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8

[캠페인] 지금, 세계문학전집을 읽읍시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소설이 아주 잘 팔렸습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프랑스 출판의 기틀을 닦은 가스통 갈리마르 평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관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점령 시기에는 책이 왕이었다. 또한 라디오 파리, BBC와 같은 라디오 방송은 프로그램도 재밌지 않았고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더욱 즐겨 찾았다. 파리에서나 지방에서 책이 지루함과 박탈감과 우울을 이겨 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 덕분에, 종이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들은 원만하게 사업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 303-304쪽.

사회 활동의 제약이 있고, 가슴은 답답하고, 불평을 함부로 털어놓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런 상황. 그럴 때 2차 대전을 겪던 프랑스인들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두껍고, 재미있고, 검증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죠.

21세기의 인류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전에 Financial Times에서 본 보도에 따르면 COVID-19 발병 이후 중국의 모바일 게임 업체들의 주가가 대폭 올랐다고 합니다. 다들 스마트폰 게임 아니면 유튜브, 혹은 SNS에서 뇌를 벅벅 긁으며 도파민을 쥐어짜거나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에코 체임버에 갇힌 채 답답해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일반적인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으니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책장에도, 괜히 사두고 안 읽는 '세계문학 고전'이 한 두 권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읽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꼭 '세계 문학의 고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한참 전에 나온 책, 시간의 검증을 버텨낸 책, 그리고 어디에나 흔히 있는 책을 우선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책을 읽고 있을 때만은, 지금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그런 책 말이죠. 그럼 당연히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이런저런 소설들이 1순위로 거론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줄창 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둬서, 그럼 뭐 어쩔 건가요? 아이들은 시간이 남아 PC방에 가고 거기서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어른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웃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를 가고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인문주의자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단 하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책을 읽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책과의 거리 좁히기' 입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식재료를 이번 기회에 털어 먹듯이, 책장 위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고전 소설들을 꺼내어, 읽읍시다.

사족) 저는 W. G. 제발트의 책 중 <아우스터리츠>는 두 번, <토성의 고리>는 한 번 읽었는데, <현기증/감정들>은 사놓고 아직 안 봤군요. 지금이 그것을 읽을 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각각 나름대로 '아 이거 읽어야지 언젠가'의 리스트를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언젠가에 적합한 시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2020-03-17

도쿄 올림픽,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진다면

나는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대신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올림픽은 관객 이전에 선수들을 위한 행사다.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거행되는 이 대회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진실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정은 지켜져야 한다.
  2. 올림픽을 보는 전 세계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올림픽 일정은 지켜지는 편이 낫다. 우리가 비록 약 100여년만에 전 세계적인 유행병과 싸우고 있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모티베이션을 전달할 수 있다.
  3. 세계 경제의 침체를 막기 위해서도 올림픽은 일정대로 치러지는 편이 낫다. 올림픽은 단지 스포츠 행사일 뿐 아니라 방송, 광고, 기타 비즈니스가 결부된 거대한 경제 이벤트다. 이것이 미뤄진다면 안그래도 휘청이는 세계 경제에 좋지 않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서는 올림픽처럼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밀접하게 모여앉아 열광하고 환호하고 끌어안는 행사를 안 하는 게 좋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100% 무관중 올림픽이 답일 수 있다. 단 한 명의 현장 관객 없이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스포츠 중계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위기지만 동시에 큰 기회일 수 있다. 카메라 및 기타 장비와 스탭이 관중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며, 관중에게 보이더라도 최대한 덜 보여야 한다는, 스포츠 중계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핵심적인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해보자. 지금 축구 중계에 관중석이 없다면? 그래서 스탭들이 원하는대로 영상을 찍고 뽑아낼 수 있다면?

수십개의 드론을 동원할 수도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크레인을 배치할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까지 차마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다양한 각도와 기법을 동원한 촬영이 가능해진다. 현장 중계지만 마치 각본을 가지고 찍은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편집하여 송출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올림픽을 완전한 미디어 스펙터클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수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드러내어 겨룰 온전한 기회를 얻고, 주최국과 IOC는 비즈니스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선수와 스텝, 방송 등 인원 전부를 합쳐봐야 1만명도 되지 않는다. 이들이 감염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올림픽에 참여시키고 귀국시키는 것은 일본 정도의 나라라면 불가능한 일이 전혀 아니다. 일본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은 관중인데, 관중 없이 올림픽을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마라톤 같은 실외 스포츠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통제하면 된다. 혹은 마라톤 또한 실내 경기장에서 치름으로써,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마라톤 스코어'가 어떻게 될지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망상이니까 무슨 말을 못하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이거다. 우리는 COVID-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 전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 또한 막아야 한다. 무턱대고 때려치우고 안하고 거리두기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성을 유지해주는,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지켜주는 것들은, 동시에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또한 올림픽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스포츠 중 상당수가 등장하는 무대에서, 100% 무관중 경기를 '관객'이라는 제약 없이 중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운동인가' 싶을 정도의 영상이 실시간 송출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나는 그런 것을 문득 보고 싶어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무턱대고 안하고 때려치우고 집에 틀어박히고 이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뉴노멀'이 닥쳐온다면 그 '뉴노멀'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올림픽 취소해라 일본 망해라 아베 좆돼라'라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불현듯 한마디 해 보았다.

덧) 올림픽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이 존재한다. 가령 말콤 글래드웰은 '올림픽을 나라 옮겨가면서 하지 말고 어떤 섬 하나를 '올림픽 섬'으로 정해서 4년마다 같은 경기장과 트랙에서 경기를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각국에서 올림픽 유치 후 벌어지는, 많은 경우 훗날 쓸모없어지는 대규모 시설 공사가 낭비라는 것이다. 만약 말콤 글래드웰의 주장대로 '올림픽 섬'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면, 관객까지 싹 격리하는 결과가 되므로, COVID-19 확산 따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2020-03-14

중국발 입국 봉쇄, 부도덕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퀴즈. 2020년 3월 14일 현재, 뉴질랜드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는 총 몇 명일까? 정답은 5명. 눈을 의심할텐데, 다섯 명, 맞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였으나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온 사람은 379명, 현재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은 두 명이고, 사망자는 없다.

뉴질랜드의 인구가 48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이것은 실로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의 확진자가 50명에 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이 3800명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세계가 놀라고 경탄해야 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뉴질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뉴질랜드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2월 3일부로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던 것이다. 1월 28일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National Health Coordination Centre (NHCC)를 세운 후, 그 통제에 따른 대응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중국을 떠난지 2주가 지났음이 확인된 경우에만 입국을 허용했다. 사실상 '중국 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3월 14일 현재 대만의 확진자 수 또한 4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만 또한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다.

대만과 뉴질랜드, 두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았고, 돌아오는 자국민을 철저히 추적 관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섬이라는 것이다. 출입국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또한 사실상 섬이다. 뉴질랜드나 대만보다 더 훌륭한 의료 체계와 헌신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응은 대만 및 뉴질랜드와 너무도 달랐다. 중국 본토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국인에 대한 세심한 추적 관찰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활발한 사회 활동'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사망자 수는 대만의 확진자 수보다 많다.

진지하게 묻자. 뉴질랜드와 대만의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가?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1980년생 여성으로, 세계 최연소 여성 지도자이며, 노동당이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보 여성 지도자다. 차이잉원의 내각에는 오픈리 트랜스젠더 장관이 IT 기술을 총 지휘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를 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끌고 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친문 선전선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눈에는 차이잉원과 저신다 아던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그들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당연한 일을 담대하게 하는 국가 지도자로 보인다.

솅겐국(aka 유럽)이나 미국처럼 육로로 외국과 교통이 가능한 나라는 입국 금지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이나 뉴질랜드 혹은 한국 같은 섬나라는 입국 금지를 하면 외국인이 못 들어온다. 입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감염 경로 추적이 용이해진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초기에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60명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국민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다.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칭송한다고?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 집어치워라. 진정 바이러스 대응을 잘 해낸 국가들은 따로 있다. 지리적 여건을 살려 봉쇄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수십 명 수준으로 감염자를 통제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다. 대만은 단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때 보건 총책임자가 통곡했다.

'글로벌 언론'들은 그런 사례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지리적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대만의 성공 사례가, 글로벌 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정부가, 글로벌 언론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아닌가?

다시 차별과 혐오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면역도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이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혐오 행동인가?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부도덕(immoral)한 것이다. 반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하고, 중국발 한국인의 행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의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을 따질 일이 아니다. 비도덕(unmoral)이다. 쓰나미가 몰려올 것에 대비해 제방을 높이 쌓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을 초기에 시행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계 동포에 대한 혐오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청와대가 그렇게까지 탁월한 인권 감수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통령이 뭘 하건 옹호하는 친문 네티즌들은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혐오 세력'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요컨대 그들은, 부도덕을 막기 위해, 도덕과 상관 없이 요구되는 대응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발생한 60명이 넘는 사망자들 앞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 능력 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진자를 찾아낸다 크어~' 같은 소리들을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에 빠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 차단은 몇몇 국가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전 국토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그렇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이른 시점에 봉쇄 전략을 택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봉쇄를 도덕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방역 차원에서의 입국 봉쇄 조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도덕(unmoral)한 일이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봉쇄 조치가 한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혹은 한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번질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도덕(immoral)의 문제를, 비도덕(unmoral)한 의학적 목적의 입국 봉쇄와 혼동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이 문제를 연거푸 강조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관념과 끓어오르는 도덕적 정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혐오하라' 같은 손쉬운 구호를 앞세우는 얼간이들이 득세할 때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기준을 잃지 않되, 도덕을 적용할 곳과 아닌 곳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다.

2020-03-08

정부와 언론의 뻔뻔스러운 '바이러스 검사 맛집' 프레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놀랍지 않다. 여론조사가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여론 그 자체가 조작에 가깝도록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뭘 잘못해왔는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뭘 더 잘못할 예정인지 모른다. 대신 그들이 아는 것은 언론을 통해 유포된 이상한 프레임이다. 가령, 이런 것들 말이다.

  1. 한국은 정말 빠른 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전 세계가 깜짝 놀라 감탄한다.
  2. 한국은 정말 투명하게 정부가 모든 정보를 공개하며,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싸우는 전 세계 정부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일단 1을 살펴보자. 얼핏 들으면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개쩔게 잘 대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는 것은 그만큼 감염자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검사를 할 일도 없다. 이건 마치 집이 활활 불타고 있는데 소방수가 불 잘 끈다고 좋아하는 꼴이다.

COVID-19 감염증 검사 프로토콜. 일단 열이 나야 하고, 마른기침을 동반한 가래가 나와야 한다. 그 가래를 채취하여 검사한다. 1차 의료기관에는 지금도 수많은 감기, 폐렴 환자들이 당도한다. 의사들이 그들 중 COVID-19 감염 의심자를 걸러낸다. 그렇게 한 차례 선별된 의심 증상자들의 가래를 채취하여 샘플을 만들고, 샘플을 분석하여 확진자를 선별한다.

즉, COVID-19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고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검사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 대상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음성이 나오고 일부는 양성이 나온다. 그렇게 양성이 나온 사람들만 확진자다. 이 관계를 집합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확진자 ⊂ 피검사자 ⊂ 유증상자

그러므로 한국에서 검사를 빨리 한다고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다. 외국인들이 보면 신기하긴 할텐데 그게 외신에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의료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만큼 COVID-19 바이러스가 퍼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세계가 깜짝 놀라는 한국의 검사 속도'를 자랑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과 청와대의 판단 착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한국의 검사 속도 세계가 깜놀!'같은, 무슨 나영석 PD가 연예인들 데리고 외국 나가서 식당 차리고 외국인들이 맛있다고 따봉 해주는 것 같은 프레임을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물론 외신들은, 좀 보기 드문 일이긴 하니까 보도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그런 장단에 놀아나는 건 좀, 문제 있지 않나? 집에 홍수가 나서 오수가 역류하고 있는데 '캬, 우리 형님 바가지로 물 퍼내는 솜씨 보소~ 엄지척!' 이지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 프레임도 그렇다. 귀찮아서 모든 외신을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어권 언론이라면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를 백퍼센트 찬성하거나 환영할 까닭이 없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주 이코노미스트를 펼쳐보니,

In South Korea, by contrast, the government is being forthright and formidably transparent, allowing Koreans to trace their possible brushes with the disease. As well as briefing the press thoroughly twice a day, and texting reporters details of every death, the government puts online a detailed record of each new patient’s movements over previous days and weeks, allowing people to choose to shun the places they visited. The risk of illicit activity being thus uncovered—at least one extramarital affair may have been—gives people an extra incentive to avoid exposure to a disease which, in most of the infected, results in only mild symptoms.

한국에서는 대조적으로 정부가 직설적이고 투명해서 한국인들은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스스로 추적해볼 수 있다. . . . 바람직하지 못한 활동이 드러날 위험도 있다. 적어도 한 건의 불륜 사례가 드러났으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감염 사례에서 가벼운 증상만 보이고 끝날 수 있는 이 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더욱 피하게 만드는 유인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What the world has learned about facing covid-19", The Economist, 2020년 3월 5일

국민의 신용카드와 교통카드 정보에 기반해 누군가의 소비와 동선을 모두 추적하여 까발리는 것은, 외신들이 나오는 '서구 선진국'이라면, 영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수집하여 언론에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을 '투명성'이라고 아이고 좋다 멋지다 한국 최고~ 라는 식으로 영어권 언론이 다룰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할 것이다. 지금 위에 인용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처럼, 다들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우려를 전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해당 대사를 좀 더 읽다보면 등장하는 문단은, 한국인 중 상당수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투명성'이라는 것이 외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정직하게 알려준다. "한국의 권력은 시민의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을 둔다. 한국의 대응 중 일부는 다른 민주 국가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South Korea has powers that put very little weight on its citizens’ privacy; some aspects of its response might be hard to mount in other democracies.)

물론 그 이후로 케나다의 사례를 들어, 국민의 동의 하에 잘 작동하는 민주국가가 국민의 설득과 동의 하에 격리 조치 등을 더 잘 시행할 수 있다는 서술이 따라붙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한국의 '투명성'이 기존 민주국가의 상식과 어긋나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야 한국의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투명하다고 뉴욕타임즈 같은 외신에서 막 좋아요 쌍따봉 했다는데?' 정도로 알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와대의 편에 선 언론들은 청와대 편을 드느라 그런 식으로 단장취의하고 있으며, 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들 또한, 어쨌건 '국뽕 장사'를 하면 조회수에 도움이 되니까, 국뽕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니 청와대는 여론조사를 조작할 필요가 없다. 여론 자체가 조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대응이 잘못되어 이 사달이 나고 있는데, 확진자 빨리 잡아낸다고 좋아라 하는,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논리가 통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한국은 '바이러스 검사 맛집'이 아니다. '정부가 투명한 국가'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지도 않다. 바이러스가 퍼질대로 퍼진 감염국이며, 국민의 사생활이고 뭐고 일단 까발리고 보는, 국민의 사생활을 덜 보호하며 민주적 원칙을 쉽게 양보하는 국가다.

여러분이 읽는 수많은 '외신에서 어쩌구' 타령에서, 국내 언론이 감추고 있는 이면의 맥락이 이렇다는 것이다. 다만 그 외신들은 '젠틀'하게, 우리의 면전에 대고 저런 소리를 안 하고 있을 뿐이다.

2020-03-03

마스크 뱅크런: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 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예금을 맡아주는 곳일 뿐 아니라 그 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주며 유통하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예금주가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하면 내줄 수가 없다. 망한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 자본국가들이 20세기 초 경험했던 '뱅크런'이다.

지금(3월 4일 0시 무렵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스크 대란' 역시, 따지고 보면 뱅크런과 유사한 현상이다. 다수가 일시에 패닉을 일으켜 특정 재화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뱅크런의 경우는 그 대상이 현금이었다면, 지금은 마스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구입하려 할까? 과도한 건강 우려? 마스크가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데 그걸 모르는 우매함 때문에? 아니다.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마스크를 구입하려 하는 이유는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언제 마스크를 못 사게 될 지 모르니, 살 수 있을 때 사두자, 이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시장 원리에 따라, 혹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시장에 공급하는 식으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제공하는 시장 뿐 아니라, 실은 그 시장의 바탕이 되는 정부마저 서서히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법은 정부가 정부답게 일하는 것이다. 뱅크런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뱅크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은행에 더 많은 돈을 갖다주는 게 아니다. 부족한 것은 화폐 그 자체가 아니라 화폐와 은행에 대한 예금주들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언제건 은행은 당신들에게 돈을 줄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예금을 주지는 말아야, 예금주들이 믿고 집에 돌아가면서 뱅크런이 종료된다.

문제는 화폐와 달리 마스크는 소비재라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미쳤나본데, 마스크를 오래 써도 된다느니 빨아 써도 된다느니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국민들로서는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나보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아껴 쓰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마스크를 확보하고자 줄을 서게 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장군처럼 하면 된다. 전국 읍동면 단위까지 퍼져있는 행정력을 이용해, 1인당 몇 장의 마스크를 정부가 확보하여, 신분증을 확인하고 직접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최선의 해법이며, 가장 자본주의적인 해법이다. 왜냐하면 시장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다. 마스크라는 물건 자체가 관건이 아니다. 지금 줄을 선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에게 마스크를 1인당 몇 장씩 직접 손에 쥐어줄 수 있는가?

만약 정부가 이걸 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마스크를 사겠다고 줄을 서는 행렬 자체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마스크를 유통하는 시장과, 그 시장의 질서를 확보하는 정부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지금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정부가 물량을 70%, 80%, 아니 100% 확보한 채로 유통에 나서도 이런 식이면 마스크는 계속 부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시장과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사서 비축해두려 할 것이며, 따라서 공급은 모자라고, 남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 불안해져서, 자신도 줄을 서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설마 하면서도 줄을 선다. 마스크 뱅크런이다.

마스크 그게 뭐 비싼 것도 아니고, 생산 물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금 없는 것은 신뢰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 앞으로 2주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전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에 걸맞는 단호한 모습을 정부가 보였으면 한다.

직접 나눠줘라. 그러면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굳이 사러 나가서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다들 어느 정도는 안정을 되찾고, 굳이 줄까지 서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마스크는 약국이나 마트에 가면 흔히 쌓여 있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게 무슨 어려운 논리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할까? 우리나라 행정력이 그렇게 부족한가? 정부가 직접 물량을 확보까지 해놓고 그걸 굳이 '판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부 물량을 '판매'하면 실수요자가 아닌 누군가가 매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그런 식이면 품귀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외 국가에 그것을 유통하여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거나, 그런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기 너무도 좋은 여건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시장과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따라서 또 사재기에 나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스크 뱅크런이다. 정부가 정부답게 행동하여 국민을 안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면 금방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부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지 말라.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