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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넷플릭스식 Binge Watch 단상

넷플릭스가 조져놓은 드라마를 둘러싼 문화적 관습이 한둘이 아닌데, 그 중 최악은 Binge Watch라고 생각한다.

TV 시리즈는 그런 게 아니다.  

힌국 기준으로 16부작은 1주 2화씩 8주에 보도록 맞춰져 있다.

딱히 기한 없이 흘러가는 연속극도 1주에 한 편 내지는 두 편, 요즘은 잘 만들지도 않는 일일연속극은 1주 5화 1일 1화가 최대치다.

이게 답답하게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연속'극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의 흐름과 시청자의 인생의 흐름이 함께하는 그 감각. 그것이 영화와 드라마를 가르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영화는 극장이라는 단절된 시공간에 들어가서, 대충 2시간 아무리 길어도 4시간이 안 되는 영상물을 보고 나온다. 영화 감상은 '이벤트'다.

반면 드라마는 TV가 됐건 모니터가 됐건, 익숙한 시공간과 시청 환경에서, 최소 8시간(이면 너무 짧고), 대충 16시간을 함께한다. 이건 '이벤트'가 아니라 '라이프'다.

빈지 와치는 바로 이 '라이프'로서의 드라마를 조져버린다. 하루 날잡고 쫙 정주행하는 그것은 드라마를 보는 자세가 아니다.

갑자기 왜 혼자 급발진하는가?

오랜만에 더 와이어 여전히 시즌 1... 의 8화를 보고 하는 소리임. 걍 무시하세요. 한 화 정도만 더 봐야지...

2022-07-30

우영우: '지켜주고 싶은 여자'라는 로맨스 세팅

1화만 봐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왜 흥행하는지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상당히 공들여서 잘 쓴 법정씬. '천재 변호사'가 진실을 밝히고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는, 잘 쓰면 당연히 재미가 보장된다.

본격적인 논의의 가치가 있는 건 우영우 캐릭터. 사람들이 '자폐'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놓치고 있지만, 이 캐릭터는 우리에게 전혀 낯선 인물 유형이 아니다. 오히려 5천만 국민에게 친숙한 '아는 맛'이다.

우영우는 기존 로맨스, 특히 2000년대 이전 순정만화에서 흔히 쓰던 여자주인공 캐릭터의 변주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해서 보고 있자니 딱하고 귀엽기도 한, 순수한 사랑스러운 그러면서도 특별한 게 있는 여자주인공'인 것이다.

(이런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귀엽다'인 것 같지만, 이게 통상적인 '귀여움'과 100% 겹치는 건 아니다. 저런 순정만화 캐릭터 세팅과 21세기 대중문화 속 귀여움에 대한 논의는 어려운 주제니까 나중에 언젠가...)

여기서 잠깐. 순정만화라는 단어만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비하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터라 이런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럽다. 나는 그런 뉘앙스의 리플은 적당히 지우거나 감추거나 할 생각이다. 이용에 참고하시길.

아무튼, 우영우 캐릭터란 그런 캐릭터다. 특별한 소녀. 하지만, 혹은 그래서, 지켜주어야만 하는 소녀.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이러한 인물 유형은 전혀 낯설지 않다.

이은혜 작 <점프트리 A+>의 혜진이는 마음이 너무 여리다. 그래서 해야 할 말 제대로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린다. "혜진이는 수도꼭지야..." 그러면 멋진 오빠들이 간지나게 춤추며 팝송을 흥얼거리며 나타나서 도와줌.

'지켜주어야 하는 여주'가 꼭 나약한 여자일 필요도 없다. <베르사이유의 장미>. 나는 장미로 태어난 장미칼, 아니 오스칼은, 군인 체질이지만 시대적 한계로 남장을 하고 군인으로 일한다. 그런 비밀 때문에 뭔가 제약이 생긴다. 소꿉친구 앙드레는 공식적으로는 오스칼의 부하지만, 앙드레에게 오스칼은 '지켜줘야 하는 여자'가 된다.

꼭 '순정만화'만 이런 기법을 쓰는 건 아니다. 여자 캐릭터를 낯선 환경에 던져넣기만 해도 '지켜줘야 하는 여자'를 만들 수 있다. 로맨스의 고전 중의 고전인 <귀여운 여인>부터가 그렇다.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은 거리의 여자다. 에드워드 루이스(리처드 기어)하고 어찌어찌 엮여서 고급 호텔에 묵는다. 비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간다. 하지만 옷가게 점원들이 무시한다. 그 사실을 듣고 에드워드는 격분하여 카드 들고 가게로 처들어가서 '여기 있는 거 다 내놔' 시전.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준다.

이 여자가 딱하다, 짠하다, 마음에 걸린다. 도와주고 싶다. 남자들이 쉽게 엮이는 감정의 고리다. 사실 여자들도 불쌍한 남자에게 쉽게 끌리곤 한다.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가 목발을 짚고 다니며 여자들의 동정심을 사서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살해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로맨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문제다. 그런데 남녀(일단 이성애 로맨스만 이야기하자)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는 건 눈만 마주쳐도 가능한 일이다. 재미있는 서사가 나오려면 뭔가 장애물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장애, disable이 아니라 obstacle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그 obstacle을 여자주인공의 캐릭터에 얹어보자. 앞서 말한 순정만화의, 혹은 로맨스의 여주 생성 공식이 왜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여자가 어떤 장애에 부딪혀 넘지 못할 때, 그걸 딱하고 짠하게 여겨 뭔가 손을 내밀고픈 남자의 마음. 그렇게 로맨스를 만드는 게 2000년도 이전에는 특히 흔했다는 것이다.

우영우의 장애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건 그런 면에서 당연하다. 혹은 장애의 재현이라는 윤리적 문제에 민감한 이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우영우>는 disable을 로맨스의 obstacle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세팅이 아니다. 여성을 취약한 존재로 만들어서 로맨스 서사의 동력으로 삼는 창작 기법 자체가 20세기의 유물이다. 요즘은 여주들에게 노골적으로 obstacle을 부여하는 고전적 로맨스 세팅을 잘 안 한다. 오늘날의 기준에서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물며 그 obstacle의 자리에 disable을 갖다 놓는다? 이건 상당한 모험이다.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로 플러스를 뽑아보겠다는 플랜. 다행히도 <우영우>는 배우 박은빈이 연기하고 있고, 그는 사실상 원맨쇼 차력쇼 수준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우영우>의 세팅이 가지고 있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이 없다. 다만 그 맥락이 뭔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약간 부연설명을 해보고 있을 뿐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이 작품의 주인공을 박은빈이 해서 천만다행이다. 조금이라도 연기력이 부족하거나 시청자들의 무조건적 호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밉상 털이 한오라기라도 박힌 배우가 맡았다면, 엄청난 논란 끝에 순항하지 못했을지 모를 일이다. 

2022-01-04

설강화 관련 코멘트 모음

신동아에 보낸 칼럼(링크). 1, 2화 보고 씀.

 

3화까지 감상 소감

설강화 3화 틀었는데, 2021년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아씨-식모' 구도의 갈등이 전면화.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잘 안 다루는 지점.

하긴 유현미 작가는 <스카이 캐슬>때도 굉장히 노골적으로 계급 이야기를 했음. 문제는 그랬다가 혜나를 구렁텅이 빠뜨리고 죽였다는 것인데... 진보적 성향은 없지만 계급 문제를 인지하는 작가들이 곧잘 택하는 코스.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다. 작게나마.

아무튼, 무슨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 논란으로 이 드라마 조지는 사람들이 더더욱 싫어할 수밖에 없겠다. 작품 내에 결백한 사람이 없으니까. 여러모로 90년대 순정만화 같음. 좋은 의미에서.

 

5화까지 감상 소감

설강화 5화까지 본 소감. 작가는 '남북관계를 배경으로 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음. 신동아 원고 쓸 때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단정지어 말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분명하네... 

 

7화까지 감상 소감

<설강화>는 영화로 갔어야 할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 게 가장 큰 패착 같다.

감정선이 아주 높고 깊게 오가며 빠르게 변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데, 영화는 그걸 연출과 몇몇 장면에서 드러나는 연기로 커버 가능함.

반면 드라마라는 장르는 워낙 러닝타임이 길다. 남주 여주 사이의 멜로가 붙느냐 마느냐, 이거를 시청자들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보고 촉각적으로 판단함.

<로미오와 줄리엣>, 거기서 파생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같은 극단적 러브스토리들, 모두 청춘들의 짧게 불타오르는 사랑 이야기인데 거의 대부분 이야기 자체를 길게 끌지 않는다.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음.

관객이 단번에 보고 단번에 흥분한 후 단번에 절망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야기가 그냥 '하나의 덩어리'로 전개되고 끝나지 않으면 안 됨. 생사를 오가는 총성 속의 사랑 이야기인데 이번주에 보고 쉬었다가 다음주에 또 보고... 그게 필이 잘 안 받겠죠.

영화로 찍었다면 좋은 뭔가가 뽑히고 충분히 유익한 사회적 논의도 뽑아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싶은데, 여러모로 아쉽다. 이제는 실검에서 총공도 안 당함...


정리해보는 차원에서 올려봅니다. 여러모로 아까운 기획이 왜곡되고 묻혔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움.

2007-05-11

드라마로부터 비평하기

드라마를 비평하면서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도는 하나의 화두가 있다면, 이렇게 담론적으로 소외되고 있는 장르를 대함에 있어서, 적어도 나는 드라마를 비평하지 말고 드라마로부터 무언가를 논할 수 있는 경지를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차이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는 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반면 이해하지 못하면서 솔직한 사람들은 그게 대체 뭐냐고 물어본 다음 피식 하고 웃어넘길 테고, 마지막으로, 알건 모르건 그럴듯한 문구가 나오면 자신이 원래부터 그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듯이 행세하는 자들은, 내게 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이 일로 돈을 벌고 있으니 대중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이 천박한 시선을 통해 작품들을 힐끗 깔아보는 것과 거리가 있다는 점을 늘 상기하고 있는 한, 이 분야에 있어서 드라마는 비평의 대상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정성일의 영화평에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보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 영화광은 결국 영화로부터 뛰쳐나가, 자신의 독자들이 가위눌려있는 80년대의 거리 속으로 달려간다. 나는 그의 문장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가,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지향하고 있는 바에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