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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3

코로나와 인종 문제, 혹은 정치적 올바름의 재구성

수많은 확진자가 나오는 가운데 점점 분명해지는 사실. 코로나는 인종별로 영향이 달리 나타납니다. 영국에서 수집된 자료에 따르면, 흑인 남자의 사망률은 백인 남자에 비해 네 배 높음. 흑인이 인종차별 당해서 아니냐? 하겠지만 인도인(대체로 흑인보다 소득 수준이 높음)도 백인 남자에 비하면 코로나로 두 배 많이 죽습니다.

그러니 인종별로 세부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데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유대인이나 로마니(aka 집시)처럼 인종으로 분류되어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집단들은 더더욱 인종 정보 제공을 원치 않기 때문.

하지만 인종 자료가 필요하고 유의미하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코노미스트의 이 기사에서 제시하는 사례. 브라질은 1990년대부터 피부색에 따라 인종을 5개로 분류했더니, 백인과 그 외 인종의 영아사망률 차이가 가시화되었고, 사회적 분노가 집중되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After Brazil started collecting data in the late 1990s by five different skin-colours, the gulf in infant mortality between indigenous and white babies became apparent. Public outrage led to serious efforts to start narrowing the gap. The Brazilian example shows that the data need to be granular. Catch-all terms such as “BAME” (Black, Asian or Minority Ethnic), used in Britain, are unhelpful. “Non-Western migrant” or “foreign born” contain even less information.

그러므로 '흑인과 아시아인과 소수자', '비서구 이민자' 같은 뭉뚱그리는 표현을 이제는 지양해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지적. 코로나로 인해 인종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새로운 방향에서 생각해보게 되는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2020-10-25

[신동아] 후쿠시마 오염수 삼중수소 8조6000억㏃의 진실

 

후쿠시마 오염수 삼중수소 8조6000억㏃의 진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입력 2020.10.25. 10:01 수정 2020.10.26. 13:40
[노정태의 뷰파인더⑥] 과장된 대중적 공포, 상식 부합 안 해

●모든 물은 삼중수소 함유수
●원전 오염수 방류, 원자력 시대 일상사
●나약하고 뿔뿔이 흩어진 방사성 물질
●인체 피해 방사성 물질은 금보다 비싸
●원전 ‘절대악’ 만든 건 美 대중문화
●文대통령과 영화 ‘판도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일본 후쿠시마 제1원전 부지에 놓인 오염수를 담은 탱크들. [후쿠시마=김범석 동아일보 특파원]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해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물이 대량 발생했다. 그 양은 현재까지 118만t에 달한다. 원전 자체가 해안가 낮은 지대에 건설돼 있다 보니 지하수가 스며들어와 매년 오염수 5~6만t이 추가 발생한다. 지금처럼 보관만 해서는 시설 용량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적절하게 방사성 물질을 처리해 독성을 없앤 후 바다에 방류하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계획이다. 한국 정부는 진작부터 반대의 뜻을 표했다. 

온갖 언론 보도를 봐도, 일본 정부가 방류하겠다는 '오염수'가 대체 얼마나 오염돼 있는지, 방사성 물질 제거 처리를 했다면 그 결과물은 얼마나 깨끗한지 비교 가능한 숫자가 제시돼 있지 않다. 그저 '어마어마한 삼중수소가 바다로 쏟아져 들어온다고요!'라는 호들갑스러운 공포 마케팅뿐이다. 이 지면을 통해 국내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숫자 몇 개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오염수 안 삼중수소 8조6000억㏃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 안에 담겨 있는 삼중수소는 8조6000억 베크렐(㏃)이다. 그 외에도 세슘-137 등의 방사성 물질이 포함돼 있다. 낯선 단위가 나오지만 일단 그냥 넘어가보자. 현재 보관 중인 오염수 중 28%인 30만t 정도는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안전규제 기준을 만족시키고 있다. 나머지 72%는 기준에 미달한다는 사실만 기억해둬도 충분하다. 또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배출은 2021년 한 해가 아니라 향후 30년에 걸쳐 이뤄질 전망이다. 나머지 72%에 대해서도 정화 작업을 완료한 후 방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8조6000억 베크렐. 겁이 난다.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수도권 주민의 식수를 제공하는 소양강댐에 2조9000억 베크렐의 삼중수소가 담겨 있다. 전체 물의 양과 그 속의 삼중수소량을 따지면 후쿠시마 오염수의 삼중수소 농도가 훨씬 높을 테지만,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는 숫자를 들이밀며 겁을 내라고 윽박지르는 자칭 '환경주의자'들의 말만 듣고 따를 일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은 삼중수소 함유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이 방류하겠다고 하는 오염수는 정화 작업이 끝난 것이다. 말하자면 '정화된 물'이다. 나라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국제 표준을 따른다. 국제 표준에 따르면 원전에서 사용한 후 바다에 방류하는 물은 음용 가능한 수준으로 정화하도록 돼 있다. 일본이 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야 없다. 하지만 기준을 지켰다는 전제 하에, 이미 정화된 물 30만t의 방류를 반대할 과학적 근거 역시 어디에도 없다. 

라파엘 마리아노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2월 27일 일본을 방문해 "(원전 오염수를 정화 처리 후) 바다에 방출하는 건 국제 관행에 일치하는 방식"이라며 "전 세계에서 엄격한 기준에 따라 해양 방출은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한 것은 IAEA가 일본의 앞잡이거나 그로시 사무총장이 '푸른 눈의 토착왜구'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냥 과학적 사실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 것이다.

나약하고 뿔뿔이 흩어진 방사성 물질

한국 언론 어느 곳도 '삼중수소수는 원래 적당히 농도가 옅어지면 바다에 버리거나 대기 중으로 증발시킨다'는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고 있지 않다. 일본이 지금까지 후쿠시마 삼중수소수를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례적이다. 유엔과학위원회(UNSCEAR)의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공기와 바다에 삼중수소를 흩뿌려댄 '원자력 악당' 국가의 명단에는 캐나다, 대한민국, 그 밖에 온갖 국가가 속해 있다. 

1990년부터 1997년까지, 캐나다의 포인트 르푸르 원전은 매년 170조 내지 640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대기 중으로 발산했다. 삼중수소가 들어 있는 물을 끓여 수증기로 날려 보냈다는 뜻이다. 매년 110조 내지 500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바다에 퍼붓기도 했다. 

여기서 '매년'에 주목해보자. 후쿠시마 원전 부지 내 저장고에 들어 있는 모든 삼중수소를 다 더해도 860조 베크렐 정도다. 캐나다는 그 정도 분량을 '매년' 공기 중으로 흩뿌리거나 바다에 뿌렸다.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방류한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건 특별한 환경 재앙과 거리가 멀다. 원자력 발전소라는 것이 생긴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져온 일상사에 가깝다.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유엔과학위원회에서 내놓은 2000년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월성 1호기와 2호기는 1990년부터 1997년까지 매년 231조 내지 625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대기 중으로 방출했다. 매년 42조 내지 180조 베크렐의 삼중수소를 동해 바다에 버리기도 했다. 프랑스의 라아그 재처리 시설은 매년 후쿠시마 원전수의 열 배 가량의 삼중수소를 바다에 버린다. 

지금 나는 '후쿠시마의 재앙이 알고 보니 전 세계에 만연해 있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정반대다. 월성 1호기와 2호기에서 삼중수소를 배출했지만 우리의 건강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후쿠시마의 오염수 방출 역시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과 그 밖의 세계인의 건강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어느 나라에서 바다로 폐기하건 삼중수소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에는 너무도 나약하고 뿔뿔이 흩어진 방사성 물질이다.

푸틴과 '방사능 홍차' 사건

10월 21일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산업정책관실 신문보관함에 탈원전 정책 관련 감사원 감사 결과 발표 기사가 담긴 신문이 놓여 있다. [뉴스1]
물론 모든 방사성 물질이 그런 건 아니다. 그 유명한 '방사능 홍차' 사건을 생각해보자.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직 KGB 요원 알렉산드르 발테로비치 리트비넨코를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푸틴은 자신이 그 범죄와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다수가 푸틴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독살에 동원된 방사성 물질이 폴로늄 210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연간 생산량이 100g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극히 희귀한 물질이다. 그런 방사성 물질을 생산하고 취급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국가와 기관의 수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그런 국가의 수장 중 리트비넨코를 죽이고 싶어 할 사람은 딱 하나 뿐이다. 

대중이 갖고 있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와 실제 방사성 물질이 지니고 있는 특성의 차이를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다. 사람들은 흔히 원자력 발전소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언가가 수백만 명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 효과도 즉각적으로 나타나리라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인체에 즉각적 피해를 불러올 수 있는 방사성 물질은 매우 비싸고 귀하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독살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방사성 물질은 '그렇다면 범인은 푸틴'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만큼 귀하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의 재료나 발전소의 연료로 쓸 수 있는 방사성 물질 역시 비싼 물건이다. 2011년의 시세로 보더라도 플루토늄은 1g당 약 4000달러에 달하는데, 당시 금값은 1g당 50달러 내외였다. 금보다 80배는 비싼 광물이 바로 플루토늄이다. 흔히 '사용후핵연료'라고 불리는 그것에는 매우 비싼 방사성 물질이 한가득 들어 있다. 

그러므로 방사성 물질을 함부로 유출할 것이라는 우려 따위는 할 필요가 없다. 금 세공 업체에서 금을 유출하는 일이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사성 물질을 다루는 곳에서는 방사성 물질을 유출하지 않는다. 위험 여부를 따지기에 앞서 자연계에 쉽게 존재하지 않는 아주 비싼 물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건 캐나다건 일본이건 바다나 대기 중으로 내보내는 방사성 물질은 삼중수소처럼 쉽게 희석시킬 수 있는 반감기가 짧은 것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과장된 대중적 공포, 상식 부합 안 해

방사능에 대한 대중적 공포는 과장돼 있다. 과학뿐 아니라 단순한 상식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가령 일부 사람들은 도쿄가 후쿠시마와 가까우니 두 곳 대신 후쿠오카에 여행을 다녀오는 게 건강에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 중, 서울 등 수도권과 강원도는 화강암 지반이고 따라서 도쿄보다 자연방사능 수치가 높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발생지에 가까운 도쿄에 사는 일본인보다, 훨씬 먼 곳인 서울에 사는 한국인이 매년 평균적으로 훨씬 더 많은 방사능에 노출되고 있다. 자연의 법칙상 그럴 수밖에 없다. 

서울 사람이나 도쿄 사람이나 그 미세한 방사능의 차이로 인해 건강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의료계는 한국인의 연간 자연피폭량을 2.5밀리시버트로 간주한다. 반면 일본에 사는 사람은 연간 1.5밀리시버트의 자연방사능에 노출된다고 보는 게 통상적이다. 방사능 총량만을 놓고 보면 한국보다 일본이 '방사능 청정지대'인 셈이다. 

그런 미세한 수치는 현실에 아무 영향도 주지 못한다. 인간의 건강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미치려면 노출되는 방사선량의 단위가 '시버트' 쯤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5시버트에 노출되면 50%의 확률로, 10시버트에 노출되면 100% 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2.5시버트의 방사능에 노출되더라도 곧장 죽지는 않는다. 밀리시버트 1000개가 모여야 1시버트가 된다. 2.5시버트란 우리가 한 해 내내 자연 상태에서 노출되는 방사능의 1000배에 달하는 셈이다. 

방사능의 공포에 대한 모든 숫자는 일상과 거의 무관하다. 방사능 홍차를 마실 일이 없는 한, 그렇게 높은 방사능에 노출된다는 것 자체가 일상의 생활 영역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가장 확률 높은 방사능 피폭은 의료기기를 통한 것일 텐데, 그마저도 전문적으로 훈련된 의료 인력에 의해 운영되고 또 모든 과정이 감시되고 있다. 불필요하게 긴장하거나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렇게 방사능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대중문화 속 '절대악'

2016년 12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의 한 영화관에서 영화 ‘판도라’를 관람하기 전 박정우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이게 다 미국 때문이다. 워싱턴의 정치인들 얘기가 아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대중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이들의 영향력 탓에 우리는 원자력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때는 1979년 3월 16일. 영화 '차이나 신드롬'이 미국에서 개봉했다. 원자력 발전소의 노심이 용융돼 한없이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 중국까지 닿을 것이라는 가상의 사고 상황을 다룬 작품이었다. 문제는 약 열흘 후인 1979년 3월 28일, 스리마일섬 원자력 발전소에서 실제로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열광적으로 공포를 퍼뜨렸다. 대중은 패닉에 빠졌으며, 이후 미국과 전 세계 대중문화 속에서 원자력은 '절대악'으로 내몰렸다. 

잘 생각해보자. 1980년대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돌연변이 닌자거북' 시리즈라던가, 그 무렵부터 쏟아져 나온 온갖 B급 호러 영화에 등장하는 '방사능 괴물'들을. '불가해한 환경 재앙으로 인해 발생한 돌연변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원전 사고나 방사능 물질 등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돼 왔다. 독립 단편 영화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어떤 책에서는 '괴물의 정체를 설명하기 귀찮으면 적당한 핵폭발 장면을 편집해서 삽입하라'는 조언이 실려 있기도 했다. 원자력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무언가, 혹은 그 자체가 괴물인 무언가로 낙인찍히고 만 셈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원자력 혐오'다. 마치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특정 지역 방언을 쓰는 사람들을 죄다 조폭처럼 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중문화 매체가 죄책감 없이 혐오 표현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아무런 생각도 고민도 없이, 방사능이나 원자력 같은 단어를 들으면 조건반사적으로 '돌연변이'니 '환경 재앙'이니 하는 말을 떠올리고 늘어놓게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장된 공포는 현실과 무관하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는 사고 발생 직후인 1979년 4월 1일 현장을 시찰했다. 그는 따로 방호복 등을 갖춰 입고 있지도 않았다. 한국에 설치된 대부분의 원자로와 마찬가지로 스리마일 2호기는 가압경수로였다. 사고가 났다고 하지만 그 어떤 방사능도 유출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는 대통령은 평소와 다름없는 양복 차림으로 사고가 난 원자력 발전소 내부까지 시찰했다. 

일단 불붙은 대중문화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원자력은 손쉽게 괴물로 몰아붙일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무언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대중적 인식은 근거 없이 확증편향만을 덧붙였다.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의 대중문화가 원자력 혐오에 기여하거나, 적어도 무관심하게 동조하는 가운데, 세월이 흘렀다. 한국에서도 2016년 '판도라'라는 영화가 개봉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당시에 관람했다. 그 후의 전개 과정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다.

혐오로부터의 탈피

이제는 원자력에 대한 공포, 혹은 그 공포를 빌미 삼은 혐오를 이겨내야 할 때가 아닐까. 기후변화 국면에서 탄소 배출 없이 인류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충분히 생산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돌파구가 바로 원자력이다. 테라파워라는 벤처 기업을 만들어 신형 원자로를 개발 중인 빌 게이츠가 늘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21세기에 화석연료에서 원자력으로 에너지 대전환을 이뤄내지 못하면 후손들이 살아갈 22세기는 매우 어두운 시절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를 통해 대한민국이 그 세계사적 전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부디 공포와 혐오의 선동을 걷어내고, 사실에 입각한 성숙한 과학 기술 정책 논의가 이뤄졌으면 한다.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05-05

Planet of the Humans (1)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Planet of the Humans’를 방금 다 보았다. 아무렇게나 순서 없이 일단 적어놓는 감상.

미국 민주당 계열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빌 매키번, ‘지구가 아프다 다큐’로 뭔가 큰 상도 받았던 미국 전직 부통령 앨 고어, 민주당 대선 주자로 경선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쓰고 그만둔 마이클 블룸버그 등, 쟁쟁한 인물들.

그들이 어떻게

  1. Green energy라는 구호를 내걸고 돈벌이를 하고 있는지,
  2. 자신들이 내세우는 구호와 biofuel(나무 썰어서 폐 타이어 등과 태우는 것)의 괴리를 얼버무리는지 
  3. 그 결과 지구가 어떻게 더 망가져가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충격적인 작품.

나도 한때 열심히 follow up했던 350.org 같은 조직이,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엑손 모빌이나 도요타 같은 기존 화석연료 업계의 후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큐를 다 보고 나면 놀랍지도 않은 수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제프 깁스(Jeff Gibbs)는 어린 시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시에라 클럽의 맴버로서 열심히 활동해온 열혈 환경운동가.

그가 환경운동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당신들 바이오매스에 찬성하냐’고 물을 때, 다들 해맑게 ‘절대 안되지 우리는 친환경인걸!’ 하는 모습은 정말 가슴아프다.

가장 황당하고 꼴같잖은 장면. 우리는 흔히 가운데 탑이 있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기가 100% 태양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아침 시동을 걸기 위해 가스발전기를 같이 설치한다고. (감독이 인터뷰한 환경 과학자는 그것을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면 커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농담하기도.)

풍력발전기도 마찬가지. 태양광/풍력 시설을 늘리면 늘릴수록 가스발전기가 늘어나는 모습이 다큐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환경운동가’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음.

아쉬운 점은 원자력에 대한 언급이, 한번 스쳐가듯 나오지만, 없다는 것. 탄소 배출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공격적으로 탄소 포집을 하려면 결국 답은 원자력 뿐이다.

아직 한국어 자막이 없는데, 영어 자막을 켜놓고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꼭 봐야 할 2020년 최고의 문제작.


2020-04-18

인류를 위한 일회용품

가령, 한 여고생은 플라스틱 빨대에 대한 문제를 인식했지만, 같은 반의 친구들 중 같은 문제를 인식한 친구는 없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E-Participation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 통해 사실은 플라스틱 빨대를 만드는 기업들이 2~30년 전까지만 해도 단순 이익을 창출하려는 기업가가 아니라 소셜 기업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B형 간염의 바이러스가 대만의 큰 고민거리였고 ,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플라스틱 식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사라졌고, 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강현숙, 오주영, "[인터뷰] 대만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 (2)", 2020년 4월 10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뉴노멀’이 도래했다는 말에 나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뉴’도 아니고 ‘노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최근 수십년간이 비정상이었을 따름이다.

투표장에서 비닐장갑을 나눠주는 것이 환경오염이라고 근심하던 분들이라던가, 스타벅스의 종이 빨대(주여…)라던가, 온갖 이슈들 속에서 문득 이런 인터뷰를 보게 되어, 재미있어서 적어두고 혼자 보기 아까워서 블로그에도 올린다.

2020-04-13

중국 자본주의와 코로나 19

2003년 사스도 그렇고 이번 바이러스 대란은 중국이 무책임한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이미 경제적 기반이 있는 부농들이 일반적인 농업을 선점하자 빈농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 대책으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아무 생각 없이, 현존하는 모든 동식물을 천연자원으로 간주하여 채집 수렵 매매를 원천적으로 허가합니다.

그래서 특히 내륙의 밀림과 맞닿은 우한시 등이 야생동물 밀렵(도 아니죠 사실) 거래의 천국이 되었고 야생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온 겁니다.

이건 제 뇌피셜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 학자를 인터뷰한 미국 언론 Vox의 보도 내용입니다.

"How wildlife trade is linked to coronavirus", Vox, 2020년 3월 6일.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처럼, 야생동물 밀렵을 금지하고 매매를 엄금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10여년 단위로 새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은 없었겠지요. 공산주의를 빙자한 극단적 자본주의의 인류적 민폐라고 봅니다.

좋은 시장경제, 바람직한 시장경제라면 시장에서 매매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후자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는 양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냥 돈이면 다 되는 아수라장인 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이런 위험을 안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아무거나 영리활동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니, 온갖 야생동물을 잡아서 비위생적으로 유통하는 시장이 생겨버린 겁니다.

저는 이번 판데믹의 전개를 보며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회복 능력'의 대립 구도를 상정하는 논의가 매우 불편합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건 2년 후면 인류 전체 인구의 60%가 감염되면서 끝납니다. 스페인 독감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 경우도, 최악이라 해도, 그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지배할 것이고, 인류는 화석 연료를 활활 태울 것이며,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바이러스 앞에 죽어나가는 선진국 시민들'을 보면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끼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정리해보겠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자연의 복수가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은 중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 잘 제어되는 시장질서와 경제 윤리, 그리고 원시림과 야생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 하는 '서구적 자연 관리' 개념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2020-03-24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배우는 이유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코로나 대응’에서 배울 게 없는 나라도 있다.

대만, 뉴질랜드 등이 그렇다.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차단하고, 귀국하는 자국민의 건강 관리와 동선 추적을 제대로 해낸 그 나라들은, 미국이나 유럽 입장에서 볼 때 배울 게 없다. 걸리지도 않은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지금처럼 100명 넘는 사망자에 8천여 명의 감염자가 나오도록 사태를 키우지 않았다면, ‘세계가 보고 배우는’ COVID-19 대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 것. 돌아가야 할 사회 기반이 제대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아무 일 없는 일상’을 지켜주는 것.

반대로 기업은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해결책을 팔아먹는 집단이다. 멀쩡히 다들 3.5파이 이어폰 잘 쓰고 있는데, 애플에서 ‘유선 이어폰은 적폐다’라고 손가락질하더니, 이어폰 구멍을 없애고 ‘혁신적’인 에어팟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한국 정부의 COVID-19 대응은, 국가로서 수준 미달이다. 없어도 되는 문제를 키우거나, 문제가 커지도록 방치한 후, 허둥지둥 처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걸 외국에서 참고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정말 좋은 나라, 국민을 진정 보호하는 나라는, 그런 문제가 아예 생기도록 하지 않는 나라다. 대만이나 뉴질랜드처럼.

2020-03-14

중국발 입국 봉쇄, 부도덕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퀴즈. 2020년 3월 14일 현재, 뉴질랜드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는 총 몇 명일까? 정답은 5명. 눈을 의심할텐데, 다섯 명, 맞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였으나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온 사람은 379명, 현재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은 두 명이고, 사망자는 없다.

뉴질랜드의 인구가 48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이것은 실로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의 확진자가 50명에 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이 3800명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세계가 놀라고 경탄해야 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뉴질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뉴질랜드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2월 3일부로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던 것이다. 1월 28일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National Health Coordination Centre (NHCC)를 세운 후, 그 통제에 따른 대응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중국을 떠난지 2주가 지났음이 확인된 경우에만 입국을 허용했다. 사실상 '중국 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3월 14일 현재 대만의 확진자 수 또한 4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만 또한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다.

대만과 뉴질랜드, 두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았고, 돌아오는 자국민을 철저히 추적 관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섬이라는 것이다. 출입국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또한 사실상 섬이다. 뉴질랜드나 대만보다 더 훌륭한 의료 체계와 헌신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응은 대만 및 뉴질랜드와 너무도 달랐다. 중국 본토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국인에 대한 세심한 추적 관찰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활발한 사회 활동'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사망자 수는 대만의 확진자 수보다 많다.

진지하게 묻자. 뉴질랜드와 대만의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가?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1980년생 여성으로, 세계 최연소 여성 지도자이며, 노동당이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보 여성 지도자다. 차이잉원의 내각에는 오픈리 트랜스젠더 장관이 IT 기술을 총 지휘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를 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끌고 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친문 선전선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눈에는 차이잉원과 저신다 아던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그들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당연한 일을 담대하게 하는 국가 지도자로 보인다.

솅겐국(aka 유럽)이나 미국처럼 육로로 외국과 교통이 가능한 나라는 입국 금지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이나 뉴질랜드 혹은 한국 같은 섬나라는 입국 금지를 하면 외국인이 못 들어온다. 입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감염 경로 추적이 용이해진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초기에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60명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국민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다.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칭송한다고?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 집어치워라. 진정 바이러스 대응을 잘 해낸 국가들은 따로 있다. 지리적 여건을 살려 봉쇄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수십 명 수준으로 감염자를 통제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다. 대만은 단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때 보건 총책임자가 통곡했다.

'글로벌 언론'들은 그런 사례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지리적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대만의 성공 사례가, 글로벌 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정부가, 글로벌 언론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아닌가?

다시 차별과 혐오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면역도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이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혐오 행동인가?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부도덕(immoral)한 것이다. 반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하고, 중국발 한국인의 행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의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을 따질 일이 아니다. 비도덕(unmoral)이다. 쓰나미가 몰려올 것에 대비해 제방을 높이 쌓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을 초기에 시행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계 동포에 대한 혐오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청와대가 그렇게까지 탁월한 인권 감수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통령이 뭘 하건 옹호하는 친문 네티즌들은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혐오 세력'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요컨대 그들은, 부도덕을 막기 위해, 도덕과 상관 없이 요구되는 대응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발생한 60명이 넘는 사망자들 앞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 능력 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진자를 찾아낸다 크어~' 같은 소리들을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에 빠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 차단은 몇몇 국가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전 국토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그렇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이른 시점에 봉쇄 전략을 택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봉쇄를 도덕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방역 차원에서의 입국 봉쇄 조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도덕(unmoral)한 일이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봉쇄 조치가 한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혹은 한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번질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도덕(immoral)의 문제를, 비도덕(unmoral)한 의학적 목적의 입국 봉쇄와 혼동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이 문제를 연거푸 강조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관념과 끓어오르는 도덕적 정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혐오하라' 같은 손쉬운 구호를 앞세우는 얼간이들이 득세할 때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기준을 잃지 않되, 도덕을 적용할 곳과 아닌 곳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