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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3

동맹과 보험

우크라이나가 지금 나토에 가입할 수 없는 이유는 전쟁중이기 때문이다. 나토는 가입국이 전쟁하면 자동 참전하게 되어 있는데, 당장 나토가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토는 군사 동맹이며, 함께 전쟁을 하는 것이 그 존재 이유다. 우크라이나는 나토가 나토이기 때문에 나토에 가입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암보험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보험은 병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지만, 정작 병에 걸려 있거나 질병 이력이 있거나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은 보험 가입을 제한당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결론: 한미동맹, 있을 때 잘 하자.

참고기사: "나토 가입, 핀란드·스웨덴은 되고 우크라는 안되는 이유", 뉴시스, 2022-05-13

2022-04-29

자기 투사: 미국은 러시아가 제대로 군사 개혁을 했다고 전제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현재까지 드러낸 온갖 난맥상의 원인이야 분명. 부패했고, 사기가 낮고, 실전 경험도 부족하고 등등.

그런데 미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대가 이지경일 줄은 몰랐음. 왜 러시아의 군사적 역량을 실제보다 높게 보고 있었을까?

러시아는 2008년 조지아(aka 그루지아) 침공 당시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꼴을 못 보여줌. 군사적 치욕을 경험. 그 후로 국방 예산도 엄청 늘림.

미국은 그걸 이렇게 해석했음. 러시아 군대가 진짜 강해졌겠다.

그런 판단의 기저에는 '사람은 남을 평가하면서 결국 스스로를 바라본다'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했음.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굴욕을 맛본 후 철저한 분석과 개혁을 단행. 그래서 1차 걸프전에서는 한 해중 가장 짧은 2월 한 달이 다 지나기도 전에 나라 하나를 쓰러뜨리는 괴력을 과시.

미국은, 자기들이 그러니까, 러시아도 제대로 군사 개혁을 했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다는 소리. 물론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음. 

웃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교훈'이 있음. 

문재인 정권이 5년 내내 했던 반일 선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 그들이 일본을 상대로 했던 손가락질, 결국 문재인과 민주당의 멘탈리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던 것임. 

같은 비판을 스스로에게도 해볼 수 있어야 성숙한 어른이겠지요. 길지만 재미있는 기사입니다. 

"This belief was based on the assumption that Russia had undertaken the same sort of root-and-branch military reform that America underwent in the 18-year period between its defeat in Vietnam and its victory in the first Gulf war. In 2008 a war with Georgia, a country of fewer than 4m people, though successful in the end, had exposed the Russian army’s shortcomings. Russia fielded obsolete equipment, struggled to find Georgian artillery and botched its command and control. At one stage, Russia’s general staff allegedly could not reach the defence minister for ten hours. “It is impossible to not notice a certain gap between theory and practice,” acknowledged Russia’s army chief at the time. To close that gap, the armed forces were slashed in size and spruced up."

https://www.economist.com/briefing/how-deep-does-the-rot-in-the-russian-army-go/21808989

2022-03-08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답: 불가능하다. 돈도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나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해외 금융자산 동결. 아무리 많은 '외환보유고'를 쌓아도, 그게 자기 땅 자기 곳간에 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은 한, 이토록 쉽게 빼앗기고 마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깨닫고 있다.

링크한 WSJ 기사도 그런 것. 아예 첫 줄부터 이렇게 묻는다. "What is money?" If Russian Currency Reserves Aren’t Really Money, the World Is in for a Shock"

실로 그렇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그토록 열심히 축적해온 '외환보유고'라는 게, 이런 식이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과 전쟁하려고 하면 싹 동결될 싸이버 머니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돈이 그런 것이다. 돈을 돈으로 만드는 건 화폐 구성 물질의 재화로서의 가치나 유용성이 아니다. 신용을 보증해줄 권력, 힘, 폭력, 그런 것들이 돈을, 특히 기축통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노정태라는 훌륭한 필자가, 신동아라는 역사와 전통의 근본 시사 정론지에 쓴, 이 칼럼을 참고해볼 수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이어가 보자. 민주당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평화를 돈으로 사자'로 요약된다. 북한에 유화책을 펴서 돈을 주고, 돈을 더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면, 우리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논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힘이 충분히 강해 상대방이 나를 넘보지 못할 때 구현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돈을 적에게 주는 식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악당에게 돈을 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란 힘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평화의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짓이다.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그것은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이겨 세계를 정복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워낙 막대한 힘으로 평화가 강요되었기에 돈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드디어 '장기 20세기'가 완전히 끝났다. 지정학과 네셔널리즘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2022-02-27

우크라이나 전쟁: 젊깨문과 늙깨문

목수정을 비롯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발언. 이들은 러시아 선전선동을 거의 그대로 주워섬긴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 더 나아가 미국이 유인, 조장, 방조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가 '군사행위'를 하는 건 맞지만 '적대행위'는 미국과 젤렌스키 내지는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세력이 먼저 했다는 논리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듣고 많은 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특히, 유시민이 쓴 이러저러한 책들을 무슨 대단한 지혜의 교과서인 양 달달 외우고 큰,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 중 상대적으로 젊은 30대 말-40대 초반 세대가 그렇다.

편의상 그 세대를 '젊깨문', 그보다 나이 많은 40대 중반-50대까지를 '늙깨문'이라고 해보자. 젊깨문들은 나름 서구적 가치에 친숙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는 젊고 쿨하지만 저들은 늙고 촌스럽다'는 전제를 깔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을 비토한다.

젊깨문들은 늙깨문(목수정을 비롯 대놓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 욕하는 바로 그 세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지는 않다. 후진국 세대인 늙깨문과 달리 나름 중진국 세대이기도 하고, 그들이 금과옥조로 섬기는 정치적 올바름과 글로벌한 가치 등을 놓고 볼 때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현재 자아분열에 빠진 상태다. 늙깨문들이 속속들이 친러주의, 친푸틴, 침략전쟁 옹호 발언을 이 시점에, 어떻게든 자신의 세계관과 기존의 인식을 통합해야 하는 난관에 처해 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젊깨문들 역시 깨문버스 특유의 '선한 우리편과 악한 저들의 대결' 같은 원시적 대립 구도를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여도, 젊깨문들은 그 러시아를 옹호하는 늙깨문을 '우리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의 온갖 망언을 못 본 척 하고 지나가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바로 그 젊깨문 세대의 일원으로서 깊은 탄식을 담아서 하는 소리다.

젊깨문은 '머리'로는 늙깨문에게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가슴'으로는 그들을 따라가고 만다. 최근 돋보이는 한 사람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2019년 2월, 나는 이런 글을 썼었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에 낯익은 얼굴이 한 분 보인다. 안희정의 부인 민주원 씨가 '내 남편은 미투가 아니다 불륜이다'라고 하자 그것을 열심히 SNS로 옹호하시던 최민희 전 의원. 현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현). http://pcpp.go.kr/info/informati

저 최민희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최민희다. <황금빛 똥을 싸는 아이>의 저자인, 말하자면 출세한 안아키. '극문 똥파리' 빼면 다 뭉치는 분위기라고 말한 이재명 선대위 미디어특보단장.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구한말 무능부패한 왕과 조정이 일제침략을 못막았듯 준비안된 우크라이나대통령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이 희생되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최민희.

젊깨문들은 이럴 때 혼란에 빠진다. 최민희가 입으로 황금빛 똥을 싸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최민희는 이재명 캠프에 있고, 이재명은 젊깨문들의 머릿속에 '절대 타도해야 할 악'으로 설정된 국민의힘과 그 후보인 윤석열과 맞서고 있다. 일종의 시스템 오류다.

그래서 젊깨문들은 어떻게 할까? 몇 가지 현실도피 기제가 있다. 갑자기 뭐 먹는 사진이나 음악 감상문 같은 걸 올린다거나, 다짜고자 맥락없이 #PrayForUkraina 같은 해시태그를 띡 붙인다거나, 김어준 따위가 생산해 퍼뜨리는 윤석열 관련 흑색선전들을 열심히 퍼다나르며 '그래도 민주당은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자기세뇌를 강화한다거나...

그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며 따른다는 가치를 민주당이 모두 배신하고 있지만, 젊깨문들은 늙깨문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못한다. 가스라이팅의 희생자여서일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에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위탁하고, 알량한 소비 문화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세대의 일원이며,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2020-05-10

건담과 혁명

Video games offer cleaner victories. But Gundam’s appeal is about more than the drama of battle. Wong appreciates the “more boring” storylines about interplanetary diplomacy. His current favourite iteration of the Gundam cartoons “Iron-Blooded Orphans” begins on Mars, where a 300-year-old colony is seeking independence from Earth. The corrupt adult leaders force children to fight. The youngsters are “soldiers born out of the Earth sphere’s oppressive rule,” explains the fictional leader of the Mars independence movement: “They embody the problems burdening each one of us.” Although Wong denies that he wants Hong Kong to be independent – he argues for greater autonomy and democracy – the parallels are clear. He is amused by the story’s conclusion: the heroes are defeated, but the vanquishing regime adopts democratic reform anyway.

(...) Wong knows that his battles will persist – and that victory poses dangers too. He uses “Iron-Blooded Orphans” as an example to warn activist friends of the challenges they’ll face even if their cause eventually prevails. The youngsters on Mars win many battles but when they achieve power they struggle with how to administer their affairs: “There’s a lot of internal conflict.”

Caroline Carter, Simon Cox, "Gaming with Joshua Wong", 1843 Magazine, 2020년 6·7월호
스노든이 역사적인 폭로를 감행할 때 머릿속에 어떤 게임 캐릭터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은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를 현재 탐닉중이라고. 내면이 흔들릴 때 건담을 생각하는, 홍콩과 인류의 민주주의 영웅.

2020-04-13

중국 자본주의와 코로나 19

2003년 사스도 그렇고 이번 바이러스 대란은 중국이 무책임한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이미 경제적 기반이 있는 부농들이 일반적인 농업을 선점하자 빈농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 대책으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아무 생각 없이, 현존하는 모든 동식물을 천연자원으로 간주하여 채집 수렵 매매를 원천적으로 허가합니다.

그래서 특히 내륙의 밀림과 맞닿은 우한시 등이 야생동물 밀렵(도 아니죠 사실) 거래의 천국이 되었고 야생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온 겁니다.

이건 제 뇌피셜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 학자를 인터뷰한 미국 언론 Vox의 보도 내용입니다.

"How wildlife trade is linked to coronavirus", Vox, 2020년 3월 6일.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처럼, 야생동물 밀렵을 금지하고 매매를 엄금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10여년 단위로 새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은 없었겠지요. 공산주의를 빙자한 극단적 자본주의의 인류적 민폐라고 봅니다.

좋은 시장경제, 바람직한 시장경제라면 시장에서 매매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후자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는 양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냥 돈이면 다 되는 아수라장인 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이런 위험을 안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아무거나 영리활동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니, 온갖 야생동물을 잡아서 비위생적으로 유통하는 시장이 생겨버린 겁니다.

저는 이번 판데믹의 전개를 보며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회복 능력'의 대립 구도를 상정하는 논의가 매우 불편합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건 2년 후면 인류 전체 인구의 60%가 감염되면서 끝납니다. 스페인 독감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 경우도, 최악이라 해도, 그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지배할 것이고, 인류는 화석 연료를 활활 태울 것이며,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바이러스 앞에 죽어나가는 선진국 시민들'을 보면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끼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정리해보겠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자연의 복수가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은 중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 잘 제어되는 시장질서와 경제 윤리, 그리고 원시림과 야생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 하는 '서구적 자연 관리' 개념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2020-04-05

코로나의 불똥?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귀환하고 있다

지난 3월 16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대국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불필요한 이동과 사회적 접촉을 삼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연거푸 전달한 그에게 한 기자가 던진 질문.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국경은 과연 잘 통제될 수 있겠습니까?’

CNN으로 그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국경 문제, 이른바 ‘백스톱’은, 브렉시트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다수의 영국 언론은 검문소와 담장 등 물리적 국경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영국의 국경은 튼튼한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코로나-19가 뒤집어놓은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귀환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국경 없는 세계주의’를 선으로, ‘자국 중심주의’를 악으로 단정짓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 확산이 본격화되고 있음에도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도덕관념에 기댄 것이기도 했다.

지난달 11일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에서 의료진이 운전자의 체온을 측정하고 있다. 이날 슬로베니아 정부는 이탈리아와의 국경을 차단한다고 발표했다./게티이미지

하지만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어도 바이러스 대응에는 국경이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외교 논평가인 기드온 라흐만(Gideon Rachman)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여분간 이어진 대국민 연설에서 단 한 번도 유럽연합(EU)을 언급하지 않았다. 독일은 EU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다. 그런 독일마저 코로나-19 앞에서 오직 독일 자신만을 챙기는 중이다.

EU는 미국처럼 내전을 치러가며 국방, 치안, 행정 등을 통합하는 대신 그저 같은 화폐를 쓰고 인구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만으로 연방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상주의적 기획이었다. 좋을 때는 좋았지만 힘든 시절이 오니 어림도 없다. <포린 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3월 현재 이탈리아의 발병 건수가 중국을 넘어서고, 성당마다 시신이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EU 회원국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EU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다.

초국가적 공동체의 이상이 무너지고 나니 국민국가의 모습과 개성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앞서 말했듯 독일은 위기가 닥쳐오자 감정을 배제하고 국민의 60% 이상이 감염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질병과의 총력전에 나섰다. 흔히 프랑스를 ‘시위할 때 자동차를 불태우는 나라’, ‘왕의 목을 자른 나라’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자 마크롱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대국민담화를 통해 친구들과 만나 파티를 벌이는 국민, 특히 청년들을 꾸짖었다.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드골을 거쳐 오늘날까지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의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국가가 아닌 도시나 마을 단위로 귀속감을 느낀다. 최근 화제를 끌었던, 한 이탈리아 시장이 시민들을 향해 조깅하지 말고 개 산책시키지 말라고 화내는 영상을 떠올려보자.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돈 까밀로와 뻬뽀네(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가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가톨릭 신부와 공산주의자 시장의 힘싸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연방국가로서 미국이 가지고 있는 특성 또한 이번 일을 통해 도드라졌다. 지난 3월 27일, 지나 레이몬도 로드아일랜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배치해 뉴욕주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을 멈춰세우고 격리 조치에 대해 상기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각 주가 무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연방국가이며, 남북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그 틀을 지켜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힘은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있다. 그 DNA는 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와 일부 언론은 한국의 코로나-19 검사 속도를 소위 ‘국뽕’의 소재로 삼아왔다. 이는 민간 기업이 신속하게 내놓은 5종의 키트를 임상병리사들이 수작업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다. 반면 미국은 3월 31일 현재 자동화된 과정을 통해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코로나-19 확진 여부를 검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포드 모델 T처럼 전차를 찍어내고, 돛단배나 요트처럼 군함을 띄우던 저력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은, 마치 처칠의 그 유명한 연설처럼,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피와 땀과 눈물’뿐임을 천명하고 단결과 희생을 호소하는 중이다. 기자회견장에서 보리스 존슨이 보좌관들과 설명한 바, 코로나 사망자는 세 종류다. 건강한데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경우, 기저질환이 있고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경우, 의료 과부하로 치료를 못 받아 다른 병이나 사고로 죽는 경우. 코로나-19의 치료제가 없는 현실 속에서 병원에 온다 한들 첫째 경우는 공공의료체계 NHS가 해줄 일이 없다. 아파도 집에서 참아야 한다. 그래야 세 번째에 해당하는, 대구 17세 소년 같은 환자가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집에 있자, NHS를 지키자, 생명을 구하자. 본인도 확진자가 된 후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존슨 총리는 본의 아니게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바이러스의 대공습 앞에 국제주의와 탈국가주의의 이상은 온데간데없이, 각국이 뿔뿔이 흩어져 대응하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경제평론가 마틴 울프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에 ‘윤리적 과제’를 던진다고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기드온 라흐만은 이 사태로 인해 극우 민족주의자와 극좌 환경주의자라는 양 극단이 기승을 부리게 될지 우려한다.

하지만 대만처럼 선제적으로 중국발 입국을 차단한 뉴질랜드는 노동당 출신의 1980년생 여성 총리 저신다 아던의 지휘 하에 사망자를 한 자릿수로 묶어두고 있다. 2015년 완전한 남녀동수 내각을 출범하며 세계인을 놀라게 했던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또한 해외 입국을 차단한 상태다. 차이잉원 대만 총리의 진보적 성향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진보 정권들이 선제적으로 자국민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국민국가를 절대악도 필요악도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코로나-19가 퍼지기 이전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삶의 조건과 윤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조선닷컴 | 입력 2020.04.04 12:0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3/2020040303118.html

2020-04-04

코로나 바이러스와 페미니즘의 위기

COVID-19 사태는 여성주의와 그 성과마저 위협하고 있다. 재택근무 혹은 자가격리가 일상화되면서 당연하다는 듯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떠안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외신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지만 아시아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8일 재택근무와 함께 가사노동·자녀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어린이집과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특히 일하는 여성의 육아 고충이 커지고 있다. 성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가연, “”코로나 때문에 일이 두배” 육아·가사노동에 피로 호소하는 여성들”, 아시아경제, 2020년 3월 10일. https://www.asiae.co.kr/article/2020031009205389640

이는 단지 집에서 밥을 더 자주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이 여성에게 편중되게 떠넘겨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경우 SNS를 통해 재택근무중인 여성들을 상대로 ‘남자를 위한 직장의 꽃’ 역할까지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가 빈축을 산 바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여성부는 앞서 이동제한령에 따른 봉쇄 기간 중 아내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들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현재 삭제된 게시물에서 여성부는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여성들이 집에서도 편하게 입기보다는 옷을 단정히 입고, 화장도 하라고 권했다. 평상복 차림의 여성 그림에는 금지 표시를 하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PC작업을 하는 여성을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여성들이 가사일에 도움이 필요할 때 ‘비꼬는’ 태도를 남편에게 취하지 말라고도 했다.

조재희, “”아내들, 잔소리말고 화장해라”가 봉쇄 기간 정부 지침?”, 조선일보, 2020년 4월 1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1/2020040101974.html
/말레이시아여성부 인스타그램·호주 ABC | 조선일보 기사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경제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추구한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라는 명분 하에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아무런 사전적 사후적 제약 없이,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할 권리
  2. 여성이 직장에서 일함에 있어서 소위 ‘여성적인 역할’에 묶이거나 그러한 역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보다 근본적인 문제 또한 발생하는 중이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시행된 주말, 영국의 가정폭력 상담 핫라인에 걸려오는 학대 신고 건수가 65% 증가했다. BBC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살고 있던 여성이,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된 경우도 보도한다. 여성의 경제적 생활과 권리 이전에 직접적인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은 COVID-19가 최초로 터져나온 중국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마치 그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처럼) ‘우리가 코로나 대응을 정말 잘한다 최고다’ 따위 프로파간다에 매진했는데, 그 주요 소재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동원되어 왔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 헌신하기 위해 삭발한 간호사의 눈물겨운 사연이라던가, 뭐 그딴 것들. 인터넷의 반응을 살펴보면 일부 한국인들은 그런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여성의 신체를 정권 홍보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위챗 기사가 1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올린 후 검열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중국의 의료 현장에서 여성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홍보를 위한 성적 이미지의 대상으로 착취당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들보다 더 열등한 급식을 받아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한 바 있다.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여성을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대상화하고, 뜯어먹는 것이다.

The propagandists’ portrayals of women during the epidemic—as self-sacrificing, brave or beautiful—“basically all follow the playbook”, says Zoe, the blogger. But she was surprised to see a state-run charity follow the volunteers’ lead and donate sanitary pads. People’s Daily has condemned “feudal” attitudes to menstruation and eulogies to “extreme behaviour” such as returning to work right after a miscarriage. Only fierce and widespread anger, she reasons, could have spurred the party’s mouthpiece to say such things.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https://www.economist.com/china/2020/03/07/covid-19-has-revealed-widespread-sexism-in-china

아직 사태가 종식되려면 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잠잠해진다 해도 언제 다시 발병자가 솟구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러한 재앙을 기회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권력의 움직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2020-03-28

스페인 독감은 인도 인구의 6%를 희생시켰다

So covid-19 could soon be all over poor countries. And their health-care systems are in no position to cope. Many cannot deal with the infectious diseases they already know, let alone a new and highly contagious one. Health spending per head in Pakistan is one two-hundredth the level in America. Uganda has more government ministers than intensive-care beds. Throughout history, the poor have been hardest-hit by pandemics. Most people who die of AIDS are African. *The Spanish flu wiped out 6% of India’s entire population.*

“The coronavirus could devastate poor countries”, The Economist, 2020년 3월 26일. https://www.economist.com/leaders/2020/03/26/covid-19-could-devastate-poor-countries

2020-03-25

유발 하라리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찬양하지 않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하긴 했다. 하지만 한국'만'을 논한 것도 아니고, 예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Financial Times에 기고한 칼럼 중 한국이 등장하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자.

Asking people to choose between privacy and health is, in fact, the very root of the problem. Because this is a false choice. We can and should enjoy both privacy and health. We can choose to protect our health and stop the coronavirus epidemic not by instituting totalitarian surveillance regimes, but rather by empowering citizens. In recent weeks, some of the most successful efforts to contain the coronavirus epidemic were orchestrated by South Korea, Taiwan and Singapore. While these countries have made some use of tracking applications, they have relied far more on extensive testing, on honest reporting, and on the willing co-operation of a well-informed public.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 Free to read”, Financial Times, 2020년 3월 20일. https://www.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한국, 대만, 싱가포르가 공히 거론되고 있다. 또한 이 세 나라 모두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국민들의 동선을 추적하였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대륙 중국과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인권을 존중하며 검역 및 격리 절차 등을 수행하므로,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내용을 한국 언론은 이런 식으로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반면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시민들의 협조로 감염 확산을 저지한 성공적인 사례로는 한국을 들었다. 하라리 교수는 “한국은 일부 접촉자 추적시스템을 이용하긴 했지만, 광범위한 검사와 투명한 보고, 정보를 잘 습득한 대중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박형기, 박혜연, 박병진, “유발 하라리-폴 크루그먼 등 세계적 석학 “한국 배워라””, 뉴스1, 2020년 3월 22일. https://news.v.daum.net/v/20200322120107853

이것은 의도적인 왜곡 보도의 사례로 기록되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한국인들의 국뽕을 충족시켜주며 밥벌이를 하는 ‘영국남자’ 같은 캐릭터가 아니다. 왜 우리의 언론은 멀쩡한 한 사람의 학자를 한국에서 국뽕 장사하는 외국인 유튜버 수준으로 전락시키는가.

통탄할 노릇이다. 이번 COVID-19 감염증 사태로 인해, 한국 언론의 수준이 점점 더 깊게 곪아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2020-03-24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배우는 이유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코로나 대응’에서 배울 게 없는 나라도 있다.

대만, 뉴질랜드 등이 그렇다.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차단하고, 귀국하는 자국민의 건강 관리와 동선 추적을 제대로 해낸 그 나라들은, 미국이나 유럽 입장에서 볼 때 배울 게 없다. 걸리지도 않은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지금처럼 100명 넘는 사망자에 8천여 명의 감염자가 나오도록 사태를 키우지 않았다면, ‘세계가 보고 배우는’ COVID-19 대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 것. 돌아가야 할 사회 기반이 제대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아무 일 없는 일상’을 지켜주는 것.

반대로 기업은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해결책을 팔아먹는 집단이다. 멀쩡히 다들 3.5파이 이어폰 잘 쓰고 있는데, 애플에서 ‘유선 이어폰은 적폐다’라고 손가락질하더니, 이어폰 구멍을 없애고 ‘혁신적’인 에어팟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한국 정부의 COVID-19 대응은, 국가로서 수준 미달이다. 없어도 되는 문제를 키우거나, 문제가 커지도록 방치한 후, 허둥지둥 처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걸 외국에서 참고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정말 좋은 나라, 국민을 진정 보호하는 나라는, 그런 문제가 아예 생기도록 하지 않는 나라다. 대만이나 뉴질랜드처럼.

2020-03-21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는 진짜 이유

간단하다. 외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는 진짜 이유는 그러므로, 그 언론이 자리잡고 있는 국가의 방역을 비판하기 위한, 헐리우드 액션이다.

마치 '엄친아'와 '엄친딸'이 완벽한 존재인 것과 비슷하다. 엄마 친구의 아들 딸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애여서가 아니라, 내 새끼 잘 되라고 혼내기 위해 엄마들은 자기 친구의 아들 딸을 세상 최고의 모범생이자 효자 효녀인 것처럼 칭찬한다.

외국 언론의 기사에서 한국이 바로 그 '옆집 걔'다. 외국 언론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나라인지 진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실제로 진심어린 예찬을 보내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한국 언론은 왜 이렇게 '해외 언론이 한국 방역에 깜짝 놀라 엄지척을 했다'에 집착하는 걸까?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방역 대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런 문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취재하는 대신, '국뽕팔이'에 도움이 될 요소들을 긁어서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내 언론에 소개되는 '해외 언론의 찬사'를 보면, 한국 언론의 수준에 화가 난다.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동시에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견인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러나 지금 언론이 하는 짓들은 어떤가. 국민을 '나랏님의 멋진 모습' 앞에 따봉 날리는 청맹과니 박수부대로 길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 같은 저질 기사가 계속 나오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선진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면, 그 나라의 주요 언론을 아무리 뒤져도 한국처럼 이 와중에 이런 재앙을 소재로 국뽕팔이를 하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다.

단적인 비교를 해보자. 뉴욕타임스에 '세계가 깜짝 놀라는 미국의 COVID-19 검사 속도' 같은 기사가 나오나? 안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뉴욕타임스'를 지향한다는 수많은 진보 언론은 그딴 기사를 하루가 멀다하고 내보낸다. 그 정도면 모를까, '미국인들은 사재기를 한다네요 우리는 안 하는데~' 같은, 불과 한 달 전의 현실을 까맣게 잊은 듯한 국뽕 기사도 최근 쏟아져 나왔다.

이게 우리의 수준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세계가 칭찬하는 한국'을 여태까지도 찾아 헤매는, 이 와중에도 그러고 있는, 그게 바로 우리 언론의 수준이고 그래서 우리는 선진국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선진국 되려면 멀었다. 그런 면에서라면, 사회 엘리트의 건강한 정신과 판단과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20-03-19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었다.

'미국, 유럽인들은 왜 사재기를 할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은 안 그러는데?' 같은 소리 하면서 국뽕 빠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도 그짓 다 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2월 23일자 기사를 보자.

대량 구매 행렬은 대구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22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의 한 마트에서도 라면, 생수 등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같은 날 창원구 진해구의 한 온라인 카페에는 마트 내 유제품 판매대가 텅텅 빈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 서초구 코스트코 양재점에서도 매장 개점 이후 한 시간 만에 생수 수백 세트가 동났다. 서초구 거주자 박모 씨는 “서울도 이제 사재기 붐이 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나 생활용품 구매에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회원 수가 190만 명에 달하는 네이버 온라인 커뮤니티 ‘파우더룸’에 ‘코로나19 때문에 100만 원을 썼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밖으로) 최대한 안 나갈 수 있도록 비상식량, 비누, 세정제, 마스크, 생활용품 등을 사 놓았더니 100만 원이 넘었다”고 했다. 이에 다른 회원들은 “나는 200만 원을 썼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실제로 온라인 주문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G마켓에 따르면 20일 즉석밥과 라면 매출은 일주일 전인 13일 대비 각각 54%, 80% 늘었다. SSG닷컴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1월 20일부터 2월 20일까지 식품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8% 증가했다.

"마트 먹거리 매대 ‘텅텅’…코로나19 확산에 ‘사재기’ 행렬 잇따라", 동아일보, 2020년 2월 23일

다들 좀 최소한의 품위를 갖고 살면 좋겠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불안하면 일단 주변 사람들 보고 따라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러 가면 나도 사러 가야 안 불안하다.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하는 것은 대체로 미국인들이 집이 넓고, 넓은 지역을 점유해서 살기 때문에 한국처럼 모든 것을 온라인 배송으로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즉 '생필품 서플라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역시 한국처럼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트에 직접 가서 우르르 사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사람이고, 당신도 사람이다. 외국 네티즌들이 한국 약국 앞에 마스크 사겠다고 줄 선 거 보면서 낄낄거리면 기분 좋겠나? 정말이지, 너무도 천박하다.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다. 한 달도 채 안 된 일이다. 윤리의 많은 부분은 기억력에서 나온다. 기억을 좀 하면서 살자.

2020-03-08

정부와 언론의 뻔뻔스러운 '바이러스 검사 맛집' 프레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놀랍지 않다. 여론조사가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여론 그 자체가 조작에 가깝도록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뭘 잘못해왔는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뭘 더 잘못할 예정인지 모른다. 대신 그들이 아는 것은 언론을 통해 유포된 이상한 프레임이다. 가령, 이런 것들 말이다.

  1. 한국은 정말 빠른 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전 세계가 깜짝 놀라 감탄한다.
  2. 한국은 정말 투명하게 정부가 모든 정보를 공개하며,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싸우는 전 세계 정부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일단 1을 살펴보자. 얼핏 들으면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개쩔게 잘 대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는 것은 그만큼 감염자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검사를 할 일도 없다. 이건 마치 집이 활활 불타고 있는데 소방수가 불 잘 끈다고 좋아하는 꼴이다.

COVID-19 감염증 검사 프로토콜. 일단 열이 나야 하고, 마른기침을 동반한 가래가 나와야 한다. 그 가래를 채취하여 검사한다. 1차 의료기관에는 지금도 수많은 감기, 폐렴 환자들이 당도한다. 의사들이 그들 중 COVID-19 감염 의심자를 걸러낸다. 그렇게 한 차례 선별된 의심 증상자들의 가래를 채취하여 샘플을 만들고, 샘플을 분석하여 확진자를 선별한다.

즉, COVID-19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고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검사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 대상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음성이 나오고 일부는 양성이 나온다. 그렇게 양성이 나온 사람들만 확진자다. 이 관계를 집합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확진자 ⊂ 피검사자 ⊂ 유증상자

그러므로 한국에서 검사를 빨리 한다고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다. 외국인들이 보면 신기하긴 할텐데 그게 외신에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의료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만큼 COVID-19 바이러스가 퍼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세계가 깜짝 놀라는 한국의 검사 속도'를 자랑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과 청와대의 판단 착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한국의 검사 속도 세계가 깜놀!'같은, 무슨 나영석 PD가 연예인들 데리고 외국 나가서 식당 차리고 외국인들이 맛있다고 따봉 해주는 것 같은 프레임을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물론 외신들은, 좀 보기 드문 일이긴 하니까 보도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그런 장단에 놀아나는 건 좀, 문제 있지 않나? 집에 홍수가 나서 오수가 역류하고 있는데 '캬, 우리 형님 바가지로 물 퍼내는 솜씨 보소~ 엄지척!' 이지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 프레임도 그렇다. 귀찮아서 모든 외신을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어권 언론이라면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를 백퍼센트 찬성하거나 환영할 까닭이 없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주 이코노미스트를 펼쳐보니,

In South Korea, by contrast, the government is being forthright and formidably transparent, allowing Koreans to trace their possible brushes with the disease. As well as briefing the press thoroughly twice a day, and texting reporters details of every death, the government puts online a detailed record of each new patient’s movements over previous days and weeks, allowing people to choose to shun the places they visited. The risk of illicit activity being thus uncovered—at least one extramarital affair may have been—gives people an extra incentive to avoid exposure to a disease which, in most of the infected, results in only mild symptoms.

한국에서는 대조적으로 정부가 직설적이고 투명해서 한국인들은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스스로 추적해볼 수 있다. . . . 바람직하지 못한 활동이 드러날 위험도 있다. 적어도 한 건의 불륜 사례가 드러났으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감염 사례에서 가벼운 증상만 보이고 끝날 수 있는 이 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더욱 피하게 만드는 유인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What the world has learned about facing covid-19", The Economist, 2020년 3월 5일

국민의 신용카드와 교통카드 정보에 기반해 누군가의 소비와 동선을 모두 추적하여 까발리는 것은, 외신들이 나오는 '서구 선진국'이라면, 영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수집하여 언론에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을 '투명성'이라고 아이고 좋다 멋지다 한국 최고~ 라는 식으로 영어권 언론이 다룰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할 것이다. 지금 위에 인용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처럼, 다들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우려를 전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해당 대사를 좀 더 읽다보면 등장하는 문단은, 한국인 중 상당수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투명성'이라는 것이 외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정직하게 알려준다. "한국의 권력은 시민의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을 둔다. 한국의 대응 중 일부는 다른 민주 국가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South Korea has powers that put very little weight on its citizens’ privacy; some aspects of its response might be hard to mount in other democracies.)

물론 그 이후로 케나다의 사례를 들어, 국민의 동의 하에 잘 작동하는 민주국가가 국민의 설득과 동의 하에 격리 조치 등을 더 잘 시행할 수 있다는 서술이 따라붙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한국의 '투명성'이 기존 민주국가의 상식과 어긋나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야 한국의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투명하다고 뉴욕타임즈 같은 외신에서 막 좋아요 쌍따봉 했다는데?' 정도로 알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와대의 편에 선 언론들은 청와대 편을 드느라 그런 식으로 단장취의하고 있으며, 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들 또한, 어쨌건 '국뽕 장사'를 하면 조회수에 도움이 되니까, 국뽕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니 청와대는 여론조사를 조작할 필요가 없다. 여론 자체가 조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대응이 잘못되어 이 사달이 나고 있는데, 확진자 빨리 잡아낸다고 좋아라 하는,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논리가 통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한국은 '바이러스 검사 맛집'이 아니다. '정부가 투명한 국가'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지도 않다. 바이러스가 퍼질대로 퍼진 감염국이며, 국민의 사생활이고 뭐고 일단 까발리고 보는, 국민의 사생활을 덜 보호하며 민주적 원칙을 쉽게 양보하는 국가다.

여러분이 읽는 수많은 '외신에서 어쩌구' 타령에서, 국내 언론이 감추고 있는 이면의 맥락이 이렇다는 것이다. 다만 그 외신들은 '젠틀'하게, 우리의 면전에 대고 저런 소리를 안 하고 있을 뿐이다.

2020-02-19

미국의 간선제와 땅의 힘

미국의 간선제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 원초적인 문제 말이다.

미국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제도라던가, 기축통화인 달러라던가, 군사력이라던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리잡은 땅덩이에 있다. 캐나다나 멕시코가 미쳐 날뛰지 않는 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좌우에 두고 있어 육로로 침공이 불가능한 나라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의 내륙은 미시시피강이라는 굵직한 강줄기 덕분에 산업화의 초기부터 해양 운송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가령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여느 내륙 국가와는 다른 여건이라는 말이다. 한술 더 떠서, 19세기에 세계 최초의 통상적인 유전이 개발된 곳도 미국인데, 21세기는 셰일가스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어 있다.

석유만 나오면 말을 안 한다. 우라늄도 충분하다. 우라늄만 있는가? 미국의 중서부 평원 지대는, 물론 지금은 많이 황폐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세계 대다수의 사람과 가축을 먹여살리는 천혜의 곡창지대다. 미국은 철도 있고 밀도 있고 석유도 있고, 우라늄도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일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본의 인구는 미국의 절반 정도다. 그렇다고 일본이 지금 갑자기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다 해서 미국과 같은 국력을 가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일본에는 (충분히 쓸만한 양의 많은) 철도 없고, 밀도 없고, 인구 전체를 부양할만한 농업 생산이 불가능하며, 석유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미국의 힘은, 톡 까놓고 말해, 미국의 땅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 동부 서부 해안에 사는 리버럴듯이 비웃듯이 지껄여대는 'Flyover States'다. 캘리포니아만 떼어놓고 보면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캘리포니아가 미합중국에서 분리 독립하면 아무도 캘리포니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힘은 동부와 서부에 모여 사는 인구와, '건너뛰는 땅'에 있는 그 무지막지한 천연자원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미국을 경험했거나,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미국의 리버럴, 리버럴이 아니어도 메인스트림의 시각에 자신을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미국이 미국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원초적인 이유를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래도 된다. 미국인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미국인이 아니니까. 미국이 왜 미국인지, 왜 그런 힘을 가진 초강대국이 군림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인을 잘못 분석하면 '인구 14억을 넘는 중국이 인구 3.5억인 미국을 능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허튼소리나 내뱉게 된다.

미국은 미국의 사람과 제도와 땅이다. 특히 마지막 요소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 점을 다들 잘 이해하면, 2020년의 국제정세에 대해 좀 더 좋은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2019-12-15

EU가 원자력을 친환경에너지로 인정했다

EU 정상들은 원자력 에너지를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해달라는 일부 회원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부 국가에 한해 에너지 믹스(전력 발생원의 구성)에 원자력을 포함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헝가리와 체코는 EU가 원자력을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룩셈부르크를 비롯해 단계적인 원자력 발전소 폐쇄를 추진하고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은 여기에 반대해왔다.

김정은, 현혜란, "EU,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 합의…폴란드는 일단 유예(종합)", 연합뉴스, 2019년 12월 13일. 기사 원문 링크.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모두 질 좋은 갈탄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뿌리 깊은 석탄 산업의 힘이 정치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자력발전이 늘어나면 석탄화력발전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독일의 '탈원전'은 석탄화력의 사용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석탄화력은 원자력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석탄이라는 연료를 공급하고, 석탄을 태우면서 나오는 재를 치우는 등의 온갖 과정에 사람이 개입해야 하므로 당연히 사고의 위험이 확률적으로 높아진다. 반면 원자력은 거의 모든 과정이 기계로 제어되며 자동화되어 있다. 나는 2017년에 이런 글을 썼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노정태,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노정태의 블로그, 2017년 7월 28일. 원문 링크.

그리고 2018년 12월 10일, 24세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그 역시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물론 2인 1조 작업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측의 무리한 경비 절감이 그의 죽음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의 구조 자체가 이와 같은 산업 재해에 취약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나는 원자력이 기후변화의 대응책으로서 유의미하고, 특히 석탄화력발전에 비해 노동자에게도 안전한 에너지원임을 줄곧 역설해왔다. 하지만 소위 '진보'는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는 입을 열었고, 2017년 7월, 약 10여년을 칼럼니스트로서 함께해온 언론사에서 잘려나갔다.

존경하던 사람들을 존경하지 못하게 되었고,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던 이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당신들보다 좀 더 깨어있는 정신으로, 좀 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진보 '세력'이 한꺼번에 퇴보하고 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진보'는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19-07-01

어딘가에서 어떤 주제에 대해 한 이야기의 편집본

북한 비핵화는 이제 물 건너갔습니다. 설령 김정은 정권이 핵무기를 포기할 의향이 생겨도, 평범한 북한 인민들에게 핵무기란 민족적/국가적 자존심의 상징물이 되었기에,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트럼프의 무계획적 충동과 그에 발맞춘 대한민국 청와대가 정말 대단한 일을 해냈습니다.

북한 인민들에게 핵무기 보유란, 자신들이 경제 제재를 견뎌가며 얻어낸 일종의 보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박정희 하면 한국인들이 좋건 싫건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떠올릴 수밖에 없듯, 북한 인민들은 이제 아무리 김정은이 미워도 핵무기에 대해 애증 섞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이제 북한의 핵 포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 내에서는 자체 핵무장을 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질 것이며, 저처럼 원론적인 평화주의적 입장에서 한국의 핵무장이 가져올 군비 경쟁의 심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대항할 논리가 마땅치 않게 됩니다. 일본도 무장을 가속화해나갈 것이고, 동북아 군비 경쟁은 점점 치열해져, 현 정권의 레토릭과 달리 평화는 더 멀어질 전망입니다.

미국 대선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달린 일이긴 하지만, 이란과 북한은 좋은 반대 사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란처럼 평화적으로 핵을 내놓으면 더 큰 수모를 당하지만, 북한처럼 핵을 들고 버티면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로 번개 하자고 하고 와서 사진 찍고 농담따먹기 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 모든 Rogue States에게 아주 좋은 선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판문점을 통해서건 중국을 통해서건 북한 영토에 잠깐 들어가는 게 어려운 일이어서 지금까지 미 대통령들이 안 하고 있던 게 아닙니다. 해봐야 미국이 얻을 국익 상 이득이 없고, 북한에게는 미국 대통령이 들어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홍보 이득이 되기 때문에, 제정신을 가진 미국 대통령은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트럼프가 하고, 한국 대통령이 enabling 하는군요.

실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승자가 아닌 패자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북한 인민들도 깨달았겠죠. 90년대 이후 겪은 그 모진 가난과 배고픔이 이 승리를 위한 것이었구나! 굶더라도 핵을 갖길 잘했다! 앞으로 저들이 어떤 감언이설로 꼬드겨도 절대 내놓지 말자! 이런 인식이 깔리면 설령 독재국가라 해도 민의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북한 비핵화는 종결됐습니다. 경제 제재를 백날 천날 해봐야 소용 없고, 만에 하나 전쟁을 해도 애국심 넘치는 북한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핵을 감춰줄 것입니다. 정말이지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역사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 바로 이런 기분임을 실감합니다.

'김정은은 핵을 원하지만 인민들은 쌀을 원한다' 같은 한국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본다면, 어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사람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목적 없는 고통입니다. 어제 트럼프의 깜짝 방북으로 인해, 대북 경제 제재를 감내하는 북한 인민들에게도 '경제 제재를 참아야 할 목적'이 생겼습니다.

트럼프가 북한에 얼마나 큰 승리를 안겨줬는지, 그리고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암담할 뿐입니다.

북한 체제의 기본 정당성 원리는 '배는 고파도 자존심을 세워준다'입니다. 한국 대통령을 꾸짖고, 한국 대통령은 찍소리도 못하고, 트럼프와 만나라고 중간에 다리 역할만 해주었으며, 미국 대통령까지 만났는데, 이 모든 것이 핵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북한 체제는 정당성을 얻었습니다. 수십만을 굶기건 수만명을 수용소에 보내건 말건, 북한의 내적 붕괴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다고 해석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이렇게 이념적/이데올로기적/종교적 장치가 국가의 기층 단위에서 한번 작동하면, 설령 상부구조를 무력으로 무너뜨려도 해당 지역을 평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워집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이슬람교에 기반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그것이 기층에서 수용되고 나니, 미국이 아무리 애를 써도 밑에서부터 저항이 들끓고 진압이 안 되는 것을 연상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북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체사상이라는 유사종교가 그렇게 된 거죠.

지금까지 한국 경제란 미국의 군사적 보호와 핵우산을 전제로 해도 위험하다는 것, 그래서 소위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초기 출범 당시 북한 위험이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에 주식시장이 쭉 렐리를 했는데, 이제 북한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두루 퍼지기 시작하고, (적어도 트럼프의) 미국은 이전처럼 한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할 의향이 없거나 매우 적다는 것도 잘 알려지고 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어찌 될까요?

2018-07-23

미 에너지국: 이제 세계는 원자력을 청정 에너지로 인식해야 할 때

옮긴이의 말: 미 에너지국(Department of Energy)의 차장인 댄 브리예트가 발표한 게시물을 번역합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energy.gov/ne/articles/it-s-time-world-recognize-nuclear-clean-energy-source 세계는 탈원전과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모두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며 건강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계는 원자력을 청정 에너지로 인식해야 할 때


2018년 5월 21일

금주, 저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9차 클린에너지장관회의(Clean Energy Ministerial)에 참석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전지구적 청정 에너지 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정책과 프로개램을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촉진하기 위해 전 세계의 에너지 관련 고위직들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릭 페리(Rick Perry) 미 에너지부 장관이 지난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청정 에너지"의 개념 정의에 원자력 에너지가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원자력은 탄소 배출량이 적은 순서대로 놓고 볼 때 2위로, 오직 수력발전소만이 원자력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습니다.

만약 세계가 진지하게 탄소 배출량을 줄이면서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싶다면, 각국의 장관들은 모든 선택지를 검토해야만 합니다. 깨끗하고 신뢰도 높은, 탄소 배출 없는 에너지인 원자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NICE 미래 계획

미국, 캐나다, 일본은 원자력 혁신: 청정 에너지 미래 계획(Nuclear Innovation: Clean Energy (NICE) Future initiative)을 출범합니다.

미래의 발전된 청정 에너지 시스템과 혁신을 위한 논의의 장에 원자력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혁신적인 원자력 시스템은 전지구적인 탈탄소화(decarbonization)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이 높은 밀도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장비를 포함합니다.

  • 담수화
  • 산업 내에서 사용되는 열 에너지의 처리
  •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의 복합 시스템
  • 유연한 전력망
  • 수소 생산
  • (열, 전자, 화학적) 에너지 저장

NICE 미래 에너지 계획은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12개국 이상이 참가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이 중요한 계획에 다른 국가들도 참여해야 할 때입니다.

원자력의 깨끗한 힘

이미 전 세계 30개국에 449개의 상업용 원자로가 운용중입니다. 종합해보면 이 원자로들은 전 세계 에너지의 11퍼센트 가량을 제공합니다. 그 모든 에너지가 깨끗하고도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99개의 원자로가 전체 전력량 중 20퍼센트를 생산하며, 이는 전체 청정 에너지 가운데 56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미국은 1995년부터 2016년까지 1400억톤 분량의 탄소 배출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30억 대의 차량을 없앤 것과 동일한 효과라 하겠습니다.

다름아닌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청정 에너지를 논의하는 장에 원자력의 설 자리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협력의 힘

트럼프 행정부는 에너지 정책에 있어서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습니다.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페리 장관이 천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경제를 발전시키느냐 환경을 보호하느냐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접근법은 기술 혁신을 불러오고, 우리의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환경을 보호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자력은 깨끗하며, 신뢰도 있고, 탄력성을 갖춘 에너지원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연이어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클린에너지장관회의에서 원자력을 포함하는 것은 이 기술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일이 될 것이며, 전 세계의 우리 동맹국들에게 효용을 안겨주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해 없는 미래를 그리는데 있어서 모든 청정 혁신 기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미래(NICE Future)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모두 함께 힘써야 합니다.

나이스 미래 계획에 대해 더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댄 브리예트(Dan Brouillette)

댄 브리예트는 미 에너지국의 차장입니다. 공공 및 민간 영역에서 에너지와 관련하여 30여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7-11-05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1.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 대한민국에는 핵탄두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이 있다. 한국형 신형 원전 모델인 APR-1400은 지난 10월 유럽사업자요건 인증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안전성을 검증받은 원전 설계 기술이 있고,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원전을 만들어낼 기술과 인력 또한 확보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건만 갖춰진다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전을 '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는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말려죽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쏘는' 상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환경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마따나,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2.

2017년 11월 5일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대규모 정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초대형 허리케인 마리아(Maria)와 어마(Irma)가 발전소가 밀집한 섬의 남동부를 강타하면서 주요 송전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10월 23일 복스(Vox)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본섬의 79퍼센트가 아직 정전 상태에 놓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대정전 사태는 엄밀히 말해 발전소가 아니라 송전망이 망가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왜 송전망이 망가졌는지 따져본다면,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잘나갔던 푸에르토리코 경제가 주저앉게 된 이유의 한복판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원전 논쟁의 한복판에서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는 본디 스페인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이 물러나게 되었고, 1952년 새 헌법을 통해 미국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012년 주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것을 결정했지만 미국의 연방의회에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은 탓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령'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그 섬의 역사는 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해온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Puerto Rico Electric Power Authority (PREPA))의 역사와도 같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하고 있다. 1941년 설립된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은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호경기 속에서 함께 호황을 누렸다. 제약업체를 필두로 한 미국의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몇몇 의약품들은 잘 살펴보면 "Made in Puerto Rico"라고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1996년 클린턴 정부가 푸에르토리코의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많은 공장들이 섬을 떠났다. 그와 함께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PREPA와 푸에르토리코 자치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요금을 내지 않고 전기를 쓰고 있었다. 둘째, 경제가 위기에 몰리자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태양광과 천연가스 발전에 돈을 쏟아부었다(“The story of Puerto Rico’s power grid is the story of Puerto Rico”. The Economist.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30432-even-hurricane-maria-hit-it-was-mess-story-puerto-ricos-power-grid). 셋째, 기저발전으로서 제 역할을 해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

2016년 기준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원 비중을 알아보자. 미국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47%가 석유, 34%가 천연가스, 17%가 석탄, 2%가 신재생에너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가격이 함께 오르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 발전량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Puerto Rico - Territory Energy Profile Overview -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ia.gov/state/?sid=RQ).

애초부터 유가의 등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푸에르토리코는 90년대 말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유가의 고공행진 속에서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경제위기 이후 폭락했던 유가는 이제서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동안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 내에서 하와이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하와이의 경우 관광산업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는 반면 푸에르토리코에는 그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워낙 낙후되어 있는 탓에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다.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는 탓에 지금과 같은 대정전이 아니어도 자꾸 전기가 끊기고 공장의 생산 비용이 높아진다. 인프라가 엉터리인 탓에 경제가 절름거리고, 경제가 힘차게 달려나가지 못하니 인프라 확충이 늦어진다. 악순환이다. 앞서 인용한 Vox의 기사에서 FiveThirtyEight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발전소 설비의 연식 중위값은 44년이다. 일반적인 산업국가 발전 설비 연식의 중위값이 18년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낡은 전력 인프라에 의존해 간신히 돌아가던 경제가 초대형 태풍을 만나 좌초한 것이다.

4.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EPA는 발전원 중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천연가스와 태양광 발전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떠나는 와중이었다. 세제 혜택이 사라진 마당에, 전기요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그들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어권에서 나온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 있다. 굳이 태양광과 가스 발전을 늘리려 드는 그러한 움직임이 '친환경'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점 말이다. 산업과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PREPA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아니라 '깨끗한 에너지'에 돈을 쏟아부었다.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가스 발전기가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을 불러온 직접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저렴한 발전원이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에는 풍력 발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태풍을 맞은 상태에서도 건재하게, 전혀 고장나지 않은 발전기가 남아있었다(지멘스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하지만 발전기를 운용하는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돌지 않는 풍력 터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풍력 발전기를 최초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력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 외부 전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태평양 앞바다가 사이다여도 컵이 없어서 못 마시는' 꼴이다(Dreazen, Yochi. “Darkness: life in Puerto Rico without electricity”. Vox, 2017년 10월 23일 접속. https://www.vox.com/2017/10/23/16501164/puerto-rico-hurricane-maria-power-water-sewage-trump).

5.

푸에르토리코에 건설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 판넬이 태풍을 맞아 파괴된 모습.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일론 머스크는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자신의 태양광 발전 사업의 홍보 기회로 삼았다. 푸에르토리코 전역에 솔라시티(Solar City)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의 그러한 제안이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솔라시티에서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 내장형 타일을 시공하여 테슬라 자동차 한 대를 굴리고 집안 전체에서 쓰고 남을만큼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해도, 푸에르토리코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기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악을 듣고 TV를 볼 때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등받이 쪽의 물탱크에 새로운 물이 차오른다. 그런데 수도가 정상 작동하려면 (고대 로마나 에도 시대의 일본처럼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당연히 어딘가에서 전기를 이용해 수압을 만들어내고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가 작동하기 위해서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인프라 중의 인프라인 셈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그러한 재앙을,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위한 제품의 홍보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집집마다 옥상에 깔려서 각 가정의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전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섬의 인프라 전체를 작동시켜줄, 절대 꺼지지 않는, 어지간한 자연재해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자력 말이다.

6.

1959년. BONUS(BOiling NUclear Superheat react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BWR이라는 실험적 기법을 채택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이다. 푸에르토리코 측에서는 평범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아주 작은 용량의 시험적 설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끝인 린꼰(Rincon)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3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General Nuclear Engineering Corporation (GNEC)이 이리저리 인수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건설은 지체되고 비용이 상승했다. 결국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64년 4월에 첫 시동을 했고 1965년 9월에서야 최대 출력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발전소는 1968년 폐쇄되었고, 오늘날은 원자로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평범한, 검증된, 583메가와트의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70년 시작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978년 완전히 폐기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핵발전소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이 되어있다(“Nuclear Energy for Puerto Rico | ANS Nuclear Cafe”. 2017년 10월 22일 접속. http://ansnuclearcafe.org/2016/04/14/nuclear-energy-for-puerto-rico/).

7.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1970년의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 연방 정부의 세제 혜택 철회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다졌더라면 그토록 낙후한 발전 및 송전 설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은 경제적 실패의 문제고, 그 경제적 실패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실패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자력을 도입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둘째,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택한 것이 천연가스와 태양광이었다. 말하자면 후라이팬 바깥으로 뛰어서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린턴 정권과 함께 불어닥친 미국 내 탈원전 열풍에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미국의 담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IT 기업들이 푸에르토리코를 소재로 자기 회사의 기발한 기술을 뽐낸다. 일론 머스크 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거대한 기구를 띄워서 푸에르토리코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24시간 돌아가는 신뢰할만한 기저발전이 없다면 현대 문명은 유지될 수 없는데 말이다.

8.

관련 뉴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누구도 푸에르토리코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술 자체가 굉장히 고난이도이며, 여타의 발전소보다 훨씬 건설 비용이 크다. 당장 전기가 안 돌아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섬을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인프라가 확충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섬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다. 마치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원자력이 필요하다. 설령 폭풍우와 기상 악화로 석탄이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실은 배가 입항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작동하는, 한 번 연료를 보급하면 1년 정도는 거뜬한, 그런 원자력 발전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석유 47%, 천연가스 34% 등의 에너지 믹스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견디고, 2008년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고유가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9.

11월 7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북핵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ICBM에 장착하여 발사 실험까지 성공하는 순간, 그것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실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미국에 핵을 '쏠'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들의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핵은 완성된 기술이며 평화적으로 활용되는 발전소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만한 기술력을 인정받은 나라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원하는 300만 이상의 (미국 대통령 투표권은 없는) 미국 시민들이 살고 있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에 핵을 '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아니 망상에 가깝다. 현 정권의 탈핵 기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내의 여론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의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원자력의 유용함과 안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래서 한국에 온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던진다면? 그렇게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밤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긴 글을 한 편 써 보았다.

2017-10-02

고래와 영웅 - 도덕적 에너지 실천에 대하여

1.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다.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의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일상은 지루하며 때로 고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과 맞장을 뜨는 사람들'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어떤 정치적 당위가 없거나 아예 부도덕한 존재라 해도, 그가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흥분하고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지강헌처럼 부당한 형사 정책에 희생된 이가 탈옥을 하면 국민들은 호응하고 그를 기린다. 하지만 신창원 같은 명백한 범죄자가 탈옥을 해도, 그저 탈옥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이 흥분하고 팬클럽이 생기며 그가 입었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이다.

약한 것과 옳은 것은 전혀 같은 가치가 아니지만 우리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설령 자신들이 실제로는 강자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포장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와 같은 무모한 도전은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박히는 어떤 '그림'이 나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마치 1975년,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포경선에 달려들던 그린피스처럼 말이다.


2.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태학 박사 과정을 밟던 대학원생 패트릭 무어(Patrick Moore)는 1971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뜨거웠던 대학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지기로 예정된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한 환경운동 그룹에 참여한 것이다. 그들은 낡은 어선 한 척을 타고 수소폭탄 실험의 현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본인들을 '인간 방패'로 제공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다.

목표와 방법이 정해졌다. 그런데 그 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처음에는 '평화(Peace)'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누군가의 제안으로 그 앞에 '녹색(Green)'이 붙었다. '그린피스(Greenpeace)'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린피스호는 그들이 막고자 했던 그 수소폭탄 실험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수소폭탄 실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과연 그린피스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린피스 호에 탔던 12명의 환경운동가들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핵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린피스의 활동은 1975년 전기를 맞이한다. "Save the Whales", 일본과 소련의 포경선에 맞서 고래들을 구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린피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포경선의 작살이 날아다니고 고래들이 물보라를 튀기는 가운데 그린피스의 젊은 활동가들이 그 어느 나라의 법도 적용되지 않는 공해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린피스는 자신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았고, 언론은 이런 '멋진 그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린피스는 전 세계인이 아는 환경운동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후 그들은 승승장구하며 다양한 환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패트릭 무어와 다른 이들의 입장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였던 패트릭 무어는 거대 조직으로 거듭난 그린피스가 염소(Chlorine)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염소는 그냥 염소일 뿐이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용 화학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나트륨과 결합된 염소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특정한 원소 하나를 두고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며 모든 종류의 일상용품으로부터 염소를 추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던 그린피스를, 훈련된 생태학자인 패트릭 무어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린피스의 창립자 중 하나인 그는 그린피스를 탈퇴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3.

화학은 화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품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린피스는 자연에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인 원자번호 17번을 가진 그 원소를 '악'으로 보기 시작했다. 포경선과 싸우는 것은 이제 식상한 일이다. 미국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지상 핵실험 따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린피스는 여전히 맞서 싸울 거대한 악을 필요로 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염소를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고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방사능을 '죽음의 파장'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방사능은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한 파장들을 이르는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면 적외선이고 짧으면 자외선이다. 그 자외선보다 짧은 파동에는 X선과 감마선이 있고,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라는 입자선도 존재한다. 이러한 파장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름이 바로 그 무시무시한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일반적으로 방사성 물질이 더 안정한 물질로 붕괴될 때 발생하는 입자선 혹은 전자기파라고 정의된다.

그냥 그게 전부다. 염소가 염소인 것처럼, 방사선은 방사선이고, 방사능이란 특정 물질이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다. 염소를 '악'이라 부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면 방사능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다.

인간은 19세기 말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방사선의 존재를 파악하고 방사능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주기율표에 써있는 자연수의 형태로 똑 떨어지는 줄만 알았던 원자들이, 중성자의 갯수에 따라 다양한 동위원소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우라늄에는 중성자가 146개 있는 우라늄-238도 있지만 143개 있는 우라늄-235도 있으며 자연계에 0.7%가량 존재하는 중성자 143개짜리 우라늄을 많이 뭉치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핵분열의 속도가 빨라지며 심지어 임계치를 넘기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발견과 기술적 진전은 도덕과 무관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있고 그것을 꺼내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만약 핵분열의 발견과 통제 기술의 발달이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핵무기의 제작은 훨씬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원유를 정제해서 나오는 가솔린이 오래도록 연료와 연구용으로만 사용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제서야 네이팜탄으로도 만들어지고 몰로토프 칵테일(일명 화염병)로도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보다 먼저 그것이 폭탄으로 사용되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원자력이라는 에너지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반핵 운동이 터져나온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린피스 역시 반핵운동 단체로 시작했고, 원자폭탄 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까지 그 모든 원자력에 반대했다. 마치 십수년 후 '염소'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듯, 그린피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환경 운동은 '방사능'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반대 운동에서 출발한 셈이다.


4.

방사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린피스는 방사능에 반대했고, 염소에 반대했고, 지금은 또 무언가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자연 현상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거대 자본/원자력 마피아/미 제국주의/기타등등'으로 표상되는 어떤 거대한 권력과 조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버젓이 진보적 담론으로 유통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거대한 조직과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소수자들'로 포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포지셔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방사능이 뭔지 몰라도, GMO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심지어는 염소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린피스의 편을 든다. 한국수력원자력과 몬산토와 카길과 미 제국주의가 그 배후에 있다고 외치면 많은 이들의 판단은 그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도덕심의 작동 원리를 그들이 잘 활용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은 권태롭고 피곤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웅의 편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포경선과 맞서 싸우는 그린피스의 모습을 TV로 보고 후원금을 퍼부어주었던 서구 시민들 중 대부분은 그 전까지 일본이 고래고기를 먹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심지어 적잖은 이들은 고래라는 동물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삼킨 동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그린피스의 활약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크고 무시무시한 작살을 단 배' 앞에 어줍잖은 낡아빠진 어선을 끌고 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 영웅들에게, 나의 후원금을 보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5.

2017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가는 탈핵 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정책적 당위성의 측면에서도 탈핵 진영은 탈핵 반대 진영에 비해 논거가 빈약하다. 아니, 사실 논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체르노빌처럼 흑연을 감속재로 쓰는 고속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후쿠시마처럼 비상용 발전기를 침수될 수 있는 낮은 곳에 배치해놓은 원자력 발전소도 한국에는 없다. 우주에서 공룡을 멸종시킬만큼 거대한 운석이 날아와 강타하지 않는 한 한국의 원전은 깨질 뿐 폭발하지는 않는다. 우라늄이 폭발할 수 있을만큼 농축되어 있지 않으니까. 심지어 북힌의 장사정포가 날아와도 원자로의 방호벽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찬성하는 이들은 당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이 그들의 편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탈핵 반대 진영은 본인들이 과학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린피스나 환경운동연합이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도덕적 당위의 담지자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핵은 '운동'인 반면, 원자력 발전은 '정책'이며 '기술'일 뿐이다. 탈핵에 찬성하는 것은, 고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린피스를 후원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을 안겨준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구차한 현실론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로 취급된다. 심지어 원자력 업계 종사자들도 종종, 그래 실은 그렇게 좋은 건 아니고 궁극적으로 보자면 없어져야겠지만 당장은 할 수 없죠,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아는, 일상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영웅적 노력의 결과물인지 아는 나잇대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원자력 발전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세상을 바꾸고 싶고, 저 거대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고,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젊은이들은, 일단 탈핵에 찬성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싱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원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왜 도덕적이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가격이 싸서, 짓다 만 발전소가 있으니까, 수십조원에 달하는 원전 시장을 빼앗기니까, 라는 식의 주장으로는 대통령 탄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청산주의적, 도덕주의적 열기를 이겨내기 어럽다.

원자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왜 사용해야 하며 왜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아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6.

이제서야 국내에서도 원자력 발전이 기후 변화 대응책으로서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교역량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세계적 트렌드에 뒤쳐진 나라다. 고맙게도 현 장권의 기습적인 탈핵 정책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원자력 발전이야말로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저발전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기후 변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21세기 인류가 처한 단 하나의 가장 큰 안보 위험 요소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후 변화일 수밖에 없다. 가령 방글라데시의 경우 인구는 1.6억인데 그 중 4천만 명 이상이 해발 1미터 이하의 저지대에 살고 있다. 해수면이 1미터만 높아져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환경 난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따로 도망갈 곳도 없으므로 최선을 다해 기후변화에 맞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최대한 많은 국토를 가꾸고, 가급적 나무를 심어서 토양의 유실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의 '신재생 발전' 드라이브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서 태양광 발전기를 짓고 있다. 그런 식으로 국토를 벌거숭이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원전은 없애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유지하고 에너지 믹스에서 원전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이거나 합리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만큼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한국에 비해 가난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나라의 빈민들이 그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처럼 인구는 많은데 기술력이 부족한 나라에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현재 방글라데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원전을 건설중이다).


7.

원자력 발전에 찬성하는 것이 과연 '영웅적'인 일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원자력 발전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너무도 안전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높이자'는 대중적인 운동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 말이다. 원자력 발전은 실로 너무도 안전하다. 얼마나 안전하냐면, 심지어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WHO 조사에 따르면,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마다 석탄은 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는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는 440명, 수력(세계 평균)은 1400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런데 원자력은 인류 최악의 사고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까지 포함해도 세계 평균 고작 90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다. 이보다 안전한 에너지원은 없다.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원자력 발전이 더 안전한 것이다.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그것을 입증한다.

안전한 원자력 발전을 계속 사용하는 것, 그 활용을 늘려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원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전의 사용은 결코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무릅써야 할 위험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원전이 '폭발'하면 수백만의 이재민이 생길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탈핵 반대 진영에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원전이 위험하지 않다고 홍보하는 쪽에 주력해왔다. 그런 계몽은 언제나 옳고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확률이 0.0000000000000000000001%여도 0은 아니니까 위험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해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과학적인 사실, 기술적인 설계, 그에 대해 쌓여있는 한국의 노하우를 놓고 볼 떄, 원전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2) 원자력 발전은 저렴하고 질 좋은 전기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으므로써, 기후 변화에 취약한 제3세계의 빈민들을 돕는 도덕적 에너지다.
3) 그러므로 아무리 사실에 입각한 안전성을 주장해도 수백조분의 1의 가능성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느끼는 그 엄청나게 희박한 가능성의 공포심을, 견뎌내시라. 그것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 사는 한국인의 의무다. 그 조그마한 공포심 때문에 우리가 원전을 포기하면, 방글라데시의 빈민가가 물에 잠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원전 공포심을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 1)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2)도 당연한 것이고 3)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은 아직도 원전의 사고 위험을 두려워하고, '수십만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핵폐기물'에 대해 정말 큰 부담감을 느낀다. 경수로에서 사용된 핵연료라고 해봐야 물에 담가서 열을 식힌 후 포장해서 쌓아두면 그만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실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그 가치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탈핵이란 원전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원전이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쁘기' 때문에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우리 인류에게 골고루 내재되어 있는 그러한 성향을 충족시킬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원전이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한 우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굉장히 안전하고 튼튼하며, 핵폐기물 문제도 과장되었다 뿐이지 사실 합리적으로 처리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면 그 걱정을 하시라고. 당신이 걱정하면서 '핵발전소'를 참아내는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환경 난민들은 웃음지을 수 있다고.


8.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며, 설령 남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포경선을 향해 달려들던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 자극한 것은 바로 그런 원초적인 참여의 본능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99.99%는 고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고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 때, 뭔가 올바른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인류 본원의 도덕심은 위안을 받았다.

그린피스는 그렇게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고, 자신들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원자력에 수십년에 걸쳐 사악한 에너지이며 죽음의 방사능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이제는 그 낙인을 벗겨내고 현실을 올바로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화석 연료의 사용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셰일 가스 로또를 터뜨린 미국은 한번 포기해버린 원전 기술을 복원하는대신 되려 석탄을 캐서 활활 불태우겠다고, 파리 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해 제3세계의 환경 난민에 대한 고민을 집어치우고, 태양광 발전기가 멈추는 밤이면 밤마다 석탄 화력 발전소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원자력은 악이 아니다. 화력도 악하지 않다. 다만 현 시점에서, 보다 나은 에너지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를 촉진시키는 화력 발전의 규모를 늘려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모두 간헐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규모의 화력발전, 특히 가스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태양과 바람의 나라는 사실 석탄과 가스로 돌아간다. 그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선진국 시민들에게는 흡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환경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다.

원자력은 안전하다. 그 안전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해두었다. 그래도 정 불안하다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지구 어딘가에 사는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원자력이라는, 아직 인류에게 친숙하지 않은 에너지의 사용에서 비롯하는 불안과 막연한 공포심을 참고 견디는 것, 원자력이 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공부하는 것,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온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한국 같은 발전된 산업 국가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도덕적 에너지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