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27

조건에 맞서기, 운명에 맞서기

 

조건과 운명.

사람들은 흔히 이 두 요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양자는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운명에 맞서는 태도를 견지하되,
조건에는 순응하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뚜렷한(...) 사계절이 있고,
극심한 연교차가 있고,
땅을 파도 석유는 나오지 않고,
국제적으로 쓸만한 무역항은 부산 뿐이며
북쪽은 어떤 유사국가 무장단체가 막고 있다.

이런 조건은 우리가 발버둥쳐서 바꿀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냥 순응하고, 그 속에서 전체 파이를 키우되,
서울과 경부선 라인을 제외한 다른 지역이
어떻게 소외되지 않을지 고민하는 게 합리적이다.

개인적인 차원으로 내려와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나에게는 나의 조건이 있고,
당신에게는 당신의 조건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여기서 조건의 역설이랄까, 그런 게 생긴다.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그제서야 비로소 '운명'을 바꿀 여지가 생긴다는 것.

우리는 그렇게 선진국 문턱을 살짝 넘었다.
조건을 받아들이되 운명에 맞섬으로써.

민주당의 지역이기주의적 행태 앞에서
민주당 지지 고학력층의 골때리는 소리들을 보고
이분들은 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 보았다.

이 사람들의 세계관은 정 반대가 아닐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조건을 '거부'하면서
운명에 순응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데,
그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운명에의 순응이다.

이영도가 피를 마시는 새였나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토끼는 자신에게 강한 턱과 이빨이 없다고 한탄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에게 달린 두 다리와 큰 귀를 이용해
포식자를 감지하고 재빨리 숨어서 이겨낸다.

조건에 순응하는 것은 운명에 순응하는 게 아니다.
조건에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운명과 맞서기 위한 첫 걸음이다.

대한민국은 충분히 큰 나라여서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가 아닌
다른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가 미국은 고사하고
심지어 일본과 비교하기에도 부적합한
그런 아담한 사이즈의 '영토국가'라는
조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방소멸은 극복할 수 있다.
심지어 운명조차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하에서
그 조건을 활용할 때에만 가능하다.

2026-04-23

너무도 단순한 돈의 방정식과 어두운 곳을 보지 않는 돈의 심리학

Housel, M. (2025). The Art of Spending Money. Portfolio(Penguin).
Housel, M. (2020). The Psychology of Money. Harriman House.

한국어판 <돈의 방정식>은 저자의 전작인 <돈의 심리학>의 후속편이다. 기왕 읽는 김에 두 권 다 구입했다.

두 책의 소재, 주제, 심지어 서술 방식은 모두 동일하다. 무리해서 돈을 더 벌려고 하지 말고 적당히 만족하며 사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두 권 모두 키워드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enough'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좋은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안분지족'이 가능한 상태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저자가 <돈의 심리학> 챕터 3에서 언급하는 조지 헬러와 해지펀드 매니저의 일화가 바로 그렇다.

조지 헬러는 '저기 저 해지펀드 매니저는 네가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하루에 번다'고 말하는 커트 보네것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저 사람이 절대 갖지 못할 것을 갖고 있는걸... (그거면) 충분해.'

여기서 어떤 논리적 모순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는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조지 헬러가 <캐치-22>의 저자로서 가지고 있는 불멸의 명성은, "a hedge fund manager"만 가질 수 없는 게 아니다. 심지어 커트 보네것조차도, 보네것이 가진 명성과는 별개로,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신전속적이고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연 이 책을 읽을 수많은 이들에게 그런 일신전속적이고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냐는 거다. 나는 갑돌이의 아들이며 개똥이 아빠다, 라고 생각할 자유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모든 남자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모든 여자는 누군가의 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경제적' 가치와 자부심의 근원은, 말하자면, 일신전속적이고 고유하지만 딱 나의 친족 범위 내에서만 가치를 지니는 무언가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더 끔찍한 경우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족이 됐건 직장 내에서의 인정이 됐건, 심지어는 가족의 틀을 넘어서는 사랑(aka 불륜이나 그... 뭐 수간? 같은 것)이 됐건, 그 고유한 가치가 경제적인 이유로 파괴되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고 단단한가? 과연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가?

돈 때문에 작살난 가족은 돈이 없어도 파괴되었을 거라고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돈 문제로 크게 고심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모건 하우절의 두 베스트셀러가 그렇게 막되먹은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다. 저자는 몹시 사려 깊은 문장과 어조로, 술술 읽히도록, 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지만 무시하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숙달된 미국 저널리스트의 글쓰기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출나다. 배울 면이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거기서 만족하기 어렵다. '돈의 심리학'을 어기게 되는, 불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선택을 하고야 마는, 그런 '심리학'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애석하게도 미국의 대중 교양 서적 시장은 그러한 인간의 내면을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저 이러저러한 호르몬 작용이라고 매도하거나, 아무튼 깊게 따져볼 필요도 없는 무언가로 치부할 따름이다.

나는 그게 매우 애석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인문학이라는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할 일이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2026-04-13

승려(혹은 종교인)이 돈을 벌면 안 되는 이유

간단하다. 승려 혹은 종교인은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는 업종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돈을 버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정당화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모든 자본주의적 행위자가 그러하듯, 자신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시장을 넓히려고 들 것이다.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는 업자가 시장을 넓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마음의 불편을 제공하는 것이다. 요컨대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장사를 할 유인동기가 된다는 소리다.

이는 마치 어지간한 나라에서는 의료행위를 순수한 영리 추구 행위로 내버려두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의사도 돈을 벌어야 하지만,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의료 지식을 마음껏 활용하도록 내버려두면, 없는 병도 만들어서 '치료'한다고 장사를 할 우려가 생긴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적절한 방식으로 의료의 사업화를 규제한다.

종교로 돈을 버는 그 승려를 두고 '왜 안 됨? 하는 사람들이 퍽 많은 것을 보고 놀라는 중이다. 종교인이 제공하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면, 그들의 행위는 돈벌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건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만 하는, 아주 당연한 결론이다. 이런 것까지 설명이 필요한 세상이 될 줄은 몰랐다.

추가) 마음의 평화 제공 + 의료 서비스 제공 + 돈벌이 = 안아키. 이렇게 말하면 단번에 이해가 되실런지?

——

2020-11-15 작성


2026-04-08

1995년의 버스표


 

중고로 구입한 헌 책 속에서 나온, 95년 서울 → 강릉 버스표.

원래 주인은 긴 여정을 견디기 위해 이 책을 샀구나 싶다.

그러나 책갈피가 꽂혀 있던 위치를 통해 추정해 보건대, 본인이 원하던 현실도피적 즐거움을 얻지는 못했던 듯.

고현학(考現學)의 사례로 기억할만 했다.

덧) 독서 목록(2022)을 확인해보니 고원정의 『빙벽』 1부의 2권이나 3권에서 나온 듯하다. 원고를 쓰기 위해 읽었던 책.

사마천. 이한우 옮김. 『이한우의 사기』(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26), 총10권.



나는 이한우라는 이름을 번역가로 처음 알았다. 길버트 라일이 쓴 『마음의 개념』은 내가 처음 읽은, 한국어로 이해할 수 있는 분석철학서였다.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이한우, 당시 조선일보 기자. 안티조선 운동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의 제국의 행동대장, 다스베이더 같은 존재였다.

안티조선 운동은 사라졌다. 망했다. 변질했다. 어떻게 말해도 좋겠다. 하지만 번역가 이한우의 역량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품에서 나와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된 후로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서양 고전에서 동양 고전으로의 지적 도약을 감행한 후, 그는 더욱 훨훨 날아가는 중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님께서 보내주신 『이한우의 사기』 총10권이 지난 주말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나는, 사기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대부분의 한국 식자층이 그럴 테지만, '열전'의 백이숙제 편부터 펼쳤다. 왜? 가장 유명하니까. 우리가 '사기'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역시 잘 읽혔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기열전은 반쪽짜리, 아니 1/3쪽짜리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기』 삼가주, 즉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까지 모두 번역해서 붙인 뜻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별로 쌓인 주석들이 만들어내는 시층과 사유의 궤적이 아름다웠다.

그 위에 붙어 있는 역자 본인의 주는 또 어떠한가. 이미 『논어』 와 『문장정종』을 완역해낸 철학자 이한우는 사마천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그가 주장하는) 정통 유교의 눈으로 꼼꼼히 읽어낸다.

첨부된 이미지 속 내용을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한우의 논어』는 "삼가주 완역 해설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겸양의 표현일 뿐이다. 이 새 번역본은 사실상 '사기 사가주(四家注)'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한우의 논어』가 이렇게 탁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옮긴이가 지니고 있는 역사철학의 확고함 때문일 수 있다. 백이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는 책의 1권을 펼쳤다. 역자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첫 세 문단을 옮겨 적는다.

1.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이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이면서도 공허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물음이다. 사실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조준이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에게 '무엇(What)'을 물어서 나올 대답은 뻔하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이를 향해 역사적 질문을 던질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인간이나 고대 중국의 인간이나 21세기 현대의 인간이나 똑같이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어떻게(How)', 즉 존재 방식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질문이다. 즉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느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고 어느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 쓸 것인가'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적어도 역사를 쓰는 사람은 일급 지성과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쪽, 역자 서]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질문은 유교 경전의 전체 체계를 제왕학의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이한우 동양 고전 해석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동양철학을 드디어 우리의 눈으로 읽어내는 시대의 개막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많은 독자분들이 이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간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