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타령’ 코미디 청문회보다 심각한 민주당 반지성주의
●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 억압”
● 민중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
● 박지현은 무엇이 못 마땅했을까
● 前 당 대표 이해찬의 ‘노론 음모론’
행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예상한 BTS의 공연도 없었다. 그러나 평범하지도 않았다. 외려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통상적 미사여구로 둘러대지 않았다. 반(反)지성주의라는 과제 앞에 맞서기 위해 자유의 기치를 드높여야 한다는 대통령 본인의 세계관을 분명히 드러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흔치 않은 대통령 취임사였다.
윤석열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반지성주의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망가지고 정상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유를 누릴 수 없게 된다.
새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면, 일반적으로는 여야를 막론하고 박수를 쳐주고 덕담이나 해주며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단독으로 168석(취임식 날 기준)을 지닌 초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퍽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 5월 11일 조오섭 민주당 대변인은 성명을 발표해 “윤석열 대통령이 민주주의 위기의 최대 원인으로 지목한 반지성주의가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발끈하는 걸 보니 찔리나보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굴 생각은 없다. 또한 박지현의 지적에는 일부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에서 드러났다시피, 민주당의 구성원 중 일부가 심각한 지성의 결여를 보여준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반지성주의를 논하는 데 있어 결정적이거나 중요하지 않다. 반지성주의란 흔히 말하는 ‘무식함’이나 ‘교양 없음’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반지성주의의 본래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면, 한국의 정치 역사상 가장 반지성주의를 심각하게 드러낸 정당은 민주당이며, 그 기간은 지난 문재인 정권 5년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호프스태터가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를 펴낸 것은 1963년의 일이다. 이듬해 퓰리쳐상을 수상하게 된 이 책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바는 분명하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의 광풍을 되짚어보며, 다시는 그런 과오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호프스태터에게 미국의 반지성주의란 특정 정치 세력이나 정당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미국인의 삶 전반(American Life)에 반지성주의의 싹이 심어져 있고, 특정한 조건과 계기가 맞아떨어지면 그것이 매카시즘 광풍과 같은 형태로 터져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일까? 미국은 구대륙 즉 유럽에서 박해 당하던 신교도가 이주해 만든 나라다. 라틴어로 쓰인 성경을 평범한 일상 언어로 번역하고, 사제가 해석해줘야만 했던 신의 말씀을 보통 사람들이 직접 읽고 해석하는 것이 종교 개혁이었다. 천 년 넘게 이어져온 지적 권위를 해체하는 과정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신대륙 이주민들은 구대륙에 비해 반(反)제도적이고, 영성적이며,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광막한 자연 속에서 원시주의와 신비주의적인 분위기 역시 문화적 풍토의 한구석에 자리매김하게 됐다.
방금 말한 내용 자체는 부정적이지 않다. 구체제의 모순이 심화하고 대중과 지식인의 괴리가 커질 때, 적절한 반지성주의는 대중과 지식인 양쪽에 건전한 자극을 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대중적 에너지를 악용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반지성주의자는 사실 ‘민중’이 아니라 민중을 동원하려는 ‘엉터리 지식인’일 때가 많다.
일본의 양심적, 실천적 지식인으로 꼽히는 우치다 다쓰루는 호프스태터의 작업에 영감을 받았다. 그는 2010년대 중반 일본에서 급속도로 퍼진 극우 운동을 파헤치는 작업에 돌입했다. 우치다 다쓰루는 뜻을 함께하는 필자들의 원고를 모아 ‘반지성주의를 말하다’를 펴냈는데, 그 중 직접 쓴 첫 번째 원고인 “반지성주의자들의 초상”에서 호프스태터의 책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교육을 받은 자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정쩡한 교육을 받은 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반지성주의자는 통상 사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사람일 뿐 아니라 종종 진부한 사상이나 알려지지 않은 사상에 홀려 있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다. 한편, 한결같은 지적 정열을 결여한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이 대목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반지성주의가 지니는 양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은 40대와 50대 남성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고학력자이며 사회적으로 명성을 지닌 지식인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 해서 반지성주의에 면역을 갖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정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과 그 구성원 및 지지층은 반지성주의에 취약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호프스태터의 논의를 21세기에 이어받은 우치다 다쓰루가 볼 때, 이렇듯 맥락도 시대감각도 없이 과거의 적을 상정하고는 그것을 현재에 이어붙이는 행태야말로 반지성주의와 파시즘의 중요한 징표다. 반대로 지성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나는 시간 속에서 차츰 진리성이 익어 가는 언명을 가리켜 ‘지성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음모론자들처럼 이것저것 자기 입맛에 맞는 ‘팩트’는 열심히 수집하고 끼워 맞추지만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반지성주의자들은 때로 다수의 지지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동시대에 적지 않은 찬동자를 얻는다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것을 사회적, 공공적인 가설이라고 못할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구조적으로 결여된 것이 있으니, 바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반유대주의자였던 에두아르 드뤼몽의 사례를 제시한다. 에두아르 드뤼몽은 고대 로마 이후 19세기 말까지도 유대인들이 흑막 너머에서 유럽을 지배해왔다는 음모론에 심취했다. 음모론을 퍼뜨리며 대중적 인기를 만끽했다. 유대인들이 유럽을 지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뿐 아니라, 고대와 중세, 근대, 현대는 모두 다른 시대라는 것을 단번에 무시해버리는 ‘무시간성’의 사고방식이다.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조선 말기는 수구 쇄국 세력이 집권했고, 일제강점기 거쳤지, 분단됐지, 4·19는 바로 뒤집어졌지, 군사독재 했지, 김대중 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입니다.”
에두아르 드뤼몽이 반유대주의 음모론에 빠져 선동했듯, 이해찬은 이른바 ‘노론 음모론’을 진심으로 믿고 있거나, 본인은 믿지 않아도 남들이 그렇게 믿기를 바라고 있다. 민주당의 지도부 또는 지지층 중 목소리 큰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들에게 ‘역사 공부를 더 하라’고 손가락질하고 함성을 치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전형적인 반지성주의의 행태다.
그러나 오늘날 더 큰 문제는 민주당이다. 그들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정부를 수립하고 6‧25전쟁을 통해 완성된 대한민국을 긍정하지 않는다. 대신 상상 속의 통일된 민족국가를 추구하며 반일 선동을 정치적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 전체의 지적 담론을 갱신해야 하는 이유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