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소설이 아주 잘 팔렸습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프랑스 출판의 기틀을 닦은 가스통 갈리마르 평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관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점령 시기에는 책이 왕이었다. 또한 라디오 파리, BBC와 같은 라디오 방송은 프로그램도 재밌지 않았고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더욱 즐겨 찾았다. 파리에서나 지방에서 책이 지루함과 박탈감과 우울을 이겨 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 덕분에, 종이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들은 원만하게 사업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 303-304쪽.
사회 활동의 제약이 있고, 가슴은 답답하고, 불평을 함부로 털어놓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런 상황. 그럴 때 2차 대전을 겪던 프랑스인들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두껍고, 재미있고, 검증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죠.
21세기의 인류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전에 Financial Times에서 본 보도에 따르면 COVID-19 발병 이후 중국의 모바일 게임 업체들의 주가가 대폭 올랐다고 합니다. 다들 스마트폰 게임 아니면 유튜브, 혹은 SNS에서 뇌를 벅벅 긁으며 도파민을 쥐어짜거나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에코 체임버에 갇힌 채 답답해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일반적인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으니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책장에도, 괜히 사두고 안 읽는 '세계문학 고전'이 한 두 권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읽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꼭 '세계 문학의 고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한참 전에 나온 책, 시간의 검증을 버텨낸 책, 그리고 어디에나 흔히 있는 책을 우선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책을 읽고 있을 때만은, 지금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그런 책 말이죠. 그럼 당연히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이런저런 소설들이 1순위로 거론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줄창 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둬서, 그럼 뭐 어쩔 건가요? 아이들은 시간이 남아 PC방에 가고 거기서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어른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웃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를 가고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인문주의자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단 하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책을 읽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책과의 거리 좁히기' 입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식재료를 이번 기회에 털어 먹듯이, 책장 위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고전 소설들을 꺼내어, 읽읍시다.
사족) 저는 W. G. 제발트의 책 중 <아우스터리츠>는 두 번, <토성의 고리>는 한 번 읽었는데, <현기증/감정들>은 사놓고 아직 안 봤군요. 지금이 그것을 읽을 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각각 나름대로 '아 이거 읽어야지 언젠가'의 리스트를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언젠가에 적합한 시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