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11

김진숙, 생명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김진숙이 살아서 땅을 밟았다. 나는 그 장면이, 암스트롱의 달 착륙 장면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고 느낀다. 암스트롱은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달에 살아서 발을 디뎠다. 김진숙은 300일이 넘는 고공투쟁을 통해 날것 그대로의 생명, 이른바 ‘호모 사케르’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했고, 노동자로서 크레인에 올라 ‘생명’으로서 지상에 발을 디뎠다.

아감벤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는 로마의 법적 개념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인간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되었지만 생명으로서의 존재를 박탈당하지는 않은 개체를 뜻한다. 누구라도 호모 사케르를 죽일 수 있다. 인간을 죽이면 살인죄로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누군가가 호모 사케르를 죽인다고 해도 그는 살인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호모 사케르는 국가의 법에 의해 처벌을 받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인간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국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

트위터, 희망버스, 소셜테이너 등의 단어들과 함께 떠오르는 하나의 기호로서의 ‘김진숙’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개념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은 김진숙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죽게 내버려두었을 뿐이다. 요구조건을 말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은 김진숙이 그냥은 내려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물을 끊고, 전기를 끊고, 통신도 끊고, 그들이 ‘끊을’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를 잘라냈다. 김진숙이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인간적’ 대우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우리는 목격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직접 김진숙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한 행위가 불러올 파장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김진숙 본인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요구 조건을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의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선량한 사회학자들이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 포장한다 한들, 두 행위가 갖는 존재론적 위상의 차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특히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임 대통령의 말처럼, ‘자살로 호소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누군가가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남기기 위해 그 의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로서의, 극단적인 표현의 한 형태로서의 자살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태일은 이렇게 외치며 죽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는 자신의 분신자살이라는 스캔들을 매체로 삼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생명은 죽지만 ‘사람’ 혹은 ‘주체’만큼은 아주 명료하게 남는다.

김진숙은 그와 정 반대의 전략을 택했다. 크레인을 포위하고 물과 전기와 식량과 통신을 끊어가며 대한민국이라는 주권은 김진숙이라는 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을까? 그가 ‘사람’으로서 죽기를, 즉 자살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하라! 해고는 살인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스스로 몸을 던지기를, 그래서 사이버 시대를 살아가는 쿨하고 쉬크한 대중들(혹은 ‘귀진보’들)이 ‘아, 또 데모하다가 사람 죽었나보네’라고 힐끗 쳐다보고 다 안다는 듯이 한 마디 지껄이고 지나가기를, 권력은 바랬다.

하지만 김진숙은 끈덕지게 살아남음으로써 ‘사람’이 될 것을 강요당하는 일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을 노출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그가 가진 것이 자신의 생명밖에 없었다고 나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김진숙은 가까스로 얻어내고 지켜낼 수 있었던 트위터라는 소통의 공간에서 결코 불필요한 소리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가 권력에 의해 죽어가도록 방치되고 있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으로서의 상징성을 끈질기게 수호해냈다. 그는 불필요한 논쟁, 의미 없는 선명성 과시, 본인이 동의하기 힘든 정치인의 접근 등에 대한 대립각 세우기 따위를 결코 하지 않았다.

사람은 주장을 하고 논쟁을 한다. 생명은 그저 살아있을 뿐이다. 김진숙의 트윗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감동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무엇에 대한 어떤 희망인가? 김진숙이라는 한 개인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대척되는 그 무엇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는가?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은 너무도 쉽지만 (그는 『소금꽃나무』라는 책의 저자이므로) 아무도 그런 ‘인간적’인 내용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를 내모는 사람들만큼이나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김진숙은 ‘호모 사케르’였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상스럽게 요약해보자. 사람들은 김진숙에게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김진숙이 보여준 것은 오직 생명 그 자체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전임 대통령, 혹은 그 전임 대통령의 전임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온 기나긴 노동 탄압의 역사를 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다른 노동운동과는 다르게 사람의 향기가 나기 때문에’ 희망버스를 탄다는 개소리를 찍찍 내뱉었다. 그러므로 권력은 김진숙을 죽일 수 없었다. 김진숙이 권력에 의해 타살되는 순간 그는 이 모든 환상의 아이콘이 되어 불멸의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권력은 김진숙이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무언가 ‘주장’을 내뱉기를 원했다. 그가 ‘벌거벗은 생명’에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모든 이가 각자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투영하는 환상의 거울이 깨지기를, 권력은 바랬고 김진숙은 바로 그것만은 결코 내주지 않았다.

사회 문제에 비판적인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김진숙과 같은 투쟁의 방식은 보편화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그의 투쟁과 승리가 일회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것은 일회적인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은 꾸준히 죽어가고 있다. 그들 역시 어떤 이념과 주장이 아니라 그저 직장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추방당한 반(半) 인간인 채로 죽어갔고 죽어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이 생명은 살고 저 생명은 죽어가는데? 왜 우리는 이 생명이 살아오는 동안 저 생명이 죽는 일을 지켜보게 되는 건데? 대체 왜?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대답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할 어떤 ‘구체적인 해법’도 모르겠다. 이 모든 논의를 어떤 이들은 ‘분석’이라고 말하겠지만 이것은 그저 일종의 자유연상일 뿐이다. 나는 나의 자유연상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달 착륙의 유비를 끌어들여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인간이 달에 땅을 딛자 SF 작가들의 상상력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인류는 우주의 저 끝까지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 탐사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흥미조차 닳아빠지고 있었으며(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텍스트 중 하나로 영화 ‘아폴로 13′을 꼽을 수 있다), 지금껏 인류는 지구 속에서 2만년 전 석기시대의 모습 그대로 싸우고 빼앗고 죽이고 섹스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생명이 정치가 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외의 어떠한 유의미한 서술도 덧붙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