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6

시장이라는 사회적 제도

정확한 표현을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대강 이런 맥락이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빵을 팔지 않는 사회보다는, 차라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유대인에게도 돈만 주면 빵을 파는 사회가 낫다고. 복거일의 말이었다. 이후 영어 공용화론 등으로 인해 복거일의 입지가 축소되면서 그는 일종의 공적이 되고 말았지만, '시장을 통해 긍정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언제나 복거일의 그림자가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복거일의 주장은 큰 맹점을 지니고 있다. 시장은 결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재화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회적 제도에 비하면 진입 장벽이 낮은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나는 노씨니까, 전주 이씨의 제삿상에 끼어들 수는 없다. 하지만 전주 이씨 문중의 누군가가 땅을 팔겠다고 내놓았다면, 충분한 돈이 있을 경우 나는 입찰할 수 있고 시장 원칙에 따라 가장 높은 값을 부른 후 낙찰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전적인 시장 질서를 전제하고 있을 때, 혹은 구시대의 다른 질서와 시장 질서를 견주어볼 때에나 성립할 수 있는 논리이다. 모든 것이 단일한 시장 질서하에 편입되어버린 현대(적어도 20세기 이후)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이런 주장은 맞지 않다. 1960년대까지 미국의 흑인들은 같은 돈을 내고도 다른 버스 좌석에 앉아야 했다. 당신이 노숙자라면 5000원을 낸다 해도 강남역 인근의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을 먹을 수 없다. 입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장이 오직 돈으로만 움직이기 때문에 무차별적이고, 따라서 '수구적 가치'와 대립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시장 그 자체가 '구분짓기'의 요소를 충분히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사실을 경험적으로 늘 확인하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베블런이 '과시적 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하면서, 시장 질서가 '평평한 세계'를 만들어준다는 믿음에 결정적인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인간은 본성상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고 싶어하면서도, 그 외의 타인들과는 구분짓고 싶어한다. 충분한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시장 질서를 이용하여 시장 질서의 무차별성과 평등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태원에서 조금만 동쪽으로 걸어가면 한남동이 나온다. 한남동에는 다들 알다시피 재벌가의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개별적인 저택들의 가격이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시장 가격'이라는 것이 애초에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정도 규모가 되는 저택들은 철저히 1:1로 매매된다. 따라서 '누가 집 내놓았다더라'는 정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돈이 있어도 그것을 살 수 없다.

부촌은 그냥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품위'를 확인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래서 타워팰리스 거주자들은 로또파와 비 로또파로 나뉘어 반상회도 따로 갖는 것이고, 성북동에서는 갑자기 돈을 번 누군가가 저택을 구입하려 하자 그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하던 주민들이 돈을 모아 문제의 주택을 공동으로 구입해버린 일도 벌어졌던 것이다. 시장 질서는 다른 질서에 비하면 무차별적일지 모르지만, 그 자체가 평평한 세계를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도, 또 사회적 강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도인에게는 1등석을 팔지 않는다'는 차별, 혹은 '너같은 졸부는 우리 동네 주민이 될 자격이 없다'는 차별, 이런 차별에 대해 '나도 돈 있다'고 항변하는 것은 우습고 치졸한 일일 뿐이다. 젊은 시절 잘 나가던 변호사 모한다스 간디가 바로 그런 소리를 했다가, 두들겨 맞고 아까 맞은 데 또 맞고 각성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마하트마 간디로 거듭났다. 시장 원리는 무차별적일 수 있고, 그래서 돈 있는 내게 유리할 수도 있지만, 그 시장을 운영하는 인간은 어디까지나 구별짓고 차별하고 멸시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장 원리 내에서, 혹은 시장 원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시장 원리 또한 사회적 질서의 일부분이다. 시장에서 개인들이 자유롭게 가격을 형성하고 매매하는 것까지 사회가 간섭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 시장에서 매매될 수 있고 없는지, 또 그 규칙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등은 전부 시장에 내재된 법칙이 아니다. 그러한 규칙들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

'흑인은 같은 값을 지불하더라도 다른 칸에 앉아야 한다'는 것은 인종차별일 뿐이라고, 즉 시장 원칙에 반하는 사례일 뿐 시장 원칙의 적용 그 자체는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가격에 다른 상품을 제시받는다 해도 거래가 꾸준히 성사되고 있는 이상, 그 경우에도 시장은 '작동'하고 있는 것이며, 시장 원리는 그 이상의 도덕적인 원칙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같은 돈을 냈으니까 나도 같은 칸에 앉겠다'는 주장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경우 '시장 원리'에 따라 해법이 도출되었다면, 같은 값을 낸 흑인에게 같은 자리에 앉게 해주는 버스 회사가 등장하여, 그 버스 회사의 버스만 흑인들이 타고 다녀서, 차별적인 좌석제를 유지하는 버스 회사가 망해버리거나 정책을 변경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일까? 애초에 법적으로 흑인은 버스 뒷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의 벽이 무너진 것은 시장 원리 때문이 아니었다. 로자 팍스라는 꼬장꼬장한 여성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들을 이끌고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로자 팍스가 처음 내세운 것은 시장 원리에 따른 평등이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이들의 가슴을 뒤흔든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평등이었다.

수구세력과의 대결을 위해서 '진정한 시장주의'를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익숙하면서도 식상한 것이다. 그런 주장은 이미 재작년 말에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위해 실컷 써먹은 레퍼토리를 변형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명박은 '노무현 정권 심판'을 위해 시장주의를 내세웠고, 지금 시장주의 타령하는 분들은 '이명박 정권 심판'을 위해 시장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상황은 몹시도 희극적이다. 두 정치 세력이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사회상을 뒤에 감춰둔 채 시장의 입을 빌려 말하려고 들고 있는 것이다.

시장은 도구일 뿐이다. 망치가 못을 박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듯, 시장 또한 재화를 효율적으로 교환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도덕적 망치'를 기대할 수 없듯, '건전한 톱'을 바랄 수 없듯,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 또한 형용모순일 뿐이다. 정치적인 문제, 도덕적인 딜레마, 사회적인 갈등은 그 자체의 논리 내에서 합의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글루스에는 '수구세력 vs. (진정한) 시장세력'의 대립구도를 상정하는 분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한 주장의 근본 동기가 결국 '한미 FTA를 졸속 추진한 노무현 옹호'임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거짓 대결 구도는 그저 한숨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국산 망치가 도덕적일 수 없듯이, 미제 망치도 쿨할 수 없다. 한미 FTA의 동기는 '시장을 통한 수구 견제'라는 노짱의 심모원려가 아니다. 외교부의 특정 세력에게 포위된, 준비되지 않은 집권 세력의 휘둘림이 그 사태의 본질에 더욱 가깝다.

미국산 시장주의를 도입하여 한국의 덜 된 시장질서를 교정한다는 발상은 우습고도 한심할 뿐이다. 이미 삼성은 한미 FTA의 실질적인 설계자인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사장급인 글로벌 법무책임자로 영입한 상태이다. 한미 FTA를 통해 재벌을 어떻게 견제하겠다는 건가? 재벌 중의 재벌인 삼성은 이미 다 빠져가날 구멍을 만들어놓은 상태인데. 삼성이 하면 다들 한다. 다른 곳에서도 외교부 전직 직원들의 몸값을 한껏 올려놓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백 번 양보해서 '노짱의 심모원려'를 사실로 인정해준다 해도, 그것이 실패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지 말자는 말이다.

시장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지하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각은, 순진할 뿐 아니라 이념적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발상이야말로 이념적이다. 어떤 이념도 택하지 않겠다는 이념, 사회적 연대의 가치를 낮게 보는 이념, 노동자가 제 몫을 찾는 것을 어떤 식으로건 폄하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이념, 그것이 바로 '올바른 시장 원리'를 드높여 강조하는 분들의 이면에 깔린 이념이다. 미국 경제 위기로 인해 '글로벌 스탠다드'가 바뀌고 있는 이 시점에, 아직도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 시장의 세계화가 아니라 사상의 세계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2009-03-13

‘사회적 논의기구’라는 문제적 개념 - 의회 불신의 난감한 산물…외부 여론이 방향타돼야

여야간의 합의로 ‘사회적 논의기구’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제대로 기술해내지 못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여야는 서로 합의하지 않은 채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었다.’

3월 13일 오전 2시 현재까지 ‘사회적 논의기구’에 대해 합의된 것은 세 가지 뿐이다. 첫째,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라는 이름을 붙인다. 둘째, 한나라당에서 10명, 민주당에서 8명, 선진과창조의모임에서 2명을 추천한다. 셋째, 100일 후에 없애버린다. 첫째와 둘째 조항만을 놓고 보면 이게 ‘사회적 논의기구’인지 친목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세 번째 조항이 더해지면서, 게다가 그 친목회는 시한부 친목회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이 친목회의 어깨에 언론관련법 등 쟁점법안의 미래가 걸려있다는 것이다.

   
  ▲ 13일 국회에서 열린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김우룡, 강상현 위원장이을 비롯한 고흥길 문화체육관광방송위원회 위원장, 나경원 한나라당 간사, 전병헌 민주당 간사, 이용경 선진과창조모임 간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여의도통신  

민주당이 잠시 ‘야성’을 되찾았다가 ‘이성’을 회복한 후, 2월로 넘어온 국회에서 언론관련법 등의 처리에 대해 내놓은 해법이 다름 아니라 이것이다.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어서 공론을 모은 후, 100일 후에 표결처리한다. 민주당은 ‘공론을 모은다’에 방점을 찍었겠지만, 한나라당은 ‘표결처리’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그 기구의 성격과 지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합의되지 않은 ‘논의기구’만이 덩그러니 튀어나와 버렸다.

이 논의기구의 성격을 둘러싸고 한겨레와 조선일보는 극명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겨레의 경우 ‘사회적 논의기구’의 역할이 자문기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지만, 조선일보는 주호영 한나라당 원내수석부대표의 기고문을 통해 그 성격을 ‘자문기구’로 한정한다는 입장을 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 스스로는 여야의 합의를 ‘거대여당의 자승자박’이라는 식으로 한층 더 낮게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일보가 싫어한다고 해서 정당성을 역으로 추출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민주당 또한 자승자박을 범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적 논의기구’가 그저 자문기구에 머무를 뿐이라면, 그 협의 내용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한나라당은 무시하고 표결에 임하면 그만이다. 반면 ‘사회적 논의기구’의 결정 내용에 국회의원들이 따라야 하는 강제성이 부가된다면, 그것은 국회의원을 통한 국민의 의사결정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되므로 위헌 소지가 매우 높아진다.

   
  ▲ 13일 국회에서 열린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 첫 전체회의에서 문화체육관광방송위원회 고흥길 위원장이 위원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여의도통신  

정치적인 계산을 뒤로 접어두고,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만 본다면 그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다. 고작 20명으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에 의해, 국회의원이 양심과 신념에 따라 법안에 동의할 수 있는 헌법적 권리가 좌우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국회의원도 국민이 뽑았다’라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국회의원의 표결권이 침해되는 것은 곧장 국민주권이 침해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설령 그것이 미디어법 관련 악법에 대한 것이어도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가 ‘사회적 논의기구’ 결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는 것은 그런 면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그런 기구가 국회의원의 결정권을 좌우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내 초헌법적 기관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해서 고작 100일간 시간을 끄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손쉬운 길은 일종의 음모론을 채택하는 것이다. 어차피 합의는 결렬되게 되어 있으므로, ‘왜 너희들은 사회적 협의기구의 견해도 존중하지 않느냐’며 한나라당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나라당의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과연 그 ‘전략’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미지수로 남는다.

같은 음모론적 입장에서 따져보자. 홍준표 원내대표를 포함한 한나라당의 소속 의원들은 진작부터 ‘사회적 논의기구는 자문기구일 뿐’이라는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어차피 결렬될 협상’에 대한 고려는 이쪽 뿐 아니라 저쪽에서도 하고 있다. 상대를 그렇게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현재 구성된 ‘사회적 논의기구’의 면면보다는, 그것이 배제하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사회적 논의기구’는, 정치인에 대한 혐오, 정치적 합의 과정에 대한 폄하, 정치적인 것 자체에 대한 거부라는 우리 시대의 경향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미 국회 자체가 ‘사회적 논의’를 위해 구성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또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고, 그 구성원에서는 정치인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능 마비를 이보다 더 절실하게 드러내는 사례가 과연 또 있을까? 토론도 다른 사람이 하고, 합의도 다른 사람이 하고, (민주당에서 암시하는대로) 표결권도 다른 사람들이 좌지우지한다면, 대체 국회의원은 뭐하러 뽑는단 말인가? 격투기 보려고 4년에 한 번씩 투표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대한민국의 의회민주주의가 이렇게 파행적으로 운행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치인의 참여를 막고, 이른바 ‘시민사회’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다보니, 변모씨 같은 인물이 그 20인의 원로원에 한 다리 끼어들게 되는 비극적인, 아니 희극적인 상황마저 연출되고 있지 않은가. 뉴라이트 국회의원 신지호는 그나마 ‘싱크탱크’를 운영해오기라도 했지, 변희재는 대체 뭘 했다고 국회에서 이 중요한 논의를 하게 된단 말인가.

무슨 말이냐고? 한나라당에서 변희재를 ‘사회적 논의기구’의 패널로 추천했다, 이런 말이다. 만약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된다면, 그 권한의 20분의 1은 변희재가 갖게 된다. 이런 상황을 두고 예로부터 민중들은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인다’라고 말해왔다.

우리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를 비난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응원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 난감함을 우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에 따라 여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지금 시민사회가 내놓을 수 있는 정치권에의 대답은 그 정도가 아닐까 싶다.

노정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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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3

지식인, 광대, 개념인

신해철의 학원광고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유승준의 병역문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들 중 하나다. 두 사건은 비슷한 구조 하에서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경우 모두에서 해당 연예인보다는, 그들에게 열광한 후 다시 열광적으로 매도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쪽에도 책임을 묻고자 한다. 역사는 역시나 두 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유승준과 신해철 모두, 한국 특유의 현상으로 보이는 '개념인'이라는 카테고리를 발견한 후, 그것을 적극 자신의 인기를 위해 사용하다가 역풍을 맞은 사례이다. 내가 생각하는 '개념인'이란 이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대충 동의하고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 이야기를, 유독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이게 주창하고 나서서 그들의 지지를 획득할 때 그는 '개념인'이 된다.

유승준의 경우부터 먼저 살펴보자. 한국에는 '남자라면 군말없이 군대를 갔다 와야 한다'라는 통념이 있다. 하지만 군대 문제 자체가 국가의 폭력과 결부되어 있으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 게다가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의 피해의식이 포진해 있기 때문에 연예인이 군대와 관련하여 함부로 농담을 하거나 하면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이럴 경우 가장 현명한 선택은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혹은 누가 말을 시키더라도 가장 소극적인 답변만 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죠, 헤헤...'라며 말꼬리를 흐리는 그런 것 말이다. 유승준은 거기서 혁신적인 마케팅 방식을 찾아냈다. 아예 적극적으로 '군대를 가고자 하는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이미지 구축에 나선 것이다. 유승준 개인이 지니고 있던 확실한 스타성에, 그러한 '개념'이 덧붙여졌을 때 그 효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역풍도 확실히 불어닥쳐서, 지금도 유승준은 인천국제공항을 통과하지 못하는 국제 미아 신세가 되어 있는 처지이다. 내가 유승준이라면 가수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정치적 이유에서의 망명 신청'을 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비인간적인 일이다. 대체 그게 뭐가 죽일 일이라고? 물론 정언명법에 따르면 또 십계명에 따르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거짓말도 하고, 걸리기도 하고, 연예인의 경우에는 '참회의 눈물'을 흘린 후 용서받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유승준만은 예외이다. '개념인'이었기 때문이다. 유승준에 대해 아직도 분노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심리에는, 유승준을 철저히 연예인으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연예인의 범주 바깥에 있는 수준의 윤리 의식을 요구하는 양면성이 포진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여 죽여도 '용서'받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군대 간다고 했다가 한국 국적 포기하는 것은 안 된다. 류시원은 '개념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승준은 아름다운 청년이었고, '개념인'이었다. 평가의 기준이 확 달라진 것이다.

신해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승준보다야 신해철의 '개념 발언'들이 비교적 낫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도 자신이 '개념인'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부인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분노할 뿐'이라는 말이 언제나 양념처럼 덧붙여졌다. 그 유보 조건이야말로 '개념인'을 개념인이게끔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 말에 동의하는 당신은 '안전'하다, 이런 식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으면 '개념인'의 발언은 성립하지 않는다.

신해철은 '상식적'이라는 이유로 노무현을 지지했고, '비상식적'이라는 이유로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다. 그가 해명 차원에서 내놓았던 첫 번째 요소가 '각하가 주신 용돈'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개념인'으로서의 자신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내놓은 답변에서도 마찬가지 코드가 좌르륵 나온다. '절라디언', 하지만 '알고보면 깨끗'한 사생활. 그런 것들로 방어벽을 쳐놓고 나서야 신해철은 공교육과 사교육을 분리하여, 자신이 반대하는 것은 공교육일 뿐 사교육에 반대한 적은 없다는 해명을 내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해명의 문제점이 아니라(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이야기했다고 본다), 그 해명에 앞서 등장한 온갖 '개념인 코드'들이다. 너무도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그 말들. 너무도 '상식적'이지만 아무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지 않는 그런 이야기들. 그래서 개념찬 발언을 해주는 신해철이 너무도 고마워지게 했었던 그런 것들.

문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과, 신해철이 머리에 담고 있는 '개념'이 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사실만을 적어놓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논의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질문을 더 깊숙히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개념인으로서의 연예인'이라는 통념에는 문제가 없는가? 문제가 있다면, 대체 왜 문제인가?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나는 '개념인으로서의 연예인'을 만들어내고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지식인과 예능인, 진중권의 표현대로라면 '광대'의 입지 모두를 좁히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식인들과 예능인들이 공히 각성해야 하겠지만, 예능인들이 개념인 행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대중적인 분위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신해철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고 있지만, 그것 뿐이다.

앞서 말한 '개념인'의 코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들은 그냥 '상식적'이다. 그냥 한나라당이고 이명박이다. 그냥 조선일보고 그냥 강남이고 그냥 사교육이다. '개념인'이 툭툭 던지는 '개념찬 발언'에는 '왜?'가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이, 혹은 쉽게 잘 이해되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껄끄러운 그런 진실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개념인은 지식인을 구축한다.

신해철과 같은 '개념인'들이 용산 참사같은 진짜 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명박이니까 잘못된 거지,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러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도 크고 두려운, 진짜 참여와 사유를 하도록 강요하는 그런 사건이 터졌을 때, 그들의 (그리고 어쩌면 당신의) '상식'은 불현듯 입을 다물어버린다.

이명박이 경찰을 함부로 부리는 것은 잘못한 것 같지만 직접 명령을 내렸을 리도 없고 세입자들이 딱한 것도 같지만 연 매출이 억단위라고 그러고 찬 물을 끼얹은 게 잘못이긴 한데 전철연이 개입하고 있었고... '상식'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팩트'만이 난잡한 시장판을 벌이고 있다.

악순환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사람들이 지식인은 멸시하고 폄하하지만 개념인은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예비 지식인들은, '대중성'이라는 명목 하에 본래의 역할을 포기해버린다. 누군가를 개념인으로 만들어주는 그 '개념'이 상식과 통념이라면, 지식인 또한 결코 개념인일 수가 없다. 다들 알지만 쉬쉬해오는 것을 폭로하는 사람, 이미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회의하게 만드는 사람, 상식과 통념을 파괴함으로써 사회를 위협한다고 모함당하지만 결국은 그에 기여하는 사람이 지식인이라면 분명히 그렇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판기에 200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듯 질문이 들어온다. 나는 그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손쉬운 대답을 안겨주고 싶지 않다. 그가 욕망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런 욕망에 굴복하고, 그것을 잘 충족시켜준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으면 나 또한 '개념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나는 개념인이 아니다. 대체 지식인이 뭐냐고 나에게 물으면, 실은 나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지식인이 되고자 지향하고 있고, 그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래야 한다.

개념인이라는 개념은 옳지 않은 개념이다. 그것은 진지한 탐구와 고민이 있어야 할 자리에, 한 두 줄로 요약되는 '어록'을 집어넣고, 사유를 마비시키며,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믿는 대중을 양성한다. 개념인이 있고, 그 개념인의 발언에 열광하는 내가 있다면, 나 또한 개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손쉬운 삼단논법은 정말 어려운 문제들,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마주봐야 하는 문제들을 상대할 수 없다.

용산 참사가 터졌다. 그렇다면 재개발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어야 할 것인가? 수많은 전문가와 지식인들이 답변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론 수용층의 입맛이 이미 '개념인'이라는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은 이명박을 깔 때에만 사랑받는다. 그때만 '개념인'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한국 정치의 불균형한 정당 구조를 토로하고, 미디어와 현대 사회에 대한 '머리 아픈' 논의를 늘어놓을 때에는 진중권 또한 그저 '지식인'에 불과한 누군가로 강등된다.

연예인의 경우에도 '개념인'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발언 한 두 개만 해도 졸지에 타고 싶지 않았던 무등을 타야 한다. 유재석이 정치에 대해 한 마디 했다고 쳐 보자. 난리가 날 것이다. 오오 개념인, 혹은 오오 알고보니 꼴통, 등등.

조지 클루니 일당처럼 '쿨'하게 정치적인 지향성을 드러내는 연예인이 나올 수 없는 이유는, 그런 발언을 하는 순간 대중들이 자신을 '개념인'으로 소비할 것임을 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해 한 마디 하려면, 연예인은 자신의 직업 생명을 걸거나, 아예 컨셉을 바꿔야 한다. '광대니까 넘어가자'는 식의 중재안이 먹힐 수가 없는 사회인 것이다. 예술과 정치 사이에 길고도 깊은 구렁이 파이고, 그 강을 건너간 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유승준이 그랬고, 신해철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개념인이라는 개념을 붙들고 있는 것은 대단히 개념 없는 짓이다. 따라서 그러한 가치 판단의 기준 하에 신해철을 비판하는 것에 나는 원론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포지션을 충분히 활용해 온 신해철에게 개인적인 실망을 느끼는 것까지 반대할 생각도 없다. 다만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들이, 특히 신해철이 두 번에 걸쳐 해명한 글에서 나온 그런 '개념 넘치는 단어'들에 대해 의문을 품고 숙고하고 고민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개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당신은 '개념인'들이 대답해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드디어 지식인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쾌락을 주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주지도 않는다. 지독하게 머리를 굴리고 나면 화끈하게 놀고 싶어진다. 그럴 때에는 광대를 찾아가면 된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해법은 이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