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와 전투기를 수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오늘 인터넷은 '폴란드의 날' 비슷한 분위기가 되어 있다.
이럴 때 나는, 마치 외국인에게 '두유노 코리아? 손흥민 몰라요?' 이러는 진상 국뽕 한국인처럼, '폴란드'라는 단어의 자동 연관 검색어를 떠올린다.
쉼보르스카는 평화주의자, 세계주의자, 시인,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그는 전차와 전투기를 사고 파는 거대한 돈과 폭력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극도로 문학적인 아무말이며, 반박시 일단 내 말이 맞는데, 솔직히 누군가 뭘 반박할 거리가 있지도 않다. 아무말이니까.
이런 시가 있으니 한 편 읽어주시면 좋겠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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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창가와 문 앞에
우산과 여행 가방, 장갑, 외투가 수두룩.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이것은 옷핀, 저것은 머리빗,
종이로 만든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이 여기저기.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열쇠여, 어디에 숨어 있건 간에
때맞춰 모습을 나타내주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녹이 슬었네. 이것 좀 봐, 녹이 슬었어."
증명서와 허가증, 설문지와 자격증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태양이 저물고 있네."
시계여, 강물에서 얼른 헤엄쳐 나오렴.
너를 손목에 차도 괜찮겠지?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넌 그저 시간을 가리키는 척 하고 있을 뿐이잖아."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에 이제 어린애는 없단다."
자, 열려진 창문으로 어서 날아가렴,
저 넓은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렴,
누군가 제발 큰 소리로 "저런!" 하고 외쳐주세요!
바야흐로 내가 와락 울음을 터뜨릴 수 있도록.
2022-07-28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2020-07-19
인용: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문학과 도덕성
저는 '도덕성'이라는 단어가 일본 문학에서는 '더러움'과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말은 확립된 도덕성에 반하는 경우에만 나타납니다.
하루키 1991년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 교수 시절 인터뷰 中
2020-02-12
박완서 (1)
박완서의 소설 "서글픈 순방"의 한 대목. 화자인 새댁은 적금 50만원에 문간방 전세금 40만원을 합쳐 9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그걸로 어디 변두리에 땅을 사고 움막을 지어 살면서, 벽돌이니 뭐니 하는 걸 하나씩 사모아 집을 짓자고 계획한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에 묘사된 그 무렵의 주택 사정도 놀랍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움막살이'를 대수롭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그 태연함이다. 1970년대의 어느 계층에게 움막살이는 인생이 폭싹 망해야만 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딜 수 있는 어떤 디딤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20세기 중후반 고도성장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때로 너무 의아할 때가 있다. 그 무렵에는 모두 행복했고, 모두에게 꿈이 있었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인 양 말하는 그 물결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1983년에 태어나 90년대에 자란 내 기억만 보더라도, 우리의 20세기는 전혀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박완서를 펼쳐보자. 영동고속도로 현장에 취직한 조카를 만나러 간 여성의 이야기인 "카메라와 워커"를 통해 그 시절로 돌아가볼 수 있다. 화자는 조카를 '임시직'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회사 윗사람에게 '와이로'를 찔러주어야 하나 노심초사한다. 고도성장기에는 마치 비정규직이라는 게 없었던 것처럼, 일자리가 지천에 널려있고 청년의 꿈이 공정하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것처럼, 2020년 대한민국이 흠뻑 빠진 가짜 노스탤지어에 찬물을 끼얹는다.
내 짧은 견문의 한계일 수도 있고, 고도성장기의 단물을 받아먹었다는 어떤 집단 속에서 내가 성장기를 보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내가 커온 세상은, 요즘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떠올리는 '쑥쑥 크던, 모두가 절로 부자가 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완서의 단편들 중 툭툭 등장하는 묘사들 속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20세기를 실감나게 재회한다.
아무튼 중요한 건 20세기의 한국이 그렇게 공정한 곳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잘 살 기회를 열어주고 있던 유토피아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를 먹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팠다. 심지어 그 시대를 나보다 오래 살았던 40대, 50대, 60대들 사이에서도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살기 좋았다', '취업하기 좋았다' 같은 소리가 마치 사실인 양 오가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새삼스레 박완서를 읽다가 한 마디 적어본다.
2017-12-29
Alles wandelt sich - Bertolt Brecht
Alles wandelt sich. Neu beginnen
Kannst du mit dem letzten Atemzug.
Aber was geschehen, ist geschehen. Und das Wasser
Das du in den Wein gossest, kannst du
Nicht mehr herausschütten.
Was geschehen, ist geschehen. Das Wasser
Das du in den Wein gossest, kannst du
Nicht mehr herausschütten, aber
Alles wandelt sich. Neu beginnen
Kannst du mit dem letzten Atemzug.
- Bertolt Bre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