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2

당갈, 정글북, 여성 서사

당갈을 보면서 '이건 아버지가 중요 인물이니까 여성 서사 실격!' 이러는 분들이 있나보다. 얼마 전 듀나 님이 트위터에서 했던 말이 맞다. '나는 이 작품이 왜 완벽한 여성 서사로서 실격인지 안다'고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여성 서사의 흥행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마이너리티가 중심이 되는 서사는 원래 '완벽'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바로 『정글북』이다. 『정글북』은 키플링이 삘받아서 쫙 써갈긴 모글리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모글리는 '인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의 대표자 자격을 지닌다.

인간은 숫적으로 소수자이지만 서사의 중심이다. 그래서 『정글북』의 모글리 이야기는, 백인 남자애들이 아무런 거리감 없이 감정이입한다는 맥락에서의 '보편성'을 어렵지 않게 획득했고 영국을 지나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문제는 그 모글리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다음의 이야기이다.

펭귄클래식 『정글북』의 해설에 따르면, 키플링이 직접 쓴 그 후의 이야기에서 인도 북부의 삼림 관리원 기스본(당연히 백인)은 정글을 떠난 모글리를 순찰대원으로 채용하고, 모글리는 기스본의 딸과 결혼하며, 기스본의 하수인이 된 모글리는 잿빛 형제들을 기스본에게 사냥하라고 몰아주기까지 한다.

이 엄청난 간극은 대체 어디서 발생하는가? 『정글북』에서는 모글리가 '인간'의 대표이지만, 정글을 떠난 후의 이야기 속에서 모글리는 한낱 '인도인'이며 키플링이 보는 '인간', 즉 영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글을 떠난 모글리는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도 중심에 설 수 없는 소수자가 되고 만 것이다.

모글리가 정글 속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인간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남성 중심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독자를 매혹시키고 꾸준히 재창작을 불러오는 강렬한 에너지가 잠재해 있기도 하다. 거칠 것 없이 달려나가는 영웅 서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글리가 소수자가 된 다음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후련한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정글 밖 세상은 '영국인'들의 것이지 '인도인'의 것이 아니니까. 키플링은 모글리를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하인'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문제를 치워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소수자임을 인식하면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현실 속에서 주체적인 서사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그와 같은 조건 하에서 소수자인 주인공은 모글리처럼 단순명료한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세상이 완벽하지 않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더욱 완벽함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소수자가 소수자인 채로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만드는 사람과 수용하는 사람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고 듣고 보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서사 많이 봅시다.


예전에 썼던 트윗 타래를 갈무리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