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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6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국민이 대통령 조롱해도 내버려두는 게 진짜 ‘권위’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한 文은 비민주적 ‘권위주의’
소위 ‘깨시민’ 덩달아 위세… 尹은 진정한 권위 누리길

 
현지 시각 지난 3월 27일,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농담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웃던 윌 스미스, 아내의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무대 위로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고, 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 목청을 높였다. “다시는 내 아내의 이름을 꺼내지 마!”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은 ‘조크’에 관대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나라다. 여기서 말하는 조크란 모두가 적당히 기분 좋게 웃고 넘어가는 무해한 농담이 아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이 감추고자 하는, 혹은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치부를 드러내고 까발리며 조롱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처럼 권위 있는 자리일수록 그렇다. 당사자가 불쾌해할 뿐 아니라 때로는 듣는 이도 웃어넘기기 어려울 만큼 독한 조크가 난무한다. 연예인들만 조크의 과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백악관 공식 행사에 코미디언을 사회자로 부르면 대통령과 영부인을 놀림감으로 삼는다. 미국식 조크에는 성역도 없고 금기도 없다.

2017년 8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청와대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석한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

 
왜일까?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지만 동시에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더 나아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지키는 방식이다. 중세 시대의 왕이나 권력자들이 광대를 옆에 두고 남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농담하도록 내버려둔 것과 같은 원리다. 스타들의 치부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권위주의’의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떠올려볼 수 있다. 권위주의와 자존심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굽실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면 권위와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미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 부르며 방송과 출판 등에서 대통령을 풍자하는 걸 기꺼이 허용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농담인 ‘YS 시리즈’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춘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그 뒤를 이은 대통령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것, 국민들이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렇게 권위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이 공식이 달라진 건 문재인 대통령 이후다. 문재인 정권의 여러 잘못 중, 문화적 영역에서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1983년에 태어나 모든 대통령 선거와 그 후의 분위기를 경험했던 필자로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까지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적은 없었다.

문재인 본인부터가 문제다. “북조선의 개 한국대통령 문재인의 새빨간 정체”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지를 만들고 뿌렸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일개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현직 대통령이 시민을 고소하는 것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그 어떤 민주국가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안을 두고 문재인 본인이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격노’를 일삼더니, 퇴임을 앞두고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제목의 책까지 냈다.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권위주의를 의인화하면 바로 이런 캐릭터가 될 듯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이렇다보니 지지자들의 행태는 한층 더 저열해졌다. 자칭 ‘깨어있는 시민’들이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대감댁 행랑채의 왈짜들처럼 떠세를 부려댔다. 정권을 향한 비판, 풍자, 농담에 대고 “대통령님이 네 친구냐?”며 시비를 걸고 다녔다. 크리스 록의 조크를 듣고 웃다가 제이다 핑킷의 눈치를 보더니 무대에 올라가 뺨을 때린 윌 스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커녕, ‘아무도 웃을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중이다. 새 대통령 윤석열은 자칭 민주정권의 비민주적인 권위주의를 확실히 털어내주기를, 국민 속에서 진정한 권위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2022-02-22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朝鮮칼럼 The Column]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나

2020년 2월 19일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수 나온 대구 남구 신천지예수교회 다대오지성전 앞을 대구 남구청 관계자들이 방역하고 있다./김동환 기자
 
“신천지 비호세력에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술과 주술에 빠진 대통령을 원하십니까”. 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대선 기간 우리 국민 모두가 내걸 수 있는 현수막 문구다.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해온 표현들이다. 이런 걸 ‘게시 가능’이라 판단한 선관위도 문제지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민주당에 있다. 특정 종교나 신앙 및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을 향한 무차별적 혐오 발언을 공론장에 퍼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민주당과 지지자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당의 당원을 향해서도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친여 방송인 김어준이 지난 18일 유튜브 ‘다스뵈이다’를 통해 한 말을 되짚어보자. 그는 지난해 10월 민주당 대선 경선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성분 분석이 안 되는 10만 표가 나왔다며, 그때 머릿속에 세 글자 ‘신천지’가 떠올랐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패널로 나온 이택수 리얼미터 대표, 여론조사업체 윈지코리아컨설팅 박시영 대표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사회 상식의 하한선이 어디인지 의심케 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분명히 밝혀둘 필요가 있겠다. 나는 신천지나 무속 등을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신천지 특유의 포교 방식으로 인해 포섭된 이들이 인생을 허비하고 금전적 피해를 입으며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공권력의 적절한 개입과 수사 및 처벌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무속인에 의한 사기·협박·폭력·갈취 등의 범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피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악질 범죄로 반드시 엄단해야 한다.

이런 견해는 필자의 독창적인 생각이나 입장이 아니다.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이야기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다. 어떤 종교를 믿을지, 더 나아가 어떤 종교를 창시할지도 개인의 자유에 포함된다. 단, 그 종교 활동 과정에서 범죄를 저질렀거나 그럴 우려가 있다면 공권력의 제지를 받아야 마땅하다. 설령 그런 경우라 해도 종교 자체를 비하·폄훼·매도하거나 누군가 어떤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집권 민주당에서는 통용되지 않은 것일까?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문재인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재작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하고 퍼져나가던 무렵으로 돌아가 보자. 청와대는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막으라는 의료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외국인 혐오’ ‘제노포비아’라며 묵살하고 있었다. 그러다 막상 국내에 전파된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하자 희생양 찾기에 나섰다.

마침 대구에서 코로나가 크게 확산되었고 그중에도 신천지를 통해 퍼졌다는 사실이 역학조사를 통해 드러나자, 환자의 개인정보 보호 같은 현대 국가의 상식은 모두 뒷전으로 밀려났다. 질병관리청은 짐짓 중립적인 태도로 신천지를 지목하고, 여당 지지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대구 코로나’ ‘신천지 코로나’ 같은 혐오 표현을 만들고 퍼다 날랐으며, 그 모든 과정을 청와대는 묵인하거나 부추겼다. 국민 상당수가 그런 비인격적 혐오 몰이에 동참하거나 방관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만 아니면 돼’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 문제야’라는 식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서로 모여 기도하고 노래하며 공동생활하는 소수 종교와 종파일수록 감염병에 취약하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공통의 현상이다. 뉴욕에서는 보수적인 유대교 종파가, 유럽에서는 이주민들의 무슬림 사원이 초기 코로나 폭발의 도화선 노릇을 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그 어떤 문명국가도 정부가 앞장서 특정 집단을 향해 ‘너희가 문제야’라는 시그널을 보내지는 않았다. 병을 퍼뜨린 이들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번 혐오의 씨앗이 뿌려지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 반려동물로부터 지지 선언을 받네 마네 하는 ‘인권 감수성’을 뽐내다가도, 민주당은 신천지와 무속인을 만나면 오히려 잔인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마치 흑인은 총에 맞아도 개는 총에 맞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무속과 신천지는 혐오해도 되는가? 이 질문을 마주하지 않는 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모든 담론은 허구다.

2021-06-16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대표에게 ‘공정’을 묻는다

[朝鮮칼럼 The Column] 이 대표, 노인 기초연금 소득 하위 70%에만 주고
상위 30%에는 안 준다며 불공정한 제도라고 지적
없는자의 몫 줄여서라도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대변인 공개오디션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덕담부터 건네자. 이준석 신임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과 취임을 축하한다. 이전에도 30대 당대표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신생 군소 정당이 아니다. 원내 102석을 지닌 제1 야당이다. 36세 당대표는 실로 이례적 사건이며 탁월한 성취다.

그러나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처럼,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르는 법. ‘이준석 현상’이 종전 정치 문법에 지각변동을 불러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갈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이준석의 정치적 관점, 특히 ‘공정’에 대한 입장을 철저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인 빈곤 문제를 생각해보자. 최근 들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며 축포를 터뜨리고 ‘국뽕’을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노인 빈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다른 OECD 가입국과 같은 층위에서 논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가 펴낸 ’2019 자살 예방 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2015년 기준 10만명당 58.6명이었다. OECD 평균인 18.8명을 훌쩍 뛰어넘고, 38.7명으로 2위인 슬로베니아와도 격차가 크다.

왜 그럴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27.7%가 생활비 문제를 꼽았다. 가난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움츠러들게 만든다. 말 그대로 돈이 없어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이 OECD 평균의 약 세 배에 가까운 나라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노년층 내 빈부 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중위 소득을 100으로 봤을 때 소득이 50%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상대적 빈곤’이라 한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상대 빈곤율은 48.8%에 달한다. 절반에 가까운 노인들이 통계적으로 빈곤층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와 경쟁의 나라인 미국조차 노인 상대 빈곤율은 같은 해 기준 21%에 불과하다. 12.1%인 OECD 평균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령연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명박 정부는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이라 이름을 바꾼 후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액을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렸다.

이쯤에서 이준석 대표가 2019년 펴낸 ‘공정한 경쟁’을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이준석 대표는 현재 기초연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다. 소득 하위 70%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책을 직접 인용해본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노령연금의 경우 소득 상위 30퍼센트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들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령연금의 경우 지급하는 금액을 낮추더라도 노인 인구 전체에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원래 연금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밝히자면, 기초연금 제도에는 결함이 있다. 기초연금 수급액을 소득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 노인 40만명은 기초연금을 받으면 그만큼 생계 급여가 깎인다. 생계 급여를 산정하는 가구의 소득 인정액에서 기초연금액을 빼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지만, 그 경우 연 1조6000억원가량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 대표가 기초연금을 ‘불공정’하다 말하는 것은 하위 70%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이에게 더 많은 지원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초연금이 없어도 생활과 생존에 지장을 받으리라 보기 어려운 상위 30%가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 10만명당 58.6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하위 70%에게 돌아갈 몫을 깎아서라도, 상위 30%의 불만을 달래야 한다는 소리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공정’은 누구를 위한 어떤 공정일까.

나는 이준석 대표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일원이다. 위 세대가 하듯이 ‘이준석 현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런 시각이야말로 그를 한 사람의 ‘청년’이나 ‘유망주’로 묶어두고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지한 태도로 토론을 시작해보자. 없는 자의 몫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을 ‘공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4-13

24평 아파트와 자가용 한 대, 이 성취를 뺏을 권리는 없다

 [朝鮮칼럼 The Column]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 단지./뉴시스
 

남북전쟁이 막바지로 향하던 1865년 1월, 연방군의 윌리엄 T 셔먼 소장은 휘하에 해방 노예로 이루어진 부대를 통솔하고 있었다. 그는 특별 야전명령 15호를 발령했다. 해방 노예에게 1인당 40에이커의 땅을 준다는 것이었다. 노새는 공식 명령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당연하다는 듯 포상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미국은 약속을 어겼다. 셔먼이 나누어준 40에이커뿐 아니라, 전쟁 과정에서 압류된 땅 모두가 백인 농장주에게 되돌아갔다. 남부에 살던 흑인들은 ‘해방’된 신분으로 소작농이 되어 노예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정의롭지 못한 역사는 다시 한번 반복됐다. 1930년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된 연방주택국(FHA)은 집값의 10%만 있으면 나머지 90%를 빌려주는 정책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장기주택담보대출이었다. 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을 지원하는 제대군인지원법(GI Bill)과 맞물려 미국은 순식간에 중산층의 나라로 탈바꿈했다. 단, 흑인들만 빼고. 연방주택국은 흑인들이 사는 구역을 빨간색으로 칠하고 융자를 막았다. 일명 ‘레드라이닝’이라는 농간이었다. 좋은 교외 주택가에 집을 사려고 해도 흑인이면 주택담보대출을 해주지 않았다. 100만여 흑인 참전 군인은 계층 상승의 사다리에 올라타지도 못했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백인 가구의 자산 중위값은 흑인 가구에 비해 9~12배 크다. 소득이 동일할 때에도 백인 가구의 자산이 흑인에 비해 두 배가량 많다.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가 본인의 영화 제작사에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땅의 역사는 어땠을까. 갑오개혁으로 노비라는 신분이 폐지됐지만 차별은 엄존했다. 가진 게 없으니 처지가 달라질 수 없었다. 근본적인 변화는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이승만 정권의 토지 개혁으로 인해 소작농이 자영농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자칭 ‘진보’ 세력 중 일부는 한국전쟁을 북한 지배층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조국 해방 전쟁’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시각에서 보자면 한국전쟁은 ‘노예 해방 전쟁’에 더욱 가깝다. 남북전쟁의 흑인들과 달리 대한민국의 소작농들은 토지 개혁으로 땅을 받았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워 나라를 지켜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가난에서 벗어난 풍요로운 미래를 제시했다. 남북전쟁 당시의 구호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24평 아파트와 자가용 한 대’를 약속한 것이다. 물론 모든 이가 경제 개발의 과실을 동등하게 누릴 수 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 시대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보면 그 약속은 성공적으로 지켜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탄탄한 중산층을 형성한 국가가 되었다. 중산층의 성장과 민주주의의 정착은 불가분의 관계다. 그렇게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는 기적을 이루어냈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이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심지어 4·7 재보궐선거가 여당의 압도적인 패배로 끝났음에도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선거 다음 날인 8일 청와대 대변인은 “부동산 부패 청산 등 국민의 절실한 요구를 실현하는 데 매진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전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8일 부동산 시장 점검 관계장관회의에서 “부동산정책의 큰 틀은 흔들림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정책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신념, 차라리 집념이라고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노예제는 폐지했지만 너희가 감히 좋은 집을 사면 안 된다. 자산을 가진 중산층이 아닌 우리가 시혜적으로 내려다보며 동정할 수 있는 빈곤층이 되어라. 이런 차별과 멸시의 시선을 느끼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혈기 넘치는 20대 남성들이 분노의 투표를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노예 해방 전쟁으로 세워진 자유민들의 나라다. ‘24평 아파트와 자가용 한 대’의 약속을 믿고 달려온 국민들이 기적과도 같은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이 빛나는 성취를 빼앗을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청년에게 내 집 마련을 허하라. 삐뚤어진 차별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면, 내년에는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2-27

[朝鮮칼럼 The Column] 文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갈등 방치해 권력 지키고 지지자 결속 다지는 효과
필요에 따라 수동적 모습 적극적으로 연출하는 것

지난 1월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연합뉴스
박범계 법무장관은 신현수 민정수석과 문재인 대통령을 모두 ‘패싱’하고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발표했던 것일까.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면서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는 않고 있다. 유영민 비서실장은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에 대해 ‘문 대통령이 속도 조절 당부를 했다’고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했다. 하지만 박 법무장관, 김경수 경남지사, 박주민 의원 등은 ‘그런 말을 들은 적 없다’며 반발하는 상태다.

이런 식이다 보니 일각에서는 ‘문재인 허수아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마치 안동 김씨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 없이 휘둘리다가 일찍 세상을 뜬 ‘강화 도령’ 철종처럼, 문 대통령을 자리에 앉혀놓고 조종하는 특정 세력이 막후에서 현 정국을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비선 실세’의 통제하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동의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청와대 내부 인사로부터 전해들은 어떤 ‘소스’가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사례와 권력의 생리를 놓고 볼 때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연합군과 소련군 양쪽의 압박을 받아 함락 직전이던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상당수의 부하들이 적에게 투항했다. 일부는 아예 명령을 듣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나갔다. 왜일까?

히틀러는 베를린을 떠나거나 항복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무적의 천재 전략가 히틀러 총통’이라는 대중의 환상이 깨진다. 그것은 권력의 붕괴를 뜻했다.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놀이를 하다가 더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었을 때 자살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본인은 총통으로서 죽을 테니 말이다.

문 대통령의 모든 것을 히틀러와 비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외우내환과 사분오열을 방치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입지와 이익을 지키는 어두운 권력의 기술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고종의 사례가 좀 더 잘 와닿을지 모르겠다. 고종은 대원군과 명성왕후 사이의 갈등을 철저히 활용했다. 동학을 믿는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그 청군을 통제할 수 없으니 일제를 불러들였고, 개화파의 힘이 커지자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을 갔다.

결국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한일합방 이후 고종과 그 일가는 일제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왕공족(王公族)으로 분류됐다. 황족에 준하며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얼핏 보면 무능한 고종이 아버지와 아내와 신하들, 침략하는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끌려다닌 것 같지만, 최후의 승자는 고종이었다.

대통령이 주변 세력에 휘둘리고 있다고만 볼 수 있을까. 박범계 대 신현수, 유영민 대 김경수 등의 갈등 구도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충돌할 때 드러났던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은 실력이다. 이게 바로 문재인 대통령의 ‘실력’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윤건영 의원의 말마따나 현 정권의 힘은 이 와중에도 40%대를 유지하는 대통령 지지율에서 나온다. 지지의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문 대통령이 능력이 부족하고 서툴 수는 있어도 나쁜 의도를 가진 건 아니라는, 선한 의지에 대한 지지층의 믿음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문재인 허수아비설’은 현 정권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믿었던 부하들조차 말을 듣지 않는 외로운 대통령을 향해 지지자들은 오히려 동정표를 보내고 결속을 다지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 틀어박힌 채 고립무원의 지도자상을 연출하며 권력을 지켰던 것과 마찬가지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에 국토부가 반기를 들자 당장 부산을 방문해 “조속한 입법을 희망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라. 문 대통령은 ‘패싱’당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에 따라 수동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연출할 뿐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일 뿐 ‘팩트’는 아니다. 문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오기 전까지는 확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다만 오늘도 ‘패싱’당하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묻고 싶을 따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철종인가, 고종인가.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2020-12-30

[朝鮮칼럼 The Column] 실력 없는 권력은 제풀에 무너진다

 

‘킵 캄 앤드 캐리 온’ 구호로 단결 나치 폭격 이겨낸 영국
코로나 버티는 국민의 안정 요구, 文 정권은 ‘독재 면허’로 여겨
윤석열 승리가 보여준 희망… 결국 소신·양심이 이길 것

2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 런던 세인트폴 성당 인근 건물 옥상에서 한 영국 병사가 독일 공습을 감시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2차 대전이 눈 앞에 닥쳐온 1939년 '영국 정부가 만든 대국민 홍보 포스터 '킵 캄 앤드 캐리 온(Keep Calm and Carry On)’. ‘평상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New York Times Paris Bureau Collection
2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 런던 세인트폴 성당 인근 건물 옥상에서 한 영국 병사가 독일 공습을 감시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2차 대전이 눈 앞에 닥쳐온 1939년 '영국 정부가 만든 대국민 홍보 포스터 '킵 캄 앤드 캐리 온(Keep Calm and Carry On)’. ‘평상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New York Times Paris Bureau Collection

1940년 9월, 영국 런던. 헤르만 괴링이 이끄는 나치 독일 공군이 폭격을 시작했다. 영국 본토가 외적의 공격을 받은 것은 874년 노르만족의 침공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폭탄이 떨어지는 밤이 두 달 넘게 이어졌다.

그러던 중 10월 10일, 인상적인 기록 사진 한 장이 남았다. 완전히 무너지고 박살이 난 건물 잔해 위에서 우유배달부가 우유를 배달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상을 유지하는 것. 동요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 평범한 영국인들이 전쟁을 하는 방식이었다.

‘킵 캄 앤드 캐리 온(Keep Calm and Carry On)’. 1939년,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것을 감지한 영국 정부가 만든 대국민 홍보 포스터의 문구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실제로 곧 전쟁이 터졌고, 독일군 비행기가 폭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영국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에는 폭격을 당해도 해가 뜨면 희망찬 하루를 시작했다. 청소부는 청소를 하고 집배원은 편지를 배달하며 우유배달부는 우유를 날랐다. 학생들이 무너진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총리 처칠은 런던을 떠나지 않은 채 지하 벙커에서 전쟁을 지휘했다. 일치단결한 영국인들의 뚝심 앞에 나치의 기세가 꺾였다. 굴하지 않는 의지,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잊혔던 구호 ‘킵 캄 앤드 캐리 온’은 2000년 영국의 한 서점을 통해 재발견됐다. 빨간 바탕 위에 영국 왕관과 흰 글씨로 이루어진 심플한 포스터가 젊은 세대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지금도 수없이 재생산·패러디되고 있다. 가령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자,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워싱턴 DC의 한 지하철역에 ‘킵 캄 앤드 워시 유어 핸즈(평상심을 유지하고 손을 씻어라)’라는 포스터를 붙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상 모든 말이 그렇듯 ‘킵 캄 앤드 캐리 온’ 역시 발화의 주체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사납고 거친 적과 맞서는 이들이 스스로를 다독이고자 되뇌는 담담한 투쟁의 구호일 수도 있지만, 권력자들은 ‘입 다물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뜻으로 저 말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도 그랬다. 정부는 바이러스의 진원인 중국발 입국을 막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모기를 잡는 꼴이었다. 마스크가 동나고 손 세정제가 품절됐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동요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약국 앞에 줄을 서고 냉장고에 쌓인 식재료를 먹어치우며 1차 유행을 견뎠다. 의료진의 헌신적 자원봉사 속에서 특히 대구 시민들의 ‘자발적 록다운’으로 나라가 위기에서 벗어났다. ‘킵 캄 앤드 캐리 온’의 힘으로 이겨낸 것이다.

총선을 치르며 무언가 엇나가기 시작했다. 국민은 위기 국면 속에서 일단 여당에 힘을 더 실어주었다.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원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그 상식적인 판단을 ‘독재 면허’로 받아들였다. 병상을 확보하고 백신을 구해야 할 시간에 자기 꿍꿍이에 몰두했다. 공공 의대를 설립한다며 의사와 간호사를 갈라치기했고,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켰으며, 자신들이 임명한 검찰총장을 자르려고 난리를 쳤다. 국민이 백신을 요구하자 도리어 화를 내기까지 한다. ‘닥치고 마스크나 써!’

여러모로 절망적인 상황이다. 백신이 개발되며 다른 나라에서는 터널의 끝이 보이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물량을 제대로 확보해 놓지 않았다. 정권에 해로운 수사는 모두 덮어버리고 반대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고 180석의 힘으로 온갖 악법을 밀어붙여 통과시켜 놓은 상태다. 올겨울은 여러모로 길고 혹독할 것이다.

대체 저들과 어떻게 싸워야 할까. 윤석열 검찰총장이 답을 제시했다. 비정상적인 목적을 달성하려 기형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실력 없는 자들은 직업윤리에 충실한 전문가를 이길 수 없다. 침착하게 버티면 제풀에 무너진다. 소소한 삶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소신껏 살아가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결국은 이긴다.

새해에는 또 어떤 ‘깜짝 쇼’가 벌어질까. 걱정되지만 두렵지는 않다. 킵 캄 앤드 캐리 온.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힘이다. 평상심을 지키는 평범한 시민을 권력은 굴복시킬 수 없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신문을 읽고 우유를 배달하고 사랑을 나누었던 영국인들처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