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21

[북리뷰]페르세폴리스 1·2-해외파 이란 여성이 본 모국

페르세폴리스 1·2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김대중 옮김 새만화책·2만2천원

현지시간으로 4월 2일, 미국을 필두로 한 국제사회는 이란과의 핵협상을 타결했다. 이란은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간 부과되었던 경제제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다. 이란과 오랫동안 반목해온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 사우디아라비아뿐 아니라, 중동국가들과 뿌리 깊은 갈등상태인 이스라엘 등도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바야흐로 세계사적 전환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는 사건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이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이란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페르세폴리스>를 읽어야 할 이유다. 저자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오스트리아 유학을 거쳐, 다시 고국에 돌아간 후 프랑스로 건너가 정착한 여성이다. 그는 아트 슈피겔만의 걸작 그래픽노블 <쥐>를 읽고, ‘나도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이렇게 전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고국인 이란이 테러범을 지원하는 나라로만 취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동시에 그 이란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억압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마르잔의 눈높이에서 진행되는 이 그래픽노블은 그가 10살이던 1980년에서 출발한다. 1979년의 이란 혁명으로 인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이란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마르잔이 다니던 프랑스계 남녀공학 학교는 폐교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구식 복장을 입고 자유를 누리던 소녀들은 이제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두르고 종교교육을 받아야 한다. 저자의 부모는 모두 유복한 교양인이며, 그들은 세상이 바뀌었다 해도 자신들의 하나뿐인 딸에게 그 억압을 고스란히 느끼게 할 생각이 전혀 없는 좋은 부모였다. 유달리 반항심이 강하고 재능이 특출난 딸을 혁명과 전쟁의 혼란에서 구출해내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보냈다. 예측 가능하게도, 사춘기 10대 소녀는 유럽에서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자유의 맛을 알아버린 마르잔은 이란에서도 적응할 수 없고 소외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한다. 경제적 여건과 가정환경 등에서 마르잔 사트라피는 분명 평범한 이란 사람들과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독재가 심화되면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질 것을 은연중에 직감한다 한들, 딸을 데리고 3개월간 해외여행을 하는 것은 1980년의 이란 사람들 중 극히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였을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는가? 특히 그 억압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강요되는가? 오스트리아 유학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이란에 돌아온 마르지는, ‘집을 나서면서 베일을 제대로 썼는지 고민하고 있는 여자는 더 이상 자신의 발언의 자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게 됨’을 깨닫는다. 서구 친화적이었지만 비밀경찰에 의한 공포정치를 택했던 팔레비 국왕이 물러난 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일군의 여성들은 베일로 머리를 가리지 않을 자유를 위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스카프 아니면 몽둥이”뿐이었고, 남자들 역시 원하건 원치 않건 턱수염을 길러야만 하며 청바지를 입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이 사소한 자유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페르세폴리스>를 통해 우리는 이란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4131655111&code=116

2015-04-19

[별별시선]대통령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다. 동시에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한다. 한국뿐 아니라 대통령제를 택한 수많은 나라들의 헌법에 그렇게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세계 최초로 국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 때 논란이 있었던 대목이다. 누군가가 행정수반이면서 동시에 국가원수라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계몽주의자들과 미국 헌법의 작성자들은 입법권과 사법권을 독립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지만, ‘민주주의임에도 선거로 왕을 뽑는다’는 대통령제의 근본적 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대통령제만의 결함이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나름의 방식으로 국가원수를 선출하거나, 세습된 국왕을 국가원수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1세기에도, 모든 국가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단 한 사람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우리의 경우, 국가원수로서의 대통령이다.

지난 4월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인 바로 그날, 박근혜는 팽목항에 들러 문자 그대로 ‘쓱 둘러본’ 후 다시 차량에 탑승하여 청와대로 발길을 옮겼다. 만약 청와대가 세월호 피해자 및 유족들과 사전에 성의껏 만남을 갖고 일정을 조율했다면, 팽목항 분향소가 임시 폐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고, 먼 길을 달려온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모든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는, 혹은 박근혜를 ‘모시는’ 청와대는, 그런 결과를 애써 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단둘이 만났고, ‘국정 현안’을 논의한 후, 중남미 해외 순방에 나섰다.

지금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해외 순방 중이다.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원수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국가의 대표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할 자격을 지닌 단 한 사람이다. 거대한 참사의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그날 이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국민들을 진정시켜야 한다. 국민이 대한민국에 손가락질하면 자신의 왼뺨과 오른뺨을 모두 대주어야 할 사람이다. 설령 사고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대통령의 책임이 전혀 없더라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대통령은 현재 중남미 순방 중이다. 그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임시로 권한을 대행하게 될 국무총리는 현재 비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족들은 겹겹이 버스로 차벽을 세워둔 전경들에게 가로막힌다. 조용하고 평화롭게 희생자를 추모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시끄러운 경찰의 경고 방송과 물대포뿐이다.

이 국면에서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은 현장에서 물대포를 같이 맞는 게 아니다. 그 누구도 물대포를 맞지 않고 추모 행사를 평화적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와의 입장에서 균형자 노릇을 해야 한다. 청와대로 흥분한 시민이 뛰어들어올지 모른다고 겁내는 정부와, 캡사이신 최루액에 눈물 흘리는 국민들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과 정치적 명운을 걸고 이들을 다독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진정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감을 느끼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박근혜가 내팽개치고 가버린 국가원수로서의 역할을 대신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떠났고, 국무총리가 검찰의 수사 대상인 지금, 상징적 군주이며 국민의 구심점인 ‘대통령’ 자리는 사실상 비어 있다. 이럴 때 어떤 정치인이 정부, 경찰, 세월호 유족, 시민들을 설득해 광화문에서 평화적으로 추모 행사가 진행되는 장면을 이끌어낸다고 가정해보자. 국민들은 아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진정한 ‘대통령’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김무성과 유승민, 문재인, 박원순 등에게 모두 열려 있는 정치적 기회다. 세월호 참사 이후 표류하는 대한민국은 그런 선장을, 책임지고 비난을 감수하며 국민을 하나로 묶어줄 대통령을 필요로 하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192042255&code=990100&s_code=ao122

2015-04-09

유승민이 옳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연설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여권에서는 찬반 양론이 갈라진 반면, 야권에서는 대체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분위기다. 한편 야권 혹은 진보 지지 성향의 네티즌들로부터는 '그건 어차피 말 뿐이다, 좋은 말 하는 걸로만 치면 박근혜야말로 대단한 진보다'라는 식의 비아냥이 들려오기도 한다. 요컨대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대응이야말로 이번 유승민 연설에 대해 나올 수 있는 가장 나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정치는 결국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지키지 못한,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 하더라도, 어떤 약속을 어떻게 하고 왜 못 지키느냐에 따라 정치인과 정치 세력의 운명이 좌우된다. '그건 그냥 말뿐이다'라는 반응은 값싼 정치 회의주의에 다름 아니다. 중요한 건 어떤 정치인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느냐다.

45분에 달하는 연설에 다양한 논점이 있지만, 오늘은 그 중에서 세금과 복지에 대한 부분만을 살펴보자. 그 대목을 통해 우리는 유승민의 연설이 왜 이렇게 큰 반향을 얻고 있는지, 반대로 비슷한 이야기를 해왔다고 여겨지는 야권은 왜 그만한 호응을 얻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中부담-中복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부담과 복지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평균 정도 수준을 장기적 목표로 정하자는 의미입니다. (중략) 中부담-中복지를 목표로 나아가려면 세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합니다. 무슨 세금을 누구로부터 얼마나 더 거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합의해야 합니다. 
증세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난 3년간 22.2조원의 세수부족을 보면서 증세도, 복지조정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부담은 결국 국채발행을 통해서 미래세대에게 빚을 떠넘기는 비겁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 그리고 소득과 자산이 있는 곳에 세금이 있다는 보편적인 원칙까지 같이 고려하면서 세금에 대한 합의에 노력해야 합니다.

결국 유승민은 중부담-중복지를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증세"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단 증세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부자증세, 법인세 인상 혹은 기존 감면분 철회, 자산세'등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승민의 연설이 야권의 '부자증세'론과 달라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은 국민 전체가 복지 부담을 져야 하며, 그것은 결국 지금보다 높아진 세금이 될 수밖에 없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반면 야권은 어떤가? '서민 여러분, 부자 증세가 이루어진다 해도, 아무튼 여러분도 세금을 더 내셔야 합니다'라는 진실을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는가?

4월 8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연설에 이어, 4월 9일에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대표연설이 있었다. 그 내용 중, 앞서 인용한 유승민의 연설에 대응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집중된 조세감면 제도를 과감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국세감면액이 2013년 30조에 달합니다. 조세감면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돌아가 조세체계의 공평성과 투명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고용 증가,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 전환, 비정규직 차별 해소 등에 대한 지원책으로 조세감면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소득세는 최고세율 구간 설정을 높이고 누진율도 높여야 합니다. 금융과 자본소득 및 재산소득에 의한 고소득에 대해서도 적절한 세금을 부과해야 합니다. 유리지갑이라는 근로소득과 비교해 공평한 소득세 부과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민 중산층 증세는 자제하여야 합니다. 더 이상 서민 중산층의 유리지갑을 털어서 세수를 메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문재인이 언급하다시피,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깎아준 법인세율만 되돌려 놔도, 연 4조6000억원의 추가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연 4조6천억원이 과연 큰 돈인가? 지난 3년간 부족한 세수만 해도 22.2조원이었다. 법인세율을 원상복귀한다 하더라도 약 10조원 가량이 모자란다. 그 돈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물론 부자증세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조세감면 혜택이 대부분 대기업과 고소득층에 돌아가 조세체계의 공평성과 투명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는 문재인의 지적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서구식 복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미국이나 일본 수준의 사회 복지를 이루려면, 우리는 지금보다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들 뿐 아니라 '서민'들에게도, 증세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전체 국가 인구는 노령화되고 있고, 경제 활동 인구는 줄어들며, 돈 버는 사람은 줄어드는데 돈 써야 할 일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경제적 현실이다. 그리고 유승민과 달리 문재인은, '서민증세'를 전혀 하지 않고도 현재 수준의 복지를 유지하거나 그보다 더 복지 지출을 늘릴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올해 연말정산 파동에 대한 문재인의 언급은 보는 이를 더욱 답답하게 한다. 물론 "국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세 부담이 크게 느는데도 "세율은 건드리지 않았으니 증세는 아니다"라는 정직하지 못한 주장"이었다는 그의 지적은 매우 정당하다. 그렇다면 그걸 잘 아는 문재인은, 왜 '월급쟁이 증세' 없이 복지 유지는 불가능하다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정직한 태도를 박근혜 정부에게 요구한다면, 스스로도 정직해야 하지 않는가?

연말정산 방식을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꾼 것은 대단히 정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소득공제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유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액공제로 전환함으로써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덜 돌려받고, 낮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이런 경우,

실제로 과세표준 7000만 원인 직장인이 3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했을 경우 소득공제 방식으로는 24%의 소득세율이 적용돼 72만 원을 환급받을 수 있었지만 세액공제 방식으로는 15%의 공제율이 적용돼 45만 원만 환급받는다. 반면 과세표준 1200만 원인 직장인이 3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하면 지금까지는 18만 원을 환급받았지만 이번 연말정산에서는 45만 원을 환급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은 '서민증세 반대'를 기치로 삼고 세액공제로 전환된 연말정산에 대해 끝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 기조는 그가 대표연설을 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아니 세상에, 과세표준 7천만원 이상인 직장인의 세 부담을 늘리지 않으면서, 어떻게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단 말인가? 과세표준 7천만원인 직장인이 '고소득층'이 아니면 대체 누가 '고소득층'이란 말인가?

문재인의 연설과 유승민의 연설은 같은 달을 가리키는 다른 손가락이다. 하지만 유승민의 손가락이 훨씬 더 곧고, 용기 있게, 그 달을 가리고 있는 구름까지 가리키고 있다. 우리는 증세를 피할 수 없다. 적절히 국민의 세 부담을 높히고 그것을 통해 소득재분배를 이루어내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문재인은 바로 그 점에서, 국민에게 사실을 사실로 전하고 설득할 용기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부자 뿐 아니라 서민들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그래야 복지를 더 할 수 있고, 그 이전에 지금 수준의 복지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다. 유승민은 그 사실을 말했다. 문재인은 진실을 회피하고 있다. 두 연설 전문을 다 읽어본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윈스턴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연설 문구를 떠올려보자.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전쟁중의 연설이긴 하나, 정치가 왜 '말'로 하는 일인지, 그리고 정치인의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곱씹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증세 없는 복지'가 거짓말이라면, '서민증세 없이 부자증세만으로 복지' 역시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의 정치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증세와, 그 증세에 따르는 복지일 뿐, '서민증세 없이 부자증세만으로 보편복지'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정치권은 국민들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 서민증세 없이는 서민복지도 없다. 정치인은 국민들에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라도, 그것을 가장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고 보편적인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복지가 필요하다면 증세를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유승민은 증세를 이야기한 반면, 문재인은 자꾸 중요한 대목에서 말꼬리를 흐리고 있다. 두 사람의 연설이 불러오는 파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유승민이 옳다.

2015-04-07

[북리뷰]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 - 싱가포르가 이룬 부와 교육의 비밀…인공낙원의 다양한 면모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싱가포르가 이룬 부와 교육의 비밀
이순미 지음·리수·1만3900원

“가난한 어촌 마을을 세계적인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가 사망한 후 언론에 수도 없이 오르내린 관용어구다. 그 나라의 지도층이 얼마나 청렴결백한지, 거리가 얼마나 깨끗한지, 기타 등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어떤 ‘이미지’들이 그 뒤를 잇는다.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는 싱가포르에 대한 간접경험을 제공하는 책이다.

저자 이순미는 싱가포르에 주재원으로 근무한 남편과 함께 4년을 그 나라에서 보냈다. 이 책의 눈높이는 저자 본인의 그것, 다시 말해 중산층 가정의 주부 겸 파트타임으로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하는 지식인 여성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저자가 싱가포르의 다양한 면모를 관찰하고, 그 감상을 솔직하게 적어놓은 덕분에, 우리는 최근 언론에서 호들갑스럽게 칭송하는 ‘그 싱가포르’의 이면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싱가포르를 표상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면 그것은 ‘유리문’이다. “싱가포르 창이공항 출입구의 유리문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여러 번 방문했다고 해도 싱가포르를 안다고 할 수 없다.”(6쪽) 그 유리문을 넘어서면 숨이 턱 막히는 열대의 습한 공기와 언제라도 벌금을 매기기 위해 사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비밀경찰의 눈초리와 짐짝처럼 트럭에 실려다니며 저임금 노동을 제공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땀냄새가 가득하다. 유리문 안의 싱가포르는 너무 강하게 틀어놓는 에어컨 때문에 종종 스웨터나 카디건을 걸쳐야만 하는 인공낙원이다. 그 밖은 한밤에도 기온이 20도를 웃도는 열대성 기후다. 리콴유 전 총리가 싱가포르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에어컨을 꼽았다는 것은 이제 국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아닌가.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싱가포르는 그 에어컨을 쬐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칼 같이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세 등급의 우열반이 정해지면서 시험에 의한 걸러내기(streaming out) 제도가 시작”되며, “초등교육을 마칠 때까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싱가포르 땅에서는 중등교육조차 받을 수 없다.”(106쪽) 학교 성적의 차이는 곧 ‘인생 등급’이 된다. “정규 코스에 합류한 우수 학생들이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으로 스카우트되면 특별관리를 받은 뒤 30대에 국장을 하고 40대에 장관을 하는 초고속 승진”을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이미 ‘걸러진’ 학생들에게는 무더위 속을 헤매고 다니는 일꾼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중산층 이상이 사는 맨션, 평균적인 사람들이 거주하는 국가 소유 아파트는 모두 그러한 ‘인간 등급’에 맞춰져 있고, 그 속에서도 ‘유리벽’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산층 이상 고학력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주는 존재인 ‘메이드’(maid)가 사용하는 엘리베이터와 통로는 거주민의 그것과 겹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에서 유일하게 에어컨이 없는 곳이 바로 부엌과 메이드의 거처”(111쪽)다. 그 “거처는 집 뒤쪽에 있는 창고 바닥”(113쪽)이다. 민주주의라고 스스로 주장하지만, 사실상 뚜렷한 신분제 국가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잘 짜여진 인공낙원은 그 속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의 땀과 눈물로 간신히 유지될 수밖에 없다. 저자의 의도와는 약간 어긋나게 <유리벽 안에서 행복한 나라>를 읽으며, 우리는 싱가포르를 보다 입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3301549131&code=116

2015-04-02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

1.

'이것은 또 다른 마녀사냥 아닌가?' 이른바 'KBS 일베 수습'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4월 1일부로 그가 정직원이 되어버린 후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일베라는 이유로 입사한 회사에서 잘리는 게 말이 되는가'라는 식의 논의가 드물게 관찰된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안 협회장이 언급한 수습기자가 올린 글은 '생리휴가를 가고 싶은 여자는 직장 여자 상사에게 사용 당일 착용한 생리대를 제출하거나 사진 자료를 남겨서 감사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핫팬츠나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닌 여자들은 공연음란죄로 처벌해야 된다', '밖에서 몸을 까고 다니는 뭐 여자들은 호텔가서 한 번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라는 내용이다. http://m.segye.com/content/html/2015/04/01/20150401006204.html

이러한 가치관에 KBS라는 조직이 동조하거나,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안주식 KBS PD협회장은 "이 친구가 올렸다는 반성문은 사내 공개 게시판에 올라온 적이 없다. 반성문도 자신의 과거에 썼던 표현에 대해서 '조금 과했다'는 아주 가벼운 반성문이다. 구체적인 반성문은 아니었다고 건너서 들었다. 일종의 제스처였을 뿐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반성문을 썼느냐?'고 물어보면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게 우리들 입장이다"고 밝혔다.

자, 이러한 '일베 기자' 논란이, KBS의 입사시험에 있어서 '사상검증'을 강화시킬 것이며, 결국 방향만 다를 뿐 또 하나의 '마녀사냥'을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과연 그 우려는 타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베에 혐오발언을 해놓고, 그걸 또 걸린 사람이 입사전형을 통과했다면, 그 혐오발언이 해당 채용 기관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 한, 어떤 식으로건 신입 선발 시스템에 오류가 있다는 뜻이다. 그걸 정정하는 것이 '사상검증'이 안 되도록 해야 하겠으나, KBS가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방식에 어떤 맹점이 있었고, 그 맹점을 타고 인격의 결함이 밝혀진 구성원이 입사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가 드러난 시점에 이미 '이 건으로 인해 KBS 입사시험에 사상검증이 포함될까 우려된다'는 말을 하는 건, 너무 편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아,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물론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제는 그런 말을 할 시점이 아니다.

지금은 좀 더 보편적이고, 반박 불가능한 가치에 기반하여 논의를 펼쳐나가야 한다. 남들이 다 한 이야기다. '일베를 했다'로 대중의 이목이 쏠렸으면, '생리대 인증' 같은 구체적 여혐 발언의 위험성을 지목하는 식으로 말이다.


2.

문제는 일부 '진보'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일베'라는 추상적인 기호에는 반대하면서, 구체적인 여성 혐오나 호남 차별 등에 대해, 실은 그리 큰 문제 의식을 절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베'라는 가짜 범주를 넘어서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형식이 내용이다.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운 내용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베에 글을 쓰면 일베 형식을 따라야 하고, 일베 형식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근간으로 삼는다. 그 사이트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다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낙인찍기 = 집단주의 = 히틀러 = 스탈린 = 나빠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일베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찍는 낙인'이 현존함을 인정하며, 동시에 '일베라는 낙인'이 어떤 사회적 기능을 하고 있으며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찍힌다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거 나 알아 나쁜거야 일베 하는 애들 봤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사전적 정의상 '낙인찍기'에 속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낙인찍기'라고 해서 그냥 '악'이라고만 하지 말고, 질문을 좀 나눠보자.

(1) 그 낙인이 과연 부당한 낙인인가?

(2) '일베 하는 애'가 가치관을 갱신하는데 그 낙인이 도움이 되지 않나?

(3) 제3자들에게도 유익한가?

첫째, 일베에서 활발한 사용자 노릇을 한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 그 사이트에서 통용되는 보편적 화법인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를 자연스럽게 구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베 하는 놈'이라는 낙인이 '나쁜' 낙인이라면, 그것은 그 사이트의 언어 자체에 문제가 있고, 사용자가 그 속에서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노력하여 벗어던질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일베는 나쁘다'는 낙인은, 당연히 '일베'를 하면서 본인도 모르게 혐오발언과 차별적 사고방식에 물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혐오와 호남혐오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비공식적'인 곳에서 늘 그래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이 공개적으로 문제시되고 있으며, 그 모든 문제의식을 포괄하는 단어가 바로 '일베'가 되었다. 여기서 '너는 일베'라는 말이, 그저 '딱지 붙이기'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나는 일베를 했다, 나쁘다'라는 죄책감을 느낄 때, 비로소 스스로의 행동을 다잡고 보다 여성과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바람직한 시민으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일베'에 무슨 미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하다. 여성차별과 호남차별이다. 그것을 공개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보편적 인권의 가치를 점점 도외시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악'을 지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그 무엇도 '악'이 아니라면, '선'을 지킬 수도 없다. 일베에는 이론의 여지 없이 '악'으로 취급될만한 여성혐오와 호남혐오가 득시글거리는데, 대체 무슨 '선'이 있는가?

여성혐오와 호남혐오. 그 거대한 악을 포괄하는 이름을 '일베'라고 하는 것, 그래서 '타자화'의 효과를 불러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선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비난받을 소리를 하며 즐기고,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뭉친 자들을, 왜 '악'이라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가?


3.

당연히 '일베가 안 되면, 오유도 잘라야 하는 거 아냐?' 같은 소리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리가 나올까봐 근심하는 행위가 가능한 시점은 진작에 지났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되었다면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답을 말하자면, 일베가 아니라 오유를 하더라도,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일삼고 있다면 당연히 문제시될 수 있다. 특히 민간 기업도 아니라 국민 전체의 세계 인식과 언어 생활 등을 책임지는 공영방송 KBS의 기자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사안에서 굳이 '일베'라는 이름을 빼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그 과장된 결벽성, 그것은 양비론으로 향하는 미끄러운 비탈길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묻자. '낙인찍기'는 나쁜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사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일단 낙인을 찍어야만 한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을 겪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가 요구되는데, 그러한 자기 객관화는 스스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범주를 찾아내어 붙이고, 그 라벨을 갱신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낙인찍기가 자기 객관화로 향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자기 객관화를 한다면 스스로에게 찍혀있는 낙인을 응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남자다. 그런데 내가 '한국 남자'라는 범주에 속한다고 흔히 여겨지는 이러저러한 악덕을 피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런 범주가 있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에 거기에 속하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근본적으로는 탈피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나는 한국 남자 아니거든?' 이라고 우겨봐야,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나 자신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된다.

하물며 '일베 회원'이라는 것은 벗어던질 수 있는 정체성이다. '나 아이디 지웠어요' 뭐 이런 인증하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베 회원'이라는 범주가 갖는 불명예스러운 요소들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노력한다면, 나중에는 훨씬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너 일베 하냐?' 같은 말을 손쉽게 '폭력'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그 점에서, 오히려 본인들이 지향하는 '일베 회원의 정신적 교화'를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기독교적인 참회와 속죄가 가능할 게 아닌가.


4.

지금 한국 사회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평가와 반성이 끝난 것 같고, '여성가족부'도 있으니 페미니즘은 완성된 것 같고, 그래서 다들 알아서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쓰면 될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도덕적으로, 또 법적으로 제재되어야 할 수많은 사안들이 존재하며, 그 각각은 너와 나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죄책감을 통해 유지된다.

'일베'를 무조건 타자화하지 말라는 속 편한 소리들을 보면, 과연 그들은 한국 사회의 진보를 원하는 것인지, 혹은 더 이상의 퇴보를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 우리가 '일베의 타자화'를 걱정할 때인가? 그들로 인해 타자화되고 있는 수많은 소수자들은 걱정되지 않는가?

'일베에서 '생리대 인증' 같은 소리 하다 걸려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한국 사회에 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공공연하게 여성 혐오 발언을 유포하던 일베 회원이 공영방송 KBS의 기자직을 수행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잘라라, 일베하는 그 수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