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6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정신이 물질을 이기지 못할 때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슬픈 전시다. 푸틴이 전쟁을 시작한 후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면서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전시를 앞당겨 종료하네 마네 하는 맥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닌 내부 맥락만 놓고 보더라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서글퍼지는 전시다. 물질적 영역, 다시 말해 현실에서의 공허와 빈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극복하고자 하던 이들의 발버둥은, 결국 초라한 물질적 형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 유명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보자. 도판이나 화면상의 이미지로 접할 때와 달리, 실물을 보면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보존 상태가 너무 나쁘기도 하고, 이전에 '물질'적 측면에서 너무 작품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미술 작품은 실물을 볼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좋은 의미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유화가 그렇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그 역사적 의의나 화면상의 이미지에 익숙한 채로 들어가 실물을 보면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물감, 캔버스, 기타 여러 측면에서, 작품을 통해 '초라함'을 느끼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질적 에너지와 풍요의 과잉이 낳은 정신주의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가 빈곤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방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택하지만 본인은 내가 정말 이걸 원해서 택하고 있다고 자기 기만을 거듭하는, 그런 정신주의랄까.

우리 현대 한국인, 특히 20세기 출생자들은 그 변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변방인이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개인적인 행복을 달성하고자 할 때, 변방적 특질과 줄타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그래서 최근 1960-1970년대생들이 '눈떠보니 선진국 이얏호' 꼴값을 떠는 게 우려스러웠으나, 그들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자이며, 정권을 뺏겼으니 이제 그들은 다시 헬조선 타령을 할 것이다. 이런 정치 과몰입 또한 변방성의 특징 중 하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변방의 인간들이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것은 러시아 문학과 마찬가지인, 그런 맥락을 놓고 보면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좋은 전시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러시아'에 방점을 찍고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법칙 중 가장 슬픈 법칙인 '원판 불변의 법칙'을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왜 사회주의라는 서구 사상의 뉘앙스 대신 뭔가 토속적이고 구린 느낌 일색인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1부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을 보던 나는 왠지 그 뿌리가 결국은 러시아적 향토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걸 떨쳐내고 좀 어케어케 해보려던 머리 좋고 예민한 자들은 소련이 된 러시아에서 살지 못해 망명하거나(칸딘스키), 소련에서 두 번이나 간첩죄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일찍 죽었다(말레비치).


이 전시에서 가장 큰 감명을 준 작품은 따로 있다. 알렉산드르 티실레르가 그린 <장애인들의 시위>다. 야만적인 나라에 사는 이가 그 야만성을 직시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각별하게 느껴진 건, 물론 어제 오늘 내가 경험한 어떤 맥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월 17일까지 예정되어 있으나 언제 휙 돌아가버릴지 모르는 전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입장료 2만원, 전시기간중 휴무.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위에 있는 경호처

● 尹 스텐팬 계란말이의 운명
● 구중궁궐에서 외로웠던 盧
● 무소불위 차지철이 빚은 실패史
● 민주화 이후에도 ‘밀착권력’
●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에 설치된 프레스다방을 찾아 취재진과 즉석 차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스텐팬 계란말이.’ 대선 과정에서 방송을 통해 공개된 후 많은 이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미 겸 특기는 다름 아닌 요리.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면서 술을 즐겨온 중년 남자답지 않게, 그는 본인과 배우자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식사를 직접 준비해왔다. 깊은 맛이 나도록 끓인 김치찌개에 각 잡힌 계란말이. 누가 봐도 소주 안주 같지만 공깃밥을 놓으니 그럴듯한 가정식 정찬이 됐다.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도 감탄한 ‘윤식당’이다.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윤석열은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도 ‘혼밥’ 안 하느냐는 질문에 “아침은 혼자 먹지만 개들이 먹던 걸 달라고 해서 나눠준다”고 답한 윤석열은, 서울 용산에 대통령실이 열리면 구내식당을 이용해 김치찌개를 대량 조리해 기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그 많은 양을 손수 할 수는 없을 테고, 말하자면 본인이 조리장이 돼 감독한다는 뜻이겠지만, ‘윤식당’을 재개장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후보 시절에도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만약 윤석열이 통상적인 경로를 밟아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윤식당’ 재개장은 불가능하다. 아니, 당분간 폐업이다. 윤석열의 스텐팬은 5년간 계란말이뿐 아니라 그 어떤 요리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하고 바빠서가 아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은 취사를 위해 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요리는 고사하고 라면조차 끓이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법으로 금지돼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단, 대통령경호처의 경호 규칙에 위반된다. 경호처는 대통령과 가족이 불을 쓰지 못하게 한다. 이유는 늘 그렇다시피 ‘대통령 경호 목적’이다. 대체로 열 살 정도면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인의 인생이지만,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오른 사람과 그 가족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냄비에 물 붓고 불 켜는 단순한 행동조차 하면 안 된다. 오늘은 바로 이 문제, 경호와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경호실에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2003111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관저를 나서고 있다. [동아DB]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대통령 경호 규칙.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 같지만, 이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도 그랬다. ‘신동아’ 2007년 5월호에 실린 ‘전직 경호원들이 털어놓은 대통령 경호 비화’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관사는 호텔 객실처럼 취사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대통령 가족은 검식관이 마치 조선시대 기미상궁처럼 검식을 마친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요리사와 검식관이 퇴근하고 난 후에는 무엇도 먹을 수 없어서, 전두환의 자녀들은 하교하자마자 청와대로 와야 했지만 밤에는 라면조차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민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그는 라면 마니아였다. 출출해도 라면, 심심해도 라면, 해외에 나가서도 라면을 먹었다. 200610월도 그랬다. 경북 김천에 갔다가 대통령 전용 KTX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는 수행참모들에게 ‘특별 메뉴’가 준비돼 있다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온 음식은 라면. 실망하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달리는 열차에서 먹는 라면 맛이 어떻습니까? 맛있지요? 대통령 빽 아니면 이런 맛 볼 수 없어요! 오늘따라 라면이 먹고 싶어서…. 서울 올라올 때에는 열차에서 저녁식사로 라면 먹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경호실에서 안 된대요. 그래서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경호실에 따르면 달리는 열차에서 컵라면 정도는 괜찮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냄비에 면을 넣고 삶는 라면은 안 된다. 안전 문제 상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설명이 납득이 되시는가. 물론 열차에서 부탄가스 등 직접 불을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공간은 조리를 하는 공간과 떨어져 있다. 불꽃이 발생하지 않는 전열 조리기구를 사용해 라면을 끓인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설마, 누군가 대통령에게 뜨거운 라면을 끼얹는 테러를 저지를까봐 안 된다는 걸까.

실제로 경호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노무현 스스로가 그러한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 손으로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바 있다.

물론 최근 한 전직 청와대 요리사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이 주말이나 일과 시간 후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임기 말에 이르러 경호처가 다소 느슨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자기 손으로 편하게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했던 노무현은 큰 불만을 느꼈고, 이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치 구중궁궐에 갇혀 있던 ‘마지막 황제’의 푸이처럼,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비서 노릇까지 겸하는 경호원?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는 대통령경호처의 힘. 이 권력의 기원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전쟁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과 지속적으로 대치했고, 북한은 여러 방향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

육영수 여사의 시해로 마무리된 문세광의 1974년 광복절 저격을 놓고는 그 배후에 대해 논란이 있다. 하지만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산을 타고 넘어왔던 사건이라거나, 전두환을 노리고 벌어졌던 아웅산 테러 사건 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일종의 비정규전투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해하려 든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자신의 심복을 경호실에 앉히고 일종의 호위부대 격으로 굴리면서 경호실이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다. 북한으로부터의 직접적 위협이 크게 줄어든 후에도 경호실의 권한과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차지철 경호실장처럼 대놓고 권력을 휘두르는 경호실장이 나오는 세상이 끝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라면 끓이기’의 사례처럼, 대통령경호처는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목 하에 대통령의 동선과 행동을 미시적으로 통제하는 일종의 ‘밀착권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신동아’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한 전직 경호원은 한국과 미국의 경호 시스템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경호원은 오로지 경호만 합니다. 우리나라 경호원은 비서(의전) 노릇을 겸하거든요. 가령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를 하려 하면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국은 절대 안 됩니다. 말 그대로 경호만 하는 거죠.”

이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2007년 당시, 한국의 대통령 경호원은 ‘대통령이 악수해야 할 사람’과 ‘악수하면 안 될 사람’을 판단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둘째,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하려 할 경우, 경호원은 그 엉뚱한 사람 대신 대통령을 제재할 수도 있었다. 셋째, 전 세계 모든 민주국가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경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측면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총 4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그 중 4명이 암살당한 나라다. 누군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일하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8.69%나 된다. 최전방 전선에 투입된 군인이 아닌 다음에야 경험하기 힘든 사망률이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 못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가능한가.

경호 목적으로 대통령과 가족이 요리를 못 하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식칼도 못 잡고 가스레인지도 못 켠다. 대통령경호처가 ‘대통령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먹는 음식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대통령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 가족을 과잉보호하며 ‘가스라이팅’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지 않는가.

지난해 1229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국민의힘]
용산 시대의 ‘윤식당’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의 대통령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호 시스템이 과연 대통령에게 유익한지 의문을 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대통령 박정희는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총을 뽑아 쏠 때 차지철은 박정희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악의 경호 실패 사례는, 대통령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벌어진 것이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윤석열을 두고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층의 태도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도사가 청와대에 가지 말라고 해서 안 가는 것 아니냐’는 식상한 흑색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최순실 사건을 보면 분명하다. 소중하게 끌어안아야 할 무속인 혹은 비선실세가 있다면 청와대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대통령경호처를 설득해서 그 비선 실세가 원할 때 ‘프리패스’로 청와대에 들락거리게 해주면 아무도 모른다. 지난 정권 시기에 벌어졌던 대통령경호처의 방만한 행태는 결국 박근혜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대통령 경호 실패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과 마찬가지로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문고리 권력의 일부로 작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대통령 됐다고 가스레인지에 불도 못 켜게 하는 식으로 ‘탈인간화’하는 경호 체제는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대통령은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이 야근하다 1층 매점으로 내려와 직원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려서 컵라면을 곁들여 먹으며 일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다. 용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윤식당’이 성공리에 재개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22

인수위에 여성가족부 포함시켜야

2017년 대선 당시의 일. 홍준표 후보의 자서전에서 '돼지발정제' 운운했던 대목의 논란이 커지자, 다른 후보들이 일제히 비난했다.

그 중 가장 수위가 셌던 사람은 안철수. '나는 홍준표 후보와 대화하지 않겠소'라고 TV 토론에서 선언했다.

수세에 몰려 있던 홍준표는 안철수의 그런 대응에서 활로를 찾았다. '안 후보님? 정말 나랑 이야기 안 할 거에요? 응?' 이러면서 어린아이 놀리듯 가지고 놀았고, 오히려 안철수가 외통수에 몰렸다.

여성가족부를 대하는 인수위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 무렵 생각이 든다.

여성가족부는 신뢰를 잃었다. '피해호소인' 운운하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린 여성들도 많다.

하지만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던 사업 중에는 여성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많다. '여성부'가 아닌 '가족부'로서 집행하던 예산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 재편성해야 한다. 또 어제 오늘 거론되고 있는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예산 등 석연찮은 대목을 확인하고 교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인수위 테이블에는 여성가족부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가족부를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여성가족부를 불러야 하지 않나?

'여성가족부 해체'라고 썼으니 인수위 단계에서 아예 포함도 안 시킨다! 이런 태도가, '나는 홍준표 너님과는 토론 안해!' 해버리던 2017년 안철수의 미숙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이런 태도를 취하면 대외적으로 '안티페미 행정부'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게 될까? '석유 대신 반도체가 나오는 사우디' 정도로 취급당할 것이다. 나라망신이다.

윤석열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 그 외 관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2022-03-21

'광화문 시대'와 작별을 고하고 싶다

"결국 미 대사관은 이 논란이 본격화되기 전에 마련해 뒸던 정동 옛 경기여고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미국은 90년 을지로에 있던 미 문화원과 1만5117㎡에 이르는 경기여고 땅을 맞바꾸기로 서울시와 합의한 상태였다. 이 부지는 미 대사관저와 바로 맞닿아 있어 대사관과 함께 직원 숙소까지 지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로 유명한 마이클 그레이브스에게 의뢰해 지하 2층, 지상 15층짜리 대사관 설계까지 마친다.

하지만 만사 쉬운 일은 없는 법.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순조로워 보였던 대사관 이전 계획은 돌연 암초를 만났다. 대사관을 지으려던 경기여고 자리가 역사적 유적지로 밝혀진 까닭이다. 조사 결과 문제의 땅에는 1933년까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모셨던 선원전(璿源殿)과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흥덕전(興德殿) 등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단체들은 “조선시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 위에 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미 대사관은 “한국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경기여고 이전 계획을 포기한다”고 2003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41863

경기여고는 순종이 어명으로 만든 학교임. 조선 왕실에서 '야 너네 이 땅 써라'해서 그 땅 위에 지었음. (사진 속 빨간 동그라미)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경기여고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또 유의미한 '조선시대의 유산'이었는데, 경기여고는 그 땅 버리고 강남으로 훌훌 갔음.

그런데 그 자리에 미국이 대사관 좀 지으려고 하니까 뭔 일이 벌어지냐? 위에 인용된 칼럼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죠.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바 아니었던 유물 나왔다고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남.

결국 미국 대사관은 대사관저와 딱 붙여서 멋들어지게 지어보려던 건물 계획 다 포기하고, 용산 미군기지 옆으로 가려고 했는데, 미군기지 이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광화문 한복판에 뒈지게 낡은 건물에서 영원히 살고 있음.

그래서 그 경기여고 땅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그냥 허허벌판임(2030년대까지 '선원전터 복원'을 한다는데 그게 문화재로서 유의미함? 그렇게 믿을 사람은 유홍준 말고 아무도 없음).

이게 뭐야? 뭐하는 짓이야? 아무도 모름. 문화재를 지키자! 하면서 그 땅 기꺼이 쓸 유일한 소비자를 쫓아내놓고, 그냥 비워두고 있음. 이런 비합리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미국이 싫어서. 혹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청와대에서 벗어나 용산으로 간다는 결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짚어보기 위함.

대통령이 청와대를 버린다? 이건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님. '광화문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도 됨.

'광화문 시대'란 무엇인가? 김영삼이 중앙청을 박살내면서 시작된 시대. 민족주의적 감성이 모든 합리와 이성과 계획의 상위 개념으로 날뛰고, 그 누구도 그것을 감히 말리지 못했던 시대. 문화재청 같은 일개 '청'이 민족의 제사장 행세를 하며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시대.

일본과 전쟁을 해서 독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목 하에 역사 왜곡을 하는 게 옳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민족정기'를 세우고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억지 부리고 악다구니 쓰는 게 뭐 좋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이제 좀 새로운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는 소리. 그 뭐 광화문의 함성이니 종로의 정취니 피맛골의 그리운 풍경이니, 다 그냥 '즐기는 문화'의 범위로 넘기고, 우리는 갑시다 미래로.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집무실 옮겨야 하는 까닭

● 풍수 언급한 건 승효상·유홍준
YS·DJ·盧도 광화문으로 이전 구상
● ‘시민과의 만남’은 집무실 목적 아냐
● 文은 ‘창성동 청와대’ 속사정 알까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전경.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미신과 풍수에 따라 청와대를 옮기려 한 정권. 어떤 정권이었을까? 문재인 정권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 201710월,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 ‘상춘포럼’에서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고 했다. 친(親)민주당계 인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뒤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돼 청와대 이전을 논의하다가, 2019년 1월 4일 공약 파기를 발표했다.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퇴임을 앞둔 문재인 정부를 먼저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윤석열 무속 논란’의 백해무익한 면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윤석열 무속 논란’을 진지하게 거론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다. 방귀 뀐 자가 성 낸다는 속담이 떠오를 지경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하루 이틀 된 논의가 아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는 광화문 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와대는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시설이다. 1990년 춘추관 및 관저, 1991년 본관이 완공됐다. 그러니까 김영삼은 콘크리트가 속까지 다 굳지도 않았을 시점에 이사를 가네 마네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광화문 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새로운 집무실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청와대 용산 이전’이라는 이슈를 ‘윤석열 무속 논란’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수많은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사람 만나면서 피해야 하는 대통령의 모순
2019년 1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유홍준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유 위원장은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직접적으로 ‘풍수’를 거론했던 문재인 정권을 빼고 나면, 대부분 정권이 탈(脫) 청와대를 외친 이유는 비슷하다. ‘국민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경복궁 뒤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민심의 동향으로부터 어두워져, 결국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대통령이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에서 노트북 펴놓고 일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지하철 노선 세 개가 지나가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로 청와대를 옮기는 건 어떨까?

말만 들어도 헛웃음이 날 것이다. 그렇다. ‘시민과의 만남’은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이유로 대통령 집무 공간을 옮겨서도 안 된다. 완전히 경호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 ‘일반 시민’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중적 접근성은 새로운 대통령 집무 공간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괜한 말장난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집무 공간을 옮겨야 한다는 쪽이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된 용산 국방부 안을 지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볼 필요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용산 뿐 아니라 어디로 이전해도 부족하고, 또 부적절하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정의상 ‘국민 속’에 있으면 안 된다. 대통령도 불편하고 국민도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통령은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문고리 권력’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그러니 ‘인의 장막’에도 갇혀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사람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순이다. 그런데 대부분 선진국은 어렵지 않게,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잘 해나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또 반대로, 왜 대한민국 대통령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청와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사실상 두 개
우리는 흔히 ‘청와대’라고 하면 사진에서 본 파란 기와 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건물은 청와대 본관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 건물은 그것만이 아니다. 청와대에 부속해 있는 건물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총 12곳. 그 중에는 ‘위민관’에서 ‘여민관’으로 이름이 바뀐 비서실도 포함돼 있는데, 그 건물만 해도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통령의 집무실은 관저에 마련돼 있다. 반면 대통령의 비서들은 비서실에 있다. 그 거리만 해도 500m인데 보안상의 이유로 중간에 또 한 차례 검문을 받아야 한다. ‘문고리 권력’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여민관 내에 집무실을 마련해 출근하면서 정부종합청사로 집무실을 완전히 옮길 계획이라 밝혔지만 결국에는 청와대에 머물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청와대의 부속 건물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편번호 03048.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하나 더 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네이버·카카오 지도로 보면 건물 모양만 그려져 있을 뿐 뭐 하는 곳인지 설명조차 나와 있지 않은 곳. 딱히 명칭도 없는 그곳은 흔히 ‘청와대 부속청사’, ‘창성동 별관’ 등으로 통한다. 지난 2018년과 2019년, 사상 초유의 청와대 압수수색을 하네 마네 할 때 뉴스에 등장했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적어도 두 개 있다. 건물이 아니라 부지를 단위로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리가 아는 청와대.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가끔 뉴스에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 ‘창성동 청와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특히 정치권 사람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않는다. 심지어 ‘BH’라느니 ‘VIP’라느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상한 관습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본인은 대통령이 아닌데 청와대에 한 다리 걸친 사람들만 신이 난다. 한껏 부풀어 오른 자아를 뽐내며 호가호위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정부와 지지난 정부, 아니 1987년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수많은 측근 비리와 판단 착오, 인사 실패 등을 떠올려보자. 모두 같은 패턴이다. ‘청와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모른다. 권력의 단맛은 청와대가 누리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뒤집어쓴다.

청와대의 구조를 가장 악용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겠지만, 문재인이라고 해서 나을 건 없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문재인은 과연 ‘창성동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조직 장악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현재 청와대는 하나가 아니다. 건물이 나뉘어 있는 것을 넘어 별도의 부지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청와대에서 일하거나 들락거리는 대통령이 아닌 사람들에게 좋을까?

민주국가 행정수반은 ‘오피스’에 있다
현재의 건물 및 인력 배치 구조상,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청와대’에 잡아먹힌다. 분명 대통령의 부하 직원이라고 돼있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기도 어렵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불시에 질문할 수도 없다. 옥상옥 위의 옥상옥으로 이어지는 한없는 계단식 구조 속에 대통령은 마치 구중궁궐의 왕처럼 고립된다.

이 문제는 대통령이 아무리 시내 번화가에서 근무한다 한들 풀리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와의 접촉면을 늘려 조직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해결된다. 대통령 본인이 모든 직원을 다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의 공간은 비좁아야 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부대껴야 한다. A가 B와 ‘썸’을 타고 있고, C와 D가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E와 F는 공직을 벗어던지고 벤처기업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등, 온갖 잡다한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의 분위기. 그 속에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니다 싶으면 제3자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의 장막’을 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불나방들이 권모술수를 부릴 수 없게 된다.

1948년 첫 대통령 선거 이후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은 ‘궁궐’에 있었다. 궁궐이 궁궐인 한 그 궁궐이 어디에 있건 대통령은 성공하기 어렵다. 해법은 대통령 집무실이 궁궐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많은 직원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미국의 백악관처럼, ‘오피스’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일은 다른 모든 지식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미국의 백악관,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독일의 연방총리관저 ‘분데스칸츨러암트(Bundeskanzleramt)’ 모두 복닥거리는 사무실이다. 민주국가의 행정수반은 그런 곳에서, 마치 국민이 그렇듯,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해답은 ‘일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청와대는 애초에 ‘오피스’로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다. 그 설계부터가 궁궐이다. 거대한 부지의 입구에 마치 양반댁 행랑채처럼 비서동을 배치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저와 본관을 뒀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지만 끔찍하리만치 봉건적이다. 분명 민주주의 국가인데 5년마다 한 번씩 선거로 왕을 뽑은 후 새 왕이 뽑히면 지난 왕의 목을 치는 ‘87년 체제’의 비극은 바로 그런 구조적 모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3월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국방부 앞 전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국방부 신청사로 옮기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기자]
87년 체제’와 ‘궁궐’
청와대를 재활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 동으로 이루어진 여민관과 창성동 별관, 그리고 대통령 관저의 업무 공간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단일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감히 청와대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대통령의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87년 체제’의 모순을 끝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궁궐’에서 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용산 국방부 청사에는 헬기 이착륙장, 지하 벙커, 그 외 필요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피스’행을 지지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19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판타지 로맨스 ‘왓 위민 원트’와
대한민국 남녀갈등 해법은?

멋진 남자, 하지만 나쁜 남자. 잘나가는 광고맨 닉 마셜(멜 깁슨)은 마초에 바람둥이다. 이혼한 전처가 재혼하고, 딸이 아빠를 경멸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던 닉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다. 닉의 회사가 경쟁사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를 채용하더니, 닉이 노리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힌 것이다. 술, 담배, 자동차 광고만 신경 쓰면 그만이던 시절은 갔다. 4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여성 광고 시장을 두고 싸워야 한다. 남성 우월주의자 닉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 그게 대체 뭐지?’

일러스트=유현호

술에 취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리의 털을 뜯어내며 팬티스타킹을 신어보던 닉. 갑자기 집에 찾아온 딸 때문에 당황했다가, 그만 헤어드라이어를 켠 채 욕조에 빠지고 만다. 빠지직!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하다.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더 끔찍한 건 여자들의 ‘본심’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닉의 야한 농담도 받아주던 가정부는 닉을 경멸하고, 택시를 잡아주던 아파트 수위는 속으로 닉을 성희롱하고 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내용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주제지만, 좀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으로 인해 EPL팀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재산이 동결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푸틴 정권과 함께 호의호식했던 아브라모비치를 비난하는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재산을 잃게 생긴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연민은 좀 더 직접적이고 감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길 잃은 개를 볼 때,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 때 이른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당사자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공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육체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전염, 그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공감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 출현한 개념이다. 반면 연민은 18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으로 주목받았다. 대체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볼 때 우리의 도덕은 한낱 관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률이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끼고 배려하는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부론>의 핵심 원리다. ‘보이지 않는 손’, 말하자면 이기주의의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배려한다. <국부론>보다 먼저 펴낸 <도덕감정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연민은 도덕의 토대가 된다. 서로 공유하는 도덕이 있어야 사회가 성립하고 자본주의 또한 가능해진다.

공감과 연민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보완한다. ‘왓 위민 원트’로 돌아가 보자. 닉에게는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공감 능력이 0에서 100으로 솟구친 셈이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이내 그 잠재력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닉에게 딸은 넌더리를 낸다. 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했을 뿐 인간적인 교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감과 연민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진정한 공감과 연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지난 대선 과정을 떠올려 보자. 국민의힘은 여론조사에서 큰 폭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빙이었다. 3월 8일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대 여성 표가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 비해 약 20%p 뛰어올랐다. 기권하거나 정의당을 찍었을 ‘이대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 집단을 비하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노인 투표 발언’, 유시민 전 장관의 ‘나이를 먹으면 뇌가 썩는다’ 발언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다’는 발언을 했다가 응징 투표를 당한 것을 보고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공감도 연민도 없는 발언으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선거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자 본인의 정치 인생에도 두고두고 족쇄가 된다.

이번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층 내에서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막판에 남녀 갈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소리를 해버렸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당연한 일. 정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분석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알던 사실을 21세기 사람들이 왜 모르는 걸까.

닉은 여자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땅 짚고 헤엄치듯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닉에게 애정을 느낀 달시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솔메이트처럼 내 마음을 짚어내던 이 남자가 오늘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버벅거린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하고, 오해를 풀고,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왓 위민 원트’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영화지만 공감과 연민의 힘은 진짜다. 대한민국의 남녀 갈등 역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

2022-03-13

'20대 남자 성비 문제'의 진짜 희생자

2020년 현재 연령별 성비

20대 남자들은 여자보다 1.2배 많고, 그래서 짝을 구하기 어렵고, 일자리도 예전처럼 쉽게 구할 수 없고, 그래서 피해자다.

이런 소리를 이제 남초 커뮤니티가 아니라 나름 양식과 식견이 있는 기성세대 중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옳은 말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성비 박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희생자 집단을 가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여성주의적 맥락에서 낙태권은 곧 여성의 선택권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 낙태에 반대하는 서구 기독교 계열이 스스로를 '프로 라이프'라 할 때, 여성주의는 '프로 초이스'라 하여 여성의 선택권으로서의 낙태권을 옹호하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1세계 문제다. 한국, 인도, 기타등등 남아선호 및 여아살해가 흔한 제3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게 전개됐다. '시댁과 사회의 강요로 인한 여아 낙태'를 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낙태시술이 성행한 것이 여성 인권의 억압과 맞닿은 현상이었던 것이다.

<사이언스>의 기자였던 마라 비슨달은 <남성 과잉 사회>에서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와 서구를 비교해보면 아시아에서의 낙태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와 서유럽에서 낙태 합법화는 보통 낙태 건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것은 보기만큼 역설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태법을 완화할 때는 피임도 함께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아울러 애당초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대두된다. 하지만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연구원 변화순은 "가족계획정책에는 성 인지적 관점(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중심으로 개념과 정책을 검토하는 관점--옮긴이)이 빠져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208쪽]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

'너무 많이 태어나서 짝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그렇게 남자들을 '과잉생산' 하기까지, 낙태를 강요당했던, 이대남들의 어머니 세대는 안 불쌍한가?

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택도 없이 이대남에게'만' 감정이입하며 엉엉흑흑 불쌍불쌍 둥기둥기 해주는지 이해를 전혀 못하겠다.

(아니, 실은 잘 알겠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2022-03-12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尹 시대, 한국정치 개와 늑대의 시간

● 역대급 초박빙 대선의 후폭풍
● 진보성향 유튜버의 송영길 습격
● 일부 친문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 이재명 ‘1600만 표’의 정치적 의미
● 野, ‘굴러온 돌’ 안철수라는 딜레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3월 10일 새벽 4시가 돼서야 당선자가 확정됐다. 1%p 이내, 고작 247077표 차이로 당락이 갈린 역대급 초박빙 대선이다. 이로 인해 기호 1번과 2번, 그러니까 여당과 야당이 5년 만에 교체됐다.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의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내의 권력 구도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가 2위로 낙선하긴 했지만 무려 16147738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때 얻은 13423800표를 훌쩍 웃돈다. 이재명이 차기 대선에서 재기를 도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 원내 제3당 정의당의 현실은 턱없이 초라하다. 2.37%, 803358표. 선거비용 보전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완주해 표가 나뉘는 바람에 대선 결과가 달라졌다는 식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야당이지만 일종의 준 여당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정의당과 민주당의 밀월관계는 정권교체와 함께 끝난 셈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를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를 중심으로 국민의힘이 완전히 개편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4만여 표차의 신승을 거둔 탓에 ‘윤석열발(發)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윤석열은 압도적 의석의 거대 야당과 맞서면서, 동시에 110석의 여당을 ‘대통령의 정당’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중 과제에 놓였다.

‘표삿갓’ 테러의 상징효과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가 떠오르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뭔가 보이지만 뚜렷하지는 않은 시간을 뜻한다.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개인지, 나를 물어뜯으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접어들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내게 다가오는 저 사람과 저 지지층이 나의 편인지 적인지, 나의 편인 척 하면서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것인지, 나를 공격했던 저들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에는 모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이지대(漸移地帶)로 향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부터 살펴보자. 지난 3월 7일, 서울 신촌에서 거리 유세 중이던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 ‘표삿갓’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70대 유튜버가 검은색 비닐로 싼 망치를 이용해 송영길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했던 것이다. 다행히 송영길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처지의 그는 하루 만에 퇴원해 유세와 연설을 이어나갔다. 송 전 대표의 쾌유를 빈다.

‘표삿갓’은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고 종전 선언을 촉구하는 등의 내용을 유튜브에 올려온 인물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에도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가 아닌 진보라는 점,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 지지층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일탈적 범죄 행위다. 이와 동시에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극도로 심각해져 있는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삿갓이 내세운 ‘한미연합훈련 반대’, ‘종전선언’ 등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내 추구했던 대북 외교 현안이다. 그를 문재인의 골수 지지자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반면 이재명은 정치 이력을 시작할 때부터 ‘친노’, ‘친문’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본인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쳐오자 문재인의 아들인 미디어아티스트 문준용 씨를 거론하는 등, 친문 세력 및 지지자들과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는 상태기도 하다. 이재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송영길이 정치적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당내 정치 지형과 무관하다 보기 어렵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의 내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레프트’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친문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다수의 친문 지지자들이 이재명을 버리고 윤석열 지지로 ‘갈아타는’ 이변이 벌어졌다. 2018년부터 이재명과 대립해오던 더레프트 및 이른바 ‘극문’ 지지층은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윤석열 지지를 표명하고 당선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에게 ‘여니’, 운석열에게는 ‘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투항과 전향 사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오른쪽)가 3월 1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도열한 의원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에서 이탈한 반(反) 이재명 지지층이 실제로 얼마나 투표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윤석열을 겨냥한 민주당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분명 일정한 기여를 했다.

윤석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인신공격이 쏟아지던 지난 1월 무렵이 그랬다. 더레프트를 비롯해 친문 ‘네임드’ 지지자 중에는 인터넷에 유포되기 적합한 이미지와 문구 등을 잘 만들어내는, 이른바 ‘능력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그들은 김건희를 향해 쏟아지는 비방과 흑색선전의 내용을 되받아치거나,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귀엽게 묘사하는 여러 ‘짤방’을 만들고 유포했다. 온라인 선전전에서 취약했던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 처지에서 보자면 가히 ‘외계인들이 외계 무기를 들고 와서 도와주는’ 형국이었다.

이낙연계의 유명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윤석열 지지 선언을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민주당 기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와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니 말이다. 이낙연의 측근으로 불린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괴물보단 식물 대통령을 택하겠다”는 그의 말에는 뼈가 있고 가시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내분은 대선 이후에도 심각한 상태다. 선거 이후 이재명의 지지자 중 일부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문자 폭탄을 보냈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민주당 의원은 ‘송영길 대표 사퇴는 안 된다’, ‘패배 원인은 무조건 이낙연 전 총리’라는 취지의 문자를 하루에 300여 통 이상 받았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는 점잖은 말로 바뀌어 서술돼 있으나, 실제로는 온갖 욕설과 폭언이 담겨 있으리라 예상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이 50% 이상의 과반 득표를 하고, 이재명은 40% 이하의 득표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선에 참패한 민주당의 내분은 본격적으로 더 크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낙연의 열혈 지지층은 이재명이 부패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해왔다. 게다가 선거 결과로 무능이 드러나기까지 했다면, 이재명과 이재명계를 쫓아내거나 자신들이 따로 짐을 싸서 나가버리거나, 아무튼 한 집 살림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에 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인 가운데에서도 1600만여 표를 얻는 성과를 냈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졌지만 민주당을 움켜쥔 ‘그립’을 놓치지 않고 더 단단히 다져나갈 수 있다. 3월 10일 새벽 4시 KBS의 당선 예측이 나오자마자 후보자 본인이 빠르게 승복 선언을 하고, 같은 날 송영길을 비롯해 당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진다며 총사퇴한 것은, 오히려 자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선거에서 졌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패배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의 임기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은 이미 야당으로, 윤석열의 인수위로 넘어간 상태다. 현직 대통령과 ‘친노 적통’을 믿고 버텨온 친문 혹은 극문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쪽에 투항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한번 지지했으니, 윤석열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믿고, 문재인이 임명한 검찰총장 윤석열의 지지자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할까? 저들은 나의 아군인가? 나는 저들에게 늑대인가, 개인가? 시계(視界) 제로.

이준석을 둘러싼 갈등 지형
대선을 이틀 앞둔 3월 7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경기 화성시 동탄센트럴파크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개 속처럼 뿌연 상태인 것은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 윤석열의 지근거리에는 소위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으로 통칭되는 측근 그룹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 점을 연신 지적해왔고, 윤석열이 윤핵관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자 지방으로 떠나는 식의 행보를 보여줬다. ‘윤핵관’과 ‘이핵관’, 그리고 윤석열의 당선에 기여한 다른 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은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교체에 성공했기 ‘ 때문에’ 앞날을 예단하기 어렵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율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과 그에 따른 ‘전리품’은 그대로 있는데, 누가 그것을 차지해야 하는가? 윤석열이 교통정리를 해서 완벽히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초박빙 승부로 결정된 여소야대 정권은 위기에 직면하기 쉬운 구조다. 정치에 입문한지 고작 8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초보 정치인’ 윤석열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이준석의 영향력은 크게 상처 입은 상태다. 호남에서 30% 이상의 득표를 올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대포위론’의 힘으로 전체 득표율에서 10% 이상의 격차를 벌려 압승하리라는 호언장담은 무참히 깨졌다. 국민의힘의 호남 진격은 약 15% 정도의 득표율로 귀결됐다. 이는 그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얻은 호남 득표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국민의힘이 호남을 끌어안는 전국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대남’ 구애 전략 혹은 여성주의 고립 전략이다. 이준석과 극적으로 화해한 윤석열이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짧은 메시지를 올려 여론을 반등시킬 때만 해도 이 전략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4일과 5일 사전투표가 시행된 후, 3월 7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준석이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며 “저는 그런 (여성들의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 성향 관련)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재명 선대위는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성들이 겪는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민주당은 20대 여성표심을 겨냥했고 서서히 판세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준석은 젊은 여성들의 표심을 ‘어차피 투표하러 안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일축했다. 역풍을 불러올만한 발언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기간 금지 전인 3월 2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20대 여성으로부터 39.1%, 윤석열은 26.7%의 지지를 받았다.(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1주일 후인 대선 당일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을 향한 20대 여성의 지지는 58.0%로 폭증한 반면, 윤석열의 표는 33.8%로 완만하게 늘었다. 안철수와 단일화를 했지만 안철수가 갖고 있던 20대 여성표는 윤석열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석 심판을 위해 이재명에게 결집하면서 이번 대선을 초박빙 승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준석이 끌어들인 남녀 갈등은 국민의힘의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의당의 고통스러운 홀로서기
‘정치 초보’ 윤석열이 풀어야 할 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와 합당까지 합의한 안철수를 어떻게 예우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선거가 워낙 박빙으로 끝난 탓에 안철수가 어떤 기여를 했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관계자들 간의 해석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안철수와 ‘굴러온 돌’들은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겠지만, 국민의힘의 ‘박힌 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307542표나 쏟아져 나온 무효표를 근거로, 안철수의 기여가 낮으니 많은 지분을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국민의힘 바깥 뿐 아니라 안에서도 적과 동지의 경계선은 흐릿해지면서 많은 이들을 혼란과 번민으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정의당은 더욱 험난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창당된 후 10년간 정의당은 민주당 및 그 지지층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수립하며 동반 성장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그 전략이 유효성을 상실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됐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선 패배 책임론을 언급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제 고통스러운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과연 진보정당으로서 독자 노선을 수립하고 지지층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을까?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뜰녘과 해질녘, 하루에 두 번 있다.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나의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으나, 해뜰녘의 불확실성은 조금만 기다리면 확실히 마무리된다. 반면 해질녘의 흐릿한 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오래도록 지속될 짙은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겪게 될 개와 늑대의 시간이 해질녘의 어둠이 아닌 해뜰녘의 어둠이기를, 곧 해가 뜨고 많은 것이 분명해지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이룰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원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SNS에 우크라이나 도착 소식을 올린 이근. 배경은 러시아군 포격으로 불타는 하르키우시. 그래픽=전유진  

먼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이근 대위'라는 유튜브 셀럽(유명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유튜브 방송 '가짜사나이'에서 그가 반복하던 "너 인성에 문제 있어?" 같은 유행어는 사실 왜 유행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참전이 목적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외교부는 여권법 위반에 대한 행정 제재를 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난 8일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정부의 규정된 사전허가 없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외교부는 현재 여권법에 따라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를 통해 여권에 대한 행정제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권법 위반에 따른 행정 제재는 여권 반납 명령→(불응시) 여권 무효화→새 여권 발급 제한 등 3단계 조치로 이뤄진다.
오웰도 처벌해야 했을까
우크라이나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 코미디언 앤서니 워커. [트위터 캡처]
 
하지만 나는 이근의 우크라이나 의용군 참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정부가 이근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이들의 참전을 막는 것에도 회의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왜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전쟁에 나설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걸까.

이쯤에서 조지 오웰을 한번 소환해보자. 193612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의용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저널리스트로 그곳에 갔지만 난생처음 가본 카탈루냐에 발을 딛자마자 의용군에 들어가 버렸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은 무정부주의적인 카탈루냐에 매료됐고, 프랑코 정권에 맞서 카탈루냐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고 느껴서 기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스페인 내전에 가담했다.

전쟁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장의 공포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과 내분이었다. 특히 소련의 지원을 받는 스탈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공통의 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프랑코 정권의 파시스트들보다 때로는 더 악독했다. 결국 오웰은 몸과 마음의 부상을 끌어안은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원고를 쓰려고 그의 『카탈루냐 찬가』를 다시 읽어봤다. 어디에도 영국 정부가 오웰의 스페인 의용군 입대를 처벌했다는 내용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타국에서 목숨을 거는 일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닐 수는 있어도 금지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깔려 있어서일 것이다.

영국·캐나다·미국 등은 여전히 그런 상식이 통한다. 심지어 영국과 캐나다는 우크라이나 참전을 원하면 참여해도 좋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역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가 차원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침략자 러시아와 싸우고 싶은 국민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외인부대 되는데 '이근'은 안 된다?
지난 8일 화상으로 영국 하원 연설을 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합뉴스]
 
이런 상식은 한국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비단 강경한 정부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이근의 우크라이나 입국을 다룬 기사에 달린 일반 국민의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이유로 그의 우크라이나 행을 비난한다. 첫째,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은 외교 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실제 전쟁에 뛰어들면 총, 칼, 폭약 등을 사용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그건 범죄다. 셋째, 한국인이라면 한국을 지켜야 한다.

이 비판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이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모인 2만여 명의 외국인 입대 지원자들은 모두 전쟁을 하려고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침공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속성으로 시민권을 발급받은 외국인들은 '국제 군단'(International Legion) 등 별도 편제로 묶여 우크라이나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법적·제도적 절차를 갖추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반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된다. 원래 한국인이라도 우크라이나 군복을 입고 작전을 수행하면서 러시아군을 사살한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교전 행위일 뿐이다.

프랑스에는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외인부대'가 있다. 이들 외인부대는 대개 프랑스 국경 바깥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실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한국인 중에도 이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다른 어떤 나라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때로는 사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한국과 제3국의 외교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전쟁 중 적군을 살상하고 오면 살인죄를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군인이 작전 중 수행한 행위는 통상적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할 수 없다.

분단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엄혹한 현실이 있는데 이를 내버려 두고 굳이 외국의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떨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에겐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까지 그런 논리를 적용하는 건 무리다. 대한민국 남성은 국가의 '병역 자원'이기에 앞서 양심과 의지를 지닌 독립된 인격체다.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송두리째 부정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참전에 살인죄를 묻겠다니
지난 1일 영국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국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은 자국민의 참전을 허용하고 있다. [EPA]
 
문제는 법이다. 우리 법은 안타깝게도 그런 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형법 제 111조 사전죄(私戰罪)다. 이에 따르면 "외국에 대하여 사전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용군으로 외국 군대에 들어가 참전하면 외교상 문제를 일으켜 국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게 이 조항이 만들어진 주된 이유다.

그런데 지금도 한국인들은 프랑스 외인부대, 혹은 한국 국적을 가진 채로 미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조롱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국제 군단을 프랑스 외인부대나 미군과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을 찬성하지 않는다.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국내법을 어기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들어 우크라이나를 돕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의지를 국가가 법으로 틀어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머나먼 땅,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그 나라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뒹굴다 목숨을 잃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국가가 자국민의 양심적 병역 거부마저 존중하는 시대에, 양심적 병역 수행 역시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나도 안다.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로서 우리 사회에 작은 생각의 균열을 내고 싶다.
이근을 비롯해 우크라이나군에 자원입대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한다.

2022-03-08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답: 불가능하다. 돈도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나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해외 금융자산 동결. 아무리 많은 '외환보유고'를 쌓아도, 그게 자기 땅 자기 곳간에 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은 한, 이토록 쉽게 빼앗기고 마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깨닫고 있다.

링크한 WSJ 기사도 그런 것. 아예 첫 줄부터 이렇게 묻는다. "What is money?" If Russian Currency Reserves Aren’t Really Money, the World Is in for a Shock"

실로 그렇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그토록 열심히 축적해온 '외환보유고'라는 게, 이런 식이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과 전쟁하려고 하면 싹 동결될 싸이버 머니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돈이 그런 것이다. 돈을 돈으로 만드는 건 화폐 구성 물질의 재화로서의 가치나 유용성이 아니다. 신용을 보증해줄 권력, 힘, 폭력, 그런 것들이 돈을, 특히 기축통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노정태라는 훌륭한 필자가, 신동아라는 역사와 전통의 근본 시사 정론지에 쓴, 이 칼럼을 참고해볼 수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이어가 보자. 민주당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평화를 돈으로 사자'로 요약된다. 북한에 유화책을 펴서 돈을 주고, 돈을 더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면, 우리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논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힘이 충분히 강해 상대방이 나를 넘보지 못할 때 구현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돈을 적에게 주는 식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악당에게 돈을 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란 힘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평화의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짓이다.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그것은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이겨 세계를 정복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워낙 막대한 힘으로 평화가 강요되었기에 돈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드디어 '장기 20세기'가 완전히 끝났다. 지정학과 네셔널리즘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2022-03-05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젤렌스키 조롱은 反민주적이다

● ‘젤렌스키 무능론’은 與 당론?
● 민주주의, ‘부적격자에 자격주는’ 역사
● 프랑스 마크롱도 ‘초보 정치인’이었다
● 나라 리셋 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 뉴시스]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NATO)가 가입을 해주려 하지 않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5TV토론에서 한 말이다. 우상호 민주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2월 28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러 미숙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재명을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탓하는 척하면서 우크라이나에도 슬쩍 책임을 돌리고, 젤렌스키에게 ‘정치 경력 없는 초보 무능 대통령’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박용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2월 25일 광주방송에 출연해 이재명과 동일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마치 당론처럼 밀어붙이는 ‘젤렌스키 무능론’은 왜 등장한 것일까? 속내는 박용진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의 여지없이 해소된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외적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무능한 초보 정치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 최근 방송 토론 보시면 건성건성 대답해요. (중략) 이 중요한 국가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맡길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호렌카에서 3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일부 뼈대만 남은 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남부 헤르손을 장악한 러시아는 인근 마리우폴, 키이우, 동부 하르키우 등에 전방위적 공격을 퍼부었다. [AP 뉴시스]
‘인민의 일꾼’에서 대통령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렌스키는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치 풍자 시트콤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해 단번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틀린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젤렌스키에 빗대 윤석열을 폄하하려 하는 이재명과 민주당의 공격은 퍽 부당하다. 타국민이 겪는 전쟁과 고통을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비윤리적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고 나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곧 ‘부적격자에게 자격을 주는’ 역사다. 참정권과 투표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궤적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민주주의가 ‘외래 문물’로 수입된 한국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소수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을 뒤늦게,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처음에는 유산계급 남자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 그러다 유색인종 유산계급 남자, 무산계급 남자, 유산계급 여자, 무산계급 여자 순서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됐다.

선거에 나온 다른 이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거에 출마해서 다른 이의 표를 받아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 ‘아니, 코미디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저 나라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따위 반응을 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종의 사농공상 내지는 카스트 제도를 내면에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 선거에 나왔다면 그 사람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런 선택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그 또한 정치적 자유의 일부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구분 짓고 웃음거리로 삼아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트럼프, 오바마 그리고 마크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져 왔다. 21세기의 인상적인 선거를 놓고 보자면 오히려 최근의 역사는 ‘자격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트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깜짝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이변이라고 보도하는 해외 언론들을 보면서, 그게 어느 정도의 이변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나홀로 집에 2’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다.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 16에서 18명의 지원자가 접수한다. 트럼프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골탕 먹이고, 속이고, 혼내고, 해고한다.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당신은 해고야!)가 ‘어프렌티스’를 상징하는 명대사인 것은 그래서다. 백만장자 트럼프가 ‘노답’, ‘고구마’인 지원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고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어프렌티스’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만들어낸 진정한 이변은 대선이 아니라 공화당 경선이다. 조직도 경험도 없는 트럼프가 쟁쟁한, ‘자격’ 있는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트럼프 본인도 과연 그 정도 성공을 예상했을 지에 대해 정치 전문가와 기자마다 의견이 갈릴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중의 마음이다. 미국인,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워싱턴 DC에 모여 있는 기성 정치인들, ‘자격’이 충분한 그들을 싸잡아서 싫어했다. 그 모든 이들을 향해 ‘유 아 파이어드!’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분노의 열풍은 트럼프만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의 선임자인 버락 오바마 역시 ‘기득권 대 정치 신인’의 구도를 타고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케이스다. 물론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그 후 시카고에서 인권변호사 겸 헌법학 교수로 일해 왔다.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력은 ‘중앙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뿐 아니라, 경선 과정에서 나가떨어진 수많은 후보 중 그 누구도 오바마에 비해 경험과 ‘자격’ 면에서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오바마를 택했다. 그가 잘 생긴 젊은 남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근본적인 동력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군가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혀, 나라 전체를 리셋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국립행정원(ENA) 졸업 후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수와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부실장과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모든 이력을 통틀어 마크롱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간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8월 장관직을 내던지고 ‘전진하는 공화국’이라는 정당을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가 경험한 최초의 선거다. 마크롱은 젤렌스키와 다를 바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자’가 아닌 열망을 조직하는 자
이렇듯 민주국가의 선거는 ‘자격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정 시점에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열망을 잘 조직하고 반영하는 이가 승리를 거두게 돼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안정을 추구하며 계층과 계급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 즉 보수 진영일수록 선거에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선거 회의론자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몇 명의 후보를 선거로 뽑은 후, 최종 결과는 추첨에 의해 결정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어차피 최종 후보에 속할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 사람일 테니 극한의 대립과 정쟁을 벌이지 말고 최종 승자의 결정은 운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고진은 추첨제를 제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퍽 나이브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는 정치력, 경제력,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참여자를 제한하기에 완벽하게 민주적일 수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런 비판이 옳은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추첨제가 선거보다 나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선거마저도 필요 없다’, ‘적당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첨하면 된다’ 이런 주장까지 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는 유권자의 열망을 조직하여 국가적 분위기와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행사다. 민주주의 선거에 '부적격자'는 없다. 젤렌스키 같은 배우 겸 TV 프로그램 제작자건,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학평론가건, 누구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젤렌스키를 조롱거리로 삼아 국내 정치에 끼워 맞추려 들었던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킹스스피치’의 청중 효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청중 비용’

일러스트=유현호
 

1925년, 영국.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버티(콜린 퍼스)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다. 아내 엘리자베스(헬레나 보넘 카터)는 남편을 위해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러그(제프리 러시)를 찾아냈다. 라이오넬은 공인 자격 없는 아마추어 치료사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것은 몸이 아닌 마음 문제인 것이다.

버티는 네 살 무렵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대만 크고 강압적인 아버지 조지 5세와, 왕족의 책임 따위 무시한 채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동생을 쪼아대는 형 데이비드에게 억눌리면서 생긴 심인성 말더듬증이다. 조지 5세는 장성하여 두 딸까지 두고도 여전히 말을 더듬는 작은아들을 보며 탄식한다. “과거의 왕은 옷만 잘 입고 말만 잘 타면 그만이었어. 지금은 집에 있는 대중의 환심을 끌어내야만 해. 이제 우리 왕족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우리는 배우가 된 거야.”

바다 건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아가는 가운데 조지 5세는 세상을 뜬다. 그 뒤를 이어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른 형 데이비드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성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해버린다. 버티는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조지 6세가 되어 마이크 앞에 서야 한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이다.

버티의 문제는 무엇일까? 라이오넬과 버티의 첫 수업. 라이오넬은 버티가 헤드폰을 쓰게 한 후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주면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대목을 낭독하게 한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축음기에 녹음된 버티의 목소리는 유창했던 것이다. 단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청중 효과(audience effect)가 부정적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중 효과란 말 그대로 청중의 존재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관객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 때 최고 기량을 발휘하는 반면, 어떤 선수는 연습할 때는 펄펄 날지만 관객이 들어오는 실제 시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버티는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을 느껴 말을 더듬는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심리 현상이다.

이 개념을 국제정치학 영역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국제정치학의 거대 담론 중 하나인 ‘민주 평화론’을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 여론에 따라 움직이므로, 적어도 잘 발전한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고전적 이론이다. 1994년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피어론 교수는 이마누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 평화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청중 효과를 연상케 하는 ‘청중 비용(audience cost)’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국민에게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민주국가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민이 정치권의 청중이 되어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국가가 절대 전쟁을 하지 않거나 전쟁을 무조건 피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민들 스스로가 외국의 침략에 맞서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면, 설령 지도자가 평화를 원한다 해도 전쟁 여론을 억누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압력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에 비해 청중 혹은 국민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바가 많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정치인이 국민 여론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정치적으로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대신 국민이 원하는 방향의 정책이나 전쟁이라면 독재국가보다 더 전폭적인 지지와 희생을 얻어낼 수 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지불해야 하는 높은 청중 비용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처럼 적국을 기만하여 기습 전쟁을 벌이기 어렵지만, 공개적으로 전쟁에 나서면 독재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킹스 스피치>로 돌아가 보자.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의 도움을 받아 더듬거리면서도 성공적으로 전쟁 연설을 해낸다. 입헌군주정의 군주가 치러야 할 높은 청중 비용이다. 그와 함께 전쟁을 이끈 처칠 총리도 마찬가지다.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식의 달콤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뿐’이라며 국민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높은 청중 비용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을 하나로 모아 국난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월 러시아는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우크라이나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단, 젤렌스키 대통령만은 예외였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로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수도 키이우(키예프) 사수 의지를 드높였다. 미국에서 항공편을 제시하자 ‘탈출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작은 승전보가 쌓이면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푸틴과 러시아를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점점 커지는 전쟁의 청중 비용이 우크라이나를 북돋고 러시아를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지난 2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TV 토론에서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상식 이하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자 민주당 측 인사들은 마치 당론으로 정하기라도 한듯 젤렌스키를 ‘코미디언 대통령’이라고 조롱하며 러시아를 두둔하거나 양비론적으로 발을 빼는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외국인들 보기에 너무도 부끄럽다. 우크라이나는 코미디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우리는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코미디를 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 정치는 웃기지도 않고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다. 거짓말로 호객하고 자리에 앉으면 정체불명 약을 파는 약장수 광대들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 3월 4일과 5일, 대통령 선거 사전 투표일이다. 9일에는 본투표가 있다. ‘청중’인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을 몇 안 되는 기회,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

2022-03-04

바가바드 기타(1)

얼마 전 반야심경의 현대어 번역 어쩌구 하는 글을 썼는데, 그 주제가 머릿속에 남아서, 이것저것 틈틈이 좀 더 찾아보다가, 며칠 전 거리에서 '샨티'라는 이름의 인도 식당을 보았고, 엘리엇의 '황무지'의 마지막 줄인 '샨티 샨티 샨티'를 중얼거리다가, 최초의 핵실험이 터져나올 때 오펜하이머가 주절거렸던 '나는 이제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도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대목을 연상했으며, 그리하여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 니체를 굳이 읽을 필요조차 없다.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및 여타 인도 철학을 애호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강렬한 텍스트가 결국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며, '너희 크샤트리아들은 우리 브라만이 시키는대로 가서 쌈박질이나 해라'는 취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을 애호하는 자들과도 마찬가지다(니체 철학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애매하고 또 우스꽝스러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신랄하게 비웃은 바 있다).

하지만 실로 강렬한 텍스트인 관계로, 머리에서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 내지는 '보다 나은 계급'의 일원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구의 리버럴 계층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더욱,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을 테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사티야그라하 무대 영상을 세 번째 돌려보다가, 이제 한 번쯤 글로 털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타자를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