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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4

‘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노정태의 뷰파인더] 상상과 선동에 휩쓸린 문재인 5年

●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 억압”
● 민중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
● 박지현은 무엇이 못 마땅했을까
● 前 당 대표 이해찬의 ‘노론 음모론’


윤석열 대통령이 5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 10일 윤석열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탄핵 이후 인수위원회 기간 없이 곧장 취임하며 야외 취임식도 생략한 터라, 9년 만에 치러지는 대규모 행사였다. 약 4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앞에서 신임 대통령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취임사를 낭독했다.

행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예상한 BTS의 공연도 없었다. 그러나 평범하지도 않았다. 외려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통상적 미사여구로 둘러대지 않았다. 반(反)지성주의라는 과제 앞에 맞서기 위해 자유의 기치를 드높여야 한다는 대통령 본인의 세계관을 분명히 드러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흔치 않은 대통령 취임사였다.

‘그거 내 욕하는 거 아니야?’
윤석열은 대한민국이, 또한 세계가 처한 위기에 대해 언급했다. 그런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금 정치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입니다.”

윤석열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망가지고 정상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새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면, 일반적으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박수를 쳐주고 덕담이나 해주며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독으로 168석(취임식 날 기준)을 지닌 초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퍽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5월 11일 조오섭 민주당 대변인은 성명을 발표해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한 반지성주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이 5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박 위원장은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를 겨냥해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했다. [뉴스1]
박지현 민주당 공동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을 통해 우리는 민주당이 못 마땅해 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박지현은 5월 11일 당 비대위 회의에서 “민주주의 위기 원인은 반지성주의라 규정하고 비판 세력을 반지성주의로 공격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즉, 민주당은 ‘반지성주의? 그거 내 욕 하는 거 아니야?’하고 화를 낸 셈이다.

‘발끈하는 걸 보니 찔리나보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굴 생각은 없다. 또한 박지현의 지적에는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드러났다시피, 민주당의 구성원 중 일부가 심각한 지성의 결여를 보여준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반지성주의를 논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거나 중요하지 않다. 반지성주의란 흔히 말하는 ‘무식함’이나 ‘교양 없음’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반지성주의의 본래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의 정치 역사상 가장 반지성주의를 심각하게 드러낸 정당은 민주당이며, 그 기간은 지난 문재인 정권 5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저작권자, 美 역사학자 호스스태터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공산주의처럼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용어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낸 용어다. 그 저작권자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로, 1970년 세상을 뜰 때까지 컬럼비아대에서 교편을 잡은 인물이다.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펴낸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하게 된 이 책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바는 분명하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을 되짚어보며, 다시는 그런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호프스태터에게 미국의 반지성주의란 특정 정치 세력이나 정당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국인의 삶 전반(American Life)에 반지성주의의 싹이 심어져 있고, 특정한 조건과 계기가 맞아떨어지면 그것이 매카시즘 광풍과 같은 형태로 터져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일까? 미국은 구대륙 즉 유럽에서 박해 당하던 신교도가 이주해 만든 나라다.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평범한 일상 언어로 번역하고, 사제가 해석해줘야만 했던 신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이 직접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었다. 천 년 넘게 이어져온 지적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신대륙 이주민들은 구대륙에 비해 반(反)제도적이고, 영성적이며,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광막한 자연 속에서 원시주의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 역시 문화적 풍토의 한구석에 자리매김하게 됐다.

방금 말한 내용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다. 구체제의 모순이 심화하고 대중과 지식인의 괴리가 커질 때, 적절한 반지성주의는 대중과 지식인 양쪽에 건전한 자극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대중적 에너지를 악용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반지성주의자는 사실 ‘민중’이 아니라 민중을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일 때가 많다.

일본의 양심적, 실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우치다 다쓰루는 호프스태터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2010년대 중반 일본에서 급속도로 퍼진 극우 운동을 파헤치는 작업에 돌입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뜻을 함께하는 필자들의 원고를 모아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를 펴냈는데, 그 중 직접 쓴 첫 번째 원고인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에서 호프스태터의 책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자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정쩡한 교육을 받은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반지성주의자는 통상 사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종종 진부한 사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사상에 홀려 있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한편, 한결같은 지적 정열을 결여한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이 대목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지성주의가 지니는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은 40대와 50대 남성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고학력자이며 사회적으로 명성을 지닌 지식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 해서 반지성주의에 면역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과 그 구성원 및 지지층은 반지성주의에 취약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친일 독재 부역 세력’이라는 프레이밍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문재인 정권 5년간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이번 선거는 한일전이다!” 이 또한 민주당이 집권하던 5년을 특징짓는 정치 구호 중 하나다. 국민의힘, 그 전신인 자유한국당, 새누리당 등을 ‘친일 독재 부역 세력’ 등으로 프레이밍한 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운동을 하듯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대중 동원 논리였다.

호프스태터의 논의를 21세기에 이어받은 우치다 다쓰루가 볼 때, 이렇듯 맥락도 시대감각도 없이 과거의 적을 상정하고는 그것을 현재에 이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중요한 징표다. 반대로 지성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나는 시간 속에서 차츰 진리성이 익어 가는 언명을 가리켜 ‘지성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음모론자들처럼 이것저것 자기 입맛에 맞는 ‘팩트’는 열심히 수집하고 끼워 맞추지만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반지성주의자들은 때로 다수의 지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동시대에 적지 않은 찬동자를 얻는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을 사회적, 공공적인 가설이라고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구조적으로 결여된 것이 있으니, 바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반유대주의자였던 에두아르 드뤼몽의 사례를 제시한다. 에두아르 드뤼몽은 고대 로마 이후 19세기 말까지도 유대인들이 흑막 너머에서 유럽을 지배해왔다는 음모론에 심취했다. 음모론을 퍼뜨리며 대중적 인기를 만끽했다. 유대인들이 유럽을 지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는 모두 다른 시대라는 것을 단번에 무시해버리는 ‘무시간성’의 사고방식이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이 1월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미래시민광장위원회 출범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그는 2019년 인터뷰에서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신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과 그 지지층에 광범위하게 퍼진 이른바 ‘역사의식’이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를 들먹이지만 시간성이 없다. 과거에 어떤 나쁜 일을 저지른 악당 집단이 있는데 그들이 계속 오늘날까지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원초적이고 상투적인, 대중소설 같은 상상력에 끌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고방식을 우리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의 2019년 인터뷰에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조선 말기는 수구 쇄국 세력이 집권했고, 일제강점기 거쳤지, 분단됐지, 4·19는 바로 뒤집어졌지, 군사독재 했지, 김대중 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입니다.”
에두아르 드뤼몽이 반유대주의 음모론에 빠져 선동했듯, 이해찬은 이른바 ‘노론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고 있거나, 본인은 믿지 않아도 남들이 그렇게 믿기를 바라고 있다. 민주당의 지도부 또는 지지층 중 목소리 큰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역사 공부를 더 하라’고 손가락질하고 함성을 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의 행태다.

국민의힘도 잘 난건 없지만…
국민의힘과 그 전신인 보수정당 역시 반지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보수 세력은 자신들의 힘이 강했을 때, 공산주의를 추종하지 않지만 사회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던 이들을 대거 ‘빨갱이’로 몰았다. 호프스태터가 비판한 매카시즘의 광풍과 다를 바 없던 행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8대 대선 당시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공개 사과하는 등의 움직임은 있었으나 앞으로도 지속적 반성과 자기 성찰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오늘날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다. 그들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6‧25전쟁을 통해 완성된 대한민국을 긍정하지 않는다. 대신 상상 속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추구하며 반일 선동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 전체의 지적 담론을 갱신해야 하는 이유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5-07

‘검수완박’이 개혁? 근현대사 공부부터 하라

[노정태의 뷰파인더] 검찰은 왜 경찰을 감시·견제·통솔했을까

● 사건 당 처리 기간·미처리 사건↑
●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
● ‘원수’ 이토 히로부미의 사법 개혁
● ‘박종철 사건’과 ‘형제복지원 사건’
● 도저한 역사적 흐름에서의 퇴행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검찰청법 개정안, 이른바 ‘검수완박’ 법안이 통과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5월 3일 오후 2시. 원래 10시로 예정돼 있었으나 한 차례 연기된 국무회의가 열렸다. 공식적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 퇴임 기념 오찬 때문이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일각에서는 이 기습적 검수완박이 결국 문재인·이재명 지키기 말고는 목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 성남 FC 후원금 의혹 등 문재인 정권 및 이재명 전 경기지사와 관련한 사건의 경우 경찰 선에서 덮어버릴 가능성을 만드는 쪽으로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결과
4월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회의 개의 전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왼쪽)와 장혜영 정의당 정책위의장(오른쪽 두 번째)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물론 의혹일 뿐이다.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 그리고 그에 찬동한 정의당의 진짜 의도를 단언할 수야 없다. 평범한 국민이 받는 피해는 예정돼 있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20년 9월 통과된 ‘검경 수사권 조정’ 법안과 그에 따른 시행령이 2021년 1월 1일부로 시행되면서 국민들은 변화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다.

일단 사건 당 처리 기간이 길어졌다. 2017년에는 경찰이 사건 하나를 처리하는데 평균 44일이 걸렸다. 2021년에는 62일로 늘어났다. 기간이 늘어난 만큼 확실하게 마무리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지난해 경찰은 2011256건의 사건을 접수했는데, 그 중 246900건(12.27%)을 처리하지 못했다. 열 건 중 한 건 이상이 미처리 상태로 남아있다는 뜻이다.

경찰의 미처리 사건 총량과 그 비중은 2017년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였다. 2021년 1월 1일 이후로는 말 그대로 폭발적으로 뛰었다. 2020년에는 2058268건 가운데 184966건으로 8.98%가 미처리 사건이었던 반면, 2021년에는 2011256건 가운데 246900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다. 단순 계산으로도 6만 건이나 미처리 사건이 늘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단 경찰의 업무 부담이 매우 커졌다. 게다가 검찰은 이전처럼 경찰의 수사를 ‘지휘’하지 못한다. 대신 보완수사를 ‘요구’할 수만 있다. 지휘와 요구 사이에는 강제성 면에서 넘을 수 없는 강이 흐른다. 경찰은 실제로 업무 부담에 짓눌리거나, 업무 부담을 핑계로 곤란한 사건을 속된 말로 ‘뭉개고’ 앉아있을 수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단기적 미래, 한 두 사건의 처리와 달리, 이런 장기적 흐름을 예상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니 우리는 시선을 반대로, 과거로 돌려보자. 검찰이라는 제도, 검사라는 공직자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에서 시작해, 근대 사법 제도가 도입되던 무렵,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거쳐 공권력과 시민사회의 관계가 재정립되어 나가던 과정을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수령·이서배 탐학”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속담이 있다. 현대 한국인은 저 속담을 실제 권한을 가진 사람보다 그 권한을 대리해 행사하는 자가 더 위세를 떠는 경우가 있다는,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이곤 한다. 애석하게도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말은 그저 담백한 사실의 표현이었다. 아주 먼 과거도 아니고, 지금으로부터 100년을 조금 넘긴 시점만 해도, 한반도의 거주민들은 정말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서운 세상에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그 전부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속국이었다. 일본이 1906년 설치한 통감부는 조선을 사실상 지배·통치했다. 초대 통감은 그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 훗날 중국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 이토 히로부미다.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대대적 사법 개혁을 단행했다.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한 사법 개혁이니 좋은 일이었을 리 없다는 단견은 잠시 접어두자. 놀랍게도 통감부가 추진한 사법 개혁은 조선의 기층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것이야말로 이토 히로부미의 ‘큰 그림’이기도 했다. 조선의 사법 제도가 워낙 가혹하면서도 엉망진창이던 탓에, 사법 제도의 근대화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을 줄일 수 있으리라 판단한 이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푸른역사)에서 이 역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06년 이후 일본의 통감부 설치와 그에 뒤이은 한국 병합은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침략 행위지만, 어찌 보면 이러한 한국 민중의 고통과 개혁 열망에 편승한 침략이었다. 갑오개혁기에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 조치들이 아관파천 이후 폐기 또는 수정되었으나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이후 다시 복원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 시행되면서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걸게 했기 때문이다.”(머리말, 9쪽)

당시는 오늘날과 같은 ‘민족 의식’이 형성되기 전이다. 다른 나라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보다 나은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생각까지 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조선의 사법 제도가 엉망이고, 갑오개혁을 통해 자기 쇄신을 이루지도 못해서다. 앞서의 책을 좀 더 읽어보자.

“조선 후기 이래 형사재판제도는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왔지만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첫째, 인민의 범죄를 최일선에서 수사하고 재판하는 수령·이서배들의 탐학이 억울한 재판을 야기하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수령들은 전문적인 법률 지식이 부족하여 재판 과정을 이서배들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형방 아전 등 이서배들이 자의적으로 재판 과정과 판결을 좌우하고 있었다.”(102쪽)

조선 민중이 일제 개혁을 환영하다?
4월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 합의파기 윤석열 국민의힘 규탄’ 대회를 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원님보다 아전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은유나 속담이 아니었다. 그저 사실이 그랬다. 뇌물을 바치고 그 자리에 오른 고을 원님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의 내막이나 진상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누가 원님이 되건 형방, 아전, 기타 등등 수령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이서배, 즉 양반은 아니지만 관의 일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실세였고, 백성을 괴롭히는 주범이었다. 그들은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다양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으며 필요와 욕구에 따라 억울한 사람을 잡아 가두고 사건을 뒤틀었다. 자정 작용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일부 암행어사들은 수령의 비리를 고의적으로 눈감아 주거나 아예 그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함께 민에 대한 수탈에 나서기까지 하였다.”(103쪽)

조선의 민심을 얻기 위해 사법 개혁에 나선 통감부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19071223일, ‘재판소구성법’ ‘재판소구성법시행령’ ‘재판소설치법’을 제정하게 했다. 이 변화는 매우 중요한데, 비로소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지방의 행정관인 수령, 즉 원님이 재판까지 했다. 갑오개혁 이후에도 바뀌지 않던 체제다.

일본은 고등고시를 합격한 일본 현직 판검사를 한국에 발령 보냈다. 한국인 중에서도 기존 경력자, 일본에서 유학하여 법학을 공부한 자, 변호사 시험 합격자, 법관양성소 졸업생 중 재판 사무 경력이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판검사로 임명했다. 판사뿐 아니라 검사라는, 행정부에 소속돼 있지만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갖는 근대적 제도가 도입됐다.

조선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앞서 말했다시피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영했다. 일단 대한제국 스스로가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화 첫 삽을 떴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가 하려고 했지만 힘이 부족해 못 한 일’을 일본의 손을 빌어 완수한다는 논리 구성이 가능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존 시스템이 지닌 문제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가혹할 뿐 아니라 합리성과 예측가능성을 결여한 조선의 사법 시스템은 기층 민중이 일제 지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인 판검사가 한국의 재판기관을 장악해 감에도 불구하고, 군수·관찰사의 불공정한 재판에 피해를 받아왔던 지방민들과 중앙의 상급재판소의 폐해를 목도해 왔던 지식인들은 신재판소 개청, 민형사 재판 관련 신규 법령 실시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표명하고 통감부의 ‘시정 개선’ 사업 중 괄목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444쪽)

오늘날 기준에서 보자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의 관점을 상상해보면 납득할 수 없는 일도 아니다. 활개 치는 폭력과 불의를 국가 권력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때, 심지어 공권력이 불법적 폭력 단체를 감싸고 비호하며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할 때, 국가는 지배 정당성을 급격히 상실하고 만다.

“당시는 우리가 깡패였다”
자유당 정권 말기 비슷한 현상이 반복됐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으며 민족 의식이 싹텄고, 6·25전쟁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까지 수립된 상황이었으나, 사법 체계는 국민의 생활과 안전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할 정도로 자의적이고 엉성했다. 폭력 조직과 경찰의 유착은 심각했다. 흔히 ‘서청’으로 통하는 서북청년단이 북한 실향민을 중심으로 한 반공 폭력을 담당했다면, 독립운동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거나 실제로 기여했던 민족주의자들 역시 해방 후 제도권에 흡수되지 못한 채 외곽 폭력 단체를 결성하고 ‘합법적 권력의 불법적 지배’에 기여했다.

일본 호세이대 방문강사인 존슨 너새니얼 펄트는 현대 한국의 역사를 조직폭력 역사와 아울러 고찰한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현실문화)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그 책에서 펄트가 인용하는 바, ‘스네이크 김’이라 불리던 방첩대장 김창룡은 다른 조직의 우두머리 고희두를 고문하다가 죽였는데, 그 고희두의 역할에 대해 미군 방첩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희두는 원남동 동회장이며 민보단 동대문구 단장이고 동대문 경찰서 후원회장이며 사법 보호위원회 회장이었다. 이런 직함은 그의 명함에 적힌 것이다. 고희두는 동대문 경찰서 관할의 청계천변에서 장사하는 노점상 대표였다. 그는 수천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어떤 면에서 동대문과 청계천의 통제권을 장악한 자는 서울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여겨질 수 있다.”(54쪽)

여러 가지 달라진 점이 있지만, 억압과 수탈의 대상이 되는 평범한 국민 처지에서 보면 구한말과 자유당 정권 시절은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1961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역점을 둔 것도 바로 그런 ‘비국가 범죄 집단’을 드러내고 소탕하는 것이었다. 펄트에 따르면 “1961년과 1963년 사이 박정희의 지배 아래 경찰은 조직적 활동으로 범죄 집단의 일원 약 1만3000명을 체포했다.”(54쪽) 대중은 열렬히 환영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이야기해둘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박정희와 군사정권이 발휘한 국가 폭력 체계가 그 자체만으로 정당성을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민간의 폭력과 어지럽게 뒤섞인 최악의 경우보다는 나은 차악을 대중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1960년대 초의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격을 지녔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은 군사정변을 일으켰다는 결함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다.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고 견제 받지 않는다면 당연히 한계가 뒤따른다. 펄트는 자신이 ‘백인 남성’인 이유로 다양한 이들을 만나 솔직한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고 인정하는데, 한 전직 경찰 인터뷰 내용이 이채롭다.

“나는 경찰관 응답자에게 왜 박정희의 권위주의 시기와 전두환 정권의 초기에 깡패들이 이용되지 않았는지 묻자 그는 꽤 단호하게 ‘당시는 우리가 깡패였다’고 대답했다. 달리 말해 그들은 그런 폭력을 행사하는 비국가 집단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즉 외양적 민주주의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질서를 세울 철권이 있었다.”(162쪽)

군인이 권력을 잡고 경찰을 ‘국가의 깡패’로 동원하는 체제는 중산층의 성장 및 민주화운동을 통해 허물어졌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조직이 다름 아닌 검찰이다. 영화 ‘1987’에서 잘 묘사했다시피 군부 정권의 수족과 다름없던 경찰은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으나, 검찰은 동의하지 않았다. 행정부 소속으로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경찰과 달리, 검찰은 조직상으로는 행정부 소속이나 사법부이기도 하며, 검사 개개인이 1인 기관으로서 권한을 지니고 있다. 박종철 사건이 폭로되면서 철통같던 군사독재도 무너졌다.

2022년 검찰이 빼앗긴 ‘수사개시 권한’ 역시 군사독재 시절의 해악을 중화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한 바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1986년, 당시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의 김용원 주임검사가 사냥을 하러 나왔다가 형제복지원이라는 기이하고도 거대한 시설에서 벌어지는 인권 침해와 노동 착취를 목격하고, 스스로 사진을 찍어 증거를 수집한 후, 법원의 영장을 받아 사건의 진상을 밝힌 경우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지역 유지로서 경찰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수사 단계부터 특혜를 받으며 온당한 처벌을 피해왔다는 비판이 지금껏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입법 폭주
검찰이 모든 수사를 직접 관할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해방 후 70여 년간 한국의 법치주의가 꾸준히, 경찰의 힘을 검찰을 통해 감시·견제·통솔하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데에는 나름의 역사적 이유가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랬다. 한국인들은 공권력이 부당하게 작동하거나 토호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에 설령 일제에 의해 근대적 사법 제도가 도입되는 상황일지라도 바람직한 개혁이라면 손을 들어주는 편을 택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주는 도저한 역사적 흐름으로부터의 퇴행으로 기록될 것이다.

모든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가 아닌 ‘권력의 몽둥이’라는 식으로 비난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구한말처럼 권력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자유당 정권 시절처럼 사적 폭력과 공적 폭력의 구분이 애매해지거나, 군사독재 시절처럼 중앙 권력이 경찰 조직을 틀어쥐고 국민을 쥐락펴락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그럴 때 법치주의는 뿌리부터 썩고 만다. 검수완박의 폐해를 최소화하며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30

‘파친코’가 한국 드라마? 그 태연한 몰염치가 무섭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K-콘텐츠’라고 으스대는 이들에게

● ‘오징어 게임’과 명확히 다른 경우
● 다분히 ‘미국적’인 캐릭터 설정
● 넷플릭스 ‘나르코스’와의 공통점
● 이제와 자이니치를 ‘우리’라고?


드라마 ‘파친코’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10대인 선자(김민하 분)가 자신의 엄마가 운영하는 부산 영도의 하숙집 방에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앉아 있다. [애플TV+]
‘기생충’ ‘오징어 게임’ 뒤를 이은 또 다른 K-콘텐츠, ‘파친코’. 요즘 언론을 통해 흔히 들을 수 있는 찬사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파친코’가 애플TV+의 간판 작품으로 선정·제작·유통되는 것을 ‘우리’의 문화적 승리로 봐도 될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파친코’라는 작품은 그 원작부터 드라마까지, 지금껏 ‘우리’가 갖고 있던 세계관과 다른 관점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 ‘파친코’는 한국 드라마가 아니다.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원조 한류 드라마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오징어 게임’과도 다른 경우다. 넓은 의미의 ‘K-컬처’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일각에서는 “애플이 일본 시장을 버리고 대신 한국을 택했다”며 마치 축구 한일전에 이겼다는 듯한 말투로 ‘파친코’를 다루는 기사를 냈다. 너무도 이상하고 우려스러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

‘파친코’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날 때 그 나라에 함께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다. ‘한국 드라마’가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껏 대한민국이 해외교포, 그 중에서도 ‘자이니치’를 다뤄온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이야기’조차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파친코’를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넷플릭스의 모험
드라마 ‘파친코’ 포스터. [애플TV+]
한국 드라마는 배용준, 최지우 주연의 2002년 작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히트를 친 뒤부터 해외에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류’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역수입됐다. ‘대장금’ 같은 경우는 이란에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다.

어떤 나라의 드라마가 외국에서 큰 인기를 끄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은 한국에서 국민 드라마의 반열에 올라 주연 배우가 광고를 찍기도 했으니 말이다. 즉 2000년대 초의 한류는 이례적이고 반가운 현상이었지만,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확률적으로 생길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맥락이 달라진 것은 미디어 환경 자체가 변화하면서부터다. 넷플릭스는 초창기에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하고 케빈 스페이시가 주연한 ‘하우스 오브 카드’로 흥행뿐 아니라 비평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곤 콜롬비아의 전설적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마약 범죄 수사물 ‘나르코스’를 내놨다.

‘나르코스’에는 잠깐이나마 미국 플로리다와 뉴욕 등이 배경으로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라틴아메리카, 특히 콜롬비아의 도시 메데인과 그 밖의 정글을 무대로 삼는 이야기다. ‘하우스 오브 카드’를 보고 유입됐을 미국인 시청자에게 다소 낯설고 당혹스럽게 느껴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미국과 무관하지 않지만 결국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만드는 글로벌 프로젝트가 바로 ‘나르코스’다.

넷플릭스는 왜 그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글로벌 콘텐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19년 현재,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3억8000만여 명으로 세계 3위다. 반면 스페인어는 4억8000만여 명의 모국어로 세계 2위다. 게다가 미국 현지에도 남부 지방과 캘리포니아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스페인어 화자가 살고 있다.

넷플릭스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야만 할 운명이었다. 이에 가장 가까운 라틴아메리카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미국 회사가 콜롬비아 마약왕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것도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제작하는 이례적인 현상은 그래서 벌어졌다.

부산 사투리로 번역된 미국 정서
드라마 ‘파친코’에서 노년에 이른 선자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의 극중 모습. [애플TV+]
OTT(Over The Top‧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업체들의 글로벌 콘텐츠 전략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특정 지역에서 개발돼 그 지역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콘텐츠가 세계적 호응을 얻기를 기대한다. 한국 시청자를 노리고 한국에서 제작한 작품이지만 세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며 일종의 문화 현상으로 솟아오른 ‘오징어 게임’이 대표적이다. 그 전에 넷플릭스에서 흥행한 ‘종이의 집’은 스페인 드라마인데, 그 또한 비슷한 경우다.

반면 앞서 언급한 ‘나르코스’나 ‘파친코’처럼 OTT 본사에서 만든 글로벌 콘텐츠도 존재한다. 이는 ‘내수용’으로 만든 작품이 해외에서 인기를 끄는 현상과는 다른 경우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하며, 해당 지역의 풍토 및 현지인의 정서를 십분 반영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기본적으로는 ‘미국 드라마’다.

우리는 ‘나르코스’를 콜롬비아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다. 콜롬비아 마약왕이 주인공이고 콜롬비아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미국인 수사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캐릭터가 스페인어로 대화하지만, ‘나르코스’는 어디까지나 넷플릭스에서 만든 미국 드라마다.

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파친코’ 또한 미국 드라마다. ‘파친코’는 애플TV+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이민을 간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미국 작가들이 각본을 쓰고, 한국계 미국인 두 사람이 연출한, 엄연한 미국 드라마다. 주요 등장인물의 성격과 내적·외적 갈등,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 작품이 준수하는 윤리적 기준 등 모든 면에서 미국 영화·드라마 업계의 표준적 작법과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파친코’의 주인공 선자(김민하 분)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큰 외동딸이다. 어려서부터 똑 부러지는 성격에 셈이 밝다. 아버지는 딸을 잘 교육시키고 주체적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애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다분히 ‘미국적’이다. 1900년대 초의 조선인 아버지가 딸을 그렇게 키운다? 현실에서 그런 사례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 시청자들에게 선자의 캐릭터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같은 인물을 직접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선자의 첫사랑이자 첫 아이의 아버지인 고한수(이민호 분)는 어떨까. 일본 야쿠자의 중간 보스 정도 되는 위치를 차지한 조선인이다. 조선인을 경멸하지만 동시에 조선인을 보호한다. 이재에 밝은 현실주의자지만 가슴 속에 뜨거운 한줄기 순정이 있다. 역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빗대어 보자면, 20세기 초 동아시아에 출현한 레트 버틀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한수가 선자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온 세상을 다 주겠다고 하지만 선자는 거절한다. 거절의 이유를 나중에 털어놓는 선자의 말. ‘나 자신을 반으로 갈라놓고 살 수는 없데이.’ 부산 사투리로 번역된 대사지만 여기 담긴 정서는 한국보다는 미국 드라마의 그것이다. ‘스스로에게 충실할 것’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지 말 것’ 같은, 실로 미국인다운 건전한 태도가 담겼다.

K-콘텐츠’라고 으스댈 일 아니다
‘파친코’는 미국 시청자에게 퍽 친숙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 설정과 구도 위에 이야기와 주제가 전개된다. 실제로 ‘파친코’의 작가와 제작진은 시즌 1을 만들 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되는 ‘대부 2’의 이야기 구조를 적극 참고했다고 한다. ‘대부 2’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이야기지만 의문의 여지없는 미국 영화다. 마찬가지로 ‘파친코’는 조선에서 건너가 오사카에 뿌리를 내린 재일교포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미국 드라마다.

‘파친코’를 여타 다른 한국산 콘텐츠와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파친코’는 역사의 격변 속에 태어난 디아스포라, 자이니치(재일 조선인)를 다룬 대하물이다. 6화에서 수십 년 만에 고향 부산에 찾아온 선자는 한국의 공무원에게 스스로를 ‘특별영주권자’라고 한다. 해방이 오기 전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한국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닌 ‘조선 국적’을 유지하며 살아간 자이니치의 현실을 반영한 설정이다.

우리, 즉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인들은 재일교포, ‘자이니치’를 ‘우리’의 일원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파친코’와 마찬가지로 오사카의 자이니치를 다룬 영화 ‘피와 뼈’는 국내 관객들에게 싸늘하게 무시당했다. 그런데 그 자이니치의 이야기를 미국 OTT 업체가 큰 예산을 동원해 드라마로 만들자, 이제 와서 ‘우리 이야기’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염치없는 일 아닐까.

이는 마치 주한미군의 자녀인 혼혈인들이 한국에 있을 때는 ‘튀기’라고 조롱하다가, 하인즈 워드가 NFL 스타가 되자 ‘우리의 핏줄’로 인정하며 호들갑스럽게 환영하던 모습마저 연상시킨다. 한국과 일본의 점이지대에서 힘겹게 살아간 재일교포의 이야기, 그 귀중하면서도 쓰라린 역사적 경험에 대해 모른 척으로 일관하더니, 재미교포의 소설을 미국 기업이 드라마로 만든 걸 보면서 ‘K-콘텐츠’ 운운한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한국의 보수 정치는 재일교포 단체들을 ‘간첩의 온상’ 쯤으로 취급하며 정치적 필요에 따라 착취했다. 한국의 진보 정치는 자이니치를 감성과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며 보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소설 ‘파친코’의 그 유명한 첫 문장,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는 말을, 마치 일본에 대한 규탄으로 받아들이며 ‘국뽕’의 소재로 삼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자이니치들에게 한국과 한국인은 일본만큼이나 그들을 ‘망쳐놓은’ 역사의 일부다. 우리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며 건설적 방향으로 손을 내밀어야지, ‘그래, 이것이 우리 민족의 힘이며 K-콘텐츠’라고 으스댈 일이 아니다.

‘우리’가 얽매어 있는 동안 자이니치는…
한반도의 역사는 한반도 내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의 왕가가 국권을 일본에 넘긴 후 벌어진 역사적 질곡 속에서, 한반도 거주민은 들어가고 나가고 섞이며 살아왔다. 단일민족의 허구, 일본을 향한 끝없는 피해자 의식, 스스로의 야만성을 드러내기 위한 알리바이로 동원되는 근현대 역사관에 ‘우리’가 얽매어 있는 동안, 애플이라는 다국적 기업은 자이니치들의 험난한 삶 속에서 매력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디아스포라의 스토리텔링을 발굴했다. 이런 상황 에서 무슨 ‘K-콘텐츠’를 운운한단 말인가.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 또한 그 ‘역사’의 일부다. 그런 자기객관화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파친코’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세계관과 원한 감정으로만 얼룩진 역사의식을 넘어, 세계에 통할 수 있는 보편적 감성과 스토리텔링을 고민할 때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23

尹 정호영 옹호는 정치인 아닌 ‘검사’ 발언

[노정태의 뷰파인더] 도덕과 관습 우롱한 어떤 ‘합법’

● 퍽 놀랍고 충격적인 尹의 말
● ‘불법 아니니 괜찮다’고만 하면…
● 민주당發 가짜 법치주의의 결과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최근 제기된 자녀 관련 의혹 등을 설명하기 위해 4월 17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부정의 팩트가 확실히 있어야 하지 않나.”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의 자녀 의대 편입학 논란과 관련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내놓은 말이다. 위법한 행위를 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는 어떤 ‘팩트’가 있어야 당선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윤석열 본인이 마이크를 잡고 한 말이 아니라 배현진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을 통해 전달된 이야기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퍽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잠시 기억을 되돌려 조국 사태를 떠올려 보자. 조국 당시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된 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여러 의혹에 대해 함구하거나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일축해왔다. 여론 악화의 결정타가 된 것은 2019년 9월, 자청해서 열었던 기자간담회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딸의 논문과 의학전문대학원 편입 등에 관한 의혹을 두고 이렇게 못 박았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불공정 의혹 제기, 너무나도 당연하다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월 21일 서울 국회 법사위원장실 앞에서 검수완박 입법을 위한 안건조정위원회 구성과 관련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안건조정위 무력화를 위해 민형배 의원이 탈당하는 ‘꼼수’를 썼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박 위원장은 “국회법에 따라 안건조정위원을 지정하겠다”고 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부정의 팩트’ 발언을 보며 충격에 빠진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그 이유 역시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아직 새 정부가 출범하지도 않았는데 조국 사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정권교체를 통한 한국 사회의 정상화를 꿈꾸었던 이들이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다.

일단 몇 가지 분명히 해둘 일이 있다. 적어도 4월 현재 조국 사태와 정호영 논란의 내용이 완전히 등치되는 것은 아니다. 조국과 그 딸인 조민 씨의 경우처럼 명백히 위조된 서류가 확인된 것도 아니고, 일각에서는 정호영의 자녀가 논문에 참여해 이름을 올린 것에 그 나름의 합리적 근거가 있다는 항변도 있다. ‘부정의 팩트’가 100% 확실히 존재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 사안을 두고 제기되는 우려가 과도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의대 편입은 ‘차라리 수능을 다시 봐서 의대에 가는 게 더 쉽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과정이다. 그런데 정호영의 두 자녀는 동시에 아버지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스펙을 쌓고 이를 바탕으로 아버지가 재직하는 의대에 편입했다. 불공정 의혹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윤석열이 이 사안을 '정치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느냐다. ‘부정의 팩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합법이면 문제가 없다는 식인데, 이것은 ‘법 기술자’의 말일 뿐이다. 법은 대체 무엇인가.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그러니 모든 일이 허용되는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 법치국가의 원리를 잘 반영한 표현이다. 법과 도덕을 분리하는 것, 동시에 법의 규제 영역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가령 노골적 성적 묘사가 담긴 창작물, 즉 성인물과 법의 관계를 떠올려 보자. 성인물을 만들거나 즐기는 이들은 성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성인들을 법이 막을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성인물에 대한 규제를 찬성하는 이들은 그런 성인물이 미성년자들의 건전한 성 관념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성인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여성, 심지어 미성년자들이 유입돼 성적 착취를 당할 가능성을 고려할 때 적절한 규제 및 법적 감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양쪽 모두에 일리가 있다. 법이 도덕의 모든 영역을 관할하려 해서는 안 되지만, ‘최소한의 도덕’으로서 작동해야 한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심지어는 전 국민에게 도덕적 지탄을 받고 있는 사안이나 행위가 반드시 법에 의해 규제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법학자 엘리네크(Georg Jelinek)의 명언처럼,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강제력이 개입되는 법적 절차는, 도덕적 당위를 따질 수 있는 영역 중에서도 최소한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옳다.

형사소송법 전공 교수 조국의 태도
이 원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령 여성들이 입는 짧은 치마, 미니스커트를 생각해 보자. ‘미니스커트 단속’이라는 말을 들으면 한국인들은 흔히 박정희 정권 시절에나 있던 일이고 ‘서구 선진국’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1968년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생한 ‘68혁명’ 이전에는, 서구에서도 경찰이 여성들의 ‘정숙하지 못한 옷차림’을 나무라고 단속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도덕이 법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옥죄는 것은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는 소리다.
이런 맥락을 놓고 볼 때,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질문은 사회의 근본 질서를 파괴하는 소리가 아니다. 오히려 ‘법’과 ‘도덕’의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법을 통해 도덕을 강요하는 근본주의적, 전체주의적 질서에 저항한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진보는 그렇게 이뤄져 왔다. 법과 도덕의 구분을 최대한 명료하게 하고,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영역에 법이 개입하지 않는 쪽으로 움직여왔다.

도덕의 영역, 가치관의 영역, 취향의 영역에 불과한 것을 법으로 옥죄지 말라. 이는 특히 진보적 성향을 지니는 법조인 사이에서 두루 통용되는 법철학적 시각이다. 심지어 누군가 법을 어겼다 해도 그럴만한 이유, 참작할 만한 사유, 혹은 그 위법 행위를 한 사람이 위법 행위를 하게끔 한 사회 구조 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참여연대의 초기 멤버 중 하나인 형사소송법을 전공한 교수 조국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불법이 아닌데 뭐가 문제냐’는 태도를 취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태도를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민간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직종이 아니라, 사회의 기준과 가치관을 제시하고 구현하는 공직자들이 그런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역시,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태도로 일관해 법에 걸리지 않는 한 무슨 짓이건 하고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사람은 우리 사회가 통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도덕의 영역을 건드리거나, 넘어서거나,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합법과 불법, 도덕과 비도덕의 경계를 오가는 행위가 사회 전체에 만연하다보면, 법의 존재 근거 자체가 흔들린다. 왜냐하면 법은 도덕의 기반 위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둘러싼 정치적 지형이 모두 그렇다. 일단 21대 국회의 출발부터가 문제적이었다. 선거법은 선거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법이다. 참여자 모두가 합의하고 동의하지 않는 한 함부로 바꿀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20대 국회의 막바지, 바로 그 기본적 상식 혹은 정치적 도덕이 망가졌다. 더불어민주당은 선거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는 상식 바깥의 수를 뒀다. 비례 의석을 노리는 정의당과 바른미래당은 민주당이 흔드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당시 제1야당이던 자유한국당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한 선거법 개정이 이뤄지고 말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국회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제1야당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위원장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법사위는 모든 법안의 자구를 검토하고 수정 보완할 수 있는, 국회의 ‘입법권’ 중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소위원회다. 그 법사위원장을 야당에서 가져가면 여당의 입법 폭주를 막을 수 있다. 국회법에 명문으로 규정돼 있지는 않으나, 21대 국회 이전까지는 모든 정치 세력이 동의해온 일종의 ‘관습법’이다.

21대 국회의 민주당은 그 또한 파괴했다. 자유한국당이 ‘모든 상임위원장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법’ 바깥에 있는 ‘도덕’과 ‘관습’을 무시한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신들이 만든 법을 야당이 꼼꼼히 읽고 평가하고 되돌려 보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오기를 부린 끝에 내놓은 법 중 대표적인 게 ‘임대차3법’(계약갱신청구권, 전월세상한제, 전월세신고제)이다.

우리는 그 덕분에 이전까지 겪어본 적 없는 엄청난 부동산 가격 상승과 그로 인한 계층 분리를 경험하고 있다. ‘불법은 아니지 않느냐’, ‘법사위원장을 야당 주라고 국회법에 쓰였느냐’며 도덕을 무시한 가짜 법치주의 탓에, 집 없는 국민은 순식간에 ‘벼락거지’가 돼버렸다.

민주당의 도덕 무시를 통한 법치 질서 파괴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법사위에 속한 무소속 양향자 의원이 검수완박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민형배 의원이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것이다. 이를 두고는 민 의원이 양 의원을 대신해 법사위 안건조정위에 비교섭단체 의원으로 합류할 것이라는 해석이 곧장 나왔다. 국회법상 안건조정위는 여당 의원 3명, 야당 의원 3명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즉 여당을 ‘꼼수 탈당’해 야당 몫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의미다.

국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성향의 무소속 의원을 법사위에 배치해 야당 몫의 투표를 빼앗아오는 것 자체가 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행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더 심한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상식과 도덕을 우롱하면서 만들어진 법을 대체 그 어떤 국민이 존중할 수 있단 말인가.

오만한 사고방식을 심판받다
‘불법이 아니면 합법이고 정당하다’는 태도는 ‘법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기에, 사회 전체의 인식과 도덕을 파괴하는 식의 입법은 수월하게 이뤄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령 만들어진다 한들 긍정적 효과를 낳기 어렵다. 법을 법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라 법을 감싸고 있는 도덕이다. 국회법은 국회의 관습과 도덕이 없다면 법으로서 유명무실해진다. 다른 모든 법도 마찬가지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법을 법으로 온전히 작동하게 해주는 도덕과 관습까지 존중하며, 문제가 있다면 공적으로 논의하고 수정해나가는 겸허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인식으로 똘똘 뭉친 거대 정당 민주당은, 바로 그 오만한 사고방식을 국민에게 심판받아 5년 만에 여당에서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는 정호영 논란에 대해 ‘불법이 아니니 괜찮다’는 투로 언급한 윤석열의 발언을 문제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는 한, 조국 사태나 검수완박으로 인해 솟구친 국민적 분노가 언제라도 다시 국민의힘의 머리에 죽비처럼 내리꽂힐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16

문재인 대통령, 세월호 결자해지하라

문재인 대통령, 세월호 결자해지하라

[노정태의 뷰파인더] 단식 농성했던 文의 마지막 임무

● 아직 밝혀야 할 ‘진실’ 있다면…
● 무책임하고 비상식적이고 잔인한
● 해경은 할 수 있는 구조를 했다
● 김어준 등이 만든 온갖 음모론
● 과학적으로 명백한 결론 부정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이틀 앞둔 4월 14일 전남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를 찾은 추모객들이 노란 리본을 걸며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11일 오후 2시, 대전시청 북문 앞. 대전지역 79개 종교·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국민주권실현 적폐청산 대전운동본부 ‘4‧16특별위원회’의 집회가 열렸다. 그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요구했다. “희생자와 국민 앞에 철저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하라.”

기자회견문에 따르면 “참사의 책임이 있는 정권이 촛불혁명으로 탄핵되고, 그 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약속했던 새 정부가 들어서서 벌써 5년의 임기를 마감하는 순간이 왔지만 진상규명은 제자리”였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당론으로 약속했던 정당이 180석에 달하는 국회의석을 가지고 있어도,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왜곡했는지’ 등에 대한 진상규명은 단 한걸음도 진척되지 못한 채 속절 없이 8년의 세월이 흘러갔다”는 것이다.

이는 대전에서 벌어진 행사의 스케치이지만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매년 4월 중순 무렵이면 반복되는 모습이다. 특히 올해는 여야 간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향해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든다. 대체 ‘세월호 진상규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2014년 사고 발생 후 벌써 8년이 흘렀다. 타국의 유사 사고 사례와 비교해볼 때 원인규명에 이례적으로 많은 비용을 들였다. 심지어 선체를 인양하기까지 했다. 마치 부검하듯 선체를 부품 단위로 떼어내 분석해 과학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운 침몰 원인까지 확인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혀야 할 ‘진실’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그런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정상 사고’(normal accident)
분명한 사실 몇 개를 확인해 보자. 첫째,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는 분명하다. 둘째, 해경은 피해자를 구조했다. 셋째, 세월호 참사의 발생 및 구조 과정에서 정권 차원의 개입이나 기상천외한 음모는 없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원인과 과정에는 그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사고 당시 세월호에 실린 여러 화물들은 제대로 고박돼 있지 않았다. 단단하게 묶여 고정되지 않았다는 소리다. 해류가 빠르게 휘몰아치는 수역으로 들어갈 때, 세월호의 키는 3등 항해사가 잡고 있었다. 3등 항해사는 상대적으로 조작이 미숙했기 때문에 배가 좌우로 크게 흔들렸는데, 그러다가 단단히 묶여 있지 않은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위로 더 나쁜 상황이 닥쳤다. 배의 키를 조종하는 장치인 ‘솔레노이드 밸브’가 고장이 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계 부품이 그렇듯 솔레노이드 밸브는 주기적으로 꺼내어 닦고 조이고 정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월호는 그렇게 잘 관리돼 있지 않았다. 조타기를 한껏 틀었을 때 솔레노이드 밸브는 한쪽으로 완전히 쏠린 채 굳어버렸다. 선실에서 아무리 조타기를 반대 방향으로 돌린다 한들 키가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최악의 경우가 연이어 닥쳐왔다고 해도, 세월호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오래 써서 낡은 배였다. 중고선을 수입한 후 화물을 잔뜩 실을 수 있도록 무리하게 증축하고 개조했다. 배가 쓰러지지 않도록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바닥에 주입하는 평형수 용량 자체가 애초 설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으며, 반대로 배의 높이를 올려버린 탓에 무게중심은 더욱 높아졌다. 내부의 화물들이 한쪽으로 쏠린, 낡고 무게중심이 높은 배, 세월호는 기울어지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사고 과정은 선박 사고의 전문가들이 사고 발생 직후부터 진단했던 바와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터질만한 사고가 터질만한 방식으로 터졌다는 소리다. 8년간의 기나긴 진상규명 과정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중요 사실은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착이라는 요소를 확인한 것이다. 그것은 선체를 인양해 부품을 해체하고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 지면의 다른 칼럼(‘광주 화정아이파크 참사에서 세월호가 어른거린다’)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세월호 참사 역시 ‘정상 사고’(normal accident)에 속하는 사건이었다. 개별적으로 놓고 보면 통제 가능한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중첩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세월호에는 이준석 선장이 타고 있었다. 잘못된 사람이 총책임자의 자리에 앉아 권력을 휘두를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단지 무책임했을 뿐만 아니라 비상식이었으며, 무신경하게 잔인했다. ‘가만히 있으라’.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형 참사는 그렇게 벌어졌다.

해경은 정말로 방관했나?
세월호 참사 8주기를 엿새 앞둔 4월 10일 오전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 앞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선상 추모식이 열린 가운데 유가족들이 사고 해역을 알리는 노란부표를 바라보고 있다. [뉴스1]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해경을 향해 쏟아졌던 비난은 어떨까. 해경이 피해자 구조에 나서지 않았거나, 심지어 방관했다는 것은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해경은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 및 여건에 따라 구조 활동을 했다. 다만 그 결과가 안타까울 뿐인데, 그렇다고 ‘구조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이 가해지는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당시 상황이다. 세월호 사고 신고가 접수된 후, 해경 구조 헬기는 약 30분, 구조정은 약 40분 뒤에 현장에 도착했다. 각 운송수단을 동원해 가장 빠른 속도로 직선으로 움직이면 그 속도가 된다. 해경이 무슨 히어로물의 영웅처럼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늑장 구조’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해경 경비정은 24노트의 전속력으로 달렸다. 신고 접수에서 도착까지 40분이 걸린 건 사고위치가 그만큼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해경 탓이 아니다.

해경이 선내에 진입하지 않았으니 잘못했다는 주장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해경 123정이 현장에 도착했을 무렵, 선체는 이미 60도 이상 기울어져 있었다. 게다가 현장은 바다다. 물에 젖은 갑판은 평평한 상태여도 미끄러진다. 해경은 해상 구조의 전문성을 지닌 집단이지만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걷기는커녕 매달려 있기도 힘들 만큼 기울어진 배 안으로 들어가, 어디 있는지도 확인되지 않은 피해자 전원을 찾아내 구조했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다.

해경이 세월호 선내에 갇힌 사람은 전혀 구조하지 않았을까? 바다에 스스로 뛰어든 사람들만 건져냈을까? 그렇지 않다. 해경은 배에 갇힌 승객이 보일 때마다 배에 올라 망치와 파이프로 유리창을 깨며 구조했다. 연합뉴스에 2014년 8월 19일 보도된 ‘세월호 승무원 2명, 승객 구조 참여 정황 확인’이라는 기사를 읽어보자. “김씨는 123정이 세월호에 두 번째로 맞대어 객실 유리창을 깨고 5~6명을 구조한 것과 관련, ‘누가 유리창을 깼느냐’는 검사의 질문을 받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직원(해경) 두 명이랑 승객 두 명이 있었다’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김씨는 당시 22세였던 목포해경 소속 의경 김모 씨. 해경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구조 활동을 했다.

바다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게 무슨 구조 활동이냐는 식으로 빈정거리는 이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4월의 먼 바다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다. 배가 좌초된 상황이면 더욱 그렇다. 해상에는 온갖 부유물이 빠른 속도로 떠돌아다니며 타박상, 찰과상, 골절 등을 유발한다. 조난자는 구명조끼를 입었다 해도 찬 물과 스트레스로 인해 탈진하고 의식을 잃다가 죽는다.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피해자를 엄청나게 늘린 건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제때 바다에 뛰어들었다 해도 ‘전원구조’는 불가능했다. 현장에서 바다에 뛰어내리고도 사망한 사례가 있다.

한여름 해수욕장에 한 시간만 들어갔다 나와도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몸이 덜덜 떨린다. 체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4월의 바닷물은 더욱 가혹하다. 몸이 바닷물에 닿는 한 하루 이상 실종자가 생존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고래가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실구조’를 이유로 목포해경 123정 김경일 정장에게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내인설’과 ‘열린 주장’
세월호 침몰 직후의 상황을 되짚어보자. 김어준을 비롯해 여러 ‘독립 언론인’들이 달려들어 세월호 침몰 원인과 관련한 온갖 음모론을 만들어 뿌려대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잠수함이 들이받았다는 둥, 국가정보원이 관여돼 있다는 둥, 심지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모종의 이유로 인신공양을 하려 했다는 둥, 입에 담기도 역겨운 소리들을 지어냈다.

그리하여, 세월호 참사를 어떤 음모론적 관점으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만들어졌다. 문제는 그런 주장을 가진 이들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의사결정기구에 포진해 있다는 것이다. 총 6인으로 구성된 세월호 선체조사위의 경우, 4명은 앞서 설명한 세월호 자체의 결함 문제를 인정했다. 즉 ‘내인설’을 취했다. 반면 나머지 2명은 2018년까지 세월호가 다른 이유로 침몰했다는 ‘열린 주장’을 고수하며 선조위를 마무리 지었다.

그 뒤를 이어 등장한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난항에 부딪혔다.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부터 ‘CCTV 조작설’까지 온갖 음모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이 과학적으로 명백한 결론을 부정하며 세월을 보냈다. 세월호 참사는 누구 한 사람만을 탓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로 벌어진 사고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의 발생과 전개 과정에는 그 어떤 미스터리도 없다. 세계 해상 사고의 역사상 보기 드물 정도로 오랜 기간과 많은 비용을 들여 구체적인 내역을 밝혀놓았다. 그럼에도 ‘진실규명’의 목소리가 가라앉지 않는 것은 더 밝혀야 할 사실이 있어서가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범죄’가 아닌 ‘사고’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약 3주 후면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다. 이제 그가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으나, 단 한 가지 남은 과제가 있다. 세월호 참사와 그 수습 과정을 마무리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겠다며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정치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란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마저 달래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대표로서 세월호 단식 농성을 했던 문재인 대통령에게 주어진 마지막 임무도 바로 그것 아닐까. 정치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에게 이렇게까지 잔인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애꿎은 희생자들과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이 이제는 편히 쉴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09

‘어용 지식인’ 유시민이 윤석열 時代에 준 교훈

‘어용 지식인’ 유시민이 윤석열 時代에 준 교훈

[노정태의 뷰파인더] 당파성이 훈장 돼버린 2017-2022

● 정파 이익 복무하겠다는 자기배반
● 피포위의식 모범적 예제
●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
● ‘알릴레오형’ ‘알쓸신잡형’ 득세
● 지식생산 헤게모니 싸움 밀린 보수


한동훈 검사장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고발된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지난해 1021일 첫 공판에 참석하고자 서울서부지법에 출석하고 있다. [원대연 동아일보 기자]

2017년 5월 5일, 제19대 대선을 나흘 앞둔 날. 친노·친문 성향의 작가 유시민이 인터넷 방송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직후인데다, 더불어민주당은 단일대오를 구성하고 있지만 반(反)민주당 표심은 안철수와 홍준표 두 후보로 갈린 상황.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낙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유시민은 선언했다.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

유시민의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진보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언제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고고하게, 깨끗하게 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아무리 진보적인 정권이더라도 ‘내가 진보 지식인으로서 권력에 굴종하면 안 되지’라고 해서 사정없이 깔 것”인데, 그건 옳지 않다. 왜냐하면 2017년 5월 현재, “한국 사회는 복잡하고 여러 층위의 권력들이 있는데, (정권이) 바뀌더라도 청와대 권력 딱 하나만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무릇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권력과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대선에서 이기더라도) 모두 다 그대로 있고 대통령만 바뀌는 것이다. 대통령은 권력자가 맞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 괴롭힐 것이다. 아마 야권 정당들이 서로 손잡고 연정을 하지 않겠나. 제가 정의당 평당원이기는 하지만, 범진보 정부의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

‘선량한 우리 편’과 ‘사악한 적’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물질적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대신 지적 활동에 매진하는 계층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지식인’은 공부나 글쓰기 등을 전업으로 삼는 사람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신분제가 폐지된 시민사회를 배경으로 공적 사안에 대해 대중의 이해를 돕고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들, 즉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을 뜻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선언은 그런 면에서 형용모순이다. ‘어용’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임금의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지식인이 시민사회 일반이 아닌 특정 정파, 그것도 곧 집권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통령과 정파의 이익에 복무하겠다는 자기배반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이 끝을 향해 달려간다. 대신 다가올 윤석열의 5년이 있다. ‘윤석열 시대의 지식인’이라는 주제에 대한 답은, 그러므로 ‘문재인 시대의 지식인’에 대한 고민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유시민과 그의 아류가 택한 길은 무엇이었을까. 어찌하여 그들은 그런 모습이 됐을까. 그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

유시민의 발언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자. 정권이 바뀌어도 대통령만 바뀐 것이며, 대통령보다 더 강한 기득권 세력은 건재하므로, 대통령을 지키고자 뭐든지 해야 한다는 단순명쾌한 사고방식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논리다.

이러한 집단의식에 제대로 된 명칭이 부여된 것은 2020년 이후의 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집권 세력이 된 민주당과 청와대를 두고 ‘피포위의식’(siege mentality)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덕분이다. 본디 피포위의식은 군사 용어로, 적에 포위당한 군대가 위기감과 공포에 쫓겨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악수를 두는 경우를 일컫는다. 미국 심리학자 대니얼 크리스티는 이 개념을 확장했다. 피포위의식은 ‘선량한 우리 편’이 ‘사악한 적’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 선언은 피포위의식을 설명하는 모범적 예제나 다름없다. 물론 그는 “사실에 의거해 제대로 비판하고 옹호하겠다”는 단서를 붙였다. 하지만 전통적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버리겠다는 취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더 중요한 건 유시민 스스로가 말한 ‘어용 지식인’의 일이라는 것이 ‘사실에 의거한 비판과 옹호’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우리는 편파중계다”
시간을 건너뛰어 2020년 1월 1일로 향해보자. 서울 상암동 JTBC 스튜디오. 신년 특집 토론이 한창이었다. 시청자들의 이목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와 유시민의 대결로 쏠려 있었다. 당시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던 유시민은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채널인 ‘알릴레오’를 통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및 그의 가족과 관련한 검찰의 수사 내용을 반박하는데 한창 열을 올렸다. 진중권은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았다. “조국 일가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인데 (‘알릴레오’ 등은) 조국은 얼마나 청렴한가로 가고 있다.”

그에 대한 유시민의 답. “우리는 편파중계다. 편파적이지만 그 과정은 공정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팀의 편파중계도 있어서 전체적으론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알릴레오’와 유시민은 검찰에서 발표된 수사 내용이라는 이유로 조국 일가를 향한 혐의를 송두리째 부정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했다. 그런 상황에서 ‘편파적이지만 과정은 공정하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른 팀도 편파적이므로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룬다'는 말도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유시민과 친(親)민주당 성향의 언론 및 유튜브에서 주장하듯 검찰이 사실을 왜곡하고 혐의를 과장하고 있다 한들, 그 반대편에서 사실을 왜곡하고 혐의를 축소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상대가 진실을 왜곡했다면 이쪽은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음수와 음수를 곱하면 양수가 되지만, 거짓말을 반박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면 두 개의 거짓말이 남을 뿐 진실은 아니다. 이쪽의 왜곡과 저쪽의 왜곡이 서로 균형을 이뤄 올바른 진실을 찾아간다는 논리는 결국 자신들의 거짓과 왜곡을 무마하기 위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2022년 4월 현재, 조국의 부인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는 수감 중이다. 조국의 딸 조민 씨 역시 입시전형 당시 제출했던 서류에 허위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 이어 고려대에서 입학 취소 결정을 받았다. 유시민 본인은 ‘노무현재단 계좌 검찰 조회’ 발언 등으로 재판 받고 있으며,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용 지식인의 길은 처참한 실패로 마무리되고 만 것이다.

지식 소매상 노릇 하기 애매해진 까닭
한국 대중문화와 출판의 역사에서 유시민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1980년대 말부터 급격하게 성장한 상업 출판, 그 중에서도 대중 교양서 시장의 ‘대장주’ 격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내 머리로 읽는 역사 이야기’ 등 유시민은 대학교 신입생 혹은 조숙한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도록 교양서를 써내는 능력이 있다.

대중 교양서 저자 유시민은 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님을 떳떳하게 인정했다. 대신 스스로를 ‘지식 소매상’이라고 부르며 전문가들 앞에는 겸손한 태도, 대중 앞에는 자신감을 드러냈다. 어렵고 복잡한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지식을 소화하기 쉽도록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본인의 본령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 들어 그 ‘지식 소매상’이 너무도 노골적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물론 유시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 논객이며 그의 책을 구입할 사람들도 진보 독자층이다. 문재인 정권을 전후로 유시민 스스로가 무색무취한 지식과 교양이 아닌 적극적인 정치적 텍스트를 생산했다. 유시민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식 소매상’ 노릇을 하기 애매해졌다.

인문 교양서 시장의 독자층 역시 급격한 성향 변화를 겪고 있었다. 이명박, 박근혜라는 두 명의 보수 정권 대통령을 겪는 동안 진보 성향의 비소설 독자층은 일종의 ‘저항의 논리’를 원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었다. 세상의 잘못된 점을 탐구하고, 고발하고, 후벼 파는 ‘독한’ 책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줄었다.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인해 출판 시장 전체의 규모가 축소되기도 했다.

평범한 혹은 진보적인 독자층에게 그리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지식과 교양을 전달하는 것은, TV나 유튜브, 팟캐스트 등을 통해 이미 인지도를 쌓은 저자들의 몫으로 넘어왔다. 바야흐로 예능 인문학, 혹은 ‘인포테이너’의 시대가 열렸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기획회의’ 2018년 9월호에서 그러한 현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인기였다. 이런바 실용인문학, 소프트 인문학이 붐을 이뤘다. (...) 이제 인문서 시장을 주도하는 것은 방송에 출연해 얼굴을 알린 이들의 인문학 서적들이다. 이른바 ‘예능 인문학’의 시대다. 방송에 얼굴을 알린 이가 쓴 책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는 세상이 됐다.”

선동에 나서거나 아닌 척 하거나
학원 강사로서 많은 팬층을 확보한 최진기라던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줄여서 ‘지대넓얕’이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로 선풍적 인기를 끈 채사장 등, 인문 교양서 시장의 새로운 강자는 단지 글만 쓰는 사람이 아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추세에 조응한 것은 유시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대넓얕’과 유사한 어감을 지닌 tvN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하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을 뿐더러, 같이 출연한 다른 지식인들 역시 많은 경우 베스트셀러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대중 교양이란 말 그대로 대중이 원하는 재미있는 지식을 발굴하고 전달하는 분야다. 오늘날의 추세에 맞춰 저자 군이 달라지고 홍보 방식에 변화를 주는 것을 탓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첫째, 엔터테인먼트와 흥미에 집중하다보니 잘못된 사실을 전하거나 오류를 범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둘째로는 그러한 ‘실수’에 정치적 함의가 종종 담기곤 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직후인 2017년 6월 30일 방영된 ‘알쓸신잡 경주편’이 대표적 사례다. 출연자인 유시민,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가수 유희열이 경북 경주시 원자력 발전소를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유시민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 위험을 거론하고, 정재승은 ‘한국처럼 원전을 많이 쓰는 나라 프랑스는 원전을 전면적으로 줄여 나가겠다고 한다’며 운을 띄운다. 그러자 유희열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 반색한다. “아,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탈석탄, 탈원전 정책을 하겠다!”

주지하다시피 탈원전은 문재인 정권의 핵심 공약이자 중점 과제 중 하나다. 해당 에피소드를 통해 전달된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온갖 장밋빛 청사진이 에너지 산업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 또한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방영된 ‘알쓸신잡’의 해당 에피소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었다고 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 5년의 지식인 사회는 그렇게 돌아갔다. 노골적으로 정치색을 드러내고 사실을 왜곡하며 지지자를 선동하는 ‘알릴레오형 지식인’, 정치색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일정 수준의 정치 편향성을 지니고 대중 교양 시장을 공략하는 ‘알쓸신잡형 지식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유시민은 두 영역 모두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으니, 문재인 정권의 지식인이란 결국 정도 차이가 있을 뿐 ‘어용 지식인’의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대중이 지식인의 정치 성향 소비할 경우
지난해 9월 10일 서울 금천구 즐스튜디오에서 열린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국민 시그널 면접’에 참가한 윤석열 당시 후보가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이 현장에서 중계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은 0.74%p라는 초박빙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4월 8일 현재 민주당 의석수는 172석이다. 여기에 정의당(6석)과 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을 합하면 180석이 넘는 세력이 곧 야당이 된다. 전례를 찾기 쉽지 않은 여소야대 정국이다. 게다가 6월 1일에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돼 있는데, 정권교체 여론이 매우 컸던 대선과 달리 국민의힘의 승리를 낙관할 수 있는 근거가 그리 많지도 않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면, 윤석열의 지지자들 역시 5년 전 문재인 지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포위의식에 사로잡히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새 정부 지지자들 중에는 문재인 정권의 정책 실패, 특히 부동산과 관련된 실정에 실망한 중도층만 있는 게 아니다. 열렬한 보수층이 대거 포함돼 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저들이 했던 일 우리가 그대로 갚아주리라’는 일종의 원한 감정을 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윤석열 시대의 지식인 사회가 또 다른 ‘어용 지식인’ 대열을 이루거나, 아닌 척 하면서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인포테이너’의 연대를 갖추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여론의 기준을 제시하는 공공 지식인이 노골적 정치색을 드러내며 당파적 편향성을 훈장처럼 내세우기 시작하면 지식 사회 본연의 기능이 마비되고 흔들린다. 대중이 지식인의 지식이나 통찰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소비할수록 지식인과 대중의 수준은 동반 하락한다.

더 슬픈 소식도 있다. 윤석열을 옹위하기 위해 ‘보수 어용 지식인’을 꾸려 싸우겠노라는 발상은 실현 불가능하다. 그럴만한 역량도 인적 자원도 없기 때문이다. 범 보수 진영, 혹은 민주당 지지 성향을 띄지 않는 중도·보수 진영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헤게모니 싸움에서 완전히 밀린 상태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권경애 법무법인 해미르 변호사,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김경율 회계사(왼쪽부터)가 2020년 9월 25일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에서 열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일명 조국흑서) 출간 관련 기자 간담회를 하고 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조국 사태를 계기로 진보 진영의 ‘어용 지식인’들이 제시하는 논리를 허물고, 입을 다물게 하고, 그 허위를 까발린 주체가 누구인가. 진중권을 비롯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 이른바 ‘조국 흑서’를 쓴 5총사다. 대선 과정을 거치며 참여자들의 입장과 태도와 진영이 서로 많이 갈라졌으나, 적어도 그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조국 흑서팀’은 모두 진보 논객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진보와의 담론 투쟁에서 보수 논객들은 스스로 그 무엇도 해내지 못했다.

대선이 끝나기 전 진중권은 정의당으로 복당했다. ‘조국 흑서’를 쓴 이들은 각자의 길을 갔으나, 단일 대오를 형성하고 민주당과 싸우던 시절의 아우라는 잃은 지 오래다. 요컨대 현재 보수는 진보와 같은 방식으로 지식인을 동원하고 담론 투쟁에 나설 수 없다.

해법은 어디 있을까. 지식인 본연의 가치를 되살리는 것만이 답이다. 윤석열 본인의 신조이기도 한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히 되새기며, 동시에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함부로 배척하지 않는 인간적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공약이나 ‘이대남’들의 관심 사항으로 여겨지는 ‘공정’을 매우 좁게 해석하며 문자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인위적 개입과 관리가 필수다. 새 정권의 출범과 함께 ‘어용 지식인’의 시대가 끝나고 진정한 ‘공공 지식인’의 시대가 돌아와, 이러한 정치적, 철학적 토론이 왕성하게 이뤄지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4-02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노정태의 뷰파인더] 시상식의 웃음거리와 권위주의

● 美 여론조사, 83%가 윌 스미스 비판
●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둬
●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 조크에 관대한 美 문화적 전통, 왜?


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3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아내에게 과도한 농담을 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쳤다. [AP 뉴시스]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진행자는 유명 코미디언 크리스 록. 록은 여러 참석자를 향해 끊임없이 ‘선 넘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 배우, 최근에는 유튜버로 큰 성공을 거둔(4월 2일 현재 구독자 986만 명, 즉 1000만에 가깝다)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록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G. I. 제인’ 속편이 기대된다”고 농담한 게 화근이었다. ‘G. I. 제인’은 ‘제인’이라는 여성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데미 무어가 삭발하고 나와 화제를 끈 영화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도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다가 윌 스미스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제이다의 탈모는 일종의 면역성 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 있다.

아카데미상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당연히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참석자가 진행자의 뺨을 때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계 방송의 역사를 모두 짚어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이다.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된 바 없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대략 확인해보면 ‘윌 스미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록이 심했다’ ‘내가 윌 스미스의 처지여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등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온정적 반응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나 미국 현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3월 28일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행위에 대해 “록이 맞을 만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134000여명 가운데 17%에 그친 반면, 그러한 행위를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의견은 83%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폭력을 썼다는 윌 스미스의 해명에 대해서도 오직 15%만이 동조했다.

병 때문에 탈모를 겪고 있는 제이다 스미스를 향한 농담이 설령 지나치다 해도, 그런 농담을 하는 코미디언을 때리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두루 퍼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건 발생한 직후 ‘미국인들이 윌 스미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미국 문화는, 현실 속의 미국 문화와 전혀 달랐다.

페미니즘으로 폭력을 변호?
배우 윌 스미스(왼쪽)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뉴시스]
윌 스미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렸다. 너 댓살짜리 아이가 해도 혼날 짓인데, 50대 중반의 성인이다. 대체 이런 행동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성주의적 관점을 둘러대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 본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번에 영화 ‘킹 리처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테니스의 전설인 윌리엄스 자매를 길러낸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는 그런 영화를 찍으며 가족의 가치를 절감했는데,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러한 주장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의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다며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발언이다.

이러한 주장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집 밖에서 명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의 행태를 용납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살펴보면 그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인도, 파키스탄, 그 외 여러 곳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아내나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거나 연애를 하거나 혹은 눈만 마주쳐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이유로 상대방 남자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는 그런 사회의 가부장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인 NBA 선수이며 미국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윌 스미스의 발언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 ‘섭스텍’을 통해 3월 29일 공개한 글에서, 압둘 자바는 윌 스미스의 변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진정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들은 1500만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거들먹대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 (...) 여성 보호를 앞세워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 윌 스미스는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 연설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국내에도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록산 게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3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후, 그는 ‘농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약자를 조롱하는 짓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록산 게이의 말에도 귀담아 들을 점이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을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페미니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진보는 이런 폭력과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슈퍼스타라는 어떤 웃음거리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상 시상 전 입담을 펼치고 있다. [AP 뉴시스]
크리스 록은 대체 왜 그런 농담을 한 걸까? 원래부터 ‘정치적 올바름’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농담을 해왔던 코미디언이지만, 그가 제이다 스미스를 농담거리로 삼은 것은 본인의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코미디언이 사회를 보았더라도 여러 출연자들을 향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미국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윌 스미스의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소수자로 밝힌 바 있으며, 자녀들은 스미스의 아내와 함께 ‘폴리아모리’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아모리란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성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애정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제이다 스미스의 폴리아모리는 단지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제이다는 어떤 남자와 연애했는데, 그는 제이다보다 21세나 어렸을 뿐 아니라, 실은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의 친구였다. 아들의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 윌 스미스는 ‘아내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대범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물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지만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일이며, 어김없이 그 또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말았다.

미국의 연예인과 셀레브리티들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고 팔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공개 석상에서 혹독하게 조롱당하기 일쑤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미국은 자유의 나라 아닌가?

미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크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자리일수록 농담을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전통은 미국 영화산업과 대중문화의 큰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진행자가 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지금껏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그랬다. 그 하루를 위해 굶고 꾸미고 갖춰 입은 영화계의 슈퍼스타들을 두고, 그들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고 까뒤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권위가 드높기 때문에 출연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농담을 허용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스타’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시피, 평소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존재다. 대중은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엿보기만 할 뿐 다가갈 수 없다. 스타들은 그런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바탕으로 천문학적 출연료를 받고 상상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쿨’하다 해도 이렇듯 공공연한 특권층의 존재는 어딘가 배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자리를 빌려 한 번쯤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비웃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가끔 벌어지는 탈춤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줘가며 광대를 불러 춤판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말뚝이 탈을 쓴 광대가 양반탈을 쓴 광대를 조롱하고 비웃고 골탕 먹이도록 하는 것은 양반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피지배층의 억압된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실 속 신분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끼게끔 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조크 통해 해악 줄이다
권위 그 자체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세상을 경직시킨다. 미국은 이렇게 조크를 통해 권위주의의 해악을 줄이면서 권위에 힘을 실어주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이다 스미스에게 크리스 록이 던진 농담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이며, 미국의 모든 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교양을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왜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전통으로 유지하는지, 그 의미를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26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위에 있는 경호처

● 尹 스텐팬 계란말이의 운명
● 구중궁궐에서 외로웠던 盧
● 무소불위 차지철이 빚은 실패史
● 민주화 이후에도 ‘밀착권력’
●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에 설치된 프레스다방을 찾아 취재진과 즉석 차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스텐팬 계란말이.’ 대선 과정에서 방송을 통해 공개된 후 많은 이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미 겸 특기는 다름 아닌 요리.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면서 술을 즐겨온 중년 남자답지 않게, 그는 본인과 배우자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식사를 직접 준비해왔다. 깊은 맛이 나도록 끓인 김치찌개에 각 잡힌 계란말이. 누가 봐도 소주 안주 같지만 공깃밥을 놓으니 그럴듯한 가정식 정찬이 됐다.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도 감탄한 ‘윤식당’이다.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윤석열은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도 ‘혼밥’ 안 하느냐는 질문에 “아침은 혼자 먹지만 개들이 먹던 걸 달라고 해서 나눠준다”고 답한 윤석열은, 서울 용산에 대통령실이 열리면 구내식당을 이용해 김치찌개를 대량 조리해 기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그 많은 양을 손수 할 수는 없을 테고, 말하자면 본인이 조리장이 돼 감독한다는 뜻이겠지만, ‘윤식당’을 재개장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후보 시절에도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만약 윤석열이 통상적인 경로를 밟아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윤식당’ 재개장은 불가능하다. 아니, 당분간 폐업이다. 윤석열의 스텐팬은 5년간 계란말이뿐 아니라 그 어떤 요리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하고 바빠서가 아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은 취사를 위해 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요리는 고사하고 라면조차 끓이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법으로 금지돼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단, 대통령경호처의 경호 규칙에 위반된다. 경호처는 대통령과 가족이 불을 쓰지 못하게 한다. 이유는 늘 그렇다시피 ‘대통령 경호 목적’이다. 대체로 열 살 정도면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인의 인생이지만,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오른 사람과 그 가족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냄비에 물 붓고 불 켜는 단순한 행동조차 하면 안 된다. 오늘은 바로 이 문제, 경호와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경호실에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2003111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관저를 나서고 있다. [동아DB]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대통령 경호 규칙.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 같지만, 이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도 그랬다. ‘신동아’ 2007년 5월호에 실린 ‘전직 경호원들이 털어놓은 대통령 경호 비화’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관사는 호텔 객실처럼 취사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대통령 가족은 검식관이 마치 조선시대 기미상궁처럼 검식을 마친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요리사와 검식관이 퇴근하고 난 후에는 무엇도 먹을 수 없어서, 전두환의 자녀들은 하교하자마자 청와대로 와야 했지만 밤에는 라면조차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민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그는 라면 마니아였다. 출출해도 라면, 심심해도 라면, 해외에 나가서도 라면을 먹었다. 200610월도 그랬다. 경북 김천에 갔다가 대통령 전용 KTX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는 수행참모들에게 ‘특별 메뉴’가 준비돼 있다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온 음식은 라면. 실망하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달리는 열차에서 먹는 라면 맛이 어떻습니까? 맛있지요? 대통령 빽 아니면 이런 맛 볼 수 없어요! 오늘따라 라면이 먹고 싶어서…. 서울 올라올 때에는 열차에서 저녁식사로 라면 먹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경호실에서 안 된대요. 그래서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경호실에 따르면 달리는 열차에서 컵라면 정도는 괜찮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냄비에 면을 넣고 삶는 라면은 안 된다. 안전 문제 상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설명이 납득이 되시는가. 물론 열차에서 부탄가스 등 직접 불을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공간은 조리를 하는 공간과 떨어져 있다. 불꽃이 발생하지 않는 전열 조리기구를 사용해 라면을 끓인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설마, 누군가 대통령에게 뜨거운 라면을 끼얹는 테러를 저지를까봐 안 된다는 걸까.

실제로 경호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노무현 스스로가 그러한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 손으로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바 있다.

물론 최근 한 전직 청와대 요리사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이 주말이나 일과 시간 후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임기 말에 이르러 경호처가 다소 느슨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자기 손으로 편하게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했던 노무현은 큰 불만을 느꼈고, 이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치 구중궁궐에 갇혀 있던 ‘마지막 황제’의 푸이처럼,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비서 노릇까지 겸하는 경호원?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는 대통령경호처의 힘. 이 권력의 기원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전쟁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과 지속적으로 대치했고, 북한은 여러 방향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

육영수 여사의 시해로 마무리된 문세광의 1974년 광복절 저격을 놓고는 그 배후에 대해 논란이 있다. 하지만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산을 타고 넘어왔던 사건이라거나, 전두환을 노리고 벌어졌던 아웅산 테러 사건 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일종의 비정규전투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해하려 든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자신의 심복을 경호실에 앉히고 일종의 호위부대 격으로 굴리면서 경호실이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다. 북한으로부터의 직접적 위협이 크게 줄어든 후에도 경호실의 권한과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차지철 경호실장처럼 대놓고 권력을 휘두르는 경호실장이 나오는 세상이 끝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라면 끓이기’의 사례처럼, 대통령경호처는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목 하에 대통령의 동선과 행동을 미시적으로 통제하는 일종의 ‘밀착권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신동아’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한 전직 경호원은 한국과 미국의 경호 시스템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경호원은 오로지 경호만 합니다. 우리나라 경호원은 비서(의전) 노릇을 겸하거든요. 가령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를 하려 하면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국은 절대 안 됩니다. 말 그대로 경호만 하는 거죠.”

이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2007년 당시, 한국의 대통령 경호원은 ‘대통령이 악수해야 할 사람’과 ‘악수하면 안 될 사람’을 판단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둘째,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하려 할 경우, 경호원은 그 엉뚱한 사람 대신 대통령을 제재할 수도 있었다. 셋째, 전 세계 모든 민주국가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경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측면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총 4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그 중 4명이 암살당한 나라다. 누군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일하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8.69%나 된다. 최전방 전선에 투입된 군인이 아닌 다음에야 경험하기 힘든 사망률이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 못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가능한가.

경호 목적으로 대통령과 가족이 요리를 못 하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식칼도 못 잡고 가스레인지도 못 켠다. 대통령경호처가 ‘대통령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먹는 음식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대통령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 가족을 과잉보호하며 ‘가스라이팅’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지 않는가.

지난해 1229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국민의힘]
용산 시대의 ‘윤식당’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의 대통령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호 시스템이 과연 대통령에게 유익한지 의문을 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대통령 박정희는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총을 뽑아 쏠 때 차지철은 박정희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악의 경호 실패 사례는, 대통령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벌어진 것이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윤석열을 두고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층의 태도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도사가 청와대에 가지 말라고 해서 안 가는 것 아니냐’는 식상한 흑색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최순실 사건을 보면 분명하다. 소중하게 끌어안아야 할 무속인 혹은 비선실세가 있다면 청와대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대통령경호처를 설득해서 그 비선 실세가 원할 때 ‘프리패스’로 청와대에 들락거리게 해주면 아무도 모른다. 지난 정권 시기에 벌어졌던 대통령경호처의 방만한 행태는 결국 박근혜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대통령 경호 실패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과 마찬가지로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문고리 권력의 일부로 작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대통령 됐다고 가스레인지에 불도 못 켜게 하는 식으로 ‘탈인간화’하는 경호 체제는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대통령은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이 야근하다 1층 매점으로 내려와 직원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려서 컵라면을 곁들여 먹으며 일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다. 용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윤식당’이 성공리에 재개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21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집무실 옮겨야 하는 까닭

● 풍수 언급한 건 승효상·유홍준
YS·DJ·盧도 광화문으로 이전 구상
● ‘시민과의 만남’은 집무실 목적 아냐
● 文은 ‘창성동 청와대’ 속사정 알까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전경.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미신과 풍수에 따라 청와대를 옮기려 한 정권. 어떤 정권이었을까? 문재인 정권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 201710월,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 ‘상춘포럼’에서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고 했다. 친(親)민주당계 인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뒤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돼 청와대 이전을 논의하다가, 2019년 1월 4일 공약 파기를 발표했다.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퇴임을 앞둔 문재인 정부를 먼저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윤석열 무속 논란’의 백해무익한 면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윤석열 무속 논란’을 진지하게 거론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다. 방귀 뀐 자가 성 낸다는 속담이 떠오를 지경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하루 이틀 된 논의가 아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는 광화문 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와대는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시설이다. 1990년 춘추관 및 관저, 1991년 본관이 완공됐다. 그러니까 김영삼은 콘크리트가 속까지 다 굳지도 않았을 시점에 이사를 가네 마네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광화문 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새로운 집무실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청와대 용산 이전’이라는 이슈를 ‘윤석열 무속 논란’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수많은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사람 만나면서 피해야 하는 대통령의 모순
2019년 1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유홍준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유 위원장은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직접적으로 ‘풍수’를 거론했던 문재인 정권을 빼고 나면, 대부분 정권이 탈(脫) 청와대를 외친 이유는 비슷하다. ‘국민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경복궁 뒤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민심의 동향으로부터 어두워져, 결국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대통령이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에서 노트북 펴놓고 일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지하철 노선 세 개가 지나가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로 청와대를 옮기는 건 어떨까?

말만 들어도 헛웃음이 날 것이다. 그렇다. ‘시민과의 만남’은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이유로 대통령 집무 공간을 옮겨서도 안 된다. 완전히 경호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 ‘일반 시민’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중적 접근성은 새로운 대통령 집무 공간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괜한 말장난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집무 공간을 옮겨야 한다는 쪽이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된 용산 국방부 안을 지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볼 필요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용산 뿐 아니라 어디로 이전해도 부족하고, 또 부적절하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정의상 ‘국민 속’에 있으면 안 된다. 대통령도 불편하고 국민도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통령은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문고리 권력’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그러니 ‘인의 장막’에도 갇혀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사람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순이다. 그런데 대부분 선진국은 어렵지 않게,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잘 해나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또 반대로, 왜 대한민국 대통령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청와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사실상 두 개
우리는 흔히 ‘청와대’라고 하면 사진에서 본 파란 기와 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건물은 청와대 본관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 건물은 그것만이 아니다. 청와대에 부속해 있는 건물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총 12곳. 그 중에는 ‘위민관’에서 ‘여민관’으로 이름이 바뀐 비서실도 포함돼 있는데, 그 건물만 해도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통령의 집무실은 관저에 마련돼 있다. 반면 대통령의 비서들은 비서실에 있다. 그 거리만 해도 500m인데 보안상의 이유로 중간에 또 한 차례 검문을 받아야 한다. ‘문고리 권력’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여민관 내에 집무실을 마련해 출근하면서 정부종합청사로 집무실을 완전히 옮길 계획이라 밝혔지만 결국에는 청와대에 머물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청와대의 부속 건물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편번호 03048.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하나 더 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네이버·카카오 지도로 보면 건물 모양만 그려져 있을 뿐 뭐 하는 곳인지 설명조차 나와 있지 않은 곳. 딱히 명칭도 없는 그곳은 흔히 ‘청와대 부속청사’, ‘창성동 별관’ 등으로 통한다. 지난 2018년과 2019년, 사상 초유의 청와대 압수수색을 하네 마네 할 때 뉴스에 등장했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적어도 두 개 있다. 건물이 아니라 부지를 단위로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리가 아는 청와대.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가끔 뉴스에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 ‘창성동 청와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특히 정치권 사람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않는다. 심지어 ‘BH’라느니 ‘VIP’라느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상한 관습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본인은 대통령이 아닌데 청와대에 한 다리 걸친 사람들만 신이 난다. 한껏 부풀어 오른 자아를 뽐내며 호가호위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정부와 지지난 정부, 아니 1987년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수많은 측근 비리와 판단 착오, 인사 실패 등을 떠올려보자. 모두 같은 패턴이다. ‘청와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모른다. 권력의 단맛은 청와대가 누리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뒤집어쓴다.

청와대의 구조를 가장 악용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겠지만, 문재인이라고 해서 나을 건 없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문재인은 과연 ‘창성동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조직 장악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현재 청와대는 하나가 아니다. 건물이 나뉘어 있는 것을 넘어 별도의 부지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청와대에서 일하거나 들락거리는 대통령이 아닌 사람들에게 좋을까?

민주국가 행정수반은 ‘오피스’에 있다
현재의 건물 및 인력 배치 구조상,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청와대’에 잡아먹힌다. 분명 대통령의 부하 직원이라고 돼있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기도 어렵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불시에 질문할 수도 없다. 옥상옥 위의 옥상옥으로 이어지는 한없는 계단식 구조 속에 대통령은 마치 구중궁궐의 왕처럼 고립된다.

이 문제는 대통령이 아무리 시내 번화가에서 근무한다 한들 풀리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와의 접촉면을 늘려 조직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해결된다. 대통령 본인이 모든 직원을 다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의 공간은 비좁아야 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부대껴야 한다. A가 B와 ‘썸’을 타고 있고, C와 D가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E와 F는 공직을 벗어던지고 벤처기업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등, 온갖 잡다한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의 분위기. 그 속에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니다 싶으면 제3자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의 장막’을 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불나방들이 권모술수를 부릴 수 없게 된다.

1948년 첫 대통령 선거 이후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은 ‘궁궐’에 있었다. 궁궐이 궁궐인 한 그 궁궐이 어디에 있건 대통령은 성공하기 어렵다. 해법은 대통령 집무실이 궁궐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많은 직원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미국의 백악관처럼, ‘오피스’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일은 다른 모든 지식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미국의 백악관,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독일의 연방총리관저 ‘분데스칸츨러암트(Bundeskanzleramt)’ 모두 복닥거리는 사무실이다. 민주국가의 행정수반은 그런 곳에서, 마치 국민이 그렇듯,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해답은 ‘일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청와대는 애초에 ‘오피스’로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다. 그 설계부터가 궁궐이다. 거대한 부지의 입구에 마치 양반댁 행랑채처럼 비서동을 배치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저와 본관을 뒀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지만 끔찍하리만치 봉건적이다. 분명 민주주의 국가인데 5년마다 한 번씩 선거로 왕을 뽑은 후 새 왕이 뽑히면 지난 왕의 목을 치는 ‘87년 체제’의 비극은 바로 그런 구조적 모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3월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국방부 앞 전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국방부 신청사로 옮기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기자]
87년 체제’와 ‘궁궐’
청와대를 재활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 동으로 이루어진 여민관과 창성동 별관, 그리고 대통령 관저의 업무 공간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단일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감히 청와대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대통령의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87년 체제’의 모순을 끝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궁궐’에서 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용산 국방부 청사에는 헬기 이착륙장, 지하 벙커, 그 외 필요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피스’행을 지지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12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尹 시대, 한국정치 개와 늑대의 시간

● 역대급 초박빙 대선의 후폭풍
● 진보성향 유튜버의 송영길 습격
● 일부 친문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 이재명 ‘1600만 표’의 정치적 의미
● 野, ‘굴러온 돌’ 안철수라는 딜레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3월 10일 새벽 4시가 돼서야 당선자가 확정됐다. 1%p 이내, 고작 247077표 차이로 당락이 갈린 역대급 초박빙 대선이다. 이로 인해 기호 1번과 2번, 그러니까 여당과 야당이 5년 만에 교체됐다.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의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내의 권력 구도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가 2위로 낙선하긴 했지만 무려 16147738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때 얻은 13423800표를 훌쩍 웃돈다. 이재명이 차기 대선에서 재기를 도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 원내 제3당 정의당의 현실은 턱없이 초라하다. 2.37%, 803358표. 선거비용 보전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완주해 표가 나뉘는 바람에 대선 결과가 달라졌다는 식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야당이지만 일종의 준 여당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정의당과 민주당의 밀월관계는 정권교체와 함께 끝난 셈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를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를 중심으로 국민의힘이 완전히 개편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4만여 표차의 신승을 거둔 탓에 ‘윤석열발(發)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윤석열은 압도적 의석의 거대 야당과 맞서면서, 동시에 110석의 여당을 ‘대통령의 정당’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중 과제에 놓였다.

‘표삿갓’ 테러의 상징효과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가 떠오르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뭔가 보이지만 뚜렷하지는 않은 시간을 뜻한다.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개인지, 나를 물어뜯으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접어들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내게 다가오는 저 사람과 저 지지층이 나의 편인지 적인지, 나의 편인 척 하면서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것인지, 나를 공격했던 저들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에는 모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이지대(漸移地帶)로 향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부터 살펴보자. 지난 3월 7일, 서울 신촌에서 거리 유세 중이던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 ‘표삿갓’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70대 유튜버가 검은색 비닐로 싼 망치를 이용해 송영길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했던 것이다. 다행히 송영길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처지의 그는 하루 만에 퇴원해 유세와 연설을 이어나갔다. 송 전 대표의 쾌유를 빈다.

‘표삿갓’은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고 종전 선언을 촉구하는 등의 내용을 유튜브에 올려온 인물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에도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가 아닌 진보라는 점,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 지지층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일탈적 범죄 행위다. 이와 동시에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극도로 심각해져 있는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삿갓이 내세운 ‘한미연합훈련 반대’, ‘종전선언’ 등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내 추구했던 대북 외교 현안이다. 그를 문재인의 골수 지지자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반면 이재명은 정치 이력을 시작할 때부터 ‘친노’, ‘친문’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본인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쳐오자 문재인의 아들인 미디어아티스트 문준용 씨를 거론하는 등, 친문 세력 및 지지자들과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는 상태기도 하다. 이재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송영길이 정치적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당내 정치 지형과 무관하다 보기 어렵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의 내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레프트’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친문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다수의 친문 지지자들이 이재명을 버리고 윤석열 지지로 ‘갈아타는’ 이변이 벌어졌다. 2018년부터 이재명과 대립해오던 더레프트 및 이른바 ‘극문’ 지지층은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윤석열 지지를 표명하고 당선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에게 ‘여니’, 운석열에게는 ‘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투항과 전향 사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오른쪽)가 3월 1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도열한 의원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에서 이탈한 반(反) 이재명 지지층이 실제로 얼마나 투표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윤석열을 겨냥한 민주당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분명 일정한 기여를 했다.

윤석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인신공격이 쏟아지던 지난 1월 무렵이 그랬다. 더레프트를 비롯해 친문 ‘네임드’ 지지자 중에는 인터넷에 유포되기 적합한 이미지와 문구 등을 잘 만들어내는, 이른바 ‘능력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그들은 김건희를 향해 쏟아지는 비방과 흑색선전의 내용을 되받아치거나,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귀엽게 묘사하는 여러 ‘짤방’을 만들고 유포했다. 온라인 선전전에서 취약했던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 처지에서 보자면 가히 ‘외계인들이 외계 무기를 들고 와서 도와주는’ 형국이었다.

이낙연계의 유명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윤석열 지지 선언을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민주당 기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와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니 말이다. 이낙연의 측근으로 불린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괴물보단 식물 대통령을 택하겠다”는 그의 말에는 뼈가 있고 가시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내분은 대선 이후에도 심각한 상태다. 선거 이후 이재명의 지지자 중 일부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문자 폭탄을 보냈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민주당 의원은 ‘송영길 대표 사퇴는 안 된다’, ‘패배 원인은 무조건 이낙연 전 총리’라는 취지의 문자를 하루에 300여 통 이상 받았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는 점잖은 말로 바뀌어 서술돼 있으나, 실제로는 온갖 욕설과 폭언이 담겨 있으리라 예상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이 50% 이상의 과반 득표를 하고, 이재명은 40% 이하의 득표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선에 참패한 민주당의 내분은 본격적으로 더 크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낙연의 열혈 지지층은 이재명이 부패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해왔다. 게다가 선거 결과로 무능이 드러나기까지 했다면, 이재명과 이재명계를 쫓아내거나 자신들이 따로 짐을 싸서 나가버리거나, 아무튼 한 집 살림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에 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인 가운데에서도 1600만여 표를 얻는 성과를 냈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졌지만 민주당을 움켜쥔 ‘그립’을 놓치지 않고 더 단단히 다져나갈 수 있다. 3월 10일 새벽 4시 KBS의 당선 예측이 나오자마자 후보자 본인이 빠르게 승복 선언을 하고, 같은 날 송영길을 비롯해 당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진다며 총사퇴한 것은, 오히려 자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선거에서 졌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패배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의 임기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은 이미 야당으로, 윤석열의 인수위로 넘어간 상태다. 현직 대통령과 ‘친노 적통’을 믿고 버텨온 친문 혹은 극문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쪽에 투항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한번 지지했으니, 윤석열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믿고, 문재인이 임명한 검찰총장 윤석열의 지지자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할까? 저들은 나의 아군인가? 나는 저들에게 늑대인가, 개인가? 시계(視界) 제로.

이준석을 둘러싼 갈등 지형
대선을 이틀 앞둔 3월 7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경기 화성시 동탄센트럴파크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개 속처럼 뿌연 상태인 것은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 윤석열의 지근거리에는 소위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으로 통칭되는 측근 그룹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 점을 연신 지적해왔고, 윤석열이 윤핵관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자 지방으로 떠나는 식의 행보를 보여줬다. ‘윤핵관’과 ‘이핵관’, 그리고 윤석열의 당선에 기여한 다른 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은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교체에 성공했기 ‘ 때문에’ 앞날을 예단하기 어렵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율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과 그에 따른 ‘전리품’은 그대로 있는데, 누가 그것을 차지해야 하는가? 윤석열이 교통정리를 해서 완벽히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초박빙 승부로 결정된 여소야대 정권은 위기에 직면하기 쉬운 구조다. 정치에 입문한지 고작 8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초보 정치인’ 윤석열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이준석의 영향력은 크게 상처 입은 상태다. 호남에서 30% 이상의 득표를 올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대포위론’의 힘으로 전체 득표율에서 10% 이상의 격차를 벌려 압승하리라는 호언장담은 무참히 깨졌다. 국민의힘의 호남 진격은 약 15% 정도의 득표율로 귀결됐다. 이는 그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얻은 호남 득표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국민의힘이 호남을 끌어안는 전국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대남’ 구애 전략 혹은 여성주의 고립 전략이다. 이준석과 극적으로 화해한 윤석열이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짧은 메시지를 올려 여론을 반등시킬 때만 해도 이 전략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4일과 5일 사전투표가 시행된 후, 3월 7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준석이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며 “저는 그런 (여성들의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 성향 관련)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재명 선대위는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성들이 겪는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민주당은 20대 여성표심을 겨냥했고 서서히 판세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준석은 젊은 여성들의 표심을 ‘어차피 투표하러 안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일축했다. 역풍을 불러올만한 발언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기간 금지 전인 3월 2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20대 여성으로부터 39.1%, 윤석열은 26.7%의 지지를 받았다.(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1주일 후인 대선 당일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을 향한 20대 여성의 지지는 58.0%로 폭증한 반면, 윤석열의 표는 33.8%로 완만하게 늘었다. 안철수와 단일화를 했지만 안철수가 갖고 있던 20대 여성표는 윤석열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석 심판을 위해 이재명에게 결집하면서 이번 대선을 초박빙 승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준석이 끌어들인 남녀 갈등은 국민의힘의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의당의 고통스러운 홀로서기
‘정치 초보’ 윤석열이 풀어야 할 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와 합당까지 합의한 안철수를 어떻게 예우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선거가 워낙 박빙으로 끝난 탓에 안철수가 어떤 기여를 했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관계자들 간의 해석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안철수와 ‘굴러온 돌’들은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겠지만, 국민의힘의 ‘박힌 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307542표나 쏟아져 나온 무효표를 근거로, 안철수의 기여가 낮으니 많은 지분을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국민의힘 바깥 뿐 아니라 안에서도 적과 동지의 경계선은 흐릿해지면서 많은 이들을 혼란과 번민으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정의당은 더욱 험난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창당된 후 10년간 정의당은 민주당 및 그 지지층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수립하며 동반 성장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그 전략이 유효성을 상실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됐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선 패배 책임론을 언급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제 고통스러운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과연 진보정당으로서 독자 노선을 수립하고 지지층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을까?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뜰녘과 해질녘, 하루에 두 번 있다.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나의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으나, 해뜰녘의 불확실성은 조금만 기다리면 확실히 마무리된다. 반면 해질녘의 흐릿한 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오래도록 지속될 짙은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겪게 될 개와 늑대의 시간이 해질녘의 어둠이 아닌 해뜰녘의 어둠이기를, 곧 해가 뜨고 많은 것이 분명해지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이룰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원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