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2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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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공부, 이럴 거면 하지 마라


요즘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남자들이 늘어나는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아주 원론적으로 보자면 누가 됐건 자신이 모르던 것을 배우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남자'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보다 좀 더 복잡한 맥락 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집어든 사람, 특히 남자 독자라면, 아마도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책에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라는 제목을 단 글이 한 꼭지 실려있다는 것은 일종의 독자 기만, 사기, 배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본인이 남자가 아니지만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던, 혹은 내용을 검토해본 후 자신이 아는 다른 남자에게 권해주고자 하는 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다. 몇 가지 조건이 먼저 갖춰지지 않는 한,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이 글은 그 몇 가지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늘과 쑥, 그리고 페미니즘


단군 신화를 떠올려보자. 환웅은 일단 호랑이와 곰에게 마늘과 쑥을 100일간 먹인 후, 그 중 그 고통의 시간을 참고 견뎌낸 곰이 웅녀로 변신하자 결혼을 했다. '있는 그대로의 호랑이', '꾸밈과 가식 없는 곰'은 포용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해도 되는 사람인가? 남자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만큼 최소한의 성숙함과 자의식을 갖추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된다면, 이제 마늘과 쑥을 먹어보자.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여성들이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때, 그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후 자연스러운 태도로 다음 문장을 발화하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꼭 "아, 그렇구나"가 아니어도 된다. 상대가 손윗사람이면 적당한 존댓말 표현으로 바꾸고, 손아랫사람이면 정중한 느낌을 잃지 않는 평어체로 바꿔서 말해보자. 핵심은 상대방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다(단, 학교 선생님이나 어머니, 할머니처럼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기만 해도 상대방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되는 상대는 논외로 한다). 아니,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고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마늘이다. 100일간 먹어보도록 하자.

장난하는 게 아니다. 많은 남자들이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 상대가 여성임을 본인이 알고 있을 경우, 그 상대방의 지적 수준이나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 등과 무관하게, 남자는 자기가 설명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고 부른다. 맨스플레인을 끊고 여자인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그것이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을 얻기 위한 첫 단계인 것이다.


100일간 맨스플레인 끊어보기


여자들의 말을 끊지 말라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페미니즘 공부의 첫 단추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의 '한국 남자'가 보편적 차원에서의 '사람'으로 진화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말을 끊는 남자,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얕잡아보면서 그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맨스플레인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최소한 빨간색 초록색 신호등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맨스플레인이란 남자를 뜻하는 man과 설명한다는 뜻의 explain을 합성한 것으로, 『옥스포드 사전』의 온라인판에 정식으로 수록되어 있는 단어이기도 하다. 리베카 솔닛의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표제작인 "남자들은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영감을 받아 태어난 그 단어는, 일상화된 여성혐오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주는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다. 솔닛의 책을 펼쳐보자.

그는 자신이 파티에서 겪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에드워드 마이브리지라는 19세기의 사진가가 있다. 달려가는 말의 모습을 연속 촬영한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사진의 발전 뿐 아니라 영화의 탄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리베카 솔닛은 바로 그 마이브리지에 대한 책을 한 권 썼고, 《뉴욕 타임스》의 서평란에 자신의 책이 소개되어 흐뭇해하던 참에,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다지 내키지 않는 파티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솔닛은 한 부유하고 나이 많은 남자와 대화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내가 쓴 예닐곱권의 책들이 다룬 주제는 상당히 다채로웠지만, 나는 2003년 그해 여름에 나온 최신작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림자의 강: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와 기술의 서부시대』(River of Shadows: Eadweard Muybridge and the Technological Wild West)라는 책으로, 시공간의 소멸과 일상의 산업화를 다룬 내용이었다.
내가 마이브리지를 언급하자마자 그가 내 말을 잘랐다.
"올해 마이브리지에 관해서 아주 중요한 책이 나왔다는 거 압니까?"[1]

그 남자는 솔닛에게 무슨 책을 썼는지 "친구의 일곱살 난 아이에게 플루트를 얼마나 배웠는지 이야기해보라고 구슬리는 사람처럼"[2] 물어보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는 이름인 에드워드 마이브리지가 나오자 곧장 솔닛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는 당연히 자기가 상대보다 더 잘 안다는 투로, 올해 나온 아주 중요한 책의 존재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문제는 그 책이 바로 솔닛의 책이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남자는 솔닛에게 '당신이 쓴 책에 대해 말해보라'고 했으니 말이다. 솔닛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자신이 책을 쓴 것들이다. 게다가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에 대한 책이 그렇게 자주 출간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올해 나온 아주 중요한 책은 바로 내 앞의 이 여자가 쓴 책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러나 그 남자는 이렇게 상식적인 사고를 전혀 하지 못하고, 속담을 빌어 표현하자면 뻔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고 돼지 앞에서 코를 뒤집고 있었다. 보다 못한 솔닛의 친구가 끼어들어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이 친구입니다'라고 몇 차례 가르쳐 주었지만 그 남자의 뇌는 그 정보의 수용을 단호하게 거부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말을 계속할 뿐이었다. 쌜리가 "그게 바로 이 친구 책이라구요"를 세번인가 네번쯤 말한 뒤에야 그는 말귀를 알아들었고, 그 즉시 꼭 19세기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알고 보니 그가 직접 읽은 것은 아니고 몇달 전에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아주 중요한 책의 저자가 나란 사실은 깔끔한 범주들로 분류되는 그의 세상을 몹시 교란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아주 잠깐. 그러고는 이내 다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여자인 우리는 조신하게도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곳까지 벗어난 뒤에야 웃음을 터뜨렸고, 한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3]

자신의 눈 앞에 바로 그 중요한 책, 본인은 《뉴욕 타임스 북리뷰》에서 서평만 읽었을 뿐인 그 책의 저자가 서 있었고, 그 사실을 알려주기까지 했음에도 그 남자는 끝내 리베카 솔닛을 가르치려 들다가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더 끔찍한 것은 본인이 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거나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한 후 솔닛은 이렇게 말한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4]

남자는 무슨 말도 못 하나?


남성 독자의 불만이 들려오는 것 같다. 이 사소한 에피소드와 그로부터 영감을 얻은 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냥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일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까? 이건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전문가가 전문가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하다가 된통 당하는 그런 이야기일 뿐 성별과는 무관한 일 아닌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이 한국 사회에 소개된 후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성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 대 무식, 혹은 잘 모르면서 용감한 사람과 잘 알면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런 이들에게 맨스플레인이란 불필요한 성별 갈등을 부추기는 잘못된 개념일 뿐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남자들은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이 한국에 전래된 후, '우먼스플레인'도 있다는 둥,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남성과 여성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둥, 온갖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하는 남자들. 여기에 바로 문제의 핵심이 있다. 왜냐하면 맨스플레인이란 '남자들은 여자들이 하는 말을 동등한 인간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향해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제시할 때, 남자들이 그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면, 그들은 그러한 반응을 통해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맨스플레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고, 아니 차라리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그런 실수를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오지 않았다'는 여자들의 항변을 부정하고 드는데, 더 이상 여자들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내가 방금 설명한 내용을 리베카 솔닛의 표현으로 다시 한 번 들어보자.

어떤 남자들은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것은 사실 젠더화된 현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대개 여자들은 지적했다. 여자들이 제 입으로 직접 겪는다고 말한 경험을 기각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우긴다는 점에서, 그 남자들이야말로 내가 그들이 종종 그런다고 말한 바로 그 방식으로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셈이라고. (확실히 밝혀두는데, 여자들도 이따금 남자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젠더 간 엄청난 힘의 격차가 악랄한 형태로 표출된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거니와, 젠더의 사회적 작동방식에 드러나는 거시적 패턴을 반영한 현상도 아니다.)[5]

그러므로 '남자들은 그저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르치려 든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이 책뿐 아니라 그 어떤 페미니즘 서적도 읽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배움은 불가능하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등 모든 인류의 성현들이 한번씩은 비슷하게라도 이야기한 진리 아닌가. 그런데 적잖은, 어쩌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자신들이 여자들의 말을 단지 상대방이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낮잡아 본다는 사실조차 모르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이 과연 '여자들의, 여자들을 위한, 여자들의 사상'인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 있을까?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기특한 결심을 한 남자는 반드시 '경청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그리고 그 훈련은, 남자로 태어나고 자란 모든 사람이, 평생토록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100일간 먹어야 하는 마늘의 주 성분이다. 여자들의 말을 자르지 않고, 내가 상대보다 잘 알 것이라는 식으로 지레 넘겨짚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것 말이다.

여자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남자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말은 본인의 성별 때문에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여자들은 참고, 포기하고, 스스로 분노를 삭히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곧 여성 억압의 역사이며, 그것은 여성의 발언권에 대한 억압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해보자.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실로 '인간적인 삶'의 거의 모든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며 우리는 그 집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동물과 다르게 인간은 언어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고 지식을 주고받으며 감정적 교류를 한다.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몸을 부비고 따스한 눈빛을 주고받는 것 정도의 교감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충분히 벌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고도로 훈련된 침팬지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인간 외의 그 어떤 동물과도 '할 말이 있으니까 방과 후에 학교 옥상에서 만나자'며 러브레터를 주고받을 수 없다. 언어는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고, 특별하게 하며, 그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거의 모든 것이다.

신체 장기 중 하나인 성대를 울려 음성 언어를 전달하는 협소한 행위를 넘어서 '말하다'의 의미를 확장해보면 그 중요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단적인 예로, 투표권이란 무엇인가? 유권자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의사를 말할 수 있는 권리다. 단, 그 말하기의 방식이 객관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바로 그 투표권을 얻기 위해 19세기 말 영국의 서프라제트들은 우체통을 폭파하고 골프장의 잔디를 황산으로 태워 죽였으며 유리창을 깨고 심지어 건물을 폭파하기도 했다. '나는 이 후보를 지지한다'라는, 오늘날 우리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그 의사 표현의 권리를 위해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서 경찰에 신고를 한다고 해보자. 상식적인 경우라면 경찰은 당신의 말을 경청할 것이고, 그 증언에 기반하여 용의자를 특정하고 수사에 착수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남자들'에게는, 이런 '공적인 차원에서의 말하기'가 무시당하고 묵살당하지 않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다.

예컨대 일명 '오원춘 사건'을 떠올려보자. 피해자는 성폭행을 당하는 와중에도 112에 신고하고 자신의 위치와 상황을 정확히 밝혔지만, 전화를 받던 경찰들은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여보세요, 주소 다시 한 번만 알려주세요." "여보세요, 주소가 어떻게 되죠?" 같은 질문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던 경찰들은, 심지어 "아는 사람인데, 남자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부부싸움 같은데"라고 자기들끼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피해자가 살해당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말이다.

'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경찰들은 듣지 않았다. 소쉬르의 구분법을 빌자면, 시니피앙은 전달되었지만 시니피에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인지 똑똑히 알아들었으면서도 그것을 '말'로서 존중하며 인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있고, 살해 위협에 처한 여성의 말은, 사람 말처럼 들려오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잘못된 대응이 이루어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 여자가 부부싸움을 하고 있을 뿐인데 경찰에 신고해 '괜한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지, 경찰이 의심하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했을까?

더 끔찍한 것은 그 경찰들이 전화를 통해 전해오는 폭력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면서도 '부부싸움'을 떠올리고 입 밖에 꺼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고통을 당하는 소리, 가해자가 분노에 차서 내뱉는 소리,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테이프를 찢는 소리 등이 모두 112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극단적 폭력을, 경찰은 '부부싸움'이라고 뭉뚱그리고, 자기들끼리 안심하기 위해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게 '부부싸움'이었다면 어떤 남편이 부인을 살해하거나 심각하게 구타하는 상황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음에도 말이다.

세상이 여자들의 말을 쉽사리 묵살하고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건 이런 뜻이다. 강간을 당해서 신고를 해도 '네가 먼저 꼬리친 게 아니냐'고 경찰이 되묻는다. 고장난 보일러를 수리하기 위해 기사를 부르면 '집 주인분 안 계세요?'라고 물어본다. 전화해서 부른 사람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진짜 집 주인'이 아니라고 단정짓는 것이다. 택시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상황들은 또 어떠한가. 여자들의 말이 무시당하는 세상은, 여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지워지고 있는 곳, 다시 말해 생명과 안전이 직접적으로 위협당하는 곳이다.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페미니즘을 공부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구체적인 여성의 경험들을 엮어 만들어낸 다양한 사고 체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한다. 남자가 경험하는 세상과 여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때로는 흡사하겠지만 많은 경우 심각하게 다르다. 그러니,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무시해 왔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납득하지도 못하는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할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지금 모든 여자들의 말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어떤 여자들은 112에 허위 신고를 할 것이고, 어떤 여자는 남자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흉계를 꾸밀 수도 있다. 어떤 여자는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어떤 여자는 본의 아니게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들의 경우와 달리, 모든 여자들은 자신의 발언이 공적으로, 또 사적으로 평가절하당하고 무시당하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들,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자 하는 남자들은, 일상의 영역에서 여성의 발언을 '일단' 긍정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물론 계약서를 쓴다거나 범죄 피의자를 심문하거나 변호사로서 이혼 소송 당사자와 상담하거나 하는 중이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요구되는 직업적 상황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 지금 나는 일상적으로 만나고 대화하는 여성들과의 대화 속에서 실천해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숨쉬듯 자연스럽게 누려왔던 '남자인 내가 옳고 여자인 네가 틀렸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보자.

가령 '아까 택시 타고 오는데 기사 아저씨가 현금으로 계산 안 했다고 욕했어'라고 말하는 주변의 여성에게, '뭐야, 나는 그런 일 겪은 적 없는데, 그건 택시 기사에 대한 너의 편견 아니야?'라는 식으로 되묻거나 쏘아붙이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까지만, 동의하는 표정으로, 대답해보자. 그런 반응을 돌려주는 것만으로도 남자인 당신은 '평범한 남자'와는 사뭇 다른 존재로 취급될 가능성이 크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 그렇구나'라는 담담한 동의의 표현. 상대가 여성일 때, 일단 그렇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표현을 하는 남자가 되는 연습. 그렇게 마늘을 먹고 있는 남자라면, 이제 쑥을 먹어볼 차례다.


세상에 뿌려진 폭력만큼


남자인 당신과 어떤 여성이 있다고 해보자. 당신에 대한 그 여성의 인간적 신뢰도를 가늠해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지표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만약 그가 당신에게, 본인이 겪었던 성추행이나 성폭력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면, 당신은 적어도 지나가는 남자1보다는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종 SNS를 통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자신이 겪었던 성폭력을 이야기하는 경우라거나, 가해자를 고발하기 위해 성폭력 피해를 공개하는 것을 당신이 엿듣는다거나, 그런 경우는 모두 제외한다. 오직 사적인 대화로만 범위를 좁힌다. 남자인 당신은 주변의 여자가 겪었던 성폭력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어보았는가?

또 어떤 남자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주변에는 성폭력이나 성추행을 겪은 사람이 없다'라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에게 본인의 성폭력 경험을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는가'라는 것은 굉장히 좋은 지표가 된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단 한 번의 성추행도 당하지 않고, 성차별을 경험해본 적도 없는, 그런 여자는 말하자면 유니콘과도 같다. 어딘가에 있다고도 하지만 그 실체를 목격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리고 내가 아는 여자들이 아는 여자들 중에는, 전혀 없었다. 물론 세상 어딘가에는 넓은 의미의 성폭력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여성이 한 명 쯤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임의의 한 남자를 골랐을 때 그 남자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들었던 사례들만 해도 이렇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떤 남자가 '뭐 묻었는데요'라고 해서 자신의 치맛자락을 보니 알 수 없는 흰 액체가 발라져 있었다. 그걸 닦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 남자가 따라들어와서 가슴을 만지며 협박을 했는데 너무 심하게 울었더니 도망갔다. 늦은 밤 주택가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데, 큰 길가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자 어떤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더니 성폭행을 시도했다. 기타등등…

여자들이, 혹은 여성의 편에 서는 남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면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여기는 '대다수의 남자'들은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한다. 그건 일부 또라이 범죄자들이 하는 짓 아니냐고, 대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강간범 취급해서 얻는 게 뭐냐고 화를 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자신들의 겪는 일상적인 젠더 폭력과 사회적 압력에 대해 '어지간한 남자들'에게는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여자들끼리 모였을 때, 그리고 상대가 '명예 남성'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을 때, 이야기가 나오면 그제서야 서로의 고통을 위로할 뿐이다.

남자들은 절대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여성들에게는 이것이 '보편적 경험'이다. 여성의 일상에는 폭력과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여성가족부의 연구 용역을 받아 "2013 성폭력 실태조사"를 출간했는데, 그에 따르면 한국의 여성 중 19.5%는 평생 신체적 성폭력, 즉 가벼운 성추행, 심각한 성추행, 강간미수, 강간 중 하나의 범죄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비신체적 성폭력의 경우는 어떨까? 여성들은 평생 10.1%가 성희롱을, 52.3%가 음란 전화 등에 의한 성폭력을, 36.8%가 성기 노출 목격을, 2.9%가 스토킹을 경험한다.[6]

위에 언급된 수치를 놓고 생각해보자. 이미 19.5%, 다시 말해 거의 5명 중 1명이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온다. 음란 전화 등 통신 수단을 이용한 성폭력을 겪었다고 응답한 여성은 조사 대상자의 절반이 넘고, 성기를 노출하는 이른바 '바바리맨'을 목격했다는 사람 역시 3분의 1을 넘는다. 이상하게도 이 연구보고서에는 '신체적 혹은 비신체적 성폭력의 평생 경험 빈도'가 나와있지 않다. 이런 저런 수치를 다 합치면 100%를 넘기기 때문에, 즉 신체적이건 비신체적이건 어떤 방식으로건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굳이 그 수치를 제시하지 않은 게 아닐까.

물론 이 조사는 여성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3500명의 표본 집단을 선정하여 진행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통계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나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치가 너무 높아서가 아니라 너무 낮아서 말이다. 가령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이른바 '신안 섬마을 교사 성폭행 사건'이 벌어진 후 자체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0.7%가 교직 생활 중 성희롱·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었다고"[7] 응답했던 것이다.

가장 많은 피해 경험은 술 따르기·마시기 강요(53.6%)였다. 이어 노래방 등 유흥업소에서 춤 강요(40.0%), 언어 성희롱(34.2%), 허벅지나 어깨에 손 올리기 등 신체 접촉(31.9%) 순이었다. 상대적으로 교장·교감 등 관리자들이 많은 권한을 갖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피해 경험이 많았다. 또한 응답자 2.1%는 키스 등 심각한 성추행 피해를 경험했으며, 강간과 강간 미수 등 성폭행 피해 비율도 0.6%(응답자 중 10명)로 나타났다.[8]

2016년 5월 20일, 강남역 공용화장실 살인사건과 10번 출구에서의 추모 열기가 불타오르던 그때, 신촌에서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주최한 '여성폭력 중단을 위한 필리버스터'가 개최되었다. 필리버스터는 본래 의회에서 의사진행을 방해하기 위해 무제한 토론을 벌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혹자는 '대체 그게 왜 필리버스터인가? 여자들이 떼로 모여서 하소연 할 뿐이지 않은가?'라고 빈정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와 달랐다. 강남역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벌어졌던 그 살인사건을 여성혐오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우발적'인 '묻지마 살인'으로 치부하고자 하는 사회적 의제 날치기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해의 목표물이 될 여자를 일부러 기다렸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했고, 피의자의 입에서도 여성을 대상으로 한 증오심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경찰은 꿋꿋하게 '묻지마 살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상당수의 언론은 반성도 고민도 없이 그것을 받아적고 있었다. 여성혐오인가, '묻지마 살인'인가? 후자를 주장하는 남성 기득권 세력들의 사회적 의제 날치기가 진행중이었다. 그에 맞서는 여성들의 발언은 명실상부한 필리버스터였던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사례들만 다시 인용해보자. "지하철 여자화장실 옆칸에 한 남성이 화장실 바닥으로 몸을 눕혀 보고 있었다. 정신없이 도망친 뒤 한동안 지하철 화장실을 못 갔다."[9] "새벽 1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연거푸 내뱉는 낯선 남자가 두려웠다."[10] "12세 때 학원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상가 공용화장실에 갔다가 술 냄새가 나는 남성 두 명이 흉기로 위협해 그 일(성폭행)을 당했다."[11]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이렇게 범죄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확실한 이야기만 나왔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겪는 수많은 성차별, 성'희롱', 위계에 의한 성적 행위 강요, 감정노동, 일상적 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수의 남자들이 연단에 올라 '나는 남자인데 여자들의 세상이 이런 줄 몰랐다'고 고백하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여성혐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오직 여자라는 이유로 감당해야 할 차별과 폭력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을 이야기였을지 모르지만, 현장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복받쳐올라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그리고 여자들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범인의 성별은 대부분 남성이며, 그 남자들은 상대가 여자이기 때문에 강간하고 성추행하며 '농담'을 지껄이고 있다.


악어 가죽 속의 남자들


그렇다고해서 이 책을 읽고 있는 남자인 당신이 다짜고짜 어떤 여자에게 '네가 겪은 성폭력의 경험을 알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여자들로부터 직접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은, 미안하지만, 그만큼 당신이 여자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남자'로 인정받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니 말이다. 전화번호 알려달라고 하는 것도 짜증나고 때로는 두려운데, 성폭력 경험을 들려달라고 어떤 남자가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폭력의 '2차 가해'가 될 수 있다. 여성이 먼저 말할 때까지, 남자는 상대에게 성폭력의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남자는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할 자격도 없고 알 권리도 없으니 그냥 여자들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옳다고 하고 입 다물고 살라는 뜻인가? 이런 식으로 발끈하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 책을 덮길 바란다. 친구에게 선물로 주거나 중고 서점에 팔아도 좋다. 페미니즘을, 아니 '인간으로서의 여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기본적 태도가 갖춰지지 않은 남자가 페미니즘에 대한 '지식'만을 쌓는다면 그것은 여성들에게 더욱 해로운 결과를 낳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편에 서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고, 그래서 페미니즘을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자, 맨스플레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맨스플레인하는 다른 남자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하기 위해 공부하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다 떠나서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토마 마티외, 맹슬기 옮김, 『악어 프로젝트』(서울: 푸른지식, 2016)

프랑스의 그래픽 아티스트 토마 마티외는 자신의 친구들 중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상적 성폭력의 사례를 수집했다. 인터뷰를 통해 모은 사례들을 만화로 그려내면서, 그는 남자들을 초록색의 악어로 형상화하고, 여성들에게는 온전한 '사람의 모습'을 남겨주었다. 요컨대 남자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인 악어로 그려져 있고, 그 남자들이 뱉는 침, 싸고 도망가는 정액, 불쾌한 손길 등등도 모두 마치 방사능 폐기물이라도 되는 양 초록색으로 그려진다.

2015년 이후 국내 출판계에 페미니즘 열풍이 불고 있고, 다양한 서적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현학적이고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고 있고, 또 어떤 책은 남자들의 긍정적 변화와 발전을 촉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악어 프로젝트』처럼 철두철미하게 여자들이 겪는 세상,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세상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다룬 책은 없다.

만약 남자인 당신이 『악어 프로젝트』를 읽어봤는데 너무 불쾌하고 화가 나서 그 책장을 끝까지 넘길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이 책도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여자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평생 한 차례 이상의 강간, 강간미수, 성추행을 당한다는 사실을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렇기에 여자들은 남자들을 '잠재적 강간범' 취급해도 우리 남자들은 그저 부끄러워하는 것 외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 '공부'는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 당신은 계몽과 설득의 대상이 되기에는 기본적인 공감력이 모자라다. 곰과 호랑이가 변신하지 않는다면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마치 단군 신화가 그랬던 것처럼, 『악어 프로젝트』 역시 일종의 변신으로 마무리된다. 한 악어가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악어 가죽을 벗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 책의 지향점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는 페미니즘을 '공부'함으로써 변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임으로써 변화의 첫 단추를 간신히 꿸 수 있을 따름이다.


마늘과 쑥, 그리고 사람


남자인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혹은 알면서도, 여성들의 발언을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저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이 맨스플레인의 주체였음을 알아차리고 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한국 남자'라는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 위해 먹어야 할 마늘이다.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남자들의 그것과 달리 강간과 성폭력과 성희롱과 불쾌한 '농담'으로 가득차 있음을 이해하고, 여성들이 그런 고통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얻는 남자가 되는 것, 그 쑥을 먹지 않는 한 '한국 남자'라는 곰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여자인 그들의 세상과 남자인 '우리들'의 세상은 그토록 다르기 때문이다.

남자가 페미니즘 공부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을 우리는 아래와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둘째, 여자들의 세상이 엉망진창인 것은 나와 같은 종족인 남자들이 저지르는 폭력과 억압 때문이다. 셋째, 나는 한 사람의 남자로서, 나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기득권에 속하며 따라서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고통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남자들이여, 페미니즘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일단 페미니즘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여자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많은 경우 남자인 나보다 옳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동시에, 그 여자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을 싫어할 수도 있고 당신의 데이트 거절이나 메시지를 무시할 수도 있으며,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모든 남자들을 잠재적 성폭행범으로 바라볼 수도 있으며, 진심으로 남자를 혐오할 수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남자인 당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으로서의 모든 장점만큼이나 단점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여자도 사람이다. 이 당위적 명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남자도 사람이다. 우리를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인 것이다.



[1]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2쪽.
[2] 같은 곳.
[3] 같은 책, 14쪽.
[4] 같은 책, 15쪽.
[5] 같은 책, 27쪽.
[6] 황정임, 윤덕경, 이미정, 김영란, 주재선, 김동식, 이인선, 정수연, 김현정. “2013 성폭력 실태조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3년 12월 15일. 연구보고 2013-49. 125쪽 참고.
[7] 배문규, "여교사 70% 성폭력 경험했다···“가해자는 주변사람”", 경향신문, 2016년 6월 15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151130001&code=940100 
[8] 같은 곳.
[9] 이승준, 박수지, “너무나 오싹했지” 꾹꾹 눌렀던 경험 털어놓다…옆집 여성들의 ‘필리버스터’, 한겨레, 2016년 5월 20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765.html 
[10] 같은 곳.
[11] 신혜정, "“폭행 당하고도 내 잘못인 줄 알았다” 눈물의 증언 봇물", 한국일보, 2016년 5월 21일. http://www.hankookilbo.com/v/9c41cf18938145f9bc648906ab418042 

댓글 35개:

  1. 노정태 작가님, 책 언제 출간되나요? 12월 출간이라고 인터넷 서점에 나와 있던데, 이제 곧 12월도 끝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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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제 글을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을 지금 보았습니다. 책은 현재 출간 계획이 멈춰진 상태입니다. 좀 더 생각을 가다듬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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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괜히 울컥하네요.. 출간 기다리겠습니다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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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노정태님 트위터에서 우연히보고 팔로까지 했는데 이렇게 글까지 쓰시는건 몰랐네요. 본인은 양성평등 지지자라고 주장하면서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남자들에게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줄 수 있는 글이네요. 여자들의 세상과 남자들의 세상이 무척 다르다는 부분에서 괜히 울컥하네요. 부디 알찬 내용으로 꽉꽉 채워주셔서 남성들의 페미니즘 입문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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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성평등'이라는 용어가 다방면으로 악용되고 있죠. 어차피 사회의 전체적인 방향이 성평등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페미니즘의 용어들을 훔쳐서 남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하고자 하는 시도는 점점 더 늘어날 전망입니다. 그러니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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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저는 '공익'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인권을 위해 일하고 싶은 여학생입니다. 대학교에 가면 페미니즘 뿐만 아니라 노동자와 약자들에 대해 공부하고 갈등론적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그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꼭 하고싶은 학생입니다. 우연히 본 글인데 큰 인상을 받고 갑니다. 저는 남성이 페미니즘에 대해, 약자와 인권에 대해 공감을 표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으로 '칭찬' 받을 만한 일이라고 감히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알을 깨는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배우지 않아도 평생 불편하고 소외당하지 않을 분야에 대해서 상대방을 위해, 약자와 공익을 위해, 아니라면 약간의 호기심이나 어떠한 책임감에 의해서라도 알고자하고 관심을 가진다는게 보통의 통찰력으로는 불가함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자' 이며 고등학생입니다. 여고생입니다. 구글에 여고생을 검색해보세요. 저는 여자 고등학생으로서 일상에서 수많은 성적 대상화가 되어왔으며 저 스스로도 그것을 노골적으로 느껴왔습니다. 노정태 작가님이 쓰신 이 글에서 나온 사례들처럼 지하철에서, 택시에서, 때로는 정말 병원에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전 제가 사회적으로 젠더적으로 사회적 소수자 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자가 대통령이고 세상에 여자가 반인데, 어떻게 소수자야?" 라는 말로 비웃음을 살거라는걸 알지만요.
    대신 저는 제가 때로는 강자의 위치일 수 있다는걸 언제나 염두해둡니다. 아니 실제로 그럴겁니다. 사회는 너무나 다양하고 우리들은 한번에 여러가지의 지위를 갖기 때문입니다. 난 아시아에 사는 '여자'로서는 꽤 약자이겠으나, 한국이라는 나라의(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인) '평범한 가정(집이 있고 밥을 먹을 수 있고 가끔 영화나 여행따위의 여가를 즐길 수 있는)의 자녀'로서는 꽤 강자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빈곤한 사람들이 많고 기본적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집단이 아주 아주 많기때문입니다. 제가 평범한 가정의 자녀라는건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소년이라는 것이고, 그 평범함은 한국이란 사회의 기준이 됩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 대다수의 '중간계층'. 이것은 제가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계층이며, 제가 속한 계층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살게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 이게 강자라고 생각합니다. 전 대한민국 고등학생으로서 교육제도와 방과후 교실에 대한 혜택을 누렸고, 비슷한 환경의 친구들과 직업탐구를 하고 법원으로 소풍 갈 기회을 누려왔습니다. 전 제 집에서 가족과 앉아 tv로 가족에 대한 공익광고를 볼 기회를 누려왔습니다.
    물론 전 제가 여자임에 의해 많은 사회적 기준에서 소외됨을 느껴왔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보다 약자일 사람이 발생할 상황에 대해, 나보다 소외될 계층이 발생할 상황에 대해 성찰하고 반성하려고 합니다. 전 거기에서 느꼈습니다. 제가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소년으로서 누리는 당연한 것들이 내가 대다수, 평범함의 힘을 가지는 '강자'로서의 것들일 수 있다는것에 대한 깨달음이요. 제가 의도적으로 관심갖고 돌아보지 않았다면 평생을 몰랐을 것들입니다. 생리대가 없어서 신발 깔창으로 대신하는 친구에 대해, 가정폭력을 겪는 친구에 대해, 뺨을 때리는 부모님을 둔 친구에 대해, 부모님이 없는 친구에 대해, 가족이 없는 친구에 대해서요.
    그렇기에 전 페미니즘에 귀기울이려 '노력'하는 남성의 행위가 바로 '알을 깨는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한것이 당연하지 않은 사회에서, 당연하면 안되는 것이 당연한 사회에서 말입니다.
    전 작가님같은 남성과, 작가님같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과 일을 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횡설수설해서 죄송해요. 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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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제 글을 읽고 좋은 감상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남자들은 갑자기 몸이 커지고, 하루가 다르게 자신의 육체적 힘이 강해짐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혹은 자기보다 더 센 남자애들과 끝없이 경쟁을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고 입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여성을 멸시하고, 모욕하며, 성적 대상화하는 것입니다. 일베 등의 사이트가 없던 과거라고 해서 남자들이 안 그러고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정숙한 고급 문화'라는 것이 통째로 실종되면서 온 나라가 일베스럽게 돌아가는 게 아닐까 우려될 지경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10대 여성들이 겪는 피로와 스트레스에 대해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보려 해도 당사자들이 느끼는 그것을 제가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는, 부모는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라고 하는데 매스컴에서는 아이돌 학교 같은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그런 모순된 요구와 직면하게 되는 10대 여성들의 이야기에 우리 사회가 더 귀를 기울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한편 방문자께서는 자신이 강자일 가능성을 생각하며 더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대해 고민하고 계십니다. 타인을 향한 동정심은 언제나 높게 평가받아 마땅한 인류 공통의 가치임에 분명합니다. 그런 선량한 마음을 잃으면 곤란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10대이신 방문자께서 대학에 진학하고, 사회에 나와 취업 전선에 서게 되면, 그때부터 단지 방문자께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을 차별의 벽은 훨씬 높고 깊어집니다. 동정심을 품되, 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보고, 단호해질 때에는 단호해질 수 있어야 그 선한 마음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에서 유명하게 떠돌고 있는 이화여대 진덕규 교수님의 2003년 발언을 링크해 두겠습니다. 꼭 클릭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aVeZ&fldid=9Zdf&datanum=740565&q=%BF%A9%C0%DA%C0%C7%BF%AA%BB%E7&_referer=V7kfJwkeLEGMZxGlgqZEmSn6PiZshx-PTYyvn_XOI73P3ruovpUEIe8EIUNpWzKd

      실제로 프랑스의 경우 1792년 8월 10일, 종복과 실업자를 제외한 모든 남자가 선거권을 갖게 됩니다. 1794년 2월 4일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원칙적으로는 노예들도 정치적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에서 여성이 참정권(투표권+공직출마권)을 얻은 것은 몇 년일까요? 1944년입니다.

      정확히 150년 후에, 남자 노예들도 다 갖고 있던 권리를, 여성들이 얻었습니다. 이게 세계인권선언문을 만들어낸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국은 해방과 함께 여성의 정치적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에 1945년으로 잡아야 하는데, 한국이 좋은 나라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여성의 권리는 언제나 '나중에'로 밀린다는 사례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가장 힘든 이들과 함께하며 낮은 곳에서 시작해서 이 사회의 밑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같은 생각은 절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어떤 고위직에 올라도 여성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공정한 대접을 받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들은 꿈을 크게 갖고, '명문대'에도 많이 가고, 학교나 부모님이 원하는 소위 '전문직'도 많이 차지해야 합니다. 학생께서 더 열심히 공부하셔서 타인에게 많은 영향력을 주는 자리를 차지하실수록, 그만큼 전체 여성들의 사회적 지분이 늘어난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게 바로 공익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좋은 리플을 남겨주셔서 저도 모르게 흥분하여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렇습니다. 남자들은 사춘기 이후로 자신보다 '강자'에게 굴복하는, 혹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게 입증되지 않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 그런 문화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언제나 여성입니다. 그러니 윤리적 기준과 선량한 마음을 지키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강박을 갖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수많은 남자들이 여자들의 그런 선한 마음을 악용하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한 동정심이 아니라 이성과 원칙에 근거한 선행이 필요합니다. 그 선행을 통해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만한 힘을 더 많은 여성들이 가져야 합니다. 곧고 강한 여성들이 더 늘어날 때, 우리 사회의 전반적 도덕과 교양이 한 단계 나아지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학창 생활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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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꽉 찬 답글 정말 감사합니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기본적인 윤리에 대해 언제나 자각하고 염두하고 있되, 강박을 가지진 않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정숙한 고급 문화'라는 것이 통째로 실종되면서 온 나라가 일베스럽게 돌아가는 게 아닐까 우려될 지경/ 이라는 것에 공감합니다. 다른건 차치하더라도, 인터넷을 자주 보려고 하진 않지만 어째 점점 더 여자(나 약자들 소수자들)에 대한 비방이 문화로 작용하는 분위기가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라는게 심하게 활성화 되면서... 암튼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아이돌학교는 저도 참 놀랐습니다. 

      진덕규 교수님의 글도 읽어보았습니다. 많이 놀랐고 좀 충격입니다.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그저 그런 학생으로 통하나, 수업시간에 동성애에 대한 아주 노골적인 혐오발언을 한 남자선생님께 공개적으로 사과를 요구한 뒤엔 전교에서 싸가지없는 애로 통하기도 합니다. 어디 감히 선생님에게 그렇게 당돌히 말해? 라고 급식실에서 밥먹고 있으면 제 욕이 들립니다.
      저는 친구들 사이에선 꽤 소신있는 학생으로 통하나, 내 옆에있는 남자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할때면 열심히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화를 풀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이거 아빠한테 배웠습니다.
      스스로 내 권리를 주장하겠다며 페미니즘을 들먹이다가도 너무 예민하게 보이려나, 괜찮은 남자들에게도 너무 뭐라 하는건 아닌가, 기분나빠 하려나 와 같은 고민에 빠지며 소심해집니다.
      내가 지향하고자 하는 나의 모습과 반대되도록 만드는 이 사적인 간극이 과연 나만의 탓인가 가끔 생각합니다. 
      저는 여고임에도 교장부터 1,2,3학년 학년부장, 심지어 자를 가져다 대고 치마를 재고 저희의 생리주기를 노트에 적어놓고 '관리'해대는 학생주임 선생님마저 모조리 남자인 저희 학교가 정말 짜증납니다. 심지어 그 학생주임 선생님은 앉을때 다리를 오므리고 앉아 원인을 제공하지 말라는 성폭력예방용 가정통신문을 만들어 나눠줍니다. 찾아가 수정해달라 이의제기를 했지만 일일히 반응하지 말라며 혼났습니다. (물론 저희에게 성적인 농담을 던지며 웃고, 수업시간에 강간을 합리화하는 말을 하고, 저희학교 학생들의 외모순위를 정해 선물을 주는 부임한지 2년 3년차 정도의 젊은 남자선생님들이 제일 짜증납니다) 
      교훈은 정숙, 조신. 학교 물품 어디에나 붙어있는 '착하고 예쁜 00여고 학생들'이라는 수식. 왜 단 한번도 저희에게 똑똑하고 당찬 이라는 수식어는 붙여주지 않는겁니까? 자칭 '여성교육의 전당' 에서 말입니다.
      작가님께서 댓글에서 설명하신 '대학에 나와 당장 어른이 되었을 때 받게 될 불공정한 대접' 도 이와 비슷하겠지요? 제도적으로 좀 더 교묘하거나 잔인할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어치피 느끼고 경험하게 될테니 제대로 경험해보겠습니다. 사회에 나가서 많이 부딪혀 보고 무시당해보고 묵살당해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것이 올바를 지, 무엇이 무분별한 동정심이며 무엇이 이성과 원칙에 근거한 선행일지 몸으로 배울 수 있겠지요. 

      좋은 글을 써주시고 현명한 답변을 주셔서 덕분에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좋은 결과' 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제가 가져야 할 제대로된 태도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일장연설은 언제나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올리신 다른 글들을 쭉 봤는데 정치적인 글들은 아직 제 수준에 이해하기 조금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열심히 배워서 다 읽어보고 싶어요.
      10대 청소년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호해질 때에는 단호해질 수 있어야 선한 마음이 진가를 발휘한다는 말씀, 잘 새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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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답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사회도 마찬가지로, 더 나아지려는 의지, 보다 더 훌륭한 상태를 지향하고자 하는 원동력을 상실하면 금새 무너지고 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특히 남자들에게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찌질해도 괜찮아' 같은 소리만 하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말씀해주신 학교 생활은 여러모로 놀랍습니다. 다리 벌리지 말라고 하고, 치마 길이 단속하고, 이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생리주기를 왜 학교에서 '관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생리주기를 미리 학교에서 알고 있다가 생리대를 지급하기 위한 것도 아닐텐데 말입니다. 학생들의 외모 순위를 정해서 선물을 주는 남자선생의 사례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다양한 억압과 부조리 속에서도 굳은 마음을 잃지 않겠다고 해주시니 제가 다 든든한 기분이 듭니다. 방문자께서 품고 계신 뜻을 잃지 않고 성장하여 많은 이들에게 바람직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건실한 사회인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물론 그 어느 집단에 속하더라도 이상한 사람, 여성혐오하는 사람,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행동만 하려는 무임승차자 등은 늘 있습니다. 그러나 곧은 마음을 갖고 성실히 노력하면, 같은 태도로 삶을 살아온 동료를 만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이 바뀌어나가는 모습을 저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더위에 지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이 대화를 통해 저도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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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네 눈에 있는 들보부터 보라고 했던 예수의 말이나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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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지한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니 흡족합니다. 더 나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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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직접 답글도 달아주시고 감사합니다.
      종종 들어와 '성찰' 얻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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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안녕하세요. 글에서 여성을 한땀한땀 이해하려는 노력이 잘 느껴지는 글이였습니다.
    남자들이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여성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수직적 성향인'맨스플레인'이 남성들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남성들이 권리를 인정받고싶다면, 그 전에 여성의 권리를 이해해 주어야한다.
    여성들은 남성사회라는 공집합 안에 속해있는 부분집합과도 같다.

    등등 저도 몰랐던부분들을 알게끔 해주셨네요. 저 역시 무의식적으로 차별을 하고있는지는 않나 하고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읽는 와중에도 몇가지 의구심이 들어서 주제넘게나마 여쭤보고싶은게 생겨서 질문을 드리고싶네요

    1.기고하신 글 중 "핵심은 상대방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다(단, 학교 선생님이나 어머니, 할머니처럼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기만 해도 상대방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되는 상대는 논외로 한다). 아니,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고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마늘이다."
    라는 문단에서 "여자의 말에 동의 하는 것"이라는 부분이 저로써는 조금은 이해가 안되네요. 어떤 사람이든 종교,인종,성별에 관계없이 자신의 의사를 밝힐 권리가 있으며 존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말을 자르지 않고 경청하여 들어보고, 그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태도를 취하는것이 첫걸음" 이라는 말씀이라면 100번 동의를 하지만, 무조건 '동의'하는 태도를취해야한다 라는 표현은 조금 불편하게 느껴지네요. 물론, 기고하신 내용과 같이 남자들은 여성을 대할때 '수직'적인 태도를 무의식적으로 취한다 라는건 이해가 됩니다.
    수직적인 관계로 흔히 갑을관계를 많이 예시를 드는데요,한국사회에서의 흔히 말하는 갑을관계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예시로 들어보자면 '고용인'은 '피고용인'을 무의식적으로 노동착취를 하고있다라는 사실을 인지해야하며,피고용인이 주장하는 의사에대해 '동의'하는 태도를 취해야한다. 그것이 노동권 차원에서의 인권을 이해하는 첫 열쇠다. 라고 빗대어 표현할 수 있을텐데, 사실 '경청'하고 '존중'을 하는 것은 말할것도 없는 당연한 것이지만 '동의'하고 '부정'한다는 차원은 여자남자를 떠나 인간이 가지고있는 고유의 선택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의미에서 "먼저 여자의 의사에 동의를 해주는것이 중요하다. 만약 이 말에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페미니즘을 공부할 자격이없다."
    라고 말씀하시는건 남성이 여성의 입을 막아왔으니 이제는 남자는 다물고 있어야한다. 라는 뉘앙스로 느껴져서 오히려 여성의 역차별을 야기시키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히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소견을 말씀드려보자면 '여성은 남자와 같은'사람'으로써 성별 ,인종,종교 등등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지 않아야하며 여성으로써의 기본적인 권리를 소신있게 주장해야한다고 외치는 가치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여지껏 차별을 받아왔기 때문에 '역차별'을 한다면 그것은 도둑질을 보상받기 위해 다른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을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표현이 과하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이 글이 “남성이 여성에게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여성의 권리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다”
    라는 말씀을 하고싶으신건지
    “여성이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남성이 이해받지 못할 차례이다.” 라는 말씀을 하고싶으신 건지, 제가 통찰이 부족해 오해를 하고있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어떻게 생각을 하시는지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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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는 의사 결정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글은, 성별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여성의 의사 결정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며 곧잘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문제적 상황을 현실로서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인위적'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글에서 길게 썼다시피 사소하게는 일상 생활의 영역부터 심각하게는 경찰서에 범죄 사실을 신고하는 부분까지, 여성의 판단과 언어는 저평가당합니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과제라고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훈련을 해보라는 말을 '역차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이미 저는 본문에서 "물론 계약서를 쓴다거나 범죄 피의자를 심문하거나 변호사로서 이혼 소송 당사자와 상담하거나 하는 중이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요구되는 직업적 상황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라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즉 여성의 말에 일단 동의하는 훈련을 한다 해서, 그것이 우리 사회의 질서를 교란한다거나, 여성 사기꾼이 판을 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적극적으로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여성의 언어는 진실성을 의심받는 경향이 매우 크고,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하신 분께서는 페미니즘을 "'여성은 남자와 같은'사람'으로써 성별 ,인종,종교 등등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지 않아야하며 여성으로써의 기본적인 권리를 소신있게 주장해야한다고 외치는 가치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보통 남자가 어떤 말을 할 때, 저 사람이 틀린 소리를 하고 있다고 전제합니까, 아니면 옳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전제합니까? 남자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많은 경우 여자의 말은 일단 틀린 소리라고 깔아두고 대화를 시작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당연히, 지금 그 말을 듣는 남자인 내가 틀린 소리 하는 사람이 되는 한이 있어도 여자가 옳은 소리 한다고 전제하고 대화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애초에 '역차별'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봅니다. 여성의 발언에 남자가 긍정하는 것이 '역차별'이라 주장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발언을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역-차별 이니까). 그런데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그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이고 사람의 말은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지금보다 더 존중해야 합니다. 일단 네 말이 맞다, 라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지 않는 한, 역차별을 논하는 것은 차별을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의 주장은, 댓글을 달기 위해 다시 살펴봐도, 너무 심각할 정도로 온건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해서도 '역차별'을 떠올리신다면 여성이 '인간'으로서 발언하고 그 발언을 존중받는 상황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여성들의 말을 더 듣고 이해한다 해서 남자들이 '이해받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상대적 개념으로 놓고 볼 때 지금까지 남자들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불균형이 하루아침에 뒤집힐 일은 없고, 따라서 '역차별'의 희생자가 되실 일도 없으니, 안심하시고 여성의 말을 더 경청하는 연습을 해나가시는 편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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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소중한 시간 내주셔서 답해주신 점 깊게 감사드립니다!

    작가님의 의견은
    남성들이 지금껏 여자들에게 불합리한 구조와 시선을 씌워 왔기 때문에 지금 그 차별을 해결하려면 “인위적 노력을 통해 남자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양성평등의 저울을 영점으로 조정해야한다.” 는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을텐데요.

    어떤 말씀인지는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제 소견으로 감히 말씀드려보자면, 페미니스트의 의견을 대변하는 작가님의 의견은 '페미니스트는 양성평등을 주장한다.'라는 전제가 무너진 의견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제가 유연성 없이 주장한다고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작가님 의견을 “남자가 8,여자가 2를 누려왔다면 여자가 8을 누려봐야 하는것 아니냐” 라는 차원에서 이해를 해봤습니다.
    이 말씀이 합리적인 방법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은 듭니다. 허나 이 경우는 소규모 집단,혹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서 '합의'를 보는 것이 가능한 상황일 때 통용되는 것이라고 생각을합니다. 양쪽 대표가 나와서 의견조율을 통해 '결정'할 수 있을 때 이해가되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는 대표가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모두의 의견을 모아 '합의'를 보는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는 거죠. 그렇기에 우리가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 공정하게 판단하고 따를 수 있는 것은 ‘인권에 의거한 법’ 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법에 근거한다면 여자의 말에 무조건 '동의'를 해야한다는 표현은 페미니즘이 '양성평등'을 목적으로 한다는 전제에 어긋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것이 저의 큰 주장이구요. 세부적으로 작가님의 말씀을 살펴보며 제 의견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작가님의 글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는 의사 결정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글은, 성별을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여성의 의사 결정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되며 곧잘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성은 사회적으로 의사결정권이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씀은 동의를 합니다. 남자들이 인식하고 조심해야할 부분이죠.
    -------------------
    그러한 문제적 상황을 현실로서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인위적'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글에서 길게 썼다시피 사소하게는 일상 생활의 영역부터 심각하게는 경찰서에 범죄 사실을 신고하는 부분까지, 여성의 판단과 언어는 저평가당합니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과제라고 받아들인다면, 여성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훈련을 해보라는 말을 '역차별'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남자가 여성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동의해줘야 한다는 것은 역차별이 아니고 인권평등을 위해 남자가 마땅히 해줘야하는 노력이다.
    ○이 말씀에서는 '동의'라는 표현이 납득이 안되네요.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여성의 권리, 의사 등을 저평가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경향이며 조심하고 개선해야할 부분이고 남자들은 여자의 말에 '경청' 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씀이라면 이해가되지만 '동의'의 표현은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 논지에 따르면 사석에서 '페미니스트를 빙자한 여자'가 성차별적인 발언을 하며 페미니스트를 왜곡한다고 해도 남자들은 양성평등을 위해 “네 말이 옳은 것 같아.” 하고 입을 닫고 있어야 합니다. 작가님의 '무조건적 동의'는 소통과 조율의 여지가 없는, 일방적이고 불합리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일방적인 방법이라고 말씀드리냐면, 작가님이 기고하신 글 중에
    “핵심은 상대방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하는 것이다(단, 학교 선생님이나 어머니, 할머니처럼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기만 해도 상대방의 말을 고분고분 듣게 되는 상대는 논외로 한다). 아니, 네 말이 맞긴 하지만, 근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말야,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같은 소리를 절대 하지 않고 '여자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것이 마늘이다.”

    만약 작가님께서 “ ‘우선’ 동의를 해본 후에 의견이 다르다면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야한다.” 라고 말씀하신 거라면 “남에게 이해 받기위해선 먼저 이해해야한다.” 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의견에서 남자는 반박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 동의 후 반박’의 태도 등의 남자의 의견을 내세울 출구가 없다는 말이죠.
    ---------------------------------
    이미 저는 본문에서 "물론 계약서를 쓴다거나 범죄 피의자를 심문하거나 변호사로서 이혼 소송 당사자와 상담하거나 하는 중이라면,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 요구되는 직업적 상황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겠다"라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즉 여성의 말에 일단 동의하는 훈련을 한다 해서, 그것이 우리 사회의 질서를 교란한다거나, 여성 사기꾼이 판을 치게 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는,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적극적으로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 경우에도 여성의 언어는 진실성을 의심받는 경향이 매우 크고,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여성의 말에 무조건적 동의를 해주는 것이 (무조건동의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임을 제외하고)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불합리하게 작용할만큼 큰 요구는 아니다.
    ○맞습니다. 사실 그렇죠. 그렇게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가부장제’ 라는 것이 뿌리박기 시작한 원인도 “남자가 여자보다 위에 있다.” 라는 인식을 무의식적으로 심어줬기 때문이죠. 무의식이라는 말, 자신의 의식을 가질 틈이 없게 그것이 스며들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 전에 애초에 그것이 ‘정답’이다. 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에 작가님이 말씀하신 맨스플레인이라던지, 사회적 차별 등을 지금까지도 남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작가님의 ‘동의’ 해야한다라는 의견은 남자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여지가 없습니다. 극단적 예시를 들어보자면 ‘동의’라는 표현이 전반적으로 자리 잡은 작가님의 의견이 만약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온 사상,교육이였다면 아마도 지금까지 남자들은 여성에게 차별받는 사회에서 살게 됐을 것입니다. 몇몇 누리꾼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아니 동의 한번 해주는 거 가지고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 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다시생각해보면 이는 경우에 따라서 “아니 여자가 명절날 음식 좀 하는거 가지고 뭐 그리 엄살이야 엄살은? ” 이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후자로 예를 든 흔히 ‘꼰대’들이 명절 날 구박받는 선량한 여자들에게 던지는 말이 듣는 이로 하여금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이 들으셨다면 아마 제 의견에 동의하실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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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어서----------------------------------------작가님의 의견
      질문하신 분께서는 페미니즘을 "'여성은 남자와 같은'사람'으로써 성별 ,인종,종교 등등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당하지 않아야하며 여성으로써의 기본적인 권리를 소신있게 주장해야한다고 외치는 가치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당신은 보통 남자가 어떤 말을 할 때, 저 사람이 틀린 소리를 하고 있다고 전제합니까, 아니면 옳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전제합니까? 남자들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많은 경우 여자의 말은 일단 틀린 소리라고 깔아두고 대화를 시작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걸 극복하려면, 당연히, 지금 그 말을 듣는 남자인 내가 틀린 소리 하는 사람이 되는 한이 있어도 여자가 옳은 소리 한다고 전제하고 대화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남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의 의견을 부정하고있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양성평등을 위해선 여자의 말이 옳다는 전제로 대화할 필요가 있다.
      ○역시 위에서 말씀드린것과 같이 이 말씀은 너무 극약처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그 말을 듣는 남자인 내가 틀린 소리 하는 사람이 되는 한이 있어도 여자가 옳은 소리 한다고 전제하고 대화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씀을 바꿔 해석해 보면
      “지금 그 말을 듣는 남자인 내가 의사표현에서 차별당하는 한이 있어도, 여자의 의사는 무조건 옳다고 전제하고 대화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로 바꿔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역차별적 발언이 아니라고 하셨지만, 역차별 발언임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고 말씀드리고싶네요.
      경청하는 태도를 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동의하지만 여자의 주장의 허와 실, 경중을 떠나서 '옳다'라고 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역으로 남자의 의사결정권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애초에 '역차별'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봅니다. 여성의 발언에 남자가 긍정하는 것이 '역차별'이라 주장하기 위해서는,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발언을 인정받지 못하는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역-차별 이니까). 그런데 그런 차별이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그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여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이고 사람의 말은 존중받아야 하니까요. 그렇다면 남자들은 여자들의 말을 지금보다 더 존중해야 합니다. 일단 네 말이 맞다, 라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 도달하지 않는 한, 역차별을 논하는 것은 차별을 유지하는 기제로 작동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가 여지껏 차별해왔는데 역차별을 논하는 것은, 차별을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애초에 ‘역차별’의 개념을 떠올리는 것 부터가 문제라고 하셨는데, 작가님 논리를 그대로 모방해보자면 저는 애초에 ‘작가님의’ 페미니즘에서 ‘평등’의 개념을 전제로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반박드릴 수 있겠네요.
      작가님의 의견에서 ‘존중’ 그리고 ‘사람’ 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우선 ‘존중’이라는 표현은 무엇일까요? 다수결의 원칙을 제시할 때, “다수결에 따르지만, 소수의 의견을 존중해야 해.” 라고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소수의 의견에 무조건적 ‘동의’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크게 대다수가 A와B라는 의견이 대립되는데, 저기 저 친구는 C라는 의견을 내고있네? 우리 다수결을 따르지만, C의 의견도 들어보고 충분히 검토해 본 후에 의견을 선택하도록 하자. ” 라고 하는 것이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중’이라는 것과 ‘무조건적 동의’는 그 의미자체가 굉장히 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남자’역시 사람이거든요.
      차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이것은 정말 몇 곱절을 강조해도 부족할 정도로 지당하신 말씀이죠. 그렇지만, 차별을 해결하기위해 노력하는 것은 ‘ 차별을 안하는 것 ’ 이지 ‘차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이 글의 주장은, 댓글을 달기 위해 다시 살펴봐도, 너무 심각할 정도로 온건합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 대해서도 '역차별'을 떠올리신다면 여성이 '인간'으로서 발언하고 그 발언을 존중받는 상황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여성들의 말을 더 듣고 이해한다 해서 남자들이 '이해받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상대적 개념으로 놓고 볼 때 지금까지 남자들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 불균형이 하루아침에 뒤집힐 일은 없고, 따라서 '역차별'의 희생자가 되실 일도 없으니, 안심하시고 여성의 말을 더 경청하는 연습을 해나가시는 편을 권합니다.
      ●여자의 말을 긍정 해준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불균형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역차별에 의한 불합리함은 실질적으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주장이 온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저는 취지 자체는 온건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의’라는 표현은 온건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성이 ‘인간’으로써 발언하고 발언을 존중받는 상황에 대해서 공포심이 생기는게 아니라, 여성이 ‘페미니즘의 권리를 빙자한 수직적인 위치’에서 발언을 하고, 발언에 ‘무조건적 동의’ 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공포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불평등 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고쳐질 일은 드물죠. 그것은 정말 극약처방이 아닌 이상은 힘들 겁니다. 그렇지만 남자들이 노력해야하는 것은 ‘경청’의 태도이지 ‘동의’의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평등’은 너와 내가 합리적이고 공평 하다.” 라고 느껴야하는 것이지 “여지껏 불공평해왔으니 이제는 반대편이 불공평할 차례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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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한번 질문을 드리고 싶은 부분은 작가님이 말씀하신 ‘무조건적 동의’가 ‘존중’과 같은 의미로 표현되어서 쓰고 계시는데 그 부분에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는건지 여쭤보고싶네요. 제 의구심은 ‘무조건적 동의’라는 표현에서 시작되고 끝났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 주장을 내세우다보니 저도 모르게 몇몇 어휘나 문장에서 날이 선 부분이 생겼던 점 불편하셨다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페미니즘에대해서는 제가 요즘 가장 관심이 많은데, 페이스북에 작가님이 쓰신 글을 출처를 밝히고 게시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페미니즘에대해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처를 명확히 밝힌 후 SNS에 게시해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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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굉장히 길게 쓰셨는데 지금 말씀하시고 계신 내용은 결국 단 하나입니다. 여자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거죠. '경청'하는 태도로 듣는 척까지는 해줄 수는 있지만.

      제 질문에 대답을 안 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아마도 거의 확실히 남자인 것 같은) 당신은, 다른 남자가 무슨 말을 할 때, 그 사람이 옳은 말을 한다고 전제합니까, 아니면 틀린 말을 한다고 전제합니까?

      일반적으로 상식적인 경우, 의심하는 것이 그 시점에 그 사람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남자들은 다른 남자가 하는 말을 옳다고 믿으면서 대화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동의'를 말하고 있다고 본문에서도 설명했고 댓글로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방문자께서는 못 받아들이고 계시죠. 왜일까요.

      적어도 그것은 '페미니스트'의 자세가 아닙니다.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성별과 무관하게 사람의 말은 일단 믿고 수긍해주는 태도로 대화를 시작할 것입니다. 여성의 말에 '일단 동의하라'는 제 주장은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단순하다 못해 심심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못 받아들이시는 걸까요. 여자는 사람입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남자와 대화할 때처럼 여자의 말을 잘라먹지 말고, 여자의 말이라고 일단 무시하고 콧방귀 뀌지 말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세요. 제 말은 그냥 이런 뜻입니다. 이게 어렵습니까?

      한편 '역차별'에 대해서도 한 마디 덧붙여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가 8을 차지하고 남자가 2를 차지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사람은 '양성평등'주의자가 아닙니다. 여성차별주의자입니다.

      미국의 대법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에게 누군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연방 대법원에 여성 판사가 몇 명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긴즈버그는 답했습니다. '9명 입니다. 남자가 9명이던 시절도 있었으니, 9명의 대법관 전원이 여자가 되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저 말이 무슨 뜻인지 곱씹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걱정하시는 그런 '역차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지표로 사람을 뽑는 공채 과정에서 여자들이 너무 성적을 잘 받아서 남자들을 억지로 밀어넣는 경우는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만.

      한편 출처를 밝히신다면 제 글을 퍼가시는 것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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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글과 댓글을 정독하다가 이 질문 댓글에 대한 노정태님의 답글이 너무나도 속시원하고 본질을 꿰뚫는 현답이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 마디 남깁니다. 귀중한 말씀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페미니즘에 관한 날카로운 고견 부탁드리겠습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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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이 고민하고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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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댓글 잘 읽고갑니다 다른 글도 정독하고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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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움이 된 듯하여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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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너무나 늦은 댓글이라 보실지는 모르겠지만 글에 반항심이 들어서 몇자 적어봅니다.

    말씀하시려는 큰 틀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페미니즘이 필요하다고 느끼면서도 페미니스트는 반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남과 여의 구분입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인권신장 운동으로 시작된 이념인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남녀의 편가르기로 인해 그 원동력이 많이 퇴색되었다 생각됩니다.

    남자의 속성은 '~하다'. 라고 페미니스트들은 말하고 맨스플레인을 논하고 작가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근데 남자는 적어도 인류의 반은 차지하고 다 같은 성격 기질 환경 경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작가님의 글은 항상 '남자들이 바뀌어야 한다' 라고 합니다. 반발이 생기겠지요. 이 논리의 구조는 '범죄자 중 남자가 많으니 남자들이 문제다' 라고 큰 틀에서 일반화하는 구조와 같아 보이네요. 세상 어찌 그렇게 쉽게 카테고라이징이 쉽게 됩디까?

    가령 '일본인은 ~하다' 라고 하면 일본도 사람마다 다르다. 저런 언행은 민족주의 발언으로 위험하다. 라고 다들 인지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대체로의 상호주관성을 가진 지식인이라면요.

    근데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는 ~하다' 라고 논지를 전개합니다. 이건 저 위에 적어둔 민족주의와는 다른 행태일까요? 적어도 남자의 공감이 필요한 사항이라면, 그런 문제라면, 공감이 되도록 논리를 만들어두는게 맞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대부분의 남자들'이라는 표현도 없이 '남자는' 이라는 표현들이 저는 상당히 거북하게 느껴집니다.

    또한, 페미니즘을 제대로 논의하려면 각 문화의 특성을 이해하고 각 문화마다 다른 방식의 페미니즘을 얘기해야 하는데, 주로 논의되는 건 서양에서 출발한 페미니즘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네요. 그러니까 한국 문화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들이 마치 원래는 발생하지 않았어야 할 말도 안 되는 야만적인 역사로 인식되는 거 같습니다. 문화 상대주의에 대한 인식도 없고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부족하면서 이전엔 남성우월주의였으니 이젠 여자의 시대다 라고 말하는 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고 하는 말이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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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녕하세요. 오래 전에 쓴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들은 ...하다'는 말은 '남자'라는 범주를 이루는 개별적인 남성 개체에 대한 판단이 아닙니다. 남자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판단이죠. 무슨 차이냐면, 이런 겁니다.

      '모든 사업가는 돈을 더 벌고 싶어한다'는 명제를 놓고 생각해봅시다. 물론 세상에는 일부러 망하려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당장은 돈을 벌지만 언젠가는 단번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요. 그렇게 개별적인 사례를 놓고 이야기하면 '모든 사업가는 돈을 더 벌고 싶어한다'는 명제는 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든 사업가는 돈을 더 벌고 싶어한다'는 말이 틀렸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사업가라는 범주 자체가 1) 사업을 하고 있고 2) 그 사업의 번영과 번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저 글에서 '모든 남자는 여자들이 여자라서 겪는 고통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 모른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가령,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에 대해 한 평생에 걸쳐 전문적으로 연구해온 학자라던가, 반례에 의해 반박될 수도 있습니다(가능성이 0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애초에 남자라는 범주에 속하는 이들은 여자라는 범주에 속하는 이들과 다른 사회적 경험을 하며 다른 생물학적 조건 하에 성장하므로, 여성들이 여성이라서 겪는 사회적인, 혹은 내밀한 경험을 남자들은 모른다고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다짜고짜 부정하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인 화법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모든 남자는'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남자는'이라고 하나, 제가 논의하고자 하는 범위와 이야기 속에서는 큰 차이를 낳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논리적으로 가능한 반례를 일일이 주워섬기면서 이야기하지 않고도, 우리는 사회 일반적인 현상에 대해 토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한편 '그것은 성차별이 아니라 문화의 차이다'라는 말씀에 대해서는, 혹시 『팩트풀니스』를 읽어보셨는지, 안 읽어보셨다면 읽어보실 생각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저자는 본인의 조국인 스웨덴에서도 1920년대 30년대 무렵에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억누르고 차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지만, 지금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그건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인권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기준의 문제라는 거죠.

      제가 지금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인용은 어렵습니다만,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페미니즘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20세기 초의 스웨덴과 21세기 초의 스웨덴은 문화적으로 굉장히 거리가 멉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라는 측면에서는 차라리 20세기 초 스웨덴과 21세기 초의 인도가 더욱 문화적으로 가깝죠. 하지만 그 누구도 20세기 초의 스웨덴과 21세기 초의 인도가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딱 봐도 다르니까요.

      그럼 결국 뭐냐, 여성차별은 '다양한 문화'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벌어지는 획일적인 차별 기제라고 보는 편이 더욱 합당할 겁니다. 문화적 차이가 크고 지리적 격차가 먼 사회에서도 비슷한 패턴으로 여성 차별이 가해지는 것이 현실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나라, 어떤 사회에서건, 여성 차별에 대한 투쟁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차별하니까, 비슷한 방식으로 대항해서 싸우겠죠. 다만 산업화가 먼저 이루어졌고 보편적인 시민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충해나간 역사에서 서구권이 우리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측면이 있으므로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눈에 더 잘 띌 따름입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펼쳐나갈 권리가 있다, 질문하신 분도 분명 동의하실 것입니다. 제 논의는 이런 보편적인 인권 옹호론에서 출발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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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남녀성별 문제에서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의견 들을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펼쳐나갈 권리가 있어서 꿈을 가지고 남녀평등을 제안하는 사람이 왜 학문적 진정성이 의심될까요? 판단의 가정의 문제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의 인과적인 순서가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성평등주의자들의 경향이 하나의 성별에만 고정된다고 보여집니다. 이를 안따르려는 남성들도 여성주의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여성주의의 진취적인 면이 손상된다는데서 출발한 이론이 아닌가하네요.

    순수한 목적에서 여성주의를 배워가는데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지와 무관한 일들은 무고로 이어집니다. 그런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면 이용되는 것 같습니다.

    사소하게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2, 3세때부터 관찰받은 사람이 경험하는 여러 인생 행로에서 여성주의가 채택되는 것은 하나로만 고정된 과정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이디푸스로 지칭되어야 할 운명인 경우, 근친상간도 소재가 되는데 이 경우 여성주의가 그 이디푸스로 지칭된 순수한 소년을 파괴합니다. 그 소재로 여성주의가 쓰입니다. 물론 노정태님은 균형감이 있더라도 그것으로만 이용되는게 아닙니다.

    댓글을 달았다가 하나로만 다시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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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별적인 '여성'이 겪는 차별과, 범주로서의 '여성'이 겪는 차별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게 이 글의 핵심적인 전제 중 하나입니다.

      가령 어떤 여왕이나 공주가 있다면, 평민 남성보다는 신분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 여왕이나 공주 역시, 왕족 귀족 등의 기준을 놓고 보면, 다른 남성 귀족에 비해 손해를 보고 차별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이라는 '범주'가 덧씌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성인 저 역시, 가령 취업을 했고 악덕 사장을 만났는데, 그 사장의 성별이 여성인 경우 등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개별적인 남성이 개별적인 여성에 비해 어떤 불이익이나 손해를 경험한다 해서, 여성이라는 '범주'가 남성이라는 '범주'에 비해 요즘은 더 우대받는다는 식의 서술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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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답글 감사합니다. 그래서 양성펻등이라는 단어를 한편으로 가정하기보다 사태특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진정으로 하는 규칙이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습니다. 여성주의자분들도, 남성주의자분들도 한편의 논리로만 사고해야 되는데 이게 원칙은 각자가 보호하는 대상에 대한 배신이 우려되서 같지만, 관철의 논리가 작용하면 두 입장이 서로 진행시키는 것이 선의의 피해자를 만드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실존주의적인 면에서 정체성의 논제로 접근해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평생 동반자였듯이 하는게 가능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배신의 상황은 어떤 경우이든 이차피해자를 만들어내기도 해서 참으로 어려운 사안이죠. 학자나 정통 여성주의자 또는 남성주의자가 아니라면 유연하게 의견을 제시하면 좋다고 보구요. 그런 면에서 여성주의를 배운다면 어떤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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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13년의 여성 성폭력 경험 통계(19.5%가 신체적 성폭력 경험)는 너무 낮아서 믿기 힘드네요. 저는 평범하게, 어쩌면 평균보다 더 '얌전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생각하는데도, 중-고-대학교까지만 생각해도 놀랍도록 공개적인 장소에서의 성희롱들을 기억합니다. (1)중학교땐 '윤리' 선생님이 대낮 모든 선생님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제 허벅지를 쓰다듬었고 (보다 못한 담임이 와서 말리더군요) (2)고등학교 땐 버스안에서 흔하던 각종 추행 (3)대학교 땐 영어학원 간다고 대낮 종로 대로를 걷는데 앞서 오던 남자가 덥석 가슴께를 만지고선 웃으며 지나가던 일이 대표적으로 기억납니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여러 기억이 있는데, 단 19%라... 제가 특별히 위험한 곳으로 다녔던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한편,,, 남성이 여성의 현실과 두려움에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게 된 것은, 어느날 밤 5호선 전철로 퇴근하다 어떤 남성이 제 옆에 가까이 서 있는게 다소 신경이 쓰여 옆칸으로 옮겼더니, 옆칸으로 따라오고, 기겁해 옮기기를 한번 더. 급기야 정신없이 내릴 역이 아닌 데서 내려서, 역무원실에 가서 사정 설명을 하고 남자친구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했는데 (매우 건장한) 저의 남자친구는 그 설명을 듣더니. "애초에 상대가 가만히 있는데 네가 자극해 자초를 한 것이다. 오버다."라고 하더군요. 제가 누군가를 의심하는 태도를 보여서 그를 자극해 그 상황을 자초를 한 것이거나 아니거나, 밝은 전철 내에서도 일단 물리력에서 차이가 큰 상대에게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을 저는 느꼈고, 상대는 그 두려움을 알고 이용해 위협을 한 것인데, 정말로 (또) "내가" 잘못한 것인가, 라는 억울함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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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5%. 저도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이렇게 썼는데, 아마 제 추측이 틀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연구보고서에는 '신체적 혹은 비신체적 성폭력의 평생 경험 빈도'가 나와있지 않다. 이런 저런 수치를 다 합치면 100%를 넘기기 때문에, 즉 신체적이건 비신체적이건 어떤 방식으로건 성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굳이 그 수치를 제시하지 않은 게 아닐까."

      최근 몇 년에 걸쳐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한 덕분에, 드디어 한국 남자들 중 상당수도 '한국의 완벽한 치안 판타지'가 현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여자가 경험하는 치안과 남자가 경험하는 치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알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죠. 남자친구분의 반응은 그런 통념 속에 살아가는 남자로서 특별할 게 없는 것입니다만, 방문자께서는 굉장히 화가 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도 받으셨을 수 있겠습니다.

      최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선생의 폭로가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입을 열어서 시작된 운동인데, 피해자를 '대리'하는 '활동가'들이 되려 피해자의 입을 또 막은 채 30여년이 흘렀고, 결국 다시 한 번 피해자가 '피해자'임을 밝혀야 하는 통탄할 상황이죠. 한국의 여성들이 자신들이 겪어왔던 크고 작은 성폭력에 대해 입을 열어서 남자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의 안전한 밤거리 신화'가 깨지는 것과 여러모로 함께 생각해보게 됩니다.

      말씀하신 상처를 듣고 방문자님의 내면이 더욱 굳건해지기를, 그 마음이 외면에 반영되어 다른 이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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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려깊은 답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시는 글들 가끔 찾아 읽으며,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종종 자극을, 가끔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또, 어떠한 종류의 공격에도, 단순한 비방에 가까운 댓글에도 성실하게 답하시는 의도를 제 나름대로 이해하고 노력을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슈에 대한 글,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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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더 유의미한 글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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