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6

[북리뷰] 북핵 위기, 케인스를 공부할 시간

평화의 경제적 결과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저 정명진 역 부글·1만5000원

그 영국 재무부 관료는 1차 세계대전의 뒷수습을 위한 파리평화회의가 자기 뜻대로 흘러가고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전범국들이 끝도 없는 가난의 수렁으로 빨려들어가는 가운데, 전승국들은 원초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경제학자인 그가 볼 때 턱도 없는 배상을 요구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한 미국마저도 그 복수의 굿판을 방관하고 있는 상황. 그는 공직을 내려놓고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명저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머리말에서 케인스는 스스로를 3인칭으로 두고 이 상황을 기술한다. "그는 평화조약의 조건을 적은 초안을 수정할 수 있는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가 평화조약에 반대하는, 아니 유럽의 경제적 문제에 대한 파리평화회의의 전반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근거들이 이 책의 여러 장을 통해 설명될 것이다."(9쪽)

케인스의 주장을 아주 간단히 요약해보자. 독일은 석탄과 철로 산업을 일으켜 해외 무역으로 돈을 버는 나라다. 그런데 승전국들은 독일에게 석탄을 현물로 내놓고 모든 식민지와 무역용 상선까지 포기하면서 동시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갚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가능할 때마다 통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가설의 늪에 빠져 길을 잃고 말 것이다. 독일은 여러 해에 걸쳐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려 외환 보유를 확대할 수 있어야만 배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176쪽)

독일은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아니므로 수출 산업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경우, 유일한 천연자원이라 할 수 있는 석탄을 판매하거나 현물로 제공하는 것 외에는 배상을 할 방도가 없다. 결국 승전국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합리적 수준의 배상을 위해 독일의 경제 부활을 허용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독일 경제를 만신창이로 만들고 계속 배상을 요구하는 모순된 입장을 취할 것인가.

케인스는 파리평화회의의 결과를 예상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으깨버리는 길을 택했고, 독일은 그 빚을 갚기 위해 무리하게 화폐 발행을 일삼다가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버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 틈을 타 독일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권력을 잡았고, 연합국을 비난하기 위해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자주 거론했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서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성찰하는 이들에게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 법. 2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승전국들은 비로소 케인스의 처방을 받아들였다. 두 번이나 세계 대전을 벌인 독일을 향해 마셜 플랜을 펼침으로써 경제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고 민주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확고히 다졌던 것이다. 그렇게 부유하고 평화로운 민주국가로 거듭난 서독은 결국 동독과 다시 하나가 되었다.

독일은 히틀러의 집권 이전부터 민주주의 국가였다. 북한을 향한 경제적 지원이 북한 주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려운 반면, 독일은 고도성장의 과실을 비교적 고르게 분배한 모범적인 복지국가다. 다시 말해, 이 책을 우리의 현실, 특히 북한을 향한 경제 봉쇄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다. 그러나 『평화의 경제적 결과』를 읽고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일 것이다. 국제 정세와 경제적 현실을 아우르며 미래를 향한 청사진을 그려내면서 현실을 과감히 비판하는 지식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2017.09.26ㅣ주간경향 1245호

2017-09-12

[북리뷰] 현대 문명에 흐르는 검은 피

황금의 샘 1, 2
다니엘 예긴 저·김태유 허은녕 역·라의눈 각권 2만4800원

1911년 여름,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에 임명되었다. 영국은 하루가 다르게 군사력, 특히 해군력을 키워가는 빌헬름 황제의 독일에 대응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처칠은 선택을 해야 했다. 해군 함정의 연료를 계속 석탄으로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석유로 전환할 것인가?

"그 시절, 영국 군함은 자국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석유로의 전환은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웨일즈산 석탄 대신,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페르시아산 석유에 의존해야 되기 때문이다. 처칠은 "해군 함정의 연료를 석유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풍랑이 심한 바다에 무기를 맡겨놓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연료를 석유로 바꾸면 함정의 속력을 높이고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전략적 이점이 크다는 점은 명확했다. 결국 처칠은 함정의 연료를 석유로 전환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진했다."(1권 17쪽)

처칠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그보다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초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였지만, 그런 위험을 먼저 무릅쓰고 우수한 해군 함정을 건설하여 영국 해군을 굴복시킨다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산산조각나버릴 테니 말이다. 더 효율적이고 막강한 에너지원이 발견되어버린 이상 영국 뿐 아니라 석유가 나오지 않는 모든 나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처칠은 그의 회고록에 '지배력이란 모험을 무릅쓴 데 대한 상(賞, prize)이다'라고 썼다."(1권 17쪽)

석유 산업 및 국제 정치 경제의 권위자인 다니엘 예긴의 책 『황금의 샘』은 석유가 만들어낸 20세기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훑어내는 대작이다. "석유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20세기를 지배했고, 이 책은 바로 석유의 지배가 일어나게 된 실상을 파헤치고 있다."(1권, 18쪽)

『황금의 샘』의 원제인 The Prize는 바로 그런 중의적인 뜻을 담고 있다. 주로 자동차, 비행기, 선박의 연료로 사용되며,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석유화학제품의 원료이기도 하고,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며, 수많은 국제 분쟁을 야기하고, 그 가격의 오르내림에 따라 전 세계의 경제가 울고 웃는 단 하나의 상품. 그리고 그것을 확보하는 나라만이 세계의 패권국이 될 수 있는 상급. 그것이 바로 석유이며, 따라서 석유의 역사는 곧 20세기 인류의 역사와도 같다.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존 D. 록펠러는 '수직 계열화'라는 경영의 일대 혁신을 이루어냈다. 석탄을 연료로 쓰는 해군력으로 패권국이 되었던 영국은 석유를 갖지 못해 1차 세계대전 이후 위축되고, 반대로 자국 내에서 석유를 펑펑 뽑아내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일본은 인도네시아의 유전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진주만을 폭격하고 전쟁을 벌여 예정된 패배의 늪으로 걸어들어갔던 것이다.

지난 7월, 중국은 동아프리카의 요충지인 지부티에 사상 최초의 해외 군사 기지를 가동했다. 석유 수송로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과 일본 입장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중국이 계속 원유를 공급하는 한 북한 봉쇄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점에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세상을 읽으려면 여전히 석유의 흐름을 바라보아야 한다. 아직 석유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2017.09.12ㅣ주간경향 12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