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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5

Planet of the Humans (1)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Planet of the Humans’를 방금 다 보았다. 아무렇게나 순서 없이 일단 적어놓는 감상.

미국 민주당 계열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빌 매키번, ‘지구가 아프다 다큐’로 뭔가 큰 상도 받았던 미국 전직 부통령 앨 고어, 민주당 대선 주자로 경선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쓰고 그만둔 마이클 블룸버그 등, 쟁쟁한 인물들.

그들이 어떻게

  1. Green energy라는 구호를 내걸고 돈벌이를 하고 있는지,
  2. 자신들이 내세우는 구호와 biofuel(나무 썰어서 폐 타이어 등과 태우는 것)의 괴리를 얼버무리는지 
  3. 그 결과 지구가 어떻게 더 망가져가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충격적인 작품.

나도 한때 열심히 follow up했던 350.org 같은 조직이,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엑손 모빌이나 도요타 같은 기존 화석연료 업계의 후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큐를 다 보고 나면 놀랍지도 않은 수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제프 깁스(Jeff Gibbs)는 어린 시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시에라 클럽의 맴버로서 열심히 활동해온 열혈 환경운동가.

그가 환경운동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당신들 바이오매스에 찬성하냐’고 물을 때, 다들 해맑게 ‘절대 안되지 우리는 친환경인걸!’ 하는 모습은 정말 가슴아프다.

가장 황당하고 꼴같잖은 장면. 우리는 흔히 가운데 탑이 있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기가 100% 태양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아침 시동을 걸기 위해 가스발전기를 같이 설치한다고. (감독이 인터뷰한 환경 과학자는 그것을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면 커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농담하기도.)

풍력발전기도 마찬가지. 태양광/풍력 시설을 늘리면 늘릴수록 가스발전기가 늘어나는 모습이 다큐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환경운동가’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음.

아쉬운 점은 원자력에 대한 언급이, 한번 스쳐가듯 나오지만, 없다는 것. 탄소 배출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공격적으로 탄소 포집을 하려면 결국 답은 원자력 뿐이다.

아직 한국어 자막이 없는데, 영어 자막을 켜놓고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꼭 봐야 할 2020년 최고의 문제작.


2020-04-18

인류를 위한 일회용품

가령, 한 여고생은 플라스틱 빨대에 대한 문제를 인식했지만, 같은 반의 친구들 중 같은 문제를 인식한 친구는 없었다. 하지만 그 학생은 E-Participation에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을 통해 통해 사실은 플라스틱 빨대를 만드는 기업들이 2~30년 전까지만 해도 단순 이익을 창출하려는 기업가가 아니라 소셜 기업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B형 간염의 바이러스가 대만의 큰 고민거리였고 , 바이러스의 전염을 막기 위해 플라스틱 식기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B형 간염 바이러스는 사라졌고, 당시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적 문제가 생긴 것이다.

강현숙, 오주영, "[인터뷰] 대만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 (2)", 2020년 4월 10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뉴노멀’이 도래했다는 말에 나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뉴’도 아니고 ‘노멀’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가 생명을 위협하는 전염병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최근 수십년간이 비정상이었을 따름이다.

투표장에서 비닐장갑을 나눠주는 것이 환경오염이라고 근심하던 분들이라던가, 스타벅스의 종이 빨대(주여…)라던가, 온갖 이슈들 속에서 문득 이런 인터뷰를 보게 되어, 재미있어서 적어두고 혼자 보기 아까워서 블로그에도 올린다.

2020-04-13

중국 자본주의와 코로나 19

2003년 사스도 그렇고 이번 바이러스 대란은 중국이 무책임한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개방을 시작할 당시 이미 경제적 기반이 있는 부농들이 일반적인 농업을 선점하자 빈농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습니다.

그 대책으로, 중국 공산당 정부는 아무 생각 없이, 현존하는 모든 동식물을 천연자원으로 간주하여 채집 수렵 매매를 원천적으로 허가합니다.

그래서 특히 내륙의 밀림과 맞닿은 우한시 등이 야생동물 밀렵(도 아니죠 사실) 거래의 천국이 되었고 야생동물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온 겁니다.

이건 제 뇌피셜이 아니라, 중국계 미국인 학자를 인터뷰한 미국 언론 Vox의 보도 내용입니다.

"How wildlife trade is linked to coronavirus", Vox, 2020년 3월 6일.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 국가처럼, 야생동물 밀렵을 금지하고 매매를 엄금했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10여년 단위로 새 바이러스가 퍼지는 일은 없었겠지요. 공산주의를 빙자한 극단적 자본주의의 인류적 민폐라고 봅니다.

좋은 시장경제, 바람직한 시장경제라면 시장에서 매매해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후자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자칭 공산주의 국가 중국에는 양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냥 돈이면 다 되는 아수라장인 셈.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 이런 위험을 안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며 아무거나 영리활동의 대상으로 만들어주니, 온갖 야생동물을 잡아서 비위생적으로 유통하는 시장이 생겨버린 겁니다.

저는 이번 판데믹의 전개를 보며 '인간의 탐욕'과 '자연의 회복 능력'의 대립 구도를 상정하는 논의가 매우 불편합니다. 백신이 개발되지 않는 최악의 경우라 하더라도, 이건 2년 후면 인류 전체 인구의 60%가 감염되면서 끝납니다. 스페인 독감이 그렇게 끝났습니다. 이 경우도, 최악이라 해도, 그렇게 끝납니다.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지배할 것이고, 인류는 화석 연료를 활활 태울 것이며,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의 작동 원리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일부 한국인들은 '바이러스 앞에 죽어나가는 선진국 시민들'을 보면서 뒤틀린 만족감을 느끼는 듯도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정리해보겠습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자연의 복수가 아닙니다. 통제되지 않은 중국식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비극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더 잘 제어되는 시장질서와 경제 윤리, 그리고 원시림과 야생동물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 하는 '서구적 자연 관리' 개념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2020-02-17

인공 작물과 천연 바이러스

우리는 흔히 유전자 조작 식품, 즉 GMO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연에서 수렵 채집한 식품들은 안전하다고 여긴다.

실상은 그와 정 반대다. 지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COVID-19'(한국명 '코로나-19') 바이러스만 봐도 그렇다. 인공은 안전하다. 반대로 자연은 위험하다. '코로나-19'의 위험에 대해 곰곰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왜 위험한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다양한 변종 중 인류가 최초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경험한 적 없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만약 '코로나-19'가 일각의 낭설처럼 중국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지금처럼 위험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그 세부 내역을 알고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에 대해 거의 모른다. 아예 모르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독감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바이러스 뿐 아니라,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와 비교해도 우리의 지식은 일천하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실험실의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모른다는 뜻도 되고, 인류의 면역계가 그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전자의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백신을 만들 수 없고, 후자의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가 자체적인 면역력으로 극복해내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코로나-19' 앞에, 무방비 상태다. 마치 서유럽의 뱃사람들이 천연두 바이러스를 퍼뜨렸을 때의 북아메리카 원주민과도 같은 상황인 것이다.

우리가 '코로나-19'에 대해 모르는 것은 그것이 방금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래 모르던 곳에서 온 모르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자연은 원래 그런 곳이다. 미지의 위험이 가득 도사리고 있는 곳.

논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보자. 소위 '백신 거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적인 면역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자연은 우리가 면역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이러스를, 이렇듯 잔뜩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는 운 좋게도 아직 그런 것을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농담입니다>그러니, '백신 거부 운동' 벌이는 이들을 지금이라도 일본 앞바다에 떠있는 크루즈 선에 태워주면 어떨까. 그들이 바라는 '백신 없는 세상'은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농담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환경 속에서 번창해왔다. 도시를 포함해, 유형 무형의 시설과 제도, 관습과 규율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일개 생물종은 우리가 아는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GMO라 불리는, 다들 짐짓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작물 역시, 인간이 수만년에 걸쳐 다른 종의 DNA에 간섭해온 역사를 더 짧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바꾼 것 뿐이다.

그런 건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익숙하지 않은, 접해보지 않은 날것의 '자연'과 만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다. '코로나-19'의 위험이 아직 다잡히지 않았고, 공포가 날뛰고 있는 와중에,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0-01-25

빌 게이츠 vs. 트럼프 (그리고 문재인)

"정치가 끼어들 될 수 있다는 건 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정부일 거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We always knew there would be politics involved. We never thought it would be out government."

망치를 잡은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빌 게이츠는 순순히 인정한다. 자신의 망치는 기술이며, 세상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고.

하지만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세상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승부처인 기후변화와의 싸움 앞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 를 3부까지 다 본 후의 소감이다.

3부는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 벤처 기업 테라파워의 홍보 영상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럴만도 하다. 사람들이 워낙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정작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분야가 바로 원자력이기 때문이다.

테라파워에서 설계한 진행파 원자로는 지금까지 '핵폐기물'로 취급하던 사용후핵연료를 연료로 삼는다. 미 정부가 보관중인 '핵폐기물'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지금껏 저장된 '핵폐기물'을 통해 미국 전체가 125년간 사용할 에너지 전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막대한 가능성 앞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굉장한 일이다.

물론 본인이 개발한 아이템을 세일즈하는 사람의 말이긴 하다. 그러나 1) 인류 전체가 쓰고 남을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2)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고 3) 사고가 발생한다 한들 원자로가 자체냉각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온갖 천재들을 끌어모았다. 그 중에는 <모더니스트 퀴진> 시리즈로도 유명한 네이선 미어볼트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직접 검색을 해보시라. 아무튼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자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는 온갖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진행파 원자로의 개념 설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완료했다. 2015년 시진핑을 만나 중국에 대량 보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원전 생산의 생태계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중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다른 모든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인프라 건설 사업이다. 여기서 사업성이 맞으려면 생산과 소비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생산과 소비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중국을 찾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중국처럼 막대한 양의 원자력 발전소를 소비해줄 수는 없지만,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있다. 테라파워에서 개발한 기술을 얼마나 공유하고 이전할지가 관건이긴 하겠으나, 적어도 현재 표준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경수로의 건설, 유지, 관리 등에 있어서 한국은 독보적인 나라다.

그러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노정태부터 그레타 툰베리까지 모든 인류가 오래도록 안정적인 기후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표방하며 당선된 문재인과, 노동계급의 불만을 들먹였지만 결국 미국 사회의 이주민 혐오를 무기삼아 당선된 트럼프는, 그 점에서 큰 교집합을 그린다.

지난번에 <인사이드 빌 게이츠> 1부를 보고 내놓았던 감상과 이 대목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 많은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정치로 수렴한다. 따라서,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탈원전은 철회되어야 한다. 순식간에 많은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집단이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 모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01-23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20-01-12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제목: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2020년 1월 8일, 요헨 비트너(Jochen Bittner) 작성

독일, 함부르크 - 독일인들은 비이성적인가? 스티븐 핑커라면 그렇게 생각할 듯하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핑커는 최근 독일 시사 잡지인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인류가 경제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서 기후 변화를 멈추고 싶다면, 원자력을 덜 쓰는 게 아니라 더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을 몰아낸다는 독일의 결정은 "편집증적(paranoid)"이라고 말이다.

내 조국은 실로 독특한 실험을 감행하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는 원자력과 석탄 발전소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독일 최후의 원자력 발전소는 2022년 말에 폐쇄될 예정이며, 최후의 석탄화력발전소는 2038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동시에 정부는 친환경적인 전기차 구입을 촉진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에너지 소비는 1990년 이후 10퍼센트 상승했다.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독일이 위험한 경로를 걷고 있다고 우려한다. 화석 연료와 원자력이 빠진 손실을 채워넣을 수 있을만한 신재생에너지가 적절한 시점에 마련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신재생에너지는 독일의 전력 공급 중 4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의 몇몇 지방에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풍력 농장"에 진력을 내고 있다. 새로운, 많은 경우 더 큰 풍력 발전기가 주변에 세워지는 것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서 산업 중심지를 이어줄 송전선이 새롭게 깔리게 될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저항이 늘어가고 있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독일의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 혹은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송전선의 길이만도 5954킬로미터(3700마일)에 육박한다. 2018년 말 현재 실제로 건설된 송전선은 약 150킬로미터(93마일)에 불과하다.

이 계획은 전력 부족을 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석탄 화력 발전소보다 빨리 폐쇄하고 있는 탓에, 독일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일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후에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대는 굳건하다. 60퍼센트의 독일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 놓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편집증은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딜레마와 맞닥뜨렸을 때 얼어붙은 듯 멈춰버리는 대단히 독일적인 특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선한 일이라면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독일 같은 국가에게 있어서, 원자력 발전과 기후 변화라는 두 개의 악을 놓고 선택하는 것은 거의 수행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시작을 위해 언급하자면, 원자력 발전이 궁극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며, 독일인들은 특히 그 점에 대해 늘 불편함을 느껴왔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토마우스티에그(Atomausstieg)", 즉 원자력 발전을 단번에 완전히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설명한 바는 이렇다. "원자력 발전의 잠재적 위험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위험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용인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훈련받은 물리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원자력 재앙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같이 고도로 기술이 발전한 나라에서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악인 기후 변화는 어떠한가? 그 재앙은 석탄화력발전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으며 거의 확실하게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에서야 "기후 변화는 우리가 몇 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동시에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파리 기후 협약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나온 희망찬 숫자를 놓고 보더라도, 2020년 말까지 탄소 배출양의 40퍼센트를 줄인다는 목표치는 달성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2011년 이후 훨씬 깊어졌으니, 각 국가들은 화석 연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을 폐기하겠노라는 생각을 바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것은 녹색당의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녹색당은 향후 메르켈의 기민당이 연정을 맺어야 할 상대이기도 하다. 녹색당은 1980년대 초 반핵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반핵운동은 녹색당의 DNA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중 구속 상태에 대해 녹색당은 그럴듯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아날레나 베르보크(Annalena Baerbock) 녹색당 공동대표는 독일 국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석탄 발전소를 더 빨리 폐쇄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오래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발상 자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우리 이웃의 정원에 원자력 폐기물을 묻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방사성 폐기물과 기술적 사고의 위험을 사회에 전가시키면서 기업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석탄 발전소가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계산 또한 참이다.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은 독일의 거의 종교적 반핵 정서가 기술 발전에 따른 논의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과학자들은 방사성 폐기물을 이용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사용후 핵연료 보관 문제, 즉 원자력에 반대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인 그것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른바 고속증식로에도 나름의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생 가능 에너지 시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원자력은 석탄이나 가스 발전소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일체의 원자력 발전소를 급속도로 폐쇄하면서, 독일은 [원자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독일은 어쩌면 인류가 본 것 중 가장 안전하고 가장 친환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기술과의 접점을 차단해버렸다. 독일이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화석 연료의 사용을 급격하게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이성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은 메르켈 시대가 낳은 최악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요헨 비트너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토론 지면의 공동 담당자이며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한다.

원문: Jochen Bittner. “Opinion |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The New York Times, 2020년 1월 8일, sec Opinion. https://www.nytimes.com/2020/01/08/opinion/nuclear-power-germany.html.

2020-01-09

사막의 생명, 인간의 에너지

내 로망 중 하나는 사막 여행이다. 물론 생명에 위험이 없을만큼 안전한 루트와 일정이 제공될 때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사막에 피어나는 온갖 식물과 동물들의 조화를 만끽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막도 생태계다. 사막에는 사막의 환경에 최적화된 동물과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온대 기후에 적합한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눈에 '가치' 있는 생물군이 매우 부족해서 그렇지, 사막의 생태계는 사막 나름의 논리와 치열함을 지니고 오늘도 작동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서부 해안가 대도시에 살면서 인근 사막에 태양광 발전기를 뒤덮어버리는 미국 리버럴들의 '환경주의'에 동의하기 힘든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들은 생태계 보호니 환경이니 잘도 떠들지만, 자기 양심을 달래기 위해 사막 생태계를 황폐화시키는 일은 서슴치 않고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말로 생태계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에너지 생산 및 소비 과정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발전 양식은 모두 지양하는 것이 옳다. 대신 원전처럼 아주 좁은 면적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야 더 많은 땅에 더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자국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자연은 되살아난다. 흔히 '죽음의 땅'이니 뭐니 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인근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발을 끊자, 멸종된 줄 알았던 야생동물까지 모두 돌아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반면 당신들이 뒤덮어놓은 태양광 발전기는 오늘도 전자파를 내뿜고, 거대한 풍력 발전기에는 곤충과 새들이 부딪쳐 죽는다. 누가 친환경인가? 누가 생태계 파괴자인가?

참고: Pat Brennan, "Desert damage: the dark side of solar power?", PHYS.ORG, 2009년 3월 30일.
Sammy Roth, "Study: California solar farms threaten desert species", The Desert Sun, 2015년 10월 19일.

2019-12-15

EU가 원자력을 친환경에너지로 인정했다

EU 정상들은 원자력 에너지를 친환경 에너지로 인정해달라는 일부 회원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일부 국가에 한해 에너지 믹스(전력 발생원의 구성)에 원자력을 포함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간 헝가리와 체코는 EU가 원자력을 환경친화적인 에너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룩셈부르크를 비롯해 단계적인 원자력 발전소 폐쇄를 추진하고 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은 여기에 반대해왔다.

김정은, 현혜란, "EU, 2050년까지 '탄소중립' 목표 합의…폴란드는 일단 유예(종합)", 연합뉴스, 2019년 12월 13일. 기사 원문 링크.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모두 질 좋은 갈탄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뿌리 깊은 석탄 산업의 힘이 정치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는 뜻이기도 하다. 원자력발전이 늘어나면 석탄화력발전의 비중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독일의 '탈원전'은 석탄화력의 사용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석탄화력은 원자력에 비해 훨씬 위험하다. 석탄이라는 연료를 공급하고, 석탄을 태우면서 나오는 재를 치우는 등의 온갖 과정에 사람이 개입해야 하므로 당연히 사고의 위험이 확률적으로 높아진다. 반면 원자력은 거의 모든 과정이 기계로 제어되며 자동화되어 있다. 나는 2017년에 이런 글을 썼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노정태,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노정태의 블로그, 2017년 7월 28일. 원문 링크.

그리고 2018년 12월 10일, 24세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었다. 그 역시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물론 2인 1조 작업 원칙을 지키지 않은 사측의 무리한 경비 절감이 그의 죽음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석탄화력발전소의 구조 자체가 이와 같은 산업 재해에 취약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나는 원자력이 기후변화의 대응책으로서 유의미하고, 특히 석탄화력발전에 비해 노동자에게도 안전한 에너지원임을 줄곧 역설해왔다. 하지만 소위 '진보'는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입을 다물어버린다. 나는 입을 열었고, 2017년 7월, 약 10여년을 칼럼니스트로서 함께해온 언론사에서 잘려나갔다.

존경하던 사람들을 존경하지 못하게 되었고, 판단의 기준점으로 삼고 있던 이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당신들보다 좀 더 깨어있는 정신으로, 좀 더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진보 '세력'이 한꺼번에 퇴보하고 있을 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진보'는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2019-01-15

미세먼지 속에서 에너지 문제를 생각하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어두컴컴한 날에 과연 태양광이라고 제대로 돌아갈까? 미세먼지 농도가 높으면 높은 확률로 바람도 잠잠하게 마련인데, 풍력발전기가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나 있나? 당연히 원자력밖에 답이 없다. 대중들이 진실을 깨달아가자 뻔한 허위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분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4세대 원전 상용화를 최대한 빨리 이룩하고 최고의 속도로 전 지구에 보급하여, 운송수단에 투입되는 화석연료까지 모두 원자력과 기타 비탄소에너지로 전환하지 않으면, 100년 후 인류의 미래는 심히 암담할 것이다.

지금까지 통용되는 기존 '환경주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UC 버클리 캠퍼스 같은 곳에서 노닥거리던 히피들이 그 골자를 짠 것이어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과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에 둔감하다. 사람이 얼어죽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 배부른 놈들이 되는대로 지껄여놓은 한가한 소리들...

어릴 때 미국에서 만들어져 일본 건너온 환경주의 책 보고 여러 면에서 황당했다. '잔디밭에 스프링쿨러로 물을 뿌리지 맙시다', '소다 캔 식스팩을 사면 딸려오는 고리를 잘라서 버립시다' 등, 미국에서나 하는 낭비를 제3세계 한국인더러 하지 말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한국에서 탈원전합시다 원전 하나 줄여요 웅앵웅 하는 소리에 혹하는 것도 대체로 중산층이거나 그 이상, 내지는 문화적 자산이 충분한 계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발등 찍는 정책도 듣기에 그럴싸하면 지지한다. 미국의 상위 10%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집집마다 광활한 잔디밭이 딸려있고 거기에 스프링쿨러로 잔디밭에 물 뿌리는 놈들이 만든 '환경주의'를 21세기에 중국발 미세먼지 퍼마시는 한국인들이 왜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냐고.

캘리포니아 사는 여러분은 모하비 사막을 태양광으로 싹 덮던 말던 알아서 하시고, 여기는 원전 깔아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노인들이 얼어죽지 않고, 어린 아이들이 나이 들어서도 견딜만한 기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2017-11-01

탈핵론자들은 대체 무엇에 반대하는가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탈핵론자들은 뭔가를 열심히 반대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뭘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방사능 유출의 위험'은 한국 원전의 설계와 가능한 사고의 영역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핵물질이 유출된 것은 격납 용기를 감싸는 콘크리트 외벽의 두께가 고작 16cm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수소폭발을 견디지 못했다.

반면 미국 최악의 원전 사고였던 TMI(Three Mile Islands) 발전소 사건은 달랐다. 노심용융으로 인해 수소폭발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격납 용기 외벽의 두께가 1미터였고, 내부의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견뎌냈다. 심지어 사고가 난 2호기는 폐쇄했지만 그 옆의 1호기는 얼마 후 정상 가동했다.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 노동자들이 출근해서 일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후에 일하던 사람들도, 방사능 때문에 죽지 않았다. 격납 용기의 힘이다.

이와 같이, 방사성 물질이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방사능은 유출되지 않는다. 방사능이란 방사성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발전용 원자로도 후쿠시마처럼 16센티미터에 불과한 콘크리트 외벽을 가진 격납 용기 안에 들어있거나 하지 않다.

한국에서 최악의 원전 사고가 터져도 핵물질이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0에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원전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수소폭발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너끈히 견뎌내기 때문이다. 그럼 방사능은 나오지 않는다. 방사능의 위험 때문에 원전에 반대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하는 '원전이 공격당하면 핵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이 끔찍하다'는 말 또한 현실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이미 미국에서 2002년에 실험을 해봤다. 두께 1미터 이상의 격납 용기는 보잉 767로 들이받아도 끄떡없다.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와 직격해도, 어지간히 센 탄두를 탑재하고 있지 않은 한, 격납 용기 내의 핵물질을 유출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강력한 탄두, 가령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그때는 원전이 아니라 그 공격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동남권에 위치한 원전은 원전에 반대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대체로 반대하는 THAAD가 '죽음의 전자파'를 쏘아대며 지켜주는 범위 안에 있다. THAAD의 주된 목적은 부산항에서 왜관을 거쳐 평택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보급선을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미군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되었다. 원전이 북한 미사일에 공격당할까봐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THAAD 배치에 찬성하고, 추가 배치를 추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들이 말하는 '규모 7.0의 지진이 바로 원전 밑에서 발생하면 큰일 아니냐'는 우려 역시 말이 안 된다. 그럼 당신들은 규모 7.0의 지진이 청와대 바로 밑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0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0.00000000000000000001%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원전을 폐쇄해야 한다면, 청와대 역시 같은 확률로 지진 피해를 입고 폭싹 무너질 수 있다(하지만 그런 지진을 겪어도 원전 건물은 안 무너진다.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당장 청와대에서 나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연재해를 견딜 수 있는 어딘가로 피신해야 한다. 어디가 좋을까? 노아의 방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화장실 없는 아파트' 타령, 사용후핵폐기물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엉터리다. 사용후핵폐기물이 10만 년을 가니까 원전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사람은, 화력발전소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인 탄소가 몇 년을 가는지 알고 있나? 무한대다. 왜냐하면 탄소는 원자이며 원자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핵융합이나 핵분열 혹은 방사성 붕괴 등)가 아닌 다음에야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쭉 그냥 그대로 가기 때문이다.

사용후핵폐기물이 걱정된다면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면 된다. 이미 과학적으로 처리 방법은 다 고안되어 있다. 다만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핵탄두의 개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국에 의해 해당 기술의 발전이 막혀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원자력계는 4세대 원전 개발에서도 앞서나가는 선두주자다. 4세대 원전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순간, 10만 년을 간다는 사용후핵폐기물 문제는 깨끗하게 사라진다. 대신 그 핵폐기물이 값싸고 훌륭한 발전 연료로 재활용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에너지라고 칭송하는 핵융합보다 훨씬 쉽게 구현 가능하고 그만큼 안전한 대안적 에너지 시스템이다.

그들이 말하는 온갖 '위험'에는 실체가 없다. 반면 실체가 없는 위험을 떠벌이는 '세력'에는 실체가 있다. 당신들은 원전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원전의 위험을 떠벌이는 당신들의 세력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탈원전을 외치는 이들은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을 보여주기 바란다. 사실 당신들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탈원전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숙의'하면 할수록,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당신들의 공포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실체가 없는 '위험'을 홍보하는 것으로 뭉친 '세력'에는 존재의 당위가 없다. 나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환경주의가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2017-10-03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가짜 이념

탈핵론자들이 내거는 멋진 기치 중 하나가 바로 '에너지 민주주의'다.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고 작동시키는 원전보다, 개똥이네 말숙이네 집에 모두 태양광 발전기가 깔려있으면, 그게 본질적으로 '민주적'이고 따라서 옳다는 논리다.

이건 에너지 정책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일단 근대국가를 전제로 한다. 근대국가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이고, 다만 그 폭력의 활용 방식을 법치주의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큰 발전소를 다 없애버리고 작은 발전소만 돌아가는 것을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에너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에너지 전근대주의, 혹은 에너지 봉건주의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애초에 민주주의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근대적 이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렴하게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 것, 본인이 사용한만큼 필요에 따라 적용된 누진제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요금을 내는 것, 그리고 그 에너지의 생산과 사용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감시 체제가 돌아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탈원전'과 필연적인 상관이 없다.

에너지의 생산과 유통을 감시하는 문제도 그러하다. 원자력 업계가 그렇게 의심스럽고 사악해보인다면, 감시하는 단체들이 전문성을 키움으로써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다. 오히려 원전은 숫자가 많지 않고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http://nsic.nssc.go.kr/main.do)와 같이 자료를 공개하는 일이 가능하다.

원전을 욕하기 위해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 자료를 참고하는 사람들이, 그 생태적 피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태양광과 풍력을 예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너무 잘 관리되는 탓에 알 수 있는 '문제'에만 손가락질하고, 자신들이 정작 파악하지도 못하는 '문제'들은 아예 없는 셈 쳐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무조건 선이니까 관리 감독의 필요가 없다고? 태양과 바람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리가 없다고? 그런 목가적 판타지에 기반해 국가 정책을 추진하자는 소리인가?

오히려 에너지 봉건주의자들의 이상대로 '공동체' 단위로 발전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에너지의 값이 비싸진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존에 저렴한 가격에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던 빈곤층부터 소외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거노인들이 전기장판을 못 틀게 된다는 말이다.

에너지는 민주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에너지를 민주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집집마다 발전기를 나눠 달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에너지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총을 들고 무장할 권리가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총기 소지 옹호론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너지의 생산은 최소한의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하고, 그것을 적법한 기구에 의해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한다. 마치 국가의 총과 무기는 군대와 경찰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다만 국민들은 국회나 정부 및 법원을 통해 그 무장 조직들을 감시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기본인 것처럼 말이다.

원전에 반대하는 논리로 뭘 갖다 붙이건 그건 주장하는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탈원전을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포장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알고도 그런다면 '강남 좌파 판타지'에 복무하는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고민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7-10-02

고래와 영웅 - 도덕적 에너지 실천에 대하여

1.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다.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의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일상은 지루하며 때로 고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과 맞장을 뜨는 사람들'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어떤 정치적 당위가 없거나 아예 부도덕한 존재라 해도, 그가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흥분하고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지강헌처럼 부당한 형사 정책에 희생된 이가 탈옥을 하면 국민들은 호응하고 그를 기린다. 하지만 신창원 같은 명백한 범죄자가 탈옥을 해도, 그저 탈옥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이 흥분하고 팬클럽이 생기며 그가 입었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이다.

약한 것과 옳은 것은 전혀 같은 가치가 아니지만 우리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설령 자신들이 실제로는 강자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포장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와 같은 무모한 도전은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박히는 어떤 '그림'이 나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마치 1975년,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포경선에 달려들던 그린피스처럼 말이다.


2.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태학 박사 과정을 밟던 대학원생 패트릭 무어(Patrick Moore)는 1971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뜨거웠던 대학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지기로 예정된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한 환경운동 그룹에 참여한 것이다. 그들은 낡은 어선 한 척을 타고 수소폭탄 실험의 현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본인들을 '인간 방패'로 제공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다.

목표와 방법이 정해졌다. 그런데 그 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처음에는 '평화(Peace)'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누군가의 제안으로 그 앞에 '녹색(Green)'이 붙었다. '그린피스(Greenpeace)'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린피스호는 그들이 막고자 했던 그 수소폭탄 실험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수소폭탄 실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과연 그린피스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린피스 호에 탔던 12명의 환경운동가들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핵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린피스의 활동은 1975년 전기를 맞이한다. "Save the Whales", 일본과 소련의 포경선에 맞서 고래들을 구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린피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포경선의 작살이 날아다니고 고래들이 물보라를 튀기는 가운데 그린피스의 젊은 활동가들이 그 어느 나라의 법도 적용되지 않는 공해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린피스는 자신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았고, 언론은 이런 '멋진 그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린피스는 전 세계인이 아는 환경운동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후 그들은 승승장구하며 다양한 환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패트릭 무어와 다른 이들의 입장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였던 패트릭 무어는 거대 조직으로 거듭난 그린피스가 염소(Chlorine)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염소는 그냥 염소일 뿐이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용 화학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나트륨과 결합된 염소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특정한 원소 하나를 두고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며 모든 종류의 일상용품으로부터 염소를 추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던 그린피스를, 훈련된 생태학자인 패트릭 무어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린피스의 창립자 중 하나인 그는 그린피스를 탈퇴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3.

화학은 화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품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린피스는 자연에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인 원자번호 17번을 가진 그 원소를 '악'으로 보기 시작했다. 포경선과 싸우는 것은 이제 식상한 일이다. 미국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지상 핵실험 따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린피스는 여전히 맞서 싸울 거대한 악을 필요로 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염소를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고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방사능을 '죽음의 파장'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방사능은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한 파장들을 이르는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면 적외선이고 짧으면 자외선이다. 그 자외선보다 짧은 파동에는 X선과 감마선이 있고,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라는 입자선도 존재한다. 이러한 파장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름이 바로 그 무시무시한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일반적으로 방사성 물질이 더 안정한 물질로 붕괴될 때 발생하는 입자선 혹은 전자기파라고 정의된다.

그냥 그게 전부다. 염소가 염소인 것처럼, 방사선은 방사선이고, 방사능이란 특정 물질이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다. 염소를 '악'이라 부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면 방사능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다.

인간은 19세기 말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방사선의 존재를 파악하고 방사능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주기율표에 써있는 자연수의 형태로 똑 떨어지는 줄만 알았던 원자들이, 중성자의 갯수에 따라 다양한 동위원소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우라늄에는 중성자가 146개 있는 우라늄-238도 있지만 143개 있는 우라늄-235도 있으며 자연계에 0.7%가량 존재하는 중성자 143개짜리 우라늄을 많이 뭉치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핵분열의 속도가 빨라지며 심지어 임계치를 넘기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발견과 기술적 진전은 도덕과 무관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있고 그것을 꺼내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만약 핵분열의 발견과 통제 기술의 발달이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핵무기의 제작은 훨씬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원유를 정제해서 나오는 가솔린이 오래도록 연료와 연구용으로만 사용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제서야 네이팜탄으로도 만들어지고 몰로토프 칵테일(일명 화염병)로도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보다 먼저 그것이 폭탄으로 사용되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원자력이라는 에너지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반핵 운동이 터져나온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린피스 역시 반핵운동 단체로 시작했고, 원자폭탄 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까지 그 모든 원자력에 반대했다. 마치 십수년 후 '염소'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듯, 그린피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환경 운동은 '방사능'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반대 운동에서 출발한 셈이다.


4.

방사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린피스는 방사능에 반대했고, 염소에 반대했고, 지금은 또 무언가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자연 현상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거대 자본/원자력 마피아/미 제국주의/기타등등'으로 표상되는 어떤 거대한 권력과 조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버젓이 진보적 담론으로 유통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거대한 조직과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소수자들'로 포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포지셔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방사능이 뭔지 몰라도, GMO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심지어는 염소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린피스의 편을 든다. 한국수력원자력과 몬산토와 카길과 미 제국주의가 그 배후에 있다고 외치면 많은 이들의 판단은 그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도덕심의 작동 원리를 그들이 잘 활용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은 권태롭고 피곤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웅의 편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포경선과 맞서 싸우는 그린피스의 모습을 TV로 보고 후원금을 퍼부어주었던 서구 시민들 중 대부분은 그 전까지 일본이 고래고기를 먹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심지어 적잖은 이들은 고래라는 동물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삼킨 동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그린피스의 활약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크고 무시무시한 작살을 단 배' 앞에 어줍잖은 낡아빠진 어선을 끌고 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 영웅들에게, 나의 후원금을 보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5.

2017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가는 탈핵 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정책적 당위성의 측면에서도 탈핵 진영은 탈핵 반대 진영에 비해 논거가 빈약하다. 아니, 사실 논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체르노빌처럼 흑연을 감속재로 쓰는 고속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후쿠시마처럼 비상용 발전기를 침수될 수 있는 낮은 곳에 배치해놓은 원자력 발전소도 한국에는 없다. 우주에서 공룡을 멸종시킬만큼 거대한 운석이 날아와 강타하지 않는 한 한국의 원전은 깨질 뿐 폭발하지는 않는다. 우라늄이 폭발할 수 있을만큼 농축되어 있지 않으니까. 심지어 북힌의 장사정포가 날아와도 원자로의 방호벽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찬성하는 이들은 당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이 그들의 편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탈핵 반대 진영은 본인들이 과학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린피스나 환경운동연합이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도덕적 당위의 담지자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핵은 '운동'인 반면, 원자력 발전은 '정책'이며 '기술'일 뿐이다. 탈핵에 찬성하는 것은, 고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린피스를 후원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을 안겨준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구차한 현실론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로 취급된다. 심지어 원자력 업계 종사자들도 종종, 그래 실은 그렇게 좋은 건 아니고 궁극적으로 보자면 없어져야겠지만 당장은 할 수 없죠,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아는, 일상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영웅적 노력의 결과물인지 아는 나잇대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원자력 발전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세상을 바꾸고 싶고, 저 거대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고,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젊은이들은, 일단 탈핵에 찬성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싱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원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왜 도덕적이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가격이 싸서, 짓다 만 발전소가 있으니까, 수십조원에 달하는 원전 시장을 빼앗기니까, 라는 식의 주장으로는 대통령 탄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청산주의적, 도덕주의적 열기를 이겨내기 어럽다.

원자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왜 사용해야 하며 왜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아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6.

이제서야 국내에서도 원자력 발전이 기후 변화 대응책으로서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교역량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세계적 트렌드에 뒤쳐진 나라다. 고맙게도 현 장권의 기습적인 탈핵 정책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원자력 발전이야말로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저발전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기후 변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21세기 인류가 처한 단 하나의 가장 큰 안보 위험 요소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후 변화일 수밖에 없다. 가령 방글라데시의 경우 인구는 1.6억인데 그 중 4천만 명 이상이 해발 1미터 이하의 저지대에 살고 있다. 해수면이 1미터만 높아져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환경 난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따로 도망갈 곳도 없으므로 최선을 다해 기후변화에 맞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최대한 많은 국토를 가꾸고, 가급적 나무를 심어서 토양의 유실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의 '신재생 발전' 드라이브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서 태양광 발전기를 짓고 있다. 그런 식으로 국토를 벌거숭이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원전은 없애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유지하고 에너지 믹스에서 원전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이거나 합리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만큼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한국에 비해 가난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나라의 빈민들이 그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처럼 인구는 많은데 기술력이 부족한 나라에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현재 방글라데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원전을 건설중이다).


7.

원자력 발전에 찬성하는 것이 과연 '영웅적'인 일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원자력 발전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너무도 안전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높이자'는 대중적인 운동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 말이다. 원자력 발전은 실로 너무도 안전하다. 얼마나 안전하냐면, 심지어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WHO 조사에 따르면,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마다 석탄은 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는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는 440명, 수력(세계 평균)은 1400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런데 원자력은 인류 최악의 사고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까지 포함해도 세계 평균 고작 90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다. 이보다 안전한 에너지원은 없다.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원자력 발전이 더 안전한 것이다.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그것을 입증한다.

안전한 원자력 발전을 계속 사용하는 것, 그 활용을 늘려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원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전의 사용은 결코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무릅써야 할 위험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원전이 '폭발'하면 수백만의 이재민이 생길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탈핵 반대 진영에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원전이 위험하지 않다고 홍보하는 쪽에 주력해왔다. 그런 계몽은 언제나 옳고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확률이 0.0000000000000000000001%여도 0은 아니니까 위험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해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과학적인 사실, 기술적인 설계, 그에 대해 쌓여있는 한국의 노하우를 놓고 볼 떄, 원전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2) 원자력 발전은 저렴하고 질 좋은 전기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으므로써, 기후 변화에 취약한 제3세계의 빈민들을 돕는 도덕적 에너지다.
3) 그러므로 아무리 사실에 입각한 안전성을 주장해도 수백조분의 1의 가능성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느끼는 그 엄청나게 희박한 가능성의 공포심을, 견뎌내시라. 그것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 사는 한국인의 의무다. 그 조그마한 공포심 때문에 우리가 원전을 포기하면, 방글라데시의 빈민가가 물에 잠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원전 공포심을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 1)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2)도 당연한 것이고 3)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은 아직도 원전의 사고 위험을 두려워하고, '수십만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핵폐기물'에 대해 정말 큰 부담감을 느낀다. 경수로에서 사용된 핵연료라고 해봐야 물에 담가서 열을 식힌 후 포장해서 쌓아두면 그만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실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그 가치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탈핵이란 원전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원전이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쁘기' 때문에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우리 인류에게 골고루 내재되어 있는 그러한 성향을 충족시킬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원전이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한 우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굉장히 안전하고 튼튼하며, 핵폐기물 문제도 과장되었다 뿐이지 사실 합리적으로 처리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면 그 걱정을 하시라고. 당신이 걱정하면서 '핵발전소'를 참아내는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환경 난민들은 웃음지을 수 있다고.


8.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며, 설령 남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포경선을 향해 달려들던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 자극한 것은 바로 그런 원초적인 참여의 본능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99.99%는 고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고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 때, 뭔가 올바른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인류 본원의 도덕심은 위안을 받았다.

그린피스는 그렇게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고, 자신들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원자력에 수십년에 걸쳐 사악한 에너지이며 죽음의 방사능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이제는 그 낙인을 벗겨내고 현실을 올바로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화석 연료의 사용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셰일 가스 로또를 터뜨린 미국은 한번 포기해버린 원전 기술을 복원하는대신 되려 석탄을 캐서 활활 불태우겠다고, 파리 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해 제3세계의 환경 난민에 대한 고민을 집어치우고, 태양광 발전기가 멈추는 밤이면 밤마다 석탄 화력 발전소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원자력은 악이 아니다. 화력도 악하지 않다. 다만 현 시점에서, 보다 나은 에너지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를 촉진시키는 화력 발전의 규모를 늘려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모두 간헐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규모의 화력발전, 특히 가스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태양과 바람의 나라는 사실 석탄과 가스로 돌아간다. 그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선진국 시민들에게는 흡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환경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다.

원자력은 안전하다. 그 안전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해두었다. 그래도 정 불안하다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지구 어딘가에 사는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원자력이라는, 아직 인류에게 친숙하지 않은 에너지의 사용에서 비롯하는 불안과 막연한 공포심을 참고 견디는 것, 원자력이 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공부하는 것,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온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한국 같은 발전된 산업 국가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도덕적 에너지 실천이다.

2017-08-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환경주의의 다양성

환경주의는 넓은 개념이다. 가령 최초의 동물 보호 운동을 벌였던 것은 사냥꾼들이었다. 자신들이 사냥을 하다보니 생태계 균형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환경주의자'는 반드시 '탈원전'에 동의할 필요가 없다. 환경주의에도 여러 갈래가 있으니 말이 나온 김에 분류를 해보기로 하자.

1) 반인간적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만약 위 문장에서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는 굉장히 극단적인(혹은 '래디컬'한) 입장인 셈이다. 영화 〈12 몽키즈〉에 나왔던 것처럼, 지구를 살리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그런 반휴머니즘적 환경주의의 길을 택하는 것이니 말이다.

2) 문명 퇴행을 수용하는 환경주의: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길어진 기대 수명, 풍요로운 식생활, 청결과 위생, 민주주의적 의사 결정 구조, 법치주의 등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 그래야 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반 문명적' 태도에서 환경주의를 주장하는 셈이다. 이웃간에 정감 넘치는 생활을 하기 위해 냉장고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철학자' 강신주 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함께하는 진보 진영에서 널리 공감을 얻고 있는 생각이다.

3) 현대 문명과 함께하는 환경주의: 지구 환경을 위해 인류는 기존의 '문명적' 가치를 포기하는 대신, 우리가 가진 과학과 문명의 도구를 최대한 발전시켜야 하는가? 나를 포함해 원자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환경주의자들이 택하는 입장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서비스와 풍요를 누리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그 활용도를 더 높여야 한다.

현재 '탈원전' 논의에서 가장 잘못된 것은 2)에 속하는 이들이 3)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매도하는 일에 너무도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3)에 속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2)는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방사능 공포를 부추기면서,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벌어질 기후 변화의 충격을 나몰라라하는 이기주의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일종의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라고 할까?

에너지 사다리 걷어차기, 그리고 우리의 솥단지

우리가 누리는 풍요를 그들이 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환경주의의 이름으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우리는 개발도상국이 급격하게 화석 연료의 사용을 늘림으로써 기후 변화의 충격이 더욱 강하게 몰아치는 것을 수수방관해서도 안 된다. 결국 안정적이고 안전하게 기저부하를 공급할 수 있는, 현재로서의 유일한 해법인 원자력 발전을 더욱 확장하는 것만이 해법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누렸던 행운도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지만 선거를 통해 정당성을 재획득했고, 그렇게 얻은 정치적 동력을 바탕으로 영남권의 공업 단지에서 요구하는 전력 수요에 따라 해당 지역에 원자력 발전소를 대거 건설할 수 있었다.

오늘날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도시 거주민들은 원전의 공포를 이야기한다. 결국 문재인 정권의 급격한 탈원전 드라이브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표심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대체 왜 해당 지역에 그렇게 원자력 발전소가 빼곡히 자리잡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 지역에 대한민국의 핵심 중공업 단지가 몰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중공업 단지들의 존재로 인해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은 높은 경제 수준을 향유하고 있으며, 더불어 대한민국의 경제도 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고리1호기를 내팽개쳤다.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는 우리가 수십년 동안 밥을 해먹은 솥단지인 것이다.

아무리 원전이 싫고 미워도 그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말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24시간 생산해내는 원자력의 힘으로 대한민국은 가난을 극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스위치를 누르면 전기가 들어오고, 수도꼭지를 돌리면 물이 나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문명화된 삶을 누리고 있다.

선진국 환경주의자들의 이기적 폭력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러한 에너지 복지를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전지구적 기후 변화가 세계인들의 거주지를 뒤흔들고 건강과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지금, 원전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근시안적인가.

무턱대고 방사능의 공포를 외치며 반대하는 그런 식의 환경주의는 1960-70년대 가장 풍요롭고 잘 살던 미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너무도 당연했기에 그들은 자발적 가난을 칭송했다. 단 한 번도 굶주려본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거리낌없이 녹색혁명을 비난하고 화학비료의 사용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환경을 위해서는 인류의 숫자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멜서스주의적 세계관 역시 그 무렵 환경주의자들이 유포한 것이다. '인구 폭발'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도덕적 당위인 양 포장되면서, 서구의 임신중절기술이 한국, 중국, 인도 등의 개발도상국에 도입되었으며, 그 결과 무수한 여아들이 선별낙태당했다.[1] '에너지 사용을 늘리지 말고 인구를 줄이자'는 발상은 이토록 반인륜적이다. 줄어드는 '인구'는, 당연히,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자들은 반성하고 있다. 〈판도라의 약속〉에 출연한 마크 라이너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통스럽게 실토한다. 환경주의자들이 무턱대고 원자력에 대한 증오심만을 불러일으킨 결과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력발전의 공해로 목숨을 잃었다고. 환경주의자들은 그러한 판단 착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더 이상 원자력혐오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한 사람, 1960-70년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창시자 중 하나인 스튜어트 브랜든은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도시화를 반대하고 시골 생활이 좋다고 떠들어댔습니다. 정작 시골에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는, 내가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환경주의자가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원전혐오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을 직접 만들어낸 사람이기에, 그것을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또 바꿀 수 있었으리라.

지구를 위해 인간이 노력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는 그 방법론이다. 모두가 골고루 가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또 세계적으로,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가사노동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라면 냉장고를 없애고 이웃끼리 음식을 나눠먹자는 소리를 할 턱이 없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환경을 걱정한다면서 사람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그런 환경주의에 나는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이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환경주의 말이다.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떠냐'고 으스대거나 '에어컨 안 틀어도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가진 자의 여유일 뿐이다. 그 몇 푼의 전기요금도 내지 못해 여름에는 헐떡이고 겨울에는 덜덜 떠는 그런 이들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와 에너지 정책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건 보수라고 생각하건, 더 많은 이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환경주의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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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구 폭탄'론의 유포, 아시아권을 향한 서구의 산부인과 기술의 급속한 전파, 그로 인한 여아 선별 낙태에 대해서는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를 참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서평은 「주간경향」 1151호(2015.11.17)에 게재되었으며, 이곳에서 확인 가능하다.

2017-07-28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책을 쓰는 사람, 책을 외우는 사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 있을까? 본인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고민하여 판단한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어떤 결정이 내려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이 한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어떤 '경전'을 잘 외우고 지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일 뿐이다.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에 넘어왔을 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렇다. 주자학은 중국 내에서 지배 이념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지만 얼마 후 부흥한 양명학의 비판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의 지적 흐름도 그에 따라 변했다. 그리고 중국의 학문은 고증학으로 넘어가, 청 제국의 말기에 이르면 유교 문헌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판적인 문헌 비평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그 중국 고전을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느냐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조선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는 이미 '유행'이 끝난 주자학의 해석을 놓고 당쟁을 벌이고 지배 계급끼리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조선 밖의 세상에서는 해상 국제 무역이 출현하고 일본 및 중국은 서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옛날 책'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셸런버거? 그게 누군데?'

스스로 생각한 자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탈핵이 아니라 더 많은 원자력 발전을 요구하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되짚어보며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미국의 환경 단체 '환경 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마이클 셸런버거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향해 탈핵 정책을 철회해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및 기고를 통해 한국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부터 생각해보자. 적지 않은 문재인 정권 지지자, 네티즌, 그리고 환경단체 운동가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셸런버거? 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은 누군데?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체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상식적인 대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셸런버거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의해 2008년 '환경 영웅'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서명을 한 인물들 중 온실가스 감축 운동의 선봉장인 미 항공우주국(NASA)출신 기상학자 제임스 핸슨(James Hansen)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조차, '너는 듣보잡이고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핵발전소 옹호론자일 뿐이다'라는 편견의 벽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가차없이 '듣보잡' 취급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핑커 역시 해당 공개 서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객관적인 숫자와 자료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고민하며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미 맹목적인 반핵 운동을 접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늘리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한 사례다.


원자력 발전: 가이아 여신을 위하여

실제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현재 원자력 발전을 더 개발하고, 그 이용을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고, 다들 너무도 잘 아는 이름이기에 깜짝 놀랄 사람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부터 꼽아보도록 하자.

'가이아 이론'.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정규 교육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니 말이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생명체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발상으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72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임스 러브록은 2004년, 영국의 신문 〈인디팬던트〉(Independent)에 한 편의 기념비적 칼럼을 기고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 러브록: 원자력 에너지는 유일한 친환경 해법이다(James Lovelock: Nuclear power is the only green solution)

러브록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기후 변화가 초래할 엄청난 재앙을 고려해볼 때,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우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24시간 돌아가는 기저전력을 공급하며,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고, 폐기물의 양도 석탄에 비해 훨씬 적다. 따라서 기후 변화의 재앙 앞에 직면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 칼럼이 공개된 후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세계관의 창조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핵심 교리 중 하나를 부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것을 계속 믿기로 했다. 제임스 러브록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대다수 환경주의자들의 관성적 사고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

그러한 고정관념에 다시 한 번 돌을 던진 사람이 등장했다. 영국의 환경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도 『도둑맞은 세계화』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그는, 2011년 4월 5일 영미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보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의 지면을 통해 환경주의자들의 격분을 자아내는 칼럼을 발표한다.

"반핵 로비 단체들이 우리 모두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The unpalatable truth is that the anti-nuclear lobby has misled us all)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반핵 로비 단체들이 과장하고 부풀려온 대표적인 사례로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 수를 지적한다. 탈핵론자들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진실은, 핵방사능 효과에 관한 과학위원회(UNSCEAR, United Nations Scientific Committee on the Effects of Atomic Radi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Of the workers who tried to contain the emergency at Chernobyl, 134 suffered acute radiation syndrome; 28 died soon afterwards. Nineteen others died later, but generally not from diseases associated with radiation. The remaining 87 have suffered other complications, including four cases of solid cancer and two of leukaemia.
체르노빌 원전을 봉쇄하기 위해 투입된 인부 중 134명이 즉각적인 방사능 피폭의 영향을 받았다. 28명이 곧 사망했다. 19명이 추후 목숨을 잃었지만, 대체로 방사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나머지 87명은 그 외의 복합적 증세를 겪었는데, 네 명은 고형암(solid cancer)에 걸렸고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만큼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려면, 격납 용기도 없이 폭발한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정도의 일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사고 체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계속 그러한 오해를 증폭시키며, 자기들끼리 인용하여,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를 보라고! 당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많은 국내의 환경주의자들과 그들이 증폭시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지 몬비오는, 심지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지 고작 열흘이 지난 시점, 역시 〈가디언〉을 통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정론을 말했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Why Fukushima made me stop worrying and love nuclear power)의 마지막 문단이다.

Yes, I still loathe the liars who run the nuclear industry. Yes, I would prefer to see the entire sector shut down, if there were harmless alternatives. But there are no ideal solutions. Every energy technology carries a cost; so does the absence of energy technologies. Atomic energy has just been subjected to one of the harshest of possible tests, and the impact on people and the planet has been small. The crisis at Fukushima has converted me to the cause of nuclear power.
그렇다, 나는 여전히 원자력 업계의 거짓말쟁이들을 혐오한다. 그렇다, 만약 무해한 대안이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 기술에는 댓가가 따른다. 에너지 기술의 부재에도 댓가가 따르고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가장 가혹한 시험 중 하나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이 사람들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작았다. 후쿠시마 사태는 나를 원자력 발전의 옹호자로 개종시켰다.

물론 그 사고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피해야 했다.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수십만의 이주민은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 아니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방사능의 누출 그 자체로 발생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근 인기 예능 〈알쓸신잡〉에서 이른바 '어용 지식인' 유시민 작가도 유포했던,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일본국민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지진 및 쓰나미 피해자와 원전 사고 피해자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혹은 구분하지 않는, 거짓말일 뿐이다.


환경주의자들의 '선택적' 공감과 우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6도의 멸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진 저널리스트 겸 환경운동가 마크 라이너스(Mark Lynas)역시 원자력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6도의 멸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높았던 시점을 연구한 고고학/고생물학 논문들을 전부 뒤지고 스크랩하여, 우리가 다가올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경우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설득력있게 제시한 바 있다.

지구기온이 4℃ 상승하면, 해수면이 0.5미터 이상 높아지면서 이 대도시도 긴 수명을 다할 것이다. 오늘날도 도시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 21세기 후반에는 치명적인 침수가 시작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이 했던 연구에 따르면, 2050년이면 해수면이 50센티미터 올라가 150만 명이 살던 곳을 버려야 하며, 350억 달러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한다. 나일 강 삼각주의 넓은 지역이 바다에 잠기면 로제타나 포트사이드 같은 도시의 시민 수백만 명도 집을 떠나야 한다.[204-205쪽]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하는 방법, 피하지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탄소 배출을 급격하게 줄이는 것 뿐이다. 그러자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너무도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환경주의'에 흡착되어버린 '탈핵'의 망령의 힘이 너무도 거세다. 더욱 끔찍한 것은, 해외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여 입장을 변경한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일종의 교조적 이념이 되어버린 환경주의가 국가 정책을 뒤흔들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히피들의 구루, 원전 전도사 되다

무조건적인 탈핵이라는 이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섭냐 하면, '환경주의'라는 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반박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을만큼 완강하다. 공자가 직접 나타나서 논어를 다시 해석해주는데도 조선의 유생들이 '그것은 진정한 공자의 뜻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10년 2월, TED 토론에서의 일이다.

나는 실제로 그 잡지를 본 적 없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때문에, 한국의 식자층들 중 많은 이들은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받았다는 바로 그 잡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원류라는 바로 그 잡지 말이다. 그리고 그 잡지를 창간한 환경주의의 대부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1968년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했던 스튜어트 브랜드가 2000년대에 원자력 발전을 옹호한다. 반면 그렇게 태어난 환경주의를 책으로 공부하거나 귀동냥으로 듣거나 그저 막연한 불안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일단 원전을 없애고 봐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토론을 볼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논적으로 등장한 마크 제이 제이콥슨은 모두 탄소 변화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한다. 나는 당연히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주장 가운데 '풍력 발전이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좁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력발전기는 단지 막대가 꽂힐 땅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날개가 돌아감으로써 조류들을 죽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공해 원인이기도 하니 말이다.


탈핵론자들의 공포 마케팅, 청와대를 홀리다

아무튼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을 동치시키는 공포 마케팅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하냐하면, 스튜어트 브랜드와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토론에서 처음에는 75:25로 원자력 발전의 손을 들어주었던 청중들의 태도가 바뀌어 65:35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공포'는 힘이 세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 가운데 10%는 오히려 핵탄두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의 생산이 아니라 해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해도, 이미 들쑤셔진 '공포 마케팅'은 잠들지 않는다.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해가 가리면 발전이 안 되는 태양광, 바람이 멈추면 발전이 안 되는 풍력만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발전기가 필요한데, 지형의 한계상 수력 발전으로 그것을 충당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선택은 화력 아니면 원자력 뿐이다. 그리고 둘 중 더 '환경적'인 선택은 당연히 원자력이고 말이다.

환경주의자는 당연히 원자력에 반대해야 한다는 어떤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심지어 '유령'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굉장히 힘이 세다. 얼마나 힘이 세냐면 환경주의의 창시자가 입장을 바꿔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원자력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환경주의자들이 원자력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원자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인류에게 100년 후의 미래는 없거나, 매우 불투명하다. 선각자들은 일찌감치 경고를 시작했고, 지난번에 언급한 빌 게이츠처럼, 그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공포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

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환경주의자'라고 할만한 어떤 활동 내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해외의 환경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늘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왔으며, 그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면에서 나름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맹목적인 탈핵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고 말이다.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해보자.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반면 남이 했던 주장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그 입장을 바꾸는 순간 본인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주의자들은, 진보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 변화 앞에, 그리고 한국의 좁은 땅이라는 선천적 한계 및 기저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태양광 및 풍력의 태생적 제약에 대해, 그들은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는가. 그저 〈녹색평론〉을 비롯한 몇몇 환경주의자들만의 회람 목록에서 맴돌고 있을 뿐 아닌가. 우리는 과연 〈판도라〉라는 영화 한 편이 나라의 미래와 관련된 논의를 뒤흔들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은 것인가.

탈핵 중심의 환경 운동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그 생각을 버렸다. 우리가 그 고정관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스스로 생각하자.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생각을 바꿔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17-07-21

미래 세대를 위한 에너지 정책

미래 세대를 위한 탈핵?

'미래 세대를 위해 탈핵을 해야 한다!' 탈핵 찬성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다면 그 해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원전에서 생산되는 핵폐기물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미래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탈핵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때 '청년 논객'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탈핵을 주장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대비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미래를 들이대며, 정작 미래 세대의 앞길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10만년 폐기물이라는 패배주의적 협박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을 접어두고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하게 보관되어야만 한다는 시간 10만년.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참고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2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0만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 단위가 아니다. '고고학적' 혹은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원자력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여 인공적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것은 1942년.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고작 7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엄청난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라. 라듐을 추출한지 44년만에 인류는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70여년만에 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의 반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10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10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 발전도 하고 폭탄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우리 인류가 10만년이 더 흐르는 동안 멸망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지구에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시점에 방사성 폐기물 따위가 문제거리로 남아있을까?

10만년 운운하는 것은 그러므로 협박이다. 무슨 협박인가?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 말이다.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10만년동안 사라지지 않는 폐기물에 대한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협박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빌 게이츠도 '원전 마피아'에게 매수당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 전 지구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석 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할 수도 있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중을 더 높일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는 기술적 제약이 존재한다.

포집된 탄소의 부피는 방사성 폐기물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에너지 밀도가 너무 낮아서 굉장히 넓은 땅에 발전기를 깔아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공해 요소가 된다. 결국 좁은 면적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해법은 원자력 뿐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해답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2010년 2월, TED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제로 탄소를 향한 혁신!'이다. 2050년 인류가 발생시키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려면 원자력 발전의 대 혁신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7분 정도 시간을 내서 강연과 질의응답을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진행파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는 MIT가 2009년 세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한 바 있는 '오래된 미래'다.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사용되는 원자로는 U-235를 분리하여 연료로 사용하는데, 그 분리 과정에서 U-238 혹은 열화우라늄이 발생하고 방사성 폐기물로 처리된다. 반면 진행파원자로는 바로 그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열화우라늄에 증식파(Breeding Wave)를 쏘아서 플루토늄-239로 증식시킨 후, 이후 발생하는 연소파(Burning Wave)를 이용해 Pu-239를 핵분열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진행파원자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한번 연료를 넣으면 최장 60년까지 발전소가 가동된다. 플루토늄까지 완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남는 폐기물들은 안정적인 비방사성 물질, 그리고 독성이 약해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방사성 물질들 뿐이다. 그리고 그 폐기물을 그대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 60년의 기간 동안 연료를 추가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훨씬 적다. 말하자면 꿈의 원자로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이다. 아직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속증식로를 개발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런 형태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에너지를 쓰는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2011년 이후에도 빌 게이츠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호이자 자선사업가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이고,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vs.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의 탈핵 정책.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 양쪽 모두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구체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탈핵 논의는 '하지 말자'고 주저앉는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 어떤 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진행파원자로가 과연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지, 언제쯤 가능한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이 글은 진행파원자로라는 특정한 기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의 탈핵 논의는 과학 이전에 세계관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믿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미래의 에너지를 연구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빌 게이츠처럼, 에너지와 원자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난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방사성 폐기물의 '10만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적어도 그 반감기가 다 채워지기 전에 말이다. 우리가 '원전 마피아'를 향해 공허한 손가락질이나 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포함해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며 믿음직한 원자로를 개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비싸게) 판매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10만년이라는 공허한 단위를 놓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정작 미래 세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킬 것이다.

10만년이 아니라 향후 10년부터 걱정하자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위는 10만년이 아니다. 10년이다. 그리고 100년이다.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기후 변화가 임계점을 넘는다면 10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전 인류적 과제다.

한편 우리에게는 1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탈핵 정책이 추진된다면,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인력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10년쯤 지나면 다방면으로 그 충격이 밀려오게 된다.

빌 게이츠는 2012년 원전 기술 강국인 대한민국과 4세대 원전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2014년 협상이 결렬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점까지는 우리나라가 빌 게이츠와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탈핵 결정 후 10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 타령을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게 된다. 10만년 운운하다가 10년 후의 부와 풍요, 안정된 세상을 놓친다. 100년 후의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숙하고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대신,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주저앉으면서 '미래'를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가 미래를 먼저 만들자

현재의 탈핵 논의는 기술과 과학 이전에 세계관의 투쟁이다. 새로운 힘, 물론 두렵지만 통제 가능한 에너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의사결정권자들, 환경주의자들과 여당 지지자들은 마치 척화비를 세우고 꽁꽁 문을 걸어잠그던 위정척사파처럼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동안, 빌 게이츠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원전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선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0만년 동안 남는 폐기물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폐기물까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진취적인 미래를, 우리가 먼저 만들자는 말이다.

2017-07-14

한산모시, 세탁기, 에어컨

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

2017-07-12

전기를 아끼는 나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문재인 대통령이 탈원전 선포를 해버리면서 에너지 전환이 주요 정치적 논점 중 하나로 부상했다. 본디 국가적 논의가 필요한 사안이긴 하나, 정치적 지지와 호오에 따른 입장의 차이가 해당 논점을 파악하고 입장을 세우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체로 기존에 '진보'로 여겨지던 진영에서는 탈핵에 찬성하며, '보수'는 탈핵에 반대하거나 신중론을 편다.

지금껏 '진보 논객' 소리를 들어왔지만 나는 지금처럼 기습적으로 선포된 탈핵 논의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논의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이다. 한국수력원자력에서 발주한 공사를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엎어버리는 것이 법적 절차를 무시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다는 것이다.

탈핵 찬성론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이다. '전기요금이 오른다고? 까짓거 한 달에 전기요금 만 원 더 내고 핵발전소(꼭 이렇게 부른다, 핵무기를 연상시키기 위해) 없는 세상에 살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해보자. 현재로서도 그 '단돈 만원'의 전기요금을 내지 않기 위해 무더위를 온몸으로 견디는 취약계층이 있다. 전기요금 내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선풍기 트는 것도 아쉬워하는 에너지 빈곤층이 2016년 기준으로 130만 가구를 넘었다. 이들 앞에서 '까짓 전기요금 좀 오르면 어때' 같은 소리는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크게 다르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산업용 전기료만 오르면 괜찮다?

그러면 대체로 이런 반론이 돌아온다. '산업용' 전기요금만 많이 올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공약대로 탈핵을 추진할 경우 2030년 가구당 전기료가 연간 31만4000원 인상될 것이라는 정유섭 자유한국당 의원의 주장에 반박하는 기사를 읽어보자.

정 의원의 자료만 봐도 ‘연간 전기요금 31만원 인상’이라는 말은 과장이다. ‘31만원’은 산업용, 상업용, 주택용을 모두 합친 금액이다. 용도별로 나눠보면 산업용 전기료는 1320만7000원가량 인상된다. 하지만 주택용 전기료의 인상폭은 연간 6만2000원, 월간 5200원에 불과하다.

백철, "탈핵하면 전기료 폭탄 떨어진다는 가짜뉴스에 대하여", 경향신문, 2017년 7월 8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www&artid=201707081514011&code=940100

저 대목을 읽고 '아, 가정용 전기요금은 고작 한 달에 5000원 오르니까 괜찮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업용 전기료가 무려 1320만원 이상 오른다는 것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물론 대한민국은 산업용 전기료가 지나치게 낮은 나라다. 너무 전기값이 싼 나머지, 심지어 제철소에서도 용광로보다는 전기로를 선호한다. 그 편이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저러한 주장은 '재벌'에 대한 분노와 맞물려, '저들'에게 '고지서 폭탄'을 날리고픈 감정선을 건드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산업용 전기는 재벌 대기업만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상업용 전기료도 따라서 오를 수밖에 없다. 집에 에스프레소 머신을 구비한 사람들 중 적잖은 이들이 그것을 중고나라 등에 매물로 내놓는다. 왜냐하면 전기요금이 심각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까페에는, 제아무리 '자그마한 동네 까페'여도, 그런 전기 먹는 괴물이 적어도 한 대 이상 있다. 만약 산업용 전기요금이 연간 1320만원 이상 오른다면 상업용 전기를 사용하는 '자그마한 동네 까페'들은 무사할까?

삼성전자도 동네 까페도 전기를 쓴다

'가정용' 전기는 '우리편'이고, '산업용' 전기는 '남의 편'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소규모 도자기 공방은 설비의 용이성과 편리성 때문에 가스가마가 아닌 전기가마를 운용하는 경우가 있다. 가정용이건 상업용이건 산업용이건, 전기 요금 인상의 직격타를 맞는다. 업무에 따라서 많은 양의 데스크탑을 사용하는 개인 개발자 프로그래머 등도 결국 전기요금 인상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이 오르는 것은 지금껏 배불리 먹고 있던 '재벌 밥그릇 빼앗기'니까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낮에는 산업용, 상업용 전기를 써가며 일을 하고, 밤에는 가정용 전기를 사용하는 집에서 쉰다.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을 뒤로하고 연일 승승장구하는 삼성전자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직접 소유하고 경영하는 기업인 키친아트도(참고로 나는 자주 쓰고 바꾸는 후라이팬 류는 꼭 키친아트에서 구입한다) 산업용 전기를 쓴다. 세상에 '나쁜 기업'에게만 미사일처럼 콕 박히는 전기요금 인상 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지금 한국의 굉장히 낮은 산업용 전기요금이 전적으로 옳고 훌륭하며 영원히 유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용 전기와 달리 산업용 전기는 요금이 올라도 된다는 식의 나이브한 주장이 얼마나 맹목적인지, 그에 따라 옳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논증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업 그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기업의 이익과 성장을 독점하는 일부 '오너'들과, 그들의 전횡을 수수방관하는 사회 시스템이 문제다. 아마 이 주장에는 대부분의 진보 진영 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재벌과 대기업이 밉다는 이유로 산업용 전기료가 폭등해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출할 수밖에 없는 고정비용으로서의 전기료 인상은 대기업보다 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 및 소상공인들에게 더 큰 타격을 안겨줄 것이 너무도 명백한데 말이다.

이게 다 단군 할아버지 때문이다

전기요금은 장기적으로 볼 때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건 지금 너무 저렴하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현실을 생각해보자. 단군 할아버지가 부동산 계약을 할 때 사기를 당했던 건지, 여름에는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리고 그 와중에 습도가 6-70%대를 찍는다. 겨울에는 반대로 영하 10도까지도 우습게 내려간다. 여름에는 킨샤샤보다 덥고 겨울에는 모스크바보다 추운 날이 적지 않다.

이런 나라에서 전기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고, 그 위에 재벌 대기업에 대한 적개심을 끼얹어, 문재인 정권의 앞뒤 가리지 않는 탈핵 선언을 옹위하려 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공공기관 실내 온도를 28도로 제한하는데 나라의 뇌가 푹 익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봄에는 미세먼지, 여름에는 폭서와 습기, 가을에도 미세먼지, 겨울에는 혹한.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이렇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기를 아껴야 한다는 당위를 내거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전기를 아끼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2016년에 폭염으로 무려 17명이 목숨을 잃은 나라에서, 공무원과 공공기관 근무자들은 28도에 맞춰진 에어컨 때문에 낮에 더워서 일도 못하고 헤롱거리다가 야근을 하게 되는 이게 정상인가?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 권리가 있지 않을까?

여름에는 열사병으로 목숨을 잃는 취약계층은 겨울에는 또 가스비를 내기 어려워서 전기장판 하나로 목숨을 부지한다. 에어콘을 꺼요, 냉장고가 없으면 음식이 빨리 상해서 이웃과 사이좋게 나눠먹게 되네요, 선풍기 하나면 충분해요 같은 소리는 이미 충분히 잘 만들어진 집에 살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찍찍 내뱉는 배부른 비윤리적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탈핵 논의는 굉장히 이상한 방식으로 정치화되고 있다. 박근혜 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 때문에 에어컨을 끄고 땀흘려 고생하라는 식이었다면, 문재인 정권 시절에는 그 자리를 환경 담론이 차지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정권이나 저 정권이나, 퇴행적인 '에너지 절약'이라는 거짓 당위를 앞세워 냉철한 논의가 설 자리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다.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고생한다며 정부에서 130억을 들여 택배 자동화 기술을 개발하기에 앞서, 모든 택배 상하차 기사들이 쉬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그 쉬는 시간에는 에어컨이 틀어진 휴게실에서 쉴 수 있는 여건을 먼저 만들어주는 나라 말이다.

저렴한 전기료가 우리의 실생활과 상관 없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값싼 전기를 '사람'이 아닌 '기계'에만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의 가장 긴 시간을 직장에서 혹은 각자의 일터에서 보낸다. 일하는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 그 어떤 나도 행복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전기료의 급격한 인상은 일터의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전기를 사람이 쓰는 것, 사람의 몸이 편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이런 논의가 동반되지 않는 한 전기요금과 관련된 현재의 논의는 극히 퇴행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에 에어컨을 28도로 고정시키는 정부와, 아파트 경비실에 설치된 에어컨을 틀지 못하도록 하는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결국 '전기를 아끼는 게 개인의 고통보다 중요하다'는 박정희 시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 자리에서 쫓아낸 지금도 그 망령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니, 이제는 친환경 탈핵 탈원전이라는 새로운 망토를 두르고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전기가 아니라 사람을 아끼는 나라에 살고 싶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탈핵 탈원전의 당위를 무턱대고 앞세우는 대신, 보다 냉철하게 향후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여름이 되기를 바란다.



* 일러두기: 본문의 부정확한 서술을 수정했습니다. 2017년 7월 12일 오후 5시 20분.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온갖 논쟁을 보거나 참여해온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PC 통신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최근 『괴짜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뉴욕타임즈 출신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더브너(Stephan J. Dubner)의 신간 SuperFreakonomics가 출간되면서, 바야흐로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보다 큰 규모의 키보드 대전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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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2009-07-23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커다란 이슈에 맞서는 작은 민주주의

미디어법이 통과되어버린 이 시점에 ‘작은 민주주의’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왠지 부적절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또한 한나라당에 의해 저질러져버린 미디어법 개정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이 지면의 존재 이유는 그것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1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3리터의 물이 소요된다. 1리터는 병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2리터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그 물을 슈퍼마켓까지 운반하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250밀리미터의 석유가 필요하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생수만큼 식수를 비효율적으로 생산•운반•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국내에서는 한나라당에 의해 수돗물을 병에 담아서 파는 것을 허용하는 방침이 추진되고 있지만, 해외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시민들이 생수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의 New South Wales 지방의 한 마을인 분다눈(Bundanoon)의 350여명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서의 투표를 통해 생수를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BBC는 ABC의 보도를 인용하여, 오직 한 사람만이 금지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사람은 생수 업체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대체 왜 주민투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일까? 시드니에 위치한 한 생수 업체가 분다눈 인근의 수원지에서 물을 가져다가 생수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분다눈에 판매할 것이라는 계획이 주민들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 물을 퍼다가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그런 경우 생수 자체를 금지할 필요는 없다. 수자원 사용에 대한 보상금을 타낸다거나, 이익금의 일부를 지역사회에서 받아가는 식으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다눈의 주민들은 생수 자체에 대한 전체적인 금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브랜드의 생수 뿐 아니라 모든 생수의 유입과 판매를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생수가 환경 파괴에 일조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구적인 이슈에 맞서는 한 지역의 작은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우르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수아레즈(Suarez)에서는 마을 광장의 가로등을 LED로 전부 교체했다. 이것 역시 지역 의회에서 결의하여 추진된 일이다. LED 가로등은 일반 가로등에 비해 70에서 최고 90퍼센트까지 에너지 효율이 높다. 게다가 그 가로등 위에는 태양 전지 패널이 부착되어 있다. 낮동안 내리쬔 햇빛으로 밤의 거리를 밝히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에너지 위기에 맞서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지역 의회가 앞장서서 고효율 에너지 소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이 친환경정책과 더불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BBC는 한 지역 의회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아레즈가 LED 가로등 완제품을 수입하는 대신 부품만을 수입하고 그 조립은 인근 업체에 맡김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고, 동시에 전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며, 그 과정에서 ‘작은 민주주의’를 하나씩 실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7월 22일 한나라당에 의해 ‘민주적’으로 통과된 미디어법과 금산분리법 등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계는 지금 전 지구적 이슈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특정 재벌 및 언론사가 방송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모든 정치적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작은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국회 점거와 질서유지권 발동 따위만 난무한다. 더운 여름, 어지러운 정국이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민주주의는 국회만의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지구적 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적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들의 작은 민주주의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