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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6

[서평] 로널드 드위킨, <신이 사라진 세상>

신이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늙은 법철학자의 마지막 질문] 로널드 드워킨의 <신이 사라진 세상>
프레시안Books, 2014년 4월 25일.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6656 

1.

법대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수능 성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노닥거린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참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능 점수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중 제일 '좋은' 곳에 원서를 냈다.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입수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봤는데, 제목이 기억나는 것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밖에 없다. 일찌감치 백수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 공부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민법총칙 교과서에는 스위스가 '瑞西(서서)'로, 오스트리아가 '墺地利(오지리)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책을 덮어버리고,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퍼져 있던 교내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그마저도 시들해질 때쯤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래도 법대에 왔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법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줄 주변 서적들을 찾아 읽겠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다.

'단지 법학자를 넘어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몇몇 있다. 가령 독일의 형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잠언집을 읽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이 담긴 에스프리들이 묶여 있었는데 적어도 당시의 내게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일종의 '진입 장벽'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라드부르흐의 법철학, 특히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드부르흐 공식' 등은, 나치 시대에 대한 독일 법학계의 평가와 반성이라는 맥락이 있어야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합법적'으로 '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따라서 그들이 만든 법이 문제였지 법조계는 비교적 결백하다는 항변이 그 이면에 깔려있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그의 말과 법철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법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법은 그 법이 통용되는 한 사회 내에서는 보편적인 규범력을 지니고, 따라서 그 법을 해설하거나 법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법학 역시, 대체로 특정 사회의 맥락 속에서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허버트 L. A. 하트의 <법의 개념>(오병선 옮김, 아카넷 펴냄) 같은 책을 읽어서 곧장 이해할 수 있는 한국 법학도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나는 당시의 나를 변호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의 법철학은 영미법 체계를 해석하면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흘러 로널드 드워킨이라는 이름을 만났지만, 역시 학부생이던 그 당시에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책이었던 <법의 제국>(로널드 드워킨 지음, 장영민 옮김, 아카넷 펴냄)은 그저 두껍고 어려웠을 뿐이다.

2.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고 전공 대상은 칸트로 선정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다. 책을 그냥 쓱 읽어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혹은 이해했다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칸트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여러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드워킨의 마지막 책 <신이 사라진 세상>(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펴냄)도 그렇다. 법학적으로 응용되어 있는 부분을 빼고 나면, 이 책의 논의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옮김, 아카넷 펴냄), 이른바 '그룬트레궁'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칸트의 핵심적 논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 윤리 법칙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렇게 파악된 윤리 법칙은 이른바 '정언 명령'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정언 명령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3) 신의 존재는 이러한 윤리형이상학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정언 명령의 최종 담지자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할 따름이다.

<신의 사라진 세상>의 논리 전개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종교의 과학 영역 그리고 의식을 통한 숭배 의무와 같은 신에 대한 책무를 거부한다"(43쪽)고 할 때, 드워킨은 칸트가 말한 (1)의 논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어떤 인생을 사는가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잘살아야 할, 빼앗을 수 없는 윤리적 책임감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같은 곳)는 말은, 칸트가 말한 (2)의 논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종교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워킨의 주장 가운데 '철학적'인 부분은, 사실상 일종의 탄탄대로 위에 놓여있는 셈이다. "우리는 처벌을 내리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오히려 신이 존재해야만 심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183쪽)고 말할 때, 드워킨은 '신의 요청'에 대한 칸트의 주장, 앞서 우리가 정리한 (3)번 논지를 되풀이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직전까지 영미 법철학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던 그는 굳이 왜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칸트가 이야기한 윤리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이른바 '전투적 무신론자'들(및 그들을 따르는 지식인들)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들 혹은 그러한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또한 무엇이 윤리적인 삶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때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면,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그렇게까지 전투적이어야 할 필요는 사실 딱히 없다. 반대로, '전투적 무신론자'들 또한 실은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과 진지함으로 삶을 바라보고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면, 유신론자들 역시 그들을 특별히 적개시해야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드워킨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렇다. 그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법학자이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신 없는 종교'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능을 동일하게 구현한다면, 그 또한 종교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드워킨은 자신이 1992년에 쓴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종교를 정의한다. "종교는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인 객관적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148쪽) 얼핏 듣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종교를 정의할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가령 낙태와 같이 기존 종교의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 역시, 일종의 '종교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 보호되는 권리가 과연 무엇을 보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드워킨은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또 답변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사람들의 윤리적 독립성을 지켜주는 것인지, 드워킨은 묻는다.

가령 내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마치 고대 이집트인처럼) 신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나의 종교의 자유 중 첫 번째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내가 종교적 환각 상태를 넘나들기 위해 국가에서 금지한 약물을 복용하고자 한다면, 그럴 때 나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나의 윤리적 독립성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해야만 한다.

첫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는 종교적 광신 등으로 향할 우려가 있다. 또한 국가가 두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를 종교의 자유로 보호한다면, 종종 '자신만의 윤리'를 세워나가며 기존의 법과 질서를 어기는 자들을 법으로 지켜줘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섣불리 해답을 내리는 대신, 드워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은 모두 좀 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지만, 서로 독립적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은 깊은 종교적 포부의 영역에서는 유신론자들을 완전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가 자신들과 똑같은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메울 수 없을 듯 보이는 간극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도덕적,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은 과학적 의견의 불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도 너무 큰 욕심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174쪽)

4.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낙태와 성에 대한 문제들이 그렇다. 낙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의료 기관은 환자에게 필요한, 환자가 요구하는 의학적 처치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의료 기관의 의무다. 하지만 일부 종교적 성향을 지니는 병원들은 가령 낙태처럼 종교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술을 거부하고, 그럴 때 자신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종교 단체들이 자신들의 로비력을 발휘해, 동성애 행위(이것은 좀 오래 전 이야기이겠으나), 동성결혼, 조기 낙태 등을 불법화하는 법을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연방대법원은 대체로 위헌 판결을 내리는데, "대법원은 그 판결의 근거를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종교의 자유 보장 조항이 아니라 미국 헌법의 평등한 보호와 적법한 절차의 조항에서 찾아냈다."(171쪽)

대법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의 의지를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에서 자신의 욕구가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 헌법의 상태와는 별개로,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윤리적 독립성의 일부로 대한다면, 진보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172쪽)

그러니까 한 쪽은 타인의 생명 및 삶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고 침해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종교의 자유를 들이밀고,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저 '평등'과 '적법절차'라는, 다소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헌법 원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종교와, 종교가 담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삶이라는 가치 자체를 장기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로널드 드워킨의 유작이 된 것은, 계산한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아름다운 결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평생토록 진보적(인 입장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법학자의 눈으로, 또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왔다. 단지 해석에서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인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답게, 논의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제 ‘Religion Without God’을 <신이 사라진 세상>으로 옮긴 것은 좋은 판단인 것 같다. 신이 사라진 세상도 아름답고 윤리적일 것이라는 그의 낙관적 믿음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5.

철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딴 후 군대에 갔다. 다행히도 카투사가 되었고,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다. 특히 훈련을 나가면, 나는 통신병이었으므로, 대기 시간이 길었다. 경기도 북부의 어딘가에 있는 탁 트인 벌판에서, 사령부에 인공위성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해놓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드워킨의 《Life's Dominion》이었는데, 내가 한창 읽어내고 난 후에야 <생명의 지배영역>(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내가 읽었지만, 혹은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대가의 문장과 논증을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워킨은 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더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안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지가 등장했을 때, 그는 특히 《New York Review of Books》 지면을 통해 치열한 반박에 나섰다. 이른바 '오바마 케어'가 통과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것에 그가 얼마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실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싸우는 지식인의 한 표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킨들에 넣어둔 그의 책을 언제 다 읽나 하고 있을 때쯤, 드워킨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설령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한들 내가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아쉬웠고, 어떤 면에서는 슬프기도 했다.

법학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 근거가 대단히 부실한 학문이기도 하다.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와 권위가, 한국 같은 성문법 국가의 경우 결국은 법조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미법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법은 왜 법인가? 법이 왜 정당한가? 같은 질문에 대해 통상적인 법학의 범위 내에서는 답하기 어렵다. 법의 정당성과 지엄함은 법 바깥의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있고, 종종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끝내 모른척하고 오직 실정법에서 출발하는 법학만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드워킨 같은 사람의 책을 읽는다. 철학적인 원칙과 논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법한 논증을 만들고, 그것이 현실의 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혹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지 유려하게 기술한다.

지적인 기반도 없고, 토대도 약하고, 심지어 판사마저도 걸핏하면 '국민의 법 감정'을 운운하며, 검찰은 국정원과 손을 잡고 무리한 기소를 벌이다가 그들 말에 따르면 '간첩임에 분명한' 유우성 씨를 놓아주는 일이 벌어지는 이 한국의 법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과 이상, 시궁창과 별이 빛나는 밤, 그런 차이가 또렷하다.

칸트의 잘 알려진 문구로 이 서평을 끝내도록 하자.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드워킨과 나와 당신은, 그런 면에서 모두 같은 별과 같은 도덕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명복과,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을 빌어본다.

2022-11-09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 GQ KOREA

2017.02.08

도서관도 없는데 책도 없고 결정적으로 도서관적 경험도 없는 이곳의 도서관에 대하여.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모른다. 서울 외 지역 출신에게 서울은 있어야 할 게 모두 있는 곳이다. 서울의 도서관이라면, 경기도 부천에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책의 바다’여야 한다. 부천의 경인문고에서 책을 뒤지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1호선을 타고 종로로 향했으니, 부천과 달리 서울의 도서관은 굉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나름 합리적인 유비 추리의 산물이었다.

서울 사람이 아닌 내게 서울의 도서관은 일단 대학 도서관이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대출 기록을 긁어보니 총 970권을 빌렸다. 그것들을 전부 읽었다고 장담할 순 없으나, 나는 가급적 빌린 책을 끝까지 읽고 돌려준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부를 졸업한 후 전공을 바꿔 다른 대학교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도서관에 가보니 학부 시절의 그곳보다 장서량이 부족하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애석해하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군 복무를 마쳤고 사회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 어떤 대학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서울의 여러 곳으로 주소지를 옮겨 다닌 지 여러 해, 이제야 서울의 도서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부천에 살던 내가 막연히 동경하던 서울의 도서관은 서울에 없다. 서울에 없다는 것은, 그것이 지역 특산물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한국에는,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 이상적인 시스템으로서의 도서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형으로서의 도서관’이 뭘까? <달력과 권력>이라는 생물학자 이정모의 책이 있다. 달력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제정 및 변화 과정이 개별적인 사회 및 세계의 권력 구조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추적한 책이다. 박학다식한 과학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물학 전공자가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서문을 통해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독일의 연방도시 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달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읽고 미진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참고도서를 찾으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있었다. 수메르와 로마 달력에 관해 1800년대에 출판된 책이 서체만 현대적으로 바뀌어 재출간된 것을 비롯, 달력에 관한 수십 종의 책이 동네의 조그만 도서관에 갖춰져 있었다. 본에 없는 책은 사서에게 부탁하면 다른 도시에서라도 구해다 주었다. 생태생화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전공과 아무 상관도 없는 달력에 관한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독일의 우수한 도서관 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책이 나오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본의 도서관에 감사의 말을 돌리고 있다.

이정모가 말하는 ‘본의 도서관’은 단일 건물과 제반 시설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에 거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학 도서관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일단 도서관에 가면 이용자가 원하는 주제의 책을 찾아주는 사서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없는 책은 다른 도시에서 가져다주는 종합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공부하고, 연구해서, 지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도서관은 그런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 에도 나와 있다. 에코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는 한 학생의 사례를 상정한다. 그 학생은 4년간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았고,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지도교수로부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해 논문을 써 보라는 조언을 받았을 뿐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그리고 접근 가능한 도서 관은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구 9만의)”의 시립 도서관뿐이다. 에코는 자신이 가진 중세 전문가로서의 이점을 포기하고, 사서에게 물어보는 쉬운 길을 접어둔 채, 우연히 발견한 핵심적인 논문의 참고 문헌 목록을 베끼는 짓을 하지 않 고, 어떻게 인구 9만 명이 사는 도시의 시립도서관에서 어엿한 논문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시연해 보인다. 그리고 밥 아저씨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참 쉽죠?”

어떤 테마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 없이 지방의 도서관에 가서 세 번의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충분히 명백하고 완벽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방에 살고 있고, 책들도 없고, 어디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서울의 도서관에서 과연 본의 도서관, 혹은 에코가 말한 인구 9만의 도시 ‘알레산드리아의 도서관’과 같은 수준의 연구를 해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한국의 철새, 19세기 판소리의 채록 과정, 물산장려운동과 담배 수입의 역사 등, 한국적인 뭔가를 주제로 삼는다면 비교적 수월할 것이다. 대학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잘 짜인 상호 대차 서비스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일반인들이 궁금해 하는 지식 및 학술 정보에 대하여, 이용자가 도서관을 방문하지 않고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홈페이지를 통해 질의 답변을 받는 참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고, 주제가 한국적인 뭔가라면 연구는 가능하다. 문제는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울에서 가장 책이 많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의 경우 책 저장고로서의 기능에 더욱 충실하고자 모든 도서를 ‘폐가식’으로 운영한다. 보고 싶은 책 제목과 청구기호를 적어서 제출한 후 한참 기다리면 도서관 직원이 가져다준다. 열람만 가능하고 관외 대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책을 저장하고 보호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이긴 하지만, 책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출구를 찾는, 도서관 고유의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답을 찾는 곳이다. 그러나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은 책 속에서 길을 잃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잡으면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그런데 대학 도서관이 아닌 한, 서울의 도서관 중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52만여 권을 소장한 정독도서관, 44만여 권을 보유한 남산도서관 정도가 체면을 세운다. 이는 서울대 4백52만 권, 고려대 2백45만 권, 연세대 2백7만 권, 부산대 1백 94만 권, 성균관대 1백82만 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 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전부 합쳐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 수보다 적다. 대한민국에는 도서관이 별로 없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책이 별로 없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도서관 정책은 ‘도서관적 경험’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나라에서 아예 법을 만들어 ‘작은 도서관’ 을 육성하고 장려한다. 2012년 2월 17일 제정된 ‘작은도서관 진흥법’에 따르면 작은 도서관이란 “<도서관법> 제2조 제4호가목에 따른 도서관”을 말하는데, 해당 조문을 찾아보면 ”공중의 생활권역에서 지식 정보 및 독서 문화 서비스의 제공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도서관으로서 제5조에 따른 공립 공공도서관의 시설 및 도서관 자료 기준에 미달하는” 곳이라고 한다. 즉, 애초부터 작은 도서관은 자료를 턱없이 부족하게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국민의 지식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의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작은 도서관의 기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7년 1월 현재 전국에는 6천1백73개의 작은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1천여 권, 혹은 수백 권 단위의 장서를 비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확장된 학급 문고 수준인데 그 앞에 굳이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면서까지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붙여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좀 더 주민 친화적이면서 도서관의 본래 기능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명칭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린이를 위해 작은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의 도서관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더 큰 책의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나는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싶었다. 나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지성을 바라보며 눈이 멀고 싶었다. 작은 도서관이 아니라 큰 도서관을 간절히 원했다. 오늘날의 책벌레 어린이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아기자기하고 예쁜 뭔가가 아니다. 성장해가는 자아를 한껏 뻗칠 수 있는 모험의 장이 절실하다. 그러한 곳, 진정한 도서관은, 단지 어린이들뿐 아니라 늘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연구하며 표현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학자와 작가와 연구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 서울의 도서관은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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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고 떠올라 백업용으로 올리는 지난 글.

연관된 내용으로, 이 블로그에 있는 다음 글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2-05-14

금배지 방패 삼아 숨지 못하게... 나라의 주인들이 회초리 들어야

금배지 방패 삼아 숨지 못하게... 나라의 주인들이 회초리 들어야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성경 속 ‘불의한 청지기’ 비유와
대한민국 최악의 대리인들

옛날에 어떤 부자가 있었다. 부자는 집사를 두고 살림을 맡겼다. 그런데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부자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집사를 불러 해고하겠노라고 통보했다. 당장 쫓겨나게 생긴 집사는 고민에 빠졌다. 다른 곳에서 집사 노릇을 할 수도 없게 된 처지에, 험한 육체노동을 해서 입에 풀칠을 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엉뚱한 결론에 도달했다. 주인댁 바깥에서 자신을 반겨줄 사람들을 만들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렀다. 그러고는 기름 백 항아리는 쉰 항아리로, 밀 백 섬은 여든 섬으로 깎아주었다. 낭비를 한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생긴 집사가 주인의 재산을 불리기는커녕 도리어 더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그러자 주인은 집사를 불렀다. 내쫓지 않았다. 오히려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이야기다. 옛날 말로 집사를 청지기라고 한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다.

성경에 나오는 여러 비유가 그렇지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특히 혼란스럽다. 논란의 여지도 많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았다. 그런데 어째서 주인에게 다른 사람들이 진 빚을 제 맘대로 깎아주고는 도리어 칭찬을 듣는다는 말인가? 성경에는 저 집사 혹은 청지기가 의롭지 못하다고 분명히 적혀 있다. 그런데 왜 예수는 나무라지 않는 걸까?

세속의 학문을 통해 성경의 비유를 이해해 보자. 1976년,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젠슨과 로체스터 대학교의 윌리엄 메클링은 본인-대리인 문제, 혹은 주인-대리인 문제(Principal-agent problem)를 제시했다. 일을 맡기는 사람과 맡아서 하는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경영학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사람은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할 수 없다. 계약을 맺어 다른 사람을 고용하고 일을 시켜야 한다. 일을 맡긴 사람이 일의 주인이다. 하지만 일을 더 잘 아는 것은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즉 대리인이다. 주인보다 대리인이 정보 면에서 우위를 차지하면서, 주인에게 불리하고 대리인에게 유리한 정보 비대칭이 발생하게 된다는 뜻이다.

남에게 일을 맡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24시간 감시하고 있지 않은 다음에야 주인은 대리인이 자신을 위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 100% 확신할 수 없다. 대리인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이로운지 아닌지, 심지어 대리인이 유능한지 여부마저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 수 있다. 업무 파악, 지시, 평가 등에 있어서 대리인은 주인보다 늘 우위를 차지한다.

주인-대리인 문제는 고용 관계, 업무상 계약 관계를 넘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엄마가 심부름을 보내면 아이는 그 돈으로 과자를 사 먹고 싶어진다. 선거철만 되면 굽실거리는 정치인들은 투표 다음 날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려 든다. 다수의 선량한 사람은 양심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주인-대리인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요즘 우리 사회는 대리인 문제로 홍역을 앓는 중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온갖 사건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오스템임플란트에서 2000억원, 우리은행에서 600억원, 돈이 돈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액수의 횡령 사건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아직 수사 중인 사안이지만 밝혀진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이는 전형적인 대리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경영진이 제대로 감시할 수 없거나 감시하지 않는 틈을 타, 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털고 있는 것이다.

온 나라에 대리인 문제가 심각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윗물이 썩었기 때문에 아랫물이 혼탁해진 것이다. 지난 5년, 문재인 정권이 벌인 일을 되짚어 보자. 세계로 수출되는 우리 원전 산업을 누구 한 사람의 고집으로 발목 잡고 주저앉히더니, 멀쩡한 숲을 밀고 중국산 태양광 패널을 도배했다. 우량 기업이던 한국전력을 빚더미에 올려놓고, 지방대가 문을 닫는 이 시점에 한전공대를 새로 만들기까지 했다. 마음껏 낭비하고 그 청구서를 주인에게 넘긴 채 떠나버리는 최악의 대리인이다.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재개발 사업에서 건설 회사는 최대한 많은 이익을 남기려 한다. 정부의 역할은 그런 사적 이익의 추구를 적절히 통제하고 공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재명의 성남시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공공 개발을 막고 영리 개발을 허용하며 그 이익을 소수가 독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주었다. 성남 시민과 대장동 입주민들의 대리인이어야 할 이재명은, 화천대유 일당 중 한 사람인 변호사 남욱의 말을 빌리자면, ‘4천억원짜리 도둑질’의 현장에서 시장 직인을 찍어주고 있었다.

대리인 문제를 원천 봉쇄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문제가 불거졌을 때 행동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주인이 고삐를 다잡는 것이다. 스스로 나서서 대리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해야 한다. 주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이 벌어졌을 때, 확실히 적발하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대리인 문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으로 돌아가 보자. 주인은 집사가 자기 재산으로 폭리를 취하는 대신 다른 이들에게 베풀기를 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집사가 돈놀이를 하고 낭비하는 것은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사람들이 진 큰 빚을 깎아준 것은 어여삐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온 세상의 주인인 예수는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향해, 물질적 손해를 보더라도 영혼의 풍요를 얻으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이재명은 대장동을 알았다면 공범이고 몰랐다면 무능이다. 어떤 면에서건 심각한 주인-대리인 문제다. 실패한 정치인, 행정가로서 자숙하며 수사에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대선에서 패배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연고도 없는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있다. ‘윤석열이 대장동 몸통’이라는 기상천외한 레퍼토리를 다시 꺼내든 것은 물론이다. 현실의 대리인 문제는 성경 말씀처럼 선하게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국회의원 금배지를 방패 삼아 숨지 못하도록,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단호하게 회초리를 들어야 한다.

‘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상상과 선동에 휩쓸린 문재인 5年

●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 억압”
● 민중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
● 박지현은 무엇이 못 마땅했을까
● 前 당 대표 이해찬의 ‘노론 음모론’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 10일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탄핵 이후 인수위원회 기간 없이 곧장 취임하며 야외 취임식도 생략한 터라, 9년 만에 치러지는 대규모 행사였다. 약 4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앞에서 신임 대통령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취임사를 낭독했다.

행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예상한 BTS의 공연도 없었다. 그러나 평범하지도 않았다. 외려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통상적 미사여구로 둘러대지 않았다. 반(反)지성주의라는 과제 앞에 맞서기 위해 자유의 기치를 드높여야 한다는 대통령 본인의 세계관을 분명히 드러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흔치 않은 대통령 취임사였다.

‘그거 내 욕하는 거 아니야?’
윤석열은 대한민국이, 또한 세계가 처한 위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금 정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윤석열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망가지고 정상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새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면, 일반적으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박수를 쳐주고 덕담이나 해주며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독으로 168석(취임식 날 기준)을 지닌 초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퍽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5월 11일 조오섭 민주당 대변인은 성명을 발표해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한 반지성주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5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박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를 겨냥해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했다. [뉴스1]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을 통해 우리는 민주당이 못 마땅해 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박지현은 5월 11일 당 비대위 회의에서 “민주주의 위기 원인은 반지성주의라 규정하고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즉, 민주당은 ‘반지성주의? 그거 내 욕 하는 거 아니야?’하고 화를 낸 셈이다.

‘발끈하는 걸 보니 찔리나보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굴 생각은 없다. 또한 박지현의 지적에는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드러났다시피, 민주당의 구성원 중 일부가 심각한 지성의 결여를 보여준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반지성주의를 논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거나 중요하지 않다. 반지성주의란 흔히 말하는 ‘무식함’이나 ‘교양 없음’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반지성주의의 본래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의 정치 역사상 가장 반지성주의를 심각하게 드러낸 정당은 민주당이며, 그 기간은 지난 문재인 정권 5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저작권자, 美 역사학자 호스스태터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공산주의처럼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용어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용어다. 그 저작권자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로, 1970년 세상을 뜰 때까지 컬럼비아대에서 교편을 잡은 인물이다.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펴낸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하게 된 이 책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바는 분명하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을 되짚어보며, 다시는 그런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호프스태터에게 미국의 반지성주의란 특정 정치 세력이나 정당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국인의 삶 전반(American Life)에 반지성주의의 싹이 심어져 있고, 특정한 조건과 계기가 맞아떨어지면 그것이 매카시즘 광풍과 같은 형태로 터져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일까? 미국은 구대륙 즉 유럽에서 박해 당하던 신교도가 이주해 만든 나라다.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평범한 일상 언어로 번역하고, 사제가 해석해줘야만 했던 신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이 직접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었다. 천 년 넘게 이어져온 지적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신대륙 이주민들은 구대륙에 비해 반(反)제도적이고, 영성적이며,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광막한 자연 속에서 원시주의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 역시 문화적 풍토의 한구석에 자리매김하게 됐다.

방금 말한 내용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다. 구체제의 모순이 심화하고 대중과 지식인의 괴리가 커질 때, 적절한 반지성주의는 대중과 지식인 양쪽에 건전한 자극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대중적 에너지를 악용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반지성주의자는 사실 ‘민중’이 아니라 민중을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일 때가 많다.

일본의 양심적, 실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우치다 다쓰루는 호프스태터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2010년대 중반 일본에서 급속도로 퍼진 극우 운동을 파헤치는 작업에 돌입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뜻을 함께하는 필자들의 원고를 모아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를 펴냈는데, 그 중 직접 쓴 첫 번째 원고인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에서 호프스태터의 책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자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정쩡한 교육을 받은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반지성주의자는 통상 사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종종 진부한 사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사상에 홀려 있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한편, 한결같은 지적 정열을 결여한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이 대목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지성주의가 지니는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은 40대와 50대 남성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고학력자이며 사회적으로 명성을 지닌 지식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 해서 반지성주의에 면역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과 그 구성원 및 지지층은 반지성주의에 취약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친일 독재 부역 세력’이라는 프레이밍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문재인 정권 5년간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이번 선거는 한일전이다!” 이 또한 민주당이 집권하던 5년을 특징짓는 정치 구호 중 하나다. 국민의힘, 그 전신인 자유한국당, 새누리당 등을 ‘친일 독재 부역 세력’ 등으로 프레이밍한 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듯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대중 동원 논리였다.

호프스태터의 논의를 21세기에 이어받은 우치다 다쓰루가 볼 때, 이렇듯 맥락도 시대감각도 없이 과거의 적을 상정하고는 그것을 현재에 이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중요한 징표다. 반대로 지성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나는 시간 속에서 차츰 진리성이 익어 가는 언명을 가리켜 ‘지성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음모론자들처럼 이것저것 자기 입맛에 맞는 ‘팩트’는 열심히 수집하고 끼워 맞추지만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반지성주의자들은 때로 다수의 지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동시대에 적지 않은 찬동자를 얻는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을 사회적, 공공적인 가설이라고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구조적으로 결여된 것이 있으니, 바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반유대주의자였던 에두아르 드뤼몽의 사례를 제시한다. 에두아르 드뤼몽은 고대 로마 이후 19세기 말까지도 유대인들이 흑막 너머에서 유럽을 지배해왔다는 음모론에 심취했다. 음모론을 퍼뜨리며 대중적 인기를 만끽했다. 유대인들이 유럽을 지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는 모두 다른 시대라는 것을 단번에 무시해버리는 ‘무시간성’의 사고방식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1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미래시민광장위원회 출범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그는 2019년 인터뷰에서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신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과 그 지지층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른바 ‘역사의식’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를 들먹이지만 시간성이 없다. 과거에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른 악당 집단이 있는데 그들이 계속 오늘날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원초적이고 상투적인, 대중소설 같은 상상력에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2019년 인터뷰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조선 말기는 수구 쇄국 세력이 집권했고, 일제강점기 거쳤지, 분단됐지, 4·19는 바로 뒤집어졌지, 군사독재 했지, 김대중 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입니다.”
에두아르 드뤼몽이 반유대주의 음모론에 빠져 선동했듯, 이해찬은 이른바 ‘노론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고 있거나, 본인은 믿지 않아도 남들이 그렇게 믿기를 바라고 있다. 민주당의 지도부 또는 지지층 중 목소리 큰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역사 공부를 더 하라’고 손가락질하고 함성을 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의 행태다.

국민의힘도 잘 난건 없지만…
국민의힘과 그 전신인 보수정당 역시 반지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힘이 강했을 때,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않지만 사회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던 이들을 대거 ‘빨갱이’로 몰았다. 호프스태터가 비판한 매카시즘의 광풍과 다를 바 없던 행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8대 대선 당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공개 사과하는 등의 움직임은 있었으나 앞으로도 지속적 반성과 자기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다. 그들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6‧25전쟁을 통해 완성된 대한민국을 긍정하지 않는다. 대신 상상 속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추구하며 반일 선동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 전체의 지적 담론을 갱신해야 하는 이유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5-07

‘검수완박’이 개혁? 근현대사 공부부터 하라

[노정태의 뷰파인더] 검찰은 왜 경찰을 감시·견제·통솔했을까

● 사건 당 처리 기간·미처리 사건↑
●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
● ‘원수’ 이토 히로부미의 사법 개혁
● ‘박종철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
● 도저한 역사적 흐름에서의 퇴행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 3일 오후 2시. 원래 10시로 예정돼 있었으나 한 차례 연기된 국무회의가 열렸다. 공식적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 퇴임 기념 오찬 때문이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일각에서는 이 기습적 검수완박이 결국 문재인·이재명 지키기 말고는 목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성남 FC 후원금 의혹 등 문재인 정권 및 이재명 전 경기지사와 관련한 사건의 경우 경찰 선에서 덮어버릴 가능성을 만드는 쪽으로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결과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회의 개의 전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와 장혜영 정의당 정책위의장(오른쪽 두 번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물론 의혹일 뿐이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그리고 그에 찬동한 정의당의 진짜 의도를 단언할 수야 없다. 평범한 국민이 받는 피해는 예정돼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9월 통과된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과 그에 따른 시행령이 2021년 1월 1일부로 시행되면서 국민들은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다.

일단 사건 당 처리 기간이 길어졌다. 2017년에는 경찰이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데 평균 44일이 걸렸다. 2021년에는 62일로 늘어났다. 기간이 늘어난 만큼 확실하게 마무리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해 경찰은 2011256건의 사건을 접수했는데, 그 중 246900건(12.27%)을 처리하지 못했다. 열 건 중 한 건 이상이 미처리 상태로 남아있다는 뜻이다.

경찰의 미처리 사건 총량과 그 비중은 2017년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2021년 1월 1일 이후로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뛰었다. 2020년에는 2058268건 가운데 184966건으로 8.98%가 미처리 사건이었던 반면, 2021년에는 2011256건 가운데 246900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단순 계산으로도 6만 건이나 미처리 사건이 늘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단 경찰의 업무 부담이 매우 커졌다. 게다가 검찰은 이전처럼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지 못한다. 대신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만 있다. 지휘와 요구 사이에는 강제성 면에서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른다. 경찰은 실제로 업무 부담에 짓눌리거나, 업무 부담을 핑계로 곤란한 사건을 속된 말로 ‘뭉개고’ 앉아있을 수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단기적 미래, 한 두 사건의 처리와 달리, 이런 장기적 흐름을 예상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시선을 반대로, 과거로 돌려보자. 검찰이라는 제도, 검사라는 공직자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서 시작해, 근대 사법 제도가 도입되던 무렵,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거쳐 공권력과 시민사회의 관계가 재정립되어 나가던 과정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수령·이서배 탐학”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속담이 있다. 현대 한국인은 저 속담을 실제 권한을 가진 사람보다 그 권한을 대리해 행사하는 자가 더 위세를 떠는 경우가 있다는,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이곤 한다. 애석하게도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말은 그저 담백한 사실의 표현이었다. 아주 먼 과거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00년을 조금 넘긴 시점만 해도,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정말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서운 세상에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그 전부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었다. 일본이 1906년 설치한 통감부는 조선을 사실상 지배·통치했다. 초대 통감은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 훗날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 이토 히로부미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대적 사법 개혁을 단행했다.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사법 개혁이니 좋은 일이었을 리 없다는 단견은 잠시 접어두자. 놀랍게도 통감부가 추진한 사법 개혁은 조선의 기층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이토 히로부미의 ‘큰 그림’이기도 했다. 조선의 사법 제도가 워낙 가혹하면서도 엉망진창이던 탓에, 사법 제도의 근대화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을 줄일 수 있으리라 판단한 이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푸른역사)에서 이 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06년 이후 일본의 통감부 설치와 그에 뒤이은 한국 병합은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침략 행위지만, 어찌 보면 이러한 한국 민중의 고통과 개혁 열망에 편승한 침략이었다. 갑오개혁기에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 조치들이 아관파천 이후 폐기 또는 수정되었으나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이후 다시 복원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 시행되면서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걸게 했기 때문이다.”(머리말, 9쪽)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 의식’이 형성되기 전이다. 다른 나라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보다 나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조선의 사법 제도가 엉망이고, 갑오개혁을 통해 자기 쇄신을 이루지도 못해서다. 앞서의 책을 좀 더 읽어보자.

“조선 후기 이래 형사재판제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왔지만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첫째, 인민의 범죄를 최일선에서 수사하고 재판하는 수령·이서배들의 탐학이 억울한 재판을 야기하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수령들은 전문적인 법률 지식이 부족하여 재판 과정을 이서배들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형방 아전 등 이서배들이 자의적으로 재판 과정과 판결을 좌우하고 있었다.”(102쪽)

조선 민중이 일제 개혁을 환영하다?
4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 합의파기 윤석열 국민의힘 규탄’ 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은유나 속담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 그랬다. 뇌물을 바치고 그 자리에 오른 고을 원님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의 내막이나 진상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원님이 되건 형방, 아전, 기타 등등 수령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서배, 즉 양반은 아니지만 관의 일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실세였고, 백성을 괴롭히는 주범이었다. 그들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으며 필요와 욕구에 따라 억울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 사건을 뒤틀었다. 자정 작용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일부 암행어사들은 수령의 비리를 고의적으로 눈감아 주거나 아예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함께 민에 대한 수탈에 나서기까지 하였다.”(103쪽)

조선의 민심을 얻기 위해 사법 개혁에 나선 통감부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19071223일, ‘재판소구성법’ ‘재판소구성법시행령’ ‘재판소설치법’을 제정하게 했다.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한데, 비로소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지방의 행정관인 수령, 즉 원님이 재판까지 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바뀌지 않던 체제다.

일본은 고등고시를 합격한 일본 현직 판검사를 한국에 발령 보냈다. 한국인 중에서도 기존 경력자, 일본에서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한 자, 변호사 시험 합격자, 법관양성소 졸업생 중 재판 사무 경력이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판검사로 임명했다. 판사뿐 아니라 검사라는, 행정부에 소속돼 있지만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근대적 제도가 도입됐다.

조선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영했다. 일단 대한제국 스스로가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화 첫 삽을 떴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 못 한 일’을 일본의 손을 빌어 완수한다는 논리 구성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존 시스템이 지닌 문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가혹할 뿐 아니라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을 결여한 조선의 사법 시스템은 기층 민중이 일제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인 판검사가 한국의 재판기관을 장악해 감에도 불구하고, 군수·관찰사의 불공정한 재판에 피해를 받아왔던 지방민들과 중앙의 상급재판소의 폐해를 목도해 왔던 지식인들은 신재판소 개청, 민형사 재판 관련 신규 법령 실시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표명하고 통감부의 ‘시정 개선’ 사업 중 괄목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444쪽)

오늘날 기준에서 보자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의 관점을 상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활개 치는 폭력과 불의를 국가 권력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심지어 공권력이 불법적 폭력 단체를 감싸고 비호하며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 국가는 지배 정당성을 급격히 상실하고 만다.

“당시는 우리가 깡패였다”
자유당 정권 말기 비슷한 현상이 반복됐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민족 의식이 싹텄고, 6·25전쟁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까지 수립된 상황이었으나, 사법 체계는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자의적이고 엉성했다. 폭력 조직과 경찰의 유착은 심각했다. 흔히 ‘서청’으로 통하는 서북청년단이 북한 실향민을 중심으로 한 반공 폭력을 담당했다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거나 실제로 기여했던 민족주의자들 역시 해방 후 제도권에 흡수되지 못한 채 외곽 폭력 단체를 결성하고 ‘합법적 권력의 불법적 지배’에 기여했다.

일본 호세이대 방문강사인 존슨 너새니얼 펄트는 현대 한국의 역사를 조직폭력 역사와 아울러 고찰한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현실문화)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그 책에서 펄트가 인용하는 바, ‘스네이크 김’이라 불리던 방첩대장 김창룡은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 고희두를 고문하다가 죽였는데, 그 고희두의 역할에 대해 미군 방첩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희두는 원남동 동회장이며 민보단 동대문구 단장이고 동대문 경찰서 후원회장이며 사법 보호위원회 회장이었다. 이런 직함은 그의 명함에 적힌 것이다. 고희두는 동대문 경찰서 관할의 청계천변에서 장사하는 노점상 대표였다. 그는 수천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어떤 면에서 동대문과 청계천의 통제권을 장악한 자는 서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여겨질 수 있다.”(54쪽)

여러 가지 달라진 점이 있지만,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 되는 평범한 국민 처지에서 보면 구한말과 자유당 정권 시절은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1961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역점을 둔 것도 바로 그런 ‘비국가 범죄 집단’을 드러내고 소탕하는 것이었다. 펄트에 따르면 “1961년과 1963년 사이 박정희의 지배 아래 경찰은 조직적 활동으로 범죄 집단의 일원 약 1만3000명을 체포했다.”(54쪽) 대중은 열렬히 환영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이야기해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박정희와 군사정권이 발휘한 국가 폭력 체계가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을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민간의 폭력과 어지럽게 뒤섞인 최악의 경우보다는 나은 차악을 대중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1960년대 초의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군사정변을 일으켰다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견제 받지 않는다면 당연히 한계가 뒤따른다. 펄트는 자신이 ‘백인 남성’인 이유로 다양한 이들을 만나 솔직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는데, 한 전직 경찰 인터뷰 내용이 이채롭다.

“나는 경찰관 응답자에게 왜 박정희의 권위주의 시기와 전두환 정권의 초기에 깡패들이 이용되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꽤 단호하게 ‘당시는 우리가 깡패였다’고 대답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비국가 집단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즉 외양적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질서를 세울 철권이 있었다.”(162쪽)

군인이 권력을 잡고 경찰을 ‘국가의 깡패’로 동원하는 체제는 중산층의 성장 및 민주화운동을 통해 허물어졌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조직이 다름 아닌 검찰이다. 영화 ‘1987’에서 잘 묘사했다시피 군부 정권의 수족과 다름없던 경찰은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으나, 검찰은 동의하지 않았다. 행정부 소속으로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경찰과 달리, 검찰은 조직상으로는 행정부 소속이나 사법부이기도 하며, 검사 개개인이 1인 기관으로서 권한을 지니고 있다. 박종철 사건이 폭로되면서 철통같던 군사독재도 무너졌다.

2022년 검찰이 빼앗긴 ‘수사개시 권한’ 역시 군사독재 시절의 해악을 중화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한 바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주임검사가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형제복지원이라는 기이하고도 거대한 시설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와 노동 착취를 목격하고, 스스로 사진을 찍어 증거를 수집한 후, 법원의 영장을 받아 사건의 진상을 밝힌 경우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지역 유지로서 경찰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수사 단계부터 특혜를 받으며 온당한 처벌을 피해왔다는 비판이 지금껏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입법 폭주
검찰이 모든 수사를 직접 관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해방 후 70여 년간 한국의 법치주의가 꾸준히, 경찰의 힘을 검찰을 통해 감시·견제·통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데에는 나름의 역사적 이유가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다. 한국인들은 공권력이 부당하게 작동하거나 토호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설령 일제에 의해 근대적 사법 제도가 도입되는 상황일지라도 바람직한 개혁이라면 손을 들어주는 편을 택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는 도저한 역사적 흐름으로부터의 퇴행으로 기록될 것이다.

모든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아닌 ‘권력의 몽둥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구한말처럼 권력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자유당 정권 시절처럼 사적 폭력과 공적 폭력의 구분이 애매해지거나, 군사독재 시절처럼 중앙 권력이 경찰 조직을 틀어쥐고 국민을 쥐락펴락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법치주의는 뿌리부터 썩고 만다. 검수완박의 폐해를 최소화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30

‘파친코’가 한국 드라마? 그 태연한 몰염치가 무섭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K-콘텐츠’라고 으스대는 이들에게

● ‘오징어 게임’과 명확히 다른 경우
● 다분히 ‘미국적’인 캐릭터 설정
● 넷플릭스 ‘나르코스’와의 공통점
● 이제와 자이니치를 ‘우리’라고?


드라마 ‘파친코’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10대인 선자(김민하 분)가 자신의 엄마가 운영하는 부산 영도의 하숙집 방에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다. [애플TV+]
‘기생충’ ‘오징어 게임’ 뒤를 이은 또 다른 K-콘텐츠, ‘파친코’. 요즘 언론을 통해 흔히 들을 수 있는 찬사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파친코’가 애플TV+의 간판 작품으로 선정·제작·유통되는 것을 ‘우리’의 문화적 승리로 봐도 될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파친코’라는 작품은 그 원작부터 드라마까지, 지금껏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다른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파친코’는 한국 드라마가 아니다.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원조 한류 드라마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오징어 게임’과도 다른 경우다. 넓은 의미의 ‘K-컬처’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각에서는 “애플이 일본 시장을 버리고 대신 한국을 택했다”며 마치 축구 한일전에 이겼다는 듯한 말투로 ‘파친코’를 다루는 기사를 냈다. 너무도 이상하고 우려스러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

‘파친코’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날 때 그 나라에 함께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한국 드라마’가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대한민국이 해외교포, 그 중에서도 ‘자이니치’를 다뤄온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이야기’조차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파친코’를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의 모험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
한국 드라마는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2002년 작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히트를 친 뒤부터 해외에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류’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수입됐다. ‘대장금’ 같은 경우는 이란에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다.

어떤 나라의 드라마가 외국에서 큰 인기를 끄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은 한국에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라 주연 배우가 광고를 찍기도 했으니 말이다. 즉 2000년대 초의 한류는 이례적이고 반가운 현상이었지만,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확률적으로 생길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맥락이 달라진 것은 미디어 환경 자체가 변화하면서부터다. 넷플릭스는 초창기에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하고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하우스 오브 카드’로 흥행뿐 아니라 비평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곤 콜롬비아의 전설적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마약 범죄 수사물 ‘나르코스’를 내놨다.

‘나르코스’에는 잠깐이나마 미국 플로리다와 뉴욕 등이 배경으로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틴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인과 그 밖의 정글을 무대로 삼는 이야기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고 유입됐을 미국인 시청자에게 다소 낯설고 당혹스럽게 느껴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미국과 무관하지 않지만 결국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만드는 글로벌 프로젝트가 바로 ‘나르코스’다.

넷플릭스는 왜 그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글로벌 콘텐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3억8000만여 명으로 세계 3위다. 반면 스페인어는 4억8000만여 명의 모국어로 세계 2위다. 게다가 미국 현지에도 남부 지방과 캘리포니아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스페인어 화자가 살고 있다.

넷플릭스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야만 할 운명이었다. 이에 가장 가까운 라틴아메리카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미국 회사가 콜롬비아 마약왕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것도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제작하는 이례적인 현상은 그래서 벌어졌다.

부산 사투리로 번역된 미국 정서
드라마 ‘파친코’에서 노년에 이른 선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의 극중 모습. [애플TV+]
OTT(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들의 글로벌 콘텐츠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특정 지역에서 개발돼 그 지역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콘텐츠가 세계적 호응을 얻기를 기대한다. 한국 시청자를 노리고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이지만 세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며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솟아오른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이다. 그 전에 넷플릭스에서 흥행한 ‘종이의 집’은 스페인 드라마인데, 그 또한 비슷한 경우다.

반면 앞서 언급한 ‘나르코스’나 ‘파친코’처럼 OTT 본사에서 만든 글로벌 콘텐츠도 존재한다. 이는 ‘내수용’으로 만든 작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과는 다른 경우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하며, 해당 지역의 풍토 및 현지인의 정서를 십분 반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는 ‘미국 드라마’다.

우리는 ‘나르코스’를 콜롬비아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다. 콜롬비아 마약왕이 주인공이고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미국인 수사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캐릭터가 스페인어로 대화하지만, ‘나르코스’는 어디까지나 넷플릭스에서 만든 미국 드라마다.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파친코’ 또한 미국 드라마다. ‘파친코’는 애플TV+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미국 작가들이 각본을 쓰고, 한국계 미국인 두 사람이 연출한, 엄연한 미국 드라마다.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과 내적·외적 갈등,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 작품이 준수하는 윤리적 기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 영화·드라마 업계의 표준적 작법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김민하 분)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큰 외동딸이다. 어려서부터 똑 부러지는 성격에 셈이 밝다. 아버지는 딸을 잘 교육시키고 주체적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1900년대 초의 조선인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키운다? 현실에서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 시청자들에게 선자의 캐릭터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같은 인물을 직접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선자의 첫사랑이자 첫 아이의 아버지인 고한수(이민호 분)는 어떨까. 일본 야쿠자의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위치를 차지한 조선인이다. 조선인을 경멸하지만 동시에 조선인을 보호한다. 이재에 밝은 현실주의자지만 가슴 속에 뜨거운 한줄기 순정이 있다.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빗대어 보자면, 20세기 초 동아시아에 출현한 레트 버틀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한수가 선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온 세상을 다 주겠다고 하지만 선자는 거절한다. 거절의 이유를 나중에 털어놓는 선자의 말. ‘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놓고 살 수는 없데이.’ 부산 사투리로 번역된 대사지만 여기 담긴 정서는 한국보다는 미국 드라마의 그것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할 것’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 것’ 같은, 실로 미국인다운 건전한 태도가 담겼다.

K-콘텐츠’라고 으스댈 일 아니다
‘파친코’는 미국 시청자에게 퍽 친숙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설정과 구도 위에 이야기와 주제가 전개된다. 실제로 ‘파친코’의 작가와 제작진은 시즌 1을 만들 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대부 2’의 이야기 구조를 적극 참고했다고 한다. ‘대부 2’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지만 의문의 여지없는 미국 영화다. 마찬가지로 ‘파친코’는 조선에서 건너가 오사카에 뿌리를 내린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미국 드라마다.

‘파친코’를 여타 다른 한국산 콘텐츠와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파친코’는 역사의 격변 속에 태어난 디아스포라, 자이니치(재일 조선인)를 다룬 대하물이다. 6화에서 수십 년 만에 고향 부산에 찾아온 선자는 한국의 공무원에게 스스로를 ‘특별영주권자’라고 한다. 해방이 오기 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닌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간 자이니치의 현실을 반영한 설정이다.

우리, 즉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들은 재일교포, ‘자이니치’를 ‘우리’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파친코’와 마찬가지로 오사카의 자이니치를 다룬 영화 ‘피와 뼈’는 국내 관객들에게 싸늘하게 무시당했다. 그런데 그 자이니치의 이야기를 미국 OTT 업체가 큰 예산을 동원해 드라마로 만들자, 이제 와서 ‘우리 이야기’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염치없는 일 아닐까.

이는 마치 주한미군의 자녀인 혼혈인들이 한국에 있을 때는 ‘튀기’라고 조롱하다가, 하인즈 워드가 NFL 스타가 되자 ‘우리의 핏줄’로 인정하며 호들갑스럽게 환영하던 모습마저 연상시킨다. 한국과 일본의 점이지대에서 힘겹게 살아간 재일교포의 이야기, 그 귀중하면서도 쓰라린 역사적 경험에 대해 모른 척으로 일관하더니, 재미교포의 소설을 미국 기업이 드라마로 만든 걸 보면서 ‘K-콘텐츠’ 운운한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의 보수 정치는 재일교포 단체들을 ‘간첩의 온상’ 쯤으로 취급하며 정치적 필요에 따라 착취했다. 한국의 진보 정치는 자이니치를 감성과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며 보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소설 ‘파친코’의 그 유명한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는 말을, 마치 일본에 대한 규탄으로 받아들이며 ‘국뽕’의 소재로 삼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자이니치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은 일본만큼이나 그들을 ‘망쳐놓은’ 역사의 일부다.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며 건설적 방향으로 손을 내밀어야지, ‘그래, 이것이 우리 민족의 힘이며 K-콘텐츠’라고 으스댈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얽매어 있는 동안 자이니치는…
한반도의 역사는 한반도 내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의 왕가가 국권을 일본에 넘긴 후 벌어진 역사적 질곡 속에서, 한반도 거주민은 들어가고 나가고 섞이며 살아왔다. 단일민족의 허구, 일본을 향한 끝없는 피해자 의식, 스스로의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한 알리바이로 동원되는 근현대 역사관에 ‘우리’가 얽매어 있는 동안, 애플이라는 다국적 기업은 자이니치들의 험난한 삶 속에서 매력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스토리텔링을 발굴했다. 이런 상황 에서 무슨 ‘K-콘텐츠’를 운운한단 말인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 또한 그 ‘역사’의 일부다. 그런 자기객관화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파친코’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세계관과 원한 감정으로만 얼룩진 역사의식을 넘어,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과 스토리텔링을 고민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합법의 탈 쓰고 국가를 파괴하는 사람들… 대한민국에 ‘헌법수호자’는 없다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넷플릭스 드라마 ‘지정생존자’
‘검수완박’과 졸렬한 정치인들

도시환경공학을 전공한 교수 톰 커크먼(키퍼 서덜랜드)은 정치인이 될 생각이 없었다. 그가 기획한 공영주택 사업을 대통령이 마음에 들어 해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이 되었지만 정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매년 초 치러지는 ‘연두교서’ 발표를 앞두고 ‘지정생존자’로 선정되어 워싱턴 DC의 안전가옥에 틀어박혀 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 내각 구성원, 상하원 의원, 대법원 판사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미 연방의사당을 커크먼은 TV로 지켜보고 있다.

연두교서 발표는 그런 자리다. 미국을 이끄는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만약 그곳에서 큰 사고나 테러가 발생한다면 어떨까? 나라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지정생존자 제도를 운영 중이다. 커크먼처럼 내각의 누군가는 일부러 연두교서 발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생존자’가 되도록 ‘지정’하여, 국회가 폭파되고 대통령이 죽고 내각이 허물어지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연두교서 발표 중계방송이 끊긴다. 창문을 열어 밖을 보자 일명 ‘캐피탈 힐’에서 폭발과 함께 불꽃이 솟구친다. 미 연방의사당은 문자 그대로 무너졌다. 그 속에 있던 이들 중 생존자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청바지에 후드티 차림으로 맥주를 마시던 톰 커크먼은 그 모습 그대로 성경에 손을 얹고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아 헌법을 지켜야 하는 자, ‘헌법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정생존자>의 설정은 퍽 과격하다. 아무리 현실에 존재하는 제도라고 해도 그렇지, 입법·사법·행정 3부를 모두 폭탄으로 날려버린 후 시작하는 이야기니 말이다. 하지만 픽션은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법. 어떤 나라가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지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존속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그랬다. 1920년대 내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1929년부터 시작된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도탄에 빠졌다.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정치적 구심점 없이 오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헌법의 가치를 누가,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1931년, 두 사람의 헌법학자가 지면을 통해 논쟁을 벌였다. 카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현 체제를 공격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비상사태의 권력을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선을 통해 꾸려진 연방의회와 총리는 독일 국민 전체의 선택을 받지 않고 간접적으로 뽑힌 이들이므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논리였다.

반면 또 다른 헌법학자 한스 켈젠은 현 체제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켈젠이 볼 때 슈미트의 주장은 옳지 않았다. 헌법 수호는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입법·사법·행정부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헌법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이었다. 특히 켈젠은 헌법재판소에 주목했다. 입법부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기구다. 반면 국회가 ‘입법 폭주’를 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도입한 헌법재판소가 그 공백까지 채워넣을 수 있다고 켈젠은 주장했다.

이 충돌은 ‘헌법의 수호자 논쟁’이라 불린다. 헌법과 법치주의에 대한 중대한 입장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카를 슈미트가 볼 때 헌법이란 국가 공동체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한 방편 중 하나일 뿐이었다. 형식적인 법 논리나 기존의 제도 같은 것은 그저 자의적인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흔히 ‘결단주의’라 불린다. 반면 한스 켈젠은 ‘법실증주의’를 택했다. 법은 법의 영역 바깥에서, 정치나 기타 요소에 의해 형성되지만, 법학은 법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훗날 카를 슈미트는 나치에 협력하면서 ‘히틀러의 법학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덕분에 결단주의 대 법실증주의의 대립은 전체주의 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논쟁을 그런 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다음과 같은 수많은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주권은 어떻게 형성되고 또 행사되어야 하는가? 국회, 법원, 심지어 대통령 같은 헌법 기관이 합법성의 탈을 쓰고 국가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들을 막아설 힘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

우리의 현실을 살펴보자.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채 보름도 남지 않았다. 이 와중에 더불어민주당은 ‘검수완박’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스 켈젠의 법실증주의적 관점을 따르자면 제도권 내에서 해결할 일이다. 국회 내에서 정치 세력 간 견제가 이루어질 것이고, 명백한 위헌 요소로 가득한 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도 가능하다.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헌법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언론인 출신으로 법 전문가조차 아닌 박병석 국회의장이 중재안을 제시하자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단 하루 만에 그것을 덥석 받아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송 인터뷰에서 검수완박에 대해 사실상 지지의 뜻을 밝혔다.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릴 것이라 기대할 근거도 희박하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담은 현행 형사소송법 역시 마찬가지로 졸속 처리되었는데, 헌재는 이미 그 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으니 말이다.

국회와 헌재를 벗어나더라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윤석열 현 대통령 당선인은 ‘검수완박은 부패완판’이라며 검찰총장직을 내던지고 대권 경쟁에 뛰어들었던 사람이다. 국민들은 그런 그에게 0.74%p의 아슬아슬한 차이로 승리를 안겨주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헌법의 수호자’로서 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수완박 타협, 아니 야합 국면에서 윤석열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지정생존자>는 정치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가 응축된 작품이다. 국회의사당에 정치인들을 몰아넣고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답답함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검수완박 야합을 보는 우리 국민들의 심정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분노가 픽션보다 무서운 현실을 불러오기 전에 국회가, 헌재가, 대통령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22-04-23

尹 정호영 옹호는 정치인 아닌 ‘검사’ 발언

[노정태의 뷰파인더] 도덕과 관습 우롱한 어떤 ‘합법’

● 퍽 놀랍고 충격적인 尹의 말
● ‘불법 아니니 괜찮다’고만 하면…
● 민주당發 가짜 법치주의의 결과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최근 제기된 자녀 관련 의혹 등을 설명하기 위해 4월 17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하지 않나.”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의대 편입학 논란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은 말이다. 위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어떤 ‘팩트’가 있어야 당선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윤석열 본인이 마이크를 잡고 한 말이 아니라 배현진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퍽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기억을 되돌려 조국 사태를 떠올려 보자. 조국 당시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된 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 함구하거나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일축해왔다. 여론 악화의 결정타가 된 것은 2019년 9월, 자청해서 열었던 기자간담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딸의 논문과 의학전문대학원 편입 등에 관한 의혹을 두고 이렇게 못 박았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불공정 의혹 제기, 너무나도 당연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월 21일 서울 국회 법사위원장실 앞에서 검수완박 입법을 위한 안건조정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안건조정위 무력화를 위해 민형배 의원이 탈당하는 ‘꼼수’를 썼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박 위원장은 “국회법에 따라 안건조정위원을 지정하겠다”고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부정의 팩트’ 발언을 보며 충격에 빠진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 역시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조국 사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정권교체를 통한 한국 사회의 정상화를 꿈꾸었던 이들이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일단 몇 가지 분명히 해둘 일이 있다. 적어도 4월 현재 조국 사태와 정호영 논란의 내용이 완전히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조국과 그 딸인 조민 씨의 경우처럼 명백히 위조된 서류가 확인된 것도 아니고, 일각에서는 정호영의 자녀가 논문에 참여해 이름을 올린 것에 그 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항변도 있다. ‘부정의 팩트’가 100% 확실히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 사안을 두고 제기되는 우려가 과도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의대 편입은 ‘차라리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에 가는 게 더 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다. 그런데 정호영의 두 자녀는 동시에 아버지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스펙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재직하는 의대에 편입했다. 불공정 의혹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석열이 이 사안을 '정치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다. ‘부정의 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합법이면 문제가 없다는 식인데, 이것은 ‘법 기술자’의 말일 뿐이다. 법은 대체 무엇인가.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그러니 모든 일이 허용되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 법치국가의 원리를 잘 반영한 표현이다. 법과 도덕을 분리하는 것, 동시에 법의 규제 영역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가령 노골적 성적 묘사가 담긴 창작물, 즉 성인물과 법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성인물을 만들거나 즐기는 이들은 성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성인들을 법이 막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인물에 대한 규제를 찬성하는 이들은 그런 성인물이 미성년자들의 건전한 성 관념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성인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 심지어 미성년자들이 유입돼 성적 착취를 당할 가능성을 고려할 때 적절한 규제 및 법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에 일리가 있다. 법이 도덕의 모든 영역을 관할하려 해서는 안 되지만, ‘최소한의 도덕’으로서 작동해야 한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심지어는 전 국민에게 도덕적 지탄을 받고 있는 사안이나 행위가 반드시 법에 의해 규제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Georg Jelinek)의 명언처럼,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강제력이 개입되는 법적 절차는, 도덕적 당위를 따질 수 있는 영역 중에서도 최소한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옳다.

형사소송법 전공 교수 조국의 태도
이 원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령 여성들이 입는 짧은 치마, 미니스커트를 생각해 보자. ‘미니스커트 단속’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흔히 박정희 정권 시절에나 있던 일이고 ‘서구 선진국’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196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68혁명’ 이전에는, 서구에서도 경찰이 여성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을 나무라고 단속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도덕이 법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소리다.
이런 맥락을 놓고 볼 때,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질문은 사회의 근본 질서를 파괴하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법’과 ‘도덕’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법을 통해 도덕을 강요하는 근본주의적, 전체주의적 질서에 저항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진보는 그렇게 이뤄져 왔다. 법과 도덕의 구분을 최대한 명료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영역에 법이 개입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여왔다.

도덕의 영역, 가치관의 영역, 취향의 영역에 불과한 것을 법으로 옥죄지 말라. 이는 특히 진보적 성향을 지니는 법조인 사이에서 두루 통용되는 법철학적 시각이다. 심지어 누군가 법을 어겼다 해도 그럴만한 이유, 참작할 만한 사유, 혹은 그 위법 행위를 한 사람이 위법 행위를 하게끔 한 사회 구조 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참여연대의 초기 멤버 중 하나인 형사소송법을 전공한 교수 조국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태도를 취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태도를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직종이 아니라, 사회의 기준과 가치관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공직자들이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역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태도로 일관해 법에 걸리지 않는 한 무슨 짓이건 하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은 우리 사회가 통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의 영역을 건드리거나, 넘어서거나,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합법과 불법,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오가는 행위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다보면, 법의 존재 근거 자체가 흔들린다. 왜냐하면 법은 도덕의 기반 위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둘러싼 정치적 지형이 모두 그렇다. 일단 21대 국회의 출발부터가 문제적이었다. 선거법은 선거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법이다. 참여자 모두가 합의하고 동의하지 않는 한 함부로 바꿀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20대 국회의 막바지, 바로 그 기본적 상식 혹은 정치적 도덕이 망가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상식 바깥의 수를 뒀다. 비례 의석을 노리는 정의당과 바른미래당은 민주당이 흔드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당시 제1야당이던 자유한국당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고 말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국회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제1야당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위원장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법사위는 모든 법안의 자구를 검토하고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국회의 ‘입법권’ 중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소위원회다. 그 법사위원장을 야당에서 가져가면 여당의 입법 폭주를 막을 수 있다. 국회법에 명문으로 규정돼 있지는 않으나, 21대 국회 이전까지는 모든 정치 세력이 동의해온 일종의 ‘관습법’이다.

21대 국회의 민주당은 그 또한 파괴했다. 자유한국당이 ‘모든 상임위원장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법’ 바깥에 있는 ‘도덕’과 ‘관습’을 무시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신들이 만든 법을 야당이 꼼꼼히 읽고 평가하고 되돌려 보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오기를 부린 끝에 내놓은 법 중 대표적인 게 ‘임대차3법’(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이다.

우리는 그 덕분에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부동산 가격 상승과 그로 인한 계층 분리를 경험하고 있다. ‘불법은 아니지 않느냐’, ‘법사위원장을 야당 주라고 국회법에 쓰였느냐’며 도덕을 무시한 가짜 법치주의 탓에, 집 없는 국민은 순식간에 ‘벼락거지’가 돼버렸다.

민주당의 도덕 무시를 통한 법치 질서 파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법사위에 속한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검수완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민형배 의원이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는 민 의원이 양 의원을 대신해 법사위 안건조정위에 비교섭단체 의원으로 합류할 것이라는 해석이 곧장 나왔다. 국회법상 안건조정위는 여당 의원 3명, 야당 의원 3명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여당을 ‘꼼수 탈당’해 야당 몫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의미다.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성향의 무소속 의원을 법사위에 배치해 야당 몫의 투표를 빼앗아오는 것 자체가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행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더 심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상식과 도덕을 우롱하면서 만들어진 법을 대체 그 어떤 국민이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오만한 사고방식을 심판받다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정당하다’는 태도는 ‘법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에, 사회 전체의 인식과 도덕을 파괴하는 식의 입법은 수월하게 이뤄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만들어진다 한들 긍정적 효과를 낳기 어렵다. 법을 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법을 감싸고 있는 도덕이다. 국회법은 국회의 관습과 도덕이 없다면 법으로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른 모든 법도 마찬가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법을 법으로 온전히 작동하게 해주는 도덕과 관습까지 존중하며, 문제가 있다면 공적으로 논의하고 수정해나가는 겸허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인식으로 똘똘 뭉친 거대 정당 민주당은, 바로 그 오만한 사고방식을 국민에게 심판받아 5년 만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는 정호영 논란에 대해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투로 언급한 윤석열의 발언을 문제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 조국 사태나 검수완박으로 인해 솟구친 국민적 분노가 언제라도 다시 국민의힘의 머리에 죽비처럼 내리꽂힐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21

'스펙 도핑' 적발된 조민…의사면허 박탈 결코 가혹하지 않다 [노정태가 고발한다]

'스펙 도핑' 적발된 조민…의사면허 박탈 결코 가혹하지 않다 [노정태가 고발한다]

지난 1월 전공의 선발 면접을 보기 위해 경상대병원에 모습을 드러낸 조민씨. 배경은 숙명여고 쌍둥이 성적 비리 관련 시위 장면. 그래픽=김은교 기자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두 명의 자녀를 본인이 재직 중이던 경북대 의대에 편입시키는 데에 그가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의혹 탓이다. 정 후보자는 기자회견을 자청해 "억울하다"고 호소했으나 논란은 오히려 계속 번지고 있다.

논의가 격해지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서울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부녀 사례를 떠올릴 수밖에 없어서다. 한편에서는 "조국 가족과 같은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명백한 서류 위조 등 불법이 드러난) 조국 사태와는 다르다"는 항변이 들려온다.
자녀의 의대 입시 부정 의혹에 대해 해명하는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 [뉴시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는 과연 조국 사태를, 특히 조 전 장관의 딸 조민씨의 부정입학 사건을 과연 제대로 처리했을까, 아니 올바로 이해하기나 했을까? 이를 답하기 위해선 몇 가지 질문을 우선 던져야 한다.
조민에게 가혹? 그 반대 아닌가?
첫째, 조민씨는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입시 부정으로 고려대와 부산대 의전원 입학이 취소됨에 따라 그의 의사면허도 조만간 박탈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선 의전원을 나와 이미 인턴 수련까지 한 마당에 의사를 못 하게 하는 건 가혹하다고 비판한다.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자식이 대신 처벌받는다는 투다.

하지만 조민씨의 의사 자격 상실은 결코 '처벌'이 아니다. '자격 상실'이다. 대학 입시를 비롯해 모든 시험은 수험자에게 특정한 자격과 행동 방침을 요구한다. 가령 수능 시험장에는 지정된 필기구와 아날로그 시계 외에는 그 무엇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전자시계를 차고 있다가 발견되거나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가 걸리면, 설령 그 기기가 시험에 전혀 쓰이지 않아 결과를 바꿀 수 없었다 할지라도 해당 시험은 무효 처리가 된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이 상식이 왜 조민씨의 입시에만 예외가 되어야 하는가. 그 어떤 입시든 허위 서류를 제출하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설령 조 전 장관이 SNS를 통해 밝힌 변호인들 입장처럼, 제출된 부정 서류가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해도 부정행위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부정행위를 했으면 실격 처리를 당하는 게 상식적인 경쟁의 룰이다. 도핑을 한 운동선수가 그 약물이 실제 경기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와 무관하게 실격 처리당하는 것과 같다. 쉽게 말해 조민씨와 그의 부모는 '스펙 도핑'을 한 것이고, 그게 적발돼 실격당한 것이다.

지난 2018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위 '숙명여고 쌍둥이 사건'에서 두 명의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했다"고 항변한들, 아버지인 숙명여고 교사의 시험지 유출 의혹이 법원에서 사실로 인정받은 이상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다는 걸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조민씨에 대한 검찰의 기소를 촉구하는 국민의힘 의원들. [중앙포토]
진짜 희생자는 조민 때문에 낙방한 응시자
둘째, 조민씨는 단순히 부모 욕심이 빚어낸 희생자일 뿐인가? 여기에선 희생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린 지금 외견상으로는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다른 가정을 한번 해보자. 만약 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면 딸은 희생자가 될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의사라는 선망의 직업을 가진 '엄친딸'로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었을 거다. 물론 그도 인간이기에 현재 겪고 있을 내적 고통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고통을 겪는다고 피해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오히려 가해자다. 조 전 장관과 그의 아내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시피 그는 입시 부정의 직접적 수혜자일 뿐만 아니라 본인의 입학 전후 사정을 잘 알고 가담한 정황이 있다.

이 사건의 진정한 희생자는 따로 있다. 조민씨 때문에 부산대 의전원에 입학하지 못한 미지의 수험생이 바로 그 희생자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으나, 알 수 없는 그 응시자를 향해 때늦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조민은 '아이'가 아니다
셋째, 조민씨에 대한 비판은 인격적 모멸감을 주는 행위인가? 답은 물론 '아니다'이다. 하지만 여기엔 긴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그가 공적 영역의 인물이 아니라서 그렇다. 게다가 미모의 젊은 여성이라 그를 향한 대중적 손가락질에 부당한 정념이 실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많은 조국 지지자들이 하듯이 이미 30대에 접어든 지 오래인 조민씨를 불쌍한 '아이'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그를 인격적으로 낮춰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을 어른 취급하지 않는 것만큼 심한 인격 모독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민씨가 부산대 의전원에 입학한 건 2015년도다. 만 24세로, 어떤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미성년자가 아닌 어엿한 성인이었다. 그를 독립된 인격체로, 성인으로 대해야 한다. 이는 그가 연루된 범죄에 대해 성인으로서 응당 그 대가를 감당해야 한다는 소리다. 칸트 '법철학'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사람은 원인과 결과를 파악할 수 있는 지성을 지닌 존재다. 자신이 행한 일이 있다면, 그 결과가 좋건 나쁘건 자신의 어깨에 짊어질 때 온전한 인격체가 된다. 조민이라는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부산대 의전원 입시에 얼마나 연루되어 있는지 명백히 밝히고 정확한 죄책을 묻는 것이다.
'숙명여고 시험 정답 유출' 사건으로 기소된 쌍둥이 자매 중 한 명이 지난해 10월에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다. 특정인을 향한 눈먼 비난으로 여겨질까 우려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산대 의전원 입시 문제와 관련해 조민씨를 그저 '희생자'로 간주하고 슬쩍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당시 미성년자였던 '숙명여고 쌍둥이'들도 끝내 혐의를 부인하자 재판 과정에서 참고인이 아닌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거짓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조민씨 사례가 다른 식으로 취급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입시는 공정과 상식의 잣대
우리는 부산대 의전원 입시 문제를 철저하게 밝히고 지나가야 한다. 조 전 장관 부부를 비롯해 당사자인 조민의 책임에 대해서도 공개적인, 법적인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호영 후보자뿐 아니라 그와 유사한 입시 의혹, 스펙 품앗이, 기타 등등 우리 사회의 공정을 의심케 하는 여러 사안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세울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뿐 아니라 국민의힘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불거져 나온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공정과 상식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르겠다. "부정의 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으며 국민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윤석열 당선인만 모르고 있다뿐이지, 상식적인 국민 대다수는 그런 방향을 원하고 있다.

2022-04-16

문재인 대통령, 세월호 결자해지하라

문재인 대통령, 세월호 결자해지하라

[노정태의 뷰파인더] 단식 농성했던 文의 마지막 임무

● 아직 밝혀야 할 ‘진실’ 있다면…
● 무책임하고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 해경은 할 수 있는 구조를 했다
● 김어준 등이 만든 온갖 음모론
● 과학적으로 명백한 결론 부정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이틀 앞둔 4월 14일 전남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찾은 추모객들이 노란 리본을 걸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11일 오후 2시, 대전시청 북문 앞. 대전지역 79개 종교·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국민주권실현 적폐청산 대전운동본부 ‘4‧16특별위원회’의 집회가 열렸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요구했다. “희생자와 국민 앞에 철저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하라.”

기자회견문에 따르면 “참사의 책임이 있는 정권이 촛불혁명으로 탄핵되고, 그 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했던 새 정부가 들어서서 벌써 5년의 임기를 마감하는 순간이 왔지만 진상규명은 제자리”였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당론으로 약속했던 정당이 180석에 달하는 국회의석을 가지고 있어도,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왜곡했는지’ 등에 대한 진상규명은 단 한걸음도 진척되지 못한 채 속절 없이 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는 대전에서 벌어진 행사의 스케치이지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매년 4월 중순 무렵이면 반복되는 모습이다. 특히 올해는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향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대체 ‘세월호 진상규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4년 사고 발생 후 벌써 8년이 흘렀다. 타국의 유사 사고 사례와 비교해볼 때 원인규명에 이례적으로 많은 비용을 들였다. 심지어 선체를 인양하기까지 했다. 마치 부검하듯 선체를 부품 단위로 떼어내 분석해 과학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침몰 원인까지 확인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혀야 할 ‘진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런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분명한 사실 몇 개를 확인해 보자. 첫째,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는 분명하다. 둘째, 해경은 피해자를 구조했다. 셋째, 세월호 참사의 발생 및 구조 과정에서 정권 차원의 개입이나 기상천외한 음모는 없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과 과정에는 그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사고 당시 세월호에 실린 여러 화물들은 제대로 고박돼 있지 않았다. 단단하게 묶여 고정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해류가 빠르게 휘몰아치는 수역으로 들어갈 때, 세월호의 키는 3등 항해사가 잡고 있었다. 3등 항해사는 상대적으로 조작이 미숙했기 때문에 배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는데, 그러다가 단단히 묶여 있지 않은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위로 더 나쁜 상황이 닥쳤다. 배의 키를 조종하는 장치인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장이 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계 부품이 그렇듯 솔레노이드 밸브는 주기적으로 꺼내어 닦고 조이고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는 그렇게 잘 관리돼 있지 않았다. 조타기를 한껏 틀었을 때 솔레노이드 밸브는 한쪽으로 완전히 쏠린 채 굳어버렸다. 선실에서 아무리 조타기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한들 키가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최악의 경우가 연이어 닥쳐왔다고 해도, 세월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오래 써서 낡은 배였다. 중고선을 수입한 후 화물을 잔뜩 실을 수 있도록 무리하게 증축하고 개조했다. 배가 쓰러지지 않도록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바닥에 주입하는 평형수 용량 자체가 애초 설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반대로 배의 높이를 올려버린 탓에 무게중심은 더욱 높아졌다. 내부의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린, 낡고 무게중심이 높은 배, 세월호는 기울어지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사고 과정은 선박 사고의 전문가들이 사고 발생 직후부터 진단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터질만한 사고가 터질만한 방식으로 터졌다는 소리다. 8년간의 기나긴 진상규명 과정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중요 사실은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착이라는 요소를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선체를 인양해 부품을 해체하고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 지면의 다른 칼럼(‘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 역시 ‘정상 사고’(normal accident)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통제 가능한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중첩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세월호에는 이준석 선장이 타고 있었다. 잘못된 사람이 총책임자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를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단지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비상식이었으며, 무신경하게 잔인했다. ‘가만히 있으라’.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 참사는 그렇게 벌어졌다.

해경은 정말로 방관했나?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엿새 앞둔 4월 10일 오전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선상 추모식이 열린 가운데 유가족들이 사고 해역을 알리는 노란부표를 바라보고 있다. [뉴스1]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해경을 향해 쏟아졌던 비난은 어떨까. 해경이 피해자 구조에 나서지 않았거나, 심지어 방관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해경은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 및 여건에 따라 구조 활동을 했다. 다만 그 결과가 안타까울 뿐인데, 그렇다고 ‘구조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이 가해지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당시 상황이다. 세월호 사고 신고가 접수된 후, 해경 구조 헬기는 약 30분, 구조정은 약 40분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각 운송수단을 동원해 가장 빠른 속도로 직선으로 움직이면 그 속도가 된다. 해경이 무슨 히어로물의 영웅처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늑장 구조’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해경 경비정은 24노트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신고 접수에서 도착까지 40분이 걸린 건 사고위치가 그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해경 탓이 아니다.

해경이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으니 잘못했다는 주장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선체는 이미 60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현장은 바다다. 물에 젖은 갑판은 평평한 상태여도 미끄러진다. 해경은 해상 구조의 전문성을 지닌 집단이지만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걷기는커녕 매달려 있기도 힘들 만큼 기울어진 배 안으로 들어가, 어디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 전원을 찾아내 구조했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해경이 세월호 선내에 갇힌 사람은 전혀 구조하지 않았을까? 바다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만 건져냈을까? 그렇지 않다. 해경은 배에 갇힌 승객이 보일 때마다 배에 올라 망치와 파이프로 유리창을 깨며 구조했다. 연합뉴스에 2014년 8월 19일 보도된 ‘세월호 승무원 2명, 승객 구조 참여 정황 확인’이라는 기사를 읽어보자. “김씨는 123정이 세월호에 두 번째로 맞대어 객실 유리창을 깨고 5~6명을 구조한 것과 관련, ‘누가 유리창을 깼느냐’는 검사의 질문을 받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직원(해경) 두 명이랑 승객 두 명이 있었다’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김씨는 당시 22세였던 목포해경 소속 의경 김모 씨. 해경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구조 활동을 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게 무슨 구조 활동이냐는 식으로 빈정거리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4월의 먼 바다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배가 좌초된 상황이면 더욱 그렇다. 해상에는 온갖 부유물이 빠른 속도로 떠돌아다니며 타박상, 찰과상, 골절 등을 유발한다. 조난자는 구명조끼를 입었다 해도 찬 물과 스트레스로 인해 탈진하고 의식을 잃다가 죽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피해자를 엄청나게 늘린 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제때 바다에 뛰어들었다 해도 ‘전원구조’는 불가능했다. 현장에서 바다에 뛰어내리고도 사망한 사례가 있다.

한여름 해수욕장에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덜덜 떨린다. 체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4월의 바닷물은 더욱 가혹하다. 몸이 바닷물에 닿는 한 하루 이상 실종자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고래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실구조’를 이유로 목포해경 123정 김경일 정장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내인설’과 ‘열린 주장’
세월호 침몰 직후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김어준을 비롯해 여러 ‘독립 언론인’들이 달려들어 세월호 침몰 원인과 관련한 온갖 음모론을 만들어 뿌려대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잠수함이 들이받았다는 둥, 국가정보원이 관여돼 있다는 둥,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종의 이유로 인신공양을 하려 했다는 둥, 입에 담기도 역겨운 소리들을 지어냈다.

그리하여, 세월호 참사를 어떤 음모론적 관점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런 주장을 가진 이들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의사결정기구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총 6인으로 구성된 세월호 선체조사위의 경우, 4명은 앞서 설명한 세월호 자체의 결함 문제를 인정했다. 즉 ‘내인설’을 취했다. 반면 나머지 2명은 2018년까지 세월호가 다른 이유로 침몰했다는 ‘열린 주장’을 고수하며 선조위를 마무리 지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난항에 부딪혔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부터 ‘CCTV 조작설’까지 온갖 음모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과학적으로 명백한 결론을 부정하며 세월을 보냈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 한 사람만을 탓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로 벌어진 사고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는 그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세계 해상 사고의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오랜 기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구체적인 내역을 밝혀놓았다. 그럼에도 ‘진실규명’의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더 밝혀야 할 사실이 있어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범죄’가 아닌 ‘사고’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약 3주 후면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다. 이제 그가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나, 단 한 가지 남은 과제가 있다. 세월호 참사와 그 수습 과정을 마무리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며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마저 달래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세월호 단식 농성을 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도 바로 그것 아닐까.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애꿎은 희생자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입만 열면 종전·동맹·자유 떠들더니… 젤렌스키 홀대한 대한민국 국회

입만 열면 종전·동맹·자유 떠들더니… 젤렌스키 홀대한 대한민국 국회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처칠
우크라이나 외면한 한국

일러스트=유현호

1940년 5월 9일. 히틀러는 체코,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 이어 벨기에로 총부리를 겨눴다. 무려 300만 대군이 집결해 있었다. 대대적 침략을 앞둔 가운데 영국 정계도 발칵 뒤집어졌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묵인하면 그 이상 야욕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는데, 그런 기대가 허구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체임벌린은 쫓겨나다시피 물러나고 다음 날 윈스턴 처칠이 총리가 됐다.

처칠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체임벌린이 유럽에 보내놓은 영국의 30만 육군은 됭케르크에서 포위당해 전멸당할 처지다. 칼레에도 병력 4000명이 갇혀 있다. 고립된 것은 처칠 본인도 마찬가지. 보수당 주류는 여전히 독일과 평화 협상을 하자고 주장한다. 체임벌린을 등에 업은 외무장관 핼리팩스는 입만 열면 처칠을 ‘전쟁광’으로 몰아붙이며 당내 여론을 선동한다. “대화만이 해결책입니다. 왜 불필요한 전쟁을 합니까?”

영화 <다키스트 아워>가 숨 가쁘게 그려내는 2차 세계대전 초기의 암울한 풍경이다. 영화에서 생략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1939년 일. 영국과 폴란드는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니 영국과 독일은 전쟁 상태였다. 하지만 체임벌린 내각은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징병제를 통해 병력을 끌어올리고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영국군 중 제대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은 해군뿐이었다. 내각을 이루는 보수당 의원 중 평화라는 환상에 휩싸이지 않고 싸워야 할 전쟁을 대비하고 있던 사람은 해군장관 처칠뿐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전쟁은 절대적인 악으로, 평화는 절대적인 선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평화를 외치고만 있다 해서 평화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때로는 평화를 위해 전쟁을 준비하고 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수없이 확인된 영원한 진리다.

여기서 철학적 질문이 나온다. 정당한 전쟁은 존재하는가? 네덜란드의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는 1625년 초판 발간된 <전쟁과 평화의 법>에서 정당한 전쟁을 논하기 위한 요건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 타국이 침략할 때 당하고만 있는 어리석은 평화를 옹호할 수는 없다. 자기 방어를 위한 전쟁은 정당하다. 둘째, 정당한 권리를 빼앗겼을 때 그것을 되찾는 방법이 전쟁밖에 없다면, 권리 회복을 위한 전쟁도 때에 따라 정당하다. 셋째, 인류 보편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용납 불가능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을 막기 위한 전쟁에도 정당성이 부여된다.

흐로티위스 눈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면 어떨까? 우크라이나 동부 영토는 러시아 것이며, 우크라이나의 나치를 쫓아내겠다는 것이 푸틴의 명분이었다. 둘째와 셋째 이유를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집안 출신 유대인이다. 나치 운운하는 것은 거짓말을 넘어 모욕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하는 국가는 북한을 비롯한 극소수뿐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침략을 당한 처지다. 젤렌스키의 전쟁은 의문의 여지 없이 정당하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내면서 젤렌스키는 글로벌 리더로 부상했다. 처칠의 명언을 인용한 영국 하원 화상 연설은 그러한 행보의 백미로 꼽힌다. “우리는 해변에서도, 벌판에서도,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시간, 국민의 의지를 모아 항전하는 리더의 등장에 자유 진영이 열광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우크라이나는 키이우를 향한 러시아의 공세를 꺾었고, 키이우를 방문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젤렌스키를 만나 뜨거운 악수를 나누었다.

이 추세에 역행하는 나라가 있다. 대한민국이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내뱉은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 자극해 전쟁 벌어졌다’ 발언만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지난 11일 국회에서 열린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연설을 보면, 우리 현실은 참담할 정도다.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여야 의원 300명은 고사하고 고작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기립 박수조차 나오지 않는 썰렁한 행사를 만들고 만 것이다.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나라 중 젤렌스키를 이렇게까지 홀대한 건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일차적 이유는 곧 야당이 될 거대 여당, 더불어민주당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민간인 학살은 조작된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사람을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설 당일 초청해 토론회 자리에 앉혀놓는 그런 정당이 국회에서 과반을 점하고 있다. 입만 열면 한반도 종전 선언을 지지해달라던 자들이, 정작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모르쇠로 일관한다. 국제사회의 눈으로 볼 때 실로 가증스러울 것이다.

러시아와 맺은 관계가 우려되고 경제적 영향을 고민해야 한다는 항변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없다면 유럽 모든 국가는 당장 올겨울부터 국민들이 말 그대로 얼어 죽을 수도 있다. 자유 진영의 우방국들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면서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는 중이다. 한국전쟁 당시 세계 각국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난 대한민국 집권 여당은 지금 대체 뭐 하는 짓인가.

곧 여당이 될 국민의힘의 실상 역시 만만치 않다. 참석자 면면을 보면 현역 의원을 다 합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더불어민주당보다 참석자가 적었다. 입만 열면 안보, 동맹, 자유를 떠들더니 대선 끝났다고 남의 집에 난 불 취급하는 것인지. 젤렌스키를 지지하고 응원한다던 윤석열 당선인 또한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처칠은 어디 있는가? 우리에게는 핼리팩스와 체임벌린만 있단 말인가?

<다키스트 아워>로 돌아가 보자. 전시 지하 벙커에서 핼리팩스는 처칠에게 평화라는 이름의 항복을 강요한다. 갈등하던 처칠은 평생 타본 적 없는 지하철에 올라타 시민들을 만난다. 밑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결연한 투쟁 의지에 감동한 처칠은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 장면은 영화적 각색이지만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다.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꺾지 못했다. 그 어떤 독재자도 자발적으로 뭉친 국민을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처칠의 말이 옳다. 승리가 없다면 생존도 없다. 우크라이나의 정당한 전쟁을 지지한다.

2022-04-09

‘어용 지식인’ 유시민이 윤석열 時代에 준 교훈

‘어용 지식인’ 유시민이 윤석열 時代에 준 교훈

[노정태의 뷰파인더] 당파성이 훈장 돼버린 2017-2022

● 정파 이익 복무하겠다는 자기배반
● 피포위의식 모범적 예제
●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
● ‘알릴레오형’ ‘알쓸신잡형’ 득세
● 지식생산 헤게모니 싸움 밀린 보수


한동훈 검사장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고발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021일 첫 공판에 참석하고자 서울서부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2017년 5월 5일, 제19대 대선을 나흘 앞둔 날. 친노·친문 성향의 작가 유시민이 인터넷 방송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직후인데다, 더불어민주당은 단일대오를 구성하고 있지만 반(反)민주당 표심은 안철수와 홍준표 두 후보로 갈린 상황.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낙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시민은 선언했다.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

유시민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진보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게, 깨끗하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정권이더라도 ‘내가 진보 지식인으로서 권력에 굴종하면 안 되지’라고 해서 사정없이 깔 것”인데, 그건 옳지 않다. 왜냐하면 2017년 5월 현재, “한국 사회는 복잡하고 여러 층위의 권력들이 있는데, (정권이) 바뀌더라도 청와대 권력 딱 하나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무릇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권력과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모두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만 바뀌는 것이다.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 괴롭힐 것이다. 아마 야권 정당들이 서로 손잡고 연정을 하지 않겠나. 제가 정의당 평당원이기는 하지만, 범진보 정부의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

‘선량한 우리 편’과 ‘사악한 적’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물질적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대신 지적 활동에 매진하는 계층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식인’은 공부나 글쓰기 등을 전업으로 삼는 사람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신분제가 폐지된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공적 사안에 대해 대중의 이해를 돕고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들, 즉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선언은 그런 면에서 형용모순이다. ‘어용’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임금의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지식인이 시민사회 일반이 아닌 특정 정파, 그것도 곧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령과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겠다는 자기배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대신 다가올 윤석열의 5년이 있다. ‘윤석열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주제에 대한 답은, 그러므로 ‘문재인 시대의 지식인’에 대한 고민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유시민과 그의 아류가 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어찌하여 그들은 그런 모습이 됐을까. 그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

유시민의 발언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정권이 바뀌어도 대통령만 바뀐 것이며, 대통령보다 더 강한 기득권 세력은 건재하므로, 대통령을 지키고자 뭐든지 해야 한다는 단순명쾌한 사고방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논리다.

이러한 집단의식에 제대로 된 명칭이 부여된 것은 2020년 이후의 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집권 세력이 된 민주당과 청와대를 두고 ‘피포위의식’(siege ment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덕분이다. 본디 피포위의식은 군사 용어로, 적에 포위당한 군대가 위기감과 공포에 쫓겨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악수를 두는 경우를 일컫는다.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크리스티는 이 개념을 확장했다. 피포위의식은 ‘선량한 우리 편’이 ‘사악한 적’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선언은 피포위의식을 설명하는 모범적 예제나 다름없다. 물론 그는 “사실에 의거해 제대로 비판하고 옹호하겠다”는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전통적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버리겠다는 취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유시민 스스로가 말한 ‘어용 지식인’의 일이라는 것이 ‘사실에 의거한 비판과 옹호’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는 편파중계다”
시간을 건너뛰어 2020년 1월 1일로 향해보자. 서울 상암동 JTBC 스튜디오. 신년 특집 토론이 한창이었다. 시청자들의 이목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유시민의 대결로 쏠려 있었다.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던 유시민은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채널인 ‘알릴레오’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및 그의 가족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 내용을 반박하는데 한창 열을 올렸다. 진중권은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조국 일가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인데 (‘알릴레오’ 등은) 조국은 얼마나 청렴한가로 가고 있다.”

그에 대한 유시민의 답. “우리는 편파중계다. 편파적이지만 그 과정은 공정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팀의 편파중계도 있어서 전체적으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알릴레오’와 유시민은 검찰에서 발표된 수사 내용이라는 이유로 조국 일가를 향한 혐의를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했다. 그런 상황에서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팀도 편파적이므로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말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유시민과 친(親)민주당 성향의 언론 및 유튜브에서 주장하듯 검찰이 사실을 왜곡하고 혐의를 과장하고 있다 한들, 그 반대편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혐의를 축소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상대가 진실을 왜곡했다면 이쪽은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음수와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지만,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두 개의 거짓말이 남을 뿐 진실은 아니다. 이쪽의 왜곡과 저쪽의 왜곡이 서로 균형을 이뤄 올바른 진실을 찾아간다는 논리는 결국 자신들의 거짓과 왜곡을 무마하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2022년 4월 현재, 조국의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는 수감 중이다. 조국의 딸 조민 씨 역시 입시전형 당시 제출했던 서류에 허위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이어 고려대에서 입학 취소 결정을 받았다. 유시민 본인은 ‘노무현재단 계좌 검찰 조회’ 발언 등으로 재판 받고 있으며,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용 지식인의 길은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되고 만 것이다.

지식 소매상 노릇 하기 애매해진 까닭
한국 대중문화와 출판의 역사에서 유시민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80년대 말부터 급격하게 성장한 상업 출판, 그 중에서도 대중 교양서 시장의 ‘대장주’ 격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내 머리로 읽는 역사 이야기’ 등 유시민은 대학교 신입생 혹은 조숙한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도록 교양서를 써내는 능력이 있다.

대중 교양서 저자 유시민은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님을 떳떳하게 인정했다. 대신 스스로를 ‘지식 소매상’이라고 부르며 전문가들 앞에는 겸손한 태도, 대중 앞에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지식을 소화하기 쉽도록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본인의 본령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 들어 그 ‘지식 소매상’이 너무도 노골적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물론 유시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 논객이며 그의 책을 구입할 사람들도 진보 독자층이다. 문재인 정권을 전후로 유시민 스스로가 무색무취한 지식과 교양이 아닌 적극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생산했다. 유시민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식 소매상’ 노릇을 하기 애매해졌다.

인문 교양서 시장의 독자층 역시 급격한 성향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라는 두 명의 보수 정권 대통령을 겪는 동안 진보 성향의 비소설 독자층은 일종의 ‘저항의 논리’를 원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었다. 세상의 잘못된 점을 탐구하고, 고발하고, 후벼 파는 ‘독한’ 책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줄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출판 시장 전체의 규모가 축소되기도 했다.

평범한 혹은 진보적인 독자층에게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지식과 교양을 전달하는 것은, TV나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이미 인지도를 쌓은 저자들의 몫으로 넘어왔다. 바야흐로 예능 인문학, 혹은 ‘인포테이너’의 시대가 열렸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기획회의’ 2018년 9월호에서 그러한 현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인기였다. 이런바 실용인문학, 소프트 인문학이 붐을 이뤘다. (...) 이제 인문서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방송에 출연해 얼굴을 알린 이들의 인문학 서적들이다. 이른바 ‘예능 인문학’의 시대다. 방송에 얼굴을 알린 이가 쓴 책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는 세상이 됐다.”

선동에 나서거나 아닌 척 하거나
학원 강사로서 많은 팬층을 확보한 최진기라던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줄여서 ‘지대넓얕’이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로 선풍적 인기를 끈 채사장 등, 인문 교양서 시장의 새로운 강자는 단지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추세에 조응한 것은 유시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대넓얕’과 유사한 어감을 지닌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을 뿐더러, 같이 출연한 다른 지식인들 역시 많은 경우 베스트셀러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대중 교양이란 말 그대로 대중이 원하는 재미있는 지식을 발굴하고 전달하는 분야다. 오늘날의 추세에 맞춰 저자 군이 달라지고 홍보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을 탓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엔터테인먼트와 흥미에 집중하다보니 잘못된 사실을 전하거나 오류를 범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는 그러한 ‘실수’에 정치적 함의가 종종 담기곤 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직후인 2017년 6월 30일 방영된 ‘알쓸신잡 경주편’이 대표적 사례다. 출연자인 유시민,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가수 유희열이 경북 경주시 원자력 발전소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유시민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 위험을 거론하고, 정재승은 ‘한국처럼 원전을 많이 쓰는 나라 프랑스는 원전을 전면적으로 줄여 나가겠다고 한다’며 운을 띄운다. 그러자 유희열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반색한다. “아,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탈석탄, 탈원전 정책을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탈원전은 문재인 정권의 핵심 공약이자 중점 과제 중 하나다. 해당 에피소드를 통해 전달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온갖 장밋빛 청사진이 에너지 산업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방영된 ‘알쓸신잡’의 해당 에피소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다고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 5년의 지식인 사회는 그렇게 돌아갔다.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고 사실을 왜곡하며 지지자를 선동하는 ‘알릴레오형 지식인’, 정치색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일정 수준의 정치 편향성을 지니고 대중 교양 시장을 공략하는 ‘알쓸신잡형 지식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시민은 두 영역 모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으니, 문재인 정권의 지식인이란 결국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어용 지식인’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대중이 지식인의 정치 성향 소비할 경우
지난해 9월 10일 서울 금천구 즐스튜디오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국민 시그널 면접’에 참가한 윤석열 당시 후보가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이 현장에서 중계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은 0.74%p라는 초박빙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4월 8일 현재 민주당 의석수는 172석이다. 여기에 정의당(6석)과 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을 합하면 180석이 넘는 세력이 곧 야당이 된다. 전례를 찾기 쉽지 않은 여소야대 정국이다. 게다가 6월 1일에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는데, 정권교체 여론이 매우 컸던 대선과 달리 국민의힘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 많지도 않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윤석열의 지지자들 역시 5년 전 문재인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포위의식에 사로잡히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새 정부 지지자들 중에는 문재인 정권의 정책 실패, 특히 부동산과 관련된 실정에 실망한 중도층만 있는 게 아니다. 열렬한 보수층이 대거 포함돼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저들이 했던 일 우리가 그대로 갚아주리라’는 일종의 원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석열 시대의 지식인 사회가 또 다른 ‘어용 지식인’ 대열을 이루거나, 아닌 척 하면서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인포테이너’의 연대를 갖추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여론의 기준을 제시하는 공공 지식인이 노골적 정치색을 드러내며 당파적 편향성을 훈장처럼 내세우기 시작하면 지식 사회 본연의 기능이 마비되고 흔들린다. 대중이 지식인의 지식이나 통찰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소비할수록 지식인과 대중의 수준은 동반 하락한다.

더 슬픈 소식도 있다. 윤석열을 옹위하기 위해 ‘보수 어용 지식인’을 꾸려 싸우겠노라는 발상은 실현 불가능하다. 그럴만한 역량도 인적 자원도 없기 때문이다. 범 보수 진영, 혹은 민주당 지지 성향을 띄지 않는 중도·보수 진영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헤게모니 싸움에서 완전히 밀린 상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김경율 회계사(왼쪽부터)가 2020년 9월 25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일명 조국흑서) 출간 관련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조국 사태를 계기로 진보 진영의 ‘어용 지식인’들이 제시하는 논리를 허물고, 입을 다물게 하고, 그 허위를 까발린 주체가 누구인가. 진중권을 비롯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이른바 ‘조국 흑서’를 쓴 5총사다. 대선 과정을 거치며 참여자들의 입장과 태도와 진영이 서로 많이 갈라졌으나, 적어도 그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조국 흑서팀’은 모두 진보 논객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진보와의 담론 투쟁에서 보수 논객들은 스스로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

대선이 끝나기 전 진중권은 정의당으로 복당했다. ‘조국 흑서’를 쓴 이들은 각자의 길을 갔으나,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민주당과 싸우던 시절의 아우라는 잃은 지 오래다. 요컨대 현재 보수는 진보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인을 동원하고 담론 투쟁에 나설 수 없다.

해법은 어디 있을까. 지식인 본연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만이 답이다. 윤석열 본인의 신조이기도 한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히 되새기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함부로 배척하지 않는 인간적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이나 ‘이대남’들의 관심 사항으로 여겨지는 ‘공정’을 매우 좁게 해석하며 문자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인위적 개입과 관리가 필수다. 새 정권의 출범과 함께 ‘어용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공공 지식인’의 시대가 돌아와, 이러한 정치적, 철학적 토론이 왕성하게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06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국민이 대통령 조롱해도 내버려두는 게 진짜 ‘권위’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한 文은 비민주적 ‘권위주의’
소위 ‘깨시민’ 덩달아 위세… 尹은 진정한 권위 누리길

 
현지 시각 지난 3월 27일,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농담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웃던 윌 스미스, 아내의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무대 위로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고, 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 목청을 높였다. “다시는 내 아내의 이름을 꺼내지 마!”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은 ‘조크’에 관대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나라다. 여기서 말하는 조크란 모두가 적당히 기분 좋게 웃고 넘어가는 무해한 농담이 아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이 감추고자 하는, 혹은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치부를 드러내고 까발리며 조롱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처럼 권위 있는 자리일수록 그렇다. 당사자가 불쾌해할 뿐 아니라 때로는 듣는 이도 웃어넘기기 어려울 만큼 독한 조크가 난무한다. 연예인들만 조크의 과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백악관 공식 행사에 코미디언을 사회자로 부르면 대통령과 영부인을 놀림감으로 삼는다. 미국식 조크에는 성역도 없고 금기도 없다.

2017년 8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청와대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석한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

 
왜일까?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지만 동시에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더 나아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지키는 방식이다. 중세 시대의 왕이나 권력자들이 광대를 옆에 두고 남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농담하도록 내버려둔 것과 같은 원리다. 스타들의 치부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권위주의’의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떠올려볼 수 있다. 권위주의와 자존심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굽실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면 권위와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미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 부르며 방송과 출판 등에서 대통령을 풍자하는 걸 기꺼이 허용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농담인 ‘YS 시리즈’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춘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그 뒤를 이은 대통령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것, 국민들이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렇게 권위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이 공식이 달라진 건 문재인 대통령 이후다. 문재인 정권의 여러 잘못 중, 문화적 영역에서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1983년에 태어나 모든 대통령 선거와 그 후의 분위기를 경험했던 필자로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까지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적은 없었다.

문재인 본인부터가 문제다. “북조선의 개 한국대통령 문재인의 새빨간 정체”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지를 만들고 뿌렸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일개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현직 대통령이 시민을 고소하는 것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그 어떤 민주국가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안을 두고 문재인 본인이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격노’를 일삼더니, 퇴임을 앞두고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제목의 책까지 냈다.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권위주의를 의인화하면 바로 이런 캐릭터가 될 듯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이렇다보니 지지자들의 행태는 한층 더 저열해졌다. 자칭 ‘깨어있는 시민’들이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대감댁 행랑채의 왈짜들처럼 떠세를 부려댔다. 정권을 향한 비판, 풍자, 농담에 대고 “대통령님이 네 친구냐?”며 시비를 걸고 다녔다. 크리스 록의 조크를 듣고 웃다가 제이다 핑킷의 눈치를 보더니 무대에 올라가 뺨을 때린 윌 스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커녕, ‘아무도 웃을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중이다. 새 대통령 윤석열은 자칭 민주정권의 비민주적인 권위주의를 확실히 털어내주기를, 국민 속에서 진정한 권위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