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31

2013년 독서 목록

2013년 독서 목록

  1. 20130103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4』(서울: 민음사, 2012)
  2. 20130103 - 빅토르 위고, 정기수 옮김, 『레 미제라블 5』(서울: 민음사, 2012)
  3. 20130105 - Albert O. Hirshman,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Political Arguments for Capitalism before Its Triumph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7)
  4. 20130114 - Paul Krugman, End This Depression Now!(New York: W. W. Norton & Company, 2012)
  5. 20130128 - Tyler Cowen, The Great Stagnation(New York: Dutton, 2011)
  6. 20130207 - 고종석, 『해피 패밀리』(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3)
  7. 20130207 - 고종석, 『제망매』(서울: 문학동네, 1997)
  8. 20130210 - Daniel Drezner, The Theories of International Politics and Zombies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1)
  9. 20130221 - Pavel Tsatsouline, The Naked Warrior (St. Paul, MN: Dragon Door Publications, 2003)
  10. 20130221 -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1』(서울: 솔, 1999), 개정증보판. 1986년 초판 발행
  11. 20130222 - 김윤식, 『이광수와 그의 시대 2』(서울: 솔, 1999), 개정증보판. 1986년 초판 발행
  12. 20130223 - 데이브 히키, 박대정 옮김, 임근준 해설, 『보이지 않는 용』(서울: 마음산책, 2011)
  13. 20130328 - 매튜 A. 크렌슨, 벤자민 긴스버그, 서복경 옮김,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서울: 후마니타스, 2013)
  14. 20130409 - 마쓰시타 기와, 황선종 옮김, 『주거 인테리어 해부도감』(서울: 더숲, 2013)
  15. 20130422 - 패트릭 콜린슨, 이종인 옮김, 『종교개혁』(서울: 을유문화사, 2005)
  16. 20130427 - 우병현, 『구글을 가장 잘 쓰는 직장인 되기』(경기도 파주: 휴먼큐브, 2013)
  17. 20130601 - 브라이언 본, 토니 해리스, 임태현 옮김, 『엑스 마키나 디럭스 에디션 01』(서울: 시공사, 2013)
  18. 20130601 - 브라이언 본, 토니 해리스, 임태현 옮김, 『엑스 마키나 디럭스 에디션 02』(서울: 시공사, 2013)
  19. 20130613 - 폴 크루그먼, 박세연 옮김, 『지금 당장 이 불황을 끝내라!』(경기도 파주: 엘도라도, 2013)
  20. 20130707 - 사사키 아쓰시, 송태욱 옮김, 『일본, 현대, 사상』(경기도 파주: 을유문화사, 2010)
  21. 20130707 - 정유정, 『28』(서울: 은행나무, 2013)
  22. 20130709 - 커트 보네거트, 박웅희 옮김, 『제5도살장』(서울: 아이필드, 2005)
  23. 20130714 -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시지프 신화』(서울: 책세상, 1998)
  24. 20130726 - 재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어제까지의 세계』(서울: 김영사, 2013)
  25. 20130910 - 주대환,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서울: 산책자, 2008)
  26. 20131001 - 마이클 더다, 김용언 옮김, 『코난 도일을 읽는 밤』(서울: 을유문화사, 2013)
  27. 20131002 - 버트런드 러셀, 장성주 옮김, 『인기 없는 에세이』(서울: 함께읽는책, 2013)
  28. 20131004 - 커트 뷰식, 스튜어트 이모넨, 최원서 옮김, 『슈퍼맨: 시크릿 아이덴티티』(서울: 시공사, 2011)
  29. 20131005 - 앨런 무어, 데이브 기본즈, 정지욱 옮김, 『왓치맨 1』(서울: 시공사, 2008)
  30. 20131005 - 앨런 무어, 데이브 기본즈, 정지욱 옮김, 『왓치맨 2』(서울: 시공사, 2008)
  31. 20131006 - 데이비드 맥컬레이, 장석봉 옮김, 『땅속 세상』(경기도 파주: 한길사, 2004)
  32. 20131007 - 마크 밀러, 존 로미타 주니어, 정지욱 옮김, 『킥애스 2 전주곡: 힛걸』(서울: 시공사, 2013)
  33. 20131007 - 고바야시 히데오, 유은경 옮김,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서울: 소화, 2003)
  34. 20131008 - 마크 밀러, 존 로미타 주니어, 정지욱 옮김, 『킥애스 1』(서울: 시공사, 2013)
  35. 20131008 - 마크 밀러, 존 로미타 주니어, 정지욱 옮김, 『킥애스 2』(서울: 시공사, 2013)
  36. 20131014 - 프란츠 카프카, 김영옥 옮김, 『오드라덱이 들려주는 이야기』(서울: 문학과지성사, 1998)
  37. 20131028 - 김사과, 『천국에서』(경기도 파주: 창비, 2013)
  38. 20131030 - Paul Auster, Hand To Mouth (New York: Picador, 1997)
  39. 20131031 - 김사과, 『테러의 시』(서울: 민음사, 2012)
  40. 20131031 - 김사과, 『풀이 눕는다』(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09)
  41. 20131114 - 안토니오 타부키, 김운찬 옮김, 『플라톤의 위염』(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3)
  42. 20131115 - 마리 노이라트, 로빈 킨로스, 최슬기 옮김, 『트랜스포머: 아이소타이프 도표를 만드는 원리』(서울: 작업실유령, 2013)
  43. 20131128 - 조지 F. 케넌, 유강은 옮김,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서울: 가람기획, 2013)
  44. 20131209 - 마이클 R. 캔필드 엮음, 에드워드 O. 윌슨 외 지음, 김병순 옮김, 『과학자의 관찰 노트』(서울: 휴먼사이언스, 2013)
  45. 20131212 - 박홍수, 『철도의 눈물』(서울: 후마니타스, 2013)
  46. 20131225 - 박해천, 『아파트 게임』(서울: 휴머니스트, 2013)

* 이 독서 목록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책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특별한 기준 없이 채워넣은 것이다.

* 이 독서 목록을 통해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인 참고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이 독서 목록에는 '논객시대'를 연재하면서 읽은 책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걸 넣자니 너무 목록이 불어난다는 생각 때문에 안 적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자의적인 기준을 도입하고 나자,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책이면 일단 포함시킨다는 기준과 충돌하게 되었으며, 한 해 100권은 읽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 폴 오스터의 Hand To Mouth는 예비군 훈련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겨우 읽어낼 수 있었다.

* 내년 예비군 훈련에는 또 무슨 책을 들고 가야 하나.

* 2013년의 출판계는 스스로 이슈를 생산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모습이었다. 시장 규모는 줄어들고, 독자들은 떨어져나가고 있다. 특히 정치, 사회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책을 사는 사람들의 성향이 거의 뻔히 보이는 지경인데, 이것은 출판계를 넘어서 한국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배우고, 많이 생각하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2013-12-18

[2030콘서트] ‘학대하는 어머니’ 박근혜·최연혜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 이론에 따르면, 진보 진영은 국가를 너그러운 부모에, 보수 진영은 엄격한 아버지에 비유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약자에게 너그러운 복지 정책을 선호하는 반면, 후자는 엄격한 법 집행과 질서에 방점을 둔다는 것이다. 과연 이 이론이 맞는 것인지, 무려 7000명이 넘는 직원들을 직위해제시켜 놓은 후, 최연혜 철도공사 사장은 파업 노동자들을 두고 “회초리를 든 어머니의 찢어지는 마음으로 직위해제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철도파업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곰곰이 짚어보면, 박근혜 정부와 국토교통부, 최연혜 사장의 태도는 ‘엄격한 아버지’에서 한참 벗어나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엄격한 아버지가 엄격한 것은 자식을 사랑하고 더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반면 국토부의 입김하에 철도공사가 수행하는 법인 분리는 철도공사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만성 적자를 더욱 증가하게 만들 뿐이다. 철도파업에 대응하는 정부는 눈물을 머금고 회초리를 든 엄격한 어머니가 아니다. 소금밥을 먹여가며 아이를 학대하고 죽게 만드는, 친권을 박탈당해 마땅한 아동학대범 어머니인 것이다.

정부는 철도공사의 방만한 운영으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었으므로 경쟁체제를 도입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왜 철도공사가 적자를 면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핵심은 기업들이 이용하는 화물열차의 운임이 지나치게 낮게 책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멘트나 철광석, 석탄 등을 실어나르는 열차는 손익분기점에 턱없이 못 미치는 요금을 받고 있다. 마치 가정용 전기 요금을 올리면서도 대기업에는 산업용 전기를 헐값에 마구 퍼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듯 구조적으로 적자를 강요해놓고는, 많은 수의 신규 승객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서발 KTX를 따로 분리해, 안 그래도 적자를 끌어안고 있는 기존의 철도공사와 경쟁시키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적자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흑자가 날 만한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따로 떼어준 채, ‘경쟁’을 하라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게다가 정부의 해명과 달리 수서발 KTX는 본질적으로 주식회사다. 이 때문에 정관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국내 재벌 및 해외 투기 자본에 조각조각 팔려나갈 수밖에 없다.

정부의 정책을 등에 업은 철도공사는 스스로를 망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이익은 남에게 주고, 손해는 고스란히 떠안으며, 숙련된 기술자들을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다. 철도는 어차피 경쟁체제를 만들 수 없는, 자연독점이 성립하는 분야라는 것을 우리는 아무 경제학 원론 책이나 펼쳐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시장 원리’를 존중한다는 그들은 꼭 이럴 때에만 시장 원리를 모른 척한다. 세계적인 운영 능력을 자랑하지만 덩치가 부족해 경쟁력이 떨어지는 우리의 철도를, 또 한 번 반토막 내려고 덤벼든다. 그것이 바로 수서발 KTX의 법인 분리이며, 철도 민영화의 시작이다.

이러니 ‘엄격한 아버지’가 아니라, ‘학대하는 어머니’ 모델을 우리는 떠올릴 수밖에 없다. 철도공사 사장은 불과 1년 전 자신이 신문 칼럼에서 했던 말을 고스란히 뒤집고 민영화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 정부는 철도공사더러 적자를 해결하라면서 흑자 노선을 빼앗아가고 적자를 더욱 키울 것을 요구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민영화가 아니라는데 정부를 신뢰하지 않느냐’며 국민들을 다그치고, 검찰은 냉큼 철도노조 간부들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다. 국민들은 잘해보겠다는데, 노동조합은 회사를 더욱 크고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데, 사장과 정부와 대통령이 나서서 발목을 잡고 있다.

우리가 이러는 사이 중국은 신의주, 평양, 개성을 잇는 고속도로 및 고속철도 개설권을 북한으로부터 따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국 철도의 덩치를 더 키워서 북한을 넘어 세계로 향하게 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의 ‘학대하는 어머니’들은 철도를 자본이 뜯어먹기 좋도록 토막 내버릴 심산이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배계급은 늘 그래왔다. 이 나라를 작고 힘없이 끌려가는 노예 상태로 전락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려 들었다. 이번 철도파업은 그런 의미에서 철도노조만의 것이 아니다. ‘학대하는 어머니’를 이겨내기 위한 우리 모두의 싸움인 것이다.


입력 : 2013.12.17 20:35:31 수정 : 2013.12.18 01:54:5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2172035315&code=990100&s_code=ao051#csidxa534af27f3279839fe0795dd375ff9a

2013-11-26

[2030콘서트] 군대 이야기

연평도에 포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나는 군복을 입은 채 전해들었다. 입대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던, 논산훈련소를 거쳐 의정부에 있는 KTA(Katusa Training Academy)에서 훈련받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몇십 미터 앞에 축소 표적지를 깔아두고 M16A를 쏘아대고 있을 무렵, 훈련소의 교관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는 DMB가 장착된 스마트폰을 꺼냈고, TV를 틀었으며, 그 속에 등장하는 속보를 나와 다른 훈련병들에게 전달해주었다. 북한이 연평도에 포격을 했다고. 우리도 당장 역습을 해야지, ‘의도 파악’은 대체 왜 하고 있느냐고. 그는 중사 계급의 직업 군인이었다.

당시 교육받은 바에 따르면, 만약 그대로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훈련소의 병력은 일단 전부 어딘가로 옮기고,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긴긴 기간을 무조건 현역병으로 군에 복무를 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끔찍한 결과를 바라지 않았기에, 하염없이 북한의 ‘의도 파악’을 하며 즉각 보복성 공격을 가하지 않은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환영의 뜻을 밝혔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

한·미동맹의 규약에 따라 미군들의 군복을 입고 있던 나는, 전쟁이 나면 이것보다 안전한 옷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편하게 군생활 하러 들어와서, 남들이 전방에서 포탄 맞고 죽고 다치는 모습을 보며, 기껏 한다는 게 나의 보직 걱정이었다는 부끄러움이 찾아온 것은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었다.

신문 칼럼에 대고 무슨 개인적인 군대 추억을 늘어놓느냐는 불만이 서서히 독자 여러분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그렇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군대 추억담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대한민국 남성 대부분이 공유하는, 말하자면 ‘기억의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설령 북한의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고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당분간 대한민국의 군대는 징병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휴전선 이북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고, 중국과의 국경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군대’는 여전히 존속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조금만 더 추억의 페이지를 넘겨보자. 전방에 위치한 미군 2사단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했다. 다른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늘 서먹서먹한 나와 달리 내 후임으로 들어온 어린 친구들은 미군들과 금세 잘 지냈고, 심지어 동두천 시내에 있는 목욕탕에도 같이 다녀왔다고 했다.

그 미군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왜 한국인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을 보면 손가락질하고 놀리는 거지? 미국에서는 군인을 보면 모두 고맙다고 하고, 도넛과 커피 등을 공짜로 주기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대답했다. 한국은 1987년 이전까지 군인들이 통치하던 나라였거든. 그리고 모든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 가.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단 군인들을 조롱하고 낮춰보지. 하지만 실은 군인들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그냥 떠오르는 대로 최대한 쉽게 설명했을 뿐이기에, 대충 그 정도 대화를 마친 후 툭툭 털고 일어나 잔업을 하러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군사독재를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루어냈다는 자신감, 모든 남자들이 다 각자의 군대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그 일상성과 하찮음 뒤에는, 아직도 극복되지 않은 군대에 대한 공포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군인들을 믿지 않는다. 시민사회는 적극적으로 군대를 통제하고 끌어안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사고치지 않고 북한의 ‘거지떼’가 넘어오는 것을 막아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은 땅에 떨어진 지 오래고, 대선개입 의혹은 국정원을 넘어 군 전체로 번져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추위에 떨며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고, 군 수뇌부 중 일부는 대선개입 의혹을 덮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25년이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눈 돌리지 말고, 우리 모두가 민주주의와, 군대와, 올바름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군대를 통제하는 것을 넘어, 군을 사회의 일부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소화해낼 수 있을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오늘의 위기를 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입력 : 2013.11.26 20:08:3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262008365&code=990100&s_code=ao051#csidx047fc7a7031cbb58435d0eec921e172

2013-11-05

[2030콘서트] ‘박근혜 탄핵’은 없지만

문재인의 대선 패배는 선거 부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라 할지라도, 국정원과 기타 조직의 선거 개입이 없었다면 문재인이 이겼을 것이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17대 대선에 비해 무려 12%나 솟구친 75%의 투표율을 보며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개표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것이 ‘잠자던 대학생들의 야권 표’가 아닌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50대 이상의 여당 표’임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기업이라는 단 하나의 조직만을 남겨둔 채 그 나머지를 급속히 파괴했다. 우리는 기업 속에서 사장님과 직원이 되고, 기업 밖에서 소비자와 유권자가 될 뿐이다. 이렇게 불안에 빠진 파편화된 개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가 우경화된다는 말과 같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그리고 실용정부까지 한국의 집권 세력은 새로운 경제적 질서에 부합할 만한 새로운 사회적 구성 원리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유지하는 일에만 골몰해왔던 것이다. 18대 대선의 결과는 바로 그 일관된 정책 방향이 낳은 당연한 업보에 가깝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권력기관들의 선거개입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망가뜨리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국정원 직원들은 수백여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아이디와 게시물을 삭제하는 식으로 증거를 은폐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온라인상에서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최대한 꼬리를 자르고 말을 바꾸고 증거를 없애가며, 국민들의 관심이 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이 모든 난국이 진행되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끝없는 해외 순방길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야권은, 2004년의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그랬듯이,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를 탄핵소추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대답은 부정적이다. 민주당은 박근혜를 탄핵해 그 권한을 정지시키고, 현재의 대선개입 문제를 검찰과 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도록 사태를 이끌어갈 수 없다. 이것은 비단 그들이 무능해서뿐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탄핵소추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대통령 노무현은 그해 있을 총선을 앞두고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거나,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등, 선거법 위반의 혐의가 있는 발언들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내놓았다. 바로 그 발언들을 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판정을 내놓았고, 그로 인해 대통령 탄핵소추가 가능해졌다.

반면 지금은 그와 많이 다르다. 마치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국정원 및 기타 조직을 이용해 선거에 개입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다.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높은 자리에서 혜택을 받을 사람이 직접 그 과정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묘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 박근혜 캠프를 불법적으로 도청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박근혜 본인이 그런 식으로 선거법을 어겼다고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박근혜를 탄핵할 수 없다. 그가 직접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했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직도 진행 중인 국정원 여론 개입 사건에 대한 확실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또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바로 그 ‘시민사회’ 자체가 거의 형해화되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마땅한 정치적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조직과 ‘실세’들이 알아서 충성하고 있는 가운데, 해외 순방이나 다니는 대통령을 어떻게 다시 정치의 현장으로 불러낼 것인가. 당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형해화되어 가는 ‘시민사회’를 재구성해, 정치가 단지 이권 다툼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사회적 당위의 문제로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입력 : 2013.11.05 22:27:5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052227535&code=990100&s_code=ao051#csidxf973a1289ce972d83b38ef4785727b6

2013-10-15

[2030콘서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미국 연방정부가 이른바 ‘셧다운’에 돌입한 것은 지난 1일의 일이다. 이미 충분히 국내에도 보도되고 또 소개된 사건이지만 다시 한번 그 전모를 살펴보자. 오바마 대통령이 도입한 미국 건강보험 개혁안인 이른바 ‘오바마케어’(ACA)를 두고 공화당 강경파가 하원에서 반발했다. 상원은 민주당, 하원은 공화당이 우세한 탓에 하원에서 요구하는 법안 수정을 상원은 계속 거절했고, 대통령 또한 ‘오바마케어’를 무위로 돌리기 위한 공화당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공화당 강경파는 버티기 끝에 연방정부의 예산안을 10월1일까지도 통과시키지 않았고, 그리하여 미 연방정부 소속 공무원들은 본의 아닌 무급휴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의회와 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민주주의의 실패’ 등을 운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는 사태를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 연방정부가 개점휴업 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망가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너무 잘 작동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 의회에서 웅변했던 원칙을 떠올려보자. ‘대표 없는 곳에 세금 또한 없다.’ 정답이다. 국민의 대표가 모여서 합의하에 세금을 걷고, 그것을 행정부에 넘기는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입법부다. 국회는 단지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토를 잡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정부를 향해 돈자루를 쥐고, 자신들이 만든 법에 따라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행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국민의 대표다. 대표 없는 곳에는 세금도 없고, 세금 없는 곳에는 예산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미 공화당 강경파를 두둔하거나 옹호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정부가 문을 닫고 국립공원부터 백신 개발까지 온갖 중요한 연방정부의 사업들이 멈춰버렸음에도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궁극적으로는 법치주의의 원리를 곧이곧대로 행하고 있는 미국식 정치에 어떤 의미에서 감탄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연방정부는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다. 월급을 줄 수 없으니 당연히 연방정부는 피고용인들을 일터로 억지로 불러내지도 못한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구분이 희미하고 그저 ‘나랏일’로 뭉뚱그리는 한국식 정서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장 국정이 마비되게 생겼는데 월급 좀 밀리는 게 대수인가? 하지만 법치주의의 원리를 놓고 보면, 월급을 주지 못하는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옳다. 공무원들 역시 월급 받는 만큼 일하기로 계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강경파는 무모한 정치적 도박을 저질러가며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이곳과 저곳의 문화적, 정서적, 정치적 차이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제국을 운영하면서 만든 그 옛날의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근본적인 약속이 없다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지금도 정부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강요하지만, 과연 자신들 스스로는 약속을 지키는가? 힘 없는 서민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행정부와 관료들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와의 약속마저도 헌신짝처럼 여기기 일쑤다. 이번 국정감사에 대해 기대감을 품지 못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 사회이므로, ‘높으신 분’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아니면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다.

한국의 법치주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식 법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정부나 국회의원, 혹은 대통령의 공약 뒤집기에 그저 손가락질이나 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는 국민들이 ‘폴리스라인’ 같은 사소한 약속을 어기면 가혹한 응징을 한다. 우리 스스로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꾸준히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팍타 순트 세르반다’가 모두의 상식이 되어야만, 우리도 그들을 ‘셧다운’시킬 수 있다.


입력 : 2013.10.15 21: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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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

[2030콘서트] 정치를 돌려달라

오랜만에 모여 앉은 가족과 친척들은 종종 싸우기 마련이었다. 예전에는 명절날 만난 친척들끼리 정치 얘기로 목청을 높이다 경찰서 신세를 지거나 심지어 강력사건을 저지르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언론들은 선동적인 기사와 헤드라인으로 불을 붙였다.

가령 2000년 추석, 이제는 전설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1면 헤드라인을 다시 떠올려보자. “추석 분위기가 썰렁하다.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라는 저 유명한 문구로 시작되는,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동아일보, 2000년 9월9일)가 바로 그것이다.

저렇게 선전과 선동이 담긴 신문을 읽고 고향집에 돌아가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가족’이 앉아 있다. 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인터넷이 기존 언론의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는 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버지, 이걸 좀 보시라고요!’라며 신문을 집어던지듯이, 당시에는 크고 무거웠던 컴퓨터와 모니터를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의 명절은 그런 것이었다. ‘민심’이 모이는 날,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날.

필자는 지역색이 강하지 않은 집안 출신으로, 사실 이렇게 화끈한 명절 풍경은 건너 들은 이야기를 조합한 것이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만약 내가 이런 ‘정치적 명절’을 무슨 미풍양속처럼 회상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남 출신의 남성인 작가 이문열씨가 시집살이하다 죽은 여성의 입을 빌려 페미니즘을 비판한 소설 <선택>을 쓴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일 터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말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절이 조용해지면서 한국 정치도 그 역동성을 상실했다고.

정치가 ‘시끄러웠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에는 이른바 ‘지역감정’을 디디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개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으며 그 실체를 유지하고 있는 정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당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존재했고, 사회적 현안에 대한 그들 각자의 의견과 입장의 차이가 존재했다. 물론 ‘반김대중’ ‘반노무현’ ‘반이회창’ ‘반한나라당’ 등 온갖 ‘정서’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긴 했지만, 이 정당이 아닌 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행동이었다.

오늘날의 모습은 그와 사뭇 다르다. 모든 정당이 입을 모아 중산층과 서민의 세 부담은 늘리지 않으면서 보편적 복지를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민주 정권’이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이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준 바, 특히 ‘서민’들이라면 거대 여당 대신 거대 야당을 찍어야 할 뾰족한 이유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교조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고,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는 귀족노조라는 야유가 쏟아지지만 늘어가는 비정규직 비율을 줄이기 위한 근본적 대책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않는다. ‘경제’가 일종의 숙명론처럼 여겨지고 있는 판에 ‘정치’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는 조용할 수가 없다. 정치는 시끄러울 때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의 목표를 합의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특히 당시의 여권이며 오늘날의 야권을 구성하는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선거에서 질까봐 허둥지둥 단일화를 하고, 토론과 합의가 아닌 여론조사에 따라 후보를 정하고, 그나마도 부정 경선 및 결과에 대한 불복으로 얼룩져온 것이 최근의 정치다.

오늘날의 야권은 손님들이 짜장면과 짬뽕을 두고 싸운다고, 모든 메뉴를 짬짜면으로 통일시켜 버린 중국집처럼 보인다. 정치는 선택이며 갈등이고, 그 끝에 얻어지는 화해와 평화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의 간극보다 야당 내 세력들의 차이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지금, 그 복잡한 내부 사정과 갈등으로 인해 정치는 국민들이 아닌 직업 정치인들만의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부터 조선일보의 검찰총장 몰아내기까지, 이 수많은 정치적 의제가 야권 내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그리하여 추석 차례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지 못했다면, 차라리 시끄러운 파열음을 내며 갈라서는 편이 낫다. 이제,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달라는 말이다.


입력 : 2013.09.24 21:20:33 수정 : 2013.09.24 23: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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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2030콘서트] 촛불시위는 왜 취미생활이 되었나

문화평론가 허지웅씨가 “국정원 이슈는 문제지만 시국선언은 오버라고 생각”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쓴 것은 8월18일 오후 9시24분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의 촛불도 취미활동 이상의 충분한 당위를 찾을 수 없다”고 따끔한 비판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보도를 사건하는 언론들에 의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저 발언 속에 몇 가지 전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국선언이나 촛불시위 등을 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셋째, 촛불시위는 한낱 취미생활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 ‘촛불이 취미냐’라는 말이 유독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특히 세 번째 전제에 대해서는 허지웅씨와 그의 비판자들이 모두 확고한 동의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체 왜 국가 정보 기관이 일간베스트나 오늘의유머 같은 웹사이트에서 전직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리플이나 달고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대북 심리전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낸 세금이 특정 웹 서버의 저장 용량을 낭비하는 일에 소진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선 개입을 위한 정치공작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사태가 진척되지 않고 있을까? 대학생, 대학 교수, 기타 다양한 집단 및 개인들이 시국선언을 내놓고 있으며, 특히 최근의 폭염을 뚫고 촛불시위가 열리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감방의 여름이 겨울보다 훨씬 힘들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다닥다닥 붙어있어도 괜찮고 오히려 서로 의지가 되지만,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짜증을 내고 다투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을 켠 사람들이 좁은 간격으로 모여 앉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지금 벌어지는 촛불시위는 바로 그런 극기훈련의 현장이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취미생활일 리가 없으며, 그렇게 끝나서도 안 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놓고 보더라도 국정원 사건은 국가적 스캔들이다. 그런데 왜, 선량한 시민들이 이 무더운 여름날 더불어 숲이 되어 촛불까지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전혀 진전되지 않는가?

생각해보자. 어차피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촛불시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경찰 버스로 막아놓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당 또한, 실은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가 없다. 촛불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그들을 아무리 실망시킨다 한들, 이 더위를 뚫고 촛불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 민주당을 찍을 것이다.

손 안에 들어온 새에게는 모이를 주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몇 차례에 걸친 정치공학적 선거 놀음을 통해 체계적으로 진보정당이 압살된 지금, 현재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내부 갈등을 정리하고, 대안적 행보를 보여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촛불 시민’들은 ‘도로 민주당’ 할 텐데.

야당이 야성을 잃은 이유는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가 부른 것은 ‘밥그릇’을 뺏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촛불시위가 취미활동이냐는 말 자체에 분노하지 말고, 그것이 한낱 취미생활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하는 진짜 원인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시라. 원세훈은 국정조사 자체를 우롱하고,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공개해도 직원 얼굴은 일급비밀이라고 우긴다. 이런 상황에서 어벙한 얼굴로 끌려다니며 ‘촛불 시민 여러분, 힘을 내주세요’라고 말하는 그들이야말로 촛불시위를 ‘취미생활’로 전락시키고 있다.


입력 : 2013.08.20 21: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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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30

[2030콘서트] 젊은이들 정치가 시작되려면

이른바 ‘20대 담론’이 지난 몇 년간 유행했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냉소와 한탄으로 끝난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 및 동아시아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급진적 무장투쟁을 통해 체제의 붕괴를 꾀하는 방법론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법 개정을 이루어내면서 이후 안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거나 적어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한다.

군 입대 전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해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있다. 혼자 살고 있으므로 부양가족은 없으며, 현재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의 세대주이기도 하다. 물론 어찌어찌 생활은 하고 있으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본다면, 백수에 가까운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유사 백수의 모습은, 이른바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않거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부모와 떨어져 살며, 거주지에 제대로 주민등록을 해서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진 젊은이의 한 표본이기도 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바로 나와 같은 이런 인원들을 지역가입자로 분류하는데, 그러면 통상적으로 같은 월수입을 얻는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

젊은이가 스스로 세대주가 되고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지고 나면, 어깨 위에 얹히는 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방금 볼멘소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그 책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다. 첫 주민세를 낼 때 매우 큰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자체 및 관공서에서 날아오는 몇 종의 고지서를 읽어보고 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1인 가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지역가입자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검색 사이트에서 ‘대학가 원룸 시세’를 입력하면 대체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 표준가로 나온다. 건강보험공단의 보험료 산출 방식에 따르면, 가령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에 사는 사람이나, 구하기도 힘든 3000만원짜리 전세에 사는 사람이나, 같은 금액의 임대차계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해당 항목에서 동급 판정을 받는다.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전자와 후자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필자처럼 미혼인 데다 아직 만 35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정부에서 보증하는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아니라 ‘가구’가 표준 단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의 유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단지 소비자에 머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이 바로 ‘부재자’, 즉 있지만 없는 자들이다.

서울, 그 중에서도 특정 지역은 젊은이들의 비율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왜 그런 곳마저도 ‘88만원 세대’에서 말하는 ‘바리케이드’ 노릇을 하지 못할까. 그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나열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유로 인해 자신의 실제 거주지 및 활동 반경이 아닌 어딘가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에 기반한 젊은 세대의 정치가 스스로 싹틀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대학가에는 젊은 주민이 아니라 ‘부재자’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작은 단위의 지자체 선거는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큰 선거에서는 그저 대의명분에 휘둘려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특정 지역을 자신의 표밭으로 삼아 가장 낮은 단위부터 한 단계씩 성장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이다. 이 근본적이고도 제도적인 한계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의 정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입력 : 2013.07.30 21: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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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2

[2030콘서트] 노무현이 박근혜를 잡으려면

7월2일부터 45일에 걸쳐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시작됐다. 국정조사라는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 파동이 벌어지던 지난 몇 주를 돌이켜볼 때, 야권에서 제대로 된 ‘결정타’를 날리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여권과 국정원이 이른바 ‘NLL 포기 발언’을 폭로하면서 만들어낸 ‘안보 프레임’을 이겨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우리의 NLL 북방한계선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킨 곳이라며 한마디 거들고 나섰지만, ‘그럼 우리나라를 지키지 말자는 거냐’는 비판 앞에서 야권은 할 말을 잃는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절차 대 안보’라는 가짜 논쟁에 휩싸여 휘청거리다, 점점 수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집단 분노 속에서 맴돌게 될 뿐이다.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야권에 요구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북송금특검에 대한 입장을 바꿔야 한다. 외교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북한 관련 사항의 뚜껑을 국내의 정치적 이유로 열어젖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국정원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먼저 열었다. 김정일을 향해 ‘외교적 수사법’을 펼치는 노무현을 옹호하면서, 김정일을 향해 ‘외교자금’을 보낸 김대중 정부를 수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외교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외교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기준선은 참여정부 이전에까지 적용돼야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갈라진 야권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일 또한 요원할 뿐이다.

둘째, 정상회담 회의록에 나온 내용 중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가령 ‘평화의 공동수역’ 같은 것. 한국 해군이 NLL까지 전부 순찰을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어선 및 군함들이 경계를 넘어와 무력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심지어 한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북한은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과연 우리가 북한과 중국을 그토록 논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긴 한가? 올해 들어 북한은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이는 몇 푼의 달러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평화의 공동수역’이 소말리아 앞바다처럼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참여정부 인사와 그 지지자들이 아닌 한, 그렇게까지 북한을 믿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셋째, 북한에 대해 온정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북 포용정책 이전에 북한이라는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국민들을 안심시키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연평도는 우리땅”이라고 만세라도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만약 일본이 독도에 포격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의 꽃’ 임수경을 보고 환호하던 일부 고학력 중년층이 아닌 다음에야, 특히 젊은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또 하나의 외국일 뿐이다. 한국인의 목숨보다 북한 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야권은 ‘안보’ 프레임에서 백전백패할 것이다.

결론을 내보자. 죽은 노무현은 살아있는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 노무현의 ‘유훈’을 곧이곧대로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가능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저들’의 비아냥을 이겨낼 수 있다. 후대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만 한다.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크게 달라졌고, 특히 핵실험까지 성공시킨 마당에,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회의록 속의 노무현을 지키는 것에 급급한다면, 야권에 미래는 없다.


입력 : 2013.07.02 21: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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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2030콘서트] ‘일베충’ 대 ‘이회충’

필자는 어릴 때 불만이 많고 이것저것 따져 묻기를 좋아해, 대부분의 전래동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황희 정승이 나오는 것들은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너도 옳다, 그래 너도 옳다, 아니 이런 네 말도 옳다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해줘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택해서야 쓰겠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억이 난다.

이 문제의식에는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모두 제한적인 경우에만 옳다. 모든 발화 주체에게는 나름의 문제와 결격 사유가 있겠지만, 매 순간에는 주제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격 따위를 따져 묻기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간베스트’(일베)라 불리는 사이트에 대한 온갖 논의들을 보고 있자니, 양비론자로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꼭 해야 할 말이 생겼다.

일베 사용자들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다른 성격을 지닌 웹사이트(‘오늘의 유머’ 등)에서 그들을 조롱할 때, ‘일베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경향신문을 포함한 몇몇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시피, 이 단어는 ‘일베’와 ‘벌레 충(蟲)’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일베에 사는 벌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칼럼을 읽는 독자분은 혹시 ‘이회충’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는 어휘는 아니고, 주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당시 여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을 지지하는 웹사이트에서 많이 쓰인 표현이다. 당시의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다시피, 이것은 당시 노무현의 경쟁 상대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이름과, 대한민국이 못 살고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을 괴롭혔던 기생충인 ‘회충’을 합성한 것이다. 그 의미는 따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기로 하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성적 지지자, 혹은 그렇게까지 뜨거운 지지자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칭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베에서 노무현을 ‘노구리’(노무현+개구리)나 ‘노운지’(노무현+운지·투신자살을 뜻하는 은어) 등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대단히 착잡한 기분을 느끼거나, 분노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언어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양비론자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묻자. 그 ‘일베하는 애들’은 대체 그런 말버릇을 어디서 배웠을까?

적어도 필자가 이 글을 쓰는 6월4일 새벽까지는, ‘그들은 우리에게 정치의 언어를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찾지 못했다. 이회창을 ‘이회충’이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하던 그 얄팍한 ‘풍자’와 ‘해학’이 목적을 잃고 떠돌다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실망해버린 새로운 인터넷 사용자의 손에 넘어갔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를 분석하고 또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조중동’이나 ‘수꼴’ 같은 타자를 만들어서 몰아세움으로써 이쪽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방식을, 왜 상대편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저들이 휘두르는 칼과 망치는 우리의 것을 더욱 과격하게 만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대신, 지금 신문 지면을 도배하는 것은 ‘대체 저들은 누구인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나’를 분석하는 사람들뿐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일본의 ‘일베’ 격인 재특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당신의 이웃들입니다”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일베’를 분석하기에 바쁜 논객들과 언론을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 ‘일베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당신의 제자들입니다”라고 답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입력 : 2013.06.04 21:37:1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042137165&code=990100&s_code=ao051#csidx0d0da945e93f97abb53ab2a5545bf99

2013-05-15

어떤 분기점

나는 진중권이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부분적으론 아무래도 그가 인터넷 매체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진중권은 자신이 이용하는 매체의 성격에 따라 각기 다른 전술을 구사한다. 물론 이는 나를 포함하여 모든 글쟁이들이 써먹는 전술이다. 그런데 진중권의 경우엔 인터넷에서도 익명의 네티즌들과 멱살 잡고 싸우는 희귀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름깨나 있는 논객 가운데 그런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진중권이 유일하다. 나는 진중권의 그런 활동에 대해 찬탄을 표한 바 있다.

그런데 비극은 진중권이 자신의 그러한 희귀한 행태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중권의 독특한 텍스트주의는 상황에 둔감하다. 그는 불특정 다수를 겨냥해 '썩어빠진 정치'라고 욕하는 것이나 정치인들의 면전에서 '썩어빠진 정치인'이라고 욕하는 것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강준만, 『인물과 사상』, 23권, (서울: 개마고원, 2002년 7월), 140쪽.

2013-05-12

단상

초자아를 극복하고 내놓은 결과물과, 초자아의 눈을 피해서 내놓은 결과물은, 같을 수가 없다. 전자의 창작자에 대해, 우리는 그에게 엄연히 초자아가 있으며, 그 초자아와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재설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반면,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단지 '남들 시선', '엄마가 볼까봐', '우리 아빠가 좀 엄하셔서'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일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도피 과정, 스스로를 (말하자면) 하위 주체로 설정하는 과정에서 (2차) 창작의 동력을 얻는 경우라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숨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대상이, 본래의 위엄 혹은 아우라를 유지한 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2013-05-07

[2030콘서트] ‘동대구역 엽기 자해’ 메시지

5월5일 밤 10시43분. 대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한 남성이 문구용 커터를 꺼내들고 자신의 생식기 중 일부를 잘랐다. 이 황당무계한 자해사건을 일으킨 김모씨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해로 32세다. 사건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그는 역무원 및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혈이 많을 수밖에 없는 부위를 절개했지만,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씨는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이 있었고, 그래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 본인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육체에 상처를 내면서 쾌감을 얻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자해사건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잊을 만하면 ‘독도는 우리 땅’ 같은 자명한 메시지를 일본대사관에 보내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손가락 끄트머리를 살짝 따서 ‘혈서’를 쓰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인간에게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해쳐가며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타인의 이목을 끌어서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그런 경우에도, 차라리 배를 가르면 갈랐지 자신의 생식기에 손을 대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필자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반응을 통해 짐작하건대, 거의 모든 남성들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함께 느꼈다. 나이·직업·재산·소득수준 등을 뛰어넘어, 모든 남성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영역을 파고드는 충격적 사건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씨가 그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스스로 유전자의 대를 끊기 위해 그런 엽기적인 행동을 했을 따름이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더 이상 이 사건은 한낱 해프닝으로 간주할 수 없다. 2013년 5월5일 어린이날에 벌어진 이 익명의 사건, 32세의 한 남성이 벌인 ‘유전적 자살’은, 사실 지금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 겪은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2013년에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직업·소득·자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워졌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그나마 부분적 농지개혁을 통해 부를 하향 분배했던 대한민국은, 이후 고도성장기를 통과하면서 다시금 부익부빈익빈으로 되돌아왔다. 사실상 신분사회를 재건해낸 것이다.

땅을 가진 아버지, 건물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소년과 소녀들은 계속 그렇게 풍족할 것이다. 그 땅 위에서 농사를 짓고 건물에 세들어 사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계속 그렇게 허덕일 것이다. 이 나라를 계급사회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왜 30대 젊은이가 자신의 생식기를 잘랐는지 묻지 말고, 왜 생식기를 자르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지 물어보라. 그 이유는 거의 비슷하다. 내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혹은 지금 겪는 고통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감당이 안되는 이 세상에서 너까지 시달리게 하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엄마와 아빠라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게 해주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동대구역에서 자해를 한 김씨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해석은 분명 과잉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대구역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을 포기하고 결혼을 미루며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야말로 ‘엽기적’이다.


입력 : 2013.05.07 21:49: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5072149295&code=990100&s_code=ao051#csidxb0fd28000a39742a0879c476f895a14

2013-05-01

한 편의 글을 남들 앞에 내놓는 데 가장 필요한 것

한 편의 글을 남들 앞에 내놓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뻔뻔스러움'인 것 같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더 깊이 알게 될수록 자기의 지식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깨닫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진리'를 파악한 연후에야 그것을 발표해야 한다면 그 누구도 저승문이 열릴 때까지 단 한 줄의 글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논리를 구실삼아 감히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3쪽, 유시민,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서울: 푸른나무, 1992)

2013-04-09

[2030 콘서트] 당시의 관행, 지탄만 할 건가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3월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새 정부가 야심차게 구상한 부처 개편도 이루어졌고, 4월9일 현재 아직 해양수산부 장관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자리가 공석이긴 하지만 대략 인선도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장관 인사가 끝나면 그 아래로 줄줄이 인사 개편이 이루어질 것이고 비로소 마비 상태였던 국정 업무가 수행될 수 있을 터다.

이중국적 문제로 낙마한 김종훈 후보자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아무튼 독특한 논점을 제시했다. 그와 달리 다른 경우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그만큼 지리멸렬한 소재들로 검증받았다.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의무 이행 여부, 논문 대필, 법인카드 유용 등이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넣고 필터링을 해보니,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무려 장·차관급 7명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을 놓고 봐도, 그것은 그들이 절대적으로 깨끗해서가 아니라, 그저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수준이기에 용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내놓는 핑계에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고. 돈이 생기면 지방에 땅을 사는 것, 그것은 관행이었다고. 실소유자인 본인이 아니라 미성년자인 자녀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것 역시, 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하고 있는, 관행이었다고. 그렇게 가갸거겨를 배우기도 전에 땅부자가 되어 있던 아들이 병역 면제를 받도록 슬쩍 힘을 쓰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관행대로 한 것뿐이라고.

이토록 인간적인 핑계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잃고 분노하지 말고, 그 내면의 논리를 잘 살펴보자. 아마도 저 해명의 방식은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실한 답변일 것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다. 다들 그렇게 해왔던 것이니만큼 내가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사청문회에서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다양한 사례에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냥 하던 대로 집 앞 차도를 무단횡단하고, 카드로 계산하면 6500원인 백반집에서 현금으로 6000원만 내는 그런 사소한 탈세를 한다. 그 상황에서 국세청 직원에게 붙들리면 아마 나나 당신도 거의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들 이러는데,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전에 없이 수많은 후보자들이 거론되고, 그들이 모두 하나같이 오늘날의 도덕성에는 맞지 않음이 드러났으며, 그 이유를 과거의 관행에서 찾고 있는 이 모습에서 ‘박근혜 정부의 부도덕성’을 탓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이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법과 도덕이 21세기의 현 시점에 부합할 만큼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이 당시 관행대로 위장전입을 하고, 탈세를 하며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해온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다 그렇게 했다고 치자. 그런데 오늘날 도덕적 기준이 바뀌었다면, 그것에 대해 응분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단지 ‘낙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후보자들뿐 아니라 당시의 관행에 편승한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면죄부를 받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관행대로 했다는 개인들을 불러놓고 면박을 주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봐야,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방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공직에 나서서 검증당하는 과정을 회피할 유인동기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시절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에 대해 조금 더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눈에 띄는 사람들만 비난하고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관행을 이겨낼 수 없다. 단호하고 적극적인 부동산 세제 개혁이 해법일지 모른다.


입력 : 2013.04.09 21:18:4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4092118435&code=990100&s_code=ao051#csidxa0b659565e4781aad68f9d76c3b97ce

2013-03-06

[2030 콘서트] 내가 보수논객이다

지금보다 열살가량 어렸던 시절, 한창 혈기 넘치던 나는 지워버린 블로그에 이런 내용을 적어두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이 박힌 젊은이는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안보를 걱정하는 좌파로 살 것인가, 분배를 근심하는 우파로 살 것인가.”

이런 식의 ‘자기 인용’이 대단히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보니 저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일간지들의 사설을 검토해보자. 이른바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쪽이건 그 반대편이건, ‘유능한 재외동포가 국내에 들어와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우리가 박탈한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국민국가 체계 속에 살고 있다. 국민국가 시스템의 핵심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며, 국민은 국가의 일원으로 그 ‘공적 폭력’의 일부가 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국민 중 군복무에 지장을 주는 장애를 갖지 않은 남성은 징집 대상이 되며, 그 외 국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경우 그 깃발 아래 적국의 국민을 죽이거나 그 일에 협력한다는 뜻이다. 미 해군에서 군복무를 한 김종훈 전 후보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 해군의 수병들과 함께 ‘Sailor’s Creed’를 수도 없이 복창했을 것이고,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충성 맹세(Oath of Allegiance)”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모국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전투 및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이 그 선언문 속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참조: http://deulpul.net/3932189).

이것이 국민국가의 본질이다. 언제라도 다른 국민국가와 전쟁을 할 수 있고, 그에 대비하는 무력집단이 바로 국가다. 그리고 국적은 어떤 사람이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 여부를 지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신분상의 지표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혈맹’이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며 특히 국제정치는 더욱 그렇다. 지금도 한국의 국익은 미국의 그것과 자주 충돌한다. 외국인에게 외교, 안보, 국방과 관련한 고급정보가 수도 없이 오가는 내각의 문호를 개방하는 처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스스로 ‘편협한 국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이 사안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른바 진보진영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반대로, 가령 본명이 로버트 할리인 귀화 한국인 하일씨가, 심지어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미국에서 장관 후보로 지명되는 모습을 진지하게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광경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한국 국적조차 없었던 누군가를 장관으로 뽑으려다 실패하는 것은 왜 ‘안타까운 일’로 간주되는가?

미국인으로서 충성 맹세를 하고 30여년을 산 사람이, 단지 한국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적도 없는 상태에서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어떤 한국인이 이른바 ‘코시안’ 혹은 ‘다문화’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미국인이 단지 한국계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장관 후보가 되는 것은 인종적 편견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한쪽에는 불이익을, 다른 쪽에는 특혜를 주고 있지만, 둘 다 인종차별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관을 미국인 중에서 뽑는다. 상식선에서 반대하면 충분한데, 그걸 지적하는 이석기 의원은 무책임하게 ‘CIA 스파이설’을 퍼뜨렸고 진보언론이 편승했다. 하지만 그는 CIA의 스파이가 아니어도 한국의 장관 후보로 부적절했다. 한국계 미국인은 국적상으로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국가관이 이 모양인데, 국가정보원 직원은 유머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보수논객 변모씨는 그 국정원에서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이 ‘넓은 의미에서’ 북한 추종자라고 강연한다. 촛불시위에 꼬박꼬박 나갔던 진보논객이 나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스무살의 고민은 서른살이 되어도 여전하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보수논객 해야겠다.


입력 : 2013.03.06 21:31:56 수정 : 2013.03.06 23:29:4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3062131565&code=990100&s_code=ao051#csidxc053004a959f015a2ad9f881c450edd

워즈니악이 제주 여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대상이 되는 글은 여기. "美 컴퓨터 고수, 제주 女고생에 e메일로 ‘격려 답장’"

워즈니악 본인이 말을 꼬아서 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이 한 번역에 이러저러하게 토를 다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 부분은 중요한데 오해의 여지가 있어 첨언한다.

어플리케이션들은 마치 가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틀을 만들지 않는 이상 무한한 종류의 가구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미래에 커다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의 맥락이 이상해서 원문을 찾아보았다. 위에 링크된 기사의 마지막에서 원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저것은,

Apps are like furniture. There are infinite variations until we have a few standards that change little. So this is a huge opportunity in the future.

의 번역이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은 '우리가 그다지 바꿀 게 없는 몇몇 표준형을 갖게 될 때까지, 무한히 많은 변종들이 있(었ㅅ)읍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문장도 말이 된다.

우리의 삶이 '앱', 혹은 컴퓨터과 맺는 관계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반면 우리는 가구로 뭘 할지 이제 대충 다 안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의자에 앉고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고 등등. 우리는 '책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세부적인 차이는 있을지언정 '책상'이라는 단일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저기서 말하는 "standard"일 것이다.

반면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소프트웨어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지금도 계속 새로운 소프트웨어, 혹은 서비스의 범주가 창출되고, 또 사라진다. 사람이 컴퓨터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표준안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 혼란과 부정형성이 아직 '열린 기회'의 역할을 한다고, 그러니 앞질러 좌절하지 말라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그가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컴퓨터 혁명이 어느 정도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는 인식을 하고 있고, 자신이 아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으리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음을 뜻한다. '당신이 잡스랑 같이 애플을 만든 워즈죠? 그럼 저는 당신같은 슈퍼스타가 될 수 없겠네요?'라는 가상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는 소리.

그러니까 이렇게 착하게, 시제도 묘하게 어긋난 문장을 써가며 제주도의 한 고등학생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편지를 읽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그의 선량한 사고와 친절한 태도에 큰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을 어느정도 역산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2013-02-07

[2030 콘서트]지상 위의 방 한칸

[2030 콘서트]지상 위의 방 한칸

입력 : 2013-02-06 21:22:09수정 : 2013-02-06 21:22:09

이 신문이 하나의 건물이라고 생각해 보자.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1층이 1면이고, 맨 마지막 페이지의 광고는 건물 옥상에 얹혀져 있는 옥외광고라고 연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설은 꼭대기층에 놓여있는 펜트하우스 같은 것일 테고, 비슷한 방식으로 이런 저런 지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비유를 연장해보자. 어떤 신문이 필자에게 칼럼을 쓰게 해준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이해해 보자면, 어떤 공간을 임대해 준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건물주는 임대료를 받는 반면 신문사는 원고료를 준다. 하지만 건물주가 자신의 건물에 들어올 업체의 성격, 종류, 매출 규모 등을 세심하게 따지듯, 언론사 역시 ‘외부 필자’들을 선별하고 관리한다.

그리고 이 지면의 이름은 ‘2030콘서트’이다. 본인을 포함해 다섯 명의 젊은 필자가 돌아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바로 그 지면의 속성과 내력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리는 작년말 대선과정 및 ‘멘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0대 담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2008년 무렵이다. <88만원 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촛불시위 과정에서 ‘촛불소녀’로 불리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솟아올랐으며, 반대급부로 역시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명박 찍어놓고 등록금 올랐다고 울먹거리는 바보들’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불쌍해서건, 피터지는 ‘스펙’ 싸움을 해야 해서건, 자기들이 정권 뺏겨놓고 20대 투표율이 낮아서 졌다고 우기는 386에게 매도를 당하고 있어서건, 20대는 어떤 식으로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른바 ‘20대 논객’들이 몇명 거론되고, 그들을 한데 묶어 신문 지면을 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 활동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20대 논객’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나이를 먹어 30대에 접어들자 ‘20대 논객’은 ‘2030 논객’이 되었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비슷한 구성원들이, 필자가 군 입대로 인해 2년여의 공백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하나의 공간을 함께 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신문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자면, ‘20대 필자’들 혹은 ‘2030 논객’들은 여전히 고시원 혹은 자취방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30 논객들이 신문지상의 방 한 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모습은, 바로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세대의 현황을 거의 완벽하게 은유하고 있다. 고시원에 사는 20대가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지 않듯, 2030 필자들이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 역시 어떤 형식의 일상이 되었다.

20대 담론의 이름으로 제기된 수많은 문제들 중 유독 반값등록금만이 사회적 의제로 자리잡은 것은, 그것이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인 20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 등록금을 내거나 최소한 보증이라도 서줘야 할 그들의 부모가 얽힌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모들은 몇몇 보수적 일간지의 적극적인 여론몰이에 힘입어, ‘하우스푸어’라는 불행의 완장을 차고 선거 국면을 주도했다. “우리 집값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너희들 등록금이라도 내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소비자 주권의식 하에 두 세대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거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것은 ‘일하는 20대’의 신음소리요, 살아남은 것은 ‘돈 내는 20대’의 함성이었다. 20대 담론은 막을 내린 것이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절필 선언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 다만 함께 생각하면서 다음 단계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불쌍한 20대’ 그 너머의 무언가를.

2013-01-03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2030 콘서트]레미제라블, 비참함… 우리사회의 ‘장발장’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을 회상할 때, ‘미리엘 주교의 용서로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몇 년 후 막대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라고만 기억한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19년간 징역을 살고 돌아온 장발장이라는 한 사내가 단지 ‘삐뚤어진 내면’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였노라고, 그래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가 만든 이야기와 다르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을 용서해준 순간, 크게 놀랐지만 당장 개심하지는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놓친 동전을 발로 밟아 빼앗은 후 자신은 은그릇을 훔친 것도 용서받았으면서 어린애의 돈이나 강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가. 위고가 묘사하는 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번 징역을 살고 나면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예 다른 색깔의 신분증이 발급되며, 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요컨대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토록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호관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감옥 밖의 세상으로부터 또 한번 탈출한다. 우리가 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자베르가 쫓아와 다시 도망가는 장발장’은, 애초에 그가 보호관찰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캐릭터이다. 지금의 현실에 억지로 대입해본다면, 전자발찌를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로 내몰고 범죄자들을 결코 다시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계속 쫓겨다니는 선량한 사람. 이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다. 파업을 해서 전과자가 되고 손해배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는 사회 밖으로 간단히 추방된다. 관객들이 ‘도망친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에게 감정이입할 때, 그들은 또 한번 잊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에게 그의 장발장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장발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시 우리 사회로 끌어안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힐링’은 값싼 자기 위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입력 : 2013-01-02 20:54:14ㅣ수정 : 2013-01-02 22:5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