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5-29

투표합시다?

되묻고 싶은 것이 있다. '투표합시다'라고 외치는 온갖 캠페인의 제작자들은, 그것을 본 누군가가 한나라당을 찍으러 간다고 말해도 좋은가? '예'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정치운동이 아니라 한낱 공익광고를 하고 있을 뿐이니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그 사람은 공익광고를 빙자한 특정한 정치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 운동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공익광고의 탈을 쓴 정치운동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현재 선관위가 '선거 관리'의 탈을 쓰고 벌이는 온갖 편향적 행동들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선관위는 공정한 선거 관리를 위해 4대강 홍보는 그냥 두고 4대강 반대는 제지한다. 투표하자고 말하면서 한나라당 찍는 것은 안 된다는 복선을 까는 것은 원론적으로 볼 때 선관위의 그러한 행태와 다를 게 없다.

왜 '우리편'에게 항의하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비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공익광고를 빙지한 특정한 편향적 정치행위 자체가 갖는 해악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관위의 편향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공공성이 갖는 본래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투표합시다'라고 쓰고 '민주당·국참당 찍읍시다'라고 읽는 분들께 묻고 싶다. 당신들은 선관위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선관위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동의하며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행동은 어떻게 보일까? 역시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양극단의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회는 '공정함'이라는 기준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모두가 패배하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찍으면 된다. 찍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면 찍지 않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 잘못된 선거 제도 및 정치 구도에 대한 비판은 불가능한 일이 될테니 말이다. 솔직하게 찍고 정직하게 설득하라. 담백하게 비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이번 선거와 관련하여 내가 하고 싶은 말들 중 하나다.



첨언: 설령 '진보신당 찍자'는 복선을 깔고 '투표합시다'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비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내 논지는 '공익광고가 진정 공익광고가 될 수 있는 영역을 내버려두자'는 것이다. 진보신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비슷한 운동이 벌어진다면 나는 그것 역시 비판할 것이다.

2010-05-28

용산을 위해 노회찬을 지지한다

5월 27일,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의 트위터에 실망스러운 속보가 떴다. 5월 28일로 예정된 선관위 주최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 발목을 잡았다. 직전 전국선거 득표율 10% '이상', 또는 5석 이상 원내정당의 후보, 그도 아니면 언론사 여론조사 평균 지지율 5% '이상'이어야 선관위 주최 TV 토론에 초대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규정 때문에 노회찬은 다른 후보들의 동의가 있어야 TV 토론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당의 한명숙 후보, 자유선진당의 지상욱 후보가 모두 동의하였지만, 오세훈 현 시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TV 토론이라는 것이 생긴 후 가장 많이 초대받은 정치인인 노회찬이, 정작 본인의 선거를 위한 TV 토론에는 참석할 수 없게 되어버린 상황이다. 대체 왜 오세훈은 노회찬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것일까? 노회찬의 지지율은 앞서 말했듯 현재 5%가 되지 않는다. 노회찬의 지자자 분포는 오세훈의 지지자 분포와 거의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지지율, 당선 가능성, 지지자 분포 등 모든 요소를 다 따져봐도 노회찬은 오세훈의 당선을 방해할만한 요인이 못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부터 공정한 토론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게 될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오세훈은 노회찬의 마이크를 빼앗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5월 18일 백분토론에 출연한 노회찬은 늘 하던대로 능숙한 화술과 현란한 비유를 구사하며 오세훈을 몰아붙였다. 복지 예산 증가율이 도로 건설비 증가율에 비해 턱없이 낮다는 사실, 무상급식이 비현실적이라고 오세훈이 말하지만 이미 그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에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등을 조목조목 짚었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드문드문 폭소가 터졌고, 오세훈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갔다. 노회찬이 다섯 사람, 아니 여섯 사람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들을 기억하냐고 물었을 때, 그리고 오세훈에게 "서울 시장으로서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할 용의는 없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오세훈은 대답했다. "용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오세훈이 노회찬과의 TV 토론을 회피하는 정확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낼 수는 없다. 소수 정당의 후보자를 괄시하는 한이 있더라도 TV 앞에서 자신의 정책과 공약의 허점이 드러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토론에 약한 한명숙 후보와 1:1로 대결하는 구도가 자신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노회찬이 TV 토론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는 작년 1월 20일 우리의 양심을 뒤흔들었던 한 사건에 대해, 서울 시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시 한 번 물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노회찬이 없는 서울시장 후보 TV 토론에는 용산 참사도 없다. 그는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현직 시장에게 사과를 요구한 유일한 야당 후보인 것이다.

나는 선거가 이기고 지는 것을 판가름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거는 누군가를 투표로 심판하고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파악해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오세훈을 이기기 위해 노회찬의 사퇴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이 선거를 전략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지만, 서울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용산 참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나는 실존적 차원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대할 수밖에 없다.

오직 노회찬만이 용산 참사를 기억하고 TV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런 노회찬이 아닌 다른 그 누구를 찍는다면, 우리는 용산 참사를 흘러가는 세월 속에 흐려져가는 기억 속에 묻어버리겠다는 결정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의 삶보다 건설 자본의 이익이 중요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 자본의 힘에 짓눌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은 후 차가운 시신보관소에서 영겁처럼 긴 시간 갇혀있었던 약자들의 눈물을 기억하고 그것이 서울 시장으로 대표되는 이 도시 자체의 문제임을 굳이 상기시키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다. 노회찬을 지지하는 것은, 그래서 적어도 내게는, 실존의 문제다. 나 역시 용산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용산 참사의 유가족, 제2의 제3의 새로운 용산 참사의 현장에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철거민들과 연대하는 방법은, 용산 참사를 기억하는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발언 기회를 빼앗은 오세훈의 정치적 행위를 비판하며, 한 사람의 서울 시민으로서 노회찬을 지지한다.

2010-05-25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조선일보는 때로 정치꾼이 되어버린 삼류 시인처럼 보인다. 우스꽝스러운 운율, 싸구려 감수성, 너무도 명백한 정치적 의도. 벤야민이 말한 '정치의 예술화'를 실현하고 있는데, 그 정치와 예술 모두 저질스럽게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조선일보가 딴 건 몰라도 미다시는 잘 뽑지'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의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게 미적으로 허름한 헤드라인을 '잘 뽑는 것'으로 보는 미적 판단 수준이 한국 사회의 정치적 의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역으로 따져 묻고 싶어진다.

2010-05-17

스타리그 승부조작 사건을 보며 한 가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일단 사건에 대해 보도된 내용부터 살펴보자. 스타크래프트 게이머들을 매수해 승부를 조작하게 하고 배당금 이익을 챙긴 사람은 두 명이다. 구속당한 박모(25)씨와 불구속기소된 정모(28)씨. 누군지 모를 수가 없는 프로게이머 마모(23)씨는 원모(23)씨와 함께 이 매수자들과 프로게이머들을 연결시켜준 혐의를 받고 있다. 참고기사

문제는 이 박모 씨의 직업이 뭐냐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서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검찰에 따르면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인 박씨는 조직폭력배 김모씨(지명수배)와 함께 작년 9월부터 올 2월까지 원씨 등을 통해 경기에 출전하는 게이머들에게 건당 200만~650만원을 주고 경기에서 고의로 지도록 사주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게이머 양성학원 운영자. 그게 승부조작에 관여한 주범의 직업이다.

저런 게 다 있나 싶어서 검색해보았더니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인용된 기사에 따르면 "`키주 아카데미'(kizoo.co.kr)로 알려진 이 학원에서는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학생 또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게임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부터 경기 분석과 같은 다양한 코스를 이수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고 한다. 박모 씨가 운영하던 학원이 과연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학원과 동일한 곳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쨌건 이런 종류의 학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누군가가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돈을 내고 배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너무도 일상화되어 있다. 일하면서 일을 배우는 게 아니라, 학원에서 대충 배워온 다음 직장에서 단물 빨리는 구조로 몇몇 직업군이 유지된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 직업군의 반열에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요점 정리의 왕국, 사교육의 본고장, 이곳은 대한민국인 것이다. 한국인들은 죽어서도 심판받기 전에 기출문제집 찾을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징그럽다.

나는 한때 누군가와의 술자리 혹은 전화통화에서 '스타리그만큼은 한국 최강자가 세계 최강자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종목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은 스타크래프트 리그의 종주국이며, 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최강국이다. 따라서 '외부'를 신경 쓸 필요 없이 스타크래프트의 팬들은 자생적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영국인들이 '본토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먹히지 않을 텐데'라고 힐끔거린다면 과연 락의 종주국이 될 수 있었을까? 미국 남부의 흑인들이 '이런 노래는 리얼 간지가 아니야'라면서 재즈의 '원본'을 수입해 듣는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가?

한국의 청년들에게 주어진 바로 그런 종목 하나가 스타크래프트 리그였다. 스타리그만큼은 우리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것이 '원본'이고 '진짜'였다. 그런데 그것이 왜,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뭐든지 붙잡고 쓸데 없는 수준까지 열심히 하는 한국, 혹은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가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명의 용병들은 한국 선수들처럼 죽어라 연습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요컨대 스타리그의 성립은 지극히 한국적인 풍토 때문에 가능했다. 미시적으로 파고들고, 뭐든지 기술적으로 끝까지 연마하는 풍토. 그리고 지금 '스타크래프트 학원'의 원장에 의한 승부조작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의 치명적인 약점 역시 한국적인 무언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학원에서 돈을 주고 배운 선수들은, '박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유혹에 약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말이다. 착잡한 마음에 단상을 한 구절 적어 보았다.

2010-05-09

이명박 경례 논란

국군통수권자가 될 수 있는 자격 여부와 군필 여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미국은 모병제 국가지만 베이비붐 세대는 베트남전과 관련해 징집 영장을 받은 경험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미국이어서 옳다는 게 아니라, 애초에 군대를 갔다 왔냐 아니냐로만 따지는 것은 유치한 소리라는 것이다.

요점은 누군가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느냐, 그 책임 의식이 적절한 실천으로 뒷받침되고 있느냐 여부이다. 군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이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 회피를 나타내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물론 고의적인 병역 회피는 나쁘다. 그러나 오직 그것만을 놓고 이명박을 비판한다면, 이명박 비판자들의 논리는 금새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 갔다 왔냐 아니냐 같은 말초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한, 여성 대통령도 장애인 대통령도 있을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얼마나 잘 수행했느냐를 놓고 한 사람의 공적 인생을 평가해야 하며, 오직 하나의 징표인 '군필 여부'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현명한 담론 전략이 되지 못한다.

이명박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혐오로 문제를 끌고 들어갈 경우, 적지 않은 수의 고연령층은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비아냥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삶이 그리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을 겪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이명박의 추한 외모와 그 위에 뒤덮인 명품들은, 언벨런스가 아니라 차라리 '가능성'이며 '희망'이다. 이명박을 비판하는 당신보다는 차라리 이명박에게 더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명박이 경례를 AM으로 한다'며 비판하는 것과, '이명박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대한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굳이 어떤 가치를 표방하고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저 새끼는 미필'이라고 말하면 그만인데, 그렇게 말하는 군필자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대한민국의 군대 혹은 그 군대에서 보낸 자신의 지난 몇 년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명박을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공동체'라는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을 인권의 이름으로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 정부의 여러 행태는 반인권적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재수 없는 인권단체 나부랭이'의 일부로 내가 되려 비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무릅써야 한다. 하지만 군대 문제에 있어서 적지 않은 수의 남성은, 자신이 대한민국의 군대를 사랑하고 긍정하지도 않으면서 군대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욕한다. 그것은 자가당착이며, 듣는 이를 설득시키기 어려운 화법이다.

이명박을 미워하고 싶다면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라. 이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명박이 그렇게 온갖 부정적인 가치를 현현하고 있는 존재라면, 어떤 긍정적인 가치를 사랑하고 있는 한 당신은 그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미움은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비판으로 당신을 이끌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명박을 미워하기 위해 이명박을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치와 지향을 지니고 사는 삶, 그러한 가치 하에 이루어지는 비판,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