 잊지 않고 거짓 해법에 열광하지 않는 것. 인문학이란 본질적으로 기억하고 되새기는 학문이니까. 다양한 논의와 해법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희망의 인문학'이 도래할 날을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