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31

2008년 독서 목록

1

2008-01-13

조쉬 웨이츠킨

배움의 기술

이제

2007

2

2008-01-13

후루이치 유키오

1日30分

이레

2007

3

2008-01-16

존 그로건

말리와 나

세종서적

2006

4

2008-01-16

김영하

빛의 제국

문학동네

2006

5

2008-01-20

대니얼 클로즈

고스트 월드

세미콜론

2007

6

2008-01-22

앨런 재닉, 스티븐 툴민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이제이북스

2005

7

2008-01-27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8

2008-01-29

박찬수

출판제작과정

서울북인스티튜트

2007

9

2008-02-04

맹가

맹자

책세상

2002

10

2008-02-07

피에르 아술린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문학의 반세기

열린책들

2005

11

2008-02-07

비카스 스와루프

Q&A

문학동네

2007

12

2008-02-07

홍명희

임꺽정 (1) 봉단편

사계절

2008

13

2008-02-09

홍명희

임꺽정 (2) 피장편

사계절

2008

14

2008-02-11

이택광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

㈜로크미디어

2007

15

2008-02-17

홍명희

임꺽정 (3) 양반편

사계절

2008

16

2008-02-19

홍명희

임꺽정 (4) 의형제편1

사계절

2008

17

2008-02-24

홍명희

임꺽정 (5) 의형제편2

사계절

2008

18

2008-02-28

홍명희

임꺽정 (6) 의형제편3

사계절

2008

19

2008-03-02

존 M. 히튼

비트겐슈타인과 정신분석

이제이북스

2002

20

2008-03-03

안토니오 그람시

대중 문학론

책세상

2003

21

2008-03-04

코맥 매카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피엔스

2008

22

2008-03-05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

23

2008-03-08

홍명희

임꺽정 (7) 화적편1

사계절

2008

24

2008-03-10

홍명희

임꺽정 (8) 화적편2

사계절

2008

25

2008-03-13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2002

26

2008-03-14

H. D. F 키토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

갈라파고스

2008

27

2008-03-16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28

2008-03-19

홍명희

임꺽정 (9) 화적편3

사계절

2008

29

2008-03-19

홍명희

임꺽정 (10) 화적편4

사계절

2008

30

2008-03-20

조선의 임꺽정, 다시 날다

사계절

2008

31

2008-03-22

Thomas L. Friedman

The World Is Flat

PICADOR

2007

32

2008-03-22

티모시 페리스

4시간

부키

2008

33

2008-03-30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새물결

2008

34

2008-04-01

에드문트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사

1997

35

2008-04-01

홍준기

라캉과 현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99

36

2008-04-03

존 J. 미어셰이머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

나남출판

2004

37

2008-04-03

제프 콜린스

데리다

김영사

2003

38

2008-04-06

다리안 리더(글) ; 주디 그로브스(그림)

라캉

김영사

2002

39

2008-04-11

로버트 달

미국 헌법과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2007

40

2008-04-11

강유원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

41

2008-04-16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까치

1998

42

2008-04-17

마르틴 하이데거

기술과 전향

서광사

1993

43

2008-04-18

이언 매큐언

첫사랑, 마지막 의식

media2.0

2008

44

2008-04-20

로제 그르니에

내가 사랑했던 개, 율리시즈

현대문학

2002

45

2008-04-21

M.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서광사

1995

46

2008-04-22

Z. 브레진스키

거대한 체스판

삼인

2000

47

2008-04-25

강영안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궁리

2002

48

2008-04-26

마이크 데이비스

조류독감

돌베게

2008

49

2008-05-06

스티븐 존슨

바이러스 도시

김영사

2008

50

2008-05-16

르네 데카르트

방법서설 |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문예출판사

1997

51

2008-05-21

Jim Benton

The Fran With Four Brains

Aladdin

2006

52

2008-05-25

스티븐 부디안스키

고양이에 대하여

사이언스북스

2005

53

2008-06-02

Allan Moore, David Gibbons

WATCHMEN (1)

시공사

2008

54

2008-06-02

Allan Moore, David Gibbons

WATCHMEN (2)

시공사

2008

55

2008-06-05

팀 하포드

경제학 콘서트

웅진

2006

56

2008-06-08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새물결

2007

57

2008-06-11

강양구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프레시안북

2007

58

2008-06-12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민음사

2004

59

2008-06-19

김석

에크리 -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살림

2007

60

2008-06-20

미시마 유키오, 기무라 오사무 외

미시마 유키오 對 동경대 전공투 1969-2000

새물결

2006

61

2008-06-23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어린 시절

새물결

2007

62

2008-06-27

슬라보예 지젝

How to Read 라캉

웅진 지식하우스

2007

63

2008-07-03

숀 호머

라캉 읽기

은행나무

2006

64

2008-07-05

F. 폴 윌슨

다이디타운

북스피어

2008

65

2008-07-08

조너선 캐럴

웃음의 나라

북스피어

2007

66

2008-07-10

김철

복화술사들 - 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

문학과지성사

2008

67

2008-07-20

존 르카레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열린책들

2005

68

2008-07-23

이충걸

갖고 싶은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

위즈덤하우스

2008

69

2008-07-27

윌리엄 레이몽

독소 - 죽음을 부르는 만찬

랜덤하우스

2008

70

2008-07-28

알렌카 주판치치

실재의 윤리

도서출판 b

2004

71

2008-07-29

권윤주

고양이에게

바다출판사

2005

72

2008-07-31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73

2008-07-31

조지 프렛

배트맨 악마의 십자가

세미콜론

2008

74

2008-07-31

로베르 드 라로슈

나보다 더 고양이

북하우스

2005

75

2008-08-06

피터 게더스

파리에 간 고양이

media2.0

2003

76

2008-08-09

피터 게더스

프로방스에 간 낭만 고양이

media2.0

2004

77

2008-08-12

피터 게더스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

media2.0

2005

78

2008-08-12

발터 뫼르스

에코와 소름마법사 (1)

들녘

2008

79

2008-08-13

발터 뫼르스

에코와 소름마법사 (2)

들녘

2008

80

2008-08-13

김진경

고양이 학교 (1)

문학동네

2001

81

2008-08-13

김진경

고양이 학교 (2)

문학동네

2001

82

2008-08-13

김진경

고양이 학교 (3)

문학동네

2001

83

2008-08-13

김진경

고양이 학교 (4)

문학동네

2001

84

2008-08-13

김진경

고양이 학교 (5)

문학동네

2002

85

2008-08-16

스타니스와프 렘

사이버리아드

오멜라스

2008

86

2008-08-22

다치바나 다카시

청춘표류

예문

2005

87

2008-08-28

미겔 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시공사

2004

88

2008-09-05

스콧 맥클라우드

만화의 이해

비즈앤비즈

2008

89

2008-09-07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90

2008-09-10

헨리 페트로스키

서가에 꽂힌 책

지호

2001

91

2008-09-11

플라톤

알키비아데스 I·II

이제이북스

2007

92

2008-09-13

에드 맥베인

10 플러스 1

해문출판사

2004

93

2008-09-14

전우용

서울은 깊다

돌베게

2008

94

2008-09-18

Malcolm Gladwell

Outliers

Little, Brown, and Company

2008

95

2008-09-23

로버트 L. 하일브로너

세속의 철학자들

이마고

2005

96

2008-09-25

강영안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효형출판

2008

97

2008-09-28

김진석

기우뚱한 균형

개마고원

2008

98

2008-10-02

이사야 벌린

고슴도치와 여우

애플북스

2007

99

2008-10-10

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김영사

2002

100

2008-10-14

우석훈

촌놈들의 제국주의

개마고원

2008

101

2008-10-26

성 아구스띤

고백록

바오로딸

1999

102

2008-11-06

스튜어트 후드

사드

김영사

2005

103

2008-11-10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문파랑

2007

104

2008-11-12

장 콕토

앙팡 테리블

2007

105

2008-11-19

박성래

부할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

김영사

2005

106

2008-11-28

조나단 B. 와이트

애덤 스미스 구하기

생각의나무

2003

107

2008-12-19

크리스토프 볼프

요한 세바스찬 바흐 1

한양대학교출판부

2008

108

2008-12-20

크리스토프 볼프

요한 세바스찬 바흐 2

한양대학교출판부

2008

109

2008-12-23

플라톤

소피스테스

한길사

2000

110

2008-12-25

J. R. R. 톨킨

북극에서 온 편지

씨앗을뿌리는사람

2006

111

2008-12-27

김석수

칸트와 현대 사회 철학

울력

2005


올해도 어김없이 독서 목록을 올리며 한 해를 마감하고자 한다. 이런 목록을 올리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정도다. 첫째, 일종의 자기 관리 차원. 둘째, 정보 공유. 셋째, 말 그대로 '회고'. 이 책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당시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고, 어떤 기분이었는지 등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이 목록은 1월 13일부터 작성되었다. 그 이전의 독서는 포함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여기서 '책'은 내용의 질이나 대상 연령층 등과는 무관하게, 그냥 단행본의 형태를 띄고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

김진경의 '고양이 학교'나 독일 동화인 '에코와 소름고양이'가 끼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수업시간에 배웠더라도 내가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페이지를 넘기지 않은 경우는 독서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한마디로 선정 기준은 자의적이고, 그리 체계적이지 않다.

이런 저런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면, 자신이 몇 개의 포스트를 올렸고 블로그에 리플이 얼마나 달렸고, 원고지로 따지면 전체 올라온 글의 분량이 얼만큼이고 등등을 결산하는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내 경우는, 일단 blogger.com이 그런 기능을 제공하지 않거니와,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보다는 원고를 쓰고 책을 읽는 것을 더 중시하고 있는 터라, 독서 목록을 통해 한 해를 결산한다.

아래 포스트에서도 한 말이지만, 모두 행복한 새해 되시길.

연말 사진들

*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싼타 모자를 사와서 안겨주자, 가을이는 그것을 '사냥'했다. '싼타를 물어뜯고 크리스마스를 정복한 고양이' 같다.



한편 입동이는 너절하게 걸린 크리스마스 장식을 바라보다가...



싼타 모자를 베고 잠이 들었다.


* 올해의 청년

GQ 12월호의 한 장면. 파티에 갔을 때 J 에디터가 '올해의 청년으로 선정됐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를 못하고 있었다. 내가 언급된 부분만 살짝.


연말 연예대상 시상식처럼 한 마디. 이건 내가 선정된 게 아니라, 그때 같은 일을 겪은 모든 사람들을 대변해서 당시 보고 겪은 것을 기록하고자 시도한 한 사람이 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GQ의 '올해의 청년' 선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서서히 당시의 싸움을 '추억'으로 바꿔가고 있던 내게 신선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이 영광을, 게으른 제가 거리에 서게 해주신, 각하께 돌립니다.

늘 그래왔듯이 GQ는, 품위와 경박함이 마구 뒤섞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 속에서, '스타일'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왔다. 나 또한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2009년에도 GQ Korea의 훌륭한 지면을 만끽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


* 책장 정리 완료


크리스마스에 가을이와 입동이를 찍은 사진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책이 넘쳐나기 시작했고, 바닥에 마구 쌓여가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 무려 3주나 꾸물거린 끝에, 어제 재활용센터에서 구입한 책장을 오늘 낮에 설치했다. 하지만 정리를 끝내고 나니 빈 공간이 또 남지 않는다.

내년에도 계속 책은 늘어날 텐데, 큰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책 정리에 대해 나름의 비결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공유좀 해주십사 부탁드리고 싶다.

아무튼, 모든 방문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9: Power to the People

1. 현실: 석유는 고갈될 것이다.

2020년이 다가오고 있다. 2008년의 마지막날에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정말 2020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IEA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석유 생산량이 6.7%가량 감소할 전망이다. 그러면 늦어도 2030년 정도에는 석유 정점에 도달하게 되는데, 시장에서 가격에 따라 수요가 조절되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2020년부터는 '정점'이 아닌 '고원'에서 유가가 오락가락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 IEA가 내놓는 보고서의 일관성이다. 국제 에너지 기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하여 석유 고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게다가 그들은 작년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매년 생산량이 3.7%씩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3.7%와 6.7%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고 있는지 묻기 위해, 영국 저널리스트 조지 몬비오는 직접 IEA에 찾아가 물어보았다.

동영상을 보려면 이 주소로 이동하시오

세상에. IEA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패티 비롤(Fatih Birol)은, 전 세계 국가들이 정책 결정의 도구로 사용하는 보고서가, 여태까지는 현장 실사 없이 'assuming'에 의지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말을 고지식하게 털어놓았다. 지금까지는 추산해보니까 3.7% 떨어질 것 같았는데, 가서 조사해보니까 더 심각해서 6.7%로 올렸다는 거다. 그렇다면 대체 그동안 석유 고갈에 대해 미적거린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진단 말인가?

지구 기후 변화와 에너지 문제에 대해 가장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집단에서조차, 2020년이면 유가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선에서 형성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게 우리가 2008년의 마지막 날 기억하고 있어야 할 '현실'이다.


2. 임기: 1년 반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회에서는 한나라당의 방송법 날치기 통과를 막기 위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한나라당은 급하다. 연말을 앞두고,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대규모 군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무리수를 연달아 두고 있다. 둘째. 한나라당의 패악질만을 놓고, 그것에 대항하는 전선만을 고려한다면 영원히 진보정당들은 민주당의 뒤에 설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왜 이리 급하게 구는 걸까? 청와대가 뒤에서 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와대는 왜 이렇게 급하게 구는 걸까? 대통령 연임이 불가능한 한국의 정치 제도상, 그리고 20퍼센트 선에서 왔다갔다하는 대통령 지지도를 감안해볼 때, 이명박의 레임덕이 찾아오는 시점은 기존의 대통령들보다 훨씬 빠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시에게 신발이 날아오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쉽다. 이명박은 정오를 넘기면 바로 '지는 태양'이고, 자유낙하하는 별똥별 신세가 된다. '앞으로 4년을 어떻게 더 견디냐'며 지나치게 괴로워할 필요 없다. 올라가는 길이 힘들었던 만큼 내려오는 길은 롤러코스터나 다름없을 테니까.

언론을 장악하고, 경찰을 장악하고, 지방 토호들을 장악하려 하는 이유는, 그나마 그거라도 없으면 나머지 임기의 절반 동안 처절하게 두들겨맞을 것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도 그렇다. 세계 경제가 회복된다 해도 그 영향이 한국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게다가 국내 부동산 거품이 꺼질 것도 고려해본다면, 이명박은 경제 문제를 해결 못 한다고 봐야 옳다. 따라서 그나마 '말빨'이 먹히는 지금, 꽉 잡을 수 있는 만큼 꽉 잡아놔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적인 만큼 이명박도 필사적이다.

그러므로 '반 이명박 연대'는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고, 지속되더라도 '이명박을 털어서 나온 전리품'을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더 큰 정치적 분쟁만을 낳을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된다. 국회 점거 농성에 진보신당이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해서, '반 이명박 투쟁'에 장내에서 참여하고 있지 못하다 해서 좌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 지향: 정치를 다시 생각하자

올해까지는 에너지 문제가 고작 유가환급금 정도와 관련된 부차적인 이슈였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할 것이고, 서서히 정치적인 주제로 떠오를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2020년이면 유가는 고원에 올라간다. 실감이 안 난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싼타 모자를 12번만 더 쓰고 나면, 기름값은 현재의 두 배 이상이 된다.

최근 '반 한나라당 전선'을 강조하며 심상정이 은평을 재보선에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보신당의 당원들을 보며 내가 콧방귀를 뀌었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앞서 2.에서 말한 것처럼, 이명박의 실제 임기는 시한부 환자의 생명줄과도 비슷하기 때문에, 그 전선에 섯불리 참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지금 당장 국회 꼴을 보더라도, 민주노동당이 같이 싸우고 있지만 보도되는 것은 '민주당' 뿐이다. 진보진영은 덩치가 작기 때문에, '전리품 나눠먹기'에서 큰 파이를 가져갈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기 전에 이명박이 먼저 쓰러지게 되어 있다. 손해보는 장사는 애초에 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진보신당이, 에너지 정치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더 많은 대비를 하고 있으며, 그 방면에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정당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에너지 문제가 정치적인 주제로 떠오른 상황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한나라당이네 반 한나라당이네 박근혜네 이명박이네 하고 싸우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담론의 하부구조는 지금과 다른 구조에서 작동하게 된다.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고, 그것에 반대하여 대체에너지 개발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전자의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마치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에서 그러하였듯이, 원자력 발전 확대에 공히 찬성할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시도했던 북한을 감싸고 돌아야 하는 민주노동당 또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미지를 나쁘게 하는 행동을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제어하고 에너지 수요량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많은 수의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 이번호 포린폴리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중 하나라서, 매체가 나올 때까지 더 이상의 내용 누설을 할 수는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원자력 발전은 미래의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또한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정치적 이슈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최장집의 정당정치론은, 정당 환원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치적 이슈를 결정하는 하부구조의 변동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장집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수용하는 20대들을 보며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에너지 정치는 정당 구조와는 다른 차원에서 결정될 것이다. 따라서 그때까지 '반 한나라당', '반 이명박' 전선을 붙들고 늘어진다면 낭패를 보게 된다. '우리 편'인줄 알았는데, 정권 잡고 부안에 전경 보내고 사람 때려 죽이는 일이 또 벌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민주당이 다시 급성장할 가능성은 없지만, 만약 그들이 회복하고 정권을 잡는다면, 분명히 '제2의 부안', '제3의 부안'이 속출한다. 반 한나라당 전선? 시신의 고환을 쓰다듬는 소리다. 제발 눈 좀 뜨고 살자.


4. 결론: Power to the People

'Power to the People'. 본래 이 말은 '민중에게 권력을' 정도로 번역된다. 하지만 에너지 정치와 맞물려 생각해본다면 그 함의는 더욱 커진다. '민중에게 힘을', 그리고 '민중에게 에너지를'. 진보신당 녹색특위의 유가환급금 태양열 발전소 운동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정치는 단순한 권력의 차원을 넘어, 에너지의 생산과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민주주의'의 해석을 놓고 이런 저런 의견이 분분했던 2008년이었다. 2009년의 주제는 'Power'가 될 것이다.

내년 당장은 그것이 부각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그렇다. 'Power to the People.' 이 말을 품고, 오늘 밤 재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야겠다.

2008-12-25

핵폭탄과 구공탄들

12월 25일자 경향신문 [판]에 실린 칼럼입니다. 이번부터는 신문 칼럼의 경우, 어떤 자료에 기반하여 논의를 펼치고 있는지 주를 달도록 하겠습니다. 일종의 'annotated' 버전인 거죠. 이렇게 칼럼까지 썼지만 정작 오늘 아침 둘리 본방을 사수하지 못했다는 것이 참 슬프군요. 재방송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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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핵폭탄과 구공탄들’


‘장기하와 얼굴들’ 이전에 ‘핵폭탄과 유도탄들’이 있었다. 그 시대의 감성을 쏙 빼다박은 가사와 가락에 절묘한 퍼포먼스까지 어우러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밴드라면 말이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아기공룡 둘리>에서 마이콜, 둘리, 도우너가 만든 밴드의 이름이었다. ‘핵폭탄과 유도탄들’은 라면을 예찬하며 “라면은 구공탄에 끓여야 제맛”이라고 노래했다(1).

왜 구공탄일까? <아기공룡 둘리>의 원작은 1983년 ‘보물섬’에 연재되었고, 애니메이션은 두 차례에 걸쳐 87년과 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되었다. 74년 제1차 오일쇼크, 80년 제2차 오일쇼크를 겪은 후 폭등한 유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증산을 결정한 85년에 이르러서야 80년 수준으로 떨어진다(2). 석유는 우선적으로 운송수단에 투입되어야 했다. 연탄가스 중독사고로 매년 사망자가 속출했지만, 서민들은 구멍 뚫린 구공탄에 라면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2월의 풍경도 어째 그와 비슷하게 돌아가고 있다. 올해 7월만 해도 배럴당 140달러까지 치솟았던 유가는,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침체와 맞물려 30달러선까지 하락했다. 하지만 국제에너지기구(IEA)의 2008년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석유 생산량은 올해부터 매년 6.7%가량 떨어지고 2020년 무렵이면 유가는 ‘고원’에 올라서게 된다(3). 지난해에 승승장구하던 펀드가 반토막난 것처럼 석유 공급 또한 앞날을 바라보기 어려워졌다. 우리는 한 해 만에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복고풍을 선호한다. 바야흐로 ‘핵폭탄과 구공탄들’이 돌아오고 있다.

12월22일, 한승수 총리에 따르면 정부는 “2030년까지 10여기 내외의 원전을 추가로 건설해 원자력 발전 비중을 현재 36%에서 59%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4). 물론 정부에서 말하는 원자로는 경수로 및 차세대 원자로에 집중되고 있다. 하지만 원자로는 붕괴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치명적이다. 미국의 스리마일섬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현대의 대형 사고는 사악한 의지를 지닌 누군가의 농간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차’하는 작은 실수 몇 개가 조합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온다(5). 엎지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지만, 물이 아니라 방사능이라면 그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다.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지난해에 비해 연탄 수요가 10% 이상 늘었다(6). 정부가 정책적으로 연탄 사용을 장려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대체에너지의 효율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국민들이 석탄을 더 사용하도록 ‘시장 법칙’에 내맡기는 것은 올바른 정책이 아니다. 2002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이 뛰어들면서 현재 풍력발전은 kwh당 8센트에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천연가스보다 싸고, 석탄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곧 더욱 저렴해질 것이다(7).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리는 시대를 지나, 풍력발전기를 놓아드리는 것이 마땅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2008년 12월25일, 즉 오늘 오전 10시30분 다시 만들어진 TV 애니메이션 <아기공룡 둘리>가 방송된다. 나는 ‘핵폭탄과 유도탄들’의 귀환을 환영한다. 하지만 ‘핵폭탄과 구공탄들’은 올해까지만 활약했으면 싶다.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면 좋겠다.

<노정태 |포린폴리시 한국어판·편집장>


1. 자세한 내용은 아기공룡 둘리 8화 참조.

2. 주요 사건과 국제유가의 변동에 대해서는 다음 그래프를 참조할 것.

1970-2005 유가 변동 주요 사건


3. 자세한 정보는 At Last, A Date참조. 특히 조지 몬비오는, 작년 보고서까지만 해도 IEA가 매년 석유 생산량이 3.7%씩 감소한다고 예견했다가 갑자기 그 추정치를 두 배 가량 높인 이유를 캐묻는다. 그가 밝혀낸 바에 따르면, 놀랍게도, IEA는 이전까지는 현장 조사 없이 오직 '추측'만으로 석유 생산량 감소에 대해 논해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곧 이 블로그에 추가적인 글을 올릴 계획이다.

4. 2020년까지 중소형원자로 10여기 수출 추진 연합뉴스, 2008년 12월 22일.

5. 183쪽 각주, Malcolm Gladwell, Outliers(New York, NY.: Littel, Brown 2008) 참조.

6. '연탄이 다시 뜬다', MBC, 뉴스데스크, 2008년 11월 14일.

7. "Trade winds", The Economist, 2008년 7월 19일, The Special Report on The Future of Energy.

2008-12-17

저널리즘에 대하여

붙들고 있던 번역을 하나 끝냈다. 색인 등 몇가지 자잘한 부분들을 해서 넘기고, 역자후기를 쓰고 나면 내 역할은 끝난다. 내가 번역한 책의 이름은 Outliers다. 그 책을 번역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다. 김영사에서 내게 좋은 기회를 주었고,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나는 그 원고를 받아들었다. 1장을 읽고 나니 멈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역자 후기를 써야 하는데,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에서 오가고 있어서 손에 잘 잡히지가 않는다. 이 책은 말콤 글래드웰의 이전 저작들에 비해 훨씬 '정치적'이다. 이 책이 '각하'의 손에 들어가고 '오해'를 유발한다면,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최대한 신중하게 역자 후기를 써야 한다. 월요일 저녁부터 지금까지 고심중인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 곧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

이 책을 읽고 번역하면서 '저널리즘'의 가치에 대해 여러번 생각하게 되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이 특정 분야의 새로운 지식을 창출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에 대해,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재조명함으로써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저널리즘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문적인 지식을 생산하거나 그것에 대해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관점'을 창출해내는 창조적 작업이라고 말이다.

내가 스스로를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칭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맥락에서이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나와 같지 않다. 하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문제삼고 싶다. 그렇다면, 철학과에 다니면서 칸트를 공부하고 있더라도, 어떤 순간마다 저널리스트가 되어야만 한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성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지적인 담론들을 충실하게 소화해내어 평이한 언어로 전달해줄만한 저널리즘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경우, 저널리즘은 아카데미즘의 보완물이 된다.

가령 뉴욕타임즈의 유명 저널리스트들을 살펴보자. 폴 크루그먼도 크루그먼이지만, 데이비드 레온하르트(David Leonhardt)라는 탁월한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가 매주 한 번씩 복잡한 보고서와 그래프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준다. 생물학과 진화론에 관한 지식은 올리비아 저드슨(Olivia Judson)의 아름다운 문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언어로 번역된다. 내가 좋아하는 가디언의 조지 몬비오 같은 경우도 그렇다. 이들은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통속의 언어에 달통한 이들이다.

훌륭한 저널리스트들이 글을 쓰는 매체를 읽고 있으면, 따라서, 해당 분야의 논의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을지라도, 적어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어떤 주장에는 무슨 헛점이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한국에 '지성계'를 출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저널리즘이다.

이런 저런 전문가들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그 전문가들 또한 자신의 영역을 넘어서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저널리스트들이 저널(학술지)을 읽고, 그것을 저널리즘의 영역 안에서 소화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저널리즘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 주기가 완성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지성계'의 존재를 논할 수 있게 된다. 대중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래야 지식인과 지식인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수 있다.

《아웃라이어》의 참고문헌을 보면 저널리즘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콤 글래드웰이 정보를 얻는 1차적인 경로는 책과 과학 저널들이다. 말콤 글래드웰이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또한 과학적인 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원이며, 그것을 대중들에게 하나의 완성된 시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말콤 글래드웰같은 탁월한 저널리스트가 아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요인은, 그는 1차 자료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반면, 나는 (특히 과학 분야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저널리즘은 외국의 저널리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국내에는 그 정도 논의도 못 따라오는 사람들,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몰상식한 소리를 너무도 쉽게 하면서 진보입네 좌파입네 하는 사람들이 참 많지만, 그들과 견주어 자신의 단점을 외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번역해야 할 책이 한 권 더 있고, 이미 쓰겠다고 계약서를 작성한 책도 한 권 있다. 하반기에 작업하게 될 다른 책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행중이다. 일정이 미칠 듯이 돌아간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도전에 진지하게 대응해야 할 시점이다.

《아웃라이어》를 옮기면서, 장차 써야 할 책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내용과 구성 뿐 아니라 편집이나 문체,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등 많은 것을 배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지만, 약속이 있어서 일단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GQ에서 파티에 초대해줬다. 좋은 저널리스트들이 만드는 훌륭한 매체라고 생각한다. 이제 노트북을 덮고 슬슬 일어나야 한다.


덧. Outliers는 현재 3주째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하드커버 논픽션 1위를 달리고 있다. 자랑하고 싶어서 한 줄 더 남겨본다.

2008-12-13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않은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곳곳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104쪽, 《정본 백석 시집》,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2007)
정본 백석 시집 - 10점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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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를 논하기 이전에, 말 그대로 '청춘'에 대한 시인 듯. 오늘 밤도 일하다가 문득 손에 잡혀서, 잠시 적어 본다.

2008-12-11

SDE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

오늘자 경향신문에, 다음 아고라에서 SDE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인터넷 논객의 인터뷰가 실렸다. 안티조선 우리모두 사이트에 들락거려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그는 '서지우'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고, 또 오랜 기간 눈팅을 해봤다면 그의 본명도 결국은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굳이 써놓을 필요는 없겠다. 아무튼, 인터넷에서 아이디로만 접하던 사람의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실제로 보니 놀랍고 반가웠다.

그는 안티조선 우리모두의 '소칼의 지적사기 논쟁'이라는 토론방에서도, 비선형 확률제어론에 입각하여 IMF를 금융위기로 정의하고 이런 저런 논의를 해왔다. 사구체논쟁과 관련해서는 주로 NL 진영에서 옹호하는 입장인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여 나름 큰 충격을 불러왔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그가 꾸준히 주장하는 '기준금리 대폭 인상'에 대해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어떤 식으로건 결국 대출금리도 올라간다. 현재 거품이 낀 아파트 가격의 절반 가량이 가계에서 대출을 받은 금액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 인상분에 대한 이자 부담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주장하는대로 금리를 높이고 '자발적 구조조정'을 조장하면,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충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바꿔 말하자면, 아파트 가격 거품이 꺼지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빚 내서 아파트를 샀다가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죽는 것이 먼저가 될 수 있다. 금리를 확 인상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이너스 5% 경제성장으로 1년을 지나"는 극약처방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가 너무 쉽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게 무슨 중학생 용돈 5% 깎는 것도 아니고.

SDE님뿐 아니라 그의 금리인상론에 동의하시는 분들께 정말이지 묻고 싶다. 엄연히 자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와 중앙은행이, 환율을 지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고(한국에서 금리를 1%나 전폭적으로 내렸는데, 오늘 원달러 환율은 35원씩이나 뚝 떨어졌다. 기준금리와 환율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부터가 오류일 가능성을 그는 배제하고 있는 것 아닐까?), '마이너스 5% 성장'을 목표로 삼고,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을 유발하는 정책을 펴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일까?

게다가 그런 충격요법을 쓰면 결국 '큰 놈'만 살아남게 된다. 즉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이 반드시 바람직한 경재 구조를 낳으리라는 보장을 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굳이 충격요법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의문은 끊이지 않지만, 맡은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일단 여기까지만 쓰도록 한다.



*덧말: 손동우 사회에디터의 인터뷰였다. 이번에도 취재수첩에 새까맣게 필기를 하셨으려나. SDE님을 인터뷰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금 내가 적어놓은 이 질문을 전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인물이라는 것도 취재 포인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2008-12-10

디플레이션 인덱스

Economist.com에서는 매일 도표를 하나씩 업데이트해준다. 대체로 당일 발간된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소재로 삼을 때가 많지만, 워낙 업데이트가 잦다보니 별 희한한 것들을 다 통계로 만들어서 보여주곤 하는데, 오늘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정확히 말하자면 Factiva.com의 자료를 그래프로 만든 것이지만, 아무튼).

월스트리스 저널, 인터네셔널 헤럴드 트리뷴, 타임즈 세 신문에서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했는가를 세서 그래프로 만든 자료인데,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올해 초부터 9월까지는, 많으면 25회, 적으면 5회 선에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언급 빈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사진 오른쪽이 잘렸습니다만 그냥 참고 보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그래프는 더 잘 보이는군요).



(이건 여담인데, 이렇듯 '일정하게 유지되다'라는 말은 세부적인 변동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사용될 수 있다. 결정적인 변인이 개입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 제한된 폭 안에서 수치의 변동이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경향신문 칼럼에 대한 내 설명을 놓고,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나는 인류의 문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즉 빙하기나 이런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고),화석연료 사용 이전과 이후를 비교했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온은 하루 종일 미세한 변동을 보이지만, 감기에 걸린 상태와 비교한다면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러다가 10월부터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디플레이션'에 대한 세 언론의 언급은 급증한다. 10월만 해도, 이전까지 가장 높은 수치였던 3월의 그것에 두 배에 달하는 '디플레이션'이 등장하고, 11월의 경우 11월 20일까지의 통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50번을 채우고 있다. 전 세계가 'D의 공포'에 휩싸여있다는 말은 괜한 표현이 아닌 것이다.

"War Room"에 준하는 국가종합상황실을 운영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발상이 가당찮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전시에는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가 전쟁으로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에, 국내 소비를 최대한 줄이고 그것을 전선으로 옮겨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경제에 시급한 것은 국내 소비를 증진하여 디플레이션의 위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므로, 그 비유는 전혀 옳지 않다.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겨야 할 판에, 최저임금을 깎고(당연히 국내 소비가 줄어든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을 때'라지만 야간 통행금지를 실시한다면(밤에 장사하는 동대문 옷가게들은 문 닫으라는 소리?), 경기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요소까지 함께 생각해보면, 'D의 공포'로 인해 정말이지 간담이 서늘해질 지경이다.

2008-12-08

국가주의-국제주의-세계주의

In short, if the world economy is to get through this crisis in reasonable shape, creditworthy surplus countries must expand domestic demand relative to potential output. How they achieve this outcome is up to them. But only in this way can the deficit countries realistically hope to avoid spending themselves into bankruptcy.

Some argue that an attempt by countries with external deficits to promote export-led growth, via exchange-rate depreciation, is a beggar-my-neighbour policy. This is the reverse of the truth. It is a policy aimed at returning to balance. The beggar-my-neighbour policy is for countries with huge external surpluses to allow a collapse in domestic demand. They are then exporting unemployment. If the countries with massive surpluses allow this to occur they cannot be surprised if deficit countries even resort to protectionist measures.

We are all in the world economy together. Surplus countries must willingly accommodate necessary adjustments by deficit countries. If they decide to sit on the sidelines, while insisting that deficit countries deserve what is happening to them, they must prepare for dire results.
Martin Wolf, "Global imbalances threaten the survival of liberal trade", The Financial Times, 2008년 12월 2일


'수출이 살아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보다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수출을 살려야 한다'는 그 주장에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마틴 볼프의 이 칼럼은 그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마틴 볼프의 칼럼 자체가 아니라, 여기서 주장하는 바의 통속화된 형태가 횡행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끔직한 일이 될 것이다. 일종의 중상주의적 관점이 회귀할 수 있고, 그것은 곧잘 (극단적인) 네셔널리즘과 손을 잡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포함한 수출국가들)이 현 국면에서 자국 내 소비 비중을 높여야 하고, 수출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것은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권고'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이런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감정 상하기 시작하면, 국제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간단한 도식을 그려보자. '국가주의-국제주의-세계주의'를 하나의 직선 위에 놓고 바라본다면, 최근 10년 동안은 '세계주의'가 득세해왔다고 볼 수 있다. 토마스 프리드먼 같은 '평평한 지구'론자들이 자유무역이 킹왕짱이고 전 지구적 분업을 하면 효율이 높아지고 금융 시장이 팽팽 돌아가서 쿨하고, 등등을 외치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의 세계도 그랬다. 벨 에포크 당시, 크루그먼이 케인즈를 인용하며 말하듯, 세계는 지금보다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자신들의 일상을 구성하는 그 고리가 그렇게 쉽게 깨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요컨대 세계주의가 졸지에 국가주의로 처박히고 만 것이다(여기서 국가주의는 nationalism의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는 지금, 100년 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중요하지만, 국민국가의 역할과 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최대한 치밀하게 짜여진 국제적 공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철학적, 제도적 기반 또한 절실해지고 있다. 케인즈주의의 복귀를 둘러싼 논의만큼이나 이 또한 중요할 터인데, 아직까지 본격적인 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두려운 일이다.

2008-12-07

독거청년을 위한 난방 가이드

혼자 사는 외로운 청년들은 추운 겨울이 오면 더 힘들다. 심리적인 이유도 있고 경제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번듯한 신축 원룸 따위에 살지 않는 한, 집에 있을 때보다 정말 더 춥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자취방은 가정집보다 난방 효율이 좋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불을 때도 때는 것 같지 않고, 방에 앉아있으면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에 손가락이 얼기 시작한다.

적지 않은 수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내용의 하소연을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놀라운 현상이다. 집이라는 것이 본디 사람이 따뜻하게 살자고 짓는 거지, 그 반대는 아닌 까닭이다. 물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어도 겨울에 가정 내 추위를 느끼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독거청년들이 유독 심하게 느끼는 '집 안에서의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팁을 제시하는 것에서 만족하고자 한다.


1. 문풍지를 바르자.

난방 효율성 재고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결국 '외풍 단속'이다. 지금 앉아있는 방이 너무 춥게 느껴진다면, 당장 라이터를 들고 창가로 가볼 것을 권한다. 창문 틈새에 대고 라이터를 켜라. 불꽃이 춤을 춘다면 바람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추워지고 있다. 가까운 철물점, 슈퍼, 잡화점 등으로 달려가 문풍지를 구입해 바르도록 하자.

외풍이 새느냐 안 새느냐의 차이는 실로 막대하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내 경험을 말해볼까 한다. 재작년 겨울 무렵 무척 추웠다. 나는 당시 드라마틱 객원 에디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내 주된 업무는 드라마를 시청한 후 리뷰를 쓰는 것이었다. 어둠의 경로로 다운받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방송사 사이트에서 다시보기 결제를 했다. 그렇게 몰아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분명히 집인데, 손가락이 얼얼할 정도로 추웠다. 당시 내 방의 데스크탑 컴퓨터는 창문과 바로 붙어 있었고, 그 창문에서 바람이 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문의 틈 사이를 전부 노란색 문풍지로 처바르고, 인터넷선을 연결하느라 드릴로 구멍을 뚫은 창틀에 고무찰흙을 이겨넣으니 한결 나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지독한 외풍이었다. 신형 샷시로 된 창문이었지만 애초에 건물 자체가 약간 삐뚤어져 있어서 창틀이 찌그러져 있었고 그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문풍지를 이중 삼중으로 발라서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

방이 남산 끄트머리에 있어서 바람이 세게 부는 것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좋았는데 겨울이 되자 단점으로 돌변했다. 고무찰흙으로 창틀의 구멍을 다 막아놨더니,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흘러나갈 구멍도 없어졌고, 그 물이 고여서 얼어붙은 결과 아침에 창문이 안 열린 날도 적지 않았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와 얼음을 우선 조심스럽게 녹인 후, 고무찰흙을 제거하고 물을 빼서 해결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으로 사료되니 이쯤 하도록 하자.

아무튼 요점은, 방 안에서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고 너무 서러워하지 말고, 일단 외풍이 드는 곳이 어디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라이터 등을 이용해 외풍을 확인하면, 악의 세력을 섬멸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틀어막아야 한다. 그 작업만 완료해도 한결 낫다.


2. 커튼을 쳐라.

문풍지를 다 발라도 창가에 가면 추울 수 있다. 그 이유는 딴게 아니라, 창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창틀이 플라스틱 샤시가 아니라 철제로 되어 있을 경우, 지금 내 방 창문이 그런데, 쉽사리 물방울이 맺히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은 벽을 이루는 벽돌보다 창문을 이루는 유리와 철의 열 전도율이 높기 때문인데, 길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고 짧게 말하자면 '자연의 섭리'이므로 그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찬바람은 창가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감기를 유발할 수 있을 정도 위력을 가지고 있다. 독거노인과 마찬가지로 독거청년 또한 질병에 취약한 존재들이다. 아프면 서럽고, 서러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마음이 약해져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풍지를 바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창가에는 커텐을 쳐야 한다.

알량한 한 장의 헝겊이 창문과 당신 사이에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생각보다 큰 차이를 불러온다. 미처 잡지 못한 외풍이 불어닥치는 속도를 낮춰줄 뿐만 아니라, 창문 자체의 서늘함도 어느 정도 감소시켜주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물론 지나치게 두꺼운 커튼은 햇빛을 전부 차단하는 부작용을 낳지만, 적어도 저녁에 집에 돌아온 다음에는 커튼을 쳐놓는 것이 여러 모로 이득이다.


3. 보일러를 확인하라.

이태원으로 이사오기 전 살던 약수동 방에 처음 들어갔던 날. 삭풍이 몰아치던 1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살기 괜찮을 거라는 아주머니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지만, 안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삿짐을 다 정리하지도 못한 방에서 박스들을 한 켠으로 밀어두고, 가을이와 함께 잠을 청했다. 가스비가 걱정되긴 했지만 보일러를 높게 틀어 놓았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붙이고 있어도 방이 하나도 안 따뜻해지는 것 아닌가. 보일러는 폐병 걸린 미소년이 밭은기침을 하듯 쿨럭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몇십분이 지났는데도 방바닥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희망온도'를 몇 번이나 확인했다. 20도.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 춥나, 내가 뭘 잘못했길래,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덜덜 떨면서 억지로 눈을 붙였다.

자고 일어나서 보일러를 확인해보니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희망온도'와 '난방온수온도'가 별도로 조작 가능하게 되어 있었고, '난방온수온도'가 40도였나, 아무튼 가장 낮은 수치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날 밤 내 방의 바닥에는 내 체온보다 고작 3~4도 정도 높은 알량한 온수, 그 미적지근한 물이 왔다갔다하면서 난방을 하겠답시고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내 기억에 그 보일러는 귀뚜라미 제품이었다. 난방온수온도의 비밀을 안 이후로는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잘 썼다는 점을 괜히 적어본다).

옛날에 했던 바보짓을 굳이 공개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게 아니다. 보일러 조작 같은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우선 따져봐야지, '전기담요가 얼마쯤 할까' 같은 다음 단계의 고민을 먼저 하면서 괜히 세입자의 서러움 같은 것을 느끼거나 하면 곤란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특히 실내가 실외보다 춥다면, 집이 완전히 잘못 지어지지 않은 바에야, 보일러가 안 돌아가고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으므로 반드시 보일러를 확인해야 한다. 계기판을 꼼꼼히 살펴보고, 본체에 써있는 주의사항도 읽어보도록 하자.


내가 방금 말한 세 가지 사항은, 사실 아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기본적이어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그런 것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모를 경우 그로 인해 한없는 고통을 겪으며 괜한 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괜히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 같은 시를 읊으며 타향살이의 설움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거나, 이성친구도 없으면서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따위 싯귀를 웅얼거리거나, '청계천 8가' 같은 노래를 부르거나, 뭐 이런 짓을 하고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감상에 빠지기 전에 실질적인 요소부터 점검해봐야 한다.

특히 요즘 독거청년들은 집에서 너무 곱게 자란 탓에, 가정 설비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채 험난한 겨울을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들었다. 어려서부터 이런 저런 가사노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 또한 막상 나와 살고 보니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겪으면서 겨우 배웠다.

혹시라도 이런 단편적인 지식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말 새벽에 일하다가 잠시 적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