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고작 회계 문제? 돈이 곧 윤리다

정의연 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회계 문제다. 회계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 가령 뭐 운동의 대의가 어쩌고 활동가의 선의가 저쩌고 따위는 모두 부차적이다. 장부에 돈 거래를 제대로 써놓고 투명하게 거래하는 것은 운동권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범한 시민들은 돈을 벌고 있다. 혹은 내일의 돈벌이를 위해 쉬고 있다. 돈을 번다는 건 그렇게 지엄한 일이다. 돈을 벌어서 그 기록을 투명하게 남기고, 내야 할 세금을 내고, 사장이라면 직원 월급 밀리지 않고, 회삿돈을 잘 관리하는 것 등은 모두 우리 삶의 기본이면서 가장 숭고한 영역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왜 하는가? 민주화운동을 왜 했는가?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안온하게 잘 살기 위해서이다. 남을 속이지 않고 권력에게 휘둘리지도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모든 회계는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반대로, 그 어떤 아름다운 대의를 갖다 댄들, 회계를 속이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그 사회는 투명할 수도 건강할 수도 민주적일 수도 없다.

'그깟 회계 문제'를 운운하는 자들아, 입 닥쳐라. 너희들은 지금 '그깟 회계'로 계산되는 '그깟 푼돈' 벌겠다고 새벽에 눈꼽 떼고 일어나 직장으로 일터로 택배 상하차 물류센터로 향하는 그 모든 평범한 생활인들을 모욕하고 있다. 너희들의 운동이 대체 뭐가 그렇게 고상하고 굉장하기에 이 모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돈 문제를 이토록 얕잡아 본단 말이냐. 그토록 돈 문제를 우습게 보면서 어쩌면 네놈들 뒷주머니만은 알뜰하게 채워넣고 있단 말이냐.

돈 문제다. 이건 돈 문제고, 바로 그렇기에 가장 투명하고 엄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반미주의니 반일주의니 거대한 헛소리 다 집어치워라. 돈이 깨끗하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숭고한 회계 문제 앞에서, 피해자와 활동가의 윤리가 어쩌고 저쩌고 지껄이는 배부른 운동권 족속들, 그 역겨운 아가리들을 다 닥치란 말이다.

2020-05-28

[신동아] ‘보수 박정희’ 아닌 ‘진보 박정희’ 되찾아라!

* <신동아> 2020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신동아 홈페이지네이버 뉴스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보수 박정희’ 아닌 ‘진보 박정희’ 되찾아라!

[사바나] 30대 논객이 미래통합당에 告함

●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詩)’도 있었다
● 1960년대, 각자도생 아닌 ‘모든 사람 위한 개혁’의 서사
● 이승만 시대와 다른 합리적·근대적 삶의 꿈
● ‘누구나 재벌’, 그 실낱같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기회
● ‘우리도 함께 잘살아 보세’에서 ‘우리가 남이가’로 전락
● 양주 마시던 박정희에 가까워진 오늘의 보수 정치

‘사바나’는 ‘사회를 바꾸는 나,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뉴스랩(News-Lab)으로,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 <편집자 주>



노동운동가 주대환은 “나는 4·19의 시(詩)만 읽은 게 아니라 5·16의 밥도 먹고 자랐다”고 즐겨 말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과 박정희의 산업화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 인식에 터를 잡고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펴낸 후 그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주대환은 따돌림과 배척을 무릅쓰고 한국 현대사의 어떤 진실을 말했다.

하지만 저 표현은 불완전하다. 주대환의 잘못은 아니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혹은 박정희가 한반도의 역사에 불러온 변화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을 뿐이다. 4·19에는 시가 있었고, 밥은 없었다. 하지만 5·16에는 밥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한 가지 지적해 두자. 아직 한국 사회는 위선적이다. ‘시’와 ‘밥’을 대조해 논하면, 시가 더 고결하고 밥은 세속적이며 천박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시보다는 밥이 더 중요하다. 시가 밥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 위해 모든 시를 억압해도 되는 것 또한 아니다.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도 있었다. 군사정변, 권력을 잡고 강화하기 위해 벌인 헌정 질서 문란 행위,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등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5·16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정신사적 사건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 의미를 새기고, 배울 건 배우되 반성할 건 반성해야 보수진영, 더 나아가 진보 그리고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5·16의 잘살아 보세, ‘혼자 말고 함께’


1962년 어느 날, 음악평론가 이상만이 방송작가 한운사를 찾아왔다. 5·16 1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데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랫말을 하나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상만을 통해 작사가를 물색한 이는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 훗날 자서전에서 한운사는 “지금 국민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한번 외쳐볼라나.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보따리를 팽개치자고. ‘잘살아 보세’라는 제목이 떠올랐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한운사는 김희조 당시 경희대 음대 교수가 만든 가락에 가사를, 즉 시를 붙였다.

‘잘살아 보세 / 잘살아 보세 / 우리도 한번 / 잘살아 보세.’ 설령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5·16 1주년 기념행사에서 초연됐으니 그야말로 ‘5·16의 시’다. 과연 우리는 이 노랫말을(시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잘살아 보세.’ 말 그대로, 잘살아 보자는 이야기다. 저 대목만 놓고 보자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면 감동을 준다.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살피는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는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대중문화로 보는 박정희 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잘살아 보세’의 핵심 구절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하는 대목은 묘하게 가슴을 울린다. 이 구절에서 징글징글하게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벗어나고 싶은 절실함이 함께 확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저 가사의 마법은 ‘잘살아 보세’에 있지 않다. ‘우리도 한번’이 핵심이다. ‘우리’가 함께 잘살아 보자는 말은, 그냥 ‘내가 잘살면 좋겠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망이라면 늘 있어왔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대 초, 인기 절정의 배우가 등장했던 신용카드 광고 문구를 떠올려보자.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지만 ‘부자 되세요’는 ‘잘살아 보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우리도 한번’이 없기 때문이다. 5·16의 노랫말에는 ‘우리’가 있다. 이승만 정권의 부자들이 그랬듯,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나 미군정에서 불하받은 적산가옥이나 미군 원조를 독식하는 식으로, 혼자만 잘살자는 게 아니었다. 성실한 노력과 노동을 통해 함께 잘살자는 목소리였다. 새 시대를 각자도생이 아닌 우리의 힘으로 일궈보자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그러한 경향성은 4·19와 5·16을 전후해 등장한 대중문화 작품 속에서 고루 발견된다. 이영미에 따르면, 당시 인기를 끌던 TV 드라마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신입사원 미스터리’와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는 공히 “근대적 기술의 힘을 지닌 개혁적이고 실천적이며 성실한 청년이 낡고 비윤리적인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대립 구도”를 지녔다.

신상옥 감독의 1963년 영화 ‘쌀’도 마찬가지다. 물이 부족해서 쌀농사를 짓지 못해 배고픈 마을이 있다. 지주이자 정치인인 송 의원은 젊고 실용적인 차용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저수지 공사를 하는 것을 방해한다. 결국 ‘합리적’으로 말이 통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차용의 뜻은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이영미의 평가가 흥미롭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이 작품은 정권 홍보의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너무도 명료한 영화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노골적인 정권 홍보 영화지만 나름의 감동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중학생 시절, 한국 고전 명작 영화를 TV에서 방영할 때 ‘쌀’을 처음 본 필자 또한 같은 감동을 느꼈다. 자연환경의 제약을 넘어, 고루한 인습과 기득권의 틀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개혁을 달성해 내는 서사 구조에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대중은 바로 그런 것을 원했다. 주대환뿐 아니라 필자 본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그 무렵의 시대정신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 대신 현실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에 진저리를 내고, 그러면서 술이나 마시고 신세 한탄을 하고, 푸념하고, ‘광장’의 주인공처럼 중립국을 외치다 죽거나 김수영 시의 한 구절처럼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 자아상을 탐닉해 왔다. ‘4·19의 시’란 그런 것이었다.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전근대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근대적인 합리성을 장착해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자는 에너지가 사회 전반에 넘치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사 8기로 대변되는 3공 세력은 그와 같은 대중적 분위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고, 놀라운 경제 발전의 첫 시동을 걸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5·16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오늘의 시발점이 됐다. 그 이면에는 밥뿐만 아니라 시도 있다. 어쩌면 밥 그 자체보다, 합리적이고 계획적이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실용적이고 성실한 인물상을 그려낸 시의 출현이 더 중요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1960년대에 한정해서 이야기해 볼 때, 박정희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도록 만든 에너지가 있었고,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만들어낸 결과가 있었다. 양자를 완벽히 나누기란 쉽지 않고 사실상 불가능할 테지만, 구분을 포기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유의미하며, 꼭 필요하다. 한국 보수 진영이 몰락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서다.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이승만 시대, 1950년대는 ‘사바사바’하지 않으면 취직할 수 없고, 취직해도 ‘빽’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비합리와 전근대의 시대였다. 당대인들은 그렇게 느꼈다. 그 시절을 배경에 둔 수많은 문학, 영화, 드라마 등에서 확인되는 바가 그러하다. 박정희는 억눌린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이전에 비해서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꿈과 희망을 줬다. 그리하여 군사정변 이후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식인들을 위한 4·19의 시가 아닌 대중을 위한 5·16의 시는 더욱 널리 퍼졌고, 애창됐고, 시대정신이 됐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시작했고 온갖 진통을 겪으면서도 한국인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며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물론 성공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된 방식이 전적으로 공정하지만은 않았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김우중 회장부터 모든 임직원이 상상하기 어려우리만큼 열심히 일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우의 급성장은 김우중이 박정희와 맺고 있던 돈독한 인연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었다. 국민 모두가 잘살아 보겠다는 열망을 품었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이 절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장 크고 달콤한 과실은 결국 권력과의 거리에 따라 분배됐다.

오늘날 보수 정치는 박정희 시대가 만들어낸 재벌그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국민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그 점이 보수 정치가 네 차례 연이어 패배한 이유일 테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던 시절, 그의 정치는 국민 모두가 잘살고 싶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반면 지금은 국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가 아닌, 이미 잘살고 있는 사람들만 잘사는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의 국민이 박정희를 지지한 까닭은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실낱같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기회를 나눠줬기 때문이었다. 2020년 현재 보수 정치는 과연 국민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하는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이렇게 복지 퍼주기만 하다가는 나라가 베네수엘라 꼴이 된다”고 외쳐도 국민들이 듣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국민들이 ‘빨갱이’가 돼서가 아니다. 보수 정치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정신을 내팽개친 채,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는 기득권 패거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남 탓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국민은 현재 보수 정치를 건강한 시장경제의 수호자로 여기지 않는다. 구멍가게에서 시작해 재벌그룹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 따위는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흙수저’는 ‘흙수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복지 예산 좀 축내는 게 뭐가 대수인가?

민주노총이냐 대기업 임원과 오너냐


조국 전 법무장관이 한 유명한 말을 떠올려보자. “우리들 ‘개천에서 용 났다’류의 일화를 좋아하지만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 소위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경제적 역동성과 그로 인한 사회계층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대신 각자 자리에서 안분지족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많은 이가 저 트위터 발언의 후안무치함을 지적했지만,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다시피 그렇다고 국민이 더불어민주당 대신 미래통합당을 택하는 일은 없었다. 통합당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역시, 대놓고 말을 안 하고 있다 뿐이지, 조국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국민 기층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계의 기득권과 한편에 서 있다. 하지만 통합당은 그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다니는 대기업의 임원 및 오너 등의 이익을 대변한다.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현실을 놓고 볼 때, 나 혹은 내 자식이 민주노총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대기업 임원이나 재벌 총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유권자로서는 누구를 지지하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

누구나 자신의 손으로 더 나은 내일을 개척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다면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가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조국조차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재판 중인 사안이긴 하나) 매우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시키지 않았던가.

그러한 욕망은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제공할 때 사회는 건전해진다. 자유시장경제 이론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신비한 힘을 역설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다. 6·25전쟁 직후 어떤 영국 언론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조롱했지만, 우리는 기어이 꽃을 피워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동력은 분명하다. 국민 모두 잘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열망을 헛되이 하지 않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고 외치며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스스로 자신과 자녀들의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는 ‘우리’로 호명됐고, 보수 정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문제는 보수가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의 근본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박정희가 처음 집권할 당시 그들은 보수가 아니었다. 혁신적인 젊은 피였고, 이전에 비해 공정하고 활기찬 시장경제를 선사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으며, 그 약속을 지켜냈다. 상대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진보에 가까웠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인류학 박사 윤보선과 달리 박정희는 논두렁에 앉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셨고 온 나라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양주잔 내려놓고 막걸리 마셔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시바스 리갈을 마시던 박정희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다. 오직 그런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국민들로서는 박정희 시대의 추억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거나, 지역적 연고가 강하거나, 박정희 체제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아닌 다음에야, 보수 정당을 찍을 이유가 없다. ‘여당 프리미엄’마저 이제는 민주당이 누린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며 중도층이 찍어주는 정당은 통합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말이다.

언필칭 청년 진보 논객으로 불려온 필자가 노년층이 지지하는 보수 정당을 향해 고언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 한국에는 올바른 시장경제와 합리적인 법치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당이 필요하다. 많은 국민은 통합당 혹은 넓은 보수 진영을 그저 ‘늙은 기득권 정당’으로만 바라본다. 그런 인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치는 자신의 핏속에 진보의 DNA가 섞여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 유전자를 깨울 때, 젊은이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돈이 아니라 꿈을 보고 투표한다. 모든 이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표심은 돌아올 수 있다. 양주잔을 내려놓고 막걸리를 마셔야 할 때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노정태의 시사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자기만의 방'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무렵의 어느 날 밤, 버지니아 울프는 변호사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메리 비턴이라는 숙모가 봄베이에서 낙마 사고로 숨졌고, 숙모의 유언에 따라 울프가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울프는 생계를 위해 지속하던 신문 기고, 대필, 노인 책 읽어주기, 조화 만들기, 유치원 과외교사 등을 집어치우고 문학에 몰두한다. 1928년 10월 발표한 두 강연문을 편집하여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그는 자신의 행운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은 후, 이전까지 '문학'의 영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진실을 말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만한 돈과, 자물쇠를 걸어잠근 채 혼자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울프의 주장에 '부르주아 페미니즘' 같은 딱지를 붙이고 매도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세상의 진실을 간파하고 드러낸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돈이 많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꼭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돈이 없다면 자유롭고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워지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이 쓴 <돈의 철학>을 같이 읽어보자.

사람들은 돈을 이용해 사고 팔고 주고 받으며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즉, 돈은 교환의 매개체이다. 그렇기에 돈에는 어떤 '본질'이 없다. 내가 가진 1만원이나 다른 사람의 1만원이나 모두 1만원일 뿐이고 그 외의 다른 속성을 갖지 않는다. 돈은 누가 어떻게 벌었는지 등도 가리지 않는다. 그저 '많다' 아니면 '적다'로 표현되는 순수한 양(量)적 재화인 것이다.

여기서만 끝났다면 짐멜의 논의가 오래 기억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돈의 소유의 양적 차이가 그 소유자에게 매우 현저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간파한 데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연금복권은 매달 500만원을 20년간 지급하고, 로또는 10억원대의 1등 당첨금을 한번에 준다. 둘 중에 골라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연금복권에 비해 로또가 훨씬 잘 팔린다는 현실이 말해주듯이 대체로 로또를 선호한다. 목돈이 주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물론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으며 글을 썼던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듯, 갑자기 생긴 큰 돈으로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대신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연금복권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시작해 게오르그 짐멜을 운운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고통을 겪은 여성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그 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인생의 선택지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충격적인 폭로 이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혹은 모른 척 하고 있었던 역사적 비극과 회복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짚어봐야 하는 것이다.

'돈의 노예' 같은 표현에 너무도 익숙해진 탓에 우리는 돈이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잘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인간관계'가 뒤엉켜있는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그런 꿈을 품고 귀농하거나 하면 대체로 실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습, 편견, 속박, '공동체'의 압력 따위 때문이다. 돈은 그런 것으로부터 개인을 가장 결정적으로 해방해주는 소유물이라고 짐멜은 강조한다.

대도시 런던에 살며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는 버지니아 울프가 느낀 해방감도 그런 것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 숙모님이 물려준 유산에서 나오는 몇 장의 종잇조각에 대한 대가로 사회는 닭고기와 커피, 침대와 숙소를 제공해 줍니다." 울프는 일에서 벗어남으로써 부질없는 감정도 털어내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증오심도 쓰라림도 없고, 다른 이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으며, 대신 연민과 관용을 느끼다가 그마저도 넘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누리면서,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해 저지른 짓은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회계 오류인지 회계 부정인지, 4억이면 충분할 전원주택을 7억에 구입해놓고 자기 아버지를 수위로 채용하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사실관계와 불법 여지를 모두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넘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단지 드러난 문제를 비난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윤미향과 정의연은 '자기만의 방'을 원했을 여성들까지 그저 '피해자'로 묶어둔 셈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젊은 시절 못다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아주고 싶었다면 그분들이 단 하루라도 젊고 건강할 때, 2015년 위안부 협상을 통해 일본이 준 배상금이 아니더라도,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경제적 도움을 드렸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현실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었다. 추운 단칸방에 시계 하나 안 걸어주고 온수매트 한 장 안 놓아드렸다. 여성주의의 대의를 내걸고, 다른 여성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몰아넣어둔 채, 자기 딸은 미국 유학 보냈고 윤미향 본인은 금배지를 달았다.

다시 "자기만의 방"을 꺼내든다. 울프가 강연문을 썼던 그 무렵, 영국의 '남성 문학'은 여성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오직 숭배와 예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 위선을 울프는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해부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우상(偶像)으로 박제했던 정의연의 행보 역시 그러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가 던진 질문 앞에, 윤미향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대답해야 할 때다.

* 일러두기: 조선일보 5월 23일자 주말판 지면에 실린 것과는 조금 다른 미교열 원고입니다.  신문에 실린 내용은 조선일보 홈페이지 또는 네이버 뉴스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05-22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에

일제시대에 대해 사람들이 잘 말하지 않는 진실 중 하나. 독립운동한다고 도둑질, 강도질하는 자들, 또 반대로 도둑질이나 강도질하다 붙잡혀놓고 독립운동 한다고 둘러대는 범죄자들이 참 많았다.

물론 그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고,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칼 든 강도가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독립운동가를 구분하기도 어렵거니와 안다고 해도 옹호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좋은 대의를 갖다 대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그 중 정말 어기면 안되는 것은 이미 다 형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횡령 같은 것이 그렇다. 설령 전쟁중이어도 전투의 일부로서 벌어지는 인명 손실이 아닌 살인은 처벌받는다. 그래야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의연 앞에 판단 중지'를 외친 한 기자 칼럼을 본 후, 구역질나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진정한 진보 운동의 출현과 정착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칼럼을 쓰는 사람, 이런 글에 동의하는 사람, 당신들이 소위 '적폐'와 다를 게 무엇인가.

2020-05-18

광화문과 門化光


광화문 한자 현판이 門化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한자가 기본적으로 세로쓰기이며, 문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문 세로쓰기 문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택한 매체, 죽간 때문이다. 오른손에 붓을 쥔 사람이 왼손으로 죽간 두루마리를 풀어가며 글씨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지금 우리가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문장이 점점 아래쪽으로 쌓여가듯, 죽간의 문장은 (글씨 안 쓴 여백이 왼쪽 두루마리에 있으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문자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언가에 관한, 책>의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는 이렇듯 "형식에 의해 제시되는 이용가능성"을 행위유도성(affordance)이라 부른다.

우리가 고대 중국의 죽간 때문에 생긴 행위유도성과 그로 인한 한문 작성법을 2020년 현재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광화문'이 아니라 '문화광'이라고 까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무식한 소리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정말이지 통탄할 일이다. 레닌이 말했다시피 무식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좀 유식하게 살자.

2020-05-10

건담과 혁명

Video games offer cleaner victories. But Gundam’s appeal is about more than the drama of battle. Wong appreciates the “more boring” storylines about interplanetary diplomacy. His current favourite iteration of the Gundam cartoons “Iron-Blooded Orphans” begins on Mars, where a 300-year-old colony is seeking independence from Earth. The corrupt adult leaders force children to fight. The youngsters are “soldiers born out of the Earth sphere’s oppressive rule,” explains the fictional leader of the Mars independence movement: “They embody the problems burdening each one of us.” Although Wong denies that he wants Hong Kong to be independent – he argues for greater autonomy and democracy – the parallels are clear. He is amused by the story’s conclusion: the heroes are defeated, but the vanquishing regime adopts democratic reform anyway.

(...) Wong knows that his battles will persist – and that victory poses dangers too. He uses “Iron-Blooded Orphans” as an example to warn activist friends of the challenges they’ll face even if their cause eventually prevails. The youngsters on Mars win many battles but when they achieve power they struggle with how to administer their affairs: “There’s a lot of internal conflict.”

Caroline Carter, Simon Cox, "Gaming with Joshua Wong", 1843 Magazine, 2020년 6·7월호
스노든이 역사적인 폭로를 감행할 때 머릿속에 어떤 게임 캐릭터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은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를 현재 탐닉중이라고. 내면이 흔들릴 때 건담을 생각하는, 홍콩과 인류의 민주주의 영웅.

2020-05-09

[노정태의 시사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정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아무튼, 주말] 노자의 '도덕경'과 보수정치
일러스트 = 안병현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 일명 '곤마리'가 출연한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제목이다. 독자 여러분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체구의 일본 여성이 미국의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나긋나긋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한다. 일단 가진 걸 모두 꺼내어 쌓아놓은 후,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엄격한 순서가 있다. 옷,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일단 몽땅 꺼내서 쌓아놓는다. '내가 이렇게나 짐이 많았어!'라고 경악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판단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이 핵심이다. 옷이건 책이건 옛날에 찍은 사진이건,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설레면 잘 정리해서 간직하고, 설레지 않으면 물건에 '고마웠어'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버린다.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쌓여 있던 과거와 선을 긋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걸까? 일본인은 좁은 집에 산다. 정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반면 넓은 집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의 경우 정리를 하지 않아도 대충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설레는' 것만 남겨야 하는 어떤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곤도 마리에의 주장은 그렇게 철학적 맥락을 띠게 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노자 철학의 일부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도덕경'의 11장을 펼쳐보자.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꽂혀 있으니, 바퀴통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어도 방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의 쓸모 덕분이다. 있음과 없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관계가 순환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노자 철학의 핵심 대목 중 하나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동아시아인들은 이 논의에 너무도 친숙하다. 많은 경우 이것을 철학적 논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하다. 하지만 곤도 마리에가 찾아가는 미국인들, 심지어 넷플릭스로 지켜보는 모든 이는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 가족이 사는 집, 각자 눕는 방, 심지어 자주 안 쓰는 물건을 치우는 창고까지도, 꽉 차 있으면 쓸모를 잃어버린다. 비어 있어야 쓸모가 생긴다. 더 좋은 삶과 경험을 채워넣으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는 가족이 살아가는 집보다 더 큰 단위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4월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후에도 끝날 기미가 없는 미래통합당의 내부 분열 및 의기양양한 청와대와 여당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다.
보수 정치라는 집구석에 쌓여 있는 것들을 곤도 마리에식 정리법에 따라 살펴보자. 옷. 새로 맞춘 핑크색 옷이 한가득 쌓여 있다. 설레는가? 그럴 리가. 책과 서류는 어떨까. 오랜 집권 경험을 지닌 거대 정당으로서 막대한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차고 넘친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된 바 없다. 쌓여만 있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품들은? 선거를 앞두고 '잔재주'를 부릴 법한 시점이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수 정치라는 집은 있긴 한데 쓸모가 없는 것들로 꽉 차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늑하기는커녕 퀴퀴하고 답답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추억의 물건을 살펴볼 차례다. 돌이켜보면 나쁜 것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당시, 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하여 내놓았던 일련의 정책들을 생각해보자. 이명박 정권의 여러 과오와는 별도로 오늘날까지도 참고할 만한 지점이 있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도 모든 게 잘못되지는 않았다.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공무원 연금 개혁의 화두를 제시한 정치적 용기만큼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치적 위험을 무릅쓸 수 없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이, 친박 양대 계파는 자신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상징적 자본을 쇄신하지 않았다. 탄핵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보수 정치는 설레지 않는 것들을 잔뜩 끌어안고 버티고만 있었다. 결국 국민이 보수를 통째로 내다 버리고 만 것이다.
여당과 청와대 역시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북한 깜짝쇼 따위 집어치우고, 국가에 필요한 인기 없는 정책을 펴나가야만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미래를 위한 노동 개혁이 절실하다. 21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정권이 슈뢰더 총리의 지도하에 감행한 하르츠 개혁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문제다.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에게만 유리한 노동 구도를 타파하여, 상위 20%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하위 80%를 좀 더 폭넓게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온 국민이 창의적으로 일자리를 오가고 만들어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벌어질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형에서 한국이 국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마련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의지가 없다. 대통령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국회 의석도 3분의 2나 되는데 뭐가 두려워서 할 일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쓰지도 않을 것을 모아만 놓는 이들을 '호더(hoarder)'라 부른다. '지지율 호더', 문재인의 지금 모습 아닌가. 지지율은 정책으로 환산되어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 경제가 무너지면 지지율도 의미가 없다. 김영삼은 지지율 90%를 넘긴 적도 있지만 정권 교체를 피하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된 첫 주말이다. 나들이 길에 나서는 건 성급할 수 있다. 나는 집 정리를 할 계획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를 털고, 안 쓰는 물건들을 내다 버릴 것이다. 그래야 뒤늦게 찾아온 봄을 신선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청소를 하는 동안 우리의 정치권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벌어지기를 바란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국민을 설레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다버린 후, 진짜 설레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이제 과거와 작별해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설레지 않다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보내주자.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 2020년 5월 9일자 조선일보 주말판 게재.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8/2020050802565.html
* 참고: 기사에 포함된 일러스트는 이 게시물의 사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ㅎㅎ

2020-05-05

Planet of the Humans (1)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Planet of the Humans’를 방금 다 보았다. 아무렇게나 순서 없이 일단 적어놓는 감상.

미국 민주당 계열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빌 매키번, ‘지구가 아프다 다큐’로 뭔가 큰 상도 받았던 미국 전직 부통령 앨 고어, 민주당 대선 주자로 경선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쓰고 그만둔 마이클 블룸버그 등, 쟁쟁한 인물들.

그들이 어떻게

  1. Green energy라는 구호를 내걸고 돈벌이를 하고 있는지,
  2. 자신들이 내세우는 구호와 biofuel(나무 썰어서 폐 타이어 등과 태우는 것)의 괴리를 얼버무리는지 
  3. 그 결과 지구가 어떻게 더 망가져가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충격적인 작품.

나도 한때 열심히 follow up했던 350.org 같은 조직이,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엑손 모빌이나 도요타 같은 기존 화석연료 업계의 후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큐를 다 보고 나면 놀랍지도 않은 수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제프 깁스(Jeff Gibbs)는 어린 시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시에라 클럽의 맴버로서 열심히 활동해온 열혈 환경운동가.

그가 환경운동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당신들 바이오매스에 찬성하냐’고 물을 때, 다들 해맑게 ‘절대 안되지 우리는 친환경인걸!’ 하는 모습은 정말 가슴아프다.

가장 황당하고 꼴같잖은 장면. 우리는 흔히 가운데 탑이 있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기가 100% 태양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아침 시동을 걸기 위해 가스발전기를 같이 설치한다고. (감독이 인터뷰한 환경 과학자는 그것을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면 커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농담하기도.)

풍력발전기도 마찬가지. 태양광/풍력 시설을 늘리면 늘릴수록 가스발전기가 늘어나는 모습이 다큐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환경운동가’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음.

아쉬운 점은 원자력에 대한 언급이, 한번 스쳐가듯 나오지만, 없다는 것. 탄소 배출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공격적으로 탄소 포집을 하려면 결국 답은 원자력 뿐이다.

아직 한국어 자막이 없는데, 영어 자막을 켜놓고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꼭 봐야 할 2020년 최고의 문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