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29

못된놈, 추한놈, 국제촌놈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보고 왔다. 열두 글자나 되는 이 긴 제목을 여덟 글자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만주에서 찍은 디워'. 정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놈놈놈'은 그저 '만주 디워'일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영화가 좀 덜 노골적으로 한국 자본가들과 그 워너비들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고, 불행한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디워 때와는 달리 사람들이 이 영화의 문제를 쉽사리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놈놈놈'을 보며 우석훈의 최근 저서인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제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을 읽어서 그런 건 아니고, 다만 그 제목이 풍기는 인상이 바로 이 영화를 설명하는 틀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우석훈의 책은 나중에 읽어볼 계획이다). 김지운을 포함한 이 영화의 제작진은 평야, 대륙에 대한 감각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다. 국제 감각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다. 대륙은 곧 자원이며, 우리가 수탈해야 할 무언가라고 보는 19세기 제국주의적인 구태는 물론이거니와, 무국적 공간으로 가정된 만주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이 품고 있는 일제시대라는 거대한 트라우마와 그것을 은폐하는 한국인들의 정신 구조까지 드러나버리고 만다.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놈놈놈'은 그저 문제작일 뿐이다.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이따위 영화를 찍는 현재 한국인들을 놓고 〈못된놈, 추한놈, 국제촌놈〉이라는 영화를 확 찍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냥 리뷰를 쓰도록 하자. 이미 논조를 보면 알겠지만 이 글은 '놈놈놈'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 그러니 그 영화에 대한 자신의 호감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읽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영화의 진행 내용을 짚어가며 논지를 펼 것이므로, 백지 상태에서 '놈놈놈'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이 글을 피할 것을 권한다. 최근에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를 보았지만, 그것과 이 작품을 대조하는 것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가혹한 일이므로 그렇게 하지도 않겠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일단 기술적인 차원에서, 액션씬의 문제를 먼저 짚고 들어가보자. 만주 평야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추적씬은, 이 영화의 제작진이 정글 밖으로 나온 피그미족같은 그런 인식론적 틀 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준다. 장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평야에서 만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먼저 총을 쏘고, 조준이 맞다면 상대방은 죽는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그 유명한 장면, 지평선 너머로 오마 샤리프가 등장하는 그 장면을 떠올려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사막이나 평원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싸워야만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데, 이건 서부 개척시대 뿐 아니라 징기즈칸이 말을 타고 유럽을 침략하던 시대부터 이미 보편화된 전투 공식이다. 탁 트인 평원에서는, 상대방을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쏴서 명중시키는 자가 승리한다. 따라서 들키지 않는 것이 생존을 위한 첫번째 조건이며, 만약 발견되었다면 상대방의 위치를 최대한 빨리 파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놈놈놈'에는 이런 최소한의 리얼리티에 대한 고려가 없다.

지도 사본은 단 한 장이라고 알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만주군 일본제국군 화적 집단 등이 동시에 한 방향을 향해 질주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고 치자. 그래서 만나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치자. 그런데 일본군이 기마 소총부대의 한복판을 가로질러가며 장총으로 아군을 마구 쏘아 죽이는 정우성 같은 놈을 그냥 보고 있을까? 마치 움직이는 과녁처럼, 정우성의 장총 돌리기만을 위해 멍하니 달려가던 일본군의 모습.

장거리 총격씬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황에서, 정두홍 무술감독팀이 짜넣은 액쎤은 지루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정우성은 아예 대놓고 일본군 부대 속으로 뛰어들어서 장총을 돌려가며 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린다. 이건 '주차장 액션 씬'의 재탕일 뿐이다. 한국 액션 영화에서 수도 없이 반복된, 적들 한가운데에서 단기필마로 깡패들을 쓰러뜨리는 '사나이'의 모습 말이다. 다만 만주니까 발차기 대신 총을 쏘는 것 뿐이고, 그러니 정두홍이 만드는 액션에서 (특히 〈짝패〉, 기본기도 돌려차기 필살기도 돌려차기, 어째 액션이 돌려차기밖에 없던가?) 돌려차기가 죽도록 나왔던 그 연장선상에서 정우성은 죽어라 장총을 돌려댈 수밖에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러한 액션씬의 구성 오류는 단지 실력 문제만은 아니다. '놈놈놈'의 제작진, 더 나아가 이 영화에 돈을 대준 사람들, 혹은 400만명이나 보고 있는 관객들이 '대륙'이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따위 액션씬을 찍어놓고도 호쾌하네 어쩌네 대륙적 기상이 느껴지고 운운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만주에서 넓은 땅을 이용해 액션을 찍을 거면, 김지운은 대륙 그 자체를 좀 더 사유했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제목에 써놓은 바와 같이 국제촌놈들이기 때문에, 혹은 정글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피그미족들이기 때문에, 탁 트인 평원을 마주치면 어찌할 줄 모르고 주춤거리다가 '결국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뭐'라며 깊고 편안하고 아늑한 우물로 돌아온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도 '대륙'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가 석유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자원 빈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의 인식 체계 속에서 '대륙'은 곧 '자원'일 뿐이라는 것을 '놈놈놈'보다 더 잘 보여주는 텍스트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스포일러 경고를 다시 한 번. 이 영화의 보물지도는 결국 일본인들이 파놓은 유전의 지도인데, 만주에서 석유가 나온다는 발상도 우습거니와 기껏 만주에 가서도 생각하는 것이 유전인가 싶어서 헛웃음이 피식 나오는 설정이다. 사실 난 초반부에 '시추'라는 단어가 들릴 때부터 이따위 설정을 짐작했고, 그걸 확인하는 과정에서 구역질이 났다. '자원 외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자원 외교'등을 통해 외국으로부터 안정된 자원 수급을 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요? 이런 질문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한국에 '자원 외교'를 요청하는 것이다. 한국에 비교적 풍부한(아니, 풍부했던) 금, 무연탄 등의 자원을 일본에 싼 값에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그런 외교를 했으면 좋겠다고, 국내 주요 일간지가 모두 쿵짝쿵짝 떠드는 가운데 일본인 외교관이 '한국의 풍부한 천연자원과 일본의 기술이 만나...'같은 소리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거다.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자원 외교'를 논하는 것은, '나 식민주의자요'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후지고 못나고 한심한 짓이다. 그런데 그걸 한국 정부는 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게 대체 왜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김지운의 '놈놈놈'에서 만주를 '석유'로 치환시키는 것을 본 중국인들의 심기가 얼마나 불편할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전체적인 스토리 진행에서 다소 동떨어진, 송강호가 독립군을 사칭하는 사기꾼의 아편굴에서 아편과 약에 취해 해롱거리는 장면에서 그 가소로운 제국주의의 욕망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독립군을 사칭하는 사기꾼은 '사실 만주는 조선의 땅이다', '그런데 거기에 보물(즉 석유)가 묻혀 있다', '따라서 그것은 본래 조선의 것이어야 한다'는 삼단논법을 펼친다. 한국인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또한 연변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로 딱 그 모양 그 꼴이다. 외국인들이 보면 한국인들은 전부 '민족뽕'에 취해 해롱거리는 얼간이들로밖에 안 보인다. 뽕 먹은 논리가 뽕 먹은 장면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나마 그 석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영화의 주인공인 세 놈들은 알아보지도 못한다. 여기서 더욱 주목할만한 것은 보물을 찾은 후 자신의 소원을 말하는 장면이다. 몇 년이 지나도 연기 못 하는 정우성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대사 치게 하는 대범한 연출이 불러오는 두통과 현기증은 논외로 하자. 그런데 송강호가 말하는 '소원'이라는 것이 결국 '외국에서 돈 벌어서 국내에 땅 사는 것', 다시 말해 해외 펀드로 대박 쳐서 아파트 사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왜 아무도 지적하고 있지 않은 걸까? 적어도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어차피 그 소원의 내용이라는 것이 클리셰에 가까운 것이므로 모르고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보물의 실체가 밝혀진 다음 그 소원의 내용을 되짚어보면, 그 적나라한 욕망 앞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땅은 사사 뭐하냐는 정우성의 되받아치는 대사도 그렇다. 그러면서 정우성은 말한다. 나라가 없으니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나라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땅을 사서 안정적으로 보유할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라는 언제 망할지 모르니 돈을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이 최고다. 바로 이 두 가지 생각이 맞물려, 아파트 값을 올려주기만 하면 한국이 망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서울 아빠'들의 표심을 만들어냈고, 그게 바로 이명박을 당선시킨 주범임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쯤 되고 보면 그동안 '나라 잃은 설움'을 읊어댄 수많은 작품들, 네셔널리즘을 과장되게 포장하여 설파하던 작품들의 존재가 민망해질 지경이다. 우리가 한국인의 '민족혼'이라 일컫던 '한'의 실체가 고작 이런 것이었을까?

아닌게아니라 김지운 감독은 '놈놈놈'을 연출하던 중 《판타스틱》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안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자신은 당시의 만주를 고증 그대로 찍었으며, 그곳은 실로 코스모폴리탄적인 공간이었다고 말이다. 그 말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판타지를 구성하고자 했다면 그 판타지의 내적 논리가 충실하게 성립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놈놈놈'에 등장하는 만주는 역사상 존재했던 그곳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매드맥스〉 시리즈의 세트장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망치를 들고 휘두르던 마동석.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분명 김지운 감독은 '놈놈놈'에서 만주를 해방구로 묘사하고 있다. 문제는 그곳이 무엇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이냐 하는 것이다. 기존 한국 문화계를 짓눌러온, 일제시대에 대한 과도한 네셔널리즘적 반발에 대항하여, 최근에는 드라마 〈경성스캔들〉을 포함하여 몇몇 영상 매체에서 '화려하고 재미있는 일제시대'라는 하나의 표상을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국내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그 작품들은, 기존에 그려내지 못한 '일제 시대'라는 무언가를 제시해주지는 못했다. 도리어 한국의 창작자들은 그 시점에서 만주로 나아가, 아니 도망가, 과도한 네셔널리즘의 반대급부로 과도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20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통해 초라하게 드러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놈놈놈'을 배태한 한국 사회의 기본적인 성향은 이 작품이 매끈한 판타지가 될 수 있도록 그냥 두고 보고만 있지 않다. 앞서 언급한, 송강호가 빨려들어간 만주의 아편굴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곳에서 송강호는, 놀랍게도, 그 코스모폴리탄적인 만주에서 참으로 놀랍게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세 명의 어린이들을 구출해내 '조선인촌'에 숨겨두고 나온다. 무국적 공간으로 만주를 제시하겠다고 하면서도, 결국 '민족'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순수한 어린이'의 탈을 쓰고 귀환하는 것이다. 무국적 공간인 만주에, 우리 민족이 있단다.

이 모든 병리적 현상은 결국, '일제시대'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한국인들의 무의식이 빚어내는 현상이다. 해방 이후 수십년 동안 '사악한 일제'에 맞선 '숭고한 민족'을 제시하다가, 그게 서서히 먹히지 않는 시점이 되자 '일제시대에도 실은 연애도 했다'고 눙치다가, 그건 그림이 잘 안 나오고, 로맨스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리얼리티를 확보하다보면 결국 일제시대를 직시할 수밖에 없으므로, 무국적 퓨전 공간인 만주로 도망간다. 만주에서는 모든 이가 그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질주하는 무국적 신자유주의 코스모폴리탄 공간이라고 우겨보다가, 아편굴에서 해롱거리는데 그 지하실에는 '조선인' 어린이가 순수한 표정으로 갇혀 있다. 한국인들은, 혹은 한국인들이 만드는 문화적 컨텐츠는, 절대 일제시대를 그 자체로 직시하려 들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물을 타고 시선을 돌리며, 끝까지 '순수한 민족'의 맹아를 남겨두고야 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모든 균열은 한국의 자본가들과 그 워너비들의 욕망을 드러내준다. 대륙이 뭔지도 모르고, 국제 관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그저 대륙으로 질주해서 석유를 퍼오고 금을 캐오고 수익률 200%를 먹은 다음 다음 국내에서 떵떵거리는 꿈에 젖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타자'의 모습을 구성하는 일에 우리는 너무도 촌스럽다. 외국인들도 모두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떠는 '유사 한민족'으로 묘사하거나, 그도 아니면 바로 '놈놈놈'처럼 짐짓 코스모폴리탄인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백의민족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박수를 치거나. (알겠지만, 그런 장면도 나온다. 그건 '쿨'한 척하는 김지운 감독의 이중 기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관객들을 우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장면을 구상하고 넣음으로써 사실은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게 되는 그런 이중 기만 말이다.)

내가 여기서 비판의 대상을 '자본가'와 그 워너비들로 한정지은 이유는, 이 문제와 맞서기 위해 리얼리즘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말을 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이다. 앞서 레오네 영화 이야기는 안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잠깐 반칙을 저질러보자. 〈황야의 무법자〉가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감상주의에 빠지지 않는 덤덤함, 〈옛날옛적 서부에서〉에 치열하게 묘사되는 서부 개척시대의 난맥상, 뭐 그런 것들. '좌파'라는 말은 '우울하다'라는 말과 동의어여서는 안 된다. 우파들은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둥그렇게 원을 그린 다음 그 밖으로 삐져나가는 이들을 '치우쳐 있다'고 비판한다. 좌파적인 리얼리즘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그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놈놈놈'을 찍고 보고 즐기는 한국인들은, 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 그저 못된놈, 추한놈, 국제촌놈일 뿐이다. 외국인 노동자 임금 떼어 먹는 놈, 공항에서 내린지 10분도 안 된 외국인에게 ENG 카메라 들이밀며 한국 좋냐고 물어보는 놈, 그걸 또 TV로 보고 있는 놈, 그 놈 욕하는 놈, 외국 나가서 '자원 외교' 한다는 말 듣고 좋아하는 놈, 알프스 산 올라가서 기껏 신라면 큰사발 먹고 내려온 게 자랑이라고 떠벌이는 놈, 놈, 놈, 놈... 하, 징그러운 놈들.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2008-07-24

이건희와 송두율

최근 두 건의 중요한 재판이 있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 대한 것과, 송두율 교수에 대한 것. 두 판결 모두 집행유예로 마무리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무죄 판결로, 후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유죄 판결로 보인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집행유예의 문제가 아니라 구속수사와 불구속수사의 문제이다.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건희 회장을 구속수사하지 않았다. 반면 증거를 인멸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송두율 교수를 구속수사했다. 한국인들은 그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느냐 무죄 판결을 받았느냐로 그의 유죄와 무죄를 판가름하지 않는다. 순사에게 붙들려서 철창에 갇힌 후 콩밥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오직 그것만이 관건인 것이다.

똑같이 집행유예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건희를 무죄로 보게 만든 검찰의 마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광우병 대책회의 관계자들이 조계사에 숨어 농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손에 넘어가 '구속'되는 순간 대중들은 그를 죄인 취급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헌법 제1조를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의 형사소송법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천명하고 있지 않고, 동시에 국민들의 법감정 또한 '나쁜놈은 잡아넣어야지'에서 나아지고 있지 않다.

재판 결과만 놓고 보면 이건희와 송두율은 모두 유죄다. 하지만 그 결과에 수긍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두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무죄로 만든 것도, 또한 유죄로 만든 것도, 국민들의 법감정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는 검찰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08-07-23

이것 저것

1. 어젯밤 읽은 이코노미스트의 사설 "Twin Twisters". 진정한 시장주의는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프레디맥 패니맥에 공적자금을 퍼부어서 부도를 막는 것은 납세자들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것이므로, 아예 화끈하게 국유화를 해버린 다음 그걸 되팔아서 비싼 값에 팔고, 정상화된 시장 기능에 그 회사들을 다시 맡겨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화끈하다, 화끈해.

'시장주의'라는 말을 할거면 이정도 강단과 일관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그 어떤 정책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다면, 책이 나오기 고작 사흘 전에 사건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준의 글을 후다닥 써서 표지에 박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반면 한국의 '시장주의'는... 에휴.


2. 독도 문제 등에서 잃어버린 점수를 되찾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멕시코 피랍사건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다지 현명한 방침이 아닌 것 같다. 금전을 노린 단순 납치사건에 정부가 공개적으로 대응하면, 납치범들 사이에서 기대치가 높아지면서 동시에 긴장이 고조된다. 만에 하나 정치적인 이유로 이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더더욱 정부는 이토록 이른 시점부터 공개적으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높은 사람들의 '액션'은 대부분의 경우 긍정적이지 못한 효과를 낳는다.


3. 아주 오래간만에 알라딘 서재에 서평을 올렸다. 《갖고 싶은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이충걸, 위즈덤하우스 2008)이다. '독서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오래간만에 신선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위 링크를 타고 들어가면 전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쉽게 훌훌 읽어넘길 수는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에 실린 글 하나 하나를 읽는 것은 마치 잡지 한 권을 읽는 것과도 같은 감각적 포화 상태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을 '이충걸식 글쓰기'라는 편리한 단어 하나에 우겨넣어버린 후 치워버리지만, 이것은 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소비의 현란함을 논하는 글쓰기에서, 저자처럼 온갖 명사를 끌어내어,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형용사를 입혀놓은 후, 그 모든 언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걷게 할 수 있으니, 독자로는 더 바랄 게 없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잡지식 글쓰기'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구성하는 방식의 글쓰기이다. 저자는 '잡지에 싣기 좋은 글'을 쓰지 않는다. 대신 그 자체가 잡지가 되어버리는 그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4. 다크 나이트 보고 온 사람들이 난리다. 부러워라.

2008-07-21

외우내환의 시대, 언론의 진정한 가치

Foreign Policy 7/8월호 편집자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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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내환의 시대, 언론의 진정한 가치




외우내환의 시대입니다. 격동하는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가 하면, 급기야 금강산을 관광하던 국민이 북한 군인의 총에 맞아 피살되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절일수록 우리는 《Foreign Policy》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주식 투자를 했다가 시장 상황이 악조건에 빠져 괴로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미 《Foreign Policy》는 2008년 3/4월호, “세계 금융 공황, 머지 않았다”를 통해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세계 경제 전체를 위축시킬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지난호의 “건축가가 독재 권력 곁으로 가는 까닭”이라는 기사를 기억하십니까? 이 기사가 나간 이후 미국에서는 ‘양심적인 건축가’를 표방하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Foreign Policy》는 내일의 주가를 예측하지 않습니다. 다음 달의 트렌드를 논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오직 ‘본질’ 뿐입니다.

한때,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릴 때까지 중국 주가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루머가 떠돌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놓고 보면, 올림픽이 가져다 주는 경제적 효과는 오히려 마이너스인 경우가 많다고 존 호버만은 주장합니다. “올림픽을 다시 생각한다”를 놓치지 마십시오. 심지어는 개최국이 금메달을 더 잘 딸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며, 다만 거대 스포츠 마케팅의 각축장이 되어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번호 “Prime Numbers: 금메달”의 내용입니다. 다른 매체가 올림픽을 보도할 때, 《Foreign Policy》는 올림픽 이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아닌 아시아의 기적은 어디 있을까요. 아시아 국가 중 드물게 민주주의를 잘 시행하고 있는 인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호 커버스토리 “아시아의 기적- 중국식이냐 인도식이냐”가 바로 그 인도의 경제적 역사와 발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야쉥 후앙이 쓴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우리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진전을 서로 대립된 것으로만 치부하는 것이, 정작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시각의 변화입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두 마리 다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Foreign Policy》와 평화기금이 선정한 “2008 실패 국가 지수”를, 그 관점에서 바라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결과가 도드라집니다. 중동에서 독보적인 군사 강국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세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 민주주의를 다지지 못한 이스라엘을 FP는 ‘실패 국가’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라는 명칭 하에 UN을 도외시한 제2의 국제기구를 창설하고자 하는 미국의 정치적 기동 또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는 못합니다. “그들만의 리그 - 새 국제기구 구상, 왜?”를 읽어보십시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외우내환의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Foreign Policy》를 손에서 놓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Foreign Policy》는 차라리 하나의 풍향계와도 같은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도 못하는 일부 국내 언론과는 달리, 정확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국제 사회’라는 말은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닙니다. 기상 이변과 식량 가격 폭등 등으로 인하여, 지구촌 사람들은 다가올 폭풍을 바싹 웅크린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Foreign Policy》의 7/8월호는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제기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페이지를 넘겨, 격랑을 해쳐나가는 지성의 향연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어판 편집부

2008-07-19

치솟는 식량 가격, 그 위기와 해법

내일 앰네스티 회원모임에서 발표할 내용. 업데이트가 너무 뜸하다는 말이 있어서, 이거라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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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식량 가격, 그 위기와 해법

노정태, 2008년 7월 19일 발표.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7월 7일 사설을 통해, G8 정상회담에서 논의되어야 할 아젠다로 F-words 문제들, 즉 Food(식량), Fuel(연료), 그리고 Finance(금융)을 제시했다. 국제적으로 무게 있는 국가들이 선도적으로 나서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 들지 않는 한, 세계는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가디언의 주된 논지였다. 사실 이 세 가지 문제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내어 논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기서 우리는 식량 문제에 주목해보도록 하자.

시장에서 밀가루를 한 포대 사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예전에 비해 말도 못 할 정도로 식량 가격이 오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6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5% 중반까지 치달았다. 이것은 1998년 11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특히 식료품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구입하는 물품으로 구성된 생활물가지수는 작년 동월에 비해 7.0% 급등했다. 이것은 한국보다 정치적으로 취약한 나라들에서는, 정부에 대한 대규모 시위와 폭동 등으로 이어진다. 전 세계적으로 1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빈곤선 아래로 떨어졌다.

경향신문은 "조세테 셰런 세계식량계획(WEP) 사무총장은 “현재 전 세계 30개국 이상에서 식량 문제로 폭동이 발생했다”면서 “식량 안보는 이제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라 평화와 안정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도 지난달 안보회의에서 “식량과 원유를 둘러싼 국제 사회의 반목이 결국 전쟁까지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고 6월 22일 보도한 바 있다.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의 책임 관리자인 조세테 셰런(Josette Sheeran)에 따르면, 식량 위기는 "조용한 쓰나미"이다. 사람들은 뭔가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하지만, 공급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엄청난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 당연히 음식을 구입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이 증가하고, 저소득층이 저축과 투자를 통해 중산층에 진입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가령 현재 인도의 인구 절반 이상은 자신들의 소득 중 50% 이상을 식량 구입에 사용하고 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굶주린 사람들의 시위를 막기 위해 정부에서 사용하는 방식이 더욱 과격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모가디슈에서는 식량 가격 폭등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시위대에게 군대가 발포를 한 사례가 있다. 2007년 초 맥시코에서는 옥수수 가격이 400%가 뛰었다. 수천명의 러시아 연금 생활자들은 작년 11월 우유와 빵의 가격 통제를 요구하며 거리를 점령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식량 문제와 연료 문제, 그리고 미국으로부터 출발한 금융 위기는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금융 위기는 영국과 그 외 지역에서 경기 후퇴를 불러왔고, 그에 따라 식량 및 연료 가격의 폭등을 완화시킬 수 있었을 자금을 대거 이탈하게 했다. 수입 유가가 올라감에 따라 정부들은 곡식으로 자동차 연료를 만드는 일을 촉진했는데, 이것이 식량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본지가 지난 주에 밝혀낸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그 영향은 75%나 된다."

식량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선, 따라서 바이오디젤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디언에서 터뜨린 특종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이미 식량 가격 폭등의 주범이 옥수수를 이용한 바이오디젤임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 내용을 일부러 발표하지 않고 있었다. 석유 대신 옥수수에서 짠 기름으로 자동차를 움직이면,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곡물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 왜냐하면 미국 정부가 바이오디젤용 옥수수 재배에 큰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농부들이 실제로 팔리건 그렇지 않건 일단 디젤용 옥수수 농사를 지으려 들고, 따라서 사람이 먹어야 할 곡식의 재배 면적은 좁아지며 가격이 상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가가 치솟은 탓에 기계식 농업에 들어가는 비용이 높아졌고 그것 또한 식량 가격을 높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현재 먹는 음식은 비행기, 배, 트럭 등을 타고 온 세계를 쏘다닌다. 미국에서 재배된 옥수수, 베트남에서 나온 쌀, 이스라엘에서 만들어낸 오랜지 등을 우리는 늘 먹고 있다. 문제는 그 유통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가 불러오는 효과는 너무도 명백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난한 자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카길, 몬산토같은 대형 식량 기업들은 때돈을 번다. 농부들의 표를 잃지 않기 위해, 또한 '환경적'인 후보라는 이미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오마바와 매케인 모두 바이오디젤을 포기할 리가 없으므로 식량 가격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한국은 추곡수매제도를 통해 쌀 가격을 안정시키고 있지만, 정책적으로 농촌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기 때문에, 앞으로 식량 문제로 인해 시위를 하게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한 해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우선 문제의 근원인 바이오디젤을, 직접 곡식에서 짜내는 대신 폐식용유나 유채씨 등 비식량작물에서만 추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독일의 윤데 같은 지방에서는 모든 시내 버스가 폐식용유에서 추출한 바이오디젤로 움직인다. 연료 가격을 아끼는 것은 물론이고, 미세먼지의 발생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의 부안에서는 유채씨에서 기름을 짜서 바이오디젤 차량을 굴리는 방법을 모색하는 이들이 있는데, 정부에서는 그러한 실험을 '불법 차량 개조'로 보고 단속하고 있다.

둘째, 먼 거리를 이동한 식품 대신 로컬 푸드를 주로 섭취하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유가가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식품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은 식품들을 섭취할 수 있도록, 또한 도시 근교 소농업을 장려하는 식으로 정책의 방향이 설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소련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던 쿠바의 경우, 그 석유가 끊기자 지방의 창고에서는 식품이 썩어가는데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는 대규모 식량 파동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이후 쿠바는 도시민들이 텃밭을 가꾸고 소규모 식량 생산하는 것을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식량 자급자족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몇몇 생협, 즉 생활협동조합을 통해 로컬 푸드 섭취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역시 정부에서는 그다지 정책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

셋째, 가능한 한 육류 섭취를 줄이고, 생태 사이클을 덜 파괴하는 식품을 먹고 또 개발하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의 편집장 모이세스 나임은 중국과 인도 등 개발도상국에서 육류 섭취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 식량 가격 상승의 원인이라고 지목했다가, 그 다음 호에서는 그것보다 바이오디젤 정책이 진정한 문제라고 입장을 변경하였는데, 결론적으로 보자면 둘 다 문제인 게 맞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전 세계 경작지 중 70%가 소나 돼지 등에게 먹일 곡물을 생산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곱게 채식을 하면 식량은 결코 모자라지 않다. 이코노미스트에서는 '고기 대신 곤충을 먹으면 훨씬 효율적으로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라는, 다소 엽기적인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웃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만큼 육식으로 인한 식량 불균형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위에 제시된 세 가지 해답은 모두 국제적인 협력과 국내 정책적인 시행, 그리고 생활의 변화를 요구한다. 옥수수를 이용한 바이오디젤 문제는 한국인인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외의 비식량작물 및 폐식용유를 이용한 바이오디젤 개발과 활용은 정책적으로 장려될 필요가 있는데, 거대 석유 회사들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좋아하는 한국 정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고 도리어 방해를 한다. 시민사회의 각성과 행동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소규모 농업의 경우도 그렇다. 주말에 차 타고 교외로 나가서 주말농장을 하고 오면, 본인은 환경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가는데 드는 석유가 더 큰 환경적 피해를 낳는다. 그러니 자신의 거주지 내에서, 혹은 걷거나 자전거를 통해 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작은 규모의 농사를 지어야 한다. 생협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으니 여기서는 언급을 삼가도록 하겠다. 아무튼 생활 자체를 친환경적인 것으로 바꿔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고기 섭취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섭취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허구한날 삼겹살에 소주 먹는 회식 문화, 소고기 마블링이 잘 되었네 안 되었네 따지는 것에 목숨 거는 그런 종류의 육류 섭취에 문화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고기가 아니라, 고기를 먹는 방식과 그 문화가 잘못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식량 가격 상승, 유가 상승 등을 이유로 원자력발전이나 유전자조작 식품 등과 같이, 기존의 시각에서 문제시되고 있던 것을 재평가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네슬레가 유럽에서 GM 식품을 유통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식량 문제를 순수하게 공급 차원에서만 다루려고 한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크다. 국내에서는 전력 생산에 석유가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위기를 기회삼아 원자력 발전소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대신 더 큰 위험을 떠안겠다는 발상에 대해 우리는 단호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국제적인 식량 가격 상승은 더 많은 빈민층을 낳고, 그것은 결국 인권의 신장에 방해가 된다. 앰네스티는 아이린 칸 사무국장의 취임 이후 단지 자유권적 기본권을 수호하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다양한 측면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단체로 거듭나고 있다. 한국 앰네스티 회원들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식량 문제에 대해 명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참고문헌
“경향닷컴 | 유가·곡물값 폭등에 선진국 ‘안보 비상’,”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6221837155&code=970100.
전반적인 논의의 방향을 알기 위해 한번쯤 읽어봐야 할 기사.

“Editorial: The F-words | Comment is free | The Guardian,” http://www.guardian.co.uk/commentisfree/2008/jul/07/g8.globaleconomy.
식량, 연료, 금융 3대 위기에 대한, 매우, 아주 훌륭한 요약 보고서.

“Green.view: Let them eat bugs,” The Economist, July 2008,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displaystory.cfm?story_id=11731829&fsrc=RSS.
육식이 낳는 경제적인 비효율에 대한 보고서. 한국인들이 소 뼈를 삶아 먹는 Behavior가 문제라고 망발하는 한국인 장관이 있는 반면, 이코노미스트는 우리 모두 곤충을 먹는 behavior를 가져보는 게 어떠한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Managing Globalization » Business Blog »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 Blog Archive » No way to put food on the table,” http://blogs.iht.com/tribtalk/business/globalization/?p=751.
시장주의자이자 세계화론자인 다니엘 알트만이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 식량 가격의 폭등에 정책적인 오류가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자유무역의 확대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음을 강변한다. 흔히 말하는 ‘좌파적’인 시각과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

“Biofuel use 'increasing poverty',” BBC, June 25, 2008, sec. Europe, http://news.bbc.co.uk/2/hi/europe/7472532.stm.
바이오디젤 사용이 가난을 증대시킨다는 내용. 특히 남미 국가에서 문제가 심각함.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로』, 강양구 저, 프레시안북, 2008.
석유 이후 시대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국내에서 그에 대한 대비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가장 먼저 참고할만한 책.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기사를 모은 책 답게, 잡지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독성이 매우 높다. 두툼한 참고문헌 리스트가 각 장마다 달려있는 훌륭한 입문서.

2008-07-15

요즘 근황

1. 《Foreign Policy》 마감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오늘 저녁에 최종적인 교정을 보고, 미국에서 파일에 대한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업무 스케줄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18일이 발행일이니, 주말을 보내며 편집자의 말을 블로그에 올릴 생각이다.


2. 미국에서 인디맥이 파산했고, 프레리맥이랑 뭐더라, 아무튼 두 개의 거대한 금융회사가 휘청거리고 있다. 이 소식을 일요일 밤에 전해들은 나는, 월요일이 되자마자 냉큼 펀드를 환매했다. 그리고 오늘 주가를 확인하면서, 뚝뚝 떨어지고 있군 ㅋㅋㅋ 이러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환매 신청이 어제 들어간거고 기준가가 적용되는 시점은 내일이었나 그렇다. 알고도 당하는 기분이다. 망했다, 망했어.

대체 왜 하루씩이나 반응 속도에 차이가 날까?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대량 매도하기 위해 뭔가 필요한 절차라도 있나? 사실 주식을 직접 사고 팔아본 적이 없어서, 매도 매수 신청과 실제 거래 사이에 시간차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른다. 아무튼 하루씩이나 반응이 늦었다는 그게 놀랍고, 또 실제로 효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지는 것이 더욱 놀랍다.

계속 붙들고 버텨볼까 말까 고민이 많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일단 팔기로 했다. 어차피 팔아서 쓸 일이 있는 돈이기도 했다. 원유 가격이 떨어질 턱이 없고, 미국의 경제 위기가 쉽게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크루그먼이 3월에 경고한 바대로, 어설프게 베어스턴스를 막아주고 해결했다고 자축했다가 지금 더 심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나는 그런 뉴스를 대강 다 접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게 '내 돈'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데 있다. 글로벌 이코노미 시대에 사는 대가를 비싸게 치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로벌 이코노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대가를 비싸게 치른다.

아무튼 사회에 갓 발을 디딘 젊은이답게, 건실한 적금으로 회귀하기로 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제로는 손해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쁜 편이, 적립식펀드에 넣었다가 그 액수마저 깎이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낫다. 경기가 회복될만한 징조가 보이면 그때부터 다시 다른 투자 방법을 모색해야지.


3. 늘 하고 있었지만, 오늘 경향신문을 보면서 확실히 든 생각. 경향신문은 신문이 아니다. 다른 일간지들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집단이다. 금강산 피격 사건 같은 핫한 이슈 대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특집을 전면에 떡하니 박아버리는 것은 보통 배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러니까 경향이지 싶다가도, 이런 경향을 안 보니까 한국이 이모양이지 싶기도 하다. 어지간한 시사 주간지를 보는 것보다 값이 싼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인 안목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방식은 결과적으로 인터넷 시대의 언론으로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당장 뜨는 뉴스를 가장 빨리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서는 어제 뉴스를 편집해서 인쇄물로 보는 것도, 느리다. 일간지는 주간지에 비해 빠른 매체가 아니다. 다만 그 모든 인쇄매체들은 인터넷에 비하면 느릴 뿐이다. 한국의 다른 매체들도 경향처럼, 어떻게 트랜드를 따라잡을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무게감 있게 느려질까를 고민하기를 바란다. 그게 인쇄매체가 택할 수 있는 생존 전략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짚어본다.


4. 개인적으로 쓰기로 약속한 글도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주와 이번주는 거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월 10일 커트라인에 맞춰 기말 레포트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그게 고작 닷새 전 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20일은 산 것 같다.


5. 촛불집회에 대해 할 말이 많고, 두 편의 글로 나눌 수 있는 초고를 7월 9일에 써갈겨놓았지만, 지금 당장은 머리에 여유가 없어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찬양하는 이들을 비아냥거리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을 쉽게 내다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안타깝고 딱하다. 그나마 지금은 그 찬양자들도 집에 들어간 상황 아닌가. 담론의 질서를 재편해야 할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게 최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마감을 마무리지으면서 다시 현장에 나가봐야지.

2008-07-03

기사 두 개

"25살 동갑내가 스타 논객 3인방… 노정태·한윤형·김현진 '글발' 비결"(주간한국, 2008년 7월 3일)


"촛불의 길을 묻다 (좌담 전문)
[인권오름-민중언론참세상 공동기획 좌담 (1)] -김현진, 노정태, 미류, 완군, 한윤형
"(인권오름, 2008년 6월 18일)



...앞으로는 사진 찍을 때 절대 웃지 말아야지.



그냥 넘어가긴 약간 서운하니, 인권오름 좌담 자리에서 내놓았던 이야기 중 일부를 옮겨놓는다.

노정태 : 에너지를 광장에서 활용하는 방식을 찾아야겠는데, 가투로는 뭘 얻을 수 없고, 주민소환제로 한나라당을 흔든다는 발상인데 사람들은 광장 그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이 사람들이 오세훈을 소환해서 짜르자고 그렇게 결의가 모아질까. 정치의 실력이 필요한 건데 지금 가능한 후보가 없다. FTA 반대 함부로 내놓으면 노무현 찬성론자들로부터 그렇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물타기 하자니 민주당은 주저앉는 거고. 진보신당은 의석도 없다보니 운동단체 취급받잖아. 진보신당은 진중권당이 됐지.

지금 비전이 없다. 유가 뛰고 있고, 유류세 인하 이야기하지만, 전혀 해결 안 되는 거다. 디젤을 바이오디젤로 바꾸고 고유가 시달리지 않도록 하겠다, 일자리 창출 같은 이런 미래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 누구도 이걸 못한다. 시청자이자 소비자는 스스로 유권자로 생각하는데, 유권자로서의 정치적 소비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거다. 최장집 교수 이야기처럼 한국 대의제가 너무 대통령 집중제이고 위임민주주의인 건 맞지만 제도를 굴릴 수 있는 인간의 문제를 제도 자체로 화해서 어설프게 개헌 이야기로 가는 건 위험한 거다.



노정태 : 제도적인 차원보다 기술적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데, 민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나와가지고 슬그머니, 사립대 50% 재정을 정부가 감당하니까 대학을 공영화하자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안 한다. 대중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사할 수 있을 만한 정치적 동력을 누가 실어줄 수 없다. 지금 이렇게 막연한 변화의 에너지가 있을 때, 잘 체계화된 사민주의적인 구상이든 어떤 거든 총체적인 것이 주어지고 수렴되어야 하는데 그런 정도로 교활한 인간이 아무도 없다. 없다고 한탄만 하고 끝날 수 없는 게, 실제로 없으니까 이게 큰 문제다. 광장에 시민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지치지 않고 버티는 거. 버티면서 쇠고기 반대에 나온 사람한테 민영화 문제, 철도 문제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 광장에 천막 치고 있는 사람과 동대문 상인들 이야기를 일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 같다. 비정규직 유인물 나눠준다. 작은 변화 꾀하는 거다. 이게 중요하다.


정말이지 그 작은 변화들이, 매우 중요하다.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

'촛불시위는 지금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식의 주장이 적지 않고, 특히 '촛불시위는 노동조합의 하투와 연대해야 하고, 촛불은 내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2071님의 블로그에서 그런 주장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연대'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촛불을 내리고 집에 들어가 앉아있는 시민들이 대체 무슨 수로 노동조합과 '연대'한단 말인지? 방구석에 앉아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다운 방법이 없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런 행동은 그냥 이것 저것 다 포기하고 집에 가서 씻고 자는 거지, '연대'가 아니다.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서 "夏鬪後援論 使用說明書(하투후원론 사용설명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 '촛불을 내리고 하투와 연대'라는 주장만 있을 뿐 대체 그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특히 왜 연대를 하는데 꼭 촛불을 내려야만 하는지에 대한 논증은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최장집 학파가 주장하는 바대로,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가 마비되어 있고 그로 인해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촛불을 내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전부 묻혀버린다. 나는 저 글을 쓰신 분이 대체 '연대'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하다.

노동조합의 전면적인 파업과 그로 인한 실질적인 압박 없이는 촛불집회의 성공 가능성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을 나는 이 시위가 굵어지던 시점부터 꾸준히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계속 촛불시위에 나와야 한다는 말도 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노동조합에서 만든 유인물 등을 시청 광장에서 한 뭉테기씩 가져와 다른 시민들에게 뿌리는 활동을 제안한 바 있고, 나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해왔다. 헌데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광장에 시민들이 꾸준히 나와줘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고스피어처럼 인식론적 필터링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는 앞서 말한 방법론이 전혀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을 놓고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탈정치'를 개탄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잖아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오늘 밤에 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판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질긴 놈이 이긴다'라는 말을 나는 본디 매우 싫어하고, 그것은 그것이 신부님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촛불시위의 제1의 목표는 그 자체의 생존이지, '탈정치에 함몰된 대중들을 그 늪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적어도 지금 당장은) 달성 가능한 목표가 결코 아니다.

《아나바시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크세노폰의 선거 홍보용 기행문, 전쟁 참전 기록문, 아무튼 그런 건데, 거기서 그와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러면 우리는 너희들을 친구로 대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겠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친구가 된다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보다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희들이 우리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을 때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크세노폰에 따르면, 크세노폰의 간지나는 지휘 하에) 최소한의 피해만을 입으며 무사히 탈출하여 바닷가에 도착한다. 2071님의 블로그에서 본 "솔직히 촛불시위는 승산이 없다"라는 글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대답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이 무기라면, 한 줌의 도덕적 우월함이 무기라면,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절대 내려놓을 수 없다. 전경들이 왁 하고 닥쳐오는 순간에, 피해를 최소화하며 탈출하기 위해서는 절대 뒤로 황급히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람들이 더 현명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면, 최소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면서 말했으면 좋겠다. 지금 촛불을 내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종교단체가 '지도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그건 최대한 '탈정치적'이고자 노력했던 대책회의가 풍비박산나면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대책회의의 확성차가 살아있던 당시에는 모든 시민들이 다 '나는 지도부가 없는 게 좋아'라고 했다고 생각하나? 눈에 불을 켜고 대책회의와 싸우고 스스로 길을 뚫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건 대책회의 차량에 시비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웅성웅성 달려와서 '그래도 지휘부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은(대책회의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듯한 사람들을 제외해도 그렇다), 정말이지 겪어본 사람이나 아는 거란 말이다.

촛불을 내리면 시민들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제발 이걸 좀 인정하고 나서 다음의 대책을 생각하건 말건 하자. 무기를 내려놓으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노예가 되는 것 뿐이다. 정당정치가 마비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정당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촛불을 내리는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위해 노동조합과의 연대에서 가장 유용할 수 있는 무기를 내려놓는다는게 앞뒤가 맞는 소리이긴 한가? 나는 그런 의견에 반대한다. 크세노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2008-07-02

사제단의 등장, 정교분리 원칙, 그 외

1. 고립으로부터의 해방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개입은 그야말로 '칼같은 타이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만약 하루나 이틀 늦었더라면 시위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립되고 있다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내가 "고립과 연대"를 통해 드러낸 바와 같이, 거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 그 피의 밤이 지난 후 사람들은 '이대로 해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일부 극렬 분자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허망함을 모든 시민들이 학습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수업료 치고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의 미사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경향, 프레시안, 한겨레 등에서 적절하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수많은 시민들이 사제단과 함께 자신감을 되찾았다. 모든 과격 행위자가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궁지에 몰린 이들은 필연적으로 과격해진다. "우리는 촛불시위대가 아니다! 우리는 생존권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고 외치던, 6월 10일 버스를 부수고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을 내가 탓할 수 없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6월 29일까지, 시민들은 조중동을 비웃으면서도 조중동의 프레임에 갇히고 있었다. 나는 그 고립을 해소하기 위해 오직 '연대'를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제단은 다르다. 한 사람의 가톨릭 신자로서 말하자면, 적어도 교회라는 제도 하에서 나는 한 마리의 양이고 그들은 선한 목자를 대신하는 목동들이다. 너무도 적절한 시점에,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는 요한복음의 구절과 함께 나타나준 그분들께는 그 어떤 말로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시위대가 점점 더 고립되고, 경찰의 진압 강도는 그에 제곱하여 강해지며, 따라서 큰 인명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마다 두려웠다. 누군가가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고,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마치 고 김선일 씨 사건 당시 그러하였듯이 무리에서 낙오되어 쓸쓸하게 희생당한 이에게 아무 공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살아서 또 보게 되지나 않을까, 그런 것이었다.

사제단은 시위대에게 다시 한 번 '비폭력'을 요구했다. 그것은 (현재 아고라의 네티즌들은 '전경 가족, 여자친구'로 간주하고 있는) '비폭력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비폭력을 요구하는 목자들은, 스스로 단식투쟁에 나서고 있다. 비폭력 불복종에 동참하자는 목소리는 무리와 함께하고 있을 때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심지어 예수조차 자신이 제자들로부터 떠나야 하던 그 운명의 밤, 제자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한 바 있다.

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그들이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22, 35-38)


물론 아고라에는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까불거리는 인간들이 더 많다. 하지만 사수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식의 목소리가 현장에서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실로 우리는 무법자로 헤아려지고 있었고, 칼 두 자루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단이 촛불을 들었다. 그들이 촛불에게 요구하는 바는 바로 다음과 같다. 이것은 아직 예수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절, 이스라엘의 곳곳에 사도들을 파견하며 했던 말이다.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 3-5)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고립에서 풀려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연대의식을 회복하고, 내일부터 벌어질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적극 연대함은 물론이거니와, 여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부산항에서 미국산 쇠고기 컨테이너 박스의 반출을 막던 민주노총 조합원 10여명이 연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 비록 대대적이고 즉각적인 총파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는 분명 촛불과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정교분리에 관하여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사제단의 정치행위는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둥, '개신교 단체들의 시위에는 혀를 차던 사람들이 사제단을 보면서는 환호하고 있다'는 둥, 자신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모습이 다소 눈에 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건 전부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조문부터 살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제20조의 구조를 일별해보면 알 수 있다시피,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라는 대원칙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원칙이 우선 있고, 그것을 위해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이러한 헌법상의 조문만으로 '그러므로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행위는 위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헌법의 본래 취지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집단이 현실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구절을 해석한다면, 교회가 사회 정의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천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배척당해야 마땅하다. 혹은 그 반대로, 대한민국 헌법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독교 관련 정당들이 난립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헌법적 원리가 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 식이라면 독일 또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땅에 떨어진 나라가 될 것이다. 헬무트 콜이 수상 노릇을 하면서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정당의 이름이 '기독민주당'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 집단이 절대 정치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고, 그 반대로 정치 단체가 종교적인 원리를 스스로의 행동 강령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제도화된 거대 종교가 국가의 통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특히 '국교'라는 제도를 통해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 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처럼 '종교 위원회'가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 또한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헌법을 만들 때 고려할만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여기서는 논할 필요가 없다.

시위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단비와도 같은 사제단의 참여를, '정교분리'라는 단어까지 꺼내가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렇게까지 '쿨'하고 싶을까. 우리가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정치적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이 종교인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장로가 아니라 아예 목사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가 국민들에게 국교를 강요하지 않는 한(대한민국을 신에게 봉헌하는 따위의 문제는 따로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그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3.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기왕 루카 복음서를 펼쳐들었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짓는 편이 낫겠다. 아기 예수를 본 시메온이라는 의인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인 예수를 찬미한 후 아기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던진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 34-35)


할 일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집회에 나가지만, 이명박 정권이 뒤집힐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리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있다는 불안감만이 엄습해오던 것이 최근의 풍경이었다. 더욱 피곤한 것은 앞서 비판한 것과 같은 '쿨게이'들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려깊지 못한 말을 툭툭 던지지만, 막상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몇 배의 정신적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주의가 나를 유혹할 때마다, 루카 복음서의 저 구절을 생각하곤 한다. 부러 과격한 어조로 자칭 마초들을 논박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토론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 시위를 통해 이명박을 광장으로 끌어내고, 그가 국민들의 뜻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다투고, 결국은 너덜너덜한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 루카라고 불리는 복음서의 기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도리어 한 줄기의 희망을 보았다. 2008년 7월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손에 남아있는 것도, 결국 그 한 가닥의 빛이다. 물론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