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5

우리가 '언제적 하버마스' 타령이나 할 때, 하버마스는 늘 현재를 살고 있었다

1970년대에 학자로서 전성기를 맞이한 현대의 거장 위르겐 하버마스는, 1990년대에 대한민국에 급격히 소개되면서 이른바 '포스트' 담론들의 대항마로 큰 각광을 받았고, 그 열풍이 시들해지면서 동시에 급격히 대한민국의 식자층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그는 꾸준히 현실 정치를 관찰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며 사회 참여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 2008년에 등장한 책이 바로 『아, 유럽』이며, 우리는 2011년 그 책의 한국어판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제서야 제 우편함에 당도한 이 뒤늦은 편지와도 같은 책을 읽으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빠졌다. 다른 그 무엇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외국의 학자들을 유행 따라 읽고 소개하는 한국의 지적 풍토가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언제적 하버마스'는 없다. 그는 꾸준히 그가 살고 있는 현재를 해석하고 그 현재와 상호작용한다. 과거의 철학자를 과거의 유물로 만드는 것은 그를 그렇게밖에 치부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다.

특히 하버마스와 같이, 본인의 독창적인 사상을 만들어내는 것만큼이나 다른 학자들의 논의를 요약해서 전달하는 일에 능숙한 철학자를, 단지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읽지 않는 것은 대단히 큰 손해다. 이 책 『아, 유럽』은 20세기의 중후반부를 살아가는 현대철학의 거목들의 진면모를 아주 짧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려낸 강연문들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 거장의 손으로 (본인의 논지를 펴기 위한 왜곡 없이) 요약된 거장을 접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

최수태. "위기에 빠진 유럽, 하버마스의 처방은?". 프레시안Books. 2011-11-25.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7092 

3월 14일 하버마스의 부음을 듣고 저는 어떤 서평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서평지였던 프레시안북스에 실린, 원고지 50매에 달하는 그 긴 서평의 저자는, 하버마스의 <아, 유럽>을 다각도로 읽어내고 있었죠.

하버마스는 <아, 유럽>에서 미국의 '좌파 애국주의'를 공들여 다루는데, 그것은 유럽통합론자로서 하버마스가 이성 중심의 공론장 뿐 아니라 감성으로 만들어진 애국심, '유럽의 애국심'이 필요하다는 걸 통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추측을 담아내고 있는 서평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책의 내용을 넘어서, 그 책을 읽고 있는, 혹은 읽어야 할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모습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지점이야말로 이 서평이 독특한 가치를 지니게 만든 부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뇌리에 계속 남아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은 분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언제적 하버마스' 같은 소리나 찍찍 내뱉으면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외국의 지적 흐름을 무슨 두쫀쿠 버터떡마냥 소비하고 버리는 동안, 하버마스 같은 진정한 지식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맥락 위에서 최선의 지적 활동을 해내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위르겐 하버마스, 위대한 학자이자 열정적인 공공 지식인, 그의 명복을 빕니다.

2026-03-12

옌스 죈트겐, 크누트 푈츠케 엮음, 강정민 옮김, 『먼지 보고서』(서울: 자연과생태, 2012)

옌스 죈트겐, 크누트 푈츠케 엮음, 강정민 옮김, 『먼지 보고서』(서울: 자연과생태, 2012)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갑자기 춥다가 덥다가 하는 기온 때문만은 아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이하기 어렵게 만드는 불청객, 미세먼지 때문이다. 물론 예전에도 봄마다 불청객 황사가 찾아왔지만 요즘의 미세먼지는 다르다.

올해 초, 설 연휴가 끝나던 주말에는 수도권의 미세먼지가 1000마이크로그램/세제곱미터를 넘겼다. 0에서 30이면 좋음, 31에서 80이면 보통, 81에서 150이면 나쁨, 150 이상이면 '매우 나쁨'인데, 그 '매우 나쁨'의 기준선을 한참 넘어선 것이다.

이전까지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먼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을까? 물론 우리는 늘 먼지와 마주치고 살아간다. 먼지는 책꽂이 위에도 쌓여있고, 우리의 몸에서도 뿜어져 나오며,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다. 사실, 먼지는 어디에나 있을 뿐 아니라, 우주가 시작되던 바로 그 순간부터 존재해왔다. 실로 이 우주는 먼지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먼지와 함께 살아가고 있고, 언젠가 먼지로 돌아간다.

독일 아우그스부르크 대학교 환경과학연구소를 이끄는 옌스 죈트겐은 대단히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화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을 철학으로 바꿔서, 질료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가 제품 형상을 공부한 크누트 푈츠케와 함께, 자신들을 빼고도 24명이나 되는 저자들이 쓴 글을 묶어 낸 책 <먼지 보고서>를 펼쳐보자.

미세먼지, 또 초미세먼지가 우리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들은 호흡기를 통해 폐로 흡수되며, 다양한 질병을 유발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얼마나 많은 먼지를 만들어내는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1990년대 초 플렌스부르크(Flensburg)와 가미쉬(Garmisch) 사이에 있는 3,000가구를 실제로 관찰한 결과 대부분의 공간에 있는 공기는 대도시의 차가 많이 다니는 교차로보다 50배나 더 유해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그들 삶의 60~90%를 집에서 보내기 때문에 집먼지는 외부의 해로운 입자만큼이나 건강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178쪽)

이와 비슷한 연구가 또 하나 있다. 북미의 연구자들은 1990년, 178명의 실험 대상자에게 휴대용 먼지감지기를 설치했다. 이 사람들은 하루에 12시간씩 먼지 감지기를 달고 살았는데, 그 결과, 그들의 집과 생활 공간에서의 먼지는 건강을 유지하기에 적합한 기준치 이하였던데 반해, 대상자의 휴대용 먼지감지기에 포착된 먼지의 양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다시 말해, 집은 깨끗해도 사람이 더러웠던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현상을 '개인적 구름'이라는 표현으로 해설했다."(188쪽) 우리는 한 평생 스스로 만드는 먼지 구름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건강을 위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기본적인 것들이다. 잘 씻고, 청소를 깨끗이 하고, 공기가 맑은 날이면 환기를 자주 하는 것 등. 또한 국내에서 발생하는 미세먼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자동차의 매연 및 타이어 마모 먼지 등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많은 먼지를 발생시키는 중국과 협력하여 보다 나은 환경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먼지에 대해, 단지 불쾌한 무언가로만 여기지 말고, 진지한 사고를 해볼 필요가 있다. <먼지 보고서>의 편집자 중 한 사람인 옌스 죈트겐이 철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먼지는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며, 동시에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먼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의는 로마교회의 교부(敎父)이자 2001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터넷의 수호성인으로 추존된 성 이시도르(Isidor von Sevilla, 기원후 560-636)가 지은 백과사전에서 발견된다. 그는 돌과 금속에 관한 장에서 '바람에 의해 이동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구약성서 시편 1장 4절을 증거로 든다. 이 정의는 순전히 현상에 의존한다. 즉 먼지는 바람에 의해 이동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저술은 수백 년간 최상의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중세까지도 대학생들은 그렇게 배웠다.(35쪽)

시편 1장 4절은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어떤 자연과학적 판단의 근거가 된다니, 이것이 중세인가 싶고, 왠지 틀렸다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먼지에 대한 현대적 판단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 연방환경청에서 근무하는 라이너 레무스의 말을 들어보자. "먼지의 묘소와 관련하여 지난 시기에 다양한 정의와 협약이 내려졌다. 그에 따르면 먼지는 고체와 액체 입자로 된 복잡한 혼합물이다. 이러한 혼합물은 에어로졸이라고도 일컫는다."(147쪽)

이 작은 입자들은 "자신의 크기로 인해 어떠한 침전에도 예속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중력에 의해 침강하지 않으며 대기권에 아주 오래 머문다."(같은 곳) 쉽게 말해보자. 모래는 아무리 작아도 우리가 그것을 놓는 순간 땅에 떨어진다. 중력에 끌리는 것이다. 하지만 먼지, 에어로졸은 너무도 작기 때문에, 공기와의 마찰로 받는 힘이 중력에 끌리는 힘보다 더 크다. 마치 사람과 곤충의 차이와 흡사하다. 우리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다치지만 곤충들은 다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워낙 몸이 작고 가볍기 때문이다. 너무도 작아서 떨어지지 않고, 대기 속에서 부유하다가, 공기와의 마찰 혹은 정전기나 기타 힘에 이끌려 어딘가에 붙어있기도 하는 존재들, 그것이 바로 먼지인 것이다.

먼지는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사색의 기회를 준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먼지로부터 만들어졌다. "우리 태양계는 약 46억 년 전에 거대한 성간가스와 먼지구름, 즉 태양계 이전의 먼지구름에 의해 탄생"(86쪽)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한 말처럼, "우리는 먼지와 그림자"인 셈이다. 지금도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우주의 먼지들을 수집하고 분석한다. 성층권까지 올라가는 비행기에 끈끈이를 붙여서 우주먼지를 수집하고, 연구실로 가져와 분석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바보같은 사람들이나 할 법한 이런 행위를 통해, 이렇게 우리는 우주의 비밀을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다.

라이프니츠와 편지를 주고받았던 바젤 출신의 수학자 요한 베르눌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주 작은 것과 아주 큰 것에 대해 함께 사고하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신은 우리들의 대상을 규정하고 우리의 사고에 해당하는 크기의 종류만을 창조했단 말인가. 극미한 먼지에도 이 커다란 세계의 모든 것에 상응하는 질서 잡힌 세계가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반대로 우리들의 세계가 무한히 큰 다른 세계의 먼지 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생각할 수 있지 않은가."(38쪽) 미세먼지가 잦아들고 황사가 불어오지 않는 맑은 봄 밤, 청소를 하고 환기를 하며, 먼지 속의 우주, 우주 속의 먼지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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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라디오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의 책 소개 코너를 위해 작성한 원고. 내가 이렇게 줄글로 서평을 써서 보내면 작가분이 받아서 라디오 대본으로 재구성한 후 그것을 들고 방송을 했다. 2015년 3월 19일 방송분.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들을 수 있으려나. 유튜브 이후였다면 곧장 링크를 찾을 수 있었을텐데.

2026-03-10

예술은 여덟 도시의 10000명의 취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계는 자신을 예술계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모든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을 예술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예술계 구성원이다. 감상 후보의 지위를 부여하는 개인은 바로 본인이 그런 지위 부여 대상을 직접 만든 작가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레디메이드나 파인아트의 사례처럼 지위 부여자와 작품 제작자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술'이라는 낱말을 트집잡아, 디키가 예술 전문가들과 같은 패거리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는 엘리트주의 이론을 제시한다고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그때는 방금 논한 점을 들어 반박해볼 만하다. 톰 울프 Tom Wolfe, 1930~2018는 『현대미술의 상실 The Painted Word』에서 자신이 보기에 예술계 구성원 가운데 현대미술의 특색taste을 결정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지역별 분포상황을 자못 진지하게 작성했다.

우리는 예술계를 구성하는 교양인 culturati (미술가를 제[140쪽]외하고) 로마에 750명, 밀라노에 500명, 파리에 1,750명, 런던에 1,250명, 베를린·뮌헨·뒤셀도르프에 2,000명, 뉴욕에 3,000명, 그 외 우리가 잘 아는 세계 각지에 1,000명 쯤 흩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덟 도시의 '사교계 les beaux mondes'에 속한 10,000여 명의 (한 작은 마을의 인구수에 불과한!) 인사로 이루어진 세계, 이것이 예술계다."

울프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할 만한 예술로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 10,000여 명의 예술계 구성원이다. 하지만 디키가 말하는 예술계는 이런 것이 아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생각도 제한적이거나 배타적이지 않다. 실제로 디키는 예술의 개념을 열어두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가능하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나 지식과 같은 예술적 수완, 혹은 예술 현장에 대한 이해, 미적 안목의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디키의 예술 정의가 전통적 의미의 예술 정의인 것은 맞지만, 예술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상이 예술품의 지위를 온전히 획득할 가능성을 전혀 차단하지 않는 정의라는 것도 사실이다. 예술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훈련을 받은 엘리트 계층이 아니다. 그들이 속한 세계는 그보다 훨씬 넓다.[141쪽]

톰 울프다운 코멘트, 그리고 좋은 해설이다. <현대미술의 상실>이 출간된 게 1975년이라는 점을 놓고 보면 1만 명이라는 숫자에 더 큰 설득력이 생긴다.

문제는 내가 저 내용을 어떤 책에서 인용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는 것. 챗GPT니 제미나이니 하는 놈들한테 물어봐도, 당연하다는 듯, 존재하지도 않는 책을 지 혼자 지어내서 지껄여댄다.

이런 식의 '출처 상실'은 왜 벌어졌을까? 당시 내가 저 대목을 손수 타이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플 노트의 OCR 기능을 이용하여 죽 긁어붙이고, 최소한의 편집만 한 후, 서지사항을 적어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누구라도 출처를 아는 분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흑흑...

2026-03-04

사람은 언제나 딴생각을 하며 불행해진다

경험 표집을 활용한 한 [연구](https://doi.org/10.1126/science.1192439)는 마음 방황에 대해 놀라운 사실들을 밝혀냈습니다. 먼저, ==사람들은 깨어있는 시간의 46.9%에 딴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을 하든 책을 읽든 대화를 하든 휴식을 취하든 무엇을 하든지 딴생각에 쉽게 빠졌습니다. 사람들은 성관계 중에는 딴생각을 가장 적게 했지만, 그 비율은 여전히 10%에 달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앱에서 울리는 알람에 답변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지만요.)

https://maily.so/mind/posts/fca43346(링크 깨짐)

제목이 곧 내용이며 못 알아듣는 이들에게도 복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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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원래 2024년 7월 11일,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웹에 올린 쪽글이다.

'굶주리는 아프리카 어린이' 비유를 들고 싶어지는 실험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비유를 했었는지 나도 기억 못하겠다.

그러므로 제목을 바꾼다. 좀 더 합리적인, 이해할 수 있는, 다른 글과 함께 고민할 수 있을법한 제목으로.

참고로 인용문에서 말한 "경험 표집을 활용한 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논문 제목을 한국어로 옮기자면, "떠도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 내내 딴생각에 빠지고, 그만큼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Matthew A. Killingsworth, Daniel T. Gilbert, A Wandering Mind Is an Unhappy Mind. *Science* 330, 932-932 (2010). DOI:10.1126/science.1192439

역시 대니얼 길버트답게 글을 잘 썼다. 마지막 문단을 인용해 보자.

In conclusion, a human mind is a wandering mind, and a wandering mind is an unhappy mind. The ability to think about what is not happening is a cognitive achievement that comes at an emotional cost.
결론적으로, 인간의 마음은 방황하는 마음이며, 방황하는 마음은 불행한 마음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하는 능력은 인지적 성취이지만, 정서적 대가를 수반한다.

2026-02-26

내 글이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날

은 2002년 7월 3일이며, 7월 4일자 신문에 실렸다.

경향신문에서 소위 '인터넷 논객'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자 'e메일 옴부즈만'이라는 코너를 신설했었는데, 거기에 글을 써서 보냈던 것이다. 1983년생인 나는 당시 만으로 19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적자금문제 심층분석 아쉬워-

공적자금 운용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중간에서 이른바 횡령을 했다면 당연히 비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공적자금이 회수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문제를 삼는 것은 언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공적자금이란 무엇인가. 금융사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투입된 돈이다. 댐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르는 시멘트와 같다. 독일에선 4위 은행이 위험했을 뿐인데도 금융공황이라고 했지만 한국에선 1위 은행이 부도 위기에 처했었다. 어찌어찌 하여 구원되긴 했지만 몹시 위험한 순간을 통과했다.

댐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고 급한 김에 성금을 모아 시멘트를 사서 발랐다. 그래서 살아났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가 내 시멘트 값 내놓으라고 소리친다면 뭐라고 하겠는가. 공적자금의 회수는 내 주머니에 돈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완료되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왜 좀 더 폼나게 팔을 저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느냐는 비판과 다를 게 무엇인가.

최근 경향은 서해교전의 비극은 비극이지만 햇볕정책의 기본 논조는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햇볕정책의 기본 정신은 비록 당장 이익을 볼 수는 없더라도 북한 정권이 급속히 붕괴된다면 남한에 더 큰 부담이 되므로 민족적 차원에서 북한을 돕자는 논리일 터이다. 이를 지지하는 경향신문이라면 공적자금에 대해서도 좀 다른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것이 더욱 깊이있는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다.

〈노정태/대학생 bard-of-wind@hanmail.net〉

"[e메일 옴부즈만]서해교전 냉철한 시각 돋보여". 경향신문. 2002년 7월 3일. https://www.khan.co.kr/article/200207211834161

편집부에서 편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내가 쓰는 수법들이 여럿 보인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주제의식 역시, 이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청년 진보 인터넷 논객'이었는데도, 시스템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북한 문제에 대한 관점도, 확실히 '진보 진영' 일반과는 결이 다르고.

사람은 달라지고 나아지는 존재이며 그럴 수 있고 그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딱히 엄청나게 바뀌는 건 또 아닌 듯하다.

나는 'e메일 옴부즈만'에 세 번 독자 투고를 실었고, 이후 잡지사에 취직해 GQ와 VOGUE 같은 훌륭한 잡지에 칼럼을 보내다가, 2008년 경향신문에서 '블로그 속으로'라는 코너를 만들면서 신문 칼럼니스트가 됐다. 만 25세의 일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과거에 썼던 글을 뒤적이다가 접하게 된 최초의 기록을 갈무리하여 공개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