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31

입동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7년 11월 15일 저를 양육자로 선택했던 입동이는, 두 달이 넘는 투병 끝에 2016년 10월 31일 내가 보는 앞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심장과 폐가 멎은 상태로 병원에 당도하여, 네 차례의 심폐소생술 끝에 잠깐 심박을 되찾았지만, 혈압과 호흡 등이 돌아오지 않았고, 설령 그러했더라도 완전한 소생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인은 급성신부전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추정됩니다.

다 큰 다음에도 자그마한 체구에 겁이 많았고, 고집이 셌으며, 사람과의 스킨십을 좋아했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언제나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꾹꾹이를 하던 입동이. 함께 살기 시작한 그 날을 '생일'로 간주하였기에 만으로 열 살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햇살 속에서 행복한 낮잠을 즐기며, 나를 기다려주길.



2016-10-18

[북리뷰] 진정성을 갖고 작성한 사망진단서라는 거짓말

진정성이라는 거짓말
앤드류 포터, 마티, 1만6천원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 원인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로 표기한 사망진단서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를 재논의하는 특별위원회를 열어, "백남기 씨의 사망진단서는 일반 지침과 다르게 작성됐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단서가 붙었다. "담당교수가 주치의로서 헌신적인 진료를 시행했으며, 임상적으로 특수한 상황에 대해 진정성을 갖고 작성했음을 확인했다"고 말이다.

과학의 일부인 의학적 진술에 '진정성'이라니. 즉각적으로 조롱이 뒤따랐다. 주치의가 에세이를 쓰는 것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 진정성 따지고 들 거면 대체 한의학은 왜 비판하냐, 의사들이 결정적인 국면에 국민들의 신뢰를 배반하니까 허현회 같은 대체의학 사기꾼들이 판치는 것이 아니냐,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책꽂이에서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을 꺼내들었다.

2008년 여름, 프랑스의 한 엔지니어가 아내 그리고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중고 요트 여행을 하다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붙잡힌 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출동한 특공대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 사건과 함께 책은 시작된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털어 중고 요트를 산 후,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해적이 우글거리는 해역으로 진입했다. "그들이 욕망한 삶의 '본질적인' 핵심은 달리 말하면 '진정성'(authenticity)이다."(10쪽)

이 사례만 들어도 많은 독자들은 저자가 비판하는 '진정성'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대중민주주의, 소비주의, 대량생산, GMO, 화학적 생산물, 기타등등 '현대적'(modern)인 것과 대척점에서 '진정한 나'를 일깨워주는 그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는 '진정성'을 찾고자 한다. 이제 제주도는 틀렸다. 산티아고나 히말라야에서 트래킹을 해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 개천의 물을 퍼마시고 과탄산소다를 풀어 빨래를 하는 삶이 '친환경적'인 것으로 언론에 소개된다. '진정한' 면역력이 활약할 기회를 빼앗는 백신을 거부하고 서로 병을 옮겨주는 '수두 파티'를 벌인다.

캐나다의 트렌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다가 현재는 작가로서 활동하고 있는 앤드류 포터는 전공인 철학 위에 다양한 대중문화적 지식을 접목하여 21세기 현재의 진보 운동이 빠져 있는 '진정성'의 늪을 파해쳐 보여준다. 그가 조지프 히스와 함께 쓴 책 <혁명을 팝니다>에서 보여줬던 것과 유사한 방법론이다. '진정성'이라는 것이 '근대성'에 대한 반발로 제시된 퇴행적 이념이라는 것을, 그리고 '진정성'에의 추구와 파시즘에 대한 열망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대단히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평범한 대중들과 달리 '깨어있는' 나는 대량생산되는 GMO 작물이 아니라 유기농 식품을 먹는다는 자부심 느끼기.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분짓기'의 욕망이다. 그러한 '진정성' 담론이 힘을 얻을수록 수많은 인류를 굶주림과 질병에서 구하고 범죄율을 떨어뜨린 "자유민주주의의 전반적인 과학·법률·정치적 기반과 그 속에서 번성하는 문화"(312쪽)는 힘을 잃게 된다. 그리고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성'을 찾아 야만과 폭력이 들끓는 전근대의 망망대해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물며 대한민국에서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진정성'을 운운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진정성'에의 호소가 권력을 향한 전근대적 복종의 습속과 맞닿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16-10-04

[북리뷰]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인가

맨박스
토니 포터, 한빛비즈, 1만4천원.

'남자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말을 우리는 최근의 페미니즘 열기 속에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남자다움'의 틀에 갇혀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하지 못하고, 여자들과 가까워지는 법도 배우지 못하고, 그저 '일하는 기계'로 살다가 늙은 후 황혼이혼을 당한다는 것이 오늘날 남성의 인생을 애틋해하는 표준 서사를 이룬다. 이게 다 '남자답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우리 남자들은 더 이상 '남자답게' 굴지 않겠다, '여자를 지켜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못난 풍경도 더러 눈에 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자. 토니 포터의 책 <맨박스>는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하는 책이 전혀 아니다. 남자들이 남성성이라는 정해진 틀을 강요당한다는 것, 그로 인해 남성 스스로가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이 책의 중요한 서사를 이루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가이며 사회운동가로서 오래도록 남성들을 상대해왔던 토니 포터는 남자들, 특히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남자들에게, 값싼 면죄부 대신 유죄 판결을 내린다. '남자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서 이 책을 펼친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맨박스는 그 속에 갇혀 있는 '선량한' 남자들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나 그 남자들이 갑갑해하면서도 결국 여성을 향한 그 억압을 용인하는 사이, 세상은 점점 더 나쁜 곳이 되어간다고 고발한다.

선한 남성들이 폭력적인 남성들을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는다. 무언의 합의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묵인할 뿐이다. 남성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묵시적 규범이자 기대치 그리고 남성들의 행동과 생각을 제한하는 모든 규범들이 맨박스 안에 엉켜 있다.(41쪽)

매력적인 목소리와 화법으로 '맨박스'에서 남자들이 나와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토니 포터의 TED 강의만을 생각하던 이들, 특히 남성 독자들에게, 위와 같은 서술은 어쩌면 공격적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선한 남성'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정 반대로,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고 있는 남자들 역시 맨박스 속에서 그것의 존속에 기여하고 있는 한, '나쁜 남자'들이 저지르는 직접적 폭력을 거들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일단 남자들에게 맨박스의 존재를 알리고, 맨박스가 이끄는대로 '자동 주행 모드'로 살아가지 않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남자들이 "일단 현실이 어떤지 알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생각이 바뀌었음을 깨닫게 된다. 남성 모임에서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43쪽) 기존의 남성성 모델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고, 남자들이 스스로 새로운, 보다 평등하고 감정적으로 풍부하며 여성들 뿐 아니라 남성 스스로에 대해서도 억압하지 않은 성 역할 모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다.

<맨박스>는 한 활동가가 평생에 걸쳐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하고 지도해왔던 내용을 최대한 평이한 문체와 짧은 분량에 담아낸 책이다. 토니 포터가 가진 자기 확신, 카리스마, 설득력 넘치는 화법 덕분에 그는 수많은 남자들을 맨박스에서 끄집어내는데 성공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의 저작물은 국내에 소개되면서 종종 오해받는 듯하다. '착한' 남자, 침묵하는 방관자들은 남자마저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피해자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공격적 행동을 당연시하는 남성성 모델을 재생산하고 있는 공범인 것이다. 우리 남자들은 이 책의 메시지를 좀 더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2016.10.04ㅣ주간경향 1195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0927095802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