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22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하기

그놈의 '소녀시대 만화'가 도화선이 되었지만, 웹툰 작가 윤서인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비단 그 지점에만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워낙 다방면으로 수많은 주제를 다루었고 그 각각에서 용납되기 힘든 어떤 본질을 건드리고 있다. 나는 그 모든 요소를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를 말해보고자 한다.

디씨뉴스의 기사로 뜬 "소녀시대 성희롱 논란 작가, 과거 만화까지 논란"을 보자. 이 만화에서 윤서인은 '다니엘'이라는 단어가 과거에는 '다니엘의 집' 등에 모여 있는 장애인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많이 쓰였는데, 지금은 다니엘 헤니의 등장으로 인해 미남을 더 빨리 연상시킨다는 내용을 뻔뻔스럽게 그려놓고 있다. 캡처된 리플을 보면 그는 항의하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다니엘 학교는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시설이었지요.
당연히 정신지체아 이미지를 그려놓은거구요.
정신지체아는 입가에 침흘리게 그려야지 눈부라리고 똑똑하게 그릴순 없죠.

장애는 장애일뿐 그게 비웃을일이라고도 나쁜거라고도 한적없습니다.
스스로 편견에 가두지 마세요. 누구나 오늘부터라도 장애인이 될수있습니다.
장애인은 어디서 장애라는 단어만 보여도 발끈발끈해야하나요?

왜 입가에 침흘리는 다니엘 이미지를 보면 기분이 나빠져야 하는지???


윤서인의 다른 불쾌한 만화들이 가지는 사고 방식이 다 이런 식이다. '그거 사실이잖아, 나는 그냥 만화로 그렸을 뿐이야'라는 편리한 변명을 하는 것이다. 이다해가 성형 많이 했으니까 "여러분 이거 다 성형인 거 아시죠?"라고 썼을 뿐인데 리플에서 남들이 난리를 치니까 대사를 바꾸는 거고, 한국 제품들이 일본거 베낀 거 많으니까 그렇다고 말했을 뿐인데 괜히 열등감에 쩔어있는 한국인들이 지들도 어차피 일본거 좋아하는 주제에 지랄을 하는 거다. 윤서인의 세계관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을 보며 불쾌감을 느낄까? 윤서인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우리가 '도덕'이라고 부르는 어떤 가치에 기반한 행동 체계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서인은 약자들에게 언제나 '솔직'하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장애인은 장애인이고 침흘리니까 침흘리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다. 와, 솔직하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이 과연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윤서인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고, 디씨뉴스의 아래 달린 리플들 중에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는 이들이 없잖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도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도덕 체계는 우리에게 사회적, 육체적, 정신적 약자들을 향해 '솔직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친절하게 대하며 부족한 지점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불운한 요소로 인해, 혹은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강자들이 지니고 있는 편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 탄압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점이 오면 약자, 혹은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시선 자체가 주는 부담감이 문제시될 수 있고, 그래서 그냥 완전히 평등하게 대우해달라는 목소리가 드높아지기도 한다. 동성애자나 성적 소수자들이 사회적 입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는 특수한 지역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이전에 적극적이고 치열한 '보호'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도 그렇다. '장애우'라는 단어가 오버스럽다고, 남사스럽다고 불평들이 많지만 그런 억지스러운 노력이 있기 전에는 장애인들이 장애인이라고 불리지도 못했다. 그냥 '병신들'이었을 뿐이다.

윤서인과 같은 저런 식의 '솔직함'은, 세상이 반 발자국 나아졌다는 것을 빌미삼아 자신들의 원초적인 폭력성을 '솔직'하게 드러내버린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반동적이고 부도덕하다. 소녀시대에 대한 만화의 내용도 결국 그것 아닌가. 솔직하게 드러나버린 아저씨의 성욕. 아, 나도 소녀시대와 떡치고 싶구나. 그는 왜 자신의 솔직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그를 까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자신들이 왜 화를 내고 왜 까는지 모르는 것 같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약자에 대한 솔직함은 강자에 대한 비굴함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윤서인의 경우에는 본인이 강자에게 비굴하다 못해 강자에게 비굴하게 굴었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치닫고("내가 일제시대에 살았더라면 친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인 또한 자신이 생각하는 강자들의 무리에 끼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으며("일본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짱'에게 노골적인 찬사를 바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삼성 최고에요"). 인간의 본래적인 도덕심은 이런 식의 비굴함을 보며 분노하고 짜증을 내게 되어 있다.

문제는 이런 식의 행태, 약자에게 솔직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이런 모습이 과연 윤서인만의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굳이 이 떡밥을 물어버린 이유는 디씨뉴스에 달려있는 리플들을 보고 우려의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니까 장애인이라고 하는게 왜 안 되냐고? 그런 식의 솔직함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그런 식이라면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지칭해서, '검다'의 어근인 '검-'과 귀엽고 작은 누군가를 뜻할때 쓰는 어미인 '-둥이'를 합쳐서 '검둥이'라고 부르면 안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로니 콜먼에게 가서 당신의 솔직한 마음을 툭 터놓고 전달할 용의가 있는 사람, 손 한 번 들어보자.

도덕은 위선이 아니다. 하지만 일체의 위선을 파괴하고 나면 도덕이 갈 곳이 없다. 우리는 약자에게 겸허하고 강자에게 솔직해야 한다. 그게 올바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함'이라는 칼날이 오직 만만한 자들만을 향하고, '겸허함'이라는 미덕이 오직 자기보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만을 향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시대인 것 같다. 윤서인을 비판할 때 스스로의 모습도 좀 돌아보자는 말이다. 나의 솔직함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덧) 갑자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The Importance of Being HonestEarnest가 생각나지만, 억지로 본문에 끼워넣자니 내용이 망가질 것 같고, 떠오른 것을 안 적자니 뭔가 서운한 듯하여 괜히 덧붙여 놓는다.

2010-01-17

인간의 본질은 행위에 있다는 주장을 하기 위하여

헤겔은 인간의 본질을 얼굴의 생김새나 두개골의 모양에서 찾는 일체의 행동을 배격한다. 길고 난삽한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이 대목들만큼은 한달음에 써내려갔으리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관상술에 대하여.

관상술이 행위라는 현실적 존재를 갖가지 의도나 그밖에 자질구레한 면으로까지 분해하고는 인간의 현실을 나타내는 그의 행위의 결과를 다시금 상정된 존재로 환원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현실의 행위를 둘러싼 특별한 의도 따위를 꾸며내게 한다거나 하는 것은 사념을 일삼는 부질없는 노릇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좋겠다. 행위는 저버린 채 머리로 짜낸 지혜에만 의지하여 행동에 수반되는 이성적인 성격을 거부하며 행위보다도 오히려 용모나 표정이 행위자의 실상을 표현한다는 투의 억지 주장을 되풀이한다면 응당 그런 부질없는 인간에게도 앞에서와 같이 뺨을 후려치는 편이 나을 듯싶다. 봉변을 당하고 나면 그 부질없는 인간은 얼굴이라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런 매서운 맛을 봐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될 테니까 말이다. (346쪽, 강조는 인용자)


허영만 화백의 뺨을 후려친 헤겔은 골상학자들을 향해 달려간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에게 "너의 두개골은 이렇게 생겼으므로 너라는 인간(너의 내면)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한다면 이는 곧 두개골이 너라는 인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관상학에서 그런 판단을 하게 되면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지만, 그것은 관상학이 떨치는 위세나 지위를 허물기 위하여 단지 부드러운 안면에 가격을 했을 뿐이고, 그렇게 내려친 안면이 정신의 본체도 그리고 정신의 실상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방식으로 응수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뇌를 박살낼 정도의 타격을 가함으로써 뼈라는 것이 인간에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고, 하물며 그것이 인간의 실상을 진실로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 그 당사자의 지능에 어울릴 정도로나마 받아들이게 하는 길밖에 없다. (360쪽, 강조는 인용자)


내가 굳이 이 부분을 따로 정리해둔 이유는 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 안심하세요. 저는 칸트를 전공할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두개골은 안전합니다. 저는 님들을 해치지 않아요.


참고문헌

정신현상학 1 - 8점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한길사

2010-01-15

나머지 2000쪽

"특공대 공명심 때문에 이런 문제 생겼다"(프레시안, 2010년 1월 15일)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경찰 수뇌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경찰 특공대에게 떠넘기는 진술 내용이 담겨 있을 뿐이다.

김형태 변호사의 말대로, 순수하게 법리대로만 따졌더라면 이미 1심에서 무죄가 나왔어야 한다. 검찰은 공소사실을 입증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은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화염병 투척으로 인해 망루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 재판부에서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화재 원인이 화염병이라고 단정지었지만, 그것을 법적 판단으로 볼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공대에게 모든 책임을 몰아가는 이 기록의 내용은 명백한 꼬리 자르기에 불과하다. 대체 이따위 뻔한 소리를 왜 공개하지 않고 버틴 것일까? 어차피 1심 재판부는 법리를 무시하고 판결을 내렸으므로, 이 기록이 공개되었다 한들 결과는 유죄로 나왔을 것이다. 현재 검찰은 재판기피를 신청하며 시간 끌기에 나섰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둑맞은 편지에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취향을 위한 투쟁 - 단상들

* 자유라는 것이 결국은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부권으로 응축될 수 있다면, 취향은 전적으로 자유의 문제이며 그것은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그 무언가가 된다. 왜냐하면 취향은 수묵화의 달처럼,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통해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내 취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대중적인 취향'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취향은 그러므로 투쟁을 통해 지켜져야 할 그 무언가가 된다. 무엇으로부터? 무엇에 대하여?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입고 먹을 수 있는지를 강제함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몰취향한 자들로부터, 그들이 '당신과 나는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군요'라고 선뜻 내미는 미소에 대하여.

* 아퀴나스의 체계 속에서 진리는 곧 선한 것이고 아름답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진리에 대해 포기하지 않는 집착을 보인 자들은 당대에 의해 선의 배신자라는 평가를 받기 일쑤였으며, 아름다움을 위해 벌여지는 온갖 시도들은 오늘날까지도 마녀사냥을 당한다.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을 취향으로 유지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나는 동성애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는 자들을 혐오한다. 이것도 취향이라면, 내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가장 저질스러운 교만에 속할 것이다. 당연한 취향은 취향이 아니다. 당연한 것을 취향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어깨 위에 여우목도리처럼 걸치는 자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인터넷의 군중들이 느끼는 생래적인 반감은, 옳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 어떤 심리 테스트가 있다고 해보자. 일본풍의 일러스트를 클릭하고, 심리학적으로 볼 때 다수의 여성에게 포위되는 공포에서 쾌락을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를 선택하며, 정서적으로 고등학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남성인 피시험자에게 '당신이 좋아할만한 게임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결과가 나왔다. 두근두근 메모리얼, 동급생, 투하트.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취향을 존중해달라고 외치는 것이 습관화된 자들이 과연 이 조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해봤고 다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떤 취향을 추출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 취향은 대체 무슨 취향인가? 대체 어떻게 존중해줘야 하는가?

* '나 취향 좀 괜찮아요, 나쁘지 않아요'라는 뉘앙스로 말하는 사람들의 뻔한 취향. 미국 대중문화의 몇몇 코드, 심슨, 스타워즈, 뱀파이어(드라큘라가 아니다), etc. 특히 영국식 블랙 유모어가 좋아요. 미쉘 공드리는 좀 아닌 것 같지만, 영상은 훌륭하죠.

*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그래픽 노블이 훌륭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 출판도 비즈니스고, 팔릴만 한 것을 떼와서 파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그 작품들이 만들어낸 풍성한 대중문화적 결실을 바라보면서 원작을 음미한다. 그런 것들을 보는 스스로의 취향적 우월함을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7년근 인삼은 몸에 좋다는 말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 알랭 드 보통과 보르헤스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딱 하나다. 읽으면서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기 좋다는 것. 지금 내가 지적인 독서를 하고 있다고 남들이 생각할 것이라는 가상의 서사 속에 스스로를 배치할 수 있게 해주는 작가라는 것. 움베르토 에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소수자 취향이라고 생각하건 말건, 한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심지어 이탈리아보다 먼저, 에코 전집이 출간되었다. 전집을 사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출판계의 소수자들. 그들의 지름에 영광 있을지어다.

* 나는 내게 어떤 취향다운 취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가질 수 있을만큼 나는 충분히 무언가를 음미하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와 서로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취향을 가진 우리'에 속하는 일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당신은 나의 취향을 위해 투쟁할 수 없고, 나도 당신의 취향을 위해 대신 싸워줄 수 없다. 취향을 갖는다는 것은 취향에 어긋나는 것을 거부할 때에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취향은 자유의 문제다.

2010-01-07

인터넷과 짤방

인터넷 공간에서 논의와 논증이 사라지고, 대신 '짤방'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짤방이 들어선 자리에는 진지한 사고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자생적인 유머와 농담이 설 자리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면, 그를 어떻게 조롱할지 생각하는 대신, '내 그림' 폴더를 뒤져 앵그리 비디오 게임 너드가 욕하는 사진 따위를 찾아내어 블로그에 붙여놓고는 자신이 그 상대를 조롱하는데 성공하였노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상대를 풍자하고 조롱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상대방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짤방은 그렇지 않다.

그 짤방들 중 상당수는 TV에서 나온다. 인터넷은 결코 TV로부터 자유로운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영상 중 일부만을 캡쳐하여 공허한 분노를 뿜어내는, 철저히 종속적인 공간이다. 짤방 문화와 함께 만화 또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맥락으로부터 납치당한 캐릭터들은 '절망이다'라고 외치고 '죽어버려'라고 눈을 부라리지만, 정말 절망스러운 것은 언어의 자리를 짤방이 대체하고 있는 바로 이 현상 자체인 것이다.

2010-01-06

법은 최소한의 도덕

모든 동성애 혐오 발언은 합법적이다'라는 명제가 참이 아님을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동성애 혐오 발언은 불법적이다'라는 것을 굳이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어떤 동성애 혐오 발언은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라는 것만 보여주면 된다. 양화사가 들어가는 논리적 계산인데, 너무 간단해서 이걸 굳이 설명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아서 잠깐 짬을 내어 보겠다.

'내게는 표현의 자유가 있다', '내가 내 취향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다'라면서 동성애에 대해 이런 저런 혐오 발언을 마구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모든 동성애 발언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에 의해(왜냐하면 취향이니까) 보호받는다'라는 명제는, '어떤 동성애 혐오 발언은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라는 것을 보여주면 참이 아니게 된다.

정 이해가 안 가면 벤다이어그램을 그려보면 된다. 동성애 혐오 발언의 집합을 H라고 하고,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 표현의 자유를 F라고 해보자. '모든 동성애 혐오 발언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라는 명제는 H가 F의 부분집합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이렇게 그려질 수 있다.

{ 집합 F {집합 H} }


따라서 F에 속하지 않는 H의 원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면, 자신들이 무슨 소리를 찍찍 싸대건 한국 사회의 법이 그들을 처벌하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믿음이 헛된 것임을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지난 포스트인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말할 권리?"에서, 인종적인 이유로 모욕죄의 성립을 인정한 최근 판례를 근거로, 동성애에 대해서도 모욕죄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이 말은 당연히, 모든 동성애 혐오 발언이 모욕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모든 동성애 혐오 발언이 집합 F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일 뿐이며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수위의 동성애 혐오 발언은 표현의 자유의 일부로 보호받을 수도 있다. 내 블로그에서 리플을 달았다 지웠다 하던 어떤 사람은 위키피디아를 뒤져가며 그것을 내게 굳이 강변하려 들었는데, KKK단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고 인종혐오 발언도 어느 정도까지는 미국의 법 내에서 허용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법적으로 금지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것이 곧 정당하다는 결론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가령 당신이 만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방귀를 뀌고 싶다고 해보자. 그런 행동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당신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예의와 도덕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률 외적인 사회적 규제와 기준은 법을 통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

블로그 공간에서 '나는 동성애가 싫습니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정도의 미약한, 대상이 명확하지 않은 혐오 발언까지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까지 개인의 표현을 국가가 법으로 억압하려 들 경우 그 칼날은 내게 먼저 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으로서 누군가가 다른 '개인'의 그러한 발언 혹은 행동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그런 비판은 더욱 활발하게 벌어져야 한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 때문에, 국가가 법의 잣대를 들이대려 하지 못하도록, 개인들끼리 활발하게 도덕을 만들고 지켜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도덕적 기준이나 상식적 당위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의 토론과 담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데 있다. 따라서 '저 잉여들이 법을 어기지만 않는다면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무제한의 헛소리의 자유를 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다.

나도 지겹지만,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상식과 윤리의 기준을 좀먹는 반인권적 발언들을 방치하면, 법으로 보장된 인권마저도 축소시키려는 정치적 움직임이 결국 도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와 같은 권위주의 선호 집단은 도덕의 공백을 법으로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 악플로 최진실이 자살했다며 '최진실법'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것 따위가 대표적이다. 그러한 논리에 맞서기 위해서는 역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는 명제에 기대야 한다. 인터넷 악플은 도덕적 기준의 문제이지 법으로 다스릴 게 아니다. 그 기준은 결코 점잔 빼는 사람들의 고상한 촌평으로 지켜지는 게 아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따라서 '저들이 불법을 저지를 때까지는 무시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소리이다. 그렇게 도덕의 영역이 허물어지기 시작하면 그 공백을 타고 법의 지배가 스며들어온다. 그것은 권력 위에 군림하는 극소수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만약 누가 진정으로 범죄적인 혐오 발언을 한다면, 왜 그따위 인간과 '토론'을 한단 말인가?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콩밥을 먹여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우리가 시끄럽게 토론하고 싸우는 것은 누군가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어서가 아니라,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없더라도 옳지 않은 발언과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시끄럽게 싸워야 하고, 서로의 생각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한다. 참된 평화는 결코 강요된 침묵과 같지 않다.

2010-01-04

단순하고 점잖은 혐오의 표현이 낳는 결과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면,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집단이 탄생하게 된다. 2007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수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값을 올려줄 정치세력'을 국민들이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혐오 감정이 단지 dislike에만 머물 뿐 심각하게 범죄적인 hate까지는 도달하지 않으므로 괜찮다는 식의 표현을 서슴치 않는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정 반대의 진실이다.

나치가 세력을 확장하던 당시, 사민당은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었고 당내 소수파들을 '급진주의자'들로 몰아붙이며 급격한 중도화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많은 경우 대중의 정서를 거스르지 않기를 원했고, 그렇게 해서 자신들이 집권을 한 다음 세상을 바꿔야겠다는 식의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고 알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지적 및 정확한 기술을 환영합니다). 나치 뿐 아니라 사민당도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대중 일반의 편견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그에 동참하는 일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인 다수가 인정한 대표적인 나치 테러가 동성애자라는 소수에 대한 테러였다. 나치 지도부 몇 명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두고, [339쪽] 동성애에 대한 나치의 원칙적인 적대감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돌격대 대장 에른스트 룀이 동성애자라며 치욕적인 공격을 가한 것은 하필 사민당 신문이었다. 그때 사민당은 선거를 위해 "인민의 건강한 정서"에 호소한답시고 독일 사회주의의 자유주의적인 전통을 더럽힌 것이었는데, 1934년 소위 룀 쿠데타 이후 나치는 그 문제를 재론하면서 그때의 학살을 정당화했다.(338-339쪽)


이런 식으로 테러는 정치의 "일탈"적 수단이 되어갔다. 나치는 특유의 선동으로 '일반 대중'들이 '싫어하는' 자들을 하나씩 공격해 들어갔다. 가령 동성애자를 싫어하지만 그들에게 직접 돌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던 일반 대중들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나는 동성애가 싫다, 하지만 그들이 저렇게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치가 직접 그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시작하자 대중들은 스스로의 입장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 나치의 테러에 동조하거나, 그들의 테러에 공포를 느끼며 입을 다물거나.

나치는 '일반 시민'들이 고깝게 여기는 자들을 순차적으로 대상으로 삼았다. 테러의 화살이 돌고 돌아 사회주의자들에게까지 돌아왔을 때, 나치의 테러를 우려하는 이들은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직접적·조직적으로 항거하지는 못했다. 왜일까? 데틀레프 포이게르트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한다.

놀라운 것은, 적어도 1933년에는 신문들이 공산주의자, 사민당원, 노조 조합원에 대한 억압 조치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에는 나치의 정치적 테러에 대한 의사 표명이 드물게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좌파에 대한 테러에 침묵한 것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과거에 중도 정당이나 우파 정당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나치가 "빨갱이"를 해치운 것을 환영했고, 따라서 테러로의 "일탈"을 기꺼이 감수했다. 둘째, 좌파 정당에 대한 테러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는 것은 그 자체의 정치성으로 인해 생필품 공급의 부족에 대해 불평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행위였다. 따라서 좌파에 대한 테러에 동의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박해가 두려워 침묵했다. (79쪽)


'나는 공산주의자를 싫어한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나치의 폭력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이용하려 하거나, 그 폭력의 화살이 자신들에게 돌아올까봐 두려워서 반대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국내의 불만 세력, 특히 조직적으로 산업에 타격을 입힐 수 있고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분쇄해버린 히틀러는 급격하게 군국주의로 향하는 가속 패달을 밟는다.

동성애에 대한 혐오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동성애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회라면, 누군가가 동성애자들에게 테러를 가할 때, 어떤 이들은 후련해하고 어떤 이들은 그 폭력에 내가 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 움추려든다. 결국 남는 것은 피묻은 몽둥이를 든 깡패 집단이다. 당신들의 고상한 혐오가 반드시 고상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사민당 신문은 에른스트 룀을 아웃팅하면서 히틀러에게 그들을 학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렇게 민주주의는 죽어갔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동성애에 대한 대중적 혐오를 부추긴 자들이, 바로 그 혐오를 타고 폭력을 휘두르며 정권을 잡은 집단에 의해 숙청당하게 된 것이다. 그 노란 카나리아를 죽인 것은 결국 '선량한 시민들'의 '평범한 혐오감'이었다. 그 모든 폭력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말 그대로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참고문헌

나치 시대의 일상사 - 10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지음, 김학이 옮김/개마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