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0

예술은 여덟 도시의 10000명의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계는 자신을 예술계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예술계 구성원이다. 감상 후보의 지위를 부여하는 개인은 바로 본인이 그런 지위 부여 대상을 직접 만든 작가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레디메이드나 파인아트의 사례처럼 지위 부여자와 작품 제작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술'이라는 낱말을 트집잡아, 디키가 예술 전문가들과 같은 패거리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는 엘리트주의 이론을 제시한다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때는 방금 논한 점을 들어 반박해볼 만하다. 톰 울프 Tom Wolfe, 1930~2018는 『현대미술의 상실 The Painted Word』에서 자신이 보기에 예술계 구성원 가운데 현대미술의 특색taste을 결정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지역별 분포상황을 자못 진지하게 작성했다.

우리는 예술계를 구성하는 교양인 culturati (미술가를 제[140쪽]외하고) 로마에 750명, 밀라노에 500명, 파리에 1,750명, 런던에 1,250명, 베를린·뮌헨·뒤셀도르프에 2,000명, 뉴욕에 3,000명, 그 외 우리가 잘 아는 세계 각지에 1,000명 쯤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덟 도시의 '사교계 les beaux mondes'에 속한 10,000여 명의 (한 작은 마을의 인구수에 불과한!) 인사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이 예술계다."

울프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할 만한 예술로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10,000여 명의 예술계 구성원이다. 하지만 디키가 말하는 예술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생각도 제한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실제로 디키는 예술의 개념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가능하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나 지식과 같은 예술적 수완, 혹은 예술 현장에 대한 이해, 미적 안목의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키의 예술 정의가 전통적 의미의 예술 정의인 것은 맞지만, 예술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상이 예술품의 지위를 온전히 획득할 가능성을 전혀 차단하지 않는 정의라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훈련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 아니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그보다 훨씬 넓다.[141쪽]

톰 울프다운 코멘트, 그리고 좋은 해설이다. <현대미술의 상실>이 출간된 게 1975년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1만 명이라는 숫자에 더 큰 설득력이 생긴다.

문제는 내가 저 내용을 어떤 책에서 인용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 챗GPT니 제미나이니 하는 놈들한테 물어봐도, 당연하다는 듯,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지 혼자 지어내서 지껄여댄다.

이런 식의 '출처 상실'은 왜 벌어졌을까? 당시 내가 저 대목을 손수 타이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플 노트의 OCR 기능을 이용하여 죽 긁어붙이고, 최소한의 편집만 한 후, 서지사항을 적어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출처를 아는 분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흑흑...

2026-03-04

사람은 언제나 딴생각을 하며 불행해진다

경험 표집을 활용한 한 [연구](https://doi.org/10.1126/science.1192439)는 마음 방황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46.9%에 딴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든 책을 읽든 대화를 하든 휴식을 취하든 무엇을 하든지 딴생각에 쉽게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성관계 중에는 딴생각을 가장 적게 했지만, 그 비율은 여전히 10%에 달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앱에서 울리는 알람에 답변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만요.)

https://maily.so/mind/posts/fca43346(링크 깨짐)

제목이 곧 내용이며 못 알아듣는 이들에게도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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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원래 2024년 7월 11일,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웹에 올린 쪽글이다.

'굶주리는 아프리카 어린이' 비유를 들고 싶어지는 실험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비유를 했었는지 나도 기억 못하겠다.

그러므로 제목을 바꾼다. 좀 더 합리적인,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글과 함께 고민할 수 있을법한 제목으로.

참고로 인용문에서 말한 "경험 표집을 활용한 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논문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자면, "떠도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딴생각에 빠지고, 그만큼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Matthew A. Killingsworth, Daniel T. Gilbert, A Wandering Mind Is an Unhappy Mind. *Science* 330, 932-932 (2010). DOI:10.1126/science.1192439

역시 대니얼 길버트답게 글을 잘 썼다.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보자.

In conclusion, a human mind is a wandering mind, and a wandering mind is an unhappy mind. The ability to think about what is not happening is a cognitive achievement that comes at an emotional cost.
결론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방황하는 마음이며, 방황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능력은 인지적 성취이지만, 정서적 대가를 수반한다.

2026-02-26

내 글이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날

은 2002년 7월 3일이며, 7월 4일자 신문에 실렸다.

경향신문에서 소위 '인터넷 논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자 'e메일 옴부즈만'이라는 코너를 신설했었는데, 거기에 글을 써서 보냈던 것이다. 1983년생인 나는 당시 만으로 19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적자금문제 심층분석 아쉬워-

공적자금 운용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이른바 횡령을 했다면 당연히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회수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문제를 삼는 것은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공적자금이란 무엇인가. 금융사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투입된 돈이다. 댐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르는 시멘트와 같다. 독일에선 4위 은행이 위험했을 뿐인데도 금융공황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선 1위 은행이 부도 위기에 처했었다. 어찌어찌 하여 구원되긴 했지만 몹시 위험한 순간을 통과했다.

댐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급한 김에 성금을 모아 시멘트를 사서 발랐다. 그래서 살아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가 내 시멘트 값 내놓으라고 소리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공적자금의 회수는 내 주머니에 돈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왜 좀 더 폼나게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느냐는 비판과 다를 게 무엇인가.

최근 경향은 서해교전의 비극은 비극이지만 햇볕정책의 기본 논조는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햇볕정책의 기본 정신은 비록 당장 이익을 볼 수는 없더라도 북한 정권이 급속히 붕괴된다면 남한에 더 큰 부담이 되므로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을 돕자는 논리일 터이다. 이를 지지하는 경향신문이라면 공적자금에 대해서도 좀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더욱 깊이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다.

〈노정태/대학생 bard-of-wind@hanmail.net〉

"[e메일 옴부즈만]서해교전 냉철한 시각 돋보여". 경향신문. 2002년 7월 3일. https://www.khan.co.kr/article/200207211834161

편집부에서 편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내가 쓰는 수법들이 여럿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주제의식 역시, 이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청년 진보 인터넷 논객'이었는데도, 시스템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관점도, 확실히 '진보 진영' 일반과는 결이 다르고.

사람은 달라지고 나아지는 존재이며 그럴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딱히 엄청나게 바뀌는 건 또 아닌 듯하다.

나는 'e메일 옴부즈만'에 세 번 독자 투고를 실었고, 이후 잡지사에 취직해 GQ와 VOGUE 같은 훌륭한 잡지에 칼럼을 보내다가, 2008년 경향신문에서 '블로그 속으로'라는 코너를 만들면서 신문 칼럼니스트가 됐다. 만 25세의 일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썼던 글을 뒤적이다가 접하게 된 최초의 기록을 갈무리하여 공개해 보았다.

2026-01-01

독서 목록(2025)

  1. 250218화 - 박한슬. 『숫자 한국: 오늘의 데이터에서 내일의 대한민국 읽기』(서울: 사이언스북스, 2025)
  2. 250224월 - 빌 에디. 박미용 옮김. 『그는 왜 하필 나를 괴롭히기로 했을까?』(경기도 고양: 갈매나무, 2018)
  3. 250227목 - 빌헬름 딜타이. 이한우 옮김. 『체험·표현·이해』(서울: 책세상, 2002). 책세상문고 고전의 세계 024. 리디북스.
  4. 250322토 - 용수. 신상환 옮김. 『근본 중송』(서울: 도서출판 b, 2022). B판고전 21.
  5. 250324월 - 지그문트 프로이트. 강영계 옮김. 『쾌락 원리의 저편』(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지식을만드는지식 고전선집 0374.
  6. 250331월 - 범천. 가연숙 사진. 『불교논리학의 향연』(서울: 불교시대사, 2016)
  7. 250524토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문형준 옮김. 『아포칼립스』(서울: 도서출판 b, 2022)
  8. 250611수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 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경기도 파주: 서광사, 2008). 개정판.
  9. 250622일 - 손민석.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서울: 마인드빌딩, 2025)
  10. 250710목 - 리처드 오스본. 보린 반 룬 그림. 윤길순 옮김. 『사회학』(서울: 김영사, 2001). 하룻밤의 지식여행 6.
  11. 250712토 - 프란스 드 발. 장대익, 황상익 옮김. 『침팬지 폴리틱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서울: 바다출판사, 2018). 개정판.
  12. 250723수 - 스티븐 위트. 백우진 옮김.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25)
  13. 250726토 - 아투로 E. 허낸데즈. 방진이 옮김. 『제대로 연습하는 법』(서울: 북트리거, 2024)
  14. 250727일 - 살만 루슈디. 강동혁 옮김. 『나이프』(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24)
  15. 250809토 - 전용덕. 『식민지 근대화의 실상』(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5)
  16. 250817일 - 에드워드 콘즈. 배광식 옮김. 『불교의 길』(경기도 파주: 뜨란, 2021)
  17. 250817일 - 에드워드 콘즈. 최필영 옮김. 『위없는 지혜: 금강경·반야심경 해설』(서울: 사유수, 2025)
  18. 250817일 - 헨리 제임스. 김진욱 옮김. 『에스펀의 러브 레터』(서울: 생각하는 백성, 2000)
  19. 250828목 - 로라 베이즈. 성원 옮김. 『인셀 테러』(서울: 위즈덤하우스, 2023)
  20. 250912금 - 크세노폰. 오유석 옮김. 『경영론·향연』(서울: 부북스, 2015)
  21. 250925목 - 이선 크로스. 왕수민 옮김. 김경일 감수. 『감정의 과학』(경기도 파주: 웅진지식하우스, 2025)
  22. 250927토 - 우에사카 요시후미. 정현욱 옮김. 『일본제철의 환생: 가라앉던 제조 기업은 어떻게 되살아났는가?』(서울: 워터베어프레스, 2025)
  23. 251121금 - 존 윌리엄스. 김승욱 옮김. 『스토너』(서울: 알에이치코리아, 2015). 전자책.
  24. 251125화 - 이병한. 『이병한의 아메리카 탐문: 피터 틸, 일론 머스크, 알렉스 카프, J. D. 밴스 이들은 미국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2025)
  25. 251205금 - 조은정·허철. 『한자와 고대중국어』(서울: 역락, 2024). 경성대학교 한국한자연구소 한자학 교양총서 04.
  26. 251218목 - 폴 실비아. 정지현 옮김. 『교수처럼 쓰는 법』(서울: 빌리버튼, 2025)
  27. 251219금 - 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 『성의 역사 1·지식의 의지』(경기도 파주: 나남, 2010), 제3판.
  28. 251219금 - 조앤 W. 스콧. 정지영·마정윤·박차민정·정지수·최금영 옮김. 『젠더와 역사의 정치』(서울: 후마니타스, 2023)
  29. 251224수 - 요한 하리. 김하현 옮김. 『도둑맞은 집중력』(서울: 어크로스, 2023).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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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록을 나는 왜 매년 작성하고 있는 걸까. 2025년의 끝자락에서 새삼스러운 고민에 잠깐 빠져 있던 나는 이런 글을 읽었다.

없음이 아니라 과잉이 사랑을 죽였다고 말하는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뭘까. 무엇이든 오래가려면 희소성을 유지하라는 것일까. 오웰은 그런 답을 주지 않는다. 생업이란 무엇을 많이 만들거나 많이 파는 일이며, 적게 해도 된다면 그건 생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신의 사랑이 생업에 완전히 파괴되기 전에 업계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웰처럼 업계를 떠날 수도 없다면 말이다. 일과 개인 사이를, 5천권과 가방 속의 한권 사이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 분리가 부디 유지되길 바라면서.

김영준. "5천권과 한권 [크리틱]". 한겨레. 2025-12-31.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37459.html

내가 이 목록을 만드는 이유를, 위 글을 통해, 보다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책을 재미로 읽는 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직업상 많은 책을 동시에 꺼내고 조금씩 보고 훑어 읽는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아웃풋'을 내기 위해 '인풋' 하는 과정이다.

만나야 할 사람도 있고, 쳐내야 할 마감도 있다. 매년 해야 할 일은 늘어만 간다. 나는 지식, 까지는 아니어도 담론의 생산과 유통에 기여함으로써 내 존재 가치를 입증하는 사람이기에, 조각조각 읽고 조각조각 쓰는 일 역시 점점 더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독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읽기 위해 읽는 일이었다. 책의 앞표지부터 뒷표지까지. 판권까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읽고 쓰는 게 직업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읽었다.

그래서 나는 매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책만 기록하는 목록을 따로 만들고 있다. 읽고 쓰는 게 직업이니 매년 100권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물론 매년 지키지 못하고, 매년 부끄러움을 느끼다가, 결국 해를 넘긴 후에야 공개한다.

언젠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그런데 다음 순간에, 그런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들, 내게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스스로를 반박했다. 그리고 목록을 다시 만들었다.

나는 말하자면 '덕업일치'가 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업' 뿐 아니라 '덕'에 대해서도 공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그것이 이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세상에 대한 작은 보답의 시작일 것이라고 믿는다.

2025-08-20

신뢰의 사슬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판단을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신뢰하는 이 사람이 신뢰하는 저 사람이 신뢰하는 그 사람을 신뢰'한다. 그러니까 경제 정책이나 탁현민이나 뭐나 뭐나 마음에 안 들어도, 통상적인 20대 여성이 윤서인이랑 같은 후보를 찍을 수는 없다. 신뢰의 사슬이 뚝 끊긴다.
노정태. "왜 20대 여성은 현 정권을 지지하는가." 노정태의 블로그. 2018-12-23. https://basil83.blogspot.com/2018/12/20.html

오랜만에 블로그를 펼쳐서 뒤적거리다 발견한 옛 게시물의 한 대목이 눈에 띄어서 코멘트.

'신뢰의 사슬', 내가 만들었지만 매우 그럴싸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세상 모든 일을 다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알 수도 없으며 판단하는 건 더더욱 귀찮아함.

사람들은 그냥 '내가 아는 저 사람이 알아서 해주겠지', '내 친구의 친구가 그렇다는데 뭐 맞겠지', 정도로, 본인과 직접 상관 없는 거의 모든 문제를 퉁 치고 지나감.

그래서 정치인은 특별한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해야 함. 어떤 소명의식? '신뢰의 사슬'로 온 몸을 칭칭 감고 살아야 하는, 솔직히 말도 안 되게 피곤한 그 노역을, 기꺼이 감당하겠노라는 소명의식.

비단 정치인 뿐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 조금이라도 발을 들였고, 발화하는, 그런 사람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

이쪽에서 한번 신뢰의 사슬을 거하게 깨뜨리면, '저 ㅅㄲ가 하는 말은 내용이 옳아도 재수없어서 동의 못하겠다' 이런 아이콘이 되어버리면, 공적인 활동의 영역이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음.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시민이겠죠.)

조국 사태가 낳은 최악의 결과도 결국 그것 아닌가? 조국을 쉴드치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그 수많은 '똑똑하고 정의로운 사회적 발화자'들이, 단지 진영 논리 하나만으로 움직이는 마리오네뜨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의 신뢰의 사슬이 반토막 아니 1/4토막 이하로 줄어들어버리고 말았던 것.

우리 사회가 좀 더 섬세하고 촘촘한 신뢰의 사슬을 맺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대다수 국민들이 정치니 사회적 이슈니 딱히 신경 안 쓰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할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