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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9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책 없는 도서관, 도서관 없는 서울 - GQ KOREA

2017.02.08

도서관도 없는데 책도 없고 결정적으로 도서관적 경험도 없는 이곳의 도서관에 대하여.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모른다. 서울 외 지역 출신에게 서울은 있어야 할 게 모두 있는 곳이다. 서울의 도서관이라면, 경기도 부천에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책의 바다’여야 한다. 부천의 경인문고에서 책을 뒤지다 좀 부족하다 싶으면 1호선을 타고 종로로 향했으니, 부천과 달리 서울의 도서관은 굉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나름 합리적인 유비 추리의 산물이었다.

서울 사람이 아닌 내게 서울의 도서관은 일단 대학 도서관이었다. 학부 졸업을 앞두고 대출 기록을 긁어보니 총 970권을 빌렸다. 그것들을 전부 읽었다고 장담할 순 없으나, 나는 가급적 빌린 책을 끝까지 읽고 돌려준다는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학부를 졸업한 후 전공을 바꿔 다른 대학교의 대학원에 들어갔다. 도서관에 가보니 학부 시절의 그곳보다 장서량이 부족하다는 게 한눈에 들어왔지만 크게 애석해하지 않았다.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군 복무를 마쳤고 사회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 어떤 대학에도 속하지 않은 채, 서울의 여러 곳으로 주소지를 옮겨 다닌 지 여러 해, 이제야 서울의 도서관이라는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부천에 살던 내가 막연히 동경하던 서울의 도서관은 서울에 없다. 서울에 없다는 것은, 그것이 지역 특산물이 아닌 다음에야,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컨대 한국에는,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 이상적인 시스템으로서의 도서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형으로서의 도서관’이 뭘까? <달력과 권력>이라는 생물학자 이정모의 책이 있다. 달력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리고 그 제정 및 변화 과정이 개별적인 사회 및 세계의 권력 구조와 어떤 연관을 맺는지 추적한 책이다. 박학다식한 과학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생물학 전공자가 책을 쓸 수 있었던 이유를 그는 서문을 통해 정직하게 밝히고 있다. 독일의 연방도시 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달력에 관한 책을 한 권 읽고 미진한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참고도서를 찾으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있었다. 수메르와 로마 달력에 관해 1800년대에 출판된 책이 서체만 현대적으로 바뀌어 재출간된 것을 비롯, 달력에 관한 수십 종의 책이 동네의 조그만 도서관에 갖춰져 있었다. 본에 없는 책은 사서에게 부탁하면 다른 도시에서라도 구해다 주었다. 생태생화학을 연구하는 필자가 전공과 아무 상관도 없는 달력에 관한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독일의 우수한 도서관 덕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책이 나오기까지 가장 큰 도움을 준 본의 도서관에 감사의 말을 돌리고 있다.

이정모가 말하는 ‘본의 도서관’은 단일 건물과 제반 시설을 의미하지 않는다. “본에 거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대학 도서관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립도서관은 도처에 널려 있는데, 일단 도서관에 가면 이용자가 원하는 주제의 책을 찾아주는 사서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며, 없는 책은 다른 도시에서 가져다주는 종합적인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공부하고, 연구해서, 지적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도서관은 그런 것이다. 아니, 그런 것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 에도 나와 있다. 에코는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는 한 학생의 사례를 상정한다. 그 학생은 4년간 학교에 잘 나오지도 않았고, 현재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지도교수로부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 평론가들의 은유 개념’에 대해 논문을 써 보라는 조언을 받았을 뿐이다.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그리고 접근 가능한 도서 관은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구 9만의)”의 시립 도서관뿐이다. 에코는 자신이 가진 중세 전문가로서의 이점을 포기하고, 사서에게 물어보는 쉬운 길을 접어둔 채, 우연히 발견한 핵심적인 논문의 참고 문헌 목록을 베끼는 짓을 하지 않 고, 어떻게 인구 9만 명이 사는 도시의 시립도서관에서 어엿한 논문 한 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시연해 보인다. 그리고 밥 아저씨처럼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참 쉽죠?”

어떤 테마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 없이 지방의 도서관에 가서 세 번의 오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충분히 명백하고 완벽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나는 지방에 살고 있고, 책들도 없고, 어디에서 시작할지도 모르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서울의 도서관에서 과연 본의 도서관, 혹은 에코가 말한 인구 9만의 도시 ‘알레산드리아의 도서관’과 같은 수준의 연구를 해나가는 일이 가능할까? 한국의 철새, 19세기 판소리의 채록 과정, 물산장려운동과 담배 수입의 역사 등, 한국적인 뭔가를 주제로 삼는다면 비교적 수월할 것이다. 대학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잘 짜인 상호 대차 서비스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일반인들이 궁금해 하는 지식 및 학술 정보에 대하여, 이용자가 도서관을 방문하지 않고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홈페이지를 통해 질의 답변을 받는 참고 서비스”를 제공한다. 확실한 목표 의식이 있고, 주제가 한국적인 뭔가라면 연구는 가능하다. 문제는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서울에서 가장 책이 많은 국립중앙도서관과 국회도서관의 경우 책 저장고로서의 기능에 더욱 충실하고자 모든 도서를 ‘폐가식’으로 운영한다. 보고 싶은 책 제목과 청구기호를 적어서 제출한 후 한참 기다리면 도서관 직원이 가져다준다. 열람만 가능하고 관외 대출은 허용되지 않는다. 책을 저장하고 보호하는 데 최적화된 방식이긴 하지만, 책의 숲에서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출구를 찾는, 도서관 고유의 경험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서관은 답을 찾는 곳이다. 그러나 도서관의 또 다른 기능은 책 속에서 길을 잃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잡으면서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그런데 대학 도서관이 아닌 한, 서울의 도서관 중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52만여 권을 소장한 정독도서관, 44만여 권을 보유한 남산도서관 정도가 체면을 세운다. 이는 서울대 4백52만 권, 고려대 2백45만 권, 연세대 2백7만 권, 부산대 1백 94만 권, 성균관대 1백82만 권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 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전부 합쳐도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의 장서 수보다 적다. 대한민국에는 도서관이 별로 없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책이 별로 없다.

애석하게도 오늘날의 도서관 정책은 ‘도서관적 경험’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나라에서 아예 법을 만들어 ‘작은 도서관’ 을 육성하고 장려한다. 2012년 2월 17일 제정된 ‘작은도서관 진흥법’에 따르면 작은 도서관이란 “<도서관법> 제2조 제4호가목에 따른 도서관”을 말하는데, 해당 조문을 찾아보면 ”공중의 생활권역에서 지식 정보 및 독서 문화 서비스의 제공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도서관으로서 제5조에 따른 공립 공공도서관의 시설 및 도서관 자료 기준에 미달하는” 곳이라고 한다. 즉, 애초부터 작은 도서관은 자료를 턱없이 부족하게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물론 “국민의 지식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의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작은 도서관의 기본 취지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생활 친화적 도서관 문화”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17년 1월 현재 전국에는 6천1백73개의 작은 도서관이 설립되어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1천여 권, 혹은 수백 권 단위의 장서를 비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말하자면 확장된 학급 문고 수준인데 그 앞에 굳이 ‘작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면서까지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붙여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좀 더 주민 친화적이면서 도서관의 본래 기능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명칭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린이를 위해 작은 도서관이 필요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서울의 도서관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더 큰 책의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나는 세상에 읽어야 할 책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싶었다. 나는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빛나는 지성을 바라보며 눈이 멀고 싶었다. 작은 도서관이 아니라 큰 도서관을 간절히 원했다. 오늘날의 책벌레 어린이들도 아마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아기자기하고 예쁜 뭔가가 아니다. 성장해가는 자아를 한껏 뻗칠 수 있는 모험의 장이 절실하다. 그러한 곳, 진정한 도서관은, 단지 어린이들뿐 아니라 늘 새로운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관찰하고 연구하며 표현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학자와 작가와 연구자들이 간절히 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아직 서울의 도서관은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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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서관'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을 보고 떠올라 백업용으로 올리는 지난 글.

연관된 내용으로, 이 블로그에 있는 다음 글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2021-05-27

유발 하라리의 ⟪대담한 작전⟫

리디셀렉트에 있길래 심심풀이 삼아서 읽어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TTS 기능을 이용해 '들었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다시피 <대담한 작전>은 유발 하라리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세계 속에 우뚝 솟은 신흥 선진국 K-나라, 그곳이 바로 이곳이지만, 아직도 지성계는 글로벌 트렌드를 못 따라가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떴다 하면 유치원때 쓴 그림일기까지 출판하고 있다.

라고 욕하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대담한 작전>을 보면 유발 하라리가 왜 오늘날의 '유발 하라리'가 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글을 잘 쓴다. 하나마나한 소리 같지만 그게 아니다. 스토리텔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탁월하다. 대중에게 팔릴 책을 쓰는 저술가로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

둘째, '근대 이후'의 세계를 상대화하여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 내용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대담한 작전>은 서양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특수작전들을 다룬다. 흔히 특수작전이라고 하면 근대국가, 즉 정규군/상비군 체제가 갖추어진 이후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그런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다.

소수의 인력으로 전략적 요충지 혹은 인물을 점령, 파괴, 납치, 살해하는 것을 특수작전이라 말한다면, 오히려 근대(와 총력전의 등장) 이전이야말로 특수작전의 전성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기사도 문학과 전설들은 대부분 특수작전의 일종으로 해석 가능하다.

이와 같은 관점은 두 가지의 장점을 낳는다. 첫째, 앞서 말했듯 근대 이후의 세계를 절대적 기준으로 바라보지 않은 역사 서술을 가능케 한다. 둘째,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기사들의 모험담이라는 재미있는 영역에 대한 독점적 해설권을 자신이 가져가게 된다.

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대단히 유리한 포지션을 단번에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영역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논문을 쓰기 시작할 때 얼마나 짜릿할까? 이런 학생을 학자로서 길러내는 교수는 또 얼마나 뿌듯할까?

'근대 이후 세계에 대한 상대적 이해'. 이것이 오늘의 키워드다. 유발 하라리의 이후 성공작인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유발 하라리를 오늘날의 스타로 만든 원동력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 근대 문명을 상대화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는 자기 각성의 계기를, 동양인들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 아자아자'의 기쁨을 안겨줌으로써, 글로벌 스타 지식인이 되었으니 말이다.

<대담한 작전>의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할 게 없다. 나는 서양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대해 원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하라리가 뭘 제대로 설명하는 건지, 자기 취지에 맞게 부풀려 왜곡하는 건지, 판단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일단 재미있게 쭉 읽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중교양서로서는 차고 넘치는 일이다.

유발 하라리라던가, 토마 피케티라던가, 몇몇 스타 지식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등장하면 한국의 출판계는 그들의 저작을 우르르 번역해서 내놓는다. 물론 그런 모습은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하게만 살았던가? 경박한 상업주의에 입각해 여러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출판계가 아직은 살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국 출판계가 떳다방처럼 책을 찍어낸다면, 진정한 독자가 해야 할 일은 개탄하기보다는 '똘똘한 한 권'을 찾으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다. '지성계'란 그런 노력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2020-05-18

광화문과 門化光


광화문 한자 현판이 門化光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한자가 기본적으로 세로쓰기이며, 문장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문 세로쓰기 문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것은 고대 중국인들이 택한 매체, 죽간 때문이다. 오른손에 붓을 쥔 사람이 왼손으로 죽간 두루마리를 풀어가며 글씨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마치 지금 우리가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문장이 점점 아래쪽으로 쌓여가듯, 죽간의 문장은 (글씨 안 쓴 여백이 왼쪽 두루마리에 있으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된다.



이는 매체의 물리적 속성이 문자 문화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언가에 관한, 책>의 저자 애머런스 보서크는 이렇듯 "형식에 의해 제시되는 이용가능성"을 행위유도성(affordance)이라 부른다.

우리가 고대 중국의 죽간 때문에 생긴 행위유도성과 그로 인한 한문 작성법을 2020년 현재까지 그대로 따르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하지만 '광화문'이 아니라 '문화광'이라고 까는 건 정말이지 너무도 무식한 소리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정말이지 통탄할 일이다. 레닌이 말했다시피 무식이 혁명에 도움이 되는 일은 없다. 좀 유식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