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고작 회계 문제? 돈이 곧 윤리다

정의연 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회계 문제다. 회계 문제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 가령 뭐 운동의 대의가 어쩌고 활동가의 선의가 저쩌고 따위는 모두 부차적이다. 장부에 돈 거래를 제대로 써놓고 투명하게 거래하는 것은 운동권 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공유하는 가장 기본적인 규칙과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범한 시민들은 돈을 벌고 있다. 혹은 내일의 돈벌이를 위해 쉬고 있다. 돈을 번다는 건 그렇게 지엄한 일이다. 돈을 벌어서 그 기록을 투명하게 남기고, 내야 할 세금을 내고, 사장이라면 직원 월급 밀리지 않고, 회삿돈을 잘 관리하는 것 등은 모두 우리 삶의 기본이면서 가장 숭고한 영역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를 왜 하는가? 민주화운동을 왜 했는가?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안온하게 잘 살기 위해서이다. 남을 속이지 않고 권력에게 휘둘리지도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당연히 모든 회계는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반대로, 그 어떤 아름다운 대의를 갖다 댄들, 회계를 속이는 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그 사회는 투명할 수도 건강할 수도 민주적일 수도 없다.

'그깟 회계 문제'를 운운하는 자들아, 입 닥쳐라. 너희들은 지금 '그깟 회계'로 계산되는 '그깟 푼돈' 벌겠다고 새벽에 눈꼽 떼고 일어나 직장으로 일터로 택배 상하차 물류센터로 향하는 그 모든 평범한 생활인들을 모욕하고 있다. 너희들의 운동이 대체 뭐가 그렇게 고상하고 굉장하기에 이 모든 사람들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돈 문제를 이토록 얕잡아 본단 말이냐. 그토록 돈 문제를 우습게 보면서 어쩌면 네놈들 뒷주머니만은 알뜰하게 채워넣고 있단 말이냐.

돈 문제다. 이건 돈 문제고, 바로 그렇기에 가장 투명하고 엄정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반미주의니 반일주의니 거대한 헛소리 다 집어치워라. 돈이 깨끗하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할 수 있단 말이냐. 이 숭고한 회계 문제 앞에서, 피해자와 활동가의 윤리가 어쩌고 저쩌고 지껄이는 배부른 운동권 족속들, 그 역겨운 아가리들을 다 닥치란 말이다.

2020-05-28

[신동아] ‘보수 박정희’ 아닌 ‘진보 박정희’ 되찾아라!

* <신동아> 2020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신동아 홈페이지네이버 뉴스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보수 박정희’ 아닌 ‘진보 박정희’ 되찾아라!

[사바나] 30대 논객이 미래통합당에 告함

●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詩)’도 있었다
● 1960년대, 각자도생 아닌 ‘모든 사람 위한 개혁’의 서사
● 이승만 시대와 다른 합리적·근대적 삶의 꿈
● ‘누구나 재벌’, 그 실낱같지만 불가능하지 않은 기회
● ‘우리도 함께 잘살아 보세’에서 ‘우리가 남이가’로 전락
● 양주 마시던 박정희에 가까워진 오늘의 보수 정치

‘사바나’는 ‘사회를 바꾸는 나, 청년’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뉴스랩(News-Lab)으로, 청년의 삶을 주어(主語)로 삼은 이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입니다. <편집자 주>



노동운동가 주대환은 “나는 4·19의 시(詩)만 읽은 게 아니라 5·16의 밥도 먹고 자랐다”고 즐겨 말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과 박정희의 산업화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런 현실 인식에 터를 잡고 ‘주대환의 시민을 위한 한국현대사’를 펴낸 후 그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주대환은 따돌림과 배척을 무릅쓰고 한국 현대사의 어떤 진실을 말했다.

하지만 저 표현은 불완전하다. 주대환의 잘못은 아니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혹은 박정희가 한반도의 역사에 불러온 변화에 대한 그릇된 통념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을 뿐이다. 4·19에는 시가 있었고, 밥은 없었다. 하지만 5·16에는 밥만 있었던 게 아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한 가지 지적해 두자. 아직 한국 사회는 위선적이다. ‘시’와 ‘밥’을 대조해 논하면, 시가 더 고결하고 밥은 세속적이며 천박하다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다. 많은 경우 시보다는 밥이 더 중요하다. 시가 밥보다 더 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밥을 먹기 위해 모든 시를 억압해도 되는 것 또한 아니다.

5·16에는 밥도 있었지만 시도 있었다. 군사정변, 권력을 잡고 강화하기 위해 벌인 헌정 질서 문란 행위, 민주화운동에 대한 탄압 등이 정당했다는 뜻은 아니다. 5·16은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 정신사적 사건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그 의미를 새기고, 배울 건 배우되 반성할 건 반성해야 보수진영, 더 나아가 진보 그리고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다.

5·16의 잘살아 보세, ‘혼자 말고 함께’


1962년 어느 날, 음악평론가 이상만이 방송작가 한운사를 찾아왔다. 5·16 1주년 기념행사가 열리는데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랫말을 하나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상만을 통해 작사가를 물색한 이는 김종필 당시 공화당 총재. 훗날 자서전에서 한운사는 “지금 국민은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 한번 외쳐볼라나.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의 보따리를 팽개치자고. ‘잘살아 보세’라는 제목이 떠올랐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한운사는 김희조 당시 경희대 음대 교수가 만든 가락에 가사를, 즉 시를 붙였다.

‘잘살아 보세 / 잘살아 보세 / 우리도 한번 / 잘살아 보세.’ 설령 그 시절을 살지 않았더라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5·16 1주년 기념행사에서 초연됐으니 그야말로 ‘5·16의 시’다. 과연 우리는 이 노랫말을(시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잘살아 보세.’ 말 그대로, 잘살아 보자는 이야기다. 저 대목만 놓고 보자면 그리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마음을 열면 감동을 준다. 진보적 관점에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살피는 대중문화평론가 이영미는 ‘동백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대중문화로 보는 박정희 시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잘살아 보세’의 핵심 구절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하는 대목은 묘하게 가슴을 울린다. 이 구절에서 징글징글하게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이를 벗어나고 싶은 절실함이 함께 확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저 가사의 마법은 ‘잘살아 보세’에 있지 않다. ‘우리도 한번’이 핵심이다. ‘우리’가 함께 잘살아 보자는 말은, 그냥 ‘내가 잘살면 좋겠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잘 먹고 잘살고 싶은 욕망이라면 늘 있어왔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직후인 2000년대 초, 인기 절정의 배우가 등장했던 신용카드 광고 문구를 떠올려보자. “여러분, 부자 되세요!”

하지만 ‘부자 되세요’는 ‘잘살아 보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우리도 한번’이 없기 때문이다. 5·16의 노랫말에는 ‘우리’가 있다. 이승만 정권의 부자들이 그랬듯,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이나 미군정에서 불하받은 적산가옥이나 미군 원조를 독식하는 식으로, 혼자만 잘살자는 게 아니었다. 성실한 노력과 노동을 통해 함께 잘살자는 목소리였다. 새 시대를 각자도생이 아닌 우리의 힘으로 일궈보자는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그러한 경향성은 4·19와 5·16을 전후해 등장한 대중문화 작품 속에서 고루 발견된다. 이영미에 따르면, 당시 인기를 끌던 TV 드라마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신입사원 미스터리’와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는 공히 “근대적 기술의 힘을 지닌 개혁적이고 실천적이며 성실한 청년이 낡고 비윤리적인 기득권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대립 구도”를 지녔다.

신상옥 감독의 1963년 영화 ‘쌀’도 마찬가지다. 물이 부족해서 쌀농사를 짓지 못해 배고픈 마을이 있다. 지주이자 정치인인 송 의원은 젊고 실용적인 차용이 마을 사람들을 이끌어 저수지 공사를 하는 것을 방해한다. 결국 ‘합리적’으로 말이 통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차용의 뜻은 이루어진다.

이에 대한 이영미의 평가가 흥미롭다. “어느 면으로 보아도 이 작품은 정권 홍보의 의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너무도 명료한 영화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노골적인 정권 홍보 영화지만 나름의 감동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중학생 시절, 한국 고전 명작 영화를 TV에서 방영할 때 ‘쌀’을 처음 본 필자 또한 같은 감동을 느꼈다. 자연환경의 제약을 넘어, 고루한 인습과 기득권의 틀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개혁을 달성해 내는 서사 구조에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대중은 바로 그런 것을 원했다. 주대환뿐 아니라 필자 본인을 포함한 지식인들은 그 무렵의 시대정신을 애써 모른 척해왔다. 대신 현실의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에 진저리를 내고, 그러면서 술이나 마시고 신세 한탄을 하고, 푸념하고, ‘광장’의 주인공처럼 중립국을 외치다 죽거나 김수영 시의 한 구절처럼 “작은 것에만 분노”하는 자아상을 탐닉해 왔다. ‘4·19의 시’란 그런 것이었다.

정작 그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전근대적인 잔재를 일소하고 근대적인 합리성을 장착해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아 보자는 에너지가 사회 전반에 넘치고 있었다. 박정희와 육사 8기로 대변되는 3공 세력은 그와 같은 대중적 분위기를 자신들의 것으로 삼았고, 놀라운 경제 발전의 첫 시동을 걸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5·16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오늘의 시발점이 됐다. 그 이면에는 밥뿐만 아니라 시도 있다. 어쩌면 밥 그 자체보다, 합리적이고 계획적이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실용적이고 성실한 인물상을 그려낸 시의 출현이 더 중요한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1960년대에 한정해서 이야기해 볼 때, 박정희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

박정희 시대는 박정희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도록 만든 에너지가 있었고, 박정희가 대통령으로서 만들어낸 결과가 있었다. 양자를 완벽히 나누기란 쉽지 않고 사실상 불가능할 테지만, 구분을 포기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그 구분은 유의미하며, 꼭 필요하다. 한국 보수 진영이 몰락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어서다.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이승만 시대, 1950년대는 ‘사바사바’하지 않으면 취직할 수 없고, 취직해도 ‘빽’이 없으면 버틸 수 없는, 비합리와 전근대의 시대였다. 당대인들은 그렇게 느꼈다. 그 시절을 배경에 둔 수많은 문학, 영화, 드라마 등에서 확인되는 바가 그러하다. 박정희는 억눌린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이전에 비해서는 합리적이고 근대적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꿈과 희망을 줬다. 그리하여 군사정변 이후 선거라는 형식을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식인들을 위한 4·19의 시가 아닌 대중을 위한 5·16의 시는 더욱 널리 퍼졌고, 애창됐고, 시대정신이 됐다. 경제는 고도성장을 시작했고 온갖 진통을 겪으면서도 한국인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달려가며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다. 물론 성공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원된 방식이 전적으로 공정하지만은 않았다.

김우중의 대우그룹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김우중 회장부터 모든 임직원이 상상하기 어려우리만큼 열심히 일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우의 급성장은 김우중이 박정희와 맺고 있던 돈독한 인연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었다. 국민 모두가 잘살아 보겠다는 열망을 품었고, 실제로 거의 대부분이 절대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장 크고 달콤한 과실은 결국 권력과의 거리에 따라 분배됐다.

오늘날 보수 정치는 박정희 시대가 만들어낸 재벌그룹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국민은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바로 그 점이 보수 정치가 네 차례 연이어 패배한 이유일 테다. 박정희가 권력을 잡던 시절, 그의 정치는 국민 모두가 잘살고 싶은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반면 지금은 국민 모두가 잘사는 나라가 아닌, 이미 잘살고 있는 사람들만 잘사는 나라를 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0년대의 국민이 박정희를 지지한 까닭은 누구라도 재벌이 될 수 있는, 실낱같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은 기회를 나눠줬기 때문이었다. 2020년 현재 보수 정치는 과연 국민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하는가?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이렇게 복지 퍼주기만 하다가는 나라가 베네수엘라 꼴이 된다”고 외쳐도 국민들이 듣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국민들이 ‘빨갱이’가 돼서가 아니다. 보수 정치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 정신을 내팽개친 채,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는 기득권 패거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남 탓을 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국민은 현재 보수 정치를 건강한 시장경제의 수호자로 여기지 않는다. 구멍가게에서 시작해 재벌그룹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공정한 게임의 규칙 따위는 더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흙수저’는 ‘흙수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복지 예산 좀 축내는 게 뭐가 대수인가?

민주노총이냐 대기업 임원과 오너냐


조국 전 법무장관이 한 유명한 말을 떠올려보자. “우리들 ‘개천에서 용 났다’류의 일화를 좋아하지만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 소위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경제적 역동성과 그로 인한 사회계층 변화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대신 각자 자리에서 안분지족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많은 이가 저 트위터 발언의 후안무치함을 지적했지만,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다시피 그렇다고 국민이 더불어민주당 대신 미래통합당을 택하는 일은 없었다. 통합당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역시, 대놓고 말을 안 하고 있다 뿐이지, 조국과 다를 바 없다는 인식이 국민 기층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주지하다시피 민주당은 민주노총이라는 노동계의 기득권과 한편에 서 있다. 하지만 통합당은 그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다니는 대기업의 임원 및 오너 등의 이익을 대변한다. 평범한 국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현실을 놓고 볼 때, 나 혹은 내 자식이 민주노총에 들어갈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대기업 임원이나 재벌 총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유권자로서는 누구를 지지하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

누구나 자신의 손으로 더 나은 내일을 개척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다면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 한다.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가는 게 더 낫다고 말하는 조국조차 딸에게 더 나은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재판 중인 사안이긴 하나) 매우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시키지 않았던가.

그러한 욕망은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제공할 때 사회는 건전해진다. 자유시장경제 이론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신비한 힘을 역설했다.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다. 6·25전쟁 직후 어떤 영국 언론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건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조롱했지만, 우리는 기어이 꽃을 피워내고 말았으니 말이다.

동력은 분명하다. 국민 모두 잘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열망을 헛되이 하지 않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고 외치며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스스로 자신과 자녀들의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는 ‘우리’로 호명됐고, 보수 정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문제는 보수가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자신의 근본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박정희가 처음 집권할 당시 그들은 보수가 아니었다. 혁신적인 젊은 피였고, 이전에 비해 공정하고 활기찬 시장경제를 선사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으며, 그 약속을 지켜냈다. 상대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진보에 가까웠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인류학 박사 윤보선과 달리 박정희는 논두렁에 앉아 농민들과 막걸리를 마셨고 온 나라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었다.

양주잔 내려놓고 막걸리 마셔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시바스 리갈을 마시던 박정희에 훨씬 더 가까워져 있다. 오직 그런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국민들로서는 박정희 시대의 추억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거나, 지역적 연고가 강하거나, 박정희 체제의 직접적인 수혜자가 아닌 다음에야, 보수 정당을 찍을 이유가 없다. ‘여당 프리미엄’마저 이제는 민주당이 누린다. ‘이기는 편 우리 편’이라며 중도층이 찍어주는 정당은 통합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라는 말이다.

언필칭 청년 진보 논객으로 불려온 필자가 노년층이 지지하는 보수 정당을 향해 고언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 한국에는 올바른 시장경제와 합리적인 법치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당이 필요하다. 많은 국민은 통합당 혹은 넓은 보수 진영을 그저 ‘늙은 기득권 정당’으로만 바라본다. 그런 인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정치는 자신의 핏속에 진보의 DNA가 섞여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 유전자를 깨울 때, 젊은이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돈이 아니라 꿈을 보고 투표한다. 모든 이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언제든 표심은 돌아올 수 있다. 양주잔을 내려놓고 막걸리를 마셔야 할 때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노정태의 시사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자기만의 방'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무렵의 어느 날 밤, 버지니아 울프는 변호사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메리 비턴이라는 숙모가 봄베이에서 낙마 사고로 숨졌고, 숙모의 유언에 따라 울프가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울프는 생계를 위해 지속하던 신문 기고, 대필, 노인 책 읽어주기, 조화 만들기, 유치원 과외교사 등을 집어치우고 문학에 몰두한다. 1928년 10월 발표한 두 강연문을 편집하여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그는 자신의 행운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은 후, 이전까지 '문학'의 영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진실을 말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만한 돈과, 자물쇠를 걸어잠근 채 혼자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울프의 주장에 '부르주아 페미니즘' 같은 딱지를 붙이고 매도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세상의 진실을 간파하고 드러낸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돈이 많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꼭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돈이 없다면 자유롭고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워지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이 쓴 <돈의 철학>을 같이 읽어보자.

사람들은 돈을 이용해 사고 팔고 주고 받으며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즉, 돈은 교환의 매개체이다. 그렇기에 돈에는 어떤 '본질'이 없다. 내가 가진 1만원이나 다른 사람의 1만원이나 모두 1만원일 뿐이고 그 외의 다른 속성을 갖지 않는다. 돈은 누가 어떻게 벌었는지 등도 가리지 않는다. 그저 '많다' 아니면 '적다'로 표현되는 순수한 양(量)적 재화인 것이다.

여기서만 끝났다면 짐멜의 논의가 오래 기억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돈의 소유의 양적 차이가 그 소유자에게 매우 현저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간파한 데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연금복권은 매달 500만원을 20년간 지급하고, 로또는 10억원대의 1등 당첨금을 한번에 준다. 둘 중에 골라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연금복권에 비해 로또가 훨씬 잘 팔린다는 현실이 말해주듯이 대체로 로또를 선호한다. 목돈이 주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물론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으며 글을 썼던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듯, 갑자기 생긴 큰 돈으로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대신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연금복권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시작해 게오르그 짐멜을 운운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고통을 겪은 여성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그 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인생의 선택지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충격적인 폭로 이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혹은 모른 척 하고 있었던 역사적 비극과 회복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짚어봐야 하는 것이다.

'돈의 노예' 같은 표현에 너무도 익숙해진 탓에 우리는 돈이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잘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인간관계'가 뒤엉켜있는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그런 꿈을 품고 귀농하거나 하면 대체로 실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습, 편견, 속박, '공동체'의 압력 따위 때문이다. 돈은 그런 것으로부터 개인을 가장 결정적으로 해방해주는 소유물이라고 짐멜은 강조한다.

대도시 런던에 살며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는 버지니아 울프가 느낀 해방감도 그런 것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 숙모님이 물려준 유산에서 나오는 몇 장의 종잇조각에 대한 대가로 사회는 닭고기와 커피, 침대와 숙소를 제공해 줍니다." 울프는 일에서 벗어남으로써 부질없는 감정도 털어내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증오심도 쓰라림도 없고, 다른 이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으며, 대신 연민과 관용을 느끼다가 그마저도 넘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누리면서,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해 저지른 짓은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회계 오류인지 회계 부정인지, 4억이면 충분할 전원주택을 7억에 구입해놓고 자기 아버지를 수위로 채용하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사실관계와 불법 여지를 모두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넘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단지 드러난 문제를 비난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윤미향과 정의연은 '자기만의 방'을 원했을 여성들까지 그저 '피해자'로 묶어둔 셈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젊은 시절 못다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아주고 싶었다면 그분들이 단 하루라도 젊고 건강할 때, 2015년 위안부 협상을 통해 일본이 준 배상금이 아니더라도,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경제적 도움을 드렸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현실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었다. 추운 단칸방에 시계 하나 안 걸어주고 온수매트 한 장 안 놓아드렸다. 여성주의의 대의를 내걸고, 다른 여성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몰아넣어둔 채, 자기 딸은 미국 유학 보냈고 윤미향 본인은 금배지를 달았다.

다시 "자기만의 방"을 꺼내든다. 울프가 강연문을 썼던 그 무렵, 영국의 '남성 문학'은 여성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오직 숭배와 예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 위선을 울프는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해부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우상(偶像)으로 박제했던 정의연의 행보 역시 그러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가 던진 질문 앞에, 윤미향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대답해야 할 때다.

* 일러두기: 조선일보 5월 23일자 주말판 지면에 실린 것과는 조금 다른 미교열 원고입니다.  신문에 실린 내용은 조선일보 홈페이지 또는 네이버 뉴스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05-22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에

일제시대에 대해 사람들이 잘 말하지 않는 진실 중 하나. 독립운동한다고 도둑질, 강도질하는 자들, 또 반대로 도둑질이나 강도질하다 붙잡혀놓고 독립운동 한다고 둘러대는 범죄자들이 참 많았다.

물론 그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고,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칼 든 강도가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독립운동가를 구분하기도 어렵거니와 안다고 해도 옹호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좋은 대의를 갖다 대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그 중 정말 어기면 안되는 것은 이미 다 형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횡령 같은 것이 그렇다. 설령 전쟁중이어도 전투의 일부로서 벌어지는 인명 손실이 아닌 살인은 처벌받는다. 그래야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의연 앞에 판단 중지'를 외친 한 기자 칼럼을 본 후, 구역질나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진정한 진보 운동의 출현과 정착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칼럼을 쓰는 사람, 이런 글에 동의하는 사람, 당신들이 소위 '적폐'와 다를 게 무엇인가.

2020-05-18

광화문과 門化光


광화문 한자 현판이 門化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한자가 기본적으로 세로쓰기이며, 문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문 세로쓰기 문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택한 매체, 죽간 때문이다. 오른손에 붓을 쥔 사람이 왼손으로 죽간 두루마리를 풀어가며 글씨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지금 우리가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문장이 점점 아래쪽으로 쌓여가듯, 죽간의 문장은 (글씨 안 쓴 여백이 왼쪽 두루마리에 있으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문자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언가에 관한, 책>의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는 이렇듯 "형식에 의해 제시되는 이용가능성"을 행위유도성(affordance)이라 부른다.

우리가 고대 중국의 죽간 때문에 생긴 행위유도성과 그로 인한 한문 작성법을 2020년 현재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광화문'이 아니라 '문화광'이라고 까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무식한 소리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정말이지 통탄할 일이다. 레닌이 말했다시피 무식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좀 유식하게 살자.

2020-05-10

건담과 혁명

Video games offer cleaner victories. But Gundam’s appeal is about more than the drama of battle. Wong appreciates the “more boring” storylines about interplanetary diplomacy. His current favourite iteration of the Gundam cartoons “Iron-Blooded Orphans” begins on Mars, where a 300-year-old colony is seeking independence from Earth. The corrupt adult leaders force children to fight. The youngsters are “soldiers born out of the Earth sphere’s oppressive rule,” explains the fictional leader of the Mars independence movement: “They embody the problems burdening each one of us.” Although Wong denies that he wants Hong Kong to be independent – he argues for greater autonomy and democracy – the parallels are clear. He is amused by the story’s conclusion: the heroes are defeated, but the vanquishing regime adopts democratic reform anyway.

(...) Wong knows that his battles will persist – and that victory poses dangers too. He uses “Iron-Blooded Orphans” as an example to warn activist friends of the challenges they’ll face even if their cause eventually prevails. The youngsters on Mars win many battles but when they achieve power they struggle with how to administer their affairs: “There’s a lot of internal conflict.”

Caroline Carter, Simon Cox, "Gaming with Joshua Wong", 1843 Magazine, 2020년 6·7월호
스노든이 역사적인 폭로를 감행할 때 머릿속에 어떤 게임 캐릭터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산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은 '기동전사 건담 철혈의 오펀스'를 현재 탐닉중이라고. 내면이 흔들릴 때 건담을 생각하는, 홍콩과 인류의 민주주의 영웅.

2020-05-09

[노정태의 시사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정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아무튼, 주말] 노자의 '도덕경'과 보수정치
일러스트 = 안병현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 일명 '곤마리'가 출연한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제목이다. 독자 여러분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체구의 일본 여성이 미국의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나긋나긋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한다. 일단 가진 걸 모두 꺼내어 쌓아놓은 후,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엄격한 순서가 있다. 옷,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일단 몽땅 꺼내서 쌓아놓는다. '내가 이렇게나 짐이 많았어!'라고 경악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판단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이 핵심이다. 옷이건 책이건 옛날에 찍은 사진이건,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설레면 잘 정리해서 간직하고, 설레지 않으면 물건에 '고마웠어'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버린다.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쌓여 있던 과거와 선을 긋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걸까? 일본인은 좁은 집에 산다. 정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반면 넓은 집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의 경우 정리를 하지 않아도 대충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설레는' 것만 남겨야 하는 어떤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곤도 마리에의 주장은 그렇게 철학적 맥락을 띠게 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노자 철학의 일부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도덕경'의 11장을 펼쳐보자.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꽂혀 있으니, 바퀴통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어도 방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의 쓸모 덕분이다. 있음과 없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관계가 순환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노자 철학의 핵심 대목 중 하나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동아시아인들은 이 논의에 너무도 친숙하다. 많은 경우 이것을 철학적 논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하다. 하지만 곤도 마리에가 찾아가는 미국인들, 심지어 넷플릭스로 지켜보는 모든 이는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 가족이 사는 집, 각자 눕는 방, 심지어 자주 안 쓰는 물건을 치우는 창고까지도, 꽉 차 있으면 쓸모를 잃어버린다. 비어 있어야 쓸모가 생긴다. 더 좋은 삶과 경험을 채워넣으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는 가족이 살아가는 집보다 더 큰 단위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4월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후에도 끝날 기미가 없는 미래통합당의 내부 분열 및 의기양양한 청와대와 여당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다.
보수 정치라는 집구석에 쌓여 있는 것들을 곤도 마리에식 정리법에 따라 살펴보자. 옷. 새로 맞춘 핑크색 옷이 한가득 쌓여 있다. 설레는가? 그럴 리가. 책과 서류는 어떨까. 오랜 집권 경험을 지닌 거대 정당으로서 막대한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차고 넘친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된 바 없다. 쌓여만 있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품들은? 선거를 앞두고 '잔재주'를 부릴 법한 시점이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수 정치라는 집은 있긴 한데 쓸모가 없는 것들로 꽉 차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늑하기는커녕 퀴퀴하고 답답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추억의 물건을 살펴볼 차례다. 돌이켜보면 나쁜 것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당시, 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하여 내놓았던 일련의 정책들을 생각해보자. 이명박 정권의 여러 과오와는 별도로 오늘날까지도 참고할 만한 지점이 있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도 모든 게 잘못되지는 않았다.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공무원 연금 개혁의 화두를 제시한 정치적 용기만큼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치적 위험을 무릅쓸 수 없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이, 친박 양대 계파는 자신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상징적 자본을 쇄신하지 않았다. 탄핵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보수 정치는 설레지 않는 것들을 잔뜩 끌어안고 버티고만 있었다. 결국 국민이 보수를 통째로 내다 버리고 만 것이다.
여당과 청와대 역시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북한 깜짝쇼 따위 집어치우고, 국가에 필요한 인기 없는 정책을 펴나가야만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미래를 위한 노동 개혁이 절실하다. 21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정권이 슈뢰더 총리의 지도하에 감행한 하르츠 개혁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문제다.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에게만 유리한 노동 구도를 타파하여, 상위 20%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하위 80%를 좀 더 폭넓게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온 국민이 창의적으로 일자리를 오가고 만들어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벌어질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형에서 한국이 국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마련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의지가 없다. 대통령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국회 의석도 3분의 2나 되는데 뭐가 두려워서 할 일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쓰지도 않을 것을 모아만 놓는 이들을 '호더(hoarder)'라 부른다. '지지율 호더', 문재인의 지금 모습 아닌가. 지지율은 정책으로 환산되어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 경제가 무너지면 지지율도 의미가 없다. 김영삼은 지지율 90%를 넘긴 적도 있지만 정권 교체를 피하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된 첫 주말이다. 나들이 길에 나서는 건 성급할 수 있다. 나는 집 정리를 할 계획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를 털고, 안 쓰는 물건들을 내다 버릴 것이다. 그래야 뒤늦게 찾아온 봄을 신선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청소를 하는 동안 우리의 정치권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벌어지기를 바란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국민을 설레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다버린 후, 진짜 설레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이제 과거와 작별해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설레지 않다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보내주자.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 2020년 5월 9일자 조선일보 주말판 게재.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8/2020050802565.html
* 참고: 기사에 포함된 일러스트는 이 게시물의 사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ㅎㅎ

2020-05-05

Planet of the Humans (1)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Planet of the Humans’를 방금 다 보았다. 아무렇게나 순서 없이 일단 적어놓는 감상.

미국 민주당 계열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빌 매키번, ‘지구가 아프다 다큐’로 뭔가 큰 상도 받았던 미국 전직 부통령 앨 고어, 민주당 대선 주자로 경선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쓰고 그만둔 마이클 블룸버그 등, 쟁쟁한 인물들.

그들이 어떻게

  1. Green energy라는 구호를 내걸고 돈벌이를 하고 있는지,
  2. 자신들이 내세우는 구호와 biofuel(나무 썰어서 폐 타이어 등과 태우는 것)의 괴리를 얼버무리는지 
  3. 그 결과 지구가 어떻게 더 망가져가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충격적인 작품.

나도 한때 열심히 follow up했던 350.org 같은 조직이,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엑손 모빌이나 도요타 같은 기존 화석연료 업계의 후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큐를 다 보고 나면 놀랍지도 않은 수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제프 깁스(Jeff Gibbs)는 어린 시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시에라 클럽의 맴버로서 열심히 활동해온 열혈 환경운동가.

그가 환경운동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당신들 바이오매스에 찬성하냐’고 물을 때, 다들 해맑게 ‘절대 안되지 우리는 친환경인걸!’ 하는 모습은 정말 가슴아프다.

가장 황당하고 꼴같잖은 장면. 우리는 흔히 가운데 탑이 있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기가 100% 태양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아침 시동을 걸기 위해 가스발전기를 같이 설치한다고. (감독이 인터뷰한 환경 과학자는 그것을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면 커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농담하기도.)

풍력발전기도 마찬가지. 태양광/풍력 시설을 늘리면 늘릴수록 가스발전기가 늘어나는 모습이 다큐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환경운동가’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음.

아쉬운 점은 원자력에 대한 언급이, 한번 스쳐가듯 나오지만, 없다는 것. 탄소 배출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공격적으로 탄소 포집을 하려면 결국 답은 원자력 뿐이다.

아직 한국어 자막이 없는데, 영어 자막을 켜놓고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꼭 봐야 할 2020년 최고의 문제작.


2020-04-19

주류 교체? 꼰대 교체!

이번 총선을 ‘주류 교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꼰대 교체’가 더 맞는 표현입니다. 왜 꼰대냐고요? 말이 안 통하니까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시죠. 1992년 총선,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습니다. 지역감정을 유발시켜서 총선에서 이겨먹겠다는 내용이 담긴 녹음 테이프가 공개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습니까? 민주자유당이 이겼죠. 왜냐? ‘우리편’이니까 옳건 그르건 찍어준다는 꼰대들 덕분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황운하, 김남국, 최강욱, 이런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울산선거 청와대 개입 사건이라던가, 팟캐스트 여성 모욕 발언이라던가, 이런 게 국민들에게 다 알려진 상태에서도 그렇습니다. 왜일까요? 올드 꼰대들이 주춤한 사이, 뉴 꼰대들이 묻지마 투표를 해서 아니겠습니까?

왕년의 꼰대들에게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빨갱이들은 안 돼, 김대중이는 안 돼, 뭐 그런 것 말이죠. 그들은 그런 소리를 찍찍 내뱉고는 다짜고짜 1번을 찍으러 갔습니다.

지금의 꼰대들과 다를 게 없죠. 새누리당은 안 돼, 쟤들은 수꼴이니까 안 돼, 안철수도 안 돼고 심상정도 안 돼고 다 안 돼, 아 몰라 나는 청와대가 선거개입했다는 증거가 수두룩해도 문재인한테 힘을 실어줄 테야…

한심스러운 상황입니다. 어째 나라 수준이 1992년과 다를 바 없을까요. 황운하가 국회의원 당선되는 2020년이, 정형근이 국회의원 당선되던 1996년과,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런지요.

불과 5년 전만 해도 저는 제가 이런 세상에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힘을 가지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줄 알았죠.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최근 뼈저리게 배워나가는 중입니다. 그래도 웃으며, 힘내서 살아봅시다.

2020-04-18

인류를 위한 일회용품

가령, 한 여고생은 플라스틱 빨대에 대한 문제를 인식했지만, 같은 반의 친구들 중 같은 문제를 인식한 친구는 없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E-Participation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 통해 사실은 플라스틱 빨대를 만드는 기업들이 2~30년 전까지만 해도 단순 이익을 창출하려는 기업가가 아니라 소셜 기업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B형 간염의 바이러스가 대만의 큰 고민거리였고 ,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플라스틱 식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사라졌고, 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강현숙, 오주영, "[인터뷰] 대만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 (2)", 2020년 4월 10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뉴노멀’이 도래했다는 말에 나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뉴’도 아니고 ‘노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최근 수십년간이 비정상이었을 따름이다.

투표장에서 비닐장갑을 나눠주는 것이 환경오염이라고 근심하던 분들이라던가, 스타벅스의 종이 빨대(주여…)라던가, 온갖 이슈들 속에서 문득 이런 인터뷰를 보게 되어, 재미있어서 적어두고 혼자 보기 아까워서 블로그에도 올린다.

오드리 탕: 공무원의 역할

우선 공무원이 책임져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확실성이다. 상수도와 인터넷이 끊김없이 제공되도록 하는 것도 확실성이다. 두번째는 정의와 균등함이다. 모두는 균등한 기회를 가져야 하며 사회정의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한다. 세번째는 민주주의 의지에 대한 반영이다.

공무원의 역할은 민주주의 의지의 변화에 따라 함께 바뀔 것이다. 10년 뒤에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대신 해주길 바라는 대신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적인 행동을 할 것이며 더이상 디지털 장관 같은 역할이 필요없게 될 수도 있다.

또한 머신러닝과 자동화 등이 공무원들이 하는 업무 중 ‘확실성’과 관련된 업무들을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10년 후 공무원의 역할은 공공의 가치를 찾아 사회정의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가치를 구성원들이 찾아내고 관련 규범을 만드는 데는 인간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역할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강현숙, 오주영, "[인터뷰] 대만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 (3)", 2020년 4월 10일.

‘디지털 시대와 공무원의 역할’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축에 속한다.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며 왜 해야 하는가? 기술 발전에 따라 그 일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며 어떤 식으로 존속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품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2020-04-16

아직 개표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2004년 총선, 노회찬이 소수점 차이로 김종필을 꺾고 국회에 입성했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민주노동당이 급성장하여, 마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버럴 파티를 압도하고 보수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는 미래를 꿈꿨다.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아무리 원숙했다한들, 정의당이 된 민주노동당이 NL 주사파 주류가 떼어준다고 꼬여낸 비례 의석 몇 개에 눈이 팔려, 원칙이고 뭐고 다 갖다바치며 공수처같은 악법에 동의할줄은 몰랐을 것이다.

개표 결과가 최종적으로 어찌되건, 이미 내 피는 식었다. 내가 현실 정치에서 희망을 보던 나날은 여기서 마무리되는 듯하다.

2020-04-13

중국 자본주의와 코로나 19

2003년 사스도 그렇고 이번 바이러스 대란은 중국이 무책임한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이미 경제적 기반이 있는 부농들이 일반적인 농업을 선점하자 빈농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 대책으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아무 생각 없이, 현존하는 모든 동식물을 천연자원으로 간주하여 채집 수렵 매매를 원천적으로 허가합니다.

그래서 특히 내륙의 밀림과 맞닿은 우한시 등이 야생동물 밀렵(도 아니죠 사실) 거래의 천국이 되었고 야생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온 겁니다.

이건 제 뇌피셜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 학자를 인터뷰한 미국 언론 Vox의 보도 내용입니다.

"How wildlife trade is linked to coronavirus", Vox, 2020년 3월 6일.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처럼, 야생동물 밀렵을 금지하고 매매를 엄금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10여년 단위로 새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은 없었겠지요. 공산주의를 빙자한 극단적 자본주의의 인류적 민폐라고 봅니다.

좋은 시장경제, 바람직한 시장경제라면 시장에서 매매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후자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는 양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냥 돈이면 다 되는 아수라장인 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이런 위험을 안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아무거나 영리활동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니, 온갖 야생동물을 잡아서 비위생적으로 유통하는 시장이 생겨버린 겁니다.

저는 이번 판데믹의 전개를 보며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회복 능력'의 대립 구도를 상정하는 논의가 매우 불편합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건 2년 후면 인류 전체 인구의 60%가 감염되면서 끝납니다. 스페인 독감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 경우도, 최악이라 해도, 그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지배할 것이고, 인류는 화석 연료를 활활 태울 것이며,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바이러스 앞에 죽어나가는 선진국 시민들'을 보면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끼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정리해보겠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자연의 복수가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은 중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 잘 제어되는 시장질서와 경제 윤리, 그리고 원시림과 야생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 하는 '서구적 자연 관리' 개념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2020-04-12

21대 총선 과정에서 확인된 몇 가지

  • ‘소수 정당을 우대하는 제도’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도 결국 정치 지형은 정치인과 유권자가 만든다.
  • 우리가 잊고 있던, 단순다수대표제에 기반을 둔 소선거구제의 장점.
    1.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유권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2.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후보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3. 유권자에게 ‘저 인간 떨어뜨리기’의 권리가 주어진다. 반면, 비례대표제의 경우, 유권자는 무슨 수를 써도 타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떨어뜨릴 수 없다.
  • 애초에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촉진하는 제도’가 왜 필요한지부터 물어봐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왜 당위적 선으로 여겨지는가? 어차피 국회에 보내놓으면 거대 여당/야당 따까리 짓이나 하는데?
  • 소선거구제이며 비례대표 따위 없는 영국의 정치.
    • 한국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 UKIP이나 스코틀랜드 국민당 같은 소수 정당이 출현하여, 대중을 설득하고, 민심을 움직여, 소선거구제를 뚫고 의석을 얻어낸다.
    • 그 역동적 과정 속에서 영국은 새로운 정치적 의제와 대립 구도를 얻었다(그 의제가 좋은 의제라는 뜻은 결코 아님).
  • 반면 한국은, 제도만 신나게 뜯어고쳤지, 5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대립 구도 속에서, 현재의 국면에 걸맞는 정치적 의제를 내놓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
  •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하지 않는가? 왜 ‘제도’ 탓이나 하는가?
  • 이것은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2020-04-06

2000년대 초, 인터넷과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촬영자와 모델의 갑을 관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전문가이든 아마추어 동호회원이든 ‘촬영을 거부한 모델’이라는 소문이 나면 사진 업계에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관계를 악용해 모델을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비공개 촬영회가 2000년대 초반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게 곽씨의 증언이다.

허정헌, ‘모델이 신었던 스타킹 나눠 드려요’ 도 넘은 촬영회, 한국일보, 2018년 5월 21일. 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805211066365076

2000년대 초반. 디씨 부흥기. 월드컵 하고 세상 다 ‘우리 거’라고 믿던 때. 페미니즘이 여성만이 아닌 ‘모두’의 것이던 시절.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장관을 ‘흑미추녀’ 같은 식으로 조롱하는 영상을 만들고 유포해도 ‘진보적’으로 괜찮다고 여겨지던 시절. 여자니까 박근혜를 지지할 수도 있다던 최보은을 김규항이 두들겨 패놓은 탓에, ‘젖녀오크’ 같은 언어 성폭력에 감히 반발하지 못하던 시절. 다함께 여혐하던 시절.

발기탱천한 진보남들의 부랄발광에 여성들이 장단맞춰주고 남성적 언어의 외피를 둘러쓰고 같이 놀았던, 혹은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 그게 존나 쿨한 줄 알았던 시절. ‘우리’가 이 시점에 ‘힘을 몰아주지’ 않으면 수꼴들이 부활한다는 협박이 날아오던, 그런 시절에 만들어진 여혐 템플릿들.

우파 남자들은 국가의 개입이 싫지만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라서, 좌파 남자들은 시장주의가 싫지만 가난한 여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라면서, 성매매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이대 부르주아 꼴페미’를 욕하던 시절. 성매매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좌파 남자’들이 진보 사이트에서 히죽대던 시절.

* 일러두기: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기록 및 공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예전에 썼던 트윗 타래를 블로그에 적어둡니다.

2020-04-05

코로나의 불똥?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귀환하고 있다

지난 3월 16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대국민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불필요한 이동과 사회적 접촉을 삼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연거푸 전달한 그에게 한 기자가 던진 질문.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의 국경은 과연 잘 통제될 수 있겠습니까?’

CNN으로 그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국경 문제, 이른바 ‘백스톱’은, 브렉시트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에 반대하는 다수의 영국 언론은 검문소와 담장 등 물리적 국경을 세워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영국의 국경은 튼튼한가’를 묻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코로나-19가 뒤집어놓은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민국가(nation state)가 귀환하고 있다. 불과 몇 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국경 없는 세계주의’를 선으로, ‘자국 중심주의’를 악으로 단정짓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중국에서 바이러스 확산이 본격화되고 있음에도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도덕관념에 기댄 것이기도 했다.

지난달 11일 슬로베니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에서 의료진이 운전자의 체온을 측정하고 있다. 이날 슬로베니아 정부는 이탈리아와의 국경을 차단한다고 발표했다./게티이미지

하지만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어도 바이러스 대응에는 국경이 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외교 논평가인 기드온 라흐만(Gideon Rachman)이 지적한 바에 따르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여분간 이어진 대국민 연설에서 단 한 번도 유럽연합(EU)을 언급하지 않았다. 독일은 EU를 주도하고 있는 나라다. 그런 독일마저 코로나-19 앞에서 오직 독일 자신만을 챙기는 중이다.

EU는 미국처럼 내전을 치러가며 국방, 치안, 행정 등을 통합하는 대신 그저 같은 화폐를 쓰고 인구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만으로 연방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이상주의적 기획이었다. 좋을 때는 좋았지만 힘든 시절이 오니 어림도 없다. <포린 폴리시>의 보도에 따르면, 3월 현재 이탈리아의 발병 건수가 중국을 넘어서고, 성당마다 시신이 넘쳐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EU 회원국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EU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다.

초국가적 공동체의 이상이 무너지고 나니 국민국가의 모습과 개성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앞서 말했듯 독일은 위기가 닥쳐오자 감정을 배제하고 국민의 60% 이상이 감염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질병과의 총력전에 나섰다. 흔히 프랑스를 ‘시위할 때 자동차를 불태우는 나라’, ‘왕의 목을 자른 나라’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자 마크롱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대국민담화를 통해 친구들과 만나 파티를 벌이는 국민, 특히 청년들을 꾸짖었다. 부르봉 왕가와 나폴레옹, 드골을 거쳐 오늘날까지 권위주의적 중앙집권의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국가가 아닌 도시나 마을 단위로 귀속감을 느낀다. 최근 화제를 끌었던, 한 이탈리아 시장이 시민들을 향해 조깅하지 말고 개 산책시키지 말라고 화내는 영상을 떠올려보자.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노 과레스키의 돈 까밀로와 뻬뽀네(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시리즈가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가톨릭 신부와 공산주의자 시장의 힘싸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연방국가로서 미국이 가지고 있는 특성 또한 이번 일을 통해 도드라졌다. 지난 3월 27일, 지나 레이몬도 로드아일랜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배치해 뉴욕주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을 멈춰세우고 격리 조치에 대해 상기시켰던 것이다. 미국은 각 주가 무장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연방국가이며, 남북전쟁을 통해 무력으로 그 틀을 지켜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힘은 표준화와 대량생산에 있다. 그 DNA는 사라지지 않았다. 청와대와 일부 언론은 한국의 코로나-19 검사 속도를 소위 ‘국뽕’의 소재로 삼아왔다. 이는 민간 기업이 신속하게 내놓은 5종의 키트를 임상병리사들이 수작업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내는 결과다. 반면 미국은 3월 31일 현재 자동화된 과정을 통해 엄청난 속도와 정확도로 코로나-19 확진 여부를 검사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포드 모델 T처럼 전차를 찍어내고, 돛단배나 요트처럼 군함을 띄우던 저력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은, 마치 처칠의 그 유명한 연설처럼,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것이 ‘피와 땀과 눈물’뿐임을 천명하고 단결과 희생을 호소하는 중이다. 기자회견장에서 보리스 존슨이 보좌관들과 설명한 바, 코로나 사망자는 세 종류다. 건강한데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경우, 기저질환이 있고 코로나 때문에 죽는 경우, 의료 과부하로 치료를 못 받아 다른 병이나 사고로 죽는 경우. 코로나-19의 치료제가 없는 현실 속에서 병원에 온다 한들 첫째 경우는 공공의료체계 NHS가 해줄 일이 없다. 아파도 집에서 참아야 한다. 그래야 세 번째에 해당하는, 대구 17세 소년 같은 환자가 제때 필요한 진료를 받을 수 있다. 집에 있자, NHS를 지키자, 생명을 구하자. 본인도 확진자가 된 후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존슨 총리는 본의 아니게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바이러스의 대공습 앞에 국제주의와 탈국가주의의 이상은 온데간데없이, 각국이 뿔뿔이 흩어져 대응하는 경향이 도드라진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수석 경제평론가 마틴 울프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에 ‘윤리적 과제’를 던진다고 이야기한다. 앞서 언급한 기드온 라흐만은 이 사태로 인해 극우 민족주의자와 극좌 환경주의자라는 양 극단이 기승을 부리게 될지 우려한다.

하지만 대만처럼 선제적으로 중국발 입국을 차단한 뉴질랜드는 노동당 출신의 1980년생 여성 총리 저신다 아던의 지휘 하에 사망자를 한 자릿수로 묶어두고 있다. 2015년 완전한 남녀동수 내각을 출범하며 세계인을 놀라게 했던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 또한 해외 입국을 차단한 상태다. 차이잉원 대만 총리의 진보적 성향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진보 정권들이 선제적으로 자국민 보호에 앞장서고 있다. 국민국가를 절대악도 필요악도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코로나-19가 퍼지기 이전 세상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걸맞는 삶의 조건과 윤리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조선닷컴 | 입력 2020.04.04 12:0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3/2020040303118.html

2020-04-04

코로나 바이러스와 페미니즘의 위기

COVID-19 사태는 여성주의와 그 성과마저 위협하고 있다. 재택근무 혹은 자가격리가 일상화되면서 당연하다는 듯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떠안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외신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지만 아시아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8일 재택근무와 함께 가사노동·자녀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어린이집과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특히 일하는 여성의 육아 고충이 커지고 있다. 성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가연, “”코로나 때문에 일이 두배” 육아·가사노동에 피로 호소하는 여성들”, 아시아경제, 2020년 3월 10일. https://www.asiae.co.kr/article/2020031009205389640

이는 단지 집에서 밥을 더 자주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이 여성에게 편중되게 떠넘겨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경우 SNS를 통해 재택근무중인 여성들을 상대로 ‘남자를 위한 직장의 꽃’ 역할까지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가 빈축을 산 바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여성부는 앞서 이동제한령에 따른 봉쇄 기간 중 아내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들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현재 삭제된 게시물에서 여성부는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여성들이 집에서도 편하게 입기보다는 옷을 단정히 입고, 화장도 하라고 권했다. 평상복 차림의 여성 그림에는 금지 표시를 하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PC작업을 하는 여성을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여성들이 가사일에 도움이 필요할 때 ‘비꼬는’ 태도를 남편에게 취하지 말라고도 했다.

조재희, “”아내들, 잔소리말고 화장해라”가 봉쇄 기간 정부 지침?”, 조선일보, 2020년 4월 1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1/2020040101974.html
/말레이시아여성부 인스타그램·호주 ABC | 조선일보 기사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경제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추구한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라는 명분 하에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아무런 사전적 사후적 제약 없이,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할 권리
  2. 여성이 직장에서 일함에 있어서 소위 ‘여성적인 역할’에 묶이거나 그러한 역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보다 근본적인 문제 또한 발생하는 중이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시행된 주말, 영국의 가정폭력 상담 핫라인에 걸려오는 학대 신고 건수가 65% 증가했다. BBC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살고 있던 여성이,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된 경우도 보도한다. 여성의 경제적 생활과 권리 이전에 직접적인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은 COVID-19가 최초로 터져나온 중국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마치 그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처럼) ‘우리가 코로나 대응을 정말 잘한다 최고다’ 따위 프로파간다에 매진했는데, 그 주요 소재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동원되어 왔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 헌신하기 위해 삭발한 간호사의 눈물겨운 사연이라던가, 뭐 그딴 것들. 인터넷의 반응을 살펴보면 일부 한국인들은 그런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여성의 신체를 정권 홍보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위챗 기사가 1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올린 후 검열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중국의 의료 현장에서 여성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홍보를 위한 성적 이미지의 대상으로 착취당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들보다 더 열등한 급식을 받아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한 바 있다.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여성을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대상화하고, 뜯어먹는 것이다.

The propagandists’ portrayals of women during the epidemic—as self-sacrificing, brave or beautiful—“basically all follow the playbook”, says Zoe, the blogger. But she was surprised to see a state-run charity follow the volunteers’ lead and donate sanitary pads. People’s Daily has condemned “feudal” attitudes to menstruation and eulogies to “extreme behaviour” such as returning to work right after a miscarriage. Only fierce and widespread anger, she reasons, could have spurred the party’s mouthpiece to say such things.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https://www.economist.com/china/2020/03/07/covid-19-has-revealed-widespread-sexism-in-china

아직 사태가 종식되려면 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잠잠해진다 해도 언제 다시 발병자가 솟구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러한 재앙을 기회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권력의 움직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2020-03-31

무기력증을 치료하는 기적의 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서 먹다가 만 건강보조제 말이다. 글루코사민이 됐건 밀크시슬이 됐건 비타민 ABCDEFG가 됐건 오메가 3가 됐건, 그냥 그거. 그게 무기력증에 정말 효과가 있다.

몇 알 먹다가 까먹거나 방치하고 있는 그 알약을,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 무기력증이 치료된다. 단, 끝까지 먹어야 한다. 한꺼번에 다 먹어치워도 안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데’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 쌓여 있으면 사람은 무기력해지기 때문이다.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 뭔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하려니 너무 사소하고 시시한 일 같아서 안 하게 된다. 안 하면 안 하는 일이 쌓이고, ‘해야지 해야지’가 되어서, 정작 아무것도 못 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므로 ‘사놓고 안 먹는 건강보조제’가 마법의 알약인 것이다. 그냥 내버려두고 있으면 우리의 정신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반대로 차근차근 먹어치우면 아주 작고 시시하지만 성취감이 생긴다. 그 성취감이, 특히 요즘처럼 사람들이 하염없이 집에 갇혀 보내는 시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나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다. 뭐였더라, 빈 통을 버린 다음 아예 까먹어버려서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사놓고 안 먹던 어떤 무의미한 알약을 매일밤 하나씩 해서 다 먹었다. 그랬더니 문득, 화장실에 걸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샀지만 설치 안 하던 수건걸이도 설치했고, 나사못이 빠져 기울어져 있던 천장 등도 5분만에 뚝딱 고쳤다.

이제는 역시 사놓고 안 먹던, 300알 넘게 들어있는 묵직한 종합비타민제를 비우는 중이다. 매일 밤, 자기 전, 하나씩. 이걸 먹고 내 컨디션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비타민의 힘이 아니다. 작지만 뭔가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긍정적인 활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이럴 때일수록 뭐라도 해야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나서 내 경험을 적어보았다. 읽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2020-03-28

스페인 독감은 인도 인구의 6%를 희생시켰다

So covid-19 could soon be all over poor countries. And their health-care systems are in no position to cope. Many cannot deal with the infectious diseases they already know, let alone a new and highly contagious one. Health spending per head in Pakistan is one two-hundredth the level in America. Uganda has more government ministers than intensive-care beds. Throughout history, the poor have been hardest-hit by pandemics. Most people who die of AIDS are African. *The Spanish flu wiped out 6% of India’s entire population.*

“The coronavirus could devastate poor countries”, The Economist, 2020년 3월 26일. https://www.economist.com/leaders/2020/03/26/covid-19-could-devastate-poor-countries

2020-03-27

n번방과 텔레그램, 기술과 선악의 문제

특정 기술의 기반 위에서 발생하는 악을, 기술 자체의 선악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트코인도, 텔레그램도, 기술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이번 사안에서는 그렇다.

텔레그램이 특정 국가의 ‘범죄 수사’ 목적에 따라 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하면, 러시아 정부가 추적하는 반체제인사와 성소수자 및 인권 운동가, 대륙 중국과 홍콩의 반 시진핑 운동가들 등의 신변이 모두 위험해진다.

n번방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악이지만, 반 시진핑 반 푸틴 운동가들은 정의의 편이니까, 다른 케이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발화자는 텔레그램이라는 일개 인터넷 메신저 서비스의 운영진에게,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결정할 권한을 주는 셈이 되어버린다.

n번방에 관여한 개자식들은 모두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 일벌백계가 아니라 백벌백계가 답이다. 그런데 그게 텔레그램의 잘못인가? 지금은 그 이용자들이 또 다른, 기밀성이 보장되는 메신저 혹은 딥웹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럼 그건 또 그 서비스의 잘못인가?

이 사안을 두고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시민사회적 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의아하다. 이것은 경제적, 정서적으로 취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다. 성범죄는 성범죄로 다뤄야 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SNS 사용을 금지 혹은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21세기다보니 기초적인 학교 과제를 위해 다들 구글 계정은 가지고 있고, 구글 문서 등을 이용해 숙제를 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공유 구글 문서를 만들어 채팅창으로 활용하고, 당연히, 그 공간에서 사이버불링도 죽어라고 한다.

그럼 이게 구글 탓인가? 구글이 모든 사용자의 모든 문서 사용 내역을 조회하여, 사이버불링이 발생할 경우 신고해야 하나? 당신들이, 혹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텔레그램 탈퇴 선언’ 등을 종종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서구 문명’의 일부인) 기술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전시하며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향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쉬워보이는’ 답은 있다. 신기술에 손가락질을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런 ‘쉬워보이는’ 답을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2020-03-25

유발 하라리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찬양하지 않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하긴 했다. 하지만 한국'만'을 논한 것도 아니고, 예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Financial Times에 기고한 칼럼 중 한국이 등장하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자.

Asking people to choose between privacy and health is, in fact, the very root of the problem. Because this is a false choice. We can and should enjoy both privacy and health. We can choose to protect our health and stop the coronavirus epidemic not by instituting totalitarian surveillance regimes, but rather by empowering citizens. In recent weeks, some of the most successful efforts to contain the coronavirus epidemic were orchestrated by South Korea, Taiwan and Singapore. While these countries have made some use of tracking applications, they have relied far more on extensive testing, on honest reporting, and on the willing co-operation of a well-informed public.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 Free to read”, Financial Times, 2020년 3월 20일. https://www.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한국, 대만, 싱가포르가 공히 거론되고 있다. 또한 이 세 나라 모두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국민들의 동선을 추적하였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대륙 중국과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인권을 존중하며 검역 및 격리 절차 등을 수행하므로,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내용을 한국 언론은 이런 식으로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반면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시민들의 협조로 감염 확산을 저지한 성공적인 사례로는 한국을 들었다. 하라리 교수는 “한국은 일부 접촉자 추적시스템을 이용하긴 했지만, 광범위한 검사와 투명한 보고, 정보를 잘 습득한 대중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박형기, 박혜연, 박병진, “유발 하라리-폴 크루그먼 등 세계적 석학 “한국 배워라””, 뉴스1, 2020년 3월 22일. https://news.v.daum.net/v/20200322120107853

이것은 의도적인 왜곡 보도의 사례로 기록되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한국인들의 국뽕을 충족시켜주며 밥벌이를 하는 ‘영국남자’ 같은 캐릭터가 아니다. 왜 우리의 언론은 멀쩡한 한 사람의 학자를 한국에서 국뽕 장사하는 외국인 유튜버 수준으로 전락시키는가.

통탄할 노릇이다. 이번 COVID-19 감염증 사태로 인해, 한국 언론의 수준이 점점 더 깊게 곪아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2020-03-24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배우는 이유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코로나 대응’에서 배울 게 없는 나라도 있다.

대만, 뉴질랜드 등이 그렇다.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차단하고, 귀국하는 자국민의 건강 관리와 동선 추적을 제대로 해낸 그 나라들은, 미국이나 유럽 입장에서 볼 때 배울 게 없다. 걸리지도 않은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지금처럼 100명 넘는 사망자에 8천여 명의 감염자가 나오도록 사태를 키우지 않았다면, ‘세계가 보고 배우는’ COVID-19 대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 것. 돌아가야 할 사회 기반이 제대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아무 일 없는 일상’을 지켜주는 것.

반대로 기업은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해결책을 팔아먹는 집단이다. 멀쩡히 다들 3.5파이 이어폰 잘 쓰고 있는데, 애플에서 ‘유선 이어폰은 적폐다’라고 손가락질하더니, 이어폰 구멍을 없애고 ‘혁신적’인 에어팟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한국 정부의 COVID-19 대응은, 국가로서 수준 미달이다. 없어도 되는 문제를 키우거나, 문제가 커지도록 방치한 후, 허둥지둥 처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걸 외국에서 참고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정말 좋은 나라, 국민을 진정 보호하는 나라는, 그런 문제가 아예 생기도록 하지 않는 나라다. 대만이나 뉴질랜드처럼.

2020-03-21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는 진짜 이유

간단하다. 외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다.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는 진짜 이유는 그러므로, 그 언론이 자리잡고 있는 국가의 방역을 비판하기 위한, 헐리우드 액션이다.

마치 '엄친아'와 '엄친딸'이 완벽한 존재인 것과 비슷하다. 엄마 친구의 아들 딸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애여서가 아니라, 내 새끼 잘 되라고 혼내기 위해 엄마들은 자기 친구의 아들 딸을 세상 최고의 모범생이자 효자 효녀인 것처럼 칭찬한다.

외국 언론의 기사에서 한국이 바로 그 '옆집 걔'다. 외국 언론은 우리가 실제로 어떤 나라인지 진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실제로 진심어린 예찬을 보내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한국 언론은 왜 이렇게 '해외 언론이 한국 방역에 깜짝 놀라 엄지척을 했다'에 집착하는 걸까? 상대적으로 언론으로서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방역 대책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런 문제가 현장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취재하는 대신, '국뽕팔이'에 도움이 될 요소들을 긁어서 국민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국내 언론에 소개되는 '해외 언론의 찬사'를 보면, 한국 언론의 수준에 화가 난다.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동시에 정부를 제대로 비판하여 보다 나은 방향으로 견인해야 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러나 지금 언론이 하는 짓들은 어떤가. 국민을 '나랏님의 멋진 모습' 앞에 따봉 날리는 청맹과니 박수부대로 길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깜짝 놀라' 같은 저질 기사가 계속 나오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선진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반면, 그 나라의 주요 언론을 아무리 뒤져도 한국처럼 이 와중에 이런 재앙을 소재로 국뽕팔이를 하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 나라일수록, 선진국이다.

단적인 비교를 해보자. 뉴욕타임스에 '세계가 깜짝 놀라는 미국의 COVID-19 검사 속도' 같은 기사가 나오나? 안 나온다. 하지만 '한국의 뉴욕타임스'를 지향한다는 수많은 진보 언론은 그딴 기사를 하루가 멀다하고 내보낸다. 그 정도면 모를까, '미국인들은 사재기를 한다네요 우리는 안 하는데~' 같은, 불과 한 달 전의 현실을 까맣게 잊은 듯한 국뽕 기사도 최근 쏟아져 나왔다.

이게 우리의 수준이고, 우리의 현실이다. '세계가 칭찬하는 한국'을 여태까지도 찾아 헤매는, 이 와중에도 그러고 있는, 그게 바로 우리 언론의 수준이고 그래서 우리는 선진국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선진국 되려면 멀었다. 그런 면에서라면, 사회 엘리트의 건강한 정신과 판단과 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우리는 미국과 유럽의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2020-03-19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었다.

'미국, 유럽인들은 왜 사재기를 할까,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한국인들은 안 그러는데?' 같은 소리 하면서 국뽕 빠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우리도 그짓 다 했다.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2월 23일자 기사를 보자.

대량 구매 행렬은 대구에 이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다. 22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의 한 마트에서도 라면, 생수 등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섰다. 같은 날 창원구 진해구의 한 온라인 카페에는 마트 내 유제품 판매대가 텅텅 빈 사진이 올라왔다. 서울 서초구 코스트코 양재점에서도 매장 개점 이후 한 시간 만에 생수 수백 세트가 동났다. 서초구 거주자 박모 씨는 “서울도 이제 사재기 붐이 이는 것 같아 불안하다”고 말했다.

마스크나 생활용품 구매에 수백만 원을 쓰는 경우도 있다. 지난 주말 회원 수가 190만 명에 달하는 네이버 온라인 커뮤니티 ‘파우더룸’에 ‘코로나19 때문에 100만 원을 썼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밖으로) 최대한 안 나갈 수 있도록 비상식량, 비누, 세정제, 마스크, 생활용품 등을 사 놓았더니 100만 원이 넘었다”고 했다. 이에 다른 회원들은 “나는 200만 원을 썼다” “남 일 같지가 않다” 등의 댓글을 남겼다.

실제로 온라인 주문이 최근 눈에 띄게 늘었다. G마켓에 따르면 20일 즉석밥과 라면 매출은 일주일 전인 13일 대비 각각 54%, 80% 늘었다. SSG닷컴에서도 코로나19 확진자가 처음 발생한 1월 20일부터 2월 20일까지 식품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8% 증가했다.

"마트 먹거리 매대 ‘텅텅’…코로나19 확산에 ‘사재기’ 행렬 잇따라", 동아일보, 2020년 2월 23일

다들 좀 최소한의 품위를 갖고 살면 좋겠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다. 불안하면 일단 주변 사람들 보고 따라한다. 주변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러 가면 나도 사러 가야 안 불안하다.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하는 것은 대체로 미국인들이 집이 넓고, 넓은 지역을 점유해서 살기 때문에 한국처럼 모든 것을 온라인 배송으로 해결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즉 '생필품 서플라이' 그 자체가 하나의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 역시 한국처럼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까 마트에 직접 가서 우르르 사고 있을 뿐이다.

그들도 사람이고, 당신도 사람이다. 외국 네티즌들이 한국 약국 앞에 마스크 사겠다고 줄 선 거 보면서 낄낄거리면 기분 좋겠나? 정말이지, 너무도 천박하다.

마트 사재기, 우리도 했다. 한 달도 채 안 된 일이다. 윤리의 많은 부분은 기억력에서 나온다. 기억을 좀 하면서 살자.

2020-03-18

[캠페인] 지금, 세계문학전집을 읽읍시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소설이 아주 잘 팔렸습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프랑스 출판의 기틀을 닦은 가스통 갈리마르 평전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영화와 연극의 관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점령 시기에는 책이 왕이었다. 또한 라디오 파리, BBC와 같은 라디오 방송은 프로그램도 재밌지 않았고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해서 프랑스 사람들은 책을 더욱 즐겨 찾았다. 파리에서나 지방에서 책이 지루함과 박탈감과 우울을 이겨 내는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진 덕분에, 종이 공급이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출판사들은 원만하게 사업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 303-304쪽.

사회 활동의 제약이 있고, 가슴은 답답하고, 불평을 함부로 털어놓으면 신변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 그런 상황. 그럴 때 2차 대전을 겪던 프랑스인들은 소설을 읽었습니다. 두껍고, 재미있고, 검증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말이죠.

21세기의 인류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일전에 Financial Times에서 본 보도에 따르면 COVID-19 발병 이후 중국의 모바일 게임 업체들의 주가가 대폭 올랐다고 합니다. 다들 스마트폰 게임 아니면 유튜브, 혹은 SNS에서 뇌를 벅벅 긁으며 도파민을 쥐어짜거나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에코 체임버에 갇힌 채 답답해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더 일반적인 모습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책이 있으니까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의 책장에도, 괜히 사두고 안 읽는 '세계문학 고전'이 한 두 권 정도는 있을 것입니다. 그걸 읽을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사실 꼭 '세계 문학의 고전'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책보다는 한참 전에 나온 책, 시간의 검증을 버텨낸 책, 그리고 어디에나 흔히 있는 책을 우선 권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책을 읽고 있을 때만은, 지금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두기'가 가능한 그런 책 말이죠. 그럼 당연히 세계문학전집에 속하는 이런저런 소설들이 1순위로 거론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만 줄창 권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사회적으로 거리를 둬서, 그럼 뭐 어쩔 건가요? 아이들은 시간이 남아 PC방에 가고 거기서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어른들은 예수가 아니라 이웃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를 가고 또 집단 감염이 됩니다.

인문주의자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단 하나, 책을 읽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책을 읽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책과의 거리 좁히기' 입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는 식재료를 이번 기회에 털어 먹듯이, 책장 위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는 고전 소설들을 꺼내어, 읽읍시다.

사족) 저는 W. G. 제발트의 책 중 <아우스터리츠>는 두 번, <토성의 고리>는 한 번 읽었는데, <현기증/감정들>은 사놓고 아직 안 봤군요. 지금이 그것을 읽을 때인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각각 나름대로 '아 이거 읽어야지 언젠가'의 리스트를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 언젠가에 적합한 시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입니다.

2020-03-17

도쿄 올림픽,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진다면

나는 도쿄 올림픽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대신 정해진 일정대로 치러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올림픽은 관객 이전에 선수들을 위한 행사다. 선수들은 4년에 한 번 거행되는 이 대회를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진실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정은 지켜져야 한다.
  2. 올림픽을 보는 전 세계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올림픽 일정은 지켜지는 편이 낫다. 우리가 비록 약 100여년만에 전 세계적인 유행병과 싸우고 있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다는 긍정적 모티베이션을 전달할 수 있다.
  3. 세계 경제의 침체를 막기 위해서도 올림픽은 일정대로 치러지는 편이 낫다. 올림픽은 단지 스포츠 행사일 뿐 아니라 방송, 광고, 기타 비즈니스가 결부된 거대한 경제 이벤트다. 이것이 미뤄진다면 안그래도 휘청이는 세계 경제에 좋지 않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방지를 위해서는 올림픽처럼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밀접하게 모여앉아 열광하고 환호하고 끌어안는 행사를 안 하는 게 좋다. 그럼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100% 무관중 올림픽이 답일 수 있다. 단 한 명의 현장 관객 없이 경기를 치르는 것이다.

스포츠 중계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은 위기지만 동시에 큰 기회일 수 있다. 카메라 및 기타 장비와 스탭이 관중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며, 관중에게 보이더라도 최대한 덜 보여야 한다는, 스포츠 중계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핵심적인 장애물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해보자. 지금 축구 중계에 관중석이 없다면? 그래서 스탭들이 원하는대로 영상을 찍고 뽑아낼 수 있다면?

수십개의 드론을 동원할 수도 있고,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크레인을 배치할 수도 있고, 아무튼 지금까지 차마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다양한 각도와 기법을 동원한 촬영이 가능해진다. 현장 중계지만 마치 각본을 가지고 찍은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편집하여 송출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올림픽을 완전한 미디어 스펙터클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선수들은 자신들의 기량을 드러내어 겨룰 온전한 기회를 얻고, 주최국과 IOC는 비즈니스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선수와 스텝, 방송 등 인원 전부를 합쳐봐야 1만명도 되지 않는다. 이들이 감염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올림픽에 참여시키고 귀국시키는 것은 일본 정도의 나라라면 불가능한 일이 전혀 아니다. 일본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은 관중인데, 관중 없이 올림픽을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마라톤 같은 실외 스포츠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든 통제하면 된다. 혹은 마라톤 또한 실내 경기장에서 치름으로써,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최고의 마라톤 스코어'가 어떻게 될지 확인하는 기회를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차피 망상이니까 무슨 말을 못하랴.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이거다. 우리는 COVID-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 전체가 우울증에 걸리는 것 또한 막아야 한다. 무턱대고 때려치우고 안하고 거리두기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성을 유지해주는, 정신적 육체적 활기를 지켜주는 것들은, 동시에 필사적으로 지켜내야 한다.

또한 올림픽이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스포츠 중 상당수가 등장하는 무대에서, 100% 무관중 경기를 '관객'이라는 제약 없이 중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운동인가' 싶을 정도의 영상이 실시간 송출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짜릿하다. 나는 그런 것을 문득 보고 싶어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무턱대고 안하고 때려치우고 집에 틀어박히고 이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뉴노멀'이 닥쳐온다면 그 '뉴노멀'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 '올림픽 취소해라 일본 망해라 아베 좆돼라'라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불현듯 한마디 해 보았다.

덧) 올림픽에 대해서는 여러 고민이 존재한다. 가령 말콤 글래드웰은 '올림픽을 나라 옮겨가면서 하지 말고 어떤 섬 하나를 '올림픽 섬'으로 정해서 4년마다 같은 경기장과 트랙에서 경기를 하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각국에서 올림픽 유치 후 벌어지는, 많은 경우 훗날 쓸모없어지는 대규모 시설 공사가 낭비라는 것이다. 만약 말콤 글래드웰의 주장대로 '올림픽 섬'에서 올림픽을 치른다면, 관객까지 싹 격리하는 결과가 되므로, COVID-19 확산 따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2020-03-14

중국발 입국 봉쇄, 부도덕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퀴즈. 2020년 3월 14일 현재, 뉴질랜드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는 총 몇 명일까? 정답은 5명. 눈을 의심할텐데, 다섯 명, 맞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였으나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온 사람은 379명, 현재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은 두 명이고, 사망자는 없다.

뉴질랜드의 인구가 48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이것은 실로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의 확진자가 50명에 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이 3800명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세계가 놀라고 경탄해야 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뉴질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뉴질랜드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2월 3일부로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던 것이다. 1월 28일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National Health Coordination Centre (NHCC)를 세운 후, 그 통제에 따른 대응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중국을 떠난지 2주가 지났음이 확인된 경우에만 입국을 허용했다. 사실상 '중국 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3월 14일 현재 대만의 확진자 수 또한 4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만 또한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다.

대만과 뉴질랜드, 두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았고, 돌아오는 자국민을 철저히 추적 관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섬이라는 것이다. 출입국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또한 사실상 섬이다. 뉴질랜드나 대만보다 더 훌륭한 의료 체계와 헌신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응은 대만 및 뉴질랜드와 너무도 달랐다. 중국 본토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국인에 대한 세심한 추적 관찰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활발한 사회 활동'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사망자 수는 대만의 확진자 수보다 많다.

진지하게 묻자. 뉴질랜드와 대만의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가?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1980년생 여성으로, 세계 최연소 여성 지도자이며, 노동당이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보 여성 지도자다. 차이잉원의 내각에는 오픈리 트랜스젠더 장관이 IT 기술을 총 지휘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를 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끌고 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친문 선전선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눈에는 차이잉원과 저신다 아던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그들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당연한 일을 담대하게 하는 국가 지도자로 보인다.

솅겐국(aka 유럽)이나 미국처럼 육로로 외국과 교통이 가능한 나라는 입국 금지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이나 뉴질랜드 혹은 한국 같은 섬나라는 입국 금지를 하면 외국인이 못 들어온다. 입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감염 경로 추적이 용이해진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초기에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60명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국민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다.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칭송한다고?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 집어치워라. 진정 바이러스 대응을 잘 해낸 국가들은 따로 있다. 지리적 여건을 살려 봉쇄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수십 명 수준으로 감염자를 통제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다. 대만은 단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때 보건 총책임자가 통곡했다.

'글로벌 언론'들은 그런 사례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지리적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대만의 성공 사례가, 글로벌 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정부가, 글로벌 언론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아닌가?

다시 차별과 혐오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면역도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이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혐오 행동인가?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부도덕(immoral)한 것이다. 반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하고, 중국발 한국인의 행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의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을 따질 일이 아니다. 비도덕(unmoral)이다. 쓰나미가 몰려올 것에 대비해 제방을 높이 쌓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을 초기에 시행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계 동포에 대한 혐오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청와대가 그렇게까지 탁월한 인권 감수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통령이 뭘 하건 옹호하는 친문 네티즌들은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혐오 세력'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요컨대 그들은, 부도덕을 막기 위해, 도덕과 상관 없이 요구되는 대응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발생한 60명이 넘는 사망자들 앞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 능력 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진자를 찾아낸다 크어~' 같은 소리들을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에 빠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 차단은 몇몇 국가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전 국토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그렇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이른 시점에 봉쇄 전략을 택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봉쇄를 도덕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방역 차원에서의 입국 봉쇄 조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도덕(unmoral)한 일이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봉쇄 조치가 한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혹은 한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번질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도덕(immoral)의 문제를, 비도덕(unmoral)한 의학적 목적의 입국 봉쇄와 혼동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이 문제를 연거푸 강조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관념과 끓어오르는 도덕적 정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혐오하라' 같은 손쉬운 구호를 앞세우는 얼간이들이 득세할 때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기준을 잃지 않되, 도덕을 적용할 곳과 아닌 곳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다.

2020-03-08

정부와 언론의 뻔뻔스러운 '바이러스 검사 맛집' 프레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놀랍지 않다. 여론조사가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여론 그 자체가 조작에 가깝도록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뭘 잘못해왔는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뭘 더 잘못할 예정인지 모른다. 대신 그들이 아는 것은 언론을 통해 유포된 이상한 프레임이다. 가령, 이런 것들 말이다.

  1. 한국은 정말 빠른 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전 세계가 깜짝 놀라 감탄한다.
  2. 한국은 정말 투명하게 정부가 모든 정보를 공개하며,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싸우는 전 세계 정부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일단 1을 살펴보자. 얼핏 들으면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개쩔게 잘 대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는 것은 그만큼 감염자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검사를 할 일도 없다. 이건 마치 집이 활활 불타고 있는데 소방수가 불 잘 끈다고 좋아하는 꼴이다.

COVID-19 감염증 검사 프로토콜. 일단 열이 나야 하고, 마른기침을 동반한 가래가 나와야 한다. 그 가래를 채취하여 검사한다. 1차 의료기관에는 지금도 수많은 감기, 폐렴 환자들이 당도한다. 의사들이 그들 중 COVID-19 감염 의심자를 걸러낸다. 그렇게 한 차례 선별된 의심 증상자들의 가래를 채취하여 샘플을 만들고, 샘플을 분석하여 확진자를 선별한다.

즉, COVID-19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고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검사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 대상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음성이 나오고 일부는 양성이 나온다. 그렇게 양성이 나온 사람들만 확진자다. 이 관계를 집합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확진자 ⊂ 피검사자 ⊂ 유증상자

그러므로 한국에서 검사를 빨리 한다고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다. 외국인들이 보면 신기하긴 할텐데 그게 외신에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의료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만큼 COVID-19 바이러스가 퍼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세계가 깜짝 놀라는 한국의 검사 속도'를 자랑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과 청와대의 판단 착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한국의 검사 속도 세계가 깜놀!'같은, 무슨 나영석 PD가 연예인들 데리고 외국 나가서 식당 차리고 외국인들이 맛있다고 따봉 해주는 것 같은 프레임을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물론 외신들은, 좀 보기 드문 일이긴 하니까 보도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그런 장단에 놀아나는 건 좀, 문제 있지 않나? 집에 홍수가 나서 오수가 역류하고 있는데 '캬, 우리 형님 바가지로 물 퍼내는 솜씨 보소~ 엄지척!' 이지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 프레임도 그렇다. 귀찮아서 모든 외신을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어권 언론이라면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를 백퍼센트 찬성하거나 환영할 까닭이 없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주 이코노미스트를 펼쳐보니,

In South Korea, by contrast, the government is being forthright and formidably transparent, allowing Koreans to trace their possible brushes with the disease. As well as briefing the press thoroughly twice a day, and texting reporters details of every death, the government puts online a detailed record of each new patient’s movements over previous days and weeks, allowing people to choose to shun the places they visited. The risk of illicit activity being thus uncovered—at least one extramarital affair may have been—gives people an extra incentive to avoid exposure to a disease which, in most of the infected, results in only mild symptoms.

한국에서는 대조적으로 정부가 직설적이고 투명해서 한국인들은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스스로 추적해볼 수 있다. . . . 바람직하지 못한 활동이 드러날 위험도 있다. 적어도 한 건의 불륜 사례가 드러났으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감염 사례에서 가벼운 증상만 보이고 끝날 수 있는 이 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더욱 피하게 만드는 유인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What the world has learned about facing covid-19", The Economist, 2020년 3월 5일

국민의 신용카드와 교통카드 정보에 기반해 누군가의 소비와 동선을 모두 추적하여 까발리는 것은, 외신들이 나오는 '서구 선진국'이라면, 영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수집하여 언론에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을 '투명성'이라고 아이고 좋다 멋지다 한국 최고~ 라는 식으로 영어권 언론이 다룰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할 것이다. 지금 위에 인용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처럼, 다들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우려를 전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해당 대사를 좀 더 읽다보면 등장하는 문단은, 한국인 중 상당수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투명성'이라는 것이 외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정직하게 알려준다. "한국의 권력은 시민의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을 둔다. 한국의 대응 중 일부는 다른 민주 국가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South Korea has powers that put very little weight on its citizens’ privacy; some aspects of its response might be hard to mount in other democracies.)

물론 그 이후로 케나다의 사례를 들어, 국민의 동의 하에 잘 작동하는 민주국가가 국민의 설득과 동의 하에 격리 조치 등을 더 잘 시행할 수 있다는 서술이 따라붙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한국의 '투명성'이 기존 민주국가의 상식과 어긋나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야 한국의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투명하다고 뉴욕타임즈 같은 외신에서 막 좋아요 쌍따봉 했다는데?' 정도로 알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와대의 편에 선 언론들은 청와대 편을 드느라 그런 식으로 단장취의하고 있으며, 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들 또한, 어쨌건 '국뽕 장사'를 하면 조회수에 도움이 되니까, 국뽕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니 청와대는 여론조사를 조작할 필요가 없다. 여론 자체가 조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대응이 잘못되어 이 사달이 나고 있는데, 확진자 빨리 잡아낸다고 좋아라 하는,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논리가 통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한국은 '바이러스 검사 맛집'이 아니다. '정부가 투명한 국가'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지도 않다. 바이러스가 퍼질대로 퍼진 감염국이며, 국민의 사생활이고 뭐고 일단 까발리고 보는, 국민의 사생활을 덜 보호하며 민주적 원칙을 쉽게 양보하는 국가다.

여러분이 읽는 수많은 '외신에서 어쩌구' 타령에서, 국내 언론이 감추고 있는 이면의 맥락이 이렇다는 것이다. 다만 그 외신들은 '젠틀'하게, 우리의 면전에 대고 저런 소리를 안 하고 있을 뿐이다.

2020-03-03

마스크 뱅크런: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 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예금을 맡아주는 곳일 뿐 아니라 그 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주며 유통하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예금주가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하면 내줄 수가 없다. 망한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 자본국가들이 20세기 초 경험했던 '뱅크런'이다.

지금(3월 4일 0시 무렵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스크 대란' 역시, 따지고 보면 뱅크런과 유사한 현상이다. 다수가 일시에 패닉을 일으켜 특정 재화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뱅크런의 경우는 그 대상이 현금이었다면, 지금은 마스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구입하려 할까? 과도한 건강 우려? 마스크가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데 그걸 모르는 우매함 때문에? 아니다.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마스크를 구입하려 하는 이유는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언제 마스크를 못 사게 될 지 모르니, 살 수 있을 때 사두자, 이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시장 원리에 따라, 혹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시장에 공급하는 식으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제공하는 시장 뿐 아니라, 실은 그 시장의 바탕이 되는 정부마저 서서히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법은 정부가 정부답게 일하는 것이다. 뱅크런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뱅크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은행에 더 많은 돈을 갖다주는 게 아니다. 부족한 것은 화폐 그 자체가 아니라 화폐와 은행에 대한 예금주들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언제건 은행은 당신들에게 돈을 줄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예금을 주지는 말아야, 예금주들이 믿고 집에 돌아가면서 뱅크런이 종료된다.

문제는 화폐와 달리 마스크는 소비재라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미쳤나본데, 마스크를 오래 써도 된다느니 빨아 써도 된다느니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국민들로서는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나보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아껴 쓰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마스크를 확보하고자 줄을 서게 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장군처럼 하면 된다. 전국 읍동면 단위까지 퍼져있는 행정력을 이용해, 1인당 몇 장의 마스크를 정부가 확보하여, 신분증을 확인하고 직접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최선의 해법이며, 가장 자본주의적인 해법이다. 왜냐하면 시장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다. 마스크라는 물건 자체가 관건이 아니다. 지금 줄을 선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에게 마스크를 1인당 몇 장씩 직접 손에 쥐어줄 수 있는가?

만약 정부가 이걸 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마스크를 사겠다고 줄을 서는 행렬 자체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마스크를 유통하는 시장과, 그 시장의 질서를 확보하는 정부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지금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정부가 물량을 70%, 80%, 아니 100% 확보한 채로 유통에 나서도 이런 식이면 마스크는 계속 부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시장과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사서 비축해두려 할 것이며, 따라서 공급은 모자라고, 남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 불안해져서, 자신도 줄을 서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설마 하면서도 줄을 선다. 마스크 뱅크런이다.

마스크 그게 뭐 비싼 것도 아니고, 생산 물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금 없는 것은 신뢰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 앞으로 2주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전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에 걸맞는 단호한 모습을 정부가 보였으면 한다.

직접 나눠줘라. 그러면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굳이 사러 나가서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다들 어느 정도는 안정을 되찾고, 굳이 줄까지 서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마스크는 약국이나 마트에 가면 흔히 쌓여 있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게 무슨 어려운 논리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할까? 우리나라 행정력이 그렇게 부족한가? 정부가 직접 물량을 확보까지 해놓고 그걸 굳이 '판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부 물량을 '판매'하면 실수요자가 아닌 누군가가 매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그런 식이면 품귀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외 국가에 그것을 유통하여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거나, 그런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기 너무도 좋은 여건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시장과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따라서 또 사재기에 나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스크 뱅크런이다. 정부가 정부답게 행동하여 국민을 안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면 금방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부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지 말라.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하라.

2020-02-19

미국의 간선제와 땅의 힘

미국의 간선제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 원초적인 문제 말이다.

미국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제도라던가, 기축통화인 달러라던가, 군사력이라던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리잡은 땅덩이에 있다. 캐나다나 멕시코가 미쳐 날뛰지 않는 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좌우에 두고 있어 육로로 침공이 불가능한 나라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의 내륙은 미시시피강이라는 굵직한 강줄기 덕분에 산업화의 초기부터 해양 운송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가령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여느 내륙 국가와는 다른 여건이라는 말이다. 한술 더 떠서, 19세기에 세계 최초의 통상적인 유전이 개발된 곳도 미국인데, 21세기는 셰일가스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어 있다.

석유만 나오면 말을 안 한다. 우라늄도 충분하다. 우라늄만 있는가? 미국의 중서부 평원 지대는, 물론 지금은 많이 황폐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세계 대다수의 사람과 가축을 먹여살리는 천혜의 곡창지대다. 미국은 철도 있고 밀도 있고 석유도 있고, 우라늄도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일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본의 인구는 미국의 절반 정도다. 그렇다고 일본이 지금 갑자기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다 해서 미국과 같은 국력을 가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일본에는 (충분히 쓸만한 양의 많은) 철도 없고, 밀도 없고, 인구 전체를 부양할만한 농업 생산이 불가능하며, 석유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미국의 힘은, 톡 까놓고 말해, 미국의 땅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 동부 서부 해안에 사는 리버럴듯이 비웃듯이 지껄여대는 'Flyover States'다. 캘리포니아만 떼어놓고 보면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캘리포니아가 미합중국에서 분리 독립하면 아무도 캘리포니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힘은 동부와 서부에 모여 사는 인구와, '건너뛰는 땅'에 있는 그 무지막지한 천연자원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미국을 경험했거나,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미국의 리버럴, 리버럴이 아니어도 메인스트림의 시각에 자신을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미국이 미국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원초적인 이유를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래도 된다. 미국인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미국인이 아니니까. 미국이 왜 미국인지, 왜 그런 힘을 가진 초강대국이 군림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인을 잘못 분석하면 '인구 14억을 넘는 중국이 인구 3.5억인 미국을 능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허튼소리나 내뱉게 된다.

미국은 미국의 사람과 제도와 땅이다. 특히 마지막 요소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 점을 다들 잘 이해하면, 2020년의 국제정세에 대해 좀 더 좋은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2020-02-17

인공 작물과 천연 바이러스

우리는 흔히 유전자 조작 식품, 즉 GMO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연에서 수렵 채집한 식품들은 안전하다고 여긴다.

실상은 그와 정 반대다. 지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COVID-19'(한국명 '코로나-19') 바이러스만 봐도 그렇다. 인공은 안전하다. 반대로 자연은 위험하다. '코로나-19'의 위험에 대해 곰곰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왜 위험한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다양한 변종 중 인류가 최초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경험한 적 없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만약 '코로나-19'가 일각의 낭설처럼 중국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지금처럼 위험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그 세부 내역을 알고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에 대해 거의 모른다. 아예 모르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독감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바이러스 뿐 아니라,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와 비교해도 우리의 지식은 일천하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실험실의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모른다는 뜻도 되고, 인류의 면역계가 그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전자의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백신을 만들 수 없고, 후자의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가 자체적인 면역력으로 극복해내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코로나-19' 앞에, 무방비 상태다. 마치 서유럽의 뱃사람들이 천연두 바이러스를 퍼뜨렸을 때의 북아메리카 원주민과도 같은 상황인 것이다.

우리가 '코로나-19'에 대해 모르는 것은 그것이 방금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래 모르던 곳에서 온 모르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자연은 원래 그런 곳이다. 미지의 위험이 가득 도사리고 있는 곳.

논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보자. 소위 '백신 거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적인 면역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자연은 우리가 면역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이러스를, 이렇듯 잔뜩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는 운 좋게도 아직 그런 것을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농담입니다>그러니, '백신 거부 운동' 벌이는 이들을 지금이라도 일본 앞바다에 떠있는 크루즈 선에 태워주면 어떨까. 그들이 바라는 '백신 없는 세상'은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농담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환경 속에서 번창해왔다. 도시를 포함해, 유형 무형의 시설과 제도, 관습과 규율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일개 생물종은 우리가 아는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GMO라 불리는, 다들 짐짓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작물 역시, 인간이 수만년에 걸쳐 다른 종의 DNA에 간섭해온 역사를 더 짧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바꾼 것 뿐이다.

그런 건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익숙하지 않은, 접해보지 않은 날것의 '자연'과 만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다. '코로나-19'의 위험이 아직 다잡히지 않았고, 공포가 날뛰고 있는 와중에,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0-02-12

박완서 (1)

박완서의 소설 "서글픈 순방"의 한 대목. 화자인 새댁은 적금 50만원에 문간방 전세금 40만원을 합쳐 9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그걸로 어디 변두리에 땅을 사고 움막을 지어 살면서, 벽돌이니 뭐니 하는 걸 하나씩 사모아 집을 짓자고 계획한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에 묘사된 그 무렵의 주택 사정도 놀랍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움막살이'를 대수롭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그 태연함이다. 1970년대의 어느 계층에게 움막살이는 인생이 폭싹 망해야만 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딜 수 있는 어떤 디딤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20세기 중후반 고도성장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때로 너무 의아할 때가 있다. 그 무렵에는 모두 행복했고, 모두에게 꿈이 있었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인 양 말하는 그 물결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1983년에 태어나 90년대에 자란 내 기억만 보더라도, 우리의 20세기는 전혀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박완서를 펼쳐보자. 영동고속도로 현장에 취직한 조카를 만나러 간 여성의 이야기인 "카메라와 워커"를 통해 그 시절로 돌아가볼 수 있다. 화자는 조카를 '임시직'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회사 윗사람에게 '와이로'를 찔러주어야 하나 노심초사한다. 고도성장기에는 마치 비정규직이라는 게 없었던 것처럼, 일자리가 지천에 널려있고 청년의 꿈이 공정하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것처럼, 2020년 대한민국이 흠뻑 빠진 가짜 노스탤지어에 찬물을 끼얹는다.

내 짧은 견문의 한계일 수도 있고, 고도성장기의 단물을 받아먹었다는 어떤 집단 속에서 내가 성장기를 보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내가 커온 세상은, 요즘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떠올리는 '쑥쑥 크던, 모두가 절로 부자가 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완서의 단편들 중 툭툭 등장하는 묘사들 속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20세기를 실감나게 재회한다.

아무튼 중요한 건 20세기의 한국이 그렇게 공정한 곳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잘 살 기회를 열어주고 있던 유토피아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를 먹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팠다. 심지어 그 시대를 나보다 오래 살았던 40대, 50대, 60대들 사이에서도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살기 좋았다', '취업하기 좋았다' 같은 소리가 마치 사실인 양 오가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새삼스레 박완서를 읽다가 한 마디 적어본다.

2020-02-03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길게 보면 수입의 불평등이다."

안도현이라는 사람이 '강남 건물주가 되고 싶은 욕망'을 옹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내세우는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강남 건물주가 되고픈 것은 경제에 대한 것이고 민주주의는 정치와 관련된 것이니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이 1945년에 쓴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부동산을 통해 지대수익을 올리려는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결국 민주주의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세습 귀족은 토지가 부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원천인 곳을 제외하면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길게 보면 수입의 불평등이다." 버트런드 러셀, 서상복 옮김, 『러셀 서양철학사』(서울: 을유문화사, 2019), 전면개정판, 266쪽.

이 대목에서 생각을 좀 더 이어볼 수 있다. 토지가 부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원천인 상태를 파괴하는 것, 즉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경제성장을 하는 것은, 세습 귀족을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고상한 도련님들이 '개나 소나 사업하는' 분위기에 현혹되어 집안 재산을 들어먹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민주적인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게 세습 귀족을 파괴하고 돈을 번 자본가들은 추후 지대추구에 몰두하며 세습 귀족의 자리를 대체하려 들 것이다. 그것을 막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국가가 해야 할 일 아닐까?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활기를 유지하면서, '쌓인 부'가 언제나 새롭게 파괴되고 또 다시 생성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것.

나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봉건적 압제를 파괴하는 무기로서 작동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지지한다. 사회를 고착시키고 사람들을 주저앉혀 종속시키고자 하는 권력의 의지와 맞서는 도구가 될 때, 그럴 때에만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돈 가진 자가 건물 사놓고 떵떵거리며 타인에게 모멸을 주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저 강남좌파들의 '민주주의'에, 나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자본주의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2020-01-31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외, 2019.

<반일 종족주의>는 실증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 혹은 그와 뜻을 함께하여 <반일 종족주의>라는 단행본 및 그 단행본의 토대가 된 연속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대단히 이념적이다.

여기서 나는 '이념적'을 '나쁘다'의 동의어로, '실증적'을 '좋다'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가 이념적인 책이라는 내 주장은, 말 그대로 이 책이 사실관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이념적 차원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영훈 본인 스스로가 경제적 사료를 통해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인물이다. 책에 참여한 다른 학자들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쟁쟁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일 민족주의>는 오직 사실만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온갖 '거짓말'과 싸우는 책일 뿐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대표 저자인 이영훈은 조선왕조의 몰락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종의 거대 서사를 기획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거대 서사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음험한 적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공들여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영훈의 이러한 기획이 드러나는 것은 1부를 지나 2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20장에 이르러서이다. 그곳에서 그는 서구의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되짚으며,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달리 개인주의의 자양분일 수 있다는 논변을 편다.

이영훈의 구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과 '심성'을 경유하여, 한반도 거주민은 단 한 번도 철저히 뿌리뽑히지 않은 '장기지속의 심성'인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주 강한 주장을 펼친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은 그러한 샤머니즘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샤머니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비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251쪽]

물론 이정도의 주장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건 좌우를 넘어서는 문제다. 우파 버전이 '반일 종족주의'라면, 좌파 버전은 '한국은 아직 탈근대를 거론할 수 있을만큼 근대화하지 못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주장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이영훈이 그 '반일 종족주의'의 사례로 위안부와 징용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갔기에 논란이 커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친숙한 주장을 편다 해서 친숙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어찌됐건, '한반도의 전근대성'에 대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인상비평을 내놓은 후 그냥 까먹어버린다. 반면 이영훈은 나름의 (실증적?) 근거와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빅 네임을 경유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논의 전개를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으고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특히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지금까지의 정치적 과정의 전개에 있어서 일본을 적개시하는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증폭되는 과정은 크게 우려스럽다. 이영훈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중 국군위안부는 완전히 잊혀지고 오직 일본군 위안부만 거론되는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비 NL 계열의 여성운동가들도 자주 해왔던 것으로서 유의미하다. 즉, 구체적인 사실관계만 놓고 볼 때 <반일 종족주의>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차원에서 나름 유의미한 점이 없지 않다.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소, 혹은 상당히, 정직하지 못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오직 사료에 입각해 사료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특정한, 그리고 저자가 좀 뚝딱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는 역사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철학은 일종의 뒤틀린 자학사관이며, 전도된 탈식민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은 한국에 근대성을 이식한 일본의 영향, 미국의 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견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며 독립국가를 만들어내신 이승만 대통령의 찬란한 능력을 예찬하고자, 그 반대편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거주민들의 토속성을 물신화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물신화인가? 왜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보더라도, 모든 인간 사회는 이영훈이 지적하는 정도의 야만성, 원시성, 주술성, 토속성을 두루 가지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는 배울만큼 배운 고학력 리버럴들이 자식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스위스에서는 모스크를 폐쇄하는 '민주적 주민투표'를 거행한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모범국가의 사례로 꼽는 북유럽 국가들 또한 그 내막을 보면 비슷하다.

모든 국가는 각자 물려받은 '장기지속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SNS를 통해 포퓰리스트들이 활개치는 시절이 오면 그것은 다양한 외양을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더욱 심각한 모습을 종종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영훈은 그러한 '장기지속의 심성'을, 마치 환빠들이 단군의 후예를 몰아낸 중국 한족 묘사하듯 바라본다. 이는 그다지 학문적으로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역사철학으로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여지는 바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훈과 그의 동료들이 지적하는 내용 중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전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관, 특히 이승만이 저지른 공과 중 과오를 굳이 덮어놓거나 축소하려 하는 경향 등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이영훈이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 내지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올바르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

2020-01-25

빌 게이츠 vs. 트럼프 (그리고 문재인)

"정치가 끼어들 될 수 있다는 건 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정부일 거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We always knew there would be politics involved. We never thought it would be out government."

망치를 잡은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빌 게이츠는 순순히 인정한다. 자신의 망치는 기술이며, 세상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고.

하지만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세상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승부처인 기후변화와의 싸움 앞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 를 3부까지 다 본 후의 소감이다.

3부는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 벤처 기업 테라파워의 홍보 영상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럴만도 하다. 사람들이 워낙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정작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분야가 바로 원자력이기 때문이다.

테라파워에서 설계한 진행파 원자로는 지금까지 '핵폐기물'로 취급하던 사용후핵연료를 연료로 삼는다. 미 정부가 보관중인 '핵폐기물'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지금껏 저장된 '핵폐기물'을 통해 미국 전체가 125년간 사용할 에너지 전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막대한 가능성 앞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굉장한 일이다.

물론 본인이 개발한 아이템을 세일즈하는 사람의 말이긴 하다. 그러나 1) 인류 전체가 쓰고 남을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2)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고 3) 사고가 발생한다 한들 원자로가 자체냉각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온갖 천재들을 끌어모았다. 그 중에는 <모더니스트 퀴진> 시리즈로도 유명한 네이선 미어볼트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직접 검색을 해보시라. 아무튼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자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는 온갖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진행파 원자로의 개념 설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완료했다. 2015년 시진핑을 만나 중국에 대량 보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원전 생산의 생태계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중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다른 모든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인프라 건설 사업이다. 여기서 사업성이 맞으려면 생산과 소비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생산과 소비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중국을 찾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중국처럼 막대한 양의 원자력 발전소를 소비해줄 수는 없지만,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있다. 테라파워에서 개발한 기술을 얼마나 공유하고 이전할지가 관건이긴 하겠으나, 적어도 현재 표준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경수로의 건설, 유지, 관리 등에 있어서 한국은 독보적인 나라다.

그러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노정태부터 그레타 툰베리까지 모든 인류가 오래도록 안정적인 기후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표방하며 당선된 문재인과, 노동계급의 불만을 들먹였지만 결국 미국 사회의 이주민 혐오를 무기삼아 당선된 트럼프는, 그 점에서 큰 교집합을 그린다.

지난번에 <인사이드 빌 게이츠> 1부를 보고 내놓았던 감상과 이 대목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 많은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정치로 수렴한다. 따라서,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탈원전은 철회되어야 한다. 순식간에 많은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집단이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 모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01-2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방금 보고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단순한 레즈비언 연애물인 것처럼 시작해, 마치 유화처럼, 한 겹씩 한 겹씩 레이어를 덧입힌다. 그리하여 소박하면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 대범하며, 응시하지만 귀기울인다. 온갖 모순되는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꽉 차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기생충>이 아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느 심사위원들의 여성혐오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봉준호의 영화가 소비되고 말았다는 것까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블랙 코미디'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가 죽었다는 말이 헛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가 왜 존재하는지를, 압도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입증한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말로도 벅차오르는 감동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20-01-19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

입만 열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던 분들 중, 지금 청와대와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리스 대사 콧수염 일제 순사' 레퍼토리에 똑부러지게 반대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쪽바리'가 혐오발언인 게 분명하다면, 일본계 미국인을 상대로 '일제 순사같은 콧수염' 타령하는 것이 혐오발언이다.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우리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도 하다. 어떻게 우리 한국인이 백인과 일본인 혼혈인 미국 대사를 '인종차별'할 수 있느냐는 식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지만, 침착하게 설명해보자. 어떤 발언이 혐오발언이냐 아니냐, 인종주의적 언사냐 아니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속한 국가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 그저 '당사자에게 부여된 어떤 범주를 폄하와 모욕의 근거로 삼느냐'만 따져보면 된다.

가령 우리는 드록바를 '흑형'이라 부르는 게 인종주의적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0센트라던가, 쿤타 킨테라던가, 심지어 버락 오바마를 상대하더라도 '흑형' 타령을 하면 그것은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다시 말해 흑인에 대한 '흑형' 운운은 해당 흑인의 모국과 한국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백인, 혹은 백인 혼혈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 또한 억지다. 한국에서 미군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많은 혼혈인들이 당해온 모욕과 차별을 도외시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드록바한테 '흑형' 하는 거나, 웨인 루니한테 '백돼지' 하는 거나, 둘 다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다. 해리스 대사를 두고 '일제 순사', '조선 총독' 운운하는 게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있긴 한가?

유시민이 만들어낸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미 대륙 원주민은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당신들은, 심지어 선량하지도 않다. 그저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세력에게 딱지를 붙이고 몰아세우기 위해 인권을 동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일말의 인권에 대한 관심 없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당신들이 인권을 적에게 던지기 위한 돌맹이 취급하던 것이 유의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선량함'에 반대한다.

2020-01-12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제목: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2020년 1월 8일, 요헨 비트너(Jochen Bittner) 작성

독일, 함부르크 - 독일인들은 비이성적인가? 스티븐 핑커라면 그렇게 생각할 듯하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핑커는 최근 독일 시사 잡지인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인류가 경제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서 기후 변화를 멈추고 싶다면, 원자력을 덜 쓰는 게 아니라 더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을 몰아낸다는 독일의 결정은 "편집증적(paranoid)"이라고 말이다.

내 조국은 실로 독특한 실험을 감행하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는 원자력과 석탄 발전소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독일 최후의 원자력 발전소는 2022년 말에 폐쇄될 예정이며, 최후의 석탄화력발전소는 2038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동시에 정부는 친환경적인 전기차 구입을 촉진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에너지 소비는 1990년 이후 10퍼센트 상승했다.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독일이 위험한 경로를 걷고 있다고 우려한다. 화석 연료와 원자력이 빠진 손실을 채워넣을 수 있을만한 신재생에너지가 적절한 시점에 마련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신재생에너지는 독일의 전력 공급 중 4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의 몇몇 지방에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풍력 농장"에 진력을 내고 있다. 새로운, 많은 경우 더 큰 풍력 발전기가 주변에 세워지는 것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서 산업 중심지를 이어줄 송전선이 새롭게 깔리게 될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저항이 늘어가고 있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독일의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 혹은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송전선의 길이만도 5954킬로미터(3700마일)에 육박한다. 2018년 말 현재 실제로 건설된 송전선은 약 150킬로미터(93마일)에 불과하다.

이 계획은 전력 부족을 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석탄 화력 발전소보다 빨리 폐쇄하고 있는 탓에, 독일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일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후에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대는 굳건하다. 60퍼센트의 독일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 놓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편집증은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딜레마와 맞닥뜨렸을 때 얼어붙은 듯 멈춰버리는 대단히 독일적인 특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선한 일이라면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독일 같은 국가에게 있어서, 원자력 발전과 기후 변화라는 두 개의 악을 놓고 선택하는 것은 거의 수행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시작을 위해 언급하자면, 원자력 발전이 궁극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며, 독일인들은 특히 그 점에 대해 늘 불편함을 느껴왔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토마우스티에그(Atomausstieg)", 즉 원자력 발전을 단번에 완전히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설명한 바는 이렇다. "원자력 발전의 잠재적 위험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위험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용인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훈련받은 물리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원자력 재앙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같이 고도로 기술이 발전한 나라에서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악인 기후 변화는 어떠한가? 그 재앙은 석탄화력발전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으며 거의 확실하게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에서야 "기후 변화는 우리가 몇 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동시에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파리 기후 협약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나온 희망찬 숫자를 놓고 보더라도, 2020년 말까지 탄소 배출양의 40퍼센트를 줄인다는 목표치는 달성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2011년 이후 훨씬 깊어졌으니, 각 국가들은 화석 연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을 폐기하겠노라는 생각을 바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것은 녹색당의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녹색당은 향후 메르켈의 기민당이 연정을 맺어야 할 상대이기도 하다. 녹색당은 1980년대 초 반핵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반핵운동은 녹색당의 DNA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중 구속 상태에 대해 녹색당은 그럴듯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아날레나 베르보크(Annalena Baerbock) 녹색당 공동대표는 독일 국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석탄 발전소를 더 빨리 폐쇄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오래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발상 자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우리 이웃의 정원에 원자력 폐기물을 묻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방사성 폐기물과 기술적 사고의 위험을 사회에 전가시키면서 기업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석탄 발전소가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계산 또한 참이다.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은 독일의 거의 종교적 반핵 정서가 기술 발전에 따른 논의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과학자들은 방사성 폐기물을 이용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사용후 핵연료 보관 문제, 즉 원자력에 반대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인 그것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른바 고속증식로에도 나름의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생 가능 에너지 시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원자력은 석탄이나 가스 발전소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일체의 원자력 발전소를 급속도로 폐쇄하면서, 독일은 [원자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독일은 어쩌면 인류가 본 것 중 가장 안전하고 가장 친환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기술과의 접점을 차단해버렸다. 독일이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화석 연료의 사용을 급격하게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이성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은 메르켈 시대가 낳은 최악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요헨 비트너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토론 지면의 공동 담당자이며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한다.

원문: Jochen Bittner. “Opinion |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The New York Times, 2020년 1월 8일, sec Opinion. https://www.nytimes.com/2020/01/08/opinion/nuclear-power-germany.html.

2020-01-09

사막의 생명, 인간의 에너지

내 로망 중 하나는 사막 여행이다. 물론 생명에 위험이 없을만큼 안전한 루트와 일정이 제공될 때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사막에 피어나는 온갖 식물과 동물들의 조화를 만끽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막도 생태계다. 사막에는 사막의 환경에 최적화된 동물과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온대 기후에 적합한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눈에 '가치' 있는 생물군이 매우 부족해서 그렇지, 사막의 생태계는 사막 나름의 논리와 치열함을 지니고 오늘도 작동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서부 해안가 대도시에 살면서 인근 사막에 태양광 발전기를 뒤덮어버리는 미국 리버럴들의 '환경주의'에 동의하기 힘든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들은 생태계 보호니 환경이니 잘도 떠들지만, 자기 양심을 달래기 위해 사막 생태계를 황폐화시키는 일은 서슴치 않고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말로 생태계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에너지 생산 및 소비 과정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발전 양식은 모두 지양하는 것이 옳다. 대신 원전처럼 아주 좁은 면적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야 더 많은 땅에 더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자국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자연은 되살아난다. 흔히 '죽음의 땅'이니 뭐니 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인근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발을 끊자, 멸종된 줄 알았던 야생동물까지 모두 돌아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반면 당신들이 뒤덮어놓은 태양광 발전기는 오늘도 전자파를 내뿜고, 거대한 풍력 발전기에는 곤충과 새들이 부딪쳐 죽는다. 누가 친환경인가? 누가 생태계 파괴자인가?

참고: Pat Brennan, "Desert damage: the dark side of solar power?", PHYS.ORG, 2009년 3월 30일.
Sammy Roth, "Study: California solar farms threaten desert species", The Desert Sun, 2015년 10월 19일.

2020-01-06

필립 풀먼에게서 배우는 글쓰기 수업

작가 필립 풀먼은 새로운 3부작 <먼지의 책>(The Book of Dust) 가운데 첫 번째 편을 깜짝 발표하면서 리라 벨라쿠아(Lyra Belacqua)의 세계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야수: 먼지의 책 1권>(La Belle Sauvage: The Book Of Dust Volume One)은 풀먼의 71번째 생일에 맞춰 목요일에 출간되었다. 그가 앞서 내놓은 3부작의 후속작으로는 17년만이다.

<황금나침반> 시리즈의 리라는 중요 인물 중 하나로, 이야기는 리라가 생후 6개월이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수녀들 틈에 숨어 있는 리라의 삶에 11살 소년 말콤 폴스테드가 끼어들어, 그의 카누인 아름다운 야수에 리라를 태우고 보호해주게 된다.

풀먼을 이토록 성공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 갓 시작하는 작가들에게 그가 건낼 조언은 무엇일까?

BBC와 마주 앉아, 풀먼은 그의 행운의 펜에 대해, 그리고 전동드릴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일할 수 있지만 왜 절대 음악은 안 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캐릭터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라.

그것은 신비로운 과정이다. 물론 나의 일부는 그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만들어내든 것과는 다른, 발견하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더 나은 단어를 찾아 종이 위에서 펜이 움직일 때까지 책상에 앉아 텅 빈 벽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이 과정을 신비롭게 포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 느낌은 발명보다는 발견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이야기가 이미 그곳에 있고, 내가 그것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말하는 최선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과 같달까.

이 희한한 일에 대해 내가 모든 것을 확실히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실은 어떤 식으로 장담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의혹에 빠져 있는 상태를 좋아한다.


2. 언제나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황금나침반> 시리즈를 끝내고 난 후,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황금나침반> 시리즈에서 말한 리라의 이야기는 결말로 향하고 있었고, 끝났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이 늘 존재한다. <황금나침반> 시리즈가 끝날 때 리라는 고작 12살이었을 뿐이다. 성장하고 어른이 될 것이다.

리라에게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

나는 그게 궁금해졌다. 말하자면 내 시각의 바깥에서, 내 눈이 닿는 구석 너머에서, 나는 내 흥미를 끄는 다른 캐릭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점점 내 펜이 그 이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 퍽 많은 일들을 해오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이야기의 설득력과 재미가 너무도 강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캐릭터들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3. 자신에 차 있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음악을 듣지는 마라.

나는 (내 글이) 좋다고 생각했던 적이 전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래, 이 정도면 되겠네" 정도다.

글을 쓸 때 나는 사실 의미보다는 소리를 더욱 의식한다. 어떤 단어가 문장에 들어갈지에 앞서 문장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갈지를 먼저 알게 되는 편이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는 방식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음악이 틀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나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고요한 상태는? 좋다. 전동 드릴 소리는? 괜찮다. 교통 소음? 문제 없다. 하지만 음악은 절대 불가다. 그러므로 나는 고요한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리듬을 들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4. 어조(tone)가 구조보다 더 중요하다.

글이 흘러가는 방향이라면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글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방법은 모른다.

구조를 만들지 않는 것, 그렇다, 나는 그런 식이다. 하지만 나중에 구조가 잡힌다. 종종 구조를 어떤 근본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다.

구조는 피상적인 것이다. 책에서 근본적인 요소는 어조, 말하는 어조이며,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모든 문장을 바꾸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구조는 최후의 순간에 바꿀 수 있다. "중간부터 시작하겠다"라던가, 그런 비슷한 말은 가능하다. 구조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뒤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5. 가장 좋아하는 펜을 골라라.

일단, 나는 볼펜과 종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행운의 펜을 가지고 있다. 몽블랑 볼펜이다. 무게와 크기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용한다.

그리고 잘 작동한다. 그 볼펜으로 여러 책을 썼다. 이제는 그 볼펜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일단 글을 쓴다. 그리고 한 챕터나 두 챕터를 쓸 때마다 컴퓨터로 옮긴다. 지금껏 발명된 편집 도구 중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6. 자신을 위해 써라.

글을 쓸 때는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다른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란 누군가에게 읽힐 때까지는 온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 상호작용에서 독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고 싶은 것을 읽어야 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 글을 쓴다. 지금껏 있어온 모든 '나 자신들'을 위해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나부터, 처음으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던 나, 50년 전에 옥스포드에 있었던 나, 학교 선생으로 일했던 나, 교실에서 이야기를 해주던 나.

이 모든 나 자신.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넓은 독자층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 그 독자들 속에 어른과 아이가 모두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원문: "Philip Pullman: Rules of writing from man behind His Dark Materials", BBC, 2017년 10월 19일.

개인적으로 4번이 가장 인상적이다. 소설 뿐 아니라 기타 분야의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저 구절을 갈무리해두려는데, 혼자 보는 자료 모음집에 담아둘까 하다가, 전문을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려둔다.

2020-01-01

작년의 영화: <우상>(2019)

<우상>은 <비밀은 없다>의 남매편(자매편x 형제편x) 같다. <우상>에서 성매매가 등장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은 <비밀은 없다>에서 디지털성범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두 작품 모두 결백하지 않은 인간들이 등장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야기.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 사람이 <우상>을 좋아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자를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후자도 적어도 '이해'는 하면서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평균적인 한국 관객의 영상 리터러시보다 기준점이 훨씬 높기 때문에 애초에 흥행은 불가능한 작품이다.

<비밀은 없다> 이후 한국 영화가 이렇게 '영화답게' 나온 것도, 글쎄, 내 기억에는 중간에 끼워넣을만한 작품이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요 사건 설정, 인물 구도, 기타등등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비밀은 없다>를 본 사람이라면 <우상>은 보고 나서 판단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싫음 말고...

참고로 나는 문제의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말죽거리 잔혹사>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 씨발~' 하더니, 결국에는 강남의 입시학원 다니는 게 결론이었던 그 영화. <우상>도 '대한민국 정의 도덕 다 좆까라 그래 씨발~'을 외치는데, 이쪽은 그따위 얄팍한 자기변명이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애초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한 게 잘못이었다. 왜 결혼했을까? 그 남자는 '전라도 출신 미녀'가 필요한 정치 지망생이었고, 연홍은 탑 스타가 못 될 것이 거의 확실한 가수(지망생)이다. 물론 사랑도 했겠지. 남자의 야망에 탑승해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싶었고. 근본적인 실수.

<우상>의 중식도 아주 근본적인 실수를 했다. 극중에서 아예 본인의 입으로 말을 해버린 그것일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건 비극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세팅. 두 영화 모두, 두 인물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가 없는 셈 치는 '터진 맹장'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터진 맹장'(참고로 이것은 영화와 완전히 무관한, 내가 방금 떠올린 은유다) 같은 걸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우상>을 안 보는 편이 나을 수 있고, 솔직히 본다 해도 뭐 이해가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를 따라갈 수 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 영화에서 댓글을 보니까 정말 '그 장면'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우상>은 어쨌건 '우상 파괴'에 성공한 것이다.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지금 말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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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남겼던 기록. 내가 작년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