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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7

유전자 조작 아기를 낳는 것을 진보가 옹호할 수 있는가

마이클 샌델이 쓴 <완벽에 대한 반론>을 읽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책. 명확한 지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괜찮은 논증을, 하버마스로부터 빌려와 잘 썼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더 나은 아이를 '선택'해서 출산하는 행위를 미국의 주류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옹호하는데, 그에 대한 반발이다.

같은 주제를 논하면서 하버마스는 '우리가 아는 자유의 개념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전제되어 있어야만 제대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주 멀리 보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의 연장이고, 가깝게는 한나 아렌트가 하이데거의 '던져짐' 개념을 빌려왔던 것의 연속성 위에 있다.

아무튼, 일반적으로 '진보'라 여겨지는 미국의 고학력 리버럴 계층은, 자신을 닮았는데 여러모로 능력이 탁월한 아이를 통해 존재의 유한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매우 큰 듯 하다. 반면 공동체주의자인 샌델은 '아이는 신이 주신 선물이며 꽝이 나와도 어쩔 수 없다'는 보수적 가치를 옹호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서구 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가치(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한 죄인이며 죽을 때는 다 똑같다)로부터 벗어난 중국계 이민자에 의해 '글로벌 대리모 서비스 앱'이 출시되었다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쌓아나가야 한다.

다시 샌델의 책으로 돌아와보면 이 아이러니가 더욱 도드라진다. 20세기 자유주의 철학자의 대명사인 하버마스의 입을 빌어, 21세기에 가장 잘 팔리는 공동체주의 철학자가, 21세기 미국의 '리버럴'들을 공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201n년이니까요!' 같은 말은 정말 아무 쓸모가 없다.

-2019년 5월 5일에 쓴 글

2022-03-04

바가바드 기타(1)

얼마 전 반야심경의 현대어 번역 어쩌구 하는 글을 썼는데, 그 주제가 머릿속에 남아서, 이것저것 틈틈이 좀 더 찾아보다가, 며칠 전 거리에서 '샨티'라는 이름의 인도 식당을 보았고, 엘리엇의 '황무지'의 마지막 줄인 '샨티 샨티 샨티'를 중얼거리다가, 최초의 핵실험이 터져나올 때 오펜하이머가 주절거렸던 '나는 이제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도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대목을 연상했으며, 그리하여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 니체를 굳이 읽을 필요조차 없다.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및 여타 인도 철학을 애호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강렬한 텍스트가 결국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며, '너희 크샤트리아들은 우리 브라만이 시키는대로 가서 쌈박질이나 해라'는 취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을 애호하는 자들과도 마찬가지다(니체 철학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애매하고 또 우스꽝스러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신랄하게 비웃은 바 있다).

하지만 실로 강렬한 텍스트인 관계로, 머리에서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 내지는 '보다 나은 계급'의 일원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구의 리버럴 계층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더욱,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을 테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사티야그라하 무대 영상을 세 번째 돌려보다가, 이제 한 번쯤 글로 털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타자를 쳤다.


 

2020-11-20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 일러두기: 이 글은 『무엇이 정의인가?: 한국사회, 정의란 무엇인가에 답하다』(마티, 2011)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아직 절판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마이클 샌델의 새 책이 나오는 시점이므로, 블로그에 공개해도 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외에 박홍규, 장정일, 이권우, 김도균, 이양수, 최원, 박원익, 이택광, 서동진, 이현우 등 훌륭한 필자분들이 참여한 책입니다. 다른 필자들의 논의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참고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의의 딜레마, 딜레마의 정의

1.

학자나 이론가들뿐만 아니라 상인들과 부인들이 동석해 있는 사교 모임들에서 대화가 진행되는 모습을 주의해 보면, 거기에는 이야기와 농담뿐만 아니라 또한 환담, 곧 수다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야기는 새로운 내용과 함께 흥미 있게 이끌어가려 하면 이내 소재가 고갈되고, 농담은 쉽게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모든 수다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성격을 결정짓는 이런 저런 행위의 윤리적 가치 에 관한 수다보다도 더 그 밖의 머리 쓰는 일에서는 이내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발하고 모임에 일종의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없다. — 임마누엘 칸트, 『실천이성비판』, O273/V153

임마누엘 칸트는 사교계의 총아였다. 그는 키도 작고 얼굴도 과히 잘생긴 편이 아니었지만, 특유의 영민함과 해박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 밖으로 떠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런던, 제노바, 베니스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 대한 '구라'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많은 경우 그의 이야기는 실제로 해외를 다녀온 사람의 것보다 정확하고 세밀했다. 칸트는 당구를 매우 잘 쳤고, 학창시절에는 내기당구를 통해 학비를 벌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쾨니히스부르크 대학교의 교수가 된 이후로 사교계에서 발을 끊고 이른바 '비판철학'의 구상과 완성에 돌입한다. 그 작업을 끝냈을 때, 이전까지 사람들이 알던 사교적이고 유쾌한 칸트 씨는 사라지고, 대신 우리가 아는 철학자 칸트가 탄생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지난 시절을 잊지 않았고, 도덕철학을 다루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위 인용구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윤리적 가치에 대해 수다 떠는 일을 좋아한다고. 저 말은 칸트 자신의 사교계 경험에서 우러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는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윤리적인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좋아한다. 누군가가 진정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를 반드시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만큼은 그 누구라도 즐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것은 근본적인 '인간적 현상'이며,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왜 『정의란 무엇인가』가 40만 부 이상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를 내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하버드 명강의'라는 단어가 수많은 이들을 솔깃하게 했고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이 탁월한 것 역시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윤리적 딜레마' 자체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섬세한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보수주의적 입장, 즉 공동체주의를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책의 도입부에서 던져놓는 딜레마 자체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그가 책에서 설명하는 공동체주의의 근본적인 한계와 맞닿아있기도 하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설령 그 책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의 도입부에서 제시하는 딜레마가 무엇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열차가 있고, 브레이크는 고장났다. 당신은 그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인데 이 철로를 쭉 달리다보면 공사중인 인부 다섯 명이 치여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한편 선로를 바꾼다면 한 사람의 인부만 치여 죽는 것으로 사고를 마무리지을 수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딜레마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첫 번째와 유사한 듯 하면서도 상당히 다르다. 역시 폭주하는 기관차를 타고 달리고 있고, 다섯 명의 목숨이 위험하다. 그런데 철로 위의 어딘가에, 열차를 멈출 수 있을만큼 뚱뚱한 사람을 선로 위로 떨어뜨리면 그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 당신이라면 그 뚱뚱한 사람의 등을 밀어서 그를 철로 위로 떨어뜨릴 것인가?

샌델은 말한다. 공리주의자라면 당연히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편을 택한다. 왜냐하면 공리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철학 사조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 특히 칸트적 자유주의자라면 선로를 바꾸거나 뚱뚱한 사람을 밀어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수단이 아닌 오직 목적으로 예우하라'는 정언명법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주의자는 그와 같은 추상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나'의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가치 기준 속에서 스스로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리고 샌델은 앞서 제시한 추상적인 비유를 현실 속으로 과감하게 옮겨놓는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은신처를 찾아다니는 미군 척후병. 그들은 중간에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을 만났다. 미군들은 이 민간인들이 탈레반 협력자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한다. 만약 그들이 협력자라면, 척후병 뿐 아니라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미군들의 위치가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들은 민간인들을 풀어주었고, 몇 시간 후 미군 전체가 탈레반에게 포위되었다.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린 댓가로 총 열아홉명의 미군이 죽어야 했다. 민간인들을 그냥 보내주겠다는 결정을 내린 미군은, 그 역시 전투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는데, 자신이 내린 판단을 후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입부를 제시한 후 샌델은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을 제시한다. 각각 3장씩, 그 내용들이 이 책의 나머지 9장을 형성하고 있다. 지금까지 등장한 서평들을 살펴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평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는 듯 하다. 쉽고 재미있게 정의와 윤리의 문제를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는 평가가 있고, 샌델이 말하는 공동체주의가 결국 보수주의적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나는 두 가지 견해 모두 가장 중요한 지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샌델이 말하는 내용, 공동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 말을 하기 위해 꺼내드는 사례가 이 책을 진정 문제적인 것으로 만든다. 철로에서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 혹은 폭주하는 열차를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죽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윤리적 토론을 위한 화두로 꺼내드는 것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다. 칸트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그 순간 '누구를 죽이는 것이 더 공정한가'를 놓고 고민하며, 그 과정을 즐기고 있다.

2.

사례들이 판단력을 예리하게 해준다는 것은 사례들이 가진 유일하고도 큰 효용이다. 지성의 통찰력의 정확성과 정밀성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사례들은 보통 그런 것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말이다. 왜냐하면 사례들이 규칙의 조건들을 (限界의 境遇로서) 충전하게 만족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고, 게다가 규칙들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경험의 특수한 상황과는 독립적으로, 충분하게 통찰하려는 지성의 노력을 흔히 약화시키며, 그리하여 종국에는 규칙들을 원칙이라기보다는 공식처럼 사용하는 버릇이 들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로서,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판단력 일반에 관하여'에서.

"사례들이란 판단력을 위한 보행기"이며 "판단력의 천부적인 재능을 결여한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칸트 자신을 포함하여 위대한 철학자들 역시 까다로운 도덕적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 끝없이 가설적 사례를 만들고 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칸트의 비판처럼 "규칙의 조건들을 충전하게 만족"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불필요하지만 유의미한 어떤 '맥락'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선 플라톤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체계적으로 대답을 시도한 최초의, 그리고 어쩌면 가장 위대한 작품은 플라톤의 『국가』일 것이다. 플라톤의 대변자로 등장한 소크라테스는 먼저 '정의란 강자의 이익에 따르는 것',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과 같은, 당대에 통용되고 있던 규정들을 하나씩 논파한다. 그리고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찾아내기 위해 개인의 삶이 아닌 공동체의 구성과 그 속에서의 삶으로 논의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도입부와 그 나머지를 가르는 기준선이다.

바로 그 도입부에서, 등장인물 소크라테스는 '정의란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당대의 통념에 맞서 한 가지 딜레마를 제시한다. 당신에게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때때로 자신의 성정을 이기지 못해 난폭한 행위를 저지르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정신일 때 당신에게 자신의 무기를 맡겨놓았다. 그런데 어느 날, 상태가 안 좋아진 그가 나타나 자신의 무기를 돌려라고 한다. 당신은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순간 그가 그것을 들고 가서 어딘가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올바름이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라는 개념에 따르자면 당신은 그 무기를 돌려줘야 한다. 무기의 주인에게 무기를 돌려주는 것, 그게 바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 누구도 그러한 행동이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와 같은 딜레마를 몇 개 더 제시함으로써 당대의 통념적인 정의관에 도전하고 자신의 새로운 입장을 펼쳐나갈 토대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플라톤이 만들어낸 사례의 맥락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플라톤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시민이라는 것은, 전쟁이 나면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들고 폴리스를 위해 전쟁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맡겨놓은 무기'라는 말은 바로 그런 맥락을 전제로 할 때에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는, 우발적인 경우 흉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은 있을지언정, 본격적인 '무기' 따위 없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시민들이 곧 군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의 무장을 남에게 맡긴다는 것은 내가 책 한 권을 친구에게 맡기는 것과 완전히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내가 이 도시국가 속에서 한 사람의 시민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내가 가진 창과 방패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의 무장을 맡아놓고 있다가 돌려주지 않는 행위가 지니는 맥락 역시 결코 간단한 게 아니다. 친구에게 빌린 청바지를 돌려주지 않는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플라톤이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모두가 시민이고 전우이기도 한 고대 그리스의 상황을 염두에 둘 때 온전히 이해 가능하다. 서로가 서로를 시민으로서 어떻게 존중할 것인가, 혹은 어떤 경우에 우리는 누군가의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을 것인가. 명시적으로 서술되고 있지는 않지만, 플라톤이 만들어낸 딜레마는 이와 같은 맥락을 추가적으로 머금고 있는 것이다.

칸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칸트 자신이 '사례'를 통한 접근을 '판단력의 부족을 매꾸기 위한 것'이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도덕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가상적인 사례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살인자에게 쫓기는 누군가를 집에 숨겨주고 있다. 그런데 그 살인자가 찾아와 당신에게 묻는다. '그 사람이 여기 있는가?' 칸트 자신이 말하는 정언명법에 따르면 우리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므로 '그렇다'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그 사람은 죽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저 질문 자체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딜레마가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맥락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샌델 본인이 곧장 그 예시를 현실 속의 것으로 치환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칸트가 말하는 저 '살인자'는 사실상 공권력에 해당하는 그 무언가에 가깝다. "우리는 나치 돌격대원에게 안네 프랑크의 가족이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말해줄 도덕적 의무는 분명 없다."(185쪽) 칸트가 말하는 '살인자'는 살인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저지르게 될 한 사람의 개인이라기보다는,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처형'하겠다고 나선 어떤 공권력에 가까운 개념인 것이다. 적어도 문맥상으로는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럽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사례의 맥락은 독특한 뉘앙스를 지니게 된다. 칸트가 살던 시대에는 국가에 의한 출판물의 검열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자유를 논하면서도 계몽군주의 자비와 관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칸트는 동료 지식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만약 내가 혹은 네가 사상 검열을 당하고 국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 때, 네가 나를 감싸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한 행위일까?

즉 칸트가 만들어낸 이 딜레마는 '국가 권력'을 상대로 하여 '시민'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윤리적일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이다. 플라톤의 경우와 달리 칸트는 국가 권력이 시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 속에서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검토하고자 했다. 반면 플라톤은 언제라도 다른 도시국가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정치 상황을 전제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각자의 생각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 철학자 모두 어디까지나 '시민'의 눈높이에서 딜레마를 고안하여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또 창과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을 만들어 적과 싸워야 하는 고대 그리스의 시민, 혹은 왕의 검열을 피해 계몽주의를 설파하고 만들어나가야 할 18세기 프러시아의 시민. 이 딜레마를 만든 사람들과 그것을 듣고 고민한 사람들 모두, 시민의 눈높이에서 윤리를 고민했다.

샌델이 제시한 철도 기관사의 딜레마와 그것의 현실적 적용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그것이 왜 문제적인지 그 이유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민간인을 쏘아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샌델의 눈높이는 결코 시민들의 그것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는 미군의 시각으로, 자신과 비교했을 때 철저히 약자일 수밖에 없는 민간인들의 생사여탈권을 거머쥔 채 그들을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고민한다. 샌델은 집 앞에 찾아온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을지 여부를 실천이성의 원칙에 따라 검토하는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이 아니다. 그 시민으로부터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문을 하는 것이 윤리적일지 아닐지 하버드 학생들과 토론하며, 민주적 원칙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 그 자체의 눈높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3.

공법적 협약하에서의 비밀 조항은 객관적으로는—내용의 측면에서 볼 때는—하나의 모순이다.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즉 비밀 조항을 명령하는 사람들의 인격의 자질에 따라 판단한다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확실히 비밀은 성립할 수 있다. 즉 그들이 비밀 조항의 초안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냄으로써 인격적 존엄성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비밀은 성립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조항은 오직 하나뿐이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명제에 포함되어 있다. 공적인 평화의 실현 가능한 조건에 대한 철학자들의 준칙을 전쟁을 위해 무장한 여러 국가들은 충고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 임마누엘 칸트, 『영구 평화론』(서울: 서광사, 2008), 개정판, 58쪽.

시민의 딜레마와 점령군의 딜레마는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시민의 눈높이에서 만들어진 딜레마를 통해 윤리적 문제를 숙고하는 것과, 점령군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딜레마를 검토하는 것 역시 완전히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전자를 고민할 때 우리는 도덕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동료 시민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진실을 말하는 누군가, 혹은 전쟁에서 동고동락한 전우의 명예를 훼손시키면서까지 그가 벌일 수 있는 위험한 사태를 막아내고자 하는 누군가가 된다. 반면 후자의 상황을 가정하며 토론할 때, 우리는 그저 '이 사람들이 탈레반 협력자일지도 모르니까 죽이자'라는 결론에 도달한 미군이 되어버릴 뿐이다. 전자에는 윤리와 가치가 이미 딜레마 속에 내재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선택이 더 '전략적'으로 타당한가 뿐이다. 윤리적 책임과 도의적 갈등은 그것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판단의 요인으로 전락한다.

샌델이 제시한 딜레마에서 행위의 주체는 곧 '초법적 주권자'이다. 재판 없이, 그 어떤 법적인 절차를 거치지도 않고, 누군가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주체 말이다. 샌델은 독자로 하여금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그저 서류에 사인을 했을 뿐인 아우슈비츠의 아이히만이 될 것을 권유한다. 구체적인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의 목숨을 직접 빼앗는 게 아니라 그냥 '결정'을 내릴 뿐인 상황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구경꾼인 당신은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직접 밀지 않고도 철로 아래로 떨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하며, "그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맨홀처럼 아래로 통하고, 당신은 핸들을 돌려 뚜껑을 열 수 있다고"(39쪽)까지 상상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토록 기계적인 살인을 상상하는 행위가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사고실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적 행위의 주체로서의 개인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열차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비곗덩어리'를 죄책감 없이 철로에 처박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릴 뿐이다.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그것을 어떤 더 큰 뜻, 대의에 따라 행사하는 초월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찾아 헤매이는 미군, 혹은 그 미국의 패권적 지배에 맞선다는 명분 하에 온 몸에 폭탄을 칭칭 감고 뛰어드는 자살 테러범. 양자의 논리는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당신이 이라크에서 태어난 한 청년이라고 가정해보자. 나 한 사람의 목숨과 더불어 미국인 수십 명을 죽임으로써 '우리 편'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올바른 것일까? 샌델이 제시하는 논리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포함하여 몇 사람쯤 희생시키겠다는 자살테러범을 설득할 수가 없다. 미군들이 미국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 있듯, 자살테러범은 이슬람 공동체를 위해 미국의 민간인을 정의롭게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자살테러범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목숨을 바쳐 미국인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하버드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민간인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일인지 토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반대편에서 같은 주제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안 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죄책감을 덜어주는 복잡한 장치를 이용해 열차를 막기 위해 뚱뚱한 사람을 철로에 떨어뜨리는 사람과 자살테러범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일 뿐이다. 전자의 경우 무슨 요절복통 기계처럼 생긴 장치 덕분에 살인의 주체가 스스로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한다면, 후자는 아예 폭탄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날려버림으로써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지워버린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각자의 정의(正義)에 따라 행동하고 있을 뿐이다. 대체 그들은 어떤 원칙과 논리에 따라 서로를 설득하여 평화에 도달할 수 있을까?

각자의 이익과 도덕과 관습이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영원한 평화를 획득하기 위한 이성적인 방안을 도출해내기 위하여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썼다. 그리고 그는 본문의 부록에 위 인용구와 같은 단서 조항을 덧붙여 놓았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서 통용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인 철학자의 말에 정치가들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바로 그렇게, 초월적 관점을 통한 보편성에의 추구가 결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한 한국인 독자가 대단히 자의적으로 '공정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모습을 놓고 보면 상황은 훨씬 비관적인 것 같다.

2020-03-14

중국발 입국 봉쇄, 부도덕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퀴즈. 2020년 3월 14일 현재, 뉴질랜드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는 총 몇 명일까? 정답은 5명. 눈을 의심할텐데, 다섯 명, 맞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였으나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온 사람은 379명, 현재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은 두 명이고, 사망자는 없다.

뉴질랜드의 인구가 48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이것은 실로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의 확진자가 50명에 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이 3800명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세계가 놀라고 경탄해야 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뉴질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뉴질랜드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2월 3일부로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던 것이다. 1월 28일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National Health Coordination Centre (NHCC)를 세운 후, 그 통제에 따른 대응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중국을 떠난지 2주가 지났음이 확인된 경우에만 입국을 허용했다. 사실상 '중국 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3월 14일 현재 대만의 확진자 수 또한 4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만 또한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다.

대만과 뉴질랜드, 두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았고, 돌아오는 자국민을 철저히 추적 관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섬이라는 것이다. 출입국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또한 사실상 섬이다. 뉴질랜드나 대만보다 더 훌륭한 의료 체계와 헌신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응은 대만 및 뉴질랜드와 너무도 달랐다. 중국 본토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국인에 대한 세심한 추적 관찰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활발한 사회 활동'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사망자 수는 대만의 확진자 수보다 많다.

진지하게 묻자. 뉴질랜드와 대만의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가?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1980년생 여성으로, 세계 최연소 여성 지도자이며, 노동당이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보 여성 지도자다. 차이잉원의 내각에는 오픈리 트랜스젠더 장관이 IT 기술을 총 지휘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를 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끌고 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친문 선전선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눈에는 차이잉원과 저신다 아던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그들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당연한 일을 담대하게 하는 국가 지도자로 보인다.

솅겐국(aka 유럽)이나 미국처럼 육로로 외국과 교통이 가능한 나라는 입국 금지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이나 뉴질랜드 혹은 한국 같은 섬나라는 입국 금지를 하면 외국인이 못 들어온다. 입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감염 경로 추적이 용이해진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초기에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60명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국민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다.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칭송한다고?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 집어치워라. 진정 바이러스 대응을 잘 해낸 국가들은 따로 있다. 지리적 여건을 살려 봉쇄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수십 명 수준으로 감염자를 통제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다. 대만은 단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때 보건 총책임자가 통곡했다.

'글로벌 언론'들은 그런 사례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지리적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대만의 성공 사례가, 글로벌 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정부가, 글로벌 언론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아닌가?

다시 차별과 혐오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면역도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이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혐오 행동인가?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부도덕(immoral)한 것이다. 반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하고, 중국발 한국인의 행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의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을 따질 일이 아니다. 비도덕(unmoral)이다. 쓰나미가 몰려올 것에 대비해 제방을 높이 쌓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을 초기에 시행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계 동포에 대한 혐오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청와대가 그렇게까지 탁월한 인권 감수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통령이 뭘 하건 옹호하는 친문 네티즌들은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혐오 세력'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요컨대 그들은, 부도덕을 막기 위해, 도덕과 상관 없이 요구되는 대응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발생한 60명이 넘는 사망자들 앞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 능력 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진자를 찾아낸다 크어~' 같은 소리들을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에 빠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 차단은 몇몇 국가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전 국토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그렇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이른 시점에 봉쇄 전략을 택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봉쇄를 도덕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방역 차원에서의 입국 봉쇄 조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도덕(unmoral)한 일이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봉쇄 조치가 한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혹은 한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번질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도덕(immoral)의 문제를, 비도덕(unmoral)한 의학적 목적의 입국 봉쇄와 혼동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이 문제를 연거푸 강조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관념과 끓어오르는 도덕적 정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혐오하라' 같은 손쉬운 구호를 앞세우는 얼간이들이 득세할 때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기준을 잃지 않되, 도덕을 적용할 곳과 아닌 곳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다.

2019-08-20

지행합일에 관하여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는 하이게이트 묘역의 마르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 테제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영향력은 중요하지 않으며, 혁명적 실천이 관건이라는 식으로 독해되었다. 전혀 그런 종류의 뜻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으며, 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세계를 다시 주조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계를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43p, Singer, Peter, Marx: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여기서 마르크스가 제기하는 문제를 '지행합일의 문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행합일이란, 통상적으로 그렇게 여겨지는 것과 같이 앎의 목표도 아니고 실천의 목표도 아니다. 그것은 앎과 행동함의 공통된 대전제인 것이다.

왜 실천하는가? 여기서 피터 싱어가 말하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실천하지 않는다면 철학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층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세계에는 철학적인 문제 따위가 존재하는가? 아무튼, 우리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다면 그 해답은 우리의 손에 있지 않고, 해답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실천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앎과 실천의 문제를 이와 같이 엮어놓는 한, 실천하지 않을 경우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통속적인 지행합일에 대한 관점과 이 해석은, 비슷해보이지만, 사실은 같지 않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에서 누군가에게 지행합일을 요구한다는 말은, 어떠한 윤리적 당위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 당위로부터 연역되는 기준에 삶을 맞춰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통상적인 의미에서 지행합일이란 '지'와 '행'의 분리 및 양자 사이의 닿을 수 없는 간극을 전제한다.

반대로 피터 싱어가 해석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지'와 '행' 사이의 분리를 궁극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지행합일을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가 공부했던 헤겔 철학의 어떠한 해석을 통해 도출되는 당연한 결론이지만, 이 경우 우리는, 설령 그렇게 합일에 도달한다 해도, 그 '지'나 '행' 혹은 양자의 변증법적 종합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 진리에 대한 대응론적 관점에서는 검증할 수 없다. 이 경우 남는 것은 그저 막연한 '정치' 뿐이라는 비판이 가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