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로 구입한 헌 책 속에서 나온, 95년 서울 → 강릉 버스표.
원래 주인은 긴 여정을 견디기 위해 이 책을 샀구나 싶다.
그러나 책갈피가 꽂혀 있던 위치를 통해 추정해 보건대, 본인이 원하던 현실도피적 즐거움을 얻지는 못했던 듯.
고현학(考現學)의 사례로 기억할만 했다.
덧) 독서 목록(2022)을 확인해보니 고원정의 『빙벽』 1부의 2권이나 3권에서 나온 듯하다. 원고를 쓰기 위해 읽었던 책.
"영리함이라는 황량한 언덕에서 어리석음의 푸른 골짜기로 내려가라."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중고로 구입한 헌 책 속에서 나온, 95년 서울 → 강릉 버스표.
원래 주인은 긴 여정을 견디기 위해 이 책을 샀구나 싶다.
그러나 책갈피가 꽂혀 있던 위치를 통해 추정해 보건대, 본인이 원하던 현실도피적 즐거움을 얻지는 못했던 듯.
고현학(考現學)의 사례로 기억할만 했다.
덧) 독서 목록(2022)을 확인해보니 고원정의 『빙벽』 1부의 2권이나 3권에서 나온 듯하다. 원고를 쓰기 위해 읽었던 책.
나는 이한우라는 이름을 번역가로 처음 알았다. 길버트 라일이 쓴 『마음의 개념』은 내가 처음 읽은, 한국어로 이해할 수 있는 분석철학서였다.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이한우, 당시 조선일보 기자. 안티조선 운동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의 제국의 행동대장, 다스베이더 같은 존재였다.
안티조선 운동은 사라졌다. 망했다. 변질했다. 어떻게 말해도 좋겠다. 하지만 번역가 이한우의 역량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품에서 나와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된 후로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서양 고전에서 동양 고전으로의 지적 도약을 감행한 후, 그는 더욱 훨훨 날아가는 중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님께서 보내주신 『이한우의 사기』 총10권이 지난 주말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나는, 사기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대부분의 한국 식자층이 그럴 테지만, '열전'의 백이숙제 편부터 펼쳤다. 왜? 가장 유명하니까. 우리가 '사기'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역시 잘 읽혔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기열전은 반쪽짜리, 아니 1/3쪽짜리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기』 삼가주, 즉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까지 모두 번역해서 붙인 뜻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별로 쌓인 주석들이 만들어내는 시층과 사유의 궤적이 아름다웠다.
그 위에 붙어 있는 역자 본인의 주는 또 어떠한가. 이미 『논어』 와 『문장정종』을 완역해낸 철학자 이한우는 사마천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그가 주장하는) 정통 유교의 눈으로 꼼꼼히 읽어낸다.
첨부된 이미지 속 내용을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한우의 논어』는 "삼가주 완역 해설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겸양의 표현일 뿐이다. 이 새 번역본은 사실상 '사기 사가주(四家注)'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한우의 논어』가 이렇게 탁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옮긴이가 지니고 있는 역사철학의 확고함 때문일 수 있다. 백이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는 책의 1권을 펼쳤다. 역자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첫 세 문단을 옮겨 적는다.
1.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이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이면서도 공허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물음이다. 사실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조준이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에게 '무엇(What)'을 물어서 나올 대답은 뻔하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이를 향해 역사적 질문을 던질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인간이나 고대 중국의 인간이나 21세기 현대의 인간이나 똑같이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어떻게(How)', 즉 존재 방식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질문이다. 즉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느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고 어느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 쓸 것인가'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적어도 역사를 쓰는 사람은 일급 지성과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쪽, 역자 서]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질문은 유교 경전의 전체 체계를 제왕학의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이한우 동양 고전 해석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동양철학을 드디어 우리의 눈으로 읽어내는 시대의 개막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많은 독자분들이 이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간청한다.
오늘(4월 3일 금요일) 국회에서 한참 논의되고 있다는 우원식 개헌안.
한마디로 내용도 형식도 틀린, 맞는 게 하나도 없는 개헌안이다.
3대 내용이라는 것이 이렇다.
첫째, 헌법 전문에 광주항쟁 부마항쟁 넣자.
둘째, 지방자치 확대하자.
셋째, 계엄 재발 방지 조항 넣자.
내용을 역순으로 검토해보자.
계엄 재발 방지? 이미 윤석열의 불법 계엄을 현행 헌법으로 잘 막아냈음. 오히려 지금보다 더 대통령의 권력을 제한하면, 북한이나 제3국이 계엄 필요 상황을 유발할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가 망할 수 있음. 헌법은 국민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지만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함.
지방자치 확대? 지방자치는 아예 없애거나 대폭 축소 개편해야 함. 심지어 지방 거주민들도, 자신들 입에 떨어질 콩고물을 생각하지 않고 국가대계를 고민한다면, 지방자치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에 동의할 것. 근데 이걸 현행 유지하면서 확대한다? 개소리임.
광주항쟁 부마항쟁? 솔직히 이거 '호남표 영남표' 같은 얄팍한 계산에서 찬성하는 거 아님?
물론 광주항쟁 부마항쟁이 큰 사건이었음으로 원론적으로는 반대할 수 없음. 그런데, 그렇다면, 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해야 함.
우리 헌법 전문은 애초에 이상함. 3.1운동에서 시작하는데 곧장 4.19로 이어짐. 중간에 있어야 할, 한국전쟁의 서사가 빠져 있음.
한국전쟁은 단지 대한민국과 북한의 전쟁이 아니었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국제 질서의 기틀을 잡은, 일종의 '정초전쟁'임. 우리는 세계 최초로 정상 작동한, 아마도 마지막 사례일 수도 있을, UN군의 힘으로 살아난 나라임. (내가 돈과 힘이 있으면 어디 좋은 터에 칸트 사당을 짓고 싶을 정도.)
헌법 전문, 나는 솔직히 없어야 한다고 생각함. 하지만 정 그걸 그대로 두고 확장하고 싶다면, 광주 부마항쟁을 논하기 이전에, 한국전쟁을 넣어야 함.
한국전쟁은 민주항쟁임.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독재와 맞선, 최초의 민주 항쟁, 그것이 바로 한국전쟁임.
이렇게 내용이 다 틀린 우원식 개헌안. 심지어 형식도 틀렸음.
국회의장이라는 인간이 왜 지방선거를 앞두고 개헌안을 띄움? 왜 '지선과 연동해야 한다'고 뽐뿌질함? 이게 과연 정상적인 국회의장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음?
우원식은 사퇴해야 마땅함. 다시는 정치권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될, 公人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갖지 못한 사람임.
내용도 형식도 글러먹은 우원식 개헌안, 반대가 마땅함. 국힘의 당론은 옳고, 개혁신당도 당론을 바꿔서 지금이라도, 향후 있을 수 있는 장기적이고 진지한 개헌 논의의 단초를 마련해야 옳다고 생각함.
미국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 크리스틴 로젠이 쓴 『경험의 멸종』 은 훌륭한 페이지 터너다. 그 장점은 단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왜 읽기 쉬울까? 주제가 너무도 단순 명료하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기술에 의해 계속 변하고 재편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깔고, "비기술적 가치와 지식 흡수의 방식이 대체되고 사라지는 것", 즉 "경험의 소멸"[19쪽]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그런 삶을 그만 살자,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진짜 경험'을 돌려주자는 이야기다.
좋은 주장이다. 우리는 이미 나쁜 사례를 잔뜩 알고 있다. 가장 극적인 예를 들어보자. "2010년 한국에서 한 부부가 인기 온라인 게임 프리우스Prius에서 가상 아이를 키우느라 실제 아이는 굶어죽게 내버려둔 일이 있었다."[31쪽] 꼭 이렇게 극적인 사례를 들 필요도 없다. 걸어다니면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든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 온전히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의 '정념'에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 정념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이성'에 설득되지 않아서다. 자신의 논지를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인용하고 여러 학자를 원용하는데, 양쪽 모두에 있어서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6장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사라이 시에라라는 33세 여성의 사례를 짚어보자. 시에라는 혼자, 하지만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원래 세계와 단단히 연결된 채, 튀르키예 여행을 갔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지 못했다. 2013년 1월 21일 귀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고 실종된 후 11일 후 이스탄불의 역사 지구 술탄아흐메트의 성벽 근처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범인은 인근의 노숙자였다. 페인트 시너에 취한 채 시에라를 강간하려다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범인은 스마트폰이다.
그녀의 친구와 가족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시에라가 여행 경험을 강화하기 위해 의존했던 기술 때문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지는 않았는지, 혼자 여행하는 여성이 직면하는 위험에 무감해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220쪽]
'주변의 위험을 살피지 않고 폰만 보고 다니지 말라'는 충고는 일반론적으로 옳다. 하지만 노숙자가 시에라를 강간하려 했을 때 상황이 스마트폰과 유관한지 아닌지, 적어도 독자인 우리는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여행지에서 셀카 찍다가 절벽에서 떨어진 사례처럼 소비될 일이 아니다. 비겁하고 심지어 위험한 서술 방식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론적 측면을 보강하기 위해 끌어들인 내용도 종종 눈에 거슬린다. 저자는 "벤야민은 이렇듯 열정적이지만 산만한 비판이 문화의 수준을 낮추고 대중이 예술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저속하고 단세포적으로 변할 것이라[245쪽]고 우려"[246쪽]했다고 적는다. 하지만 저자 스스로 잘 요약했듯, "발터 벤야민은 1936년 에세이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기술적 변화, 특히 기계적 복제가 새로운 관점인 "진보적 반응"(그가 붙인 이름이다)을 촉진한다고 주장했다."[245쪽] 기술복제로 인한 예술작품의 아우라 상실을 벤야민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반겼다. 로젠은 벤야민을 똑바로 읽고도 거꾸로 인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식의 견강부회가 등장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자의 편향성 때문이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은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기 전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나는 X세대다) 성인기에야 이 새로운 세상을 접하[18쪽]고 이 세상의 전망과 위험성을 헤쳐 나가고 있는 나 자신의 경험에서 발전"[19쪽]한 책이다. 특정 세대의 경험과 세계관에 입각해 현재의 미디어 발전을 제단하고 있는 것이다.
X세대라면 여자친구와 워크맨 이어폰을 나눠 듣는 것을 아름다운 연애 경험의 한 장면으로 추억할 것이다. 그런데 오직 그것만이 '현실'일까? 여자친구의 온라인 게임 계정에 대신 로그인해 레벨을 높이고 아이템을 주워주는 Z세대의 연애 경험 역시 나름의 진실된 무언가를, authenticity를 갖고 있지는 않을까?
지니는 이미 램프 밖으로 풀려났다. 이 문제는 특정 국가에서 성장한 어떤 세대의 편견을 넘어, 보다 진지하게, 가치 중립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뿐 아니라,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야만적인 착취의 대상이던 식민지 주민들과 관련해서도 착취는 끝이 났다. 자신의 이익을 위한 물질적 형태의 착취는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급격한 감소 추세로 미루어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완전히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오늘날에는 모두가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모두가 자기 밖의 목적을 위해 자신을 이용한다. 사물의 생산이라는 한 가지 전능한 목표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목표, 즉 인격의 완벽한 발달, 인간의 완벽한 탄생과 완벽한 성장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수단을 목적으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의 생산만이 중요한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물로 변화시킨다. 우리는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를 생산하고, 점점 더 기계처럼 행동하는 인간을 제작한다. 19세기에 노예가 될 위험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로봇이나 자동인형이 될 위험이 있다. 물론 분명 시간은 절약된다. 하지만 시간을 절약해 놓고는 막상 그 절약한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당혹스러워[26쪽] 한다. 기껏해야 시간을 죽이려고 노력할 뿐이다. 일주일에 3일만 일을 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시간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영혼의 붕괴를 수용할 만한 병원은 아직 충분치 않다.[27쪽]
에리히 프롬,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서울: 나무생각, 2016).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일원으로서, '노동 해방'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에리히 프롬의 양면적 고뇌가 잘 담겨 있는 대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