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1월부터 2010년 7월까지 <미디어스>에 보냈던 원고들을 갈무리하여 블로그에 업데이트합니다.
이렇게 직접 정리해두지 않으면 URL이 바뀌거나 언론사가 사라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제 원고를 찾을 수 없게 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와 지금, 많은 생각이 달라졌고 어떤 것은 그대로입니다. 저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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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 미국 대선 결과를 보는 외국 언론들의 몇 가지 시선
https://basil83.blogspot.com/2008/11/blog-post_6.html
2009-03-13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문제적 개념 - 의회 불신의 난감한 산물…외부 여론이 방향타돼야
https://basil83.blogspot.com/2009/03/blog-post_13.html
2009-05-06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
https://basil83.blogspot.com/2009/05/blog-post_6.html
2009-05-21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알타이연합론인가 대동아공영권인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05/blog-post_21.html
2009-05-2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부엉이바위의 음모론을 경계하자
https://basil83.blogspot.com/2009/05/blog-post_77.html
2009-06-04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 태국의 노란 셔츠 시위대를 보며
https://basil83.blogspot.com/2009/06/blog-post_4.html
2009-06-1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이란 대선 시위, 남의 일이 아니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대적인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06/blog-post_17.html
2009-07-02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이명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다면 - 온두라스 쿠데타를 보며
https://basil83.blogspot.com/2009/07/blog-post_2.html
2009-07-13
[시론] 신장 유혈 사태, 타인의 비극과 우리의 미래 사이
https://basil83.blogspot.com/2009/07/blog-post_13.html
2009-07-23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커다란 이슈에 맞서는 작은 민주주의
https://basil83.blogspot.com/2009/07/blog-post_23.html
2009-08-12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버마에서 벌어지는 법의 횡포와 민주주의 - 아웅산 수치와 쌍용자동차
https://basil83.blogspot.com/2009/08/blog-post_12.html
2009-08-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 중도주의의 덫
https://basil83.blogspot.com/2009/08/blog-post_27.html
2009-09-1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강만수 특보의 이중국적 발언 – 마붑 알엄 씨의 경우
https://basil83.blogspot.com/2009/09/blog-post_10.html
2009-09-18
김어준 총수, 파티는 끝났다
https://basil83.blogspot.com/2009/09/blog-post_18.html
2009-10-09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조두순, 장자연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 엄격한 잣대가 과연 평등했는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10/blog-post_9.html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https://basil83.blogspot.com/2009/10/blog-post_27.html
2009-11-2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https://basil83.blogspot.com/2009/11/fta.html
2009-12-04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https://basil83.blogspot.com/2009/12/blog-post_4.html
2009-12-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https://basil83.blogspot.com/2009/12/blog-post_27.html
2010-03-16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https://basil83.blogspot.com/2010/03/blog-post_16.html
2010-07-29
[기고] 저 민주당과 무슨 연합을 할 것인가? - 이재오, 엄기영, 심상정
https://basil83.blogspot.com/2010/07/blog-post_29.html
2009-12-04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오바마의 대답은 병력 증파였다. 3만명 이상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로 투입하고, 나토(NATO)와 그 외 동맹국에서도 추가 병력을 보냄으로써, 2011년 이전까지 ‘이 일을 끝내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비난은 비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반미주의’라고 통칭되는 단순한 관념의 틀을 벗어나 이 파병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9/11테러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라크 전쟁, 그리고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 미국의 국제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 비판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어떤 입장과 논거에 기반하여 그것을 평가할 것인가? 무턱대고 ‘미국이 하는 행동이니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던 시간과 장소가 존재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친미주의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익한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미국을 비판하는가?
▲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청와대제공 | ||
끝없이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적어도 한 해에 한 권 이상 책을 쓰는 왕성한 필력의 소유자, 라캉을 영미권에 유행시킨 장본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비평서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 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구절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닌 애매성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박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세계경찰로서의 미국, 안 될 게 뭐 있는가? 탈냉전 상황은 실로 그 공백을 채울 어떤 세계적 권력을 요청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신 로마제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상식적 지각을 상기해 보라.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위의책 32쪽, 강조는 저자)
지젝은 ICC(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로 들어가며, 세계 제국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럴 힘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지젝은 미국더러 세계 제국이 되라는 것인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 만약 미국이 세계 제국이라면, 미국은 국제법에 있어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 국왕이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젝은 미국이 세계 제국으로 활동하려면 ICC의 규칙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가 뒤바뀐 발상이다. ICC는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만을 기속할 뿐, 그 조약이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게끔 하는 ‘권력’에게까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만약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의 지위를 벗어나 정말 세계 제국이 된다면, 이라크 전쟁도 ‘합법적’인 것으로 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현재 추진중인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드높은 이유도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의 국가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안정시키고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을 더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국경을 잘 틀어막고 신분 조회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테러의 가능성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약 1년 전 발생한 인도 뭄바이의 테러도 그렇거니와, 며칠 전에는 러시아에서 열차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1세기는 테러의 시대이며 그것은 인류가 처한 보편적 위협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키스탄 정부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내고 있다. 테러 발생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위협을 ‘미국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로 놓고 본다면, ‘왜 미국이 이런 전쟁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한 비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100명을 잡기 위해 10만 명이 투입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따져 묻는 마이클 무어의 일갈은 바로 그러한 ‘상식적인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역할을 일개 국민국가로 한정하고 있다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 행정부도 바보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 혹자는 ‘그곳에서 나오는 석유’를 전쟁의 이유로 거론하였지만, 그렇다면 미국이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다할 천연자원도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로 이루어진 척박한 나라이다. 게다가 전쟁을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전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핵심적인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왜 미국은 전쟁을 하는가? 가능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이 실제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경찰의 폭력적인 법 집행이 타당하냐 부당하냐에 대한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은 분명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이 아니라면 그 어떤 나라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테러 조직에게 값비싼 폭탄을 퍼붓고 수만 명의 병력을 보내 잔당을 소탕하려 들겠는가?
‘반미주의’라는 단순한 틀거리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탈레반은 문제적인 집단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들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의 지옥이 되었다. 현장법사가 보고 눈물을 흘렸을 거대한 바미안 석굴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으며 탈레반을 등에 업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알카에다는 민간인들이 탑승한 항공기를 이용하여 사상 초유의 테러를 저질렀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 행위마저도 ‘문화적 다양성’ 같은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러 조직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의 열악한 여건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과, 그 테러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미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폭탄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단순한 ‘반미주의’는 할 말이 없다.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대로 ‘이 전쟁은 미국 국민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니, 우리는 손을 떼자’는 식의 비판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렇다. 그 비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국 시민들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대내정책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나 가능한 화법이다.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 오지랖 넓은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게는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다. 미국이 진정 일개 국민국가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려 든다면, 우리는 더 높아진 군사비와 더 불안해진 국경을 놓고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마이클 무어는 흡족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처지는 그 쿨한 미국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지젝이 엉성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하나의 국가가 아닌 세계 제국으로 스스로를 확립하고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개 국가 자격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개시하여 한 나라를 거꾸러뜨렸다. 그런 미국에게 제국의 왕관을 씌우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 게다가 그 제국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미국의 국방비에서 나오고, 그것은 결국 미국 시민들이 낸 세금이다. 왜 한 나라의 시민들이 세계 제국의 역할을 모두 떠맡아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고된 일을 요구하면서 ‘도덕적’일 것까지 바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 특히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미국과 관련된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허술함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큰 딜레마이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딜레마에 마주설 수 있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국제 문제에서 진보진영이 ‘수구꼴통’에 비해 말빨이 딸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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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 ⓒ청와대 | ||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2009-10-31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 2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미디어행동, 야당 등은 헌재 판결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곽상아 | ||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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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2009-10-09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조두순, 장자연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 엄격한 잣대가 과연 평등했는가?
‘대체 왜 지금에서야 폴란스키를 체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피아노>, <차이나 타운>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13세 소녀에게 약물과 술을 먹인 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항문성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77년의 일이다. 46일간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은 끝에 ‘사회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고 잠시 가석방된 틈을 타, 그를 다시 구치소에 구금한 후 재판을 진행하려 했던 판사의 결정에 불복하고 미국에서 빠져나간 것은 1978년 2월 1일. 아직 미국으로 송환되지는 않았지만, 31년만에 미 사법 당국은 폴란스키를 다시 붙잡았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 | ||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내의 언론 및 예술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무관심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안그래도 ‘공인’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내의 여론이, 폴란스키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예술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메다꽂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무관심은 불행한 일이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논쟁의 씨앗을 머금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법 현실과 성범죄
연예인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마이스페이스, 기타 등등 사적인 공간을 뒤져 몇 장의 사진이나 ‘발언’을 얻어낸 후 ‘어떻게 공인으로서 이럴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인터넷의 여론과 달리, 한국의 사법 현실은 (폴란스키의 체포 및 압류를 끝까지 요구하는) 미국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 더 가깝다. 몇몇 유명한 뺑소니 사건이나 도박 사건 등을 놓고 일반적인 경우와 형량을 비교해본다면 분명 그렇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 아닌 정치인, 혹은 기업가라면 솜방망이 처벌의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쉽고, 통상적인 형량이 선고되거나 집행된 경우를 찾는 게 어려워질 지경이다.
반대로 인터넷의 열화와 같은 분노가 곧장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50대 남성이 안산에서 9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평생 회복될 수 없는 상해를 입힌 사건, 이른바 ‘조두순 사건’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경애하는 지도자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천인공노할 사건에 크게 진노하시어 ‘그가 받은 형기를 모두 살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에 떠는 민중들의 마음을 크게 헤아리신 것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법무부와 정치권은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고 공소시효를 연장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법 시스템은 대중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으면 즉각 반응하지만, ‘사회적 강자’를 향하고 있으면 귀를 막는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다섯 글자를 타자로 치는 것이 참으로 메스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변변한 소득도 직업도 없었고, 성범죄를 포함한 온갖 범죄를 저질러 전과 10범이 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사회 시스템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오직 ‘조두순’이라는 한 개인에게로, 혹은 언제 다가와서 내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성폭행을 가할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 조두순을 동정하는 게 아니다. 조두순이 아닌 사람들,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한국 사회가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성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지니고 있는가? ‘설령 상대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 ‘설령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가해자가 누가 되었건 성범죄만큼은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서울신문 10월5일자 1면 | ||
‘성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이런 논의를 할 때 가장 곤란한 것 중 하나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체 ‘성범죄’가 무엇일까? ‘조두순 사건’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수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미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 남성들 중 상당수는 성매매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매매는 성범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두순이 저지른 범죄에 진노하신 그 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못생긴 마사지걸 발언’이 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스포츠 마사지에 대한 것이라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식석상에서조차 성매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 등장했으나 그것이 이미 ‘성범죄’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남자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돈이 있는 남자가 성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 서비스를 받는 성매매가 대체 왜 성폭력이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리 베커와 리처드 포스너를 필두로 한 법경제학자들이라면 ‘성이라는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매매는 엄연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성폭력이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은 성매매를 강요한 자, 성매매를 한 자 모두 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포주도 나쁘지만 그 포주에게 돈을 주고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남자’도 그 범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성매매피해자’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뭔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성매매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지 그것을 괜히 단속하겠다고 하면 ‘풍선효과’가 발생해서 성매매가 음성화되고, 그래서 차라리 공창제를 시행하는 게 나을 것이고, 등등 운운하는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에서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남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
‘조두순 사건’에 대한 여론과 함께 폴란스키의 체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두순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곱씹으며 ‘미국처럼 200년, 300년씩 콩밥 먹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외치는 남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성매매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성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 대통령이 헛기침을 해도 사법 당국은 꿈쩍하지 않는다. 성범죄는 성범죄일 뿐이며, 누가 저질렀더라도 처벌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오래 된 것일지라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슈피겔』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LA 주 검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다루는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신부가 20년전 어떤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이다. 왜 이런 경우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고, 폴란스키를 체포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폴란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원칙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혹자는 폴란스키를 고발한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조사 결과 피해자는 폴란스키와 단 둘이 남아있을 때 성관계를 거절했다. ‘무섭다, 집에 가겠다’는 의사를 수 차례에 걸쳐 분명히 표현했다. 이미 가해자가 먹인 술과 약물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두려웠기 때문에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면 ‘적극적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화간’이라고 몰아붙이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고, 가해자는 어렵잖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 장자연씨 사건’을 떠올려보면 된다. 성접대를 받은 사람들이 과연 법에 규정된 처벌을 받았던가?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나 했던가? 한국 검찰은 미국 검찰이 그러하듯이 성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 XX를 죽여라’, ‘거세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미국의 제도와 형량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런 엄격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 자체에 대한 단호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을 보라.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연예계에는 감독과 배우들간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스키 감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사건 발생 이전에 부인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충격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법 체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13세 소녀에게 약을 먹이고 술을 먹인 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힘과 협박으로 제압하고 피해자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여 수 개월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만이 관건일 뿐이다. 성폭력은 성폭력일 뿐이다.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사건이 벌어진지 31년이 지났지만 검찰은 끝까지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바로 이럴 때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미국식으로 하자고? 그 엄격한 잣대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찬성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 사회는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그런 사회이다. 형량을 높이고 전자발찌를 평생 채우자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법무부 관계자들 중, ‘미국식 윤리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적어도 ‘각하’께서는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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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강만수 특보의 이중국적 발언 – 마붑 알엄 씨의 경우
가령 내가 이 코너에서 ‘나는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정부의 기조에 동의한다’라고 선언한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미쳤구나, 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치 대운하, 혹은 4대강 정비 사업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과 같이 이미 성장할대로 성장해버린 경제 체계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업 기조를 변화하는 일이 꼭 필요하며,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가 엄습해오는 21세기 초반의 현실을 놓고 볼 때 그 방향은 결국 ‘저탄소 녹색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4대강 정비는 전혀 저탄소도 아니고 녹색도 아니지만, 그 고탄소 회색성장에 걸려있는 깃발은 분명 ‘저탄소 녹색성장’인 것이다.
이처럼 문제는 정부가 전혀 엉뚱한 방향에 올바른 단어를 가져다가 써먹고 있다는 데 있다. 현 정부에서 발표하고 있는 정책 기조들 중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할만한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친 서민 경제정책’, 얼마나 좋은가. ‘중도 실용주의’도 말은 좋지 않은가.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실제로 진행되는 바를 살펴보면 본래의 이상이 실현되기는 커녕 그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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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법은 이민자들에 대한 문호를 넓히는 것이다.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는 한, 떨어지는 출산률을 직접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출산 보조금 지급, 육아 환경 개선 등 간접적인 일들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산률이 떨어지면 전체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되고, 경제적 요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사회의 활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출산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강만수, '저출산 해결하기 위해 해외 우수인재 받아들여야'
인구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한 성장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출산률이 저하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의 경우 아직도 인구증가율이 너무 가파르다. 이런 경우 이민은 해당 국가의 국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그로 인해 국내의 인구 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이중국적 문제에 접근해보자. 2009년 5월 현재 국내에는 45만 명의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다.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불법체류자만 해도 20만 명에 이른다.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60% 이상은 방문취업자이다. 방문취업자에게는 최장 3년의 체류가 허용되며, 요식업이나 건설업 생산직 등 일부 제한된 업종에 한하여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3년 이상 체류할 경우이다. 현행법은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 자신의 국적을 보유한 채 머무르는 것, 즉 간이귀화를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한국 국적을 얻거나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의 인권 신장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국적에서 정체성을 확인하곤 한다.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 않는 한, 원래의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한국에서 이른바 ‘후진국’ 국민들에게 국적의 문호를 쉽게 열어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 문제까지 다루지는 않기로 하자). 문제는 그 국적이 없으면, 유학생이나 어딘가에 고용된 누군가가 아닌 다음에야, 3년 이상 체류하면서 경제 활동을 하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혹자는 이런 사안을 논하면 ‘거지 나라에서 온 거지들이 우리나라에서 돈 벌어서 나가려는 걸 우리가 왜 보장해줘야 하냐’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다 자기네 나라로 송금해버릴텐데, 그러면 국부가 유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반박했던 중상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가치는 화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한국에 와서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한다면 그는 그 활동을 통해 그만큼 한국의 GDP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동시에 외국인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제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버는 액수 중 일부가 국외로 유출된다 해도, 한 사람이 한국에 들어와서 노동하고 소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순전히 대한민국의 GDP를 증가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대세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돈을 벌어서 들고 나간다 한들, 이미 그동안 먹고 마시고 생활하면서 쓰는 돈이 있고 그것이 한국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혹은 들어와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일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모두 지하경제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만수의 발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이중국적’은 이렇듯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저소득층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듯하다. 강만수 특보가 과연 영화 <반두비>의 주인공을 맡은 마붑 알엄 펄럽 씨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 말을 했을까? 마붑 알엄 씨는 방글라데시의 두라람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인재다. 영어는 당연히 잘하고 한국어도 한국인처럼 하며, 그 외에도 뱅골어, 우르드어, 힌두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런 그도 한국에 와서 염색공장, 플라스틱 공장 등 3D업체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과연 강만수가 말하는 “해외 우수 인재”에 마붑 알엄 씨 같은 사람이 포함될 수 있을까? “백인 며느리 두 명”을 운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절망감이 앞선다. 인종주의라는 게 별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짓이 바로 인종주의이다. 이중국적 허용 논의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이주민들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논의여야지, 인종주의에 찌든 ‘해외 우수 인재’ 타령이나 부유층의 탈세와 병역 회피 논란으로만 치달아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제발 우리와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노정태/전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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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 중도주의의 덫
오바마 미 대통령이 ‘중도주의의 덫’에 걸렸다.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하여 보수층과 진보층 양쪽으로부터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전 세계인의 대통령으로 환영받았던 그의 지지율은 현재 50% 선에서 오가고 있다(국내 상황 때문에 이게 ‘높은’ 지지율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초기임을 감안했을 때 유례가 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선과 총선 모두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공히 다수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의 개혁은 시작부터 높은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 및 매력을 지닌 정치인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높은 기대를 받으며 대권을 탈환해낸 모습은 여러 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케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측면이 적지 않다. 오바마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미국을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무현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양자 모두 기존의 ‘정치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노무현과 오바마 모두 사회적으로 볼 때 비주류 출신이며 그들의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차별 구조가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닌다.
▲ 경향신문 8월 18일자 9면.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난맥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장점이나 특징 뿐 아니라 단점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중도주의’라는 막연한 이상에 대한 집착이 그 단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노 정부에 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주요 개혁 법안들을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변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마찬가지 현상이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현재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며,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열성적인 지지자 그룹을 일구어낸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의료보험 개혁 법안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국내 매체에서는 이 사안을 두고 ‘세금 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정서’ 등을 이유로 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태 자체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미국인들은 원래부터 세금 내기를 싫어했지만, 강력한 국세청 덕분에 성실한 납세가 몸에 베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극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부에서 추진하는 ‘타운홀 미팅’을 방해하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지만, 애초에 이런 법안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그정도 저항은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었지 그것 ‘때문에’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킬만한 오바마측의 동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바마가 ‘초당적 협력’, ‘중도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보수진영의 공세에 맞서 굳건한 신념을 보여주지 못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내 보수파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본인이 빌 클린턴처럼 탁월한 사교술을 바탕으로 의원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세부적인 주고받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이탈표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중도주의’의 이상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도주의는 없다
여러 진영의 눈치만 살피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풀뿌리 자원봉사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버락’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선명성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대통령이 된 그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런 이들의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남으로써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힘을 모아야 할 시점에 내부의 정치 투쟁이 불거지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우리는 이미 지난 정부 기간 동안 충분히 보아 왔다.
그렇게 해서는 소수파 출신 정치인이 살아날 수가 없다. 자신보다 강한 세력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하나의 생존술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얻어내었다면 자신의 지지층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내 진정성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할 때이다. ‘중도주의’를 외치며 이쪽의 정책과 저쪽의 정책을 절충하겠다는 발상은 양쪽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본거지 역할을 해야 할 기존 지지자들마저 이탈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 『프레임 전쟁』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가 만든 로크리지연구소의 정치 전략 제언에서 따온 것이다. ‘중도주의’는 없다.
가령 낙태에 대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한 아기를 ‘중간 정도’만 낙태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해답은 0 아니면 1, 도 아니면 모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진보진영에 속한 누군가가 ‘중도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어중간한 합의책을 도출하거나 그런 제안을 어물쩍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견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보수층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노무현 정부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기존의 지지층이 대폭 이탈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중도주의 덫에는 미래가 없다
레이코프 교수와 로크리지연구소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지 말고, 대신 지지층과 반대자에게 강력한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권한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특정 정책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믿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것 저것을 뒤섞는 것보다, 현재 추진되는 의료보험 개혁이 어떻게 ‘미국적 가치’와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게는 탁월한 대중 설득력과 카리스마가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활용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도 우리는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를 평생 빨갱이라는 족쇄에 묶어놓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뒤섞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국민들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진정성’을 갖고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갔다. 70년대의 김대중과 2000년대의 김대중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할지 모르지만, 통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초지일관 같은 편에 선다. 그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연이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그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키워나갈 것인지를 놓고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진정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포장하려고 하며, 계파 내의 이합집산에만 집중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잡탕밥같은 정책을 내놓는 일에만 골몰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중도주의는 덫이다. 그것은 권력을 이미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 여타의 정치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워낙 중간을 좋아한다고?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외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중도주의의 덫에 빠져 있는 한, 미래는 없다.
2009-08-12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버마에서 벌어지는 법의 횡포와 민주주의 - 아웅산 수치와 쌍용자동차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악화된 채 오랜 시간이 지속되자,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을 찾았다.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고 보도된 그의 말은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조깅을 열심히 한 덕분에 아직까지 건강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중 한 문장만큼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YS는 ‘우리가 함께 잘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뤘다. 아니었다면 버마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내용을 기사로 읽으면서도 의미 있는 내용으로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추정된다. YS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을 DJ가 했다면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실로 버마의 상황은 정말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현지시각으로 8월 11일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다시 군부에 의해 1년 6개월의 가택연금 처분을 당함으로써 버마의 민주주의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야 없겠지만, 버마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미약한 희망이 다시 한 번 짓밟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아니면, 버마처럼...지금 버마는?
지난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의 민주화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바람을 타고 이루어졌다. 1987년 한국에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필리핀에서는 그 전 해인 1986년 피플 파워 운동이 벌어졌다. 그 영향을 받아 버마에서도 1988년 8월 8일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문제는 최루탄을 쏘다가 탄이 다 떨어지자 항복한 한국 군부와 달리, 버마 군부는 국민들을 향해 실탄을 마구 쏘았고, 시위대가 전부 투쟁 의지를 상실하고 집에 들어박힐 때까지 계속 실탄을 쏘았다는 데 있다.
▲ 동아일보 8월 12일자 1면. | ||
가택연금 기간이 끝난 후 다시 연금이 시작된 것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버마 군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웅산 수치를 법원으로 끌고 들어가고, 법원은 그에게 예정된 징역형을 선고한다. 차마 살해할 수는 없으니만큼 늙어 죽을 때까지 가두어두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가장 어이없는 경우는 바로 올해 벌어진 것이었다. 존 윌리엄 예토(John William Yettaw)라는 미국인이 수치 여사가 연금되어 있는 저택의 건너편 호수를 헤엄쳐 건너갔다. 그는 저택에 도착했고 수치 여사는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바로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가택연금 규칙상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와서는 안 되므로 아웅산 수치가 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법 논리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마 군부는 오래도록 재판을 끌었다. 재판의 방청을 요구하는 외국 저널리스트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묵살했다가 허용했다가 다시 묵살하는 식으로 갈팡질팡했다. 아웅산 수치 뿐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숱한 범민주화세력들에 대해서도 일제히 연행 및 수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야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인세인 교도소는 새삼스레 밀려닥친 정치범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세계 각국의 인권단체들이 항의를 하고 행동을 취해보았지만 이미 국제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버마 군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버마 봉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The Economist>가 도달한 결론도 그런 것이다. 이미 (‘인권’을 존중하는) 서구 세계는 버마에 대해 봉쇄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괴로워지는 것은 버마의 국민들이지 군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군부는 국민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건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인 대우인터내셔널을 포함하여 여러 아시아 기업들이 버마의 해상 유전 및 가스전 개발에 진출하고 있고, 그 경로를 통해 군부는 엄청난 양의 달러를 직접 챙길 수 있다. 일반적인 봉쇄 조치가 실질적인 의미를 전혀 지니지 못하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서구 언론들의 중평이다.
<The Guardian>그런 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군부의 돈줄이 되는 바로 그 에너지 수출에 대해서도 봉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버마의 주변에 있는 돈 많은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과 한국은 버마의 국내 정치에 대해 거의 완전히 무관심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버마 뿐 아니라 수단과 나이지리아 등에서도 중국은 자원을 챙겨 떠나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일관하여 독재 정부의 후견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시민사회가 국가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견제하기는커녕, 잃어버린 고구려의 꿈을 꾸고 앉아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버마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 중 하나로 대한민국을 지목하는 것은 그리 ‘오버’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 지배는 버마와 얼마나 다른가?
역설적이게도 국내에서는 한창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고작 싸이월드에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고 써놓은 것만으로도 수억원 어치의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되고, 다음 아고라에 글 좀 썼다고 구치소에 잡아넣고, 시위중인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이 엄연히 보도 위에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세 번의 경고방송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진압작전에 돌입한다.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그리고 법원의 사법 절차가 군사독재 종결 이후 이토록 문란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바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법 질서의 혼돈이, 버마의 군부 독재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데 있다. 군부의 개가 되어 있는 사법부는 이미 아웅산 수치에게 가택 연금을 내리겠다는 결정을 해놓고 수사 및 재판을 시작한다. 그나마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수치가 아닌 다음에야,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수사 기법’의 일환으로 폭행을 당해 사망하거나 하는 일이 벌이진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나아질 리 없는 ‘현실’이니까.
버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18개월, 즉 1년 반 동안의 가택 연금을 추가로 명령했다. 사법 절차의 몽둥이를 휘둘러 정치적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는 행태는, 그러나 남의 일이 아니다.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폭로로 인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현재 재판중이다. 법원은 노회찬에게 아마도 실형을 선고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삼성의 비위를 거슬린 누군가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노회찬이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난신고끝에 다시 국회의원 뱃지를 얻어낸 조승수의 경우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거 전 날 밤 주민들에게 ‘친환경 농법을 도와주는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선거운동을 한 후보자가 되었고,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일명 ‘젖사마’로 불리는 최연희 의원이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음으로써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과 비교해보자. 대한민국에 공정한 법의 지배가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두 가지 차원 모두를 함께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미성숙한 부국(富國)이 국경 밖에서 어떤 해악을 끼치고 다니는지, 민주화를 염원하는 버마 국민들에게 얼마나 미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를 우선 똑똑히 알아야 한다. 동시에 버마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법의 횡포가 지금 우리에게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 60여명을 대상으로 검찰은 무더기 기소를 하고 나섰다. 심지어 예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어떤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관이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이 노동쟁의를 일종의 공안사건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외국인도 사람이고 노동자도 국민이다. 외국인의 인권을 깔아뭉개는 대한민국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무턱대고 두들겨 패고 잡아 넣는 현행 법 집행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의 단호한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아직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어물거리다가는 곧 ‘내 차례’가 온다. 20년이 넘도록 암흑 속에 갇혀 있는 버마 국민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2009-07-23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커다란 이슈에 맞서는 작은 민주주의
미디어법이 통과되어버린 이 시점에 ‘작은 민주주의’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왠지 부적절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또한 한나라당에 의해 저질러져버린 미디어법 개정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이 지면의 존재 이유는 그것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1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3리터의 물이 소요된다. 1리터는 병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2리터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그 물을 슈퍼마켓까지 운반하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250밀리미터의 석유가 필요하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생수만큼 식수를 비효율적으로 생산•운반•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국내에서는 한나라당에 의해 수돗물을 병에 담아서 파는 것을 허용하는 방침이 추진되고 있지만, 해외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시민들이 생수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의 New South Wales 지방의 한 마을인 분다눈(Bundanoon)의 350여명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서의 투표를 통해 생수를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BBC는 ABC의 보도를 인용하여, 오직 한 사람만이 금지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사람은 생수 업체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대체 왜 주민투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일까? 시드니에 위치한 한 생수 업체가 분다눈 인근의 수원지에서 물을 가져다가 생수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분다눈에 판매할 것이라는 계획이 주민들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 물을 퍼다가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그런 경우 생수 자체를 금지할 필요는 없다. 수자원 사용에 대한 보상금을 타낸다거나, 이익금의 일부를 지역사회에서 받아가는 식으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다눈의 주민들은 생수 자체에 대한 전체적인 금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브랜드의 생수 뿐 아니라 모든 생수의 유입과 판매를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생수가 환경 파괴에 일조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구적인 이슈에 맞서는 한 지역의 작은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우르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수아레즈(Suarez)에서는 마을 광장의 가로등을 LED로 전부 교체했다. 이것 역시 지역 의회에서 결의하여 추진된 일이다. LED 가로등은 일반 가로등에 비해 70에서 최고 90퍼센트까지 에너지 효율이 높다. 게다가 그 가로등 위에는 태양 전지 패널이 부착되어 있다. 낮동안 내리쬔 햇빛으로 밤의 거리를 밝히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에너지 위기에 맞서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지역 의회가 앞장서서 고효율 에너지 소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이 친환경정책과 더불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BBC는 한 지역 의회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아레즈가 LED 가로등 완제품을 수입하는 대신 부품만을 수입하고 그 조립은 인근 업체에 맡김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고, 동시에 전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며, 그 과정에서 ‘작은 민주주의’를 하나씩 실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7월 22일 한나라당에 의해 ‘민주적’으로 통과된 미디어법과 금산분리법 등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계는 지금 전 지구적 이슈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특정 재벌 및 언론사가 방송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모든 정치적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작은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국회 점거와 질서유지권 발동 따위만 난무한다. 더운 여름, 어지러운 정국이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민주주의는 국회만의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지구적 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적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들의 작은 민주주의를 희망한다.
2009-07-13
[시론] 신장 유혈 사태, 타인의 비극과 우리의 미래 사이
7월 8일 우름치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면서 신장 지구의 유혈 사태는 제압되었다. 중국 공안은 금요일에 메카에 모여 집회를 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종교 행사가 폭력 시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접한 어떤 국가의 경찰을 연상시키는 대목인데) 모스크를 한시적으로 폐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는 진정되어가고 있다.
‘해외’라는 단어를 들으면 ‘시장’ 내지는 ‘자원’을 떠올리는 국내 언론의 속성상, 신장 지구 유혈 사태의 보도 방향도 대부분 그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신장 지구에서 개발된 유전이 있고, 그 유전의 개발권을 한족이 독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가 한 장난감 공장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를 이렇게만 묘사할 경우, 위구르인들의 폭력 행사 이후 역으로 한족들이 위구르인들에 대해 자행한 무차별적인 폭력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내 언론의 통상적인 설명은 신장 지구의 민족 갈등을 ‘자원 수탈자’와 ‘선량한 토착인’으로 치환시켜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7월 7일자 3면. | ||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중앙정부는 동부로 밀려드는 미숙련 노동자들을 처리하고 동부와 서부의 불균형한 발전을 해소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주 정책을 추진했다. 서부를 개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4대강 유역을 개발한다는 말이 한국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듯이, 서부 지역을 개발한다는 말은 중국의 저소득층에게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약속으로 들렸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뉴욕타임즈》의 에드워드 왕(Edward Wong)은 위구르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한 중국인 이민자 가족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열악한 생활 수준을 보도했다. 매일 아침 8시에 리어카를 끌고 행상을 나가 한밤중에 집에 들어온다. 벌이가 쏠쏠하다 해도 미화 300불 수준에 머물고, 그러면 가까스로 생활비를 맞출 수 있다. 서부 개발의 노다지를 노리고 들어온 한족 이민자들에게도 막연한 불만은 팽배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서로 막연히 품고 있는 삶에 대한 불만이 특정한 계기로 터져나올 경우, 그것은 눈 앞에 보이는 다른 민족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폭력 사태의 계기가 된 장난감 공장 살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저소득층 위구르인과 한족들은 그럭저럭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씨가 튀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 몽둥이를 들고 폭력을 휘두르며 서로의 변변찮은 재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폭동을 벌인 위구르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다민족 ‘포용’ 정책이 실상은 해당 문화의 압살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구르인들은 이민자의 증가로 인해 다수에서 소수로 변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문화와의 연결고리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위구르인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은 이슬람인들의 취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족 사장들은 메카 순례를 위해 긴 휴가를 쓰고 싶어하는 위구르인, 라마단을 지키고 낮 동안은 금식하고자 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는다.
종교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우름치에 위치한 신장대학교에서는 오직 위구르 시(詩)에 대한 강의만이 위구르어로 이루어진다. 1990년대부터 대학 교육에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신장 지구 내 한족의 불만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위구르족의 불만은 경제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차원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중앙 공산당 정부는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댓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G8 행사에 참여하고 있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히 귀국한 것은 그러한 의지를 특히 대내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위구르의 유혈 사태가 더 악화되어 국제 사회가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확산된다면, 인접한 티벳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강력한 제압 의지를 보인 것은 그러나, 적어도 현지인들의 생존권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이 폭력 사태는 ‘돈 많은 한족’과 ‘가난한 위구르인’의 대결이 아니다. 위구르인들은 (국내 언론에서 너무도 자주 언급되는) 석유 회사가 아니라, 자기 주변의 한족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족들의 대항 시위도 마찬가지이다. 중앙정부의 이주 정책에 대한 불만을 그 정부를 향해 풀어내지 못하고, 대신 이웃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혈 사태가 지속되는 것은 그 어떤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종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곳을 ‘개발’하는 것으로 국내의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려 하는 중앙정부가 있다면, 당연히 저소득층은 생활을 위해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위구르의 관계를 식민지와 제국의 그것으로 당장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마치 영국이 식민지배를 시작한 이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제국』에 따르면, 영국이 제국으로 성립해있을 당시 영국의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보다 영국에서 식민지로 넘어간 이민자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일거양득이다.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국내의 불만 세력이 될 수 있는 저소득층을 먼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신장과 티벳에서 바로 그러하듯이, 원주민보다 이민자의 수가 많거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면 문화적, 인종적 단일성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분리 독립운동의 추진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는 신장 지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동에서 서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신장 위구르 유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거지떼’가 내려와 우리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북한의 체제가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남한과 하나의 정치 단위를 구성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처럼 어느 정도의 국가 형태가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고위층과 남한의 자본이 결탁하여 이북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이 시행된다면, 마치 중국 동부와 서부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은 북에서 남이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다. 위구르에 사람이 없어서 한족들이 건너간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양극화가 심해져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층이 크게 늘어나고, 북한에 이른바 ‘개발 특수’가 시작된다면, 남한의 저소득층은 당연히 북한으로 이주할 것이다.
비록 혈통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미 남과 북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다른 형태의 집단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이 서로의 이민자를 포용해야 하는 문제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결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북한이 망하고 남쪽으로 ‘거지떼’가 몰려올 상황에 대해서만 걱정하지 말고, 북한이 개방되고 남쪽에서 ‘노가다’들이 몰려가 에스닉 그룹을 형성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걱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장 지구 폭력 사태라는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며 우리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조만간 우리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중국이 대한민국을 삼켜버릴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인구와 경제력을 놓고 볼 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그보다는 북한 사람들을 중국이 위구르족 대하듯이 취급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덩치가 커져버렸지만, 아직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국인들이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될 때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노정태/Foreign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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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이명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다면 - 온두라스 쿠데타를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상상’임을 확실히 못박아두는 바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로는 그럴 만한 정치력이 없지만) 한나라당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 자신이 연임할 수 있게끔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바와 같이, 거리에서의 항의 시위나 시민단체 및 야당의 반발 따위로는 그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 없다. 급기야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바로 ‘그 일’이 터져버리는 것이다.
온두라스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지난 토요일, 호세 마누엘 셀라야(Hose Manuel Zelaya) 온두라스 대통령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관저의 침실에 들어갔다. 비록 대법원은 대통령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두 차례에 걸쳐 선고한 바 있고, 육군과 해군에서도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셀라야 대통령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복면을 쓴 군인들이 그를 깨우기 전까지 그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가 추진하던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예정된 날의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체포되어 파자마 차림으로 코스타리카로 이송된 그는, 쿠데타에 굴하지 않고 세계 각국에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셀라야 대통령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반미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셀라야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유엔에서도 쿠데타를, 당연한 일이지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분위기이다. 온두라스 의회는 재빠르게 셀라야 대통령을 ‘전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온두라스 국내의 정확한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이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 헤럴드경제 6월 29일자 14면. | ||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민주주의는 ‘외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는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북쪽에 위치한 세습왕정국가도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정치가 다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아닌 나라가 없다. 정치적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민주주의냐 민주주의가 아니냐’라는 질문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해졌다. 지금 온두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바로 그렇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쿠데타는 반민주주의이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 수반 대통령의 통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헌법기관에서 반대하는 개헌을 강행하는 대통령의 통치도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그따위 국민투표가 벌어지는 일이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외부’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적인 절차 혹은 투표를 통해 헌법을 바꾸고 통치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된다면, 우리는 나치의 독일 지배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2009-06-1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이란 대선 시위, 남의 일이 아니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대적인가
6월 13일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이란은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 시위를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현 정부의 임기가 3년 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이번 대선은 분명히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통, 비밀,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밝은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 축제처럼 선거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지지 집회는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를 붙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랍권을 순방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은밀한 지원 사격도 눈에 띄었다. 바야흐로 이란에도 변화의 물결이 당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 경향신문 6월 15일자 8면. |
미국의 인권단체 Avaaz에 따르면, 대선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개별적인 증거들은 아직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없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온다면, 이란의 최고 결정기관인 혁명수호위원회는 무사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디에자드의 지도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일 오후 7시 현재까지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12명.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우선 테헤란을 뒤덮었던 밝은 녹색의 물결을 짚어보자. 무사비의 지지자들은 주로 여성, 도시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 고학력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선거 운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러한 ‘축제와도 같은 선거’가 반드시 민주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선거운동이 도리어 이슬람 원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 자체는 부당한 피해자 탓하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느냐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축제’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선거도 축제처럼 하고, 홍보도 유세도 축제처럼 하고, 심지어는 시위도 축제처럼 하고, 등등. 특히 촛불시위에 본격적인 사회 이슈를 접목시키려 들 때마다, ‘촛불시위의 자발성이 훼손된다’거나 ‘축제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반발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놓고 보면 그 축제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축제처럼 선거운동하다가 결국 목숨 걸고 데모하게 된 이란 국민들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무언가를 ‘축제처럼’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정치적 성격과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란의 경우를 1대1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이란을 지배하는 집단은 혁명수호위원회이며,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입김에 의해 이번 정국의 방향이 좌우될 것이다. 말하자면 (어쨌건 절차적으로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시위로 인해 물러난다 해도, 이란이라는 나라의 안정성은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 대통령 위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3년 반 뒤에 한국에서 지금 이란과 같은 시위가 벌어질 경우,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가져올 충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란의 시위를 보며 한국의 3년 반 뒤를 걱정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란이 처한 국제적 고립과 사회적 불평등 등을 놓고 볼 때, 현 국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비교적 덜 심각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들의 반발을 힘으로 억누른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될 터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가? 우리가 가진 것은 87년 체제의 허약한 정통성 뿐이다. 다음 대선이 치러진 후 이란의 경우와 같은 시위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당한 시위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혹여 그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염치불구하고 독자 여러분께 이 질문을 남겨둔 채 이번 칼럼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2009-06-04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 태국의 노란 셔츠 시위대를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머리 속의 ‘세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큰 나라인 미국이 있고, 그것보다 작지만 우리보다 ‘조금’ 큰 나라 일본이 있고, 그 옆에 한반도가 있으며 왼쪽으로는 큼지막하게 중국을 그려놓고 그 속에 상상의 동물과 식물, 미개인 따위를 잔뜩 그려놓는다(대륙의 …라는 이름이 붙는다). 마치 ‘판교 위에 분당, 분당 위에 천당’이라는 식의 농담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의 일부이며, 그 ‘아시아’란 한중일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1987년 민주화 투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버마의 8888 운동이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 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아시아 국가들이 동시에 겪게 된 경제 성장과 서구식 민주 사상의 보급, 그것을 억누르고자 하는 통치 이념과의 갈등 등이 모두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벨기에를 바라보며 네덜란드와 그 근처 다른 나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듯, 한국을 바라보는 ‘색목인’들은 이 나라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전제로 놓고 최근 대한민국을 관통한 하나의 큰 사건을 돌이켜보자.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서 시민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색종이를 뿌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바 있다. 한국인들이야 내부 사정을 다 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서 이 노란색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그러나 국제 뉴스를 꾸준히 접하는 외국인이 이 광경을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태국의 ‘국민 민주주의 연대(PAD)’일 것이다. 노란색 셔츠를 입고 공항을 점거하여 관광객들의 출입국을 가로막았던 바로 그 단체 말이다.
‘지금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러 나온 시민들을 대체 뭐에 비유하는 거냐’라고 흥분하기 전에, 일단 태국 시위의 전체적인 풍경도를 먼저 들어주셨으면 한다. 2001년 탁신이 태국 총리로 취임하고, 2006년 탈세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태국은 시위의 격량 속으로 빨려들게 되었다. 탁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빨간 티셔츠를 입고, 탁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란 티셔츠를 입는다. 그 양 집단의 성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빨간 티셔츠는 태국 북부의 서민들이 주를 이루고, 노란 티셔츠는 태국 남부의 중산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빨간 티셔츠는 탁신 전 총리와 그의 일당들을 지지하는 반면, 노란 티셔츠는 푸미폰 국왕과 군부의 행동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서서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태국의 중산층 시위대는 국왕과 군부로 대변되는 태국의 권위적 통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 물론 탁신 총리와 그의 정치적 동료들 또한 민주 투사는 아니지만, 태국의 중산층이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인 것이다.
▲ 중앙일보 2008년 12월 2일자 17면. | ||
탁신이나 차베스같은 포퓰리스트 정치가가 출현하여, 이른바 ‘빈민 퍼주기’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후,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저소득층에게 경제 성장의 혜택을 안겨주게 될 경우 그 비용은 지금까지 성장의 과실을 누려온 중산층들이 지불할 수밖에 없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이 화이트칼라인) 중산층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당선된 총리 혹은 대통령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거듭 반복해서 시위를 하며, 결국 그를 쫓아낸다. 문제는 그렇게 누군가를 쫓아낸 다음이다. 이미 투표를 통해 단결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바 있는 저소득층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시위대를 구성하고, 투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난리 끝에 결국 군부가 개입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사실상 그 효력을 다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복잡한 현대 사회와 경제 속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나라를 온전히 통치해내는 경우부터가 매우 드물다. 90년대를 지나며,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군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후 다음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물러나거나 선거를 통해 추출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들어서는 민주정부라고 해도 기존의 권위를 회복하여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시위가 벌어질 것이고, 또 저차하면 군부가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태국이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인권 탄압, 공권력 남용,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 등을 모두 ‘우리가 찍은 대통령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 그 과정에서 닥쳐오는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결연히 맞서는 것은 모두 훌륭한 미덕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 정부의 특정한 모습에 반대를 함에 있어서, 또한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하고, 그 범위를 기존의 것보다 더 넓게 사용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탁신이 총리가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남부의 중산층들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북부의 저소득층, 노동자들과 나누려 들지 않은 데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가 당선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저소득층에게 ‘떡고물’을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흘려 정권을 잡는 ‘민주독재’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이니, ‘한반도 대운하’니 하는 것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흔히, ‘대체 국토를 작살낼 뿐인 그따위 공약을 진정 믿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고 분개하곤 한다. 하지만 함바집 아줌마라면 국토가 어떻게 되건 말건, 당장 자신에게 떨어지는 게 있다는데, 그 공약을 내건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뉴타운 개발이나 그린벨트 해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식으로는 돈 가진 사람들만 1억 벌고, 못 가진 사람들은 100원도 못 받는다’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투표자들은 50원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런 공약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결국, 이명박 정부 또한 한국 사회의 소득 양극화가 낳은 산물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교육받은 중산층들은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반면, 서울 외 지역에 거주하는 저소득층들은 현 정부에 대해 그리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차베스처럼 저소득층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을 안겨주는 정책을 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생색도 제대로 못 내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해버린 후 한국의 군대는 정치와 완전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군사 독재’라는 단어가 욕설처럼 쓰이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민주주의가 혼돈에 빠지고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경제적 민주화’의 요구로까지 향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 큰 불안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다. ‘대운하 공약’을 듣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명박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진 저소득층을 설득해낼 만한 그 무언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도리어 지금까지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그 무언가로 돌변할 수도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결국 ‘경제적 민주화’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2009-05-2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부엉이바위의 음모론을 경계하자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수사기관은 완결되지도 않은 수사 내용을 조금씩 조금씩 언론에 흘린다. 기자들은 그것을 받아 적고, 데스크에서는 가장 자극적인 제목을 골라 뽑는다. 그 뉴스를 읽고 독자들은 ‘진실’이 뭐냐, ‘○○설’의 팩트는 뭐냐, 왈가왈부 따지기 시작한다. 정작 제대로 밝혀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남는 것은 그저, 피의자의 황폐해진 영혼뿐이다. 그는 설령 수사결과가 무죄로 나온다 해도, 사회가 자신을 평생 죄인 취급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은 선택은 결백을 주장하며 목숨을 던지는 것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타살설 따위를 놓고 벌어지는 인터넷상의 설왕설래를 보고 하는 말이다. 많은 이들은 쉽게 말한다. 조선일보가 문제야, 언론의 선정성이 문제야, 쯧쯧.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 사람부터가, 그 언론에서 흘리는 파편적인 정보를 놓고 누가 진범이네 아니네, ‘시나리오’가 이렇게 나오네 저렇게 나오네, 여론재판에 슬그머니 참여해버린다. 좋은 언론은 결국 좋은 독자가 만들고, 좆같은 언론은 좆같은 독자새끼들이 만드는 거다. 조중동뿐 아니라 모든 언론이 싸구려스럽다면, 그 언론을 소비하는 사람들, 특히 ‘○○설’에 혹하는 자기 자신부터 돌아보기 바란다.
▲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노 전 대통령이 투신했다고 알려진 봉화산 부엉이 바위가 사저 뒤로 보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유성호
지금 똑같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지나가던 등산객의 증언, 번복되는 진술, 과연 진실은? 이게 지금이다. 일주일 전에는 이랬다. 박연차 회장의 증언, 번복되는 노무현의 진술, 과연 진실은? 타살설이니 뭐니 하는 떡밥을 덥석 무는 순간, 당신도 결국 조선일보 독자들과 다를 바 없는 팩트 골룸이 될 뿐이다.
안티조선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언론운동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조선일보의 공신력이야 떨어졌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성취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왜 조선일보를 욕하는지, 왜 욕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을 ‘진실 게임’으로 몰아가고, 한 개인의 공적 판단과 선택을 그의 신변잡기와 연루시키는 조선일보, 혹은 조중동의 황색 저널리즘을 이겨내는 방법은, 언론의 소비자들이 그런 천박한 ‘팩트’에 관심을 끄고 오직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만을 토대로 담론을 쌓아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모습은 찾아볼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안타깝게 여긴다면, 대체 그 죽음이 왜 닥쳐와야만 했는지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기 바란다. 검찰은 확인되지도 않은 범죄 사실을 언론에 계속 흘렸고, 언론은 그것을 확대재생산했다. 그러한 전방위적 압박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노 전 대통령의 경호원에 대한 수사는, 경찰에서 조용히 하면 되고, 수사 결과 공개는 모든 사실이 확인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사안이 시급하다면, 경찰은 우선 완전히 확인된 사실부터 공개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도 최대한의 신중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어떤가? 이미 또 하나의 여론재판이 시작되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다며 그 여론재판에 끼어드는 사람들, 당신들도 이미 공범이다.
조중동이 어쩌고 저쩌고, 좆중동이네 마네 욕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조선일보 못 이기는 이유가 딴 게 아니다. 그놈의 달콤한 ‘팩트’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거 살살 흘리면서 애간장 타게 만드는 기술이라면 조선일보가 세계 최고 수준이지. 그래서 정작 지나고 보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피의자는 병신 되어 있고 정작 ‘진실’은 과도한 ‘팩트’의 무더기에 갇혀버리고, 환기되었어야 하는 여론의 방향은 오직 ‘진실 게임’에만 쏠려버리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도 딱 그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그놈의 타살설 때문에 지금 묻혀진 이야기가 뭔지 잘 생각해보라.
서울시청 광장 봉쇄를 둘러싸고, 27일 수요일, 시민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져 가고 있었다. 타살설이 운위되기 전까지 그 문제를 둘러싼 담론이 형성되고 있기도 했다. 정부도 아닌 일개 지자체 서울시가, 국민들의 집회의 자유를 완벽하게 억압하고 있다. 사실상의 집회허가제가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그런데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타살설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선량한 사람들 덕분에 완전히 묻혀버리게 되었다. 네, 진실 좋죠. 잘 찾아보세요. 이미 조선일보는 웃고 있습니다.
명백하게 확인된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내가 ‘팩트 골룸’이라고 욕하는 것은, 하지만, 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놓고 제 깜냥으로 시나리오 써가며 왈가왈부하느라, 정작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을 놓쳐버리는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조선일보가 문제라고? 부스러기 ‘팩트’를 주워먹는 당신 같은 독자가 있는 한, 조선일보는 망하지 않는다. 조선일보가 망한다 해도 어차피 같은 식으로 장사하는 다른 언론이 등장할 것이다. 그 품위 없는 언론은 결국 품위 없는 독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 언론과 검찰의 수사가 노무현을 죽였다. 이제 그의 경호원도 칼날 위에 서게 되었다.
제발, 그만하자. 떡밥을 물지 말자. 당신들이 낚이는 한 저들은 영원히 낚게 되어 있다. 조선일보의 독자들이 노무현을 죽였듯이, 한겨레의 독자들이 노무현의 경호원을 죽이는 모습을 나는 정말 보고 싶지 않다. ‘사회적 타살’은 바로 그렇게 저질러진다. 떡밥에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그것을 물고 자유를 얻을 수는 없다. 경찰의 수사와 언론의 호응이 다시 한 번 큰 죄를 저지르기 전에, 제발 그만 좀 하잔 말이다.
2009-05-21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알타이연합론인가 대동아공영권인가?
‘우리 핏줄’ 몽고, 혹은 변태적 혈통주의
짙은 안개 속에서 탈옥한 죄수는,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한 바퀴 빙 돌아 원래 갇혀있던 교도소로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민족문학’의 첨병이었던 왕년의 대문호 황석영의 이른바 ‘변절’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오리무중 속에서 걷고 걷다보니, 결국 또 하나의 제국주의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황석영이 주장하는 이른바 ‘알타이연합’, 그 논리를 천천히 짚어보도록 하자.
우선 그 ‘알타이’라고 통칭되는 국가에 사는 사람들과,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을 한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저 공통되는 것은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는 언어학상의 한 분류뿐인데, 그나마도 한국어가 정말 거기에 속하는지에 대해서 이견이 존재한다. 바이칼 호수에서 태어난 위대한 민족혼을 공유하고 있다고 우길 수야 있겠지만, 현대의 맥락에서 보자면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혈통적 공통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굳이 같은 혈통이라고 한다면, 생판 본 적 없는 16촌 친척이 다가와 사업하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할 때의 그런 ‘친척’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선조가 되는 사람들과 ‘몽고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혈연 교배를 했던 시점은 다름아닌 몽고 강점기이다. 고려의 국왕은 반드시 몽고 여인과 결혼해야 했고, 그걸 보고 좋다고 권문세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국제 결혼’ 시키기에 바빴던 시절이니만큼, 왕성한 혈연 관계가 맺어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당시 그런 국제 결혼을 통해 혈연관계를 뒤섞은 후, ‘우리는 모두 몽고의 자식’이라고 말했던 것은 몽고인들이었을까, 아니면 고려인들이었을까? 혹은 고려의 지배계급이었을까 아니면 고통받는 민중들이었을까?
‘알타이 연대’의 근간에 깔려 있는 혈통주의에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만약 고려와 몽고가 한 핏줄이라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몽고강점기에 벌어진 지배층간의 대규모 국제 결혼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정복당한 나라의 후손들이 그걸 마치 자랑인 양 떠벌리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실제로 몽고강점기 당시 백성들은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다. 반면 권력을 잡고 있던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몽고에 줄을 대기 위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알타이 문화권’을 주장하는 것은 ‘몽골리안의 핏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야 낫다. 전자는 공허할 뿐이지만 후자는 변태적이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5월8일자 40면
이쯤 되면 황석영의 ‘알타이 연합론’은, 황석영에 앞서 일찍이 몽고 타령을 시작한 몽고반점 얼리어덥터 조갑제의 ‘기마민족 정복자론’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한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는 징기스칸과 함께 전 세계를 정복한 게 아니라, 그에게 정복당한 세계 중 일부에 불과했다. 원나라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가로 상당한 수혜국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고려가 몽고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효도르에게 두들겨 맞고 암바 걸려서 실신했다가, 나중에 효도르가 찾아와서 같이 술 한 잔 한다고 해서, 얻어터진 약골이 효도르 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려가 원나라와 함께 외국에 원정을 나간 적이 있었긴 하다. 고려 민중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대 함대를 건설하고,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고 병사들을 대신하여 엄청난 숫자의 고려 병사들이 출전했는데, 일본에서 폭풍이 불어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어버린 그 사건 말이다. 대체 ‘우리(몽고+고려)’가 정복해낸 게 뭔가? 기마민족의 기상,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강간하는 사나이의 모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몽고 타령, 알타이 타령, 바이칼호에서 뿜어져나온 우리 민족의 기상 타령, 이 모든 것들이 기대고 있는 지점은 동일하다. 힘에 대한 동경, 제국주의에 대한 갈망,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서 황석영의 ‘알타이연합론’은 일제 강점기 문인들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찬성과 공통분모를 지니게 된다. 정복당한 자들이 정복한 자들과 자기동일시하려 하고, 급기야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몽고 밑에서 2등 부마국이 되었으니 몽고와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일제시대의 문인들은 일본 밑에서 ‘내선일체’를 달성하면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될지 모른다며 학도병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황석영은 알타이 문화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마치 가미카제 전사처럼 폭탄을 짊어지고 이명박호의 갑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던 논리나, 황석영을 포함한 ‘범 몽고주의자’들이 이런 저런 이름 하에 몽골리안 국가들의 연합을 주장하는 논리나, 양자의 차이가 그리 크지도 않다. 한민족이 살기에 한반도는 너무 좁다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주장했다. 반면 저 넓은 대륙에는 인구는 없지만 풍부한 자원과 개척되지 않은 광활한 영토가 있다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주장했다니깐. 우리가 침을 흘리며 바라보는 나라는 사실 따지고보면 먼 친척이기 때문에, 친척끼리 도와주는 거지 정복하는 게 아니라고? 일제가 하면 폭력적 침탈행위지만 우리가 하면 정당한 자본 투자일 뿐이라고? 일제도 그렇게 말했다. 서양 세력이 총칼을 앞세워 폭력적인 근대화를 강요할 때, 일본은 정당한 자본 투자를 한다고. 아시아인의 공통성에 주목하자고.
대한민국, 이미 제국주의 국가일지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일 뿐이다. 민족주의의 허울을 씌운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 이미 대한민국의 자본은 그런 공허한 수사 없이도 공공연히 해외 ‘진출’을 하고 나선 상태이다. 여기서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사안만 살펴보도록 하자.
1987년 6월10일, 한국의 직선제 개헌 쟁취는 숱한 아시아 국가 민중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1988년 8월8일, 버마의 민중들은 대규모 봉기를 감행했다. 그런데 버마의 군부는, 애초에 국민을 위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무조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렇게 8888은 진압되었고, 아직도 버마의 봄은 멀다.
문제는 버마(미얀마)의 연근해에서 천연가스를 뽑아내고 있는 한국 기업이, 바로 그 미얀마 군부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정환닷컴에 따르면, 대우인터네셔널은 버마에서 투자가치 4580억원에 이르는 가스전을 개발하고 있다. 그 수입 중 버마 군부에게 들어가는 것은 86억4천만 달러로, 이는 그 나라의 국민총생산보다 많은 액수이다. 국민들이 죽건 말건 군부가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기업 덕분인 것이다. 게다가 대우인터내셔널의 최대 주주는 자산관리공사이며, 그와 무관하게 한국가스공사도 그 가스전의 개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별게 아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 되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의 이익 때문에 사람이 죽건 말건,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프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더 넓은 땅에서 웅비를 떨치고 싶고, 칭얼칭얼 징징징징거리고 있으면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 되는 것은 다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그런 ‘진출’에는 사실 민족이니 알타이니 하는 수사도 그리 필요치 않다.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의 한복판에 벨기에 영토의 절반 크기나 되는 농장을, 무려 99년간 무상으로 임대받는 계약을 체결했을 때, 그게 ‘우리 민족’이어서 그랬겠는가 말이다. 결국 마다가스카르에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시위대의 대표는 대우로지스틱스와의 계약을 해지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선 바 있다. 황석영이 꿈꾸는 몽고의 거대 농장과, 마다가스카르의 옥수수 농장이 다를 게 뭔가? 설마 아프리카 동남부의 섬 마다가스카르의 원주민들도 우랄 알타이 어군에 속하나? ‘우리 핏줄’인가?
알타이연합? 알타리김치나 드세요
온갖 비장미를 풍기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나선 황석영만큼이나, ‘문학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상상할 권리가 있다’며 그를 옹호하고 나선 김지하의 발언 또한 난망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김지하 본인이 촛불을 보면 촛불에서 율려를 보고,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보면 또 거기서도 율려를 보는 사람이니만큼, 황석영이 이명박 정부를 중도 실용주의로 평가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겠다.
하지만 케인즈의 말마따나 자신이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받아적고 있다고 여기는 광인 또한, 결국 어느 경제학자나 정치철학자가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듯이, 황석영의 알타이공동체론은 100여년 전 일본인들이 떠들었던 시덥잖은 제국주의 옹호론의 헛된 변주일 따름이다. 그나마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제국주의에 필요한 국제 정세 인식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황석영 본인은 자신이 “알타이 연합을 통해 지역적 균형을 이루면서 중국, 일본과도 건설적으로 협력하고, 그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남북의 연방연합 논의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이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는데, 제발 이런 소리를 할 때에는 지도를 펴놓고 했으면 좋겠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래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아프가니스탄의 아래에는 파키스탄이 있으며, 파키스탄과 이란은 동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 일본과의 건설적 협력”과 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네덜란드가 프랑스, 독일과의 건설적 협력을 위해 한국에 투자하고, 궁극적으로는 벨기에와의 1830년 이래의 분단을 넘어서 하나의 국가로 나가려고 한다고, 어느 네덜란드 작가가 말했다고 쳐보자. 타자를 치면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제발 꿈 좀 깨시라.
물론 문학가의 상상은 자유다. 하지만 황석영이라는 최고 수준의 예술가가 내놓은 상상이라 보기에, ‘알타이연합’은 너무도 조악하고 유치하다.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와서 내놓은 구상이라고는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폼나는 소리니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산티아고에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 싶다. 의미 없이 공허한 수사를 남발하며, 여행지에서 문득 마주친 풍경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를 성찰하는 여행기를 쓰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산티아고가 제격이니 말이다. 물론 서점가에는 ‘산티아고 여행기’가 넘쳐나지만 황석영이 하면 다르지 않겠는가. 먼길 떠나기가 힘드시다면 자택에서 알타리김치에 보리밥 한 그릇 석석 비벼 자시고, 푹 주무시고 일어나신 다음, <풍물기행 세계를 가다>, <W> 같은 프로를 보며 대륙의 꿈을 보듬으시는 것도 강추할 만하겠다.
2009-05-06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돼지가 독감에 걸린 날
돼지들만 억울하게 됐다. 돼지독감(swine flu)라고 초기에 명명된 것과는 달리, WHO는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신종 인플루엔자가 돼지에서 비롯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공식 명칭을 변경했다. 늦은 일이다. 많은 이들은 이미 이 질병을 '돼지독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1918~1919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스페인 독감의 경우도 그랬다. 스페인 독감은 스페인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페인 독감이라고 이름 붙여졌고, 지금껏 그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WHO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2009년 발병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꾸준히 ‘돼지독감’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을 때,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는 기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40대 버스 운전기사 모씨가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을 때, 대형 일간지들은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1면에 보도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조했다. 안타깝게도(?) 그 환자는 단순한 독감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정리해보자. 현재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는, 기본적으로는 평범한 독감과 다를 바 없다. 인플루엔자는 그 바이러스의 종류를 통해 크게 A형, B형, C형으로 분류된다. 이것들 중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A형이다. B형은 우리가 매년 예방접종을 맞는 평범한 독감 바이러스이며, C형은 그냥 ‘감기’의 원인이 될 뿐이다. B형과 C형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와 함께 살아왔고, 인간에게는 그 각각에 대응할 수 있는 항체가 있다.
문제는 A형 독감이다. 이것들은 주로 조류를 숙주로 삼으며, 간혹 돼지에게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인플루엔자 A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아직도 야생 상태에 있으며, 지금도 끝없이 진화중이다. 통상적으로는 A형 인플루엔자가 인간에게 감염될 수 없다. 단백질의 구조가 인간의 기관지로 침입할 수 없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혹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그 침투가 가능해지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것이 바로 인플루엔자 대유행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 <조류독감>에 따르면, “인플루엔자(독감) 대유행은 흔히 대다수의 사람들이 전혀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HA 아형의 출현 또는 재부상으로 정의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플루엔자 유행이 ‘돌연변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면역성을 지니지 않은 독감에 걸린 채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길어도 한 달 내에 그 사람은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그 기간 동안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자기증식하고, 그 과정에서 계속 돌연변이가 발생한다. 최대한 빨리 감염자의 신원을 확인하여 격리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몸은 바이러스를 배양, 증식할 수 있는 최고의 배양기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멕시코 정부가 감염자 숫자를 제대로 집계하지 않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큰 비난에 직면한 것도 바로 그래서이다. 인플루엔자와의 싸움은 결국 환자 관리에 달려 있다. 감염자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을 격리하여 치료해야만 파국을 방지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과연 온 국민에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의료적 혜택이 주어질 수 있느냐이다.
이명박 정부의 ‘의료 개혁’이 단행되지 않은 지금 신종 인플루엔자 문제가 불거진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직은 전국에 보건소가 깔려 있고, 사람들은 누구라도 5000원 미만의 돈을 내고 병원에서 잘 훈련된 의사의 진단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온 국민의 의료 접근권이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인구 1억 명이 모여 사는 곳이다. 멕시코 또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으로 인해 사회적 안전망이 파괴된 나라 중 하나이다. 현재 발생한 인플루엔자의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거대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인해 애꿎은 ‘타미플루’만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고 한다. 마치 1994년 북핵 위기 당시 라면을 사재기하는 일이 벌어졌듯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치료제인 타미플루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그 독감에 걸리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게 많은 사람들이 독감에 걸렸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한국의 의료 체계 하에서는, 본인이 스스로의 증세를 일찍 자각한다면, 신종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도 큰 무리 없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문제는 그놈의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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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ForeignPolicy한국어판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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