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26

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4월 9일에 프레시안에 실린 기고문입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올린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게재된 후 시간이 한참 되었으니, 전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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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슬 vs 故 박지연 vs 천안함 희생자…공통점은?
[기고] 대학생 문제인가, 20대 문제인가


기사입력 2010-04-09 오전 10:00:49

나는 현재 이른바 '20대 담론'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한다. 그 위기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명목상으로는 '20대 문제'지만 전체적인 프레임은 '대학생' 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 대학생이 아닌 20대가 소외되고 있다. 둘째, 그 과정에서 아직 사회적으로 미성년자 취급을 받는 대학생이 20대를 위한 일종의 '시혜적' 정책을 요구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고 있다. 셋째, 앞서 말한 두 가지 문제가 종합되어, '20대 담론'이 사회 보편의 문제로 인정받고 자리 잡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한 가지 특징적인 사례 비교를 통해 이 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난 3월 10일, 고려대학교 3학년 김예슬 씨가 학교 안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여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다. 대학생이 뭔가 '젊은이'의 패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사회적 수요와 맞물려 이 선언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경향신문>은 바로 다음날 1면의 일부를 할애하여 이 소식을 보도했고, 여러 사회적 명사가 지지와 격려의 뜻을 표했다. 서울대학교 08학번 채상원 씨는 김예슬 씨의 선언에 동참해 자신도 대학과 싸우겠다는 뜻을 표했다. 이 역시 <프레시안>을 비롯한 여타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었다.

한편, 지난달 31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반도체 검수 업무를 맡았다가 백혈병에 걸린 뒤 2년간 투병 중이었던 박지연 씨가 2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의 눈치를 보는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넘어갔지만, <프레시안>을 비롯한 이른바 '비판 언론'은 사태의 추이를 비교적 면밀하게 추적·보도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박지연 씨의 문제를 '20대의 문제'로 바라보고 다룬 기사는 없는 듯하다. 박지연 씨의 투쟁과 사망을 다룰 때, 그가 2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동정의 소재가 될 뿐이다. '꽃다운 나이에 스러진 비윤리적 기업의 희생자'로 묘사될 따름이었다.

그는 '노동하는 젊은이'가 아니라 '젊은 노동자'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20대에 대한 과도한 예찬과 기대와 비판에 사용되는 온갖 수사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는 삼성에 대한 비판과,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대한 보도 등이 주를 이루었을 따름이다.

언론이 고 박지연 씨의 죽음을 다루고 있을 때조차 그 '젊은 노동자'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거대한 악당 삼성이 주인공이고, 박지연 씨는 순결한 희생자일 뿐이다.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고 외친 김예슬 씨가 언론에서 다루어질 때와는 사뭇 다르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읽다보면 분명해진다. 우리 사회가, 우리 언론이 기대하는 '실천하는 20대', '사회의 부조리에 반항하는 젊은이'는 절대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 무조건 '대학생', 그것도 명문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어야 한다. 사실 박지연 씨는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었다. 다른 산업 재해 피해자와 함께 법원에 자신의 질병을 산업 재해로 인정해달라고 소송을 걸고 있었다.

박지연 씨는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지연 씨를 '투쟁하는 20대'로 보지 않는다. 김예슬 씨의 자발적 퇴교는 '대학'이 아닌 '20대'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만, 박지연 씨의 싸움과 죽음은 '20대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그에게 우호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조차, 그것을 오로지 '삼성'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가령 4월 5일자 <한겨레>의 '왜냐면'에 실린 한 독자 의견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 박지연 씨의 죽음은 삼성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과 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와 그리고 우리 안에 자리잡은 '삼성'은 원래 그랬어,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을 드러내고 반성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어야 한다."

4월 1일 발표된 민주노동당의 논평 역시 삼성에 대한 규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스물세 해를 살다 떠난 젊은이의 못다 핀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검색해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에 통용되는 '20대 담론'이 철저하게 대학생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명문대에 다니는 대학생은 자퇴만 해도 화제가 되고 저항하는 20대로 승격된다. 고등학교만 나오고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죽은 젊은이는 죽어서도 투쟁의 주체가 아닌 산업 재해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김예슬 씨의 용감한 결의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현재, 세상의 시선은 대단히 불공평하다. '세상을 바꾸자'고 떠드는 바로 우리들의 시선이 불공평하다.

이렇듯 현재 논의되고 통용되는 '20대 담론'은 사실상 '대학생 담론'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20대 담론'의 의제가 '청년 실업 해소'와 '대학 등록금 인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각각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는 없고, 두 측면 모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대의 삶과 인권이 피폐해지는 이유는 비싼 등록금과 대기업 사무직 취업난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박지연 씨의 죽음에서 확인할 수 있는 20대의 수많은 문제를 과연 '20대 담론'이 포용할 수 있을까?

앞서 말한 박지연 씨의 죽음도 그렇거니와, 가령 이번에 침몰한 천안함 사건을 되짚어보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대부분의 남성들은 군대에 간다. 그 군대는 지금 우리가 확인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권의 사각지대이며 누군가가 애꿎은 생명을 잃어도 속 시원한 해명 한마디 내주지 않는다.

도리어 생존한 장교들(그 중에는 다수의 20대 사관들이 속해 있다)에게 병원복을 입고 목발을 짚고 나오는 '쇼'를 강요한다. 20대 남성의 대부분이 저런 군대에서 2년간 청춘을 바치는 것이, 20대가 아파트가 없어서 모텔에 가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 아닐까?

그러나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20대 담론'은 저런 지점을 수용할 수 없다. 세대론의 덫에 갇혀버렸기 때문이다. '386 세대가 20대의 몫을 가져간다'는 식의 괴담이 횡횡한 가운데, 정작 20대와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 운동의 과정에서 '20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사실상 실종되어버렸다.

대신 20대'를 위해' 등록금도 내려야 하고 아파트도 지어줘야 하고 낮은 학점을 받아도 대기업과 안정된 사무직 직장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주장들이 떠돌아다닌다. 전체 사회와의 접점을 찾지 못한 세대론은 결국 정부 혹은 권력자들이 배푸는 '시혜적 정책'에 대한 요구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러한 형태의 20대 담론은 점점 범사회적인 공감대를 잃어가고, '너희만 힘드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을 불러온다. 심지어 20대, 혹은 대학생 사이에서도 그러한 상호 불신과 냉소가 그득하다. 세상을 바꾸고 세상 속에서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한 운동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스스로를 위치 짓고 있는 한 그러한 상호 불신과 전망의 결여는 필연적이다.

가령 우석훈 박사는 20대 미디어 <이빨을 드러낸 20대>와의 대담에서 "교수를 비롯한 교직원의 급여가 너무 과다하다는 것과 제2캠퍼스나 건물 신축에 투자되는 비용이 절약 가능하다"는 것을 근거로 "연간 등록금 100만 원 이하 책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과연 이런 주장을 통해 대학을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을까? 교수와 교직원의 월급을 깎아서 대학생의 등록금으로 달라는 주장을 하면서 대학 사회 내에서 폭 넓은 공감과 정치적 동의를 확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내 또래의 누군가는 아직 차디찬 서해 바다 속에 갇혀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린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그 속에서 청년 실업의 불안을 이야기하고 스펙 쌓기의 '무한경쟁'에 시달리는 고통을 토로하는 것을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20대 노동자가 죽어가고, 20대 군인이 학대당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20대 대학생이 '20대 문제'를 '등록금 인하'와 '청년 실업 해소'로 한정짓고 있다면, 부끄럽고 비도덕적인 일이다. 대학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듯, 대학생이 20대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20대 담론'은 사회적 효용을 다해가고 있다.

김예슬 씨와 고 박지연 씨 모두를 위해, 이제는 그 폭을 좀 더 넓히고, 더 많은 주제를 함께 다루며 싸워나갈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할 때이다.


/노정태 전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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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4월 9일 내 기고문이 나가고, 4월 10일 경향신문 만평 장도리에는 이런 내용이 올라왔다.

2010-04-21

검찰 문제, 몇 가지 빠진 지점

PD수첩의 방영 이후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검찰에서도 외부 인사가 대거 포함된 특위를 꾸려 내부 감찰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고, 좋은 반응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논의하는 지점에서 몇 가지 빠진 구석이 보인다.


1. 성매매와 여성 문제

검찰들은 어디서 접대를 받는가? 그 접대의 양식이 성매매를 포함한 음주가무라는 점을 들어 사람들은 '떡찰이 떡친다'는 식의 조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대량 성매매'가 아무렇지 않게 벌어질 수 있는 문화가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서도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 성매매 업체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양상은 한국과 달랐다. 우리는 남자들이 떼로 한 건물에 몰려가서 술을 마시고 삼삼오오 모텔로 흩어진다. 미국에서는 은밀하게 연락을 받은 고급 콜걸들이 고위 공직자가 있는 호텔에 찾아가 성매매를 했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요컨대 한국에서는 '남자'라면 당연히 끼어야 하는 어떤 추접한 아랫도리 업무가 따로 존재한다. 그 사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TV에서 본 것과 같은 향응 접대가 가능한 것이다. 성매매 자체를 근절하는 것은 절도나 강도를 근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다들 쉬쉬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는' 형태로 대규모 성매매가 시행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하고 있는 한, 돈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권력자들에게 술과 성을 접대할 것이다.

고위공직자 사회 내의 성비를 깨뜨리는 문제가 그래서 중요하다. 자료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성비가 골고루 나누어지면 나누어질수록 비리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집단적 로비'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모든 검사들이 다리 사이에 좆을 달고 있다면, 그 숫자만큼 아가씨를 붙여주면 된다. 하지만 일부 검사들이 여성이고 그들이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와 있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풍토가 바로 이와 같은 집단 성매매를 통한 향응 접대를 낳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 검찰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이 문제를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도 비판할 수 있고, 그 비판이야말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상기해 주었으면 싶다. 성매매를 옹호하는 당신은 떡찰을 옹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비리와 노동 문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잘 말하고 있듯이, 기업의 내부 비리를 척결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그 기업에 강경한 노동조합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삼성도 그렇거니와 이번에 PD수첩에 나온 그 기업도 그렇다. 사장님이 검사 영감님들게 술 사드리고 여자 바치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사장의 개인 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다 회사 공금이다.

노동조합이 생기면 그런 일이 완전히 근절될 수 없더라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회사돈으로 사장이 친분 쌓고 다니면서 '공적 활동'이라고 우기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업과 권력간의 유착을 상당 부분 제거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점점 노동조합에 대해 비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고, 그것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고 외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유시민은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분열'이라고 말하더라.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말에 한치의 동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성장'이다. 노동운동이 온전히 자리를 잡고 정치적으로도 제 몫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한국 사회의 자정능력 신장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을 매도하면서 한국 사회의 개선을 바란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ㄴ자만 나와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이런 인식도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3. 검찰 수사비 현실화

한 차례 사정의 폭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결국 검사들은 다시 스폰서에게 돈을 받을 것이다. 그래야 할 핑계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말이다. 검사들은 늘 수사비가 모자란다. 혹은 그렇다고들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금이 모자라면, 공적으로 신청해서 받아내면 되는 일이 아닐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현실을 뜯어고쳐서 검사들이 돈 받아먹을 핑계를 대지 못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 옳다. 수사비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어디 어디 사장님들 만나서 접대 받는 것이 문제라면, 일단 수사비도 제대로 지급하고, 수사비를 유용하거나 접대를 받을 경우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게 해야 앞뒤가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혁안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고, 나온다고 해도 시민사회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백리를 요구하기만 하면 나오는 것은 탐관오리 뿐이다. 관직에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인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면서 인간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지 않는 한, 구조적인 비리와 부패의 사슬은 끊기 어렵다.


검찰에 대한 이번 비판을 통해 검찰이 진실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앞서 말한 요소들도 조금씩 진전되어 나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2010-04-15

학문으로서의 철학

철학에 대해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학계의 철학자들이 하는 논의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것은 철학 연구자들이고, 진정한 철학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라고 외치겠지.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교양서 수준의 지식을 반복해서 읊어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떤 물리학자가 대중들에게 물리학의 초보적인 내용에 대해 소개해주었다고 해도 대중들은 그게 물리학의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건 물리 연구자들이나 하는 소리고, 진정한 물리학자는 우리의 표피적 관찰(가령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 같은 것)과 어긋나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라고 누군가 외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철학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은 바로는, 자신들이 표피적으로 생각한 초보적인 논증 수준 이상을 벗어날 경우 '현학적'이라느니 '궤변'이라느니 하는 항의가 따라온다. 그러나 철학은 학문이고, 대중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 이상의 논의들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자신들의 이런 저런 생각에 덧붙이는 훈장과도 같은 기호로서의 '철학'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진지하게 추구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전자를 위해 후자의 활동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강단철학은 틀렸다, 우리가 간다!'라고 외치는 '인문 상업주의'는 바로 그런 대중적 경향성에 편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2010-04-05

천안함 문제를 보며, 단상 하나

천안함 침몰 사태와 관련해서, MBC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군(軍)이 청와대에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이미 노무현 시대부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관료 집단은 통제가 되지 않기 시작한 것 아닌가. 가령 이런 경우.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며 이 과정을 지켜 본 김종대 씨의 최근 책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지음. 나무와숲 펴냄)를 보면 노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5월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 전부가 나에게는 진실로 들리지 않아요. 이게 대책회의 맞습니까?"

참고 링크


가히 폭력적인 인사 개혁을 통해 하나회를 물갈이한 김영삼의 군에 대한 카리스마와 통제력이, 김대중 시절을 거쳐 조금씩 약화되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본다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은 '희망의 군국주의자'로 떠받들고 이명박은 '미필 씹새끼'로 몰아붙이는 그런 도식화를 통하지 않고도.

요컨대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인간으로 구성된 기계, 즉 관료 집단과의 알력싸움에서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외교에서 무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이미 노무현 시절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권력은 관료 집단의 정보 독점과 의사 결정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연속성을 지니는 정책들, 특히 외교부가 관할하는 분야는 한결같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민주주의'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명박은 반민주주의고 노무현은 민주주의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이 '기존의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한 것. 노무현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대통령과 지지자들 모두 '조선일보 때문이다'라는 편리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그 변명을 스스로에게까지 남발했다는 것 아닐까.

2010-04-01

이성은 정념의 노예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them.

- Hume, David. A Treatise of Human Nature


너무도 유명한 인용구. 흄이 '이성은 정념(passion은 철학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열정'이 아니라 '정념'으로 번역됨)의 노예'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나 판단을 낳지 못하며, 그것들을 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 혹은 지성과 판단이 인간의 같은 사고 기능이 아니라는 인식은 칸트에게도 이어져, 말년의 그가 『판단력 비판』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판단력의 결여는 사람들이 본디 천치[天痴]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러한 결함은 전혀 구제할 수가 없다. 둔한 머리나 편협한 머리는 다름아니라 보통 정도의 지성과 지성 고유의 개념들을 결여한 것으로, 이러한 머리는 배움을 통해 충분히 보강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보통은 (페트루스의 제2부의) 저것을 결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대단한 학자들이 그들의 학식을 사용할 때 결코 개선될 수 없는 판단력의 결함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A134=B173, 375쪽.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파악된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자꾸 이런 것들을 혼동할까. 왜 자신들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념'에 의해 판단하고 있다고 성급한 단정짓기를 서슴치 않을까. 그런 판단은 대체 어떤 정념에 의존하고 있는지, 관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