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6

[신동아] 北 만행에도 文정권은 '저 망나니 착해질 수 있다'며 악행 방조

 

北 만행에도 文정권은 '저 망나니 착해질 수 있다'며 악행 방조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09.26. 10:01
[노정태의 뷰파인더③] 北 행패에도 비위 맞추고 굽신 거리는 'enabler(조력자)'

●‘北 이기자, 잘 살아보자’는 퀘스트의 힘이 번영의 동력
●北 몰락하자 남북 힘 합쳐 외세 이기자는 서사 범람
●박정희에 멈춘 보수, 옛 대북관 넘어서는 담론 못 만들어
●그 틈새서 반미주의 세례 586, 낭만적 대북관 들이밀어
●현실의 北, 해수부 공무원 총살 후 시신훼손 만행
●北은 韓의 짐, 이웃에 폐 끼쳐도 뒷감당은 우리 몫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北에 술값 못 찔러줘 안달
●北 ‘사람 구실’ 하게 만드는 게 ‘선진국’ 대한민국의 퀘스트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 24일 오후 경기 김포시 ‘캠프원’에서 열린 디지털 뉴딜 문화콘텐츠산업 전략보고회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해양수산부 실종 공무원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된 뒤 시신이 불태워진 사건에 대한 보고를 받고 “국민들에게 있는 그대로 발표하라”고 지시한 뒤 현장 일정을 예정대로 소화했다. [뉴스1]
영화과 학생이 아니라도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교과서가 한 권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영화·텔레비전 학교의 교수이며 지금도 현역으로 할리우드 주요 제작사의 스토리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로버트 맥키의 책 'STORY: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다. 

책의 서문에서 맥키는 선언한다. 이 책은 이야기의 전형이 아니라 원형에 관한 것이라고. 시대·장소·문화·인종을 불문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의 틀이 있다. 이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대중을 상대로 한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구조는 어렵지 않다. 주인공(hero)이 있고, 주인공이 이루어야 할 목표(quest)가 있다.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반(反)주인공, 즉 안티히어로(anti-hero)가 등장한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이러한 원형적 구조 위에 성립하고 있다는 게 맥키의 설명이다. 

이야기의 성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주인공도 퀘스트도 아니다. 안티히어로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 그 안티히어로의 행동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냐에 따라 관객의 집중도가 오르내린다. 영화나 드라마의 흥행 여부는 이에 달려 있다. 이야기가 막히면 악역을 다시 검토해볼 것! 맥키의 책뿐 아니라 모든 시나리오 작법서에서 공히 지적하는 내용이다.

‘북한을 이긴다'와 '잘 살아보세'

대한민국, 특히 한국 보수 정치에 그 '악역'은 북한이었다. 북한을 이기기 위해 한일협정을 맺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박정희 정권 때부터 이 구도가 더욱 분명해졌다. 박정희는 1961년 대통령에 당선했다. 북한 김일성 체제의 황금기인 1960년대와 겹친다. 북한의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은 실로 놀라웠다. 일본에서 공부한 화학자 리승기가 1950년 월북한 후 합성 섬유 비날론(Vinalon) 생산 단지를 건설해낸 것 또한 1961년. 갓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모든 면에서 북한을 이기는 것을 자신들의 과제, 즉 퀘스트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테다. 

‘북한을 이긴다.' 그 퀘스트는 도덕적 당위도 포함하고 있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137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온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6·25전쟁이 끝난 지 고작 10여 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전쟁의 참상과 공포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선배들을 통해 알게 되는 '감춰진 진실'이 아니었다. 모든 이가 보고 듣고 겪어서 아는 실질적 위협이었다. 

보수는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대한민국도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 그 원인은, 아주 근본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북한을 이긴다'는 퀘스트가 지닌 힘 때문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박정희 정권의 모티프는 경제 번영을 향한 열망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온 국민을 일종의 전시체제로 몰아넣었다. 진보 진영에는 바로 그런 이유로 박정희 정권과 그들이 만들어낸 대한민국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다.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의 화약고였으니 말이다. 한국 보수 정치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나라에서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맞서기 위해 국민을 산업역군이자 전쟁용사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군인 출신의 정치인들은 근대적 시스템에 익숙했다. 한마디로 유능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북한에 맞서 잘 살고 잘 싸울 수 있는 준비를 하자는 목적의식과 동기 부여에 국민이 호응했다. 분명한 전략은 분명한 국가적 서사(national narrative)로 이어졌다. 국가적 서사는 국민 각각을 그 서사 속의 주체로 재정립했다.

기아와 영양실조의 땅

이 서사가 흔들리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다. 1994년 김일성이 죽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한 시대가 끝나간다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당시만 해도 평범한 한국인이 접할 수 있는 세계 소식은 극히 제한돼 있었다. 냉전의 종말과 그로 인한 변화를 한국인들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실감했다. 

북한은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르고 말았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엄포를 놓고 쌀과 라면 등을 사재기하게 만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부터였다. 두만강과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은 내전 상태의 소말리아를 연상케 할 만큼 처참한 기아와 영양실조의 땅이었다. 김일성은 죽었고 김정일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데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 

‘북한을 이기기 위해 경제를 개발해야 한다. 잘 살아보자, 잘 살아남아보자.' 1961년 이후 30년 넘게 지속된 대한민국의 서사에 일대 변곡점이 다가왔다. 주인공은 그대로이고 퀘스트도 딱히 달라지지 않았는데, 안티히어로가 제풀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시간을 한국 사회는 갖지 못했다. 1990년대의 흥청망청하는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1997년 외환위기의 충격 때문이었다.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30년을 달려왔는데 망했다. 순식간에 거지가 됐다. 적어도 그 시점에는 다들 그렇게 느꼈다. 어떻게든 다시 잘 살아야 하는데, 이번에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는 게 아니었다. 네가 망하건 말건 나는 잘 살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렸다. 

게다가 북한이 너무도 비참하게 몰락했다. 물론 우리도 외환위기로 힘들었지만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린 북한의 경제적 비참은 그보다 빨리 시작됐다. '꽃제비'로 불리는 어린이들이 굶주려 구걸하러 다니는 처지가 됐다는 소식까지 알려지자 북한을 향한 한국인의 경각심은 급격히 사그라졌다. 그런 나라와 경제적으로 대결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북한을 상대로 경쟁심을 품는 것이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그 빈자리를 채워 넣은 것은 김진명을 필두로 한 수많은 대중소설 작가들이 만들어낸 '민족 합체물'의 서사였다. '신동아' 8월호(‘여권이 조장한 북한 판타지 기원 '김진명,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북한의 천연 자원 및 저렴한 노동력과 한국의 기술력이 결합하면 일본쯤은 가볍게 누를 수 있는 세계 초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환상적 서사가 대북 담론의 주류 자리를 꿰찼다.

낭만적 대북관과 찌질한 대일관

‘민족 합체물'의 판타지는 범여권에 더욱 친화적이다.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서 공천을 받아 김진명이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설정된 범여권의 공식적인 북한관은 그런 모습을 띠고 있다. 

문제는 현재의 야권, 전통적 보수가 과연 어떤 눈으로 북한을 바라보고 있느냐다. 지금도 북핵은 우리 안보의 가장 큰 위험 요소다. 온갖 군사 도발을 통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직접적으로 위협해온 유일한 집단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 또한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1960년대 이후 30여 년간을 유지해온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북 정책에 '정책'으로서, 혹은 그 배후의 '철학'으로서, 김대중·노무현 시절의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는가. 외려 박근혜는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북한을 일종의 미개척 노다지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민족 합체물'의 서사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소리다. 

그것은 박근혜 혼자만의 탓이 아니다. 보수진영 전체가 북한관을 업데이트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북한은 재래식 군사력으로는 우리에게 더 이상 큰 위협이 아니게 된 시점에 핵을 개발하다가 발각됐다. 그렇다면 북한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성장이라는 20세기 대한민국의 내러티브 또한 전면적 수정이 이뤄졌어야 한다. 

정작 보수진영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찾아온 김대중의 당선 앞에 원투펀치를 맞고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박정희가 세팅해놓은 틀 위에서 고민 없이 내달리는 경주마 같은 존재들이었다. 세상의 규칙이 통째로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이명박과 박근혜가 연이어 당선돼 10년의 집권기를 가졌지만 국정교과서 논란 같은 퇴행적 이벤트나 벌였을 따름이다. 

20세기가 아닌 21세기의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이 최악의 실패 국가인 북한을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하는지, 진지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그동안 반미주의의 세례를 강하게 받은 586 세대가 한층 더 낭만적으로 변한 대북관, 그리고 한층 더 지독하면서도 찌질해진 대일관을 들이밀며 우리를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나라'로 인도하고 있다.

호주머니 사정 넉넉해지면 착해질 수 있다?

안영호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이 9월 2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도를 들고 연평도 인근 실종 공무원 북한 피격 사건 관련 보고를 하고 있다. [뉴스1]
그러니 무슨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9월 22일 북한이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 지도 공무원 A씨(47)를 총살하고 시신을 불태운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다.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는 우리 국민 40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됐다. 

대관절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아무리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한들, 세계 최악의 실패 국가이며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는 강제수용소를 숱하게 운영하는 최악의 인권 탄압 집단이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우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뀔 리는 없다. 보수뿐 아니라 진보 역시 이런 기본적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민족 합체물'과 같은 판타지에 몰두하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우리에게 북한이란 친하게 지낼 수는 없지만 완전히 외면할 수도 없는 존재다.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지만 다른 이웃에게도 폐를 끼친다. 결국 뒷감당은 우리의 몫이다. 그렇다. 북한은 짐이다. 하지만 남에게 떠넘길 수도 없다. 술 마시고 싸우고 빚지고 행패부리는 나쁜 친척 같은 존재다. 

반인륜적 만행까지 저지르는 나쁜 친척. 북한을 이렇게 정의하고 나면 현 정권의 대북 정책에서 잘못된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관계국이 볼 때 한국과 북한은 한 나라였지만 분단된 사이다.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본다면 한국이 북한에 대해 더 큰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더라도 북한의 잘못에 대해 우리가 먼저 미안해하며, 북한이 바람직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문재인 정권은 정반대의 길로 향한다. 북한이 외국과 우리에게 행패를 부려도 그저 비위를 맞추고 굽신 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나쁜 친척이 술 마시고 이웃에게 폐를 끼치는데, 혼내고 말리기는커녕 뒷주머니로 술값 더 찔러주지 못해 안달이다.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고 나면 저 망나니가 착해질 수도 있다고, 이웃들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나 해가며 실실 웃고 있는 꼴이다. 이렇듯 누군가의 악행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사람을 영어로 'enabler'라고 부른다. 현재 대한민국은 북한의 enabler인 셈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관련해 한 외국 석학은 한국 언론에 질문을 던졌다. 통일에 찬성하느냐고 물으면 젊은이들 상당수가 반대한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보자. 북한이 무너진다면 중국이 관리해야 할까? 한국이 관리해야 할까? 이렇게 묻는다면 다들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이 문답 속에 북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통일은 대박이 아니다. 박근혜 때도 그랬고 문재인 때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대박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한때 우리를 위협하여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과 군사적 강화를 부추겼던, 수족관의 메기 노릇을 해주었던 북한은, 이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삐뚤어진 탑과 같다. 게다가 그들은 핵무기도 가지고 있다. 온전한 정신이 아닌 상태로 행패부리는 나쁜 친척의 손에 흉기까지 들려 있는 셈이다.

해악의 최소화와 '사람 구실'

9월 24일 서울역에 설치된 TV에서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 뉴스 화면이 나오고 있다. [뉴스1]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지면에서 당장 답하기에는 너무도 큰 질문이다. 일단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주인공을 규정하는 안티 히어로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겠다. 20세기 후반, 냉전 시대의 북한은 공산주의 진영 속에서 그 나름 잘나가는 모범 국가였다. 21세기의 북한은 국제 사회의 문제아일 뿐이다. 그 북한이 우리와 주변에 끼치는 해악을 최소화하고, 비유하자면 '사람 구실' 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에 주어진 퀘스트라고 할 수 있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노정태의 시사哲] 아동급식카드는 왜 인천 ‘라면 형제’를 구원할 수 없었나

일러두기: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저는 '라면 형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제목에도 넣지 말아달라고 일부러 한번 더 당부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제목은 편집부의 권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동급식카드는 왜 인천 ‘라면 형제’를 구원할 수 없었나

[아무튼, 주말] 레비나스와 윤리학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엄마는 없었다.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다. 맏이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약간의 생활비가 들어있는 돈 봉투와 크리스마스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메모 한 장뿐이었다. 실제로는 네 남매가 살고 있었지만 애가 많이 딸려 있으면 세를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엄마는 아이들을 감춘 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출생신고를 하지도 않았으므로 학교는 고사하고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 그때그때 다른 남자를 만나 집에서 출산한 자식들이었다. 이제 열두 살 맏이와 세 동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내용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실화에 기반을 둔 작품이다. 네 남매가 방치되어 있었다.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엄마는 몇 달에 한 번씩 방문하며 가끔 돈도 보냈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차남의 시신이 비닐에 싸여 벽장에 감춰져 있었다. 장남이 어울려 놀던 불량한 친구들이 어른 없는 집을 아지트 삼았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집주인의 신고로 경찰이 개입해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다. 1988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이다.

이런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 14일, 인천의 한 빌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열 살짜리 형과 여덟 살짜리 동생이 큰 화상을 입었다. 엄마는 없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날부터 지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웃은 엄마가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다며 이미 세 차례나 경찰에 신고한 바 있었지만 강제력 있는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급식 대신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고,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형제의 어머니는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기초생활수급가정이었기에 매달 150만원 내외의 지원금을 받았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발생 무렵 어머니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스가모 사건처럼 사실상 자식을 내다 버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이웃으로부터 아동 학대와 방치로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양육자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아동 보호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듯하다.

약자와 타자를 존중하며 돌보는 것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은 그런 주제에 소홀했다. 대부분의 철학자가 남자, 그것도 지배 계급 남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자연에 가까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문명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웅변하며 ‘에밀’을 쓴 루소도 그랬다. 정작 자기 자식들은 고아원에 보내버렸던 것이다. 인의예지를 논하면서 수백, 수천명의 노비를 부리던 조선 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철학에서 윤리의 지위란 고작 그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반성도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를 생각해보자.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주체의 사유를 통해 세계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가 생각해야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어야 다른 이들도 있을 수 있으니, 내가 아닌 너, 자아가 아닌 타자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자기중심적 지배를 끝없이 확장하는 근대적 병폐의 근원이며, 결국 나치의 만행으로 이어졌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했다. 그의 부모와 형제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으로 이어지던 서양 철학의 위계를 뒤집었다. 기존 철학은 내가 있고 너를 알게 된 후 네게 선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레비나스는 비참하고 고통받는 타자인 네가 있고, 그런 너를 보살피면서 나는 윤리적 존재가 되고 자신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 너는 나보다 먼저고, 윤리는 존재보다 앞선다. 제1 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선포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 ‘애무’ 같은 용어를 철학적으로 끌어올렸다. 우리는 남의 속을 모른다. 타자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근대 철학은 그 무지에서 한계와 공포를 느낀다. 레비나스의 생각은 다르다. ‘전체성과 무한’의 한 문장. “타자가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을 우리는 얼굴이라고 부른다.” 서로가 얼굴을 가진 타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애무’ 또한 마찬가지다. 연인은 끌어안아도 여전히 서로에게 목마를 수밖에 없는 타자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다 보면 또 다른 타자, 즉 아이가 태어난다. 연인은 함께 아이를 쓰다듬으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랑의 철학. 레비나스 이전에는 그 어떤 철학자도 마주보고 어루만지는 것을 이토록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반대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복지라는 미명하에 거론되는 온갖 선심성 현금 살포 정책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인천 형제에게는 기초생활수당과 아동급식카드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관심과 보살핌은 받지 못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은 고립됐다. 양육자인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해야 할 국가는 돈만 주고 손을 놓았다. 요즘은 그런 돈을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게도 주는 게 대단한 복지요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일자리 파괴에 대응하고자 미리 고민하는 것까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얼마를 주네, 누구한테 주네 목청을 높이는 현 정치권의 논쟁은 값싼 포퓰리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원래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렇다. 국가가 사람을 고용하고 훈련시켜 직접 복지를 제공하는 대신, 몇 푼의 돈을 주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우파 경제학자도 기본소득에 찬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천 형제 사건 앞에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스가모 사건의 충격은 컸지만 2010년 오사카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복지의 사각지대를 어떻게 없애야 할지 밤새 토론해도 부족한 시점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끌어안는 따스한 공동체를 향한 철학과 정치가 절실하다.

2020-09-23

다시,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일전에 신동아에 썼던 '뷰파인더' 칼럼에서 지적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코로나와 독감이 동시에 유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무료로 독감 백신을 접종하겠다고 해놓고, 예산을 최대한 덜 쓰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액수로 백신 단가를 후려쳤다. 당연히 기존의 정상적인 업체들은 손을 놓아버렸고 처음 백신 시장에 들어온 의약품 유통업체 신성약품이 낙찰받았다.

신성약품은 비용 절감을 위해 냉장 상태를 유지한 채 배송해야 할 백신을 종이상자에 담아 보내는 말도 안 되는 실수 혹은 과실을 저질렀다.

문재인 정권은 여기서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또 뻔뻔스럽게 신성약품을 상대로 '네 이노옴!' 하고 소리지르고 손가락질하며 무마하려 들 것인가?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정부는 제대로 된 비용을 지불할 각오를 하고 공적인 일에 착수해야 한다. 그 재원이 부족하다면, 역시 정당한 절차와 논의를 거쳐 세금을 걷어야 한다.

국가가 날강도처럼 구니까 국민들도 서로 뜯어먹을 궁리나 하는 것이다. 더 이상 이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지 말기 바란다. 

보건당국이 독감백신 사업에서 가격을 지나치게 낮게 잡은 것이 관리 소홀 문제로 이어지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의약업계에 따르면 정부는 백신 단가를 8,000원으로 책정했는데 이 가격은 시중 병원 납품가(1만 4,000~1만5,000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해, 주요 업체들은 아예 응찰을 하지 않았다. 입찰이 대여섯 차례나 유찰을 거친 후에야 이번에 신성약품으로 공급사가 정해진 것이다. 의약품 유통업체인 신성약품은 1,100억원 규모의 4가 독감백신 국가 조달 입찰에 성공하면서, 이번에 처음 백신 시장에 진출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537880

2020-09-21

[신동아] "한국인 30% 민주주의에 반감" 文정부 비판 英이코노미스트의 숨은 근거

 [노정태의 뷰파인더②]

●英이코노미스트 “文정권, 피포위의식 사로잡혀”
●같은 호에 韓언론에 보도 안 된 ‘세계사회관 조사’ 결과 실려
●2018년 조사 결과, 한국인 중 ‘민주주의 반감’ 응답자 30%
●‘푸틴의 러시아’보다 민주주의 반감 커…이라크와 비슷한 수치
●‘산업화·민주화 동시 이룩한 한국’은 K방역처럼 ‘국뽕’일 뿐
●여권, 민주주의 앞세워 민주주의 제도 망가뜨려
●정권 비리 수사팀 좌천에 언론인 감옥행, 이것은 독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21대 국회 개원식이 열린 7월 16일 문재인 대통령이 개원 축하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자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박수를 치고 있다.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8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문재인 정권이 피포위의식(siege mentality)에 사로잡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코노미스트'는 문 정권이 비판 세력으로서 도덕적 권위를 획득하고 권력을 잡더니, 같은 기준이 자신들에게 적용되자 수긍하기는커녕 발끈하며 고소·고발을 일삼고 있다고 꼬집었다. 또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이 구속된 사실도 언급했다. 독자 여러분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국내 언론의 외신발(發) 보도 행태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숱하게 일어나는 오역 논란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그렇다. 개별 외신이 갖는 속성과 논조, 맥락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에 대해 긍정적 뉘앙스의 발언이 나오면 기뻐하고 부정적인 언급이 나오면 화를 내는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번 '이코노미스트' 칼럼에 대한 보도 역시 그랬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던 시기부터 '월스트리트저널'을 정점으로 하는 해외 유력 경제지들이 우려를 표했던 것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코노미스트'가 경제지 가운데 문 정권에 우호적인 편에 속하는 매체였다. 이번 보도를 통해 비로소 입장을 바꾼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같은 호에서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화제를 모은 피포위의식 칼럼은 우리가 다 알고 있던 내용을 정리해서 보도한 것이다. 반면 주목받지 못한 또 다른 보도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몰랐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의미심장한 차원을 넘어, 섬뜩하다.

러시아·이라크와 비교당해야 하는 정치 후진국

2019년 12월 23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이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매주 발행되는 '이코노미스트'의 마지막 페이지는 부고 기사가 차지한다. 그 바로 앞에는 중요한 통계 수치를 도표로 만들어 소개하는 그래픽 디테일(graphic detail)이란 코너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에 균열 벌어져"(A rift in democratic attitudes is opening up around the world)라는 제목과 함께 웹에 공개된 해당 기사는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던 어떤 진실을 드러낸다. '산업화·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라는 한국인의 자부심이 실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세계사회관조사(World Value Survey)는 1981년부터 시행됐는데, 약 100여개 국가에서 동일한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한 후 그 결과를 비교하는 프로젝트다. 본부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비영리기구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다방면에서 세계인의 가치관 변화를 긴 시간대에 걸쳐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로 인정받고 있다. 

가장 최근 자료는 2017년 중반부터 2020년 초까지의 연구를 집약한 7차 조사(Wave 7)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2018년에 진행됐다. 촛불시위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뒤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년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다.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 근간은 위태로워 보인다. "우리나라의 통치 방법으로써 다음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큰 주제 하에, 238번 문항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호오를 묻고 있다. 한국인들의 응답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원자료를 확인해보면 '대단히 좋다' 18.5%, '약간 좋다' 51.6%, '약간 나쁘다' 25.1%, '대단히 나쁘다' 4.9%로 부정적인 응답이 합산 30.0%에 달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수준의 반감은 1995년~1998년 진행된 3차 조사(Wave 3) 당시 러시아에서나 나왔던 수치다. 옛 소련 몰락 이후 극도로 피폐해졌던 옐친 대통령 집권 당시의 러시아 말이다. 같은 7차 조사를 놓고 비교해보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푸틴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꾀하고 있는 러시아에서조차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답변이 채 20%가 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래프를 통해 현재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된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히 큰 나라로 두 국가를 지목한다. 하나는 대한민국, 또 하나는 이라크다. 이라크인들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약 40%가 약간 나쁘거나 대단히 나쁘다고 응답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 지금까지 혼돈의 늪에 빠져 있는 그 이라크가 '민주주의'라는 지표에서 한국과 비교대상에 올라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국뽕 서사'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서모(27) 씨의 ‘군복무 휴가 특혜’ 의혹이 제기된 가운데 9월 16일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앞에 추 장관을 응원하는 화환이 놓여 있다. [뉴스1]
문재인 정권 들어 주로 30대와 40대 사이에 만연한 '국뽕 서사'가 있다.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평화적·수평적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것이다. 짧은 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뤄낸 세계 유일의 국가!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가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다는, 이른바 'K-방역'의 승전보가 언론에 연일 울려 퍼지며 국민의 들뜬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간 듯하다. 

얼마 전까지는 나 또한 일정 정도 이에 동의했다. 그것을 자칭 '민주화 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를 통한 민주주의에 대해 국민의 30%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나라라면, 언제 어떤 식으로건 민주주의가 쓰러지거나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민주주의 선진국이다. 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만을 놓고 보면 1990년대 후반 러시아나 오늘날의 이라크 등 민주주의가 망가져 있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와 비교될 수준이다. 

이 결과를 납득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세계가치관조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호감 여부를 묻는 질문은 세계가치관조사의 4차 조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행히도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설문조사 자료도 모두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해당 질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응답 추이는 다음과 같다. 

1995년에는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15.2%로 지금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2001년에는 13.5%로 조금 더 낮아졌다. 2005년에는 22.8%, 2010년에는 24.6%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나쁘다' 혹은 '매우 나쁘다'라고 응답했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특정 시점 이후로는 계속 커져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10명 가운데 3명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과 의회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품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 한국은 러시아·이라크와 비교당해야 하는 정치 후진국이 되고 말았다. 현 정권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부정적 답변이 30%나 나온 책임은 문재인 정권에 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 분열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민주적 제도와 절차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87년 체제' 이후를 기획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테니 말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코노미스트'도 아는데

대통령 직선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 정치인'의 리더십으로 이뤄졌다. 이제는 공정한 룰(rule)과 투명한 제도, 합리적 소통에 터를 잡은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할 때다. 그것이 탄핵 정국 이후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취임 직후 발표했다면 개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코노미스트'도 알다시피 문재인 대통령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정권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 수사팀을 뿔뿔이 찢어 사방팔방 좌천시켰다. 말끝마다 검찰개혁을 들먹이며 '공수처법'을 통과시켜놓더니, 야당이 협조하지 않자 이제는 야당을 완전히 배제한 채 공수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것은 독재다. 적어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세계가치관조사가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르면 그렇다.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중심에 서야 온전한 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여당은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기어이 독식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전례가 없던 일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와 공무원, 국회의원을 겁박하기 위해 '친위 조직'인 공수처를 밀어붙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뉴스를 '가짜뉴스'로 낙인찍고 처벌하겠다는 어엿한 독재 법안까지 들먹이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한국 민주주의를 '나쁘다'고 보는 30%는 대체 누구일까? 세계가치관조사가 제공하는 자료를 분석해보면 응답자의 성별, 연령, 정치 성향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해석 방법론을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어떤 확정적인 답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특히 의회와 정당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반감의 수준은 통상적인 민주주의 선진국과는 차원이 다르게 나쁘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통계와 그래프를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둘째, 청와대와 여당이 민주주의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행보를 밟고 있는데도 정권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는다. 

1987년 개헌 이래 법사위원장은 언제나 야당 몫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정치와 의회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다. 그런데 당시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상에서는 실명을 내걸고 번듯한 직함을 자랑하며 점잖은 말투로 문재인 정권의 '막가파 행태'를 옹호하는 고학력 인사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의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권에 철통같은 지지를 보낸 거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민주주의라는 제도나 가치가 아니라, 선거에서 이긴 현 정권만을 지지하는 행위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중 일부 혹은 상당수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으로 응답한 30%에 들어가리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국뽕은 인민의 아편이다

젊은층을 향해 호소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한국인의 '종특'(종족 특성)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특산물'도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이 무슨 짓을 하건 '묻지마 지지'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짓이다. 민주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경제가 위태로워진다. 정치 불안은 경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짧은 시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 성취는 언제라도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건전한 시민의 상식으로 가꾸고 지켜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달라는 외국인 유튜버 같은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있다. 국뽕은 인민의 아편이다. 깨어나 현실을 바라볼 때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09-13

[신동아] 의사 투사 만든 건 8할이 文의 ‘반쪽 공공성’

일러두기: 신동아에 '뷰파인더'라는 고정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매주 한 편씩 다양한 시사 이슈를 다룹니다.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정통 시사 월간지의 웹 지면 및 종이 지면을 허락해주신 편집부에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의사 투사 만든 건 8할이 文의 ‘반쪽 공공성’

[노정태의 뷰파인더①] 툭하면 ‘공공성’ 외치는 與, 본질은 民 쥐어짜기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입력
2020-09-13 10:00:01
 
  • ● 대단지 아파트, 주택가에는 없는 편의 제공
    ● 학교부지 기부채납, 건폐율 제한 등 민간 의지한 덕
    ● 공적 재원 투명하게 걷는 대신 민간에 부담 떠넘겨
    ● 병원 안 짓고 당연지정제로 민간 통제해 공공의료 지탱
    ● 금전 부담 넘기려 1981년 사립 유치원 설립 허용
    ● 원아 1人당 보조금 지급 방식 탈피 어려워
    ● 공공의대 설립·지방 강제근무? 수가 조절·병원 확충부터
    ● 비용 전가할 대상 찾는 與, 조선시대식 사고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Getty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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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목요일, 일요일. 우리 동네 쓰레기 버리는 날이다. 몇몇 모퉁이와 전봇대 근처가 온갖 쓰레기로 뒤덮인다. 재활용 쓰레기 놓는 곳과 종량제 봉투 버리는 곳 사이에 암묵적 구분은 있지만 명확한 규칙은 없다. 사람들은 집에서 적당히 분류해 온 캔, 비닐, 종이 등을 이미 쌓인 쓰레기 위에 또 버린다. 

평생을 한국에서, 그중에서도 아파트가 아닌 주택가에서만 살아온 나는 이런 광경을 일종의 자연현상처럼 받아들였다. 내 생각의 틀이 깨진 건 모든 사람이 일상의 온갖 자투리를 시시콜콜 떠벌이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시대가 시작되면서였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 겪는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관리사무실이 너무 엄격하다’는 둥, ‘재활용 기준이 혼란스럽다’는 둥, ‘일회용 그릇을 깨끗이 씻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는다’는 둥,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가 새로 설치돼 너무 좋다’는 둥. 온갖 낯선 이야기의 바탕에 공히 깔린 전제가 있었다. 주택가와 다른 어떤 ‘시스템’이 있다는 것. 그 시스템이 사람들에게 모종의 강제력을 행사하고 입주자 역시 자발적으로 지키면서 살아간다는 것.

복도와 공공성이라는 화두의 출현

프랑스의 역사가 필립 아리에스와 조르주 뒤비가 총 편집을 맡은 다섯 권짜리 대작 ‘사생활의 역사’를 펼쳐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등장한다. 흔히 사람들은 사생활의 영역과 공적 영역이 대립한다고 여기지만, 발생론적으로 따져보면 두 공간은 떼어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주거 공간에는 복도가 없었다. 방과 방은 쭉 이어져 있었다. 왕이 사는 궁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한옥에도 복도는 없었지만 한반도의 주거용 건축물은 모두 단층이고 문을 열고 나가면 마당 등 실외 공간과 연결됐다. 유럽에는 2층 이상의 건물이 많았는데도 복도가 없었다. 

이에 사생활이 존재할 수 없었다. 내 방이 건물의 안쪽에 있고 현관을 통해 나가려면 중간에 다른 사람의 방을 지나가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남이 옷을 갈아입는 중이건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중이건, 밖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방을 통과해야 한다. 프라이버시(privacy)를 지키는 것도 혹은 지켜주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는 사뭇 달랐다. 방과 방 사이에, 그 누구의 방도 아닌 오직 사람의 이동과 연결만을 위한 공간인 복도라는 형태가 출현했다. 내가 사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남이 들이닥칠 위험도, 또 남이 사적인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부득이하게 침해할 우려도 복도의 출현으로 확연히 줄었다. 

복도는 방과 방 사이, 방과 현관 사이를 연결하는 것 외에 다른 기능을 갖지 못하는 공간이다. 누군가는 자기 방이 아닌 공간을 청소하고 관리해야 한다. 또 복도를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삼거나 방에서 넘쳐나는 물건 따위를 늘어놓는 용도로 써서도 안 된다. 복도식 아파트에서 복도에 짐 쌓아두고 쓰레기 놓는 얌체 입주자 문제로 흔히 생기는 갈등을 연상해 보면 된다. 

공용 공간의 존재는 ‘공공성’이라는 화두를 수면으로 끌어냈다. 공적 자원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누군가가 이를 사적으로 유용하지 못하게끔 강제하는 규칙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의 희생이나 헌신 따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참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공적 자원’을 형성, 유지, 관리해야 하는 임무가 공적으로 주어진 거다.

‘하하 호호 어울려 사는 동네’는 없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9월 4일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 사이로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공공재’에 빗댄 피켓이 보인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9월 4일 서울 중구 한국건강증진개발원에서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협약식에 참석하려다 전공의와 전임의들의 항의를 받으며 장소를 빠져나가고 있다. 그 사이로 전공의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공공재’에 빗댄 피켓이 보인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물론 아파트의 관리 방식이 완벽하지는 않다. 층간 소음을 비롯해 여러 문제가 있을 테고,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 갖춰진다 한들 자기 이익만 챙기고 공적 영역을 무시하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단 시스템이 있는데도 안 쓰는 경우와, 시스템을 갖출 여건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는 전혀 다른 문제다. 사실 서울을 비롯해 대도시의 낡은 주택가에는 공용 공간으로 쓸 수 있는 부지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동네’에서의 가족 같은 삶에 대한 동경을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아파트에 사는 강남좌파들이 알지도 못하고 경험할 생각도 없는 주택가의 현실이 이렇다. 허구한 날 싸운다. 쓰레기 때문에 싸우고, 주차 때문에 싸운다. 처음 택지를 구획할 때 쓰레기 모을 장소도 차를 대놓을 장소도 따로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위치에 사는 사람은 자기 집 앞이 쓰레기를 모으는 장소여서 일주일에 사흘은 창문을 열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사 온 뒤에야 깨닫는다(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내가 이런 일까지 겪었다는 건 아니다). 공적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공용 부지 자체가 부재했던 탓이다. 

강남좌파들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서로 돌보고 아끼고 하하 호호 어울려 사는 동네’는 세상에 없다. 대한민국 대다수 주택가와 같이, 공용 목적으로 있어야 할 부지가 없는 상태에서는 화목한 동네 생활이 불가능하다. 마치 르네상스 이전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남의 방을 들락거려야 했고, 이에 사생활이라는 게 불가능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살면 사이가 더 좋아지기는커녕 싸울 일만 늘어난다. 복도가 생기면서 프라이버시가 확립되고 근대적 자아가 탄생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아파트를 주택보다 선호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단지 아파트는 대한민국의 표준적 주택가가 제공하지 않는 ‘공공성’을 제공한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다. 대규모로 재개발할 경우 입주자들이 초등학교 부지 등을 기부채납하게 돼 있다. 내부 조경은 잘 가꿔져 공원처럼 산책하고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다. 그 또한 주택가에도 있어야 하지만 실상은 없다. 앞으로도 생길 가능성이 희박하다. 그러니 우리 동네를 재개발하자고 하면 다들 찬성한다. 더 나은 삶은 내 집뿐 아니라 수많은 공용 공간에서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에 떠넘긴 국가의 역할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까지 파업에 가세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대한전임의협의회 소속 의사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까지 파업에 가세한 8월 24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입구에서 대한전임의협의회 소속 의사가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개인적 체험까지 덧붙여가며 길게 설명한 이유는 살아보지도 않은 ‘아파트 찬가’를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공공성’이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 또렷이 드러내기 위해서다. 애초에 공용 공간을 고려하지도 않고 구획된 토지 위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너무 불편하고 싸울 일도 많다. 새로 개발되는 아파트의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내 집 앞에 쓰레기가 쌓일 일도, 남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불편한 일도 없으니 말이다(이 글에서는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 등은 논외로 한다). 

정작 그 해결 방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공성 구현’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새로 단지를 개발할 때 초등학교 부지 등의 기부채납을 요구하는 경우를 예시로 삼아보자. 너무 일반화된 방식이라 이상하게 느끼지 못할 수 있지만, 학교 부지는 공교육을 운영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 중 일부다.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다. 미국처럼 자식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 부지 비용은 국가가 내는 게 맞지 않겠는가? 

공원 같은 녹지 및 휴식 공간을 국가가 마련하는 대신 아파트 단지를 지을 때 건폐율이나 용적률 등의 제한을 둬 주민들이 나누어 부담하게 하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다. 개별적 사안에서는 그러한 접근법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공공성’ 개념을 엄밀히 따져보면 이상한 일이다. 국가가 공적 존재로서 제 기능을 한다면, 많은 공원 부지를 직접 확보하고 이를 주거 용지 곳곳에 적절히 배치해야 마땅하다. 

우리 사회는 공공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전체 사회를 위한 공공성을 염두에 두고 세금이라는 공적 재원을 투명하게 걷고 활용하는 대신, 사적 영역으로 그 부담을 떠넘기는 방식이 일반화돼 있다. 비단 주거 문제뿐 아니라 수많은 영역에서 같은 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공공의 비용을 공적인 방식으로 걷는 대신, 다양한 경로를 활용해 사적인 영역에서 부담토록 하는 것이다. 

의사 파업 문제의 본질도 결국은 공공성의 비용이라는 논쟁거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 밑에는 대한민국 의료 제도의 핵심인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자리 잡고 있다. 모든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지정 의료기관으로 정해져 있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할 때 발생하는 비용을 환자 본인부담금 제외 후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해야 한다. 국가는 시술, 처방 등 모든 의료 행위에 병원이 청구할 수 있는 액수를 미리 정해 놓는다. 요즘 부쩍 많이 거론되는 ‘의료수가’다. 

환자, 즉 국민 처지에서 보면 이 제도는 대체로 좋다. 경제력과 무관하게 모두가 건강보험에 가입한 상태인 만큼, 치료비 부담 없이 병원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자기부담금도 낼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의료급여 대상자로 따로 보호받는 만큼, 돈이 없어서 병원에 못 가는 나라는 아닌 셈이다. 

반대로 병원 처지에서 이 제도는 좋지 않다. 의료 행위는 넓은 의미의 서비스다. 병원은 서비스의 가격을 스스로 설정할 수 없다. 경제학 원리를 적용해 보면 의료수가가 수요·공급 곡선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가격 설정에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 주장은 원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어느 정도 비효율을 감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 말도 원론적으로 옳다.

학교·병원·유치원 짓는 대신 택한 방법

8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관계자들이 각 병원에 보낼 손피켓을 정리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8월 20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에서 관계자들이 각 병원에 보낼 손피켓을 정리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한국 의료의 공공성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국민은 언제라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비용은 다른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퍽 저렴하다. 국민 대부분은 현재 수준의 의료 공공성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의 제도 변화는 원치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단체의료연합의 설명을 들어보자. 

“우리나라가 당연지정제를 실시하게 된 이유는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1977년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게 됐는데, 당시에 의료보험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정 의료기관을 확보해야만 했었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공병원이나 개인의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의료보험제도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민간의료기관을 강제 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낯선 용어가 나오지만 본질을 두고는 기시감이 든다. 국가가 직접 땅을 사서 학교를 만드는 대신, 아파트 단지를 짓도록 허락하면서 주민들에게 학교 부지 비용까지 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병원은 개인이 짓고 운영하되 모든 민간 의료기관을 예외 없이 건강보험 적용 대상으로 삼아, 모든 병원에서 같은 치료를 하면 같은 병원비가 나오도록 만들었다. 국가가 수가를 결정하므로 의료비 상승에 대한 국민적 불만 역시 통제가 가능해졌다. 

위에서 정책을 내리면 밑에서는 대책을 만드는 법.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더 많은 약을 처방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냈다. 의약분업 전까지 그랬다는 말이다. 의약분업이 이루어지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진료, 즉 비급여진료 항목이 늘었다. 이전까지는 별 인기가 없던 피부과, 성형외과, 안과 등이 각광받은 까닭이다. 그 상태로 20여 년이 흘렀다. 두 번째 의사 파업을 통해 의료의 공공성이라는 주제가 다시 화제로 떠올랐다. 즉 큰 골자에서 보면 1977년 이후 지금까지 상황은 같다. 국가가 병원을 직접 운영하는 대신, 민간 병원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공공 의료는 굴러가고 있다. 

사립 유치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는 돈이 없었다. 필요한 대로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 영역에 금전적 부담을 넘겨왔다. 북한에서 아이들을 탁아소에 보내 보육 부담을 줄여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기민하게 움직여야 했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8~1977년생)가 갓 유년기에 들어설 무렵이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1981년부터 사립 유치원 설립을 허용했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사립 유치원에 힘입어 보육 대란을 피했다.

文 국공립 유치원 40% 공약? 실현 가능성 제로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부터)이 8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공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왼쪽부터)이 8월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공공의료 인력 확충을 위한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추진방안 당정협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문제는 2012년부터 정부가 무상보육을 정책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무상보육을 실시하려면 정부가 사립 유치원을 전부, 혹은 상당수 매입해 국·공립 유치원으로 만들고 직접 경영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공공의료를 달성하는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방법이 정부가 직접 공공병원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번에도 나라에는 돈이 없었다. 201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대형단설유치원을 국·공립으로 지어 전체 유치원의 40% 비중까지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실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한민국의 공공성은 그저 사립 유치원에 원아 한 명당 일정액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대응할 정도의 여력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 지원금을 회계 처리하는 방식 등을 놓고 사립 유치원 측과 교육부 사이에 갈등이 불거진 게 사립 유치원 사태의 핵심이다. 사립 유치원을 마땅찮게 여기는 대중적 시선과는 별도로, 모든 사립 유치원을 비리의 온상인 양 몰아간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었을까. 

모든 제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단순한 선악 구도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주거 형태인 아파트 또한 마찬가지다. 주택가에 없고 나라가 해결해 주지도 않는 공용 공간이 아파트에는 있다. 게다가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악인 데다, 여름에는 영상 30도를 넘고 겨울에는 영하 20도에 가까운 추위가 찾아오는 기후를 갖고 있다. 사이사이가 뚝뚝 떨어진 단독주택보다 여럿이 모여 있는 집합주택이 훨씬 유리할 수밖에 없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도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기형적이지만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1차 의료기관이 널리 퍼져 있는 나라에 살고 있다. 어느 동네건 원장이 한가하게 앉아 있는 내과 의원 하나쯤은 있다. 이를 통해 전 지구적 코로나19 위기를 상대적으로 무사히 넘기고 있다. 정작 공공의료 시스템이 선진적이라 평가받던 국가들은 의료 체계가 유연하지 못해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해 내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여러모로 잘못돼 있다. 국가가 직접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그 비용은 결국 국민적 합의하에 (준)조세 형식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는 기본적인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낙후된 지방 의료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공공의대를 만들고 졸업생을 지방에서 의무 복무하게 하자는 발상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공공의대에 시민단체 추천으로 누구를 음서로 넣네 마네 하는 음흉한 의도를 빼고 보더라도, 정말이지 납득할 수 없다. 

이건 마치 주택가에 쓰레기 분리수거장을 만드는 대신 누구 한 명 찍어서 저 집 앞에는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버리자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사고다. 공공성을 달성하기 위한 비용을 더 쉽게, 더 만만하게, 더 확실히 전가할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내자는 소리다. 자칭 민주 진보 정권에서 이런 발상을 떠올렸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공공의료가 더 필요하면 수가를 조절하고 공공병원을 확충하는 식으로 대응하며, 늘어나는 비용에 대해서는 정권이 국민적 이해와 합의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는 조선이냐 대한민국이냐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다. 평소에는 세금을 잘도 뜯어가다가 외적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된 상비군 하나 굴리지 못해 ‘의병’에 의존하던 조선이 아니다. 박정희 정권의 의료보험 체계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전두환 정권의 사립 유치원 허용을 어떻게 바라보건,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고 지금과 같은 방식이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하물며 ‘별도의 의대를 만들어서 남들이 원치 않는 지방 근무를 강제하자’니, 현 집권 세력의 인식 수준은 임진왜란 시절에 더욱 가까운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다시 반복하자. 공공성은 공짜가 아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제는 좀 더 차분하고 정직하게,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에 대해 토론해야 할 때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신동아 2020년 10월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09-12

[노정태의 시사철]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노정태의 시사哲]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아무튼, 주말] 로버트 액설로드와 ‘협력의 진화'

일러스트=안병현
일러스트=안병현

“오늘 밤 여러분과 사회 실험을 해보겠다.” 강 위에 떠 있는 배 두 척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미치광이 악당 조커의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한 척에는 선량한 시민들, 다른 배에는 범죄자들이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두 배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실려 있다. 그리고 기폭 장치는 상대방의 배에서 가지고 있다. 내 목숨이 상대의 판단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조커는 조건을 제시한다. 상대편 배를 먼저 폭파하는 쪽은 살려준다. 하지만 둘 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자정을 넘긴다면 두 배 모두 폭파한다. 먼저 배신하는 쪽이 이익이다. 아니, 살아남으려면 배신해야만 한다. “누가 먼저 누를까? 하비가 잡아들인 악질 범죄자들? 아니면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 잘 선택해. 빨리 결정하라고. 상대가 먼저 누르면 후회해도 늦으니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표작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이다. 2008년작이지만 ‘다크나이트‘는 여전히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탄탄한 줄거리를 통해 배트맨 시리즈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시에 ‘죄수의 딜레마’와 ‘사회적 신뢰’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게임이론의 고전적 문제 중 하나다. 중범죄를 저지른 두 공범이 취조실에 따로 붙잡혀 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어버리면 중범죄로는 기소할 수 없고 경범죄로 2년형을 살게 된다. 둘 다 자백하면 각각 6년형이 예상된다. 경찰은 그들을 유혹한다. 네가 상대를 배신하면 너는 석방이고 자백하지 않은 상대는 10년형을 살게 된다고. 어떻게 해야 할까?

둘 다 입을 다물고 2년형을 받는 게 최선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이론을 통해 분석해보면 결과는 다르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건 나는 자백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자백했을 때 내가 받을 형량은 석방 혹은 징역 6년이 된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상대의 행동에 따라 징역 2년 혹은 10년이다. 징역 1년을 -1로 본다면 자백할 경우의 기대값은 -6인데, 자백하지 않으면 -12가 되는 것이다.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일단 자백을 해야 한다.

자백하는 것이 내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이 범죄자들은 언제나 자백한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면 징역 2년으로 끝났을 것을 징역 6년으로 늘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상대가 자백하여 징역 6년이 10년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 위험을 뒤집어쓰느니 자백하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 모두에게 차악의 결과를 낳는 상황, 그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이다.

앞서 말한 ‘다크나이트‘의 장면은 엄밀히 말해 죄수의 딜레마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조커가 두 배를 모두 폭발시킬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쪽은 선량한 시민, 다른 쪽은 범죄자가 타고 있다고 하니, 한쪽에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영화 속 시민들은 투표를 감행하여 396대 140으로 버튼을 누르자는 결정까지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나이트‘의 시민, 선원, 범죄자들은 기폭 장치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는다. 딜레마에 등장하는 두 죄수와 달리 서로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조커는 바로 그런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을 갈라놓은 후, 너는 착한 사람이고 저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그러니 남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속삭인다.

지난 8월 31일, 우리는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현실에 강림한 모습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 게시물 덕분이었다. 코로나 현장에서 고생한 의료진의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며, 간호사들만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의료진을 갈라놓고 간호사를 앞세워 의사들을 공격하려 든 것이다.

팩트부터 확인하자. 6월 25일 현재, 방역 현장에 뛰어든 자원봉사자는 총 3819명. 그 중 의사는 1790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563명, 임상병리사 등 기타 인력은 466명이었다. 숫자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수 아이유가 코로나 1차 파동 당시 의사협회에 방호복을 기부했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권은 늘 이랬다. 국민을 반으로 나누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물었다. 부동산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들 모두 공급을 늘리는 대신 다주택자와 1주택자를 가르고, 임대인과 임차인을 나눈 후, 너희들은 나쁘다고 손가락질 하는 식이었다. 청년 실업 문제도 그렇다.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자연스럽게 전체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항의가 빗발치자 팔자 좋게 취직 준비하는 취준생과 고생하는 비정규직 청년들을 또 나눈다. 우리가 국민이 아닌 죄수인가. 대체 왜 이런 딜레마를 강요하는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서로 믿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이다. 수학자, 생물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등이 모두 고민하던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 미시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였다. 그는 ‘협력의 진화‘에서 신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게임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된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상대를 믿는다. 상대가 신뢰를 돌려주면 계속 신뢰한다. 하지만 배신하면 다시는 협력하지 않는다. 이것을 ‘팃포탯 전략’이라 하는데, 게임의 실행 횟수가 누적될수록 팃포탯 전략은 기회주의적 배신자의 입지를 좁히고 상호 협력을 낳는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키도록 기준을 잡고 관리하는 강력한 국가가 문명 발전의 필수 요소인 이유다.

대한민국은 고담시가 아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이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한 줌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공감 능력을 지닌 시민의 힘으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자.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0/09/12/FUR77LEORREGTGR3X6FP5F6K7Q

2020-09-02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내 판단·생각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연애' 수작
부동산 정책도 공공의대도 정부가 하는 정신 조종 폭력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유명한 심리학 실험.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고백하면 승산이 높아진다. 안정된 곳에 있을 때와 달리 불안감으로 인해 가슴이 뛰고, 그 가슴 뛰는 것을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나온 청춘 연애물에는 남자 주인공이 친구들에게 깡패나 치한 흉내를 내게 한 후 자신이 그 악당을 쫓아내는 용사인 척 하다가 들켜 망신당하는 전개도 곧잘 등장했다. 불안하면 ‘내 편’을 찾고 쉽게 호감을 느끼며 의지하게 된다는 계산의 반영인 셈이다.

하지만 그딴 수작은 연애 시장에서 퇴출당한 지 오래다.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몰아가고,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며,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상대를 놀라게 하고 달래주는 것, 병 주고 약 주는 짓은 더 이상 연애의 기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정신 조종 폭력 행위인 것이다.

가스라이팅은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연극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정착시킨 표현이다.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그 작품에서, 남편은 아내가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도록 하여 정신적인 궁지로 몰아간다.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용어 자체는 이렇듯 학대당하는 여성에 대한 상담에서 비롯했지만, 가스라이팅의 범위는 남녀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 사이의 따돌림, 직장이나 군대 등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등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할 수도 있다. 스물세 번인지 몇 번인지 수도 없이 갈아엎는 문재인표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 정책 내놓았다가 분위기 안 좋으면 손바닥처럼 뒤집고, 특례에 예외에 유예 조치 따위를 허둥지둥 꺼내 든다. 이제는 공인중개사나 회계사도 뭐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에 파악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국민은 처음에 문재인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그저 서툴러서 그렇거니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많은 장관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김현미 장관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며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불안과 혼돈은 문재인 정권의 선의가 낳은 부작용이 아닐 수도 있구나. 국민이 부동산과 관련해 불안과 혼돈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선의’ 그 자체일 수도 있겠구나.

부동산 ‘패닉 바잉‘이 시작되고, 특히 30대 젊은이들이 ‘영끌’하여 집을 사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시장을 믿어서가 아니다. 문재인을 믿지 못해서다. 집값이 안정적으로 오를 것이라는 신뢰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요동칠지 알 수 없다는 불신이, 국민의 발걸음을 부동산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패닉 바잉에 나선 젊은 실수요자들을 향해 ‘다주택자 매물을 영끌해서 받아준다니 안타깝다’고 비아냥댄 김현미 장관의 발언도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가스라이팅의 교과서적 행동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의 모든 고위 인사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지금이라도 서울, 그것도 강남의 아파트를 사야 한다. 그걸 따라 하는 청년들에게 국토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빈정거리고 비웃는다. 졸지에 수억원의 빚을 진 30대로서는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효과다. 내 판단과 생각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내 인생의 결정권을 남에게 넘긴 채 그저 복종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 가재 붕어 게로 개천에 주저앉아, 저 위에서 선량한 손길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맥없이 기다리게 길들이는 것.

부동산 정책뿐일까? 정부는 코로나 2차 유행이라는 공포 속에서 공공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음서의대’를 만들어 시민단체 추천으로 의사 면허를 주겠다고 했다. 의사들은 코로나부터 잡자는데, 정부는 ‘전면 철회’라는 말을 절대 안 한다. 방역을 정치화하고 국민 건강을 해치는 쪽은 의사가 아니라 정부다. 하지만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은 정부에 있다. 국민과 의사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겠다고 덤벼들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누군가가 ‘나쁜 연애’ 하듯이 정치를 하고 있다. 소위 ‘문빠’들은 악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문프’가 멋져보인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국민 가스라이팅을 중단하라.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0/09/02/XQP3MTNQNBG5XDPGNUCGK3HAO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