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또 재미없다. 퀸스 갬빗도 예외는 아니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창작물들은 늘 그렇다. 데이빗 핀처라는, 이미 닳고 닳은 거장이 만드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다.
그 재미없음에는 특징이 있다. 작품 속에 제대로 된 갈등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퀸스 갬빗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반응을 보면 '이 이야기에는 악역이 없어서 좋다'는 소리들을 한다. 하지만 악역이 없는 것과 갈등이 없는 것은 다르다. 이건 악역이 없는 게 아니라 갈등이 없는 것이다. 그냥 '도자기 인형처럼 예쁜 소녀가 체스하는 모습'만, 적당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정도의 서사 위에 얹어놓은, 스틸컷 모음집이다.
퀸스 갬빗처럼 '잘못된 장소와 시간에서 특출난 재능을 지닌 자'의 이야기를 다룰 때, 사실 악역은 없어도 된다. 무거운 혹은 무서운 재능에 시달리는 존재는 스스로가 이미 주변인들에게 어느 정도는 악당일 수밖에 없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세상도 그의 존재로 인해 소외당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런 절대 고립의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혹은 그 절대 고립의 감정을 어떻게 소화해내느냐, 이것이 '동떨어진 천재물'의 핵심 갈등인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그런 갈등의 설정에는 꼭 악당이 필요하지가 않다. 가령 체스물의 걸작인 '위대한 승부'(Searching for Bobby Fischer, 1993)에서 잘 다루고 있는 바와 같다. 미국의 체스 신동(이었던) 조쉬 웨이츠킨의 실화를 다룬 이 작품은, 스스로 체스 규칙을 익히고 미국 챔피언십을 순식간에 뚫어낸 천재소년의 유년기를 다룬다.
부모는 처음에 자식이 지닌 천재성 때문에 행복해하지만, 곧 깨닫고 절망에 빠진다. 부모인 스스로가 자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조쉬 역시 부모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고 도와줄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엄청난 고립감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네추럴 본 지니어스' 물의 핵심 갈등이다. 누구도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는 것. 하지만 나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여기에는 따로 악역이 필요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 규격에서 벗어난 천재 자체가 애초에 인간 세상에 끼어든 옥의 티 혹은 티의 옥 같은 존재이므로, 그의 존재 자체가 갈등이다.
그런데 퀸스 갬빗을 비롯한 최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은 어떤가? 뭔가 '특별한'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들이민다. 그런데 그 특별한 존재들이 자신의 특별함 때문에 겪게 되는 특별한 고통을 냉철하게 다루지 않는다. 대신 적당하고 평범하고 '무해한' 성장물로 편입시켜버린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몇몇 넷플릭스 오리지널이 또 떠오르지만 일일이 다 거론하지는 않겠다. 하나같이 똑같은 패턴이니 말이다.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성하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갈등과 사건을 이끌어가는 대신, 적당히 예쁘고 귀엽고 보기 좋은 인형을 몇 개 만든 후 거기에 설명서만 붙여놓는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드는 것 같은데, 적어도 나는 동의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적어놓고 보니 내가 시대의 흐름을 못 따라가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성공적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제 발로 일어설 수 있는 캐릭터를 안고 있었다. 최근의 넷플릭스 오리지널들은 그렇지 않다. 뭔가 잘못된 트렌드가 오늘날의 창작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