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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4

퀸스 갬빗, 혹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유감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또 재미없다. 퀸스 갬빗도 예외는 아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창작물들은 늘 그렇다. 데이빗 핀처라는, 이미 닳고 닳은 거장이 만드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다.

그 재미없음에는 특징이 있다. 작품 속에 제대로 된 갈등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퀸스 갬빗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반응을 보면 '이 이야기에는 악역이 없어서 좋다'는 소리들을 한다. 하지만 악역이 없는 것과 갈등이 없는 것은 다르다. 이건 악역이 없는 게 아니라 갈등이 없는 것이다. 그냥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체스하는 모습'만, 적당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정도의 서사 위에 얹어놓은, 스틸컷 모음집이다.

퀸스 갬빗처럼 '잘못된 장소와 시간에서 특출난 재능을 지닌 자'의 이야기를 다룰 때, 사실 악역은 없어도 된다. 무거운 혹은 무서운 재능에 시달리는 존재는 스스로가 이미 주변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악당일 수밖에 없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세상도 그의 존재로 인해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절대 고립의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혹은 그 절대 고립의 감정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 이것이 '동떨어진 천재물'의 핵심 갈등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그런 갈등의 설정에는 꼭 악당이 필요하지가 않다. 가령 체스물의 걸작인 '위대한 승부'(Searching for Bobby Fischer, 1993)에서 잘 다루고 있는 바와 같다. 미국의 체스 신동(이었던) 조쉬 웨이츠킨의 실화를 다룬 이 작품은, 스스로 체스 규칙을 익히고 미국 챔피언십을 순식간에 뚫어낸 천재소년의 유년기를 다룬다. 

부모는 처음에 자식이 지닌 천재성 때문에 행복해하지만, 곧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부모인 스스로가 자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조쉬 역시 부모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엄청난 고립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네추럴 본 지니어스' 물의 핵심 갈등이다. 누구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여기에는 따로 악역이 필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규격에서 벗어난 천재 자체가 애초에 인간 세상에 끼어든 옥의 티 혹은 티의 옥 같은 존재이므로, 그의 존재 자체가 갈등이다.

그런데 퀸스 갬빗을 비롯한 최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은 어떤가? 뭔가 '특별한'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들이민다. 그런데 그 특별한 존재들이 자신의 특별함 때문에 겪게 되는 특별한 고통을 냉철하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적당하고 평범하고 '무해한' 성장물로 편입시켜버린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몇몇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또 떠오르지만 일일이 다 거론하지는 않겠다. 하나같이 똑같은 패턴이니 말이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과 사건을 이끌어가는 대신, 적당히 예쁘고 귀엽고 보기 좋은 인형을 몇 개 만든 후 거기에 설명서만 붙여놓는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적어놓고 보니 내가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가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성공적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제 발로 일어설 수 있는 캐릭터를 안고 있었다. 최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은 그렇지 않다. 뭔가 잘못된 트렌드가 오늘날의 창작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20-11-23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운폴>을 보았습니다

<히틀러 최후의 14일>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다운폴>을 보았습니다.

요아힘 페스트는 

  1. 나치가 완전 미친놈들인 건 맞지만 거기에 장단 맞춘 평범한 독일인들도 못지 않았다. 피해자인 척만 하지 마라 좀.
  2. 히틀러를 '인간도 아닌 악마!'로 말하면 1 같은 자기 변명을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히틀러도 인간이긴 했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사악해질 수도 있다.
  3. 나치는 애초에 근본 사상이 썩어서 망한 거다. 전쟁하면서 계속 멸망과 죽음을 예찬하는 미친놈들이었다. 일말의 미련을 갖지 마라.

와 같은 입장에서 나치 및 히틀러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한 독일의 언론인 출신 역사 저술가라고 하겠습니다.

영화는 그 책의 논지를 잘 따라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하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애도'가 되어버리는 예술의 내재적 한계 혹은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 히틀러'를 배우가 공들여 연기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추모 아니냐, 이런 비판이 가능하고 그런 방향에서 비판도 많이 받은 작품입니다.

아무튼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묵혀두고 있다가 봐서, 가볍게 기록을 남겨봅니다.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고, 회원가입하면 아마도 한달 무료일 겁니다.

다운폴(2004)

2020-05-05

Planet of the Humans (1)

마이클 무어가 제작한 ‘Planet of the Humans’를 방금 다 보았다. 아무렇게나 순서 없이 일단 적어놓는 감상.

미국 민주당 계열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빌 매키번, ‘지구가 아프다 다큐’로 뭔가 큰 상도 받았던 미국 전직 부통령 앨 고어, 민주당 대선 주자로 경선에 뛰어들었다가 돈만 쓰고 그만둔 마이클 블룸버그 등, 쟁쟁한 인물들.

그들이 어떻게

  1. Green energy라는 구호를 내걸고 돈벌이를 하고 있는지,
  2. 자신들이 내세우는 구호와 biofuel(나무 썰어서 폐 타이어 등과 태우는 것)의 괴리를 얼버무리는지 
  3. 그 결과 지구가 어떻게 더 망가져가는지

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충격적인 작품.

나도 한때 열심히 follow up했던 350.org 같은 조직이, 결국 따지고 들어가면 엑손 모빌이나 도요타 같은 기존 화석연료 업계의 후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다큐를 다 보고 나면 놀랍지도 않은 수준.

각본과 감독을 맡은 제프 깁스(Jeff Gibbs)는 어린 시절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후, 이 다큐를 만들기 전까지 시에라 클럽의 맴버로서 열심히 활동해온 열혈 환경운동가.

그가 환경운동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당신들 바이오매스에 찬성하냐’고 물을 때, 다들 해맑게 ‘절대 안되지 우리는 친환경인걸!’ 하는 모습은 정말 가슴아프다.

가장 황당하고 꼴같잖은 장면. 우리는 흔히 가운데 탑이 있는 거대한 태양광 발전기가 100% 태양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아침 시동을 걸기 위해 가스발전기를 같이 설치한다고. (감독이 인터뷰한 환경 과학자는 그것을 ‘매일 아침 내가 일어나면 커피를 마셔야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과 같다’고 농담하기도.)

풍력발전기도 마찬가지. 태양광/풍력 시설을 늘리면 늘릴수록 가스발전기가 늘어나는 모습이 다큐에 생생하게 묘사된다. 하지만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환경운동가’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음.

아쉬운 점은 원자력에 대한 언급이, 한번 스쳐가듯 나오지만, 없다는 것. 탄소 배출을 줄이는 차원을 넘어 공격적으로 탄소 포집을 하려면 결국 답은 원자력 뿐이다.

아직 한국어 자막이 없는데, 영어 자막을 켜놓고라도 보시기 바랍니다. 꼭 봐야 할 2020년 최고의 문제작.


2020-01-25

빌 게이츠 vs. 트럼프 (그리고 문재인)

"정치가 끼어들 될 수 있다는 건 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우리 정부일 거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We always knew there would be politics involved. We never thought it would be out government."

망치를 잡은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빌 게이츠는 순순히 인정한다. 자신의 망치는 기술이며, 세상 모든 문제를 기술로 해결하려 한다고.

하지만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세상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승부처인 기후변화와의 싸움 앞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 를 3부까지 다 본 후의 소감이다.

3부는 빌 게이츠가 만든 원자력 벤처 기업 테라파워의 홍보 영상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그럴만도 하다. 사람들이 워낙 싫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정작 알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분야가 바로 원자력이기 때문이다.

테라파워에서 설계한 진행파 원자로는 지금까지 '핵폐기물'로 취급하던 사용후핵연료를 연료로 삼는다. 미 정부가 보관중인 '핵폐기물'을 연료로 쓸 수 있고, 지금껏 저장된 '핵폐기물'을 통해 미국 전체가 125년간 사용할 에너지 전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막대한 가능성 앞에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만큼 굉장한 일이다.

물론 본인이 개발한 아이템을 세일즈하는 사람의 말이긴 하다. 그러나 1) 인류 전체가 쓰고 남을 에너지를 공급하면서 2) 이산화탄소를 전혀 발생시키지 않고 3) 사고가 발생한다 한들 원자로가 자체냉각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개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빌 게이츠는 온갖 천재들을 끌어모았다. 그 중에는 <모더니스트 퀴진> 시리즈로도 유명한 네이선 미어볼트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직접 검색을 해보시라. 아무튼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의 입장은 확고하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이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원자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와 테라파워는 온갖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진행파 원자로의 개념 설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완료했다. 2015년 시진핑을 만나 중국에 대량 보급하는 계약을 체결했지만,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는 2017년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원전 생산의 생태계가 송두리째 파괴되는 중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다른 모든 발전소와 마찬가지로 인프라 건설 사업이다. 여기서 사업성이 맞으려면 생산과 소비에서 규모의 경제를 갖추어야 한다. 빌 게이츠가 생산과 소비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중국을 찾아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면 한국은, 중국처럼 막대한 양의 원자력 발전소를 소비해줄 수는 없지만,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있다. 테라파워에서 개발한 기술을 얼마나 공유하고 이전할지가 관건이긴 하겠으나, 적어도 현재 표준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경수로의 건설, 유지, 관리 등에 있어서 한국은 독보적인 나라다.

그러나 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정치가 발목을 잡고 있다. '원자력 마피아'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노정태부터 그레타 툰베리까지 모든 인류가 오래도록 안정적인 기후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짓밟고 있는 것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가치를 표방하며 당선된 문재인과, 노동계급의 불만을 들먹였지만 결국 미국 사회의 이주민 혐오를 무기삼아 당선된 트럼프는, 그 점에서 큰 교집합을 그린다.

지난번에 <인사이드 빌 게이츠> 1부를 보고 내놓았던 감상과 이 대목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 많은 문제들은 기술로 해결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정치로 수렴한다. 따라서, 천하의 빌 게이츠도, 정치라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인류 전체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탈원전은 철회되어야 한다. 순식간에 많은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집단이 인류의 공존공영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인사이드 빌 게이츠>는 우리에게 모종의 자아 성찰의 기회까지 제공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01-23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방금 보고 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단순한 레즈비언 연애물인 것처럼 시작해, 마치 유화처럼, 한 겹씩 한 겹씩 레이어를 덧입힌다. 그리하여 소박하면서 웅장하고, 섬세하면서 대범하며, 응시하지만 귀기울인다. 온갖 모순되는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꽉 차있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기생충>이 아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황금종려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칸느 심사위원들의 여성혐오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로 봉준호의 영화가 소비되고 말았다는 것까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블랙 코미디'를 이루는 것 같기도 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예술 형식으로서의 영화가 죽었다는 말이 헛소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가 왜 존재하는지를, 압도적이면서도 담담하게 입증한다.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말로도 벅차오르는 감동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20-01-01

작년의 영화: <우상>(2019)

<우상>은 <비밀은 없다>의 남매편(자매편x 형제편x) 같다. <우상>에서 성매매가 등장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은 <비밀은 없다>에서 디지털성범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두 작품 모두 결백하지 않은 인간들이 등장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야기.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 사람이 <우상>을 좋아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자를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후자도 적어도 '이해'는 하면서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평균적인 한국 관객의 영상 리터러시보다 기준점이 훨씬 높기 때문에 애초에 흥행은 불가능한 작품이다.

<비밀은 없다> 이후 한국 영화가 이렇게 '영화답게' 나온 것도, 글쎄, 내 기억에는 중간에 끼워넣을만한 작품이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요 사건 설정, 인물 구도, 기타등등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비밀은 없다>를 본 사람이라면 <우상>은 보고 나서 판단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싫음 말고...

참고로 나는 문제의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말죽거리 잔혹사>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 씨발~' 하더니, 결국에는 강남의 입시학원 다니는 게 결론이었던 그 영화. <우상>도 '대한민국 정의 도덕 다 좆까라 그래 씨발~'을 외치는데, 이쪽은 그따위 얄팍한 자기변명이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애초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한 게 잘못이었다. 왜 결혼했을까? 그 남자는 '전라도 출신 미녀'가 필요한 정치 지망생이었고, 연홍은 탑 스타가 못 될 것이 거의 확실한 가수(지망생)이다. 물론 사랑도 했겠지. 남자의 야망에 탑승해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싶었고. 근본적인 실수.

<우상>의 중식도 아주 근본적인 실수를 했다. 극중에서 아예 본인의 입으로 말을 해버린 그것일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건 비극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세팅. 두 영화 모두, 두 인물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가 없는 셈 치는 '터진 맹장'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터진 맹장'(참고로 이것은 영화와 완전히 무관한, 내가 방금 떠올린 은유다) 같은 걸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우상>을 안 보는 편이 나을 수 있고, 솔직히 본다 해도 뭐 이해가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를 따라갈 수 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 영화에서 댓글을 보니까 정말 '그 장면'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우상>은 어쨌건 '우상 파괴'에 성공한 것이다.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지금 말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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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남겼던 기록. 내가 작년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9-12-14

박하사탕(1999)

나는 이 영화가 개봉 후 한창 화제를 끌 때에도, 이창동이 영화감독을 넘어 문화부장관으로 승승장구할 때에도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KBS에서 매주 금요일 방송하는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을 통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돌아가고 싶다. 내가 <박하사탕>을 안 봤던 그 시절로.

<박하사탕>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줌의 윤리적 자의식도 보여주지 않는 영화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오프닝 크레딧이 뜰 때부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시간의 역순이라는 핑계를 대고 서사적 구성이 전혀 맞지 않는 '억울한 나님'들의 현란한 전시로 꽉 채워져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남들 때문이고, 여기서 그 '남들'은 대부분의 경우 여자이며, 여자 중에서도 특히 첫사랑인 순임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죽어라고, 정말이지 죽어라고, 여자 탓을 한다. 그가 80년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된 후 트라우마에 빠진 건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여고생 때문이다. 때문인가? 물론 영호의 자기 서사 속에서는 본인은 착하게 여고생을 집에 보내주고 싶었지만 뒤에 다른 군인들이 다가와서 쫓아내기 위해 허공에 총을 쏘다가 잘못 맞았다. 그러므로 영호는 피해자다. 영호가 피해자면 누가 가해자인가? '비극적인 현대사' 탓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났던 그 여자 탓이 없다고도 하지 않는다. 허공에 대고 총을 쏘는 그 쉬운 일조차 제대로 못 해놓고서(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사실, 순임이 겹쳐보이는 그 여고생을 영호가 일부러, 혹은 미필적 고의로 쏘아 죽인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나?) 세상 모든 고통과 아픔을 짊어진다.

그의 인생에 나타나는 회상과 반추가 모두 이딴 식이다. 1984년, 신참 형사가 된 그가 본격적으로 타락의 길로 접어든 것은 또 어떤가. 고참들이 강요해서 고문을 하다 손에 똥이 묻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첫사랑 순임이 자신을 찾아와, 영호에게 '착한 손을 가졌다'는 둥 그의 상처받은 마음을 들쑤시는 소리를 한다. 그래서 평소에 본척만척하던 식당 종업원 홍자의 엉덩이를 더듬는다. 순수한 영혼이 상처를 받아 일부러 위악적 행동을 하며 순수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한 행동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이창동이 만든 영호의 서사란 '나는 울고 싶은데 네가 나타나서 내 뺨을 때려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호가 삐뚤어진 것에는 순임의 탓이 있다.

잘 따지고 보면 영호는 죽을 때까지 순임 탓을 한다. 혹은, 영호가 죽은 것에는 순임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짜여져 있다. 대체 어떻게, 마치 고르고13처럼 생긴 순임의 남편은 영호가 인생 최악의 위기에 몰려 있는 그 시점에 영호를 찾아낸 것인가? 전날 밤까지 의식이 있었다던 순임은 대체 왜 영호가 자신을 찾아오자 의식을 잃었나?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영호는 이해받지 못한 상처받은 영혼'이라는 억울억울 열매의 재료일 뿐이다. 그래서 영호는 죽는다. 순임과의 추억이 어린 그곳에서.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100%의 네 탓으로, 100%의 억울함만으로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이창동은 그걸 해냈고, 특히 남자 관객들은 이 영화를 '크 캬 커' 소리를 내며 보았을뿐더러,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영화라는 둥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2000년대 초에 이런 영화를 보며 엄지척 눈물 주르륵 하던 남자들이 지금 한국 영화계의 어엿한 중견들이다. 한국 영화판에 온통 억울한 남자들이 가득하고, 다들 '씨-발'이나 외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시발점이 바로 <박하사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나는 돌아가고 싶다. 이 영화를 모르던 그 순수의 시대로. 하지만 이미 봐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영호라던가, 영호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1999년 무렵의 이창동과 달리, 나와 이 글을 읽을 당신은 스스로의 행위와 그 행위가 낳은 결과에 대해, 슬퍼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자신의 몫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윤리적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박하사탕>보다 더 나은 이야기를 보고, 읽고, 만들어가며 살아갈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2019-02-03

<로마>에 대해 이것저것

  • 당연히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1.

<로마>는 한 가정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식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떤 가족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서사의 중심에 선 인물은 식모로 일하는 클레오이지만, 작품의 눈높이는 어린 시절의 감독 본인에게 맞춰져 있다. 아마도 막내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

한국어로는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성체축일 대학살'이 언제인지에 대해서조차 알기 어렵다. TIME지의 기사에 따르면 1971년 6월 10일, 정부가 훈련시킨 깡패 집단인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 영어로는 Falcons(매))가 시위 현장에 투입되었다. 마치 다른 학생운동 정파인 것처럼 위장하여 살인극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클레오의 남자친구였고 그를 임신시킨 후 외면해버린 페르민이 티셔츠 차림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씨네21>은 로마를 마치 별도의 도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알폰소 쿠아론이 택한 영화의 재료는 1970년대 초 멕시코의 한 도시, 로마에서 살던 당시 3년간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사실 로마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내의 한 구역의 이름이다. 물론 나도 가본 적은 없지만, 구글 지도로 확인되는 정보만 놓고 봐도, 멕시코시티의 한복판에 위치한, 옆에 큰 공원을 끼고 있는 멋진 곳이다. 구글 지도의 스트리트 뷰로 둘러볼 수 있다.

2019년인데, 인터넷으로도 확인 가능한 정보를 찾지 않은 채 기사를 쓴다. 다른 이들은 그런 기사를 보고 베낌으로써, 한국어로 유통되는 정보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지겹다.


3.

그래도 국내에 나온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 도움이 되긴 한다. 가령, 알폰소 쿠아론 본인이 직접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타일이 깔린 바닥을 보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클레오가 물을 붓고 청소를 한다. 어떤 곳에는 물이 고이고 다른 곳에는 물이 빠진다. 거품이 일어나고 부서지고 흘러간다. 고인 물 위로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가 비춰 보인다. 이 단순한 쇼트부터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것만 두 시간을 보고 있어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 지경이다. 물, 그림자, 거품. 극도로 단순한 구성 요소들을 섬세하게 담아낸 화면이 실로 압도적이다.

<로마>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마스킹(영사기가 빛을 쏘지 않는 스크린을 암막으로 가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스킹이 없다면 화면 바깥에서 허옇게 빛이 일어난다. 극중의 1970년 12월 31일 밤 11시 무렵 발생한 산불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알폰소 쿠아론 본인이 연거푸 강조했다시피 이 영화는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관람해본 결과, 그 말이 사실이었다.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은 전방 뿐 아니라 측면과 후방, 심지어 극장의 지붕에도 별개의 스피커를 설치하여 바닥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사운드를 제공하는 방식인데, 영화를 보면 마치 <로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로마>는 멕시코시티를 주요 무대로 삼는 작품이며, 멕시코시티는 소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카메라가 찍어낸 화면 뿐 아니라 마이크로 담아낸 사운드를 통해서도 관객을 압도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멕시코시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을 담아낸 후 그것을 다시 설계하여 배치하는데, 다른 극장에서 볼 경우 이런 감상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집에서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의 어머니 소피아가 큰 차를 몰고 가다가 어떤 소음을 만들어내는데,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극장에 앉아있으면 그 고통을 거의 온전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작품의 결말이자 하이라이트인 대목에서 몰려오는 파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로마>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알폰소 쿠아론은 아주 소박한 소재를 통해 엄청난 숭고의 체험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비전을 갖고, 확고하게 실행에 옮겨, 성공했다.


4.

그런데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제공하는 숭고의 체험에 압도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관객인 나에게 숭고함을 느끼게 하려 했다'는 사실만큼은 절감했고, 이렇게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장악하려 드는 영화를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경탄했다. 하지만 나는 몰입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작품의 소재와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계속 소격효과를 불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오는 페르민에게 버림받았다. 소피아도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두 여성은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치며, 바다에서 빠져 죽을뻔한 아이들을 건져내면서, 단단한 연대를 이룬다. 바닷가의 그 장면은 실로 아름답다. 완벽하다. 숭고하다. 하지만 껄끄럽다. 계속 식모로서 살아가고 있는 클레오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 자체에 내가 동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의 원주민들은 스페인어를 쓰는 이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도시로 몰려와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농장주를 습격해 땅을 빼앗기도 하지만, 정복자의 후예들과 미국인들은 총 쏘는 연습을 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격을 여성과 아이가 고루 참여하는 레포츠인 양 포장해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굳이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로 양분해본다면 감독 자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빼앗는 자'의 편에 서 있었다. 멕시코시티의 로마라는 곳에서 원주민 식모를 두고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식모살이를 하던 원주민의 관점에서 1970년대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서사적, 혹은 윤리적 도박이 된다.

여기서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알폰소 쿠아론은 그 도박에서 잃지 않았다. 그는 '가진 자'의 눈으로 '못 가진 자'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만들 때 빠질 수 있는 모든 함정을 영리하게 비켜나갔다. 그러나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클레오와 소피아는 개인적이지만 큰 사건들을 겪으며 단단한 정서적 유대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서사는 그 어떤 비윤리적 선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식모와 고용인이다. 클레오는 여전히 바깥채에 살며 따로 밥을 먹고 빨래를 하며 개똥을 치울 것이다. 성인이 되고 헐리우드에서 스타 감독이 된 알폰소 쿠아론은 수십년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본인의 어린 시절을 보살펴준 식모와 꼭 닮은 원주민을 찾아내어 카메라 앞에 세워 연기를 시켰다. 자신을 키워준 식모와 같이 <로마>를 보기까지 했다("클레오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초연될 때 함께 <로마>를 감상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비윤리적이라고 지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감동적인가?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감동'을 '향유'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5.

그렇다면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인가? 나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져봤는데, 잘 모르겠다. 너무 잘 찍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지금 시대의 제1세계 관객들이 불편해할 수 있을만한 함정은 전부 피하면서도, 멕시코의 현대사 뿐 아니라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진행되어온 수탈의 역사까지 묵직하게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든다면 이보다 잘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관객이 아니다. 그 사실을, 영화를 보고 와서 곱씹는 지금까지도 실감한다.

우리가 영화를, 혹은 그 외의 창작된 서사를 소비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해서도 아니고 그 어떤 흠이 없어서도 아니다. 보는 이에게 일말의 불편함도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몇몇 작품들(머릿속에 몇 개의 예시가 지나가지만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다)일수록, '나는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올바른 작품의 팬이다'라고 우기는 소위 '팬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역설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윤리는 창작물이 아니라 창작물을 만들고 즐기는 사람의 몫일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로마>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볼 이유가 충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러 번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소재와 이야기의 전개 등을 되짚어보면, 단순하고 상쾌한 감동 따위는 점점 설 곳을 잃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게 무슨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상문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나 말고도 비슷한 고민에 빠져든 사람들이 있을테고, 누군가는 말문을 열어야 하니 말이다.

2018-01-06

〈1987〉은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인가

나는 〈1987〉이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586세대가 내뱉는 승리의 함성과도 같은 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온당히 받았어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허구의 서사를 창작하는 일에 대한 인식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적인 현상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여성 캐릭터에 대해 내린 판단을 보다 정확히 서술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픽션을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직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시점에서만 '현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있어야 할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대신 남은 것은 '그 모든 민중'의 대변자인 연희(김태리 분)라는 '순수한 여대생' 뿐이다.

김경찬 작가와 이우정 제작자가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의 한 대목. "나머지는 실존 인물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한 인물이다." 이우정 제작자도 그러한 인물 배치를 순순히 인정한다. "당시 사건에 말리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표상이 연희였다."

요컨대 연희는 도구적 인물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혹은 직·간접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남성들에게는 '시위 현장에서 마주쳤던 것도 같은 아련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 87년 6월 항쟁을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예정대로 작년 12월이 대선이었다면 '역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계속 훈계를 들었을 젊은이들에게는, 쉽사리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 요컨대 피와 살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아닌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는 좋은 캐릭터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내면으로부터의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폭발할 때, 배우 김태리의 단정한 용모와 선을 넘지 않는 연기 톤이 조화를 이루어 기대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문제는 연희가 '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학 새내기인 그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연희가 할 일은 그저 눈을 뜨고 거리에 나가 버스에 올라 깃발을 휘두르는 것 뿐이다.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세상을 낳기 위해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존재로 설정된 연희 말고는, 유의미한 여성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심각한 문제는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씨네21〉 인터뷰를 통해 확인하고 나니, 나도 이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6월 시위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선창을 하는 목소리는 배우 문소리씨다. 어떤 역할이든 캐스팅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배역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목소리만 썼다. <1987>은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 조금 더 조화롭게 여성 캐릭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김정남의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볼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우리는 실화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남성들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

이 대답은 실로 문제적이다. 감독은 "팩트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드라마적으로 윤택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서, "한병용 같은 경우 실제로 편지를 빼내오고 전달한 교도관은 두분이었는데 두 인물을 하나로 합쳤다"라고까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준환 감독과 제작진은 극적 긴장감을 위해 실존인물 두 명을 하나로 합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어도,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수많은 운동권 여성 캐릭터 한 두 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그들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교회건 절이건 성당이건 운동권이건, 어떠한 신념에 기반한 조직이 작동하려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제공하는 이들 중 상당수, 때로는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공식 기록에 충실하려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애초에 그 공식 기록으로부터 배제된 여성들을 끌어안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는 그러한 효과를 알면서도 선택을 했다. 현실 속에 존재했던 두 사람의 교도관을 하나로 합칠 때에는 '극적 재미'를 앞세우던 그들이,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내지는 않으면서 그 핑계로 '팩트'를 들이댄 것이다.

역사의 악역은 거의 모두 남자다. 왜냐하면 그들이 권력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 악과 맞서 싸우는 일에는 남녀가 없다. 따라서 역사의 선한 역할에는 남성과 여성이 고루 포진해야 한다. 문제는 그 싸움이 승리로 기록되건 패배로 기록되건, 역시 기록하는 자는 남성적인 시각을 전제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혹은 숫제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정착 과정에서 예수가 부활한 빈 무덤을 처음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어떻게 축소되었는지,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여인들의 이름은 왜 남아있지 않은지, 대신 우리가 아는 것은 12명의 남자 제자들 뿐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남자들끼리 뭉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여성들의 힘을, 마치 1단 로켓처럼 소진시켜버린 후 떨궈버리기 일쑤였다.

〈1987〉의 제작진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에 여성의 이름이 부족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건 조금만 생각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도 뻔한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해도 어차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서사화가 이루어지지만, 특히 픽션을 창작하는 중이었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어떤 의미에서건 (왕년의?) '운동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1987〉에는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야 했다. 선량한 교도관의 수더분한 누이, 시대적 각성을 하는 주인공과 덩달아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는 날라리 친구 같은 기능적 인물 말고, 그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내면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유의미한 입체적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를 만들었어야 한다. '팩트'로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밝히는 것, 그게 바로 픽션의 임무 아닌가?

역사는 전두환, 노태우, 박처원, 박종철, 이한열, 이부영, 김정남, 함세웅 등의 이름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도 매일 밥을 먹었고 세탁된 옷을 입었다. 그러한 돌봄노동은 자연스럽게 운동권 여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문건을 쓰고 몰래 인쇄하고 뿌리며 연락을 주고받던 것도 여성들이었고, 심지어 남자 운동권들의 자기 서사화와 달리, 여자들이야말로 용맹하게 돌을 던지고 전경들에게 얻어맞아가며 싸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런 기록의 부재를 〈1987〉의 제작진은 '팩트'로 받아들여, 영화로 만들었다.

이런 이중적 기준 앞에 나는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자들을 픽션의 세계에서마저 지워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 길게 말을 이어봐야 중언부언일 수밖에 없으니 시 한 편을 인용하면서 끝내도록 하자. 우리는 역사를 이런 식으로 기억해서도 안 되며, 이런 식으로 서사화해서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2017-12-31

올해의 영상물: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2017)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 트레일러


지난 8월 9일 새벽, 웹 스트리밍 서비스 아프리카의 BJ인 김윤태는 유튜브 스트리머 갓건배의 집 주소를 알아냈다며, 갓건배의 집에 찾아가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컨텐츠'를 유포했다. 실시간으로 약 7000여명 가까운 사람이 영상을 시청하는 가운데,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 성북경찰서에만 총 3차례 신고가 접수되었다. "그 주소에 갓건배가 살지 않아도 여성이라면 목졸라 죽이겠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증언(링크)까지 나온 가운데, 이 사건은 놀랍게도 살해협박이 아니라 '과도한 남성 혐오, 이대로 좋은가', 혹은 '인터넷 스트리머들의 무분별한 폭력과 증오의 표출은 과연 어디까지 표현의 자유인가' 따위의 주제로 소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초고속인터넷의 보급과 거의 동시에 3cf를 만드는 등 다방면에서 창작 활동을 벌였고 지금껏 꾸준히 인터넷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대한민국의 인디 록 음악가, 시인 겸 작사가, 인터넷 유명인"(위키백과) 권용만은, 갓건배를 소위 '저격'한다는 170여개의 유튜브 영상을 전부 시청한 후, 그것을 모으고 편집하여 컴필레이션 영상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2017)이다. 이 영상은 올해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진 모든 영상물 중 가장 문제적이다.

갓건배는 게임 〈오버워치〉를 플레이하며 게임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남성 유저들의 여성 유저에 대한 성차별, 성폭력, 비하 표현 등을 '미러링'해온 유튜브 스트리머(였)다. 그를 두고 남자들이 쏟아내는 온갖 증오와 욕설의 표현들로 1시간 44분 31초를 꽉 채워넣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대목이 몇 가지 나온다. 첫째,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갓건배 저격'에 나선 것은 대부분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연령대의 어린 남자들이다. 과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아들자식 농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둘째, 마찬가지로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그게 꼭 애들만 그러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높은 연령대의 남자들은 어떤 '남자 역할'을 제시하고 수행하는 중인가? 셋째, 대체 이 수많은 '초딩'들의 교육 환경과 삶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거나, 구성되어 있지 못하거나, 망가지고 있는 중인가?

이 영상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되었을 때 발생한 논란은 추가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하나 더 안겨준다. 이 '초딩'들은 스스로 영상을 찍어서 올렸다. 그것을 편집하여 별개의 영상물로 만드는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미성년자의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전제하고 그들 스스로의 어리석은 행동으로부터 미성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면 당연히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의 존재 자체를 비난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은 모두 직접 찍어 올린 영상을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등장인물들을 '보호'하려면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을 비판하거나 보지 말자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한 '보호'는, 미성년자의 인격과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려 하는 입장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훈육과 맞닿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이 있다. 특정 여성에 대한, 그리고 여성 일반에 대한 인터넷 상의 언어 폭력이 단지 말로만 오가는 차원을 넘어 현실의 폭력으로 돌변하던 바로 그 순간과 이후의 반응으로 인해 〈갓건배에 대한 모든 것〉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말이다. 그 폭력을 휘두르겠다던 남자 BJ들은 '원래 그런 놈들'이라고 치부되면서, 실질적으로는 면죄부를 받았다. 반면 '갓건배'는 언론의 조명을 받더니 소위 '남성혐오'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금도 조금만 검색해보면 그에게 다종다양한 폭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증오의 표현이 넘쳐난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혹은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그 수많은 폭력은 어디에 있는가?

한 해의 마지막에 이 영상을 소개하면서 '꼭 보라'고 하는 것은 다소 어폐가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기왕 본다면 1시간 44분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꾹 참으며 보기 바란다. 특히 남자라면 말이다. 창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어쩌면 이것은 여성들이 느끼는 인터넷 속의 언어 폭력을 체감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일 수도 있다. 이게 바로 여성혐오의 민낯이며, 대한민국의 현재이자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