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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0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형량 계산기' 김기춘 vs. '표결 계산기' 박지원

'성지 순례'를 위한 기사를 먼저 하나 소개해보겠다. 11월 27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오늘 아침까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접촉했다"며 "탄핵 공조자들이 60명을 훨씬 넘었다는 통화를 했다. 탄핵안은 확실히 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미 탄핵안이 통과된 이 시점에 우리는 박지원의 표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1명 기권, 234명 찬성, 56명 반대, 7명 무효. 새누리당의 이탈표는 총 62명으로 예상된다. 박지원이 옳았다. 그의 표 계산이 정확하게 맞았다. 11월 27일 현재, 그 시점까지만 해도 탄핵은 예정된 수순처럼 보였다.

그리고 11월 28일, 박지원은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두고 "대한민국 법 미꾸라지이자 즉석 형량 계산기"라며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의 지시로 차은택을 만났다고 언론에 밝힌 그가, 본인에게 돌아올 죄책을 박근혜에게 덮어씌우고 자기만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정국을 뒤흔들었다. 박근혜 본인을 향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본인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그의 말은, 탄핵을 향해 치닫던 비박계의 기세를 꺾고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이 묘수를 박근혜 본인이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특히 형사법체계에 통달한 누군가가 대신 내준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굉장한 한 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탄핵의 칼날이 순식간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로서 좀 받아들이고 논의를 시작하자. 야3당의 의석을 전부 더해도 167석이다. 탄핵에는 200표가 필요하다. 33표를 어디에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 '어딘가'는 당연히 새누리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1월 29일의 3차 대국민담화는 그 33표를 가진 새누리당 비박계를 뒤흔들었다. 그대로 탄핵 절차가 진행된다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야3당에 의해 발의는 가능하지만, 200표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박지원이 택한 경로는 당연히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1일에 발의하고 2일에 표결하기로 했던 일정을 수정하여, 9일에 표결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일주일 미룬다고 해서 백퍼센트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야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된 일주일동안 어떤 변수가 등장하여 비박계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얻으려면 일단 탄핵안 발의를 멈추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터져나온 후에도,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박과 친박을 가리지 않고 '새누리당'을 향해 강경한 비난의 어조를 높이면서, 그들의 표를 얻어내기 위한 다른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은 채, 그냥 표결을 하자고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결이 아니라 부결을 향해 달려가는 질주와도 같았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3000만명이 아니라 300명이 하는 투표다. 누가 무슨 표를 던질지 투표 개시 전에 미리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 모든 정치적 불이익과 야당 강경파들의 야유를 무릅쓰고 양심적인 비박계 및 새누리당 탈당파 33명이 표를 던져주기를 염원하면서 2일에 탄핵안을 표결한다는 것은, 낙하산을 매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묻지마 표결 강행이었을 뿐이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형량 계산기'에 맞설 수 있는 '표결 계산기'가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 혐오발언 등에도 굴하지 않고 9일 표결안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고, 그동안 탄핵 정국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 새누리당에서 62명의 이탈표가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만약 2일에 그대로 표결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건 박근혜, 혹은 '형량 계산기' 김기춘의 뜻대로 정치권이 놀아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야권 일각에서는 그렇게 '망하는' 결과가 벌어졌을 때, 국민들이 분노하여 '촛불 민심'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는 탄핵당하지 않고, 하야하지도 않고, 내년 대선까지 쭉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안정국을 강화해나갔을 것이다. 국민들은 광장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탄압당하고, 얻어맞고,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져간다. 그렇게 쌓이는 불만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세력은 미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박근혜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기대어 손쉬운 대선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12월 1일까지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치권이 갇혀 있었던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꺼내는 것도 요즘은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랬다. 탄핵안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는 민주당 주류의 입장은 진정 솔직한 것이었고, 또 합리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민주당 주류, 즉 친 문재인 계열은, 문재인을 제외한 다른 대선 주자가 부상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핵안 가결'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현재의 탄핵 정국을 2004년의 그것과 1:1로 대조하는 사람들이 현 정국의 초반에 탄핵 절차 진행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 탄핵과 이 탄핵은 완전히 다르다. 여당을 탈당하고 미니 여당을 차린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는 아직도 거대 여당 소속 대통령이며,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과 박근혜의 온갖 비리 혐의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등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이 탄핵에 동참하는 것은, 일종의 속죄 의식으로 작동한다. 박근혜를 탄핵함으로써 비박계,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구 친이계는 박근혜와의 선긋기에 성공하고 오명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근소한 차이로 탄핵에 성공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비박계가 심지어 새누리당을 탈당하지도 않은 채로 압도적인 탄핵 찬성표를 끌어올 수 있다면, 그들은 새누리당 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고, 새누리당의 자산을 잃지 않은 채 조기대선 국면에 임할 수 있다.

대체 왜 민주당의 주류는 탄핵 정국에서 계속 한 발씩 늦게 움직이고, 불필요한 돌발 행동과 강경 발언으로 비박계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12월 3일 촛불집회에서까지 '탄핵'이 아니라 '하야'를 외치고 있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지렛대삼아 비박계가 부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은 표 차이로 탄핵이 가결되어 도덕적 면죄부를 얻었지만 새누리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비박계가 집단 탈당하여 '제3지대'를 형성하는 것도 원치 않고, 지금처럼 비박계가 세력을 과시하며 새누리당을 재접수하는 것도 민주당 주류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기 없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대선이 치뤄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탄핵안은 안타깝게 발의되지 못하거나, 발의된 후에 부결되어야 하거나,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

국민의당의 셈법은 좀 더 복잡했다. 가결되되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어, 친박과 비박의 싸움이 좀 더 커지고, 이른바 '제3지대'가 넓어질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속죄 의식을 제대로 치렀지만 그 결과 갈 곳을 잃어버린 구 새누리당 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해가며 '합리적 중도'로서 외연을 넓힌다거나, 아니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안철수 외의 다른 대선 주자를 수용할 여지를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박계가 아예 새누리당 내에서 이겨버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그다지 이익을 볼 수가 없다. 반면 탄핵안을 발의하지만 실패한다면 애초부터 탄핵론을 펼쳐왔던 안철수의 입지가 더욱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반드시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국민의당은 일단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상황이지만, 너무 많은 표 차로 탄핵에 성공하면 그렇게까지 즐거운 상황은 되지 못한다. 반면 민주당은 지지층을 향한 강경 발언과는 별도로, 탄핵을 통해 비박계가 속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므로, 우상호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탄핵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는 쪽이다. 비박계는 탄핵을 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성공한다면 최대한의 표를 이끌어내어서 승리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각 정당이 얻게 되는 보상의 상대적 선호도를 -1, 0, 1로 놓고 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1-1-1

민주당 입장에서는 작은 표차로 이기는 것보다는 부결되는 게 훨씬 낫다(2점 차이). 국민의당은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일단 탄핵안을 가결시켜야 1점의 손해를 안 볼 상황이므로, 새누리당이 4월 퇴진을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비박계는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탄핵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아예 참여를 하지 말아야 마이너스 1점의 손해를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부결되는 것이 이득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죄수의 딜레마였다. 무기명투표를 이용해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그 비난은 민주당이 아니라 비박계, 더 나아가 국민의당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1일과 2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보수 성향의 일간지 뿐 아니라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진보 계열 언론에서도 행간에 녹여 계속 언급하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간절하게 탄핵의 성사를 원하는 쪽은 국민의당과 비박계이지만, 그들은 민주당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반면 민주당은 굳이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간절한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급격한 여론 변화와 보상 매트릭스 변동

12월 3일의 촛불시위 이전까지의 계산이 그랬다. 그 후 지역구 의원들에게 쏟아진 전화, 문자, 메신저 등 또한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욱 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 총선이 무려 3년이나 남았고, 다음 총선은 다음 총선의 이슈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전방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의 압박이 정치권의 보상 매트릭스를 바꿔놓았다.

일단 민주당은 더 이상 탄핵 여론의 발목을 잡으며 한 템포 늦게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온라인 여론전에 힘입어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었으나, 문제는 문재인의 지지율이었다. 성난 탄핵 찬성 여론을 이재명이 모두 쓸어가면서, 물론 경선을 하면 어떻게든 문재인이 이길 테지만, 불안감이 커진 것이다. 탄핵안이 부결되고 '촛불정국'이 이어진다면 문재인이 아니라 이재명만 좋은 일이 되어버린다. 탄핵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민의당과 박지원은 2일로 예정된 탄핵 투표를 9일로 미루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해놓고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라는 국민 여론의 불만을 한 몸에 떠안았다. 부결되고 나면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국민의당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변함이 없지만 손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여기서 빠진 변수가 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4월 30일 18:00를 기해 나는 모든 권한을 여야가 합의한 총리에게 넘겨주마' 같은 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면 탄핵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런 수를 두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헌재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비박계와 접촉을 했는데 이빨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해버렸을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고 책상을 두드리다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갔을까? 내게 주어진 정보 하에서는 알 수가 없고, 결론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므로, 일단 넘어가자.

비박계의 셈법은 변함이 없었다. 표결에 참여했는데 부결되면 곤란하다. 표결에 참여한다면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에서 배신표가 나올 여지가 사라졌고, 너무도 이상하게도 청와대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낌없이 투표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공적 용어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이른바 '촛불 민심'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의원 압박의 결과로 변경된 보상표를 다시 그려보자.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2-2-2

이제 죄수의 딜레마는 해소되었다. 부결되는 것은 모두에게 확실한 손해를 안겨준다. 작은 표차로 가결되어서 국민의당이 이익을 보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민주당으로서는 감수해야 한다. 부결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박계는 일종의 꽃놀이패를 쥐고 탄핵안 표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혹자는, 아니 적잖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여론조사 결과와 딱 맞아떨어진 국회 표결 결과'를 두고 감탄하는 모양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회의원을 리모콘 삼아 국민의 여론조사 그대로 움직이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만약 12월 1일 '여론' 그대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12월 2일 표결했더라면, 국민의 여론과는 완전히 다른 국회 표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2월 9일의 탄핵안 투표가 여론조사와 우연히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12월 1일에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거슬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꿋꿋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정치인의 이름은 박지원이다.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박근혜 게이트를 두고 박영선 의원에게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자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일갈했던 박지원의 성차별적 의식과 발언을 나는 여전히 규탄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남자들이다. 게다가 박근혜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자식'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온 정치인이다.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실패를 보상하는 방법은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고, 그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는 것 뿐이다. 나는 성차별주의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한, 구시대 정치인 박지원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2016년 12월의 탄핵 정국 속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한 명 선정하면, 그건 당연히 박지원이다. 그가 홀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가며 '1일 발의 2일 표결'안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12월 3일의 촛불 시위대는 앞으로 벌어질 표결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실패로 돌아간 표결의 절망을 안고 거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미 정치 외의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이기는 경험'을 해온 사람들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세계의 벽' 앞에 무릎 꿇는 비루함이 극복되었다. 김연아 선수를 대표로 한 여러 스포츠인들의 활약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 수출국이며 경제 강국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정치에서만큼은 '우리 정치권이 힘이 약해서 저 악당들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찌질한 서사가 아직도 통용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국민 여러분이 힘을 모아주시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정치 세력, 적어도 나는 절대 사절한다. 욕을 먹을 때 욕을 먹더라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치권 내부의 논리에 부합하는 행보를 하는 그런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나는 원한다. 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는데 성공한 기쁜 날,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긴 글을 써 보았다. 이것은 국민의 승리이며 정치의 승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2016-12-02

탄핵은 대박이다

지지난주 토요일의 일이다. 충무로 인근에 즐겨 가는 한 식당이 있다. 닭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집이며 백숙을 잘 삶는다. 그런데 광화문 집회를 몇 시간 앞두고 좀 일찍 저녁을 먹으려 가보니 닭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리면서 광화문과 종로 인근을 넘어 충무로까지 식당 매진 사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창조경제라면 창조경제다. 요즘 분위기 살아난 광화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말만 되면 한산하기 그지 없었던 종로와 청계천 일대 상가들까지 '촛불 특수'로 북적거리게 만들었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경찰이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통행을 막지 않으니, 2008년에는 아예 장사를 못하고 울상이었던 광화문과 종로 인근의 대형서점들도 부쩍 늘어난 유동인구의 온기를 느낀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촛불 호경기는 웃을 일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앉아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통째로 마비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기업들은 박근혜 게이트의 불똥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임원 인사를 한없이 미루고 있다. 경제 성장률 하향이 예상되지만 민간이건 공공이건 경제 연구소들은 한없이 비관적인 수치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체감 경기는 한없이 얼어붙었고,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5000원짜리 순댓국집들 중에도 폐업하는 곳이 보인다.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가 정말 굉장한 것이다. 관련 보도를 인용해보자.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6년 11월 소비자동향조사’ 자료를 보면 1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5.8로 조사됐다. 10월보다 6.1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94.25) 이후 7년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링크)

한국 대기업들에 대한 신뢰 역시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다. 우리 한국인들끼리야 원래 그랬거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현실이 영화보다 저질이구나, 하고 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외 투자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정 불안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원화 가치 하락이 겹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빠르게 돈을 빼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연루돼 총수의 이름이 거론되는 삼성전자(11월 1일 이후 순매도 4627억원), 현대차(321억원), SK텔레콤(408억원) 등 9개 재벌 그룹 관련주도 대부분이 외국인 순매도를 기록 중이다. 이 9개 그룹이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육박한다."(링크)

국내 소액 주주들의 심정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당신이 해외 투자자라고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을 잘 만들어서 수익을 내고 배당도 많이 해달라는 생각에 그 비싼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했는데, 그 삼성전자가 정유라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승마 선수를 위해 수십억 짜리 말을 사고 관리비까지 대고 있었다고? 그래서 검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하고 있다고? 이건 갤럭시 노트7이 폭발한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황당한 사건 아닌가?

시간을 한 달 전으로 되돌려보자. 당시만 해도 한가한 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대통령에게는 외치와 국방을 맡기고 내정을 전담할 책임총리를 임명하면 어떻겠느냐는 식의 공허한 정치적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정치권에서 시끄럽게도 울려퍼졌다. 바닥 경제가 말라붙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돈보따리를 챙기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기상천외한 소리들을 하고 있는 판에, 한국의 정치권 중 일각은 이 난국을 합법적 절차에 의해 해결하려 들기는커녕 최대한의 정략적 이해만을 도모하다가 헛된 시간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궁지에까지 몰렸다. 누군지 몰라도 법에 대해 잘 알면서 동시에 정략적 이간질에 능숙한 사람이 대신 써준 듯한 3차 대국민 담화문이 투척되자 일순간에 탄핵 대오가 흔들렸다. 이대로는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을지언정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게 분명한데도 야권 일각의 분노한 지지자들은 같은 편에게 '사쿠라', '부역자'라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나는 대체 왜 이런 지지자들의 행태를 제1야당에서 제지하지 않는지 의아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중요한 건, 이제 더 물러설 길이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를 탄핵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산다. 최순실이 대신 써줬다는 의혹이 있지만 최순실 본인은 한사코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표현을 빌려보자. 탄핵은 대박이다. 끝없는 불황의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반전시킬 수 있는 단 한 장의 카드가 바로 탄핵안 가결이다.

생각해보자. 박근혜를 탄핵시키자고, 하야를 촉구하자고, 수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들면서 일대의 경기가 매주 주말마다 불타오른다. 만약 적법한 헌법적 절차에 따라 박근혜의 대통령 권한이 12월 9일 정지된다면 온 나라가 광장으로 돌변할 것이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던 유족들도 환호성을 질렀던 것처럼, 4%의 골수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오늘날의 불황 속에 소비심리를 진작시키고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이벤트가 이것 외에 또 있을까?

탄핵은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불안정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법이다. 탄핵안이 통과되는 날 시민들은 축제를 벌이며 주가는 폭등할 것이다. 어쩌면 출산율도,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중요한 건 탄핵안이 부결될 경우 현재의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으며 무기력한 분위기가 반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탄핵만이 해법이다. 이제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광장에서 사진 찍을 생각 하지 말고, 비박계 의원들에게 '충성충성충성' 문자 보내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부정청탁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로비를 퍼부어라. 광장은 시민들이 알아서 지킬테니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일을 하란 말이다. 오직 비박계의 표를 확보해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것이 당신들의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영국의 권위있는 경제지 『파이넨셜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청하며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박근혜가 결국 무대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더욱 강력한 민주주의와 함께 이 사건으로부터 솟구쳐오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만한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링크) 성공적인 탄핵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지금 탄핵하지 못하면 박근혜는 끝까지 버티려 들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경제가 버텨줄 수 있을까?

탄핵은 대박이다. 12월 9일은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하는 날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 부활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다. 탄핵안 가결을 위해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2016-11-15

탄핵 역풍? 노무현을 모욕하지 마라

노무현은 왜 탄핵을 당했을까? 대통령이기 이전에 변호사였던 노무현은, 본인의 발언이 선거법에 위반될 수 있음을 뻔히 알면서, 왜 공개적인 경로로 자신이 속한 신생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것일까?

물론 일각에서는 그가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일부러 대통령 탄핵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의 '선거 개입' 발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도전이었음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간과하는 듯하다. 그는 대통령이 한 사람의 정치인이자 정당인으로서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우리는 1987년까지, 그리고 어쩌면 그 이후로도, 지속적인 정권의 선거 개입을 목격해왔다. 그러므로 '대통령의 선거 개입'은 무조건적으로 막아야 할 일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만들어진 공직선거법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얼마 전 치뤄진 미국 대선에서 전례 없이 높은 임기 말 지지율을 자랑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은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유세장을 찾아다니며 온갖 종류의 연설을 했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라고 클린턴을 소개하고, 상대편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를 비판하면서, 클린턴의 약점인 '인간적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다. 심지어 영부인 미쉘 오바마까지 동원해가며 말이다.

2016년 미국 대선의 경우, 권력 기관의 '선거 개입'은 오히려 야당 후보를 돕기 위해 벌어졌다. FBI 국장 제임스 코미가 이른바 '이메일 게이트'에 대한 재조사를 거론하면서 막판 부동층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트럼프를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클린턴이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이라 예상되었던 모든 경합주를 빼앗기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통령제를 택하는 민주 국가의 경우, '선거 개입'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FBI, 경찰, 국가정보원, 기무사, 기타등등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그런 '선거 개입'이 첫번째다. 우리의 헌정질서는 바로 그런 '선거 개입'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선거 개입', 즉 여당의 당원인 대통령이 공개적인 발언 등을 통해 여당의 선거운동을 지원하는 '선거 개입'도 있다.

노무현의 의지는 첫 번째의 '선거 개입'을 철저히 차단하는 대신, 두 번째의 '선거 개입'을 할 수 있는 권리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노무현은 자신이 탄핵당하게 된 사유 그 자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또 대통령의 신분으로 공직선거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이유다. 다른 공무원들과 달리 대통령은 '공직자'이기 이전에 '정치인'이므로 정치적 활동을 금지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발언'에 대한 제약이 존재한다면 대통령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활용하여 선거에 개입할 유인동기를 갖게 된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개선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발상이다. 국민에게는 결사의 자유가 있고, 대통령 또한 국민이며, 따라서 선출직 공무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헌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을 제외한 수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을 허용한다. 다만 권력기관을 동원한 음성적 '개입'을 철저히 금지할 뿐이다. 왜 대한민국에서는 그러지 말아야 하는가?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은 이렇듯 그 자체가 헌법적, 더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판단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설령 노무현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자체가 논쟁할만한 사안이라는 것만은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은 '다른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을 뿐, 민주적 헌정 질서 그 자체를 부정하려 들지 않았다.

당시의 국민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민주주의인가'의 문제지,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는 사안이 아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발의될 때부터 찬성보다 반대가 더 많았던 것이다. 탄핵안이 발의된 2004년 3월 9일 당시의 신문을 인용해보자. "조선일보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9일저녁 전국 성인 714명을 상대로 전화 조사한 결과 탄핵반대가 53.9%, 찬성이 27.8%였다."(링크)

심지어 국민들은 그 탄핵안이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같은 기사를 더 읽어보자. "국회 본회의에서 탄핵소추안의 통과를 전망하는 답변자는 24.4%이며 부결을 전망하는 답변자는 50.3%였다." 왜냐하면 애초에 대통령을 탄핵할만한 '깜'이 되지 않는다는 게 누가 봐도 명확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다만 "노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는 의견은 60.8%이며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은 30.1%로 조사됐다." 그는 사과하지 않았고, 발의된 탄핵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어 헌재로 향하게 되었다.

탄핵 불가론 등을 운운하는 야권 내 주류 세력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박근혜-최순실-우병우 국정 농단 사건과, 노무현의 '선거 개입' 논란이, 당신들의 눈에는 동등하게 보이는가?

전자는 두말할 나위 없는 국정 농단이다. 최대한 빨리 그들을 처벌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후계자에게 합법적으로 넘겨야 하는 사안이다. 반면 후자는 '지금과는 다른 민주주의'를 꿈꾸던 이상주의자가 대통령 당선 이후 새 당을 만들더니 기존의 민주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그 외 보수 세력을 자극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특히 구 민주당의 열렬한 지지자들에게 대북송금특검에 뒤이은 열린우리당 창당과 대통령의 입당은 굉장히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지만, 그것은 어쨌건 최순실-우병우-김기춘 일당의 국정 농단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말이다.

실제로 국민들은 현임 대통령의 국정 농단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고 있다. 정치권 내부의 갈등이 오작동하고 불거졌던 2004년의 경우와 달리, 현재 국민들의 60퍼센트 가량은 박근혜 대통령이 사임하거나 탄핵당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탈당하고 여야 합의 총리에 국정을 이양해야 한다는 의견은 18.4퍼센트에 지나지 않으며, 박근혜 대통령이나 김병준 국무총리 임명자가 중심에 서서 국정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14.1%에 불과하다.

한편 박근혜 대통령이 제1차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10월 25일 조사에서는 ‘자진 사퇴 및 탄핵’ 의견이 42.3%를 기록했고, 1주일 후인 최순실씨가 긴급 체포되어 검찰 조사를 받았던 11월 2일 조사에서는 55.3%로 10%p 이상 더 늘어난 데 이어, 역시 1주일 후인 이번 9일 조사에서는 60.4%를 기록하며 25일 조사 대비 20%p 가까이 ‘자신 사퇴 및 탄핵’ 여론이 더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링크)

놀랍게도, '이 탄핵'과 '저 탄핵'이 뭐가 다른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보지도 않은 채 그저 '탄핵 역풍'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다름아닌 노무현의 이름과 이상을 내걸고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과 그 정치인의 지지자들이라는 것이다. 노무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다가 탄핵을 당했는데, 그의 유지를 받든다는 세력은 누가 봐도 잘못된 짓을 하다가 탄핵을 당하게 생긴 악당들과 노무현을 등치시킨다. 그들에게 '이 탄핵'이건 '저 탄핵'이건 중요한 건 그 내용이 아니라 그저 '탄핵 역풍'을 안 맞는 것 뿐이라는 뜻이다.

국민들은 '이 탄핵'과 '저 탄핵'이 다르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다. 과거의 그것에는 정당성이 없었지만, 현재의 국정 마비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는 한이 있더라도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양자를 혼동하는 세력은 오직, 과거에 '탄핵 역풍'으로 재미를 본 바 있는 사람들 뿐이다. 이 역설은 너무도 받아들이기에 괴롭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겠다는 사람들이, 노무현을 박근혜와 같은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2004년의 탄핵은 '떡고물'이 떨어지는 정치적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노무현에게 그것은 끝까지 '쪽팔려'가며 싸워야 할 어떤 민주주의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팔아 정치 생명을 이어가는 세력이 본인의 이상을 이토록 진흙탕에 처박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이 탄핵'과 '저 탄핵'은 분명히 다르다. '탄핵 역풍'을 걱정하며 똑같은 범주로 싸잡을 사안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뜻을 받든다는 이들이 더 이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2016-11-12

박근혜를 사면하라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왜 박근혜 대통령은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사임하지 않을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그의 뒤를 이어 대권에 도전하고 안위를 보호해줄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노태우가 있었기 때문에 직선제 개헌 수용이라는 도전을 할 수 있었다.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대중적 인기와 후광이 돌아오게 한 후 퇴임했고, 노태우는 대통령이 된 후 3당합당을 통해 김대중과 '재야'를 제외한 반대파를 모두 흡수했다.

물론 여당의 일원이 된 김영삼이 결국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5공 세력에게는 나름의 탈출 전략이 존재했으며 그렇기에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 넓게 잡아 친박에게 주어지지 않은 정치적 선택지가 바로 그것이다. 친박(이라는 게 뭔지 현재로서는 대단히 아리송하지만)은 마치 박근혜라는 텅 빈 인물을 데려다놓고 대통령으로 만든 후 권력을 잡았듯, 반기문이라는 또 다른 텅 빈 인물로 그 자리를 채워넣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반기문의 유엔 사무총장 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기름장어는 박근혜의 지지율이 거덜나자 재빨리 손을 떼는 모양새이다.

박근혜에게는 퇴로가 없다. 단지 정치적 수명의 문제가 아니다(애초에 박근혜라는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 듯하고). 지금 하야하면 곧장 감옥에 갈지 모른다는 아주 원초적인 공포심이 박근혜의 결단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권의 대선주자들 중 일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조건으로 사면을 약속해야 한다. 특히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일수록 그러한 유화책을 내걸 때 박근혜의 사임을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사인의 천관율 기자가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1) 박근혜는 헌법적 정당성을 가진 대통령이며 2) 시민사회는 불법적 쿠데타를 저지르지 않는 한 그를 끌어내릴 수 없다. 다시 말해 3) 박근혜가 임기를 끝내지 않고 조속하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스스로 사임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뿐이다.

이 시점에서 시민사회와 대통령의 대립이 장기화될수록 대통령과 청와대가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아직도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인사권이 있고, 국정원과 일베 같은 초특급 정보 기구들도 그의 수중에 있으며, 길거리에서 덜덜 떨면서 시위해야 하는 시민들과 달리 대통령은 따뜻한 청와대에서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명박도 그런 식으로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 버텼다. 박근혜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가 잔여 임기를 채울 가능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경찰과 검찰은 그냥 청와대의 편을 드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최근 몇 주 동안 경찰의 태도가 눈에 보이게 유순해졌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권력기구이며, 청와대의 편이다. 단지 지금 여론이 너무 안 좋기 때문에 시위를 '보호'해주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근혜 개인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과, 그를 청와대에서 끌어내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박근혜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청와대에서 버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를 감옥에 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그러므로 여기서 누군가는, 적어도 '정치인'이라면, 박근혜에게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사임한다면 사면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 물론 수많은 이들에게 비난받겠지만, 현재 '쪽팔려서' 여당을 지지하지 못하는 부동층들의 여론을 수습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우병우와 최태민 일가 및 김기춘의 비위를 최대한 밝혀내고 처벌할 수도 있다.

박근혜를 사면하라. 그리고 그를 청와대에서 쫓아낸 후, 박근혜 외의 모든 악인들을 처벌하라. 이러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치인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지지하겠다.

2016-11-10

박근혜, 클린턴, 정치인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볼 때 놀랍게도 박근혜와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박근혜는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애' 시절을 넘어 정계에 재입문한 이후의 박근혜에 대해 생각해보자. 박근혜는 '여성스러움'을 무기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박정희가 낳은 삼남매 가운데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활동 가능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딸'임을 굳이 강조할 이유가 없다. 그는 중성 명사인 '후계자'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성 정치인 박근혜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9말0초의 진보진영은 한바탕 뜨거운 '논쟁'을 했다. 그런데 그걸 논쟁이라고 불러도 될까? 실상은 '여자로서 박근혜를 지지한다'고 말한 최보은에 대한 인간사냥에 가까웠다.

그 인간사냥이 문제였던 것은 최보은의 '지지 선언'의 반어적 맥락을 무시했다는 것 뿐만이 아니다. 최보은을 몰아가던 자들, 대표적으로 김규항 같은 사람들은, 2002년 당시 정치인 박근혜가 지니고 있던 중요한 페미니즘적 함의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 유효했던 상황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역할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박정희의 생물학적 후계자 중 주류 정치권에서 활동 가능한 유일한 소실이라는 정치적 역할이 박근혜에게 할당되었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성 역할을 밀어내버렸다.

그러므로 박근혜가 페미니스트 정치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비판을 부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성으로 태어나고 살고 있지만 박근혜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두고 '섹스는 여성이지만 젠더는 남성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는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성'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자의건 타의건 수행하고 있었던 '여성의 성 역할 거부'는 '남성 되기'와 동일시될 수 없다. 힐러리 클린턴의 역사적 대선 도전이 실패로 끝나고 나니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과 검증을 당한 대선 후보는,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얼마나 거센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나긋나긋한 굿 와이프' 따위의 역할을 거부했다. 빌 클린턴의 불륜은 힐러리 클린턴의 '성적 매력'에 대한 온갖 종류의 시시덕거림을 낳았지만, 애써 '사랑으로 결합한 부부'의 모습을 연출해서 보여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본인의 성별로 인해 남자들이라면 받지 않을 검증과 비난과 모욕을 당한다는 사실을 힐러리 클린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비난은 그가 '스마일링 맘' 같은 태도를 취하면, 요컨대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익숙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사회적 태도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줄어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은 언제나 단호하게,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태도를 고수했다. '정치인'으로서 페미니즘적 의제를 선언하고 또 실천했다. '굿 와이프'로서의 자신을 연출하면서 가부장제와의 타협을 도모하는 대신, 가부장제 사회가 '여자 정치인'을 받아들일 때까지 모욕을 참고 견디며 자신의 일을 하는 편을 택했다.

그렇게 백악관 시절 이후 뉴욕 상원 의원으로서의 경력이 쌓였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대단한 정치인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뒤틀어서, 가령 '남자들이 어질러놓은 정치판을 뒤치닥거리해주는 엄마' 같은 역할을 감내하지 않고서, '여성이면서 워싱턴 정가를 주무르는 정치인'이 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박근혜가 본의 아니게 도달한 지점도 사실 그와 같았다. 박근혜는 '아줌마'도 '아가씨'도 '엄마'도 아니었다. 한때의 '영애'였지만 성인으로서 정치인이 된 후에는 줄곧 '박근혜'였을 뿐이다. 그것은 그가 물려받은 정치적 상징 자산에 힘입은 것이지만, 사실 정치권 내에서 커리어를 쌓고 싶은 모든 여성들이 누려야 마땅한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의 자리를 그냥 획득했고, 그에 딱히 미련을 갖지도 않았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대한 2차 대국민담화에서 그는 '대통령'의 표정을 버리고 '죄송하다고 울먹거리는 중년 여자'를 드러냈다. 사사로운 정에 휘둘리고, 실은 멍청하고,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 한 게 아니라며 푸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자면,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높은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둘러대는 모든 종류의 부정적 성 역할을 있는 그대로 재현했다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정치적 수명은 바로 그 시점에 끝났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은 '중성 명사로서의 정치인'이라는, 그가 평생에 걸쳐 싸워 얻어낸 위치를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를 수십년에 걸쳐서 사냥했던 적들이 간절히 원하는 그 전리품만은 절대 내어주지 않은 것이다. 힐러리 로뎀 클린턴이 선거에서 졌다고 눈물을 흘린다면, 다른 여성 정치인들이 '울지 않을 자유'를 빼앗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와 클린턴 모두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되, 사회적으로는 '여성'이 아닌, 어떤 중간지대에서 자신의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정치 경력은 반드시 이 시점에서 끝장이 나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의 가장 높은 유리천장에 대한 도전은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을 거부하면서 정치적 커리어를 쌓는 여성은 앞으로 더욱 늘어나야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그리고 비록 선거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힐러리 로뎀 클린턴을 지지한다. 여성의 사회적 성 역할에 갇히지 않은 채 정치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는 더 많은 여성 '정치인'의 출현을 두 손 모아 소망하면서 말이다.

2016-11-08

거국중립내각은 최순실의 꿈을 꾸는가

최순실-박근혜-청와대 스캔들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국민이 대통령에게 위탁한 권력이 엉뚱한 곳에서 휘둘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권력을 이용해서 무슨 '갑질'을 했건, 어디에서 얼마를 '해먹었'건,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도 않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듣도 보도 못한 누군가에게 국가의 핵심적 권력 행사를 위탁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다.

정치권 내에서 무슨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번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라면, 내게 주어진 정보를 이용해서 이런 저런 계산을 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사이비 종교 교주에게 빠져 그 딸에게 국정 전반의 전권을 위탁했다'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사실로 확인되었으니, 현재로서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거국중립내각'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박근혜 대통령이 임명하는 총리가 야권에서 추천하는 인물인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내가 가진 시민사회 및 법적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름이 '거국중립내각'이건 '편파치중내각'이건 '최순실 내각'이건, 모든 내각은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내각을 해산할 권리 역시 대통령이 가지고 있다. 이것은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통령의 수많은 권한 중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 중 하나다. 국무총리에 대해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제86조를 살펴보자.

제86조 ①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한다.
③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총리로 임명될 수 없다.

국무총리가 행정각부를 통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의 명을 받아" 이루어진다. 설령 그 '명'이 국정 전반에 대한 포괄적 위임이라 하더라도, 대포폰을 쓰건 비선실세를 만나건 최태민에게 정신과 육체를 모두 지배당하건,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국무총리에게 '명'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국무총리는 그 '명'을 거역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한다.

'거국중립내각'의 구성요소인 다른 국무위원들은 또 어떤가?

제87조 ①국무위원은 국무총리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②국무위원은 국정에 관하여 대통령을 보좌하며, 국무회의의 구성원으로서 국정을 심의한다.
③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다.
④군인은 현역을 면한 후가 아니면 국무위원으로 임명될 수 없다.

국무총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에 대한 제청, 그리고 국무위원의 해임에 대한 '건의' 뿐이다. '거국중립내각'의 법무부장관이 우병우의 혐의를 유야무야 덮으려고 하는 것을 총리가 파악했다 한들, 그 총리는 자신의 권한으로 법무부장관을 해임할 수 없다. 역시 이 경우에도, 최종적인 결정권은 대통령인 박근혜가 갖는다. 가령 문재인이 총리가 된다 한들, 박근혜가 거부한다면, 조윤선 문체부장관을 해임시킬 수 없다. '책임총리'란 이토록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현행 헌법상 '거국중립내각'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가능하다. 하지만 '책임총리'는 어디까지나 대통령이 총리의 편에 서서 그에게 국정을 일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헌법적 개념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당시 이해찬 총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통령으로부터 포괄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총리가 누릴 수 있는 한시적이며 임의적인 특권에 불과하다. 박경신 교수의 말을 인용해본다. "우선 새로운 총리가 누가 되었든 그가 권한이양을 얼마나 받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어야 하고 그 총리는 국회의원들이 뽑는 총리 즉 내각제 하의 총리와 유사한 정치적 위상을 갖게 된다." 지금 국민들이 야당에 요구하는 것이 고작 '박근혜를 잘 모시는 총리'인가?

절반이 넘는 국민들이 박근혜를 지지했고, 투표했다. 나머지 국민들은 그 결과에 승복했고,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민주적 절차를 통해 주어진 권한을 박근혜는 엉뚱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준 상태였다. 이 모든 상황은 대통령제의 실패도 아니고, 내각책임제를 시작해야 할 이유도 되지 못하며, '거국중립내각'을 통해 유야무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물러남으로써 해결될 수 있고 해결해야만 하는, 대통령제가 '정상적'으로 처리할 수 있고 처리해야 하는 '비정상적' 상황일 뿐이다. 대통령제의 원조격인 미국에서도 이미 겪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역시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는, 흔하다면 흔한 대통령 하야 요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는가? 왜 하야 요구를 하지 않으며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국회에 띡 방문한 박근혜가 '야 니네가 추천해'라고 띡 던지고 가는 상황을 만들어서 주도권을 뺴앗기는가? 야권은 '최순실 게이트'에 진정으로 분노하긴 했는가? 최순실 일당에게 국정 농단을 허락한 박근혜를 몰아내고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합법적 권력을 획득하는 대신, 박근혜를 식물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들이 '비선실세'가 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닌가? 선출되지 않았으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정작 책임져야 할 때에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낸 후 차지하고 싶어서 '거국중립내각' 타령으로 세월을 허비한 것은 아닌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일개 비리 사태가 아니다. 헌정 질서의 위기다. 국민에게 선택받은 이가 헌법상 주어진 권력을 올바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주판을 튕기며 스스로를 또 하나의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자리에 놓기 위해 골몰하는 야권을, 국민들은 절대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정 총책임자는 대통령이지 '책임총리'가 아니다. 정치권은 헌정질서 농단 사건을 두고 또 다른 헌정질서 농단을 모의하는 짓을 당장 그만두고, 헌법상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한민국을 정상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2016-09-23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

트위터에서 몇 차례 지적을 했더니, 역사학자 전우용(@histopian) 씨는 내 계정을 블락하였다. 그런다고 해서 한국 사회의 여성혐오에 대해 왜곡된 의견을 내놓는 그의 행태가 비판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블로그에 글을 쓴다.

전우용은 경향신문에 "혐오의 상승작용"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링크) 여성 대 남성의 성비가 3:1인 고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막내아들이 겪었던 '고초'를 소개하며 글을 시작한다. 남학생들에게 '원치 않는 여장'을 강요하고 여학생들이 투표하게 하는 학교 행사가 있었는데, "다행히 자기는 강제 출전당하는 ‘굴욕’을 겪지 않았지만, 강제로 ‘여장’당하며 민망해하는 친구들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남자 고등학생이 느낄법한 뻔한 '분노'인데, 전우용은 그런 시시껄렁한 사건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하다. "녀석이 살아온 세계는 내가 살아온 세계와 달랐다. 집에서 아들이라고 대우받은 적도 없고 학교에서는 언제나 여자 선생님들에게 순종했으며, 여자아이들에게 종종 ‘타자화’ 대상이 되었으니, ‘사회가 남자 중심으로 짜여 있다’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게다."

전우용의 작은아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 나무랄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역사학자'님이, 아직 세상의 쓴맛을 보지도 않은, 게다가 자기 아들이므로 혈육에 의한 끌림과 가중치가 주어질 수밖에 없는 편향적 경험에 대해, 대단히 큰 의의를 부여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것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라고 전우용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에서 줄기차게 비판당한 바와 동일하다. '메갈리아의 미러링 그것도 남들 기분 나쁘게 하는 점잖치 못한 소리인데, 그런 걸로 여성혐오를 극복하려 해봐야 도리어 반감만 커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 고등학교의 ‘교육 프로그램’도 미러링에 해당하지만, 역효과가 더 컸다. 질 나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쓰는 온갖 추잡한 말들을 그대로 복제해서 남자 일반에게 돌려주면, 남자들이 회개할까? 이런 행위는 오히려 여자들로 하여금 ‘폭력적인 남성성’을 내면화하게 하여 여성주의가 그토록 혐오하는 ‘폭력성’의 저변을 확대 강화하는 결과만을 낳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전우용은 '여장 시켜놓고 깔깔거리고 쳐웃는 저 기집애들 줘패고 싶은 남자 고등학생'에 감정이입하고 있다. 적어도, 그가 여학생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 않거나, 못하거나,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남자들에게 여장을 시키고 외모 품평을 하는 것, 그것을 전우용은 "미러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여장남자 외모품평회'라는 "미러링"은 무엇을 비춰보이고 있는 것인가? 여성적으로 꾸미는 것에 관심이 있건 없건, '여자니까 여자답게 꾸며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외모 품평에 나서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전우용은 이미 '억울한 남자 고등학생'이 되어 있다. 미러링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 거울에 비춰 보이는 모습이 왜 자신에게 분노를 일으키는지 되짚어볼만한 냉철함이 그에게는 남아있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막내아들을 달래려다가 도리어 '남자로서의 분노'를 공유해버린, 어른스럽다고 말하기 힘든 자아를 고스란히 폭로해놓고는, 그걸 또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된 양 신문 지면에까지 칼럼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전우용이 '너희 남자애들은 그렇게 1년에 딱 하루 외모 품평을 당하지만, 잘 생각해보렴, 여자애들은 지금도 계속 외모 지적을 당하고 품평 당하고 있잖니. 너와 네 남자인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볼 기회가 되지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면, 아마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른'스러운 대답이다.

하지만 전우용은 '여자의 입장에서 한국 사회를 바라본다'가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장남자 가장무도회라는 '미러링'을 겪은 아들을 설득하지도 못했다. 문제는 이런 협소한 남성중심적 시각과 협소한 세계관, 그리고 SNS에서 욕먹은 사실을 굳이 앙갚음하기 위해 신문 지면까지 동원하는 '선택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 진보 진영에서 주요 필자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보 진영의 인적 쇄신 및 젠더 감수성 회복이 절실하다.

2016-04-15

한국: 1987년과 2008년의 성공과 실패

20대 총선의 결과로 인해 기존의 정치 구도가 크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인해 탄생한 호남 포위 전략에서, 호남이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모험을 감행하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총선 결과에 대한 언론의 분석을 보면 이 점을 제대로 언급하는 기사나 칼럼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소수자 집단이 독자세력화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보기 드문 사건인데 말입니다.

그 이면에는 1987년 대선의 결과에 대한, 어쩌면 강요된,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책을 옮기면서 외국의 사례를 검토해본 바에 따르면, 그것이 과연 '발생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치적 과오'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대한민국의 진보 정치는 2008년 이후 스스로를 '셀프 감금'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단 '억울한 사연'들을 모아서 광장에 모인 후, 하염없이 분통을 터뜨리다가 경찰의 저항과 부딪친 후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집에 가는, 그런 '광장의 정치' 말입니다. 그것이 공회전하면서 굉장히 많은 정치적 에너지가 제대로 조직되지도 못한 채 우리 사회의 담론을 내부로부터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 의식 하에 저는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링크)를 번역한 후, "한국: 1987년과 2008년의 성공과 실패"라는 제목의 다소 긴 역자 후기를 썼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21세기 대한민국의 가장 큰 정치적 담론 혹은 선입견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이 실린 책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가 그다지 좋은 판매 성적을 거두지 못한 탓에,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사장되었습니다.

20대 총선이 막 끝났지만 그 의의를 철저하게 곱씹는 반응을 보기 힘든 지금, 출판사의 양해를 구해, 저의 역자 후기 혹은 서평을 인터넷에 공개합니다. 출판된 내용과 달리 마지막 단락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습니다.

2016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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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987년과 2008년의 성공과 실패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은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하 …… 그림자가 없다" 中

1.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운을 떼면 꼭 뭔가 가정법을 끌어들이게 마련이다. 지나간 사건들을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를 논함에 있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아쉬움의 순간은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아닐까 한다. 시민 사회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이 힘을 합쳐 군부 독재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대선에서는 민주화 세력이 분열하여 민주정의당의 노태우에게 대권을 빼앗겼다는 서사가 그 얼개를 이룬다.

‘민주 세력은 분열해서 망한다’거나, ‘최후의 순간에 단결하지 못해 민주화의 열매를 군부 독재 세력에게 넘기고 말았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 책의 독자들은 적잖이 접해봤을 것이다. 어쩌면 독자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민주화 세력 단결론’은 그렇게 1987년 대선 패배와 함께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정치를 지배하는 주요 담론 중 하나가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사실일까? 이미 이 책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읽은 독자라면, 본 역자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덧붙이는 이 부록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의 ‘분열’은 분명 즉각적으로 민주화 투쟁에 나섰던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그것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의 내용을 통해 이 나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일종의 ‘대안 서사’를 구성해보자.


2.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이른바 ‘제3세계’에 속하던 국가들, 과거 식민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대거 독립을 이루었다. 대한민국의 해방은 그보다 조금 빨랐지만 한국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국가 형성에 들어간 시기가 비슷해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민족의 아픔’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머릿속에 지구본을 하나 띄워놓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마치 다른 나라의 역사인 양, 그렇게 말이다.

그 경우 해방 직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평범한 제3세계 독립국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가장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된다. 소련의 영향권에서는 소련의, 미국의 영향권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아 경제가 유지된다. 자체적인 산업의 발전이나 경제 성장 등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초대 대통령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선출된 독재자’로 변신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이끌었던 1960년까지의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다른 나라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의 경우도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이후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와, 식민지 시대에 교육을 받고 성장한 구세대의 충돌은 어느 국가에서나 어떤 식으로건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낮춰놓은 상태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의 핵심 인물인 박정희가 정치인으로 급부상한 것 역시, 세계 정치사의 보편적 경향성에서 벗어나는 사건이라 보기 어렵다. 1960년대가 아니라 2010년대에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독특한 경로를 밟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이후의 일이다. 87년 민주화 항쟁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지구본을 놓고 보면, 아시아에 불어닥친 세 번째 민주화의 물결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필리핀에서 군사 정권이 무너졌고, 인도네시아도 흔들렸으며, 중국에서는 이후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필리핀과 달리 한국에서는 민주화 세력이 ‘분열’했고, 즉각적으로 정권을 가져가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받는다.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평가해왔다는 말이다.


3.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유명한 격언이며,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읽으면서 몇 번이고 되뇌게 되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립운동가들이 결국 독재자로 변하는 경향을 보였다는 것을 앞서 우리는 확인했다. 그러한 비극적인 변화는 비단 독립운동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운동가들 역시, 적지 않은 경우, 권력을 잡고 나면 독재자들의 방법론과 무기를 차용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금방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민주화를 이루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 넬슨 만델라가 죽고 난 후의 아프리카민족회의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더 많은 사례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일대일로 맞붙어서 후자가 전자를 완전히 꺾어버린다 해도, 그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민주화 세력과 독재 세력의 대결이 아니다. 민주화 세력‘들’끼리 서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유지해나가는 과정이다. 단 하나의 민주주의가 이전의 세력과 맞붙어서 이겨버리면, 그 ‘하나의 민주주의’가 결국 독재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의 정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을 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인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지체되었다는 식으로만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히려, 그 분열로 인해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라는 두 민주화 정치 세력이 유지됨으로써, 1997년의 평화적 정권 교체가 가능해진 측면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강조하도록 하자. 민주주의는 독재와의 대결이 아니라, 다양한 민주주의‘들’끼리의 대결을 전제로 성립하는 정치 시스템이다. 어떤 하나의 민주주의가 다른 민주주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거대한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명분하에 그 외의 모든 것을 흡수해버린다면, 민주주의는 그 존재 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다시피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세력이 사회 속에서 공존하고, 권력을 독점하지 않으며, 상호 경쟁을 통해 개선될 때 비로소 건강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국가의 모든 세력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해야 하지만, 그 민주주의의 모습은 서로 다를 수 있으며, 사실상 달라야 한다. 하나의 민주주의 국가를 이루기 위해 다양한 민주 세력이 요구된다는 것, 단 하나의 민주 세력만이 남으면 그것은 독재와 다를 바 없다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중 하나다.


4.

우리는 87년 이후 지금껏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대한 적극적 반성과 재평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 1987년 이후 더 이상 군대는 정치에 개입하지 못한다. 군사 쿠데타의 위험은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선거가 치러지며,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 교체가 두 차례나 이루어졌다.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보장되어 있고, 국가인권위원회를 포함해 다양한 권력 통제 기구들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아시아 전체를 놓고 볼 때 한국이 가장 앞선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다. 여러 가지 지표들이 명확히 보여주는 바다.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활력도 점점 떨어지는 중이다. 국가정보원이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선거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고 판단한 반면, 이후 2심 재판부는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에서 그 판결이 유지될지 여부와는 별도로, 이미 2심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자랑스러운 민주주의는 큰 수모를 겪은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로부터, 우리가 영원히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반복해야 할 필요성이 자동으로 도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국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선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어떤 것이 민주주의인가’, ‘어떤 것은 민주주의가 아닌가’를 각 정치 세력이 명확히 밝히고, 이론화하고, 그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며 상호 견제와 비판을 주고받는 건강한 정치 문화를 확립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통상적인 민주주의의 절차를 뛰어넘어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1987년에 대한 재평가 위에, 또 하나의 도발적인 역사적 가정을 해볼까 한다. 만약 2008년의 촛불시위가 더욱 격화되어, 그 시점에서 이명박 정권이 무너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 또한 당시의 촛불시위에 숱하게 참여했다. 경찰에 의해 연행될 위기에 처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대중 집회를 기회로 삼고 있던 공무원 노동조합의 선전전을 도우며, 촛불시위가 잘 진행되어야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2015년 현재, 지금의 나는 당시의 내가 내렸던 판단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만약 그때 정부가 전복되는 정치적 변화가 발생했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중 역시 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벌여 정부를 뒤엎으려 했을 것이다. 마치 지금의 태국처럼 끝없는 대중 시위와 쿠데타로 그 어떤 정부도 민주적 절차만으로는 안정을 얻지 못하며, 결국 군부에 손을 내밀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사건에 대한 가정일 뿐이다. 또한 사회과학은 실험이 불가능한 학문이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시점에 민주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 금융위기로 경제적 난항에 부딪혔던 태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다소 섬뜩한 반면교사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4.19 혁명을 바라보던 시인 김수영이 옳다. 민주주의의 싸움은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민주주의의 방식은, 단지 많은 수의 사람들이 투표를 하거나 거리에 뛰쳐나오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민주적이냐’라고 묻는다면, 어떤 확실한 개념 정의를 묻는다면 그것은 본 역자가 대답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국가가 내란이나 외환에 휩쓸려 있지 않는 한, 정당한 선거로 뽑힌 정부를 시위로 쫓아내는 것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매우 어려운 행위라는 것 말이다. 그 최소한의 룰을 누군가가 깨기 시작하면, 민주주의의 퇴행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질 뿐이다.


5.

이 부록에서 본 역자는 두 개의 도발적인 역사적 가정을 해보았다. 1987년 대선이 양자 구도로 치러졌다면 어땠을까. 2008년의 촛불시위에서 정부가 전복되었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되었을까.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아마도) 가장 먼저 꼼꼼하게 읽은 한국인으로서, 나는 두 질문에 대해 모두 부정적인 답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리는 현실에 만족할 수 없고,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한두 발자국씩 물러서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근본적인 조건을 훌쩍 뛰어넘게 해줄 수 있을 만한 ‘도약’의 순간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 1987년의 승리는 다양한 세력들이 연합해 최소한의 목표인 대통령 직선제에 집중했기에 가능했다. 그 세력들이 목표를 달성한 후에도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고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가능하지 않았을 뿐더러 바람직한 일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2008년의 실패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시위를 주도하는 지도부가 없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외의 다른 의제가 집회를 주도하지 못했던 탓이 컸다. 그 실패가 어쩌면 한국의 민주주의를 최악의 후퇴로부터 막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2015년 현재, 세계 정세는 또 한 번 급변하고 있다. 미국은 셰일 가스 개발을 통해 왕성한 원유 수출국으로 거듭났으며, 수니파 테러범들을 지원하는 '불량국가'로 낙인찍혔던 이란과 대대적인 핵 협상을 타결했다. 왕년의 영원한 동맹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을 향해 큰 당혹감을 표하는 중이다. 중국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경기 부양책을 동원하고, 일본은 한 걸음씩 이른바 '정상국가'의 길로 향한다. '중국 모델'은 과연 언제까지 유효할 것인가? 미국의 새로운 중동 정책은 전지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함부로 넘겨짚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들이 대한민국에, 그리고 북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리는 늘 숙고하고 예측하며 적절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더욱 민주적인 국가로 만들어야 할 뿐 아니라, 북한에 대해서도 큰 책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 아니다. 최악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비상시국’을 함부로 가정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더욱 심한 곤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다양한 민주주의자‘들’이 늘어난다면, 대한민국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가장 빛나는 성취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2016-02-26

필리버스터, 새누리당 이탈표가 답이다

1.

2016년 2월 25일 오후 9시 현재, 개정된 국회법에 따른 필리버스터가 시작된지 40여 시간을 넘겼다. 한국의 정치에 이렇게 지적이고 품위 있는 언어가 살아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뜬금없는 계기를 통해 배우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필리버스터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패배주의가 느껴진다. 어차피 2월 26일에 선거구를 획정하기로 했으니까 그때 새누리당에서 처리해버리겠지, 3월 10일까지 계속 이렇게 버티기만 해도 어차피 다음 회기가 열리면 즉각 처리되어 버리겠지, 그렇게 우리는 지금은 신나고 재미있고 흥분되지만, 결국은 지겠지. 이렇게 말이다.

심지어 허핑턴포스트에 제시된 기사 "필리버스터 후 테러방지법은 이렇게 처리된다"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철회하거나, 대통령이 테러방지법을 포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인 것처럼 적혀 있다. 익숙한 이 느낌, 패배보다 앞서 먼저 스며들어오는 패배주의의 눅눅한 기운이 발목을 휘감는다.


2.

하지만 테러방지법은 저지될 수 있다. 어떻게? 새누리당에서 딱 12명만 반대표를 던지면 된다. 다시 말해,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으로 돌아가, 테러방지법에 찬성하지 않는 의원들이 자신의 뜻을 표로 밝히면 되는 것이다. 열 명도 필요 없다. 여덟 명이면 테러방지법은 막힌다.

현재 국회의원은 총 292명. 그 중 새누리당은 절반을 넘긴 157석을 차지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만 전원 출석하고 찬성표를 던지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야권 지지자들은 '콘크리트 지지율', '어리석은 국민들', '새누리당 철옹성'에 손가락질을 하며 익숙한 절망 달콤한 패배의식에 다시 젖어든다.

하지만 이 나라가 정상적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작동시키고 있는 나라라면 새누리당의 의석이 과반이라 해서, 그 새누리당의 법안이 반드시 통과된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국회의원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이며, 본인의 정치적 판단과 신념에 따라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그건 어디까지나 선진국 이야기일 뿐이라고? 대한민국은 의회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그렇게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편 의회 독재'를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비난하는 '콘크리트 지지층'과 사실상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다. 우리가 진정 의회민주주의의 원리에 동의하고 그 힘을 믿는다면, 우리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주체적인 판단과 자발적인 반대표에도 기대를 걸어야 한다.

게다가 그러한 기대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에 모두 공천 칼바람이 불고 있는 계절이니 말이다. 이번 필리버스터를 통해 '그런다고 공천 못 받아요!'라는 유행어가 떠올랐는데, 바로 그것이다. 지금 여의도 최대의 관심사는 공천이며, 공천 탈락 예정자는 주변의 분위기와 소문, 기타 정황을 종합해볼 때 자신이 탈락할 것임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지금 새누리당에는 '당론'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 중 일부는 이번에 한 번 거르고 다음에 새누리당에서 공천을 받자는 생각조차 포기했을 수 있다. 개인적인 사정에 의해, 혹은 당내 정치의 변화로 인해, 정치 인생이 끝났음을 직감하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몇 명의 새누리당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지면, '국가비상사태'는 의회민주주의의 힘에 의해 제압된다.


4.

이자스민 의원을 생각해보자. 이민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은 그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너무도 두텁다. 자신에 대한 뉴스의 리플을 다 읽는 이자스민 의원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는 그 어떤 지역구도 돌파하기 어렵다. 결국 그는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마치 지난 총선의 손수조 후보처럼 사석(死石)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 시점에서 테러방지법에 대해 이자스민 의원의 양심에 묻고 싶다. 당신은 진심으로 테러방지법에 찬성하는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테러'를 악마화하는 이 법은, 이자스민 의원 본인이 대변하고자 하는 이주민들에게 적대적인 사회 분위기를 더욱 북돋울 것이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그 누구보다 이자스민 의원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 결혼이주민의 아이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테러범'이라고 조롱당하며 가슴 속의 울분을 쌓고 있다.

국정원은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라고 누군가를 지목하여 인간사냥을 해왔다. 마찬가지로 테러방지법은 국정원에게 누군가를 '테러단체'의 구성원이라고 지목할 권한을 줄 것이다. 설령 그 '테러단체'가 "UN이 지정한 테러단체"라고 규정되어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그들은 '너 테러범'이라는 편견과 딱지붙이기를 전혀 해결할 생각 없이, 오히려 그 편견의 힘에 기대어 자기 조직의 권한을 늘리려 할 뿐이다.

여의도 정가의 복잡한 속사정을 다 알 수 없으므로 어쩌면 내가 잘못 짚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누리당 내에서, 혹은 저 위쪽에서 누군가가 각별히 이자스민 의원을 아껴서, 깃발만 꽂아도 당선되는 그런 지역에 그를 꽂아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주어진 정보만을 놓고 보면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면 이자스민 의원은 새누리당으로부터 얻는 것도 없이, 자신이 대표하는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한국인'들과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한국인의 자녀'들을 타자화하는 법에 찬성표를 던지는 셈이다.


5.

이자스민 의원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누리당에는 양심적이고 사려깊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국가비상사태'를 들먹이며 직권상정을 했다는 그 절차적 하자가 이미 얼마나 심각하게 법치주의를 무시하는 처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친박계, 아니 진박계와 비박계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번 공천에서, 순위권 바깥으로 밀려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치적 진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주어진다. 물론 불사조처럼 살아남는 몇몇 정치인은 수없이 정당을 바꾸지만 그 경우는 더 이상 대선주자급으로 부상하기 쉽지 않다고 봐야 한다. 정치인이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고, 정치적 입지를 잃지 않으려면, 진영을 바꾸지 않거나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단 한 번만 갈아타야 한다.

만약 새누리당에서 야권으로 옮겨가고 싶은 정치인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지금은 야권이 나뉘어 있어서 새누리당 이탈자에 대한 호가가 높아질 수밖에 없을뿐더러, 그 과정에서 테러방지법을 부결시키는데 기여한다면, 그 공로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귀순을 하려면 미그기 정도는 끌고 내려와야 한다. 공천 싸움의 패배자 그룹은 대략 정리되었지만, 아직 출마자 명단이 확정되지는 않은 지금, '국가비상사태'와 '테러빙자법'을 쓰러뜨리고 의회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용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6.

비판자들의 비아냥이 들려온다. 새누리당에서 그럴 리가 있겠어? 정치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일로 밉보이면 안 되는 건 당연한 거지. 그런 분들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 그들은 진심으로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으면서, 오직 의회민주주의의 '겉모습'을 띈 단순한 권력 투쟁의 승리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변화가 실제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다. 하지만 이것은 '박근혜가 테러방지법을 포기한다'와 같은 원천 불능의 요건이 아니다. 어쩌면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란, 예나 지금이나, 가능성의 예술 아니던가. 적어도 선택 가능한 답안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은 이미 수도 없이 지적되었다. 이제 나올 수 있는 논점은 대충 다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법 자체가 굉장히 허술하게 만들어져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공식적으로 금융기록과 통신기록에 손을 댈 수 있게 되는 국정원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이 직권상정이 가능하게 된 '국가비상사태'라는 요건 자체가 허구임이 명백하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당 대 당'의 힘싸움으로만 정치를 바라보면, 우리가 빠질 길은 값싼 회의주의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국회에 모인 민의의 대변자 몇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것조차 기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수십만 수백만의 시민들의 생각이 바뀌어 의석 배분이 변화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7.

필리버스터라는 전무후무한 정치적 무대가 열렸다. 저 단상에 올라 자신의 양심을 선언하고 반대의 뜻을 밝힌 최초의 새누리당 의원이 된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의원이 된다면,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임기도 이제 고작 2년 남았다. 대통령은 지는 별이고, 새누리당으로부터 더 받을 것도 없다면, 양심을 지키며 마지막 정치적 불꽃을 불사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아닌가?

2월 25일 밤 연단에 오른 더불어민주당의 강기정 의원은 회한의 눈물을 쏟았다. 국회선진화법이 도입된 덕분에 자신이 원하는만큼 평화롭게 발언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전까지 그는 '폭력국회'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여겨졌다. 벌금 500만원, 벌금 1000만원 등의 판결을 받고, 결국 이번 공천에서 탈락한 것이다.

폭력의원으로 시작했지만 토론으로 의정생활을 마무리짓게 되었다며 그는 눈물을 훔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당에서도, 주제에서 곧잘 벗어나는 강기정 의원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은 오히려 그를 도닥이기도 했다. 더 좋은 제도, 더 평화로운 방법이 있었다면, 싸우지 않고 토론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안타까운 마음이 국회 내에 공유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필리버스터는 시간끌기다. 문제는 그 시간을 끄는 동안 무엇을 했느냐,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동안 무엇을 할 것이냐이다. 다가올 총선 결과를 예단하며 절망할 것인가? 아니면 새누리당 의원들의 양심과 식견에 호소해볼 것인가? 나는 한국의 정치권이 후자의 길을 택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우리는 억지로 만들어낸 너무도 평화로운 '국가비상사태'를 의회민주주의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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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게시된 칼럼입니다.

2015-11-10

아이유, 아동성애, 아티스트

1.

아이유는 새 음반에 수록된 곡 'Zeze'에서 작사가로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주인공인 제제를 소재로 삼아, "넌 아주 순진해 그러나 분명 교활하지"라던가, "어린아이처럼 투명한 듯해도 어딘가는 더러워" 등의 가사를 썼다. 그 음반의 엘범 아트에는 망사스타킹을 신은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했다. 아이유가 아동성애를 부추긴다, 아동성폭행 피해자를 도외시하고 있다, 기타등등 아동 인권과 관련한 온갖 악덕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난이 일순 쏟아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논란이 이어지는 중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대한민국은 아동학대에 전혀 민감한 나라가 아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학대 사례들을 빼놓고, 그냥 미디어에 반영되는 내용만 봐도 그렇다. 지난 10월 13일 SBS에서 방영된 <육룡이 나르샤>의 한 장면을 생각해보자. 남자 등장인물 '땅새'의 각성을 위해, 같은 마을에 살던 소녀 연희가 강간당하는 장면이 버젓이 밤 10시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아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아동학대에 민감한 나라였던가? 아이유에게 아동성애 코드를 팔아먹는다고 손가락질하는 분들은, 아이유가 대놓고 '삼촌'이라는 제목의 노래를 낼 때에는 뭐 하고 계셨는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미성년자 강간 장면이 공중파 드라마에 나왔다. 고작 한 달 전 일이다. 'Zeze'처럼 은근한 암시를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수준이 아니라, 대놓고 강간당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때는 안 나오던 분노가 왜 이제서야 치밀고 있는가?


2.

한국의 대중가요에서 미성년자 소녀가 남성들에게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제공하는 역사는 실로 유구하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려요 / 당신만 아세요 열일곱 살이에요"부터 시작해야 할까?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것부터 이야기해보면 그렇다. 비교적 최근 임펙트 있게 다가왔던 것으로 박지윤의 '성인식'을 꼽아볼 수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에요 / 그대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요 / 그대 기다렸던만큼 나도 / 오늘을 기다렸어요."

아이유의 기존 행보 역시 이러한, 명백히 아동성애에 가깝지만 대중적으로 별 논란 없이 받아들여지던 시선 위에 놓여 있었다.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이라며 고음을 높이고, "너랑 나랑은 지금 안되지"라며 소녀 아이유를 향한 '삼촌'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굳이 아이유에게 '아동성애 컨셉'이라고 말한다면, 당신들이 아이유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던 그때야말로 '아동성애 컨셉'이 한창 꽃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아이유가 달라졌다. 전작 '모던타임즈'부터 서서히 '삼촌팬을 위한 소녀'가 아닌 무언가의 자의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작 '스물셋'에 와서 드디어 논란이 불거졌다. 아이유에게 붙은 죄명은 뜬금없게도 아동성애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한도전의 무도가요제에서 레옹의 마틸다 컨셉을 하고 나왔을 때에는 아무 탈이 없었는데 말이다.


3.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어떤 아동성애'는 별 문제가 안 된다. 반면 '다른 아동성애'는, 실제로 아동성애인지 아닌지와는 큰 상관 없이, 지탄의 대상이다.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의 한국어판을 낸 출판사에서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며 가상인물의 정신적 순결함을 항변하지 않나, 어떤 소설가라는 분은 아이유의 음반을 전량 폐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유의 아동성애 컨셉은 이미 한 차례 트위터를 포함한 소수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그가 무도가요제에서 영화 '레옹'의 마틸다로 분장하고 나왔던 그때의 일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미성년자 여성을 향한 남자들의 성적 욕망'을 인식하고 그에 맞춰 차려입은 아이유를 보며, 몇몇 트위터 사용자와 네티즌들이 불만을 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금과 달리 논란이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쁘기만 한데 왜들 저러냐'는 식의 비아냥 섞인 반응이 돌아오기도 했다. 아이유가 스스로를 아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으로 포장하여 내놓는 것은, 한국 사회의 도덕적 가이드라인과 어긋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혹시 모를까봐 하는 말인데 '레옹'의 마틸다는 미성년자다).

반면 'Zeze'의 가사와 앨범 아트 역시 소수의 네티즌들이 발견하고 불편함을 표현했는데, 이번에는 일이 커졌다. 음반이 나온지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논란이 시작되었고, 애초에 '아동성애'라는 금기 자체가 '할아버지가 고추 따먹는' 이 나라에서 과연 그렇게 굉장한 터부인가 싶기도 했으나, 출판사가 끼어들면서 논의가 한층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사안의 화제성을 놓고 보자면 음반의 수록곡 중 하나일 뿐인 'Zeze'는 무도가요제와 비교할만한 대상이 못 된다. 아동성애로 장사를 한 게 문제라면 논란은 마틸다 코스프레를 할 때 일어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때는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가 그러한 종류의 페도필리아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과 그 때의 차이는 무엇인가?

결국 그 차이는 아이유가 스스로를 '상품'으로 내놓았느냐, 아니면 제 손으로 쓰는 가사의 '창작자', 즉 어떠한 종류의 주체로 내세웠느냐에서 갈라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젊은 여자 가수 아이유가 자신을 소아성애적 욕망의 '대상'으로 내놓는 것에는 대한민국의 윤리 의식이 발작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4.

아이유에게 잘못이 있다면 단 하나, 성적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이다. 아이유는 지속적으로 '아티스트'를 지향하는 자기 자신을 내세워왔다.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고, 이번 음반은 자신이 프로듀서로 나섰고, 지난 음반에는 음악계의 '선배님'들을 모셨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아동성애 논란이 벌어졌다. 아이유가 노골적으로 마틸다 코스프레를 하며 아동성애 컨셉을 '팔아먹고' 있을 때에는 없던 일이다. 왜일까? 그 아동성애 컨셉을 '소비하던' 대중들에게, 어린 소녀에게 나이 많은 남자가 성욕을 느끼는 것은 사회규범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유가 'Zeze'의 가사에서 사용한 은유와 상징들은 어딘가 어설프고 아귀가 안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소년을 향한 성인 여성의 욕망인 것처럼 해석되더니만, 난리가 나고 있다.

'Zeze'의 은유는 덜컹거린다. 결국은 밍기뉴라는 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제제라는 소년의 순수함과 영악한 욕망이 오가는 어떤 지점을 잡아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아이유의 목표대로라면 밍기뉴를 넘어서 결국 그가 해석한 제제에게 힘이 확 실려야 하는데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화자인 밍기뉴가 '성인 여성'이라는 혐의에 힘이 실렸고(꼭 그러라는 법은 없을텐데. 소설에서 가상의 친구인 밍기뉴와 뽀르뚜까 아저씨는 모두 남자 아니던가), 가수로서 지금까지 아동성애적 욕망의 '대상'이었던 아이유가 순식간에 아동성애적 욕망의 '주체'로 둔갑해버렸다.

동녘출판사의 단호한 입장과 달리, 모든 창작물은 발표되는 순간부터 해석의 무중력 속에 던져진다. 누가 그 작품을 보고 무슨 식으로 읽어낼지 창작자는 미리 다 알 수도 없고, 물론 어떤 효과를 노리기야 하겠지만, 그 결과를 일일이 통제할 수도 없다. 대중이 'Zeze'의 가사에 아동성애의 혐의를 씌우는 것 자체를 막아낼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의 머리에는 떨쳐낼 수 없는 질문이 남는다. 가령 조영남은 작품 활동을 넘어 현실의 생활 속에서 별별 '금기'를 다 넘나드는 행보를 보이면서도 '아티스트로서의 면책 특권'을 십분 누리며 살아간다. 반면 아이유는 현실 속에서 아동성애는 커녕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장기하와 연애하며 근면 성실하게 살고 있다. 그런데 왜 아이유에게는 조영남에게 허락되는 것과 같은 '아티스트 면책 특권'이 반에 반도 부여되고 있지 않은가?


5.

나이 많은 남자가 어린 여자를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한, 대한민국은 아동성애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나라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남자들은 '산삼보다 몸에 좋은 고3, 고3보다 몸에 좋은 중3' 같은 소리를 시시덕거리고 있다. 아이유는 그런 욕망의 대상으로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면서 슈퍼스타가 되었고, 지금은 그렇게 스타로서 쌓아올린 자산을 차분히 매각하며 아티스트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빚는 중이다.

아이유의 새로운 행보를 두고, 대중들은 자신들이 소비해왔던 아동성애적 기호들을 새삼 '발견'하며 분노한다. 그러한 해석은 아이유의 의도를 넘어, 스물셋이 된 아이유가 다섯 살짜리 소년 제제에게 '어른의 놀이'를 가르치려 든다는 식의 망상으로 뻗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유가 '아동성애' 컨셉으로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를 왜곡했다는 대중들의 분노는, 바로 그 아이유를 상대로 같은 욕망을 불태웠던 스스로에 대한 알리바이 만들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 나라에서 진정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어린 여자를 향한 나이 많은 남자의 성욕이 아니라, 여자가 감히 욕망의 대상에서 벗어나려 드는 것 뿐이라는 현실이 폭로되고 있는 중이다. 아티스트 아이유의 건투를 빈다.

2015-10-21

청년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나라

너무 심한 모욕을 당하면 어이가 없어서 화를 못 내는 경우가 있다. 요 며칠 사이 출산율과 관련하여 정부와 새누리당이 내놓은 '정책'들을 보면 그렇다. 이들은 가임기 여성과 혼인 적령기 남성들을 딱히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어서 너희들이 새끼를 쳐야 할텐데, 라고 혀를 차는 양돈장 주인의 눈빛에 더욱 가깝다고 생각한다.

10월 18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안)을 내놓았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비혼(非婚)·만혼(晩婚) 경향이라는 것이 그들의 분석이었다.

일단 이 분석부터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그 어떤 선진국에서도 비혼과 만혼을 줄여서 출산율을 높이지는 못했다. 출산율을 회복한 나라가 없지는 않다. 프랑스가 그런데, 프랑스는 비혼여성들이 낳은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복지와 인식 개선을 통해 출산율을 회복했다. '출산'을 '결혼'과 연결짓는 한, 현대 산업 사회의 국민들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을 꺼리게 된다. 반대로 그 연결을 끊으면 끊을수록, 자녀를 낳고 기르고 싶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발휘되어, 출산율이 회복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의 판단은 정 반대다. 빨리 시집 장가 보내서 애 낳게 해야 한다는, 전지적 시부모 시점으로 청년 세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나오는 대책의 모습은 인격과 판단력을 지닌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 사회의 정책결정자들은 애완견 눈 맞추는 브리더들처럼, "국가가 나서서 미혼 남녀를 위한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1]다.

"광역지자체가 복지부 소관 단체인 인구보건복지협회와 함께 '만사결통(萬事結通·만사는 결혼에서 통한다)'이라는 단체 맞선 프로그램을 마련해 총각, 처녀 사이 만남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다."[2]

이건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 아니다. 청년들을 진정 '사람'으로 본다면, 서로 자유롭고 자발적인 만남을 갖고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사회 여건을 개선하면 될 문제다. 청년들을 단지 '일해서 세금 내고 번식해서 그 뒷세대 낳을 것들'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암컷 수컷 눈 맞춰주면 번식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말이다.

내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도 그런 고민을 안 해봤던 것이 아니지만, 10월 21일자 뉴스를 보고 의혹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국회에서 열린 제3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당정협의에서, 새누리당은 "새누리당은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현행 만 6세에서 1년 정도 앞당기고 초등학교를 6년제에서 5년제로, 중·고 6년을 5년으로 줄이는 학제개편까지 중장기 과제로 검토해줄 것을 정부에 요청"[3]했다.

입학연령 1년, 초등학교 1년, 중학교 고등학교 각각 1년씩 해서 총 4년을 빨리 졸업시키겠다는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대학 교육을 빨리 받게 하기 위해서? 절대 아니다. 어서 고등학교 졸업해서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소리다. 청년이라는 이름의 개·돼지들, 국민이라는 이름의 가축들에게, 어서 번식하고 새끼 쳐서 세금 내고 국민연금 납부할 장래의 또 다른 가축을 생산하라는 대한민국 축사 주인들의 헛기침 소리인 것이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의 말을 들어보자. "재정투입 중심의 출산과 보육대책이 축을 이루고 있어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발상의 전환과 획기적인 대책을 요구했습니다."[4] 실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이긴 하다. 국민을 '사람'이 아니라 '가축'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번식의 본능이 있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빼닮은 아이를 낳고 싶어하며, 건강상의 이유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에는 입양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모든 여건이 바람직하다면, 적잖은 사람들은 알아서 자녀를 낳고 기른다.

높으신 분들은 안달이 나 있다. 이 국민이라는 이름의 가축들이 어서 새끼를 쳐야 자신들이 계속 지배자 노릇을 할 수 있을텐데, 왜 이것들이 번식을 안 하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을, 청년들을 바로 그렇게 가축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는다는 간단한 진실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런 모욕적인 '정책'으로 출산율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심지어 동물도 여건이 안 좋으면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은 다음 기르지 않고 물거나 밟아서 죽여버린다. 나치 독일에서도 국민 강제 번식 정책을 추진한 바 있었지만 실패했다. 사람을 가축 취급하는 이 나라의 국격은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충분한 급여를 받으며, 안정된 주거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해준다면 출산율은 장기적으로 알아서 회복될 것이다. 반대로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정책을 빙자한 모욕이 쏟아진다면, 글쎄, 사람들이 과연 언제까지 참아줄 성 싶은가?



[1, 2] 연합뉴스, "<인구위기> ② 국가가 처녀총각 단체 미팅 주선한다", 2015년 10월 18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0/16/0200000000AKR20151016186900017.HTML

[3, 4] SBS뉴스, "새누리, 초등학교 조기입학 추진…"신중해야"", 2015년 10월 21일,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228032&plink=COPYPASTE&cooper=SBSNEWSEND

2015-10-13

내용적 종북, 형식적 종북

박근혜 대통령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내용적 종북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으되, 형식적 종북은 국정 운영의 기조가 되었다'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패기 넘치게 '박근혜 대통령 떨어뜨리려 나왔다'던 이정희 대표의 통진당은 헌정 사상 최초의 정당해산심판을 통해 공중분해되었다. 그 외에도 일일이 기억하기 힘든 '종북 사냥'의 사례가 존재한다. 심지어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이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칭하기까지 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하지만 '형식적 종북'은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정 운영의 많은 부분이 주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이 어떻게 주체적인가?

가령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라는 행사를 생각해보자. 블랙 프라이데이는 기본적으로 북미 지역의 백화점이 그간 쌓아두었던 재고를 헐값에 털기 위해 하는 행사다. 처음부터 수많은 물류 비용을 공급자가 떠안고 있으며, 물류 비용이 미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그런 행사가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당에서, 아니 청와대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유통업체들은 눈물을 머금고 할인 행사를 벌였는데, 최종적으로 그 손실은 공급자가 나눠서 지게 되었다.

이것은 시장 경제가 아니다. 하다못해 북한 장마당에서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가격 통제를 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공산권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서나 등장했던 그런 에피소드가, 2015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다. 이 의사 결정의 방식, 막무가내식 상명하달, 시장 경제와 가격 결정 원리에 대한 철저한 비존중을 놓고 볼 때, 그 행사는 한국판 블랙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종북 프라이데이, 혹은 블랙 장마당데이 정도로 불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현 정부의 북한 따라잡기는 급기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교과서화에 이르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국정교과서를 택하고 있는 나라들 중 우리가 '발전 모델'로 삼을만한 나라가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더 중요한 것은 그 중에 북한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어휘라는 이유로 '동무'가 일상 언어에서 완전히 소거되어 버릴 만큼 반공은 우리의 제1국시였다. 북한에서 하는 것은 무조건 정 반대로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이 어떠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함에 있어서 북한의 길을 뒤따르는데 일말의 주저함도 없다.

통일은 대박이라고 쉽게도 말하지만, 정작 그 통일이 되고 나면 북한의 깊은 산속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나는 홀로 고민해보곤 한다. 북한은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오래도록 유지되고 있는 유사 종교적 독재 국가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통일이 되고 난 후에는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 주체주의자들이 가장 큰 안보 위협이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 대한민국은 '형식적 종북'에 대해 이토록 관대한 나라가 되었을까. 우리는 북한이 하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해서가 아니라, 북한이 하는 일을 하지 않고 정 반대의 방향을 택했기에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 설마 아직도 대한민국이 북한과 '경쟁'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핵심 과제는 북한을 이기는 게 아니다. 이미 이겼다. 북한을 흡수하고도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만큼 튼튼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박근혜 정권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한다. 통진당이 해산된 이 시점,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 청와대를 능가할만한 조직이 대한민국에 없다. 동시에, 국정교과서 논란을 '역사 왜곡'으로만 몰아가는 야권 역시 역사 인식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 국정교과서는 그 내용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형식부터가 '쪽팔리는',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방향에서 말해보자. 국정교과서를 추진하는 측에서는 '내용적 종북'이 들어있기 때문에 여타의 교과서를 없애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그것은 친일 독재 세력의 역사 왜곡'이라고 반발하면, 문재인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그 덫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끝나지 않는 논쟁을, 혹시 즐기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피해야 한다.

어떻게? 상대방을 종북주의자로 몰아가면 된다. 위에서 우리가 이야기했다시피 현 정부는 '내용적 종북'과 거리가 멀지언정(정말 그런지도 의문이지만), '형식적 종북'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공격적인 어법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 최근 시사 용어로 '미러링'이라고 한다. 종북 프레임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 너희들은 친일파라고 몰아붙이는 것, 다 해봤지만 그다지 소용이 없지 않나.

이제는 미러링을 해볼 때다. 야권이 종북이라고? 아니다. 북한이나 하는 국정교과서를 기습 추진하는 현 정권이야말로 종북 정권이다. 우리는 박근혜 정권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보호해야 한다. 청와대에 종북 세력이 숨어들어 있다. 건국 70년, 공산주의와 맞서며 이룩해낸 우리의 민주주의와 경제적 성취를 이렇게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 통진당의 해산 이후, 대한민국에 조직화된 '내용적 종북'은 없다. 이제는 '형식적 종북'의 문제를 고민해볼 때다.

이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국격의 문제다. 피땀흘려 이룬 나라가 하루아침에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는 꼴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우리의 경제 수준에 걸맞는 정치적 발전을 고대하며, 숨죽여 외쳐본다. 종북세력 물러가라. 자유민주주의 만세.

2015-09-23

엠마 왓슨에게 공개 서한을 보낸 고종석 선생님께 보내는 공개 서한


1.


고종석 선생님, 안녕하세요.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 "에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께"를 읽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읽었고, 반면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엠마 왓슨은 읽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애초부터 그 '편지'는 엠마 왓슨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게 아니니까요.

경향신문에 연재하시는 코너 '고종석의 편지'에 실리는 내용이 실은 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게재된 제목들을 쭉 훑어보면, "IS 전사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그나마 수취인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미국 대사, 프란치스코 교황,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된 엠마 왓슨 유엔 친선대사 등은 극동의 변방에서 한국어로 실린 공개 서한에 눈길을 주지 않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국제적 명사들입니다. 하물며 사회주의자 여운형, 익사한 시리아 난민 소년 아일란 쿠르디 등을 수신인으로 호명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공개 서한'이라는 민망한 글쓰기 방식을 저도 시도하고 있는 지금, 그 형식에 대해 한 차례 곱씹어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그 글에서 지목하는 상대가 읽기를 바라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정말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연락처를 알아내어 직접 전달해야 할 테니까요. 공개 서한은 누군가를 '명시적 독자'으로 삼아,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을 '실질적 독자'로 만듭니다. 저자와 같은 목소리를 내거나 적어도 동참하게끔 유도하는 양식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공개 서한은 일종의 상소문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오바마'와 '공개 서한'을 함께 검색하면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뉴욕타임즈>의 광고란을 사서 오바마를 상대로 공개 서한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박근혜'를 함께 검색해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요컨대, 힘 없는 다수의 목소리를 모아서 권력의 꼭데기에 있는 누군가에게 발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캐럴라인 케네디 주일 대사에게 보내신 '편지'는 그러한 고전적인 양식에 잘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한껏 칭찬하다가, 그 모든 개방적 행보에도 불구하고 여성 사제를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교황의 입장을 비판하시죠. 케네디 대사를 향해서는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밀착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우려를 전달하면서, 결국 한국의 독자들에게 현재의 국제 정세를 전달하셨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2.

편지가 시작된 후 다섯 문단에 걸쳐 고종석 선생께서는 엠마 왓슨의 HeForShe 연설과 그 캠페인을 설명하셨습니다. 만약 이 '편지'가 진정으로 엠마 왓슨을 향한 것이라면 그 내용은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보다 엠마 왓슨 본인이 잘 알고 있을 내용일 테니까 말이죠. 

엠마 왓슨은 "연설에서 페미니즘을 “남성과 여성이 동일한 권리와 기회를 지녀야 한다는 신념”이라고 정의한 뒤, 그것이 남성 혐오와 동일시되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사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어떤 페미니스트가 남성을 혐오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자격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무튼 연설을 듣고 고종석 선생님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여성과 남성은 자유롭게 감성적이 돼야 하고 자유롭게 강인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대로, HeForShe 캠페인은 모두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엠마 왓슨과 함께 HeForShe 캠페인을 기획한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캠페인이 갖는 근본적인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나 고종석 선생님보다야 잘 알고 있었겠죠. 간헐적으로 칼럼을 쓰는 저나 고종석 선생님과 달리, 그들은 직업적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여성 인권 뿐 아니라 다양한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요컨대 HeForShe는 세계에서 가장 큰 힘과 든든한 자원을 가진 집단의 페미니즘 기획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우려했을법한 페미니즘에 대한 부당한 평가와 왜곡이, 그것도 엠마 왓슨을 수신인으로 호명한 공개 서한에 빼곡이 담겨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것이 나름 선진국 반열에 속한 대한민국의 언론 지면에 정식으로 실릴 것이라고는 말이죠.

일단 이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당신이 제한된 시간 때문에 그 멋진 연설에서 누락했을 문제들을 짚어보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칼럼의 후반부는 그 "누락"된 문제들을 지적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애초에 그 문제들이 누락된 이유가 과연 '시간 제한' 때문이었을까요? 과연 엠마 왓슨과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캠페인 담당자들이 그저 '시간이 부족'하여, 고종석 선생님도 아실만큼 잘 알려진 젠더 이슈들을 간과한 것일까요?


3.

HeForShe는 2014년 이전까지의 페미니즘의 맥락에서 볼 때 굉장히 이상한 캠페인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만, 애초에 공개 서한이라는 것 자체가 그 사람만 보라고 쓰는 게 아니니까, 좀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페미니즘은 크게 세 개의 세대로 구분됩니다. 1세대 페미니즘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참정권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기본권의 동등한 보장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1960년대부터 대략 1980년대 정도까지, 기본적인 정치적 평등을 넘어서는 사회적 균형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표출되었고요. 3세대 페미니즘은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페미니즘 그 자체가 간과할 수밖에 없는 범주들을 발견하고 그 의의를 부각시키면서 페미니즘의 다각화 혹은 발전적 해체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됩니다.

이러한 맥락을 놓고 고종석 선생님의 진심어린 충고를 살펴보면, 스스로 인식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으나, 고종석 선생께서는 2세대 페미니즘에 대한 3세대 페미니즘의 레퍼토리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계셨음이 드러납니다. "당신도 최근에 인정했듯,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경험하는 성차별과 불평등은 양상이 크게 다"르다거나, "존재는 중층적으로 결정"되며 "그렇게 중층적으로 결정된 존재는 어떤 순간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순간에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논변 등은 아주 고전적입니다. 특히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이라는 표현은, '백인 중산층 여성'들을 겨냥하여 수많은 소수 젠더 그룹들이 불만을 드러냈던 맥락을 거의 고스란히 상기시킵니다. 가령 이런 것이지요.

여성 일반을 대변하여 여성들 사이의 자매애와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던 과거의 페미니즘은 '여성'이 보편 범주로서 유효한가라는 질문에 봉착하면서 많은 비판과 수정을 거치게 되었다. 과거의 페미니즘에 대한 성찰은 기존 페미니즘 이론의 '사각지대', 즉 인종과 계급, 성 정체성 등을 축으로 하여 다양한 층위로 드러나는 '여성' 내의 차이들을 조명하는 움직임 속에서 다양한 담론들로 나타난다. 이른바 페미니즘의 제3물결이라고도 하는 유색인종 여성의 비평들이 제2물결 페미니즘의 백인 중심적 전제를 비판하고 '여성'이라는 범주에 내재하는 인종적·계급적·문화적·민족적·성 정체성적 차이에 주목한 이래,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추상적 범주보다는 다양한 여성들의 개별 경험과 각각의 삶이 지니는 특수성에 대해 성찰하는 페미니즘'들'로 분화되었다.[1]

이렇게만 놓고 보면 고종석 선생님의 공개 서한은 퍽 그럴듯한 말처럼 보입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3세대 페미니즘의 맥락을 빌려 HeForShe를 2세대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전략은, 그 자체로서는 성립하지만, 문제는 '누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있느냐'이기 때문입니다.

2세대 페미니즘과 3세대 페미니즘이 분화하는 지점에 대해 생각해보시죠. '너는 백인 중산층 여성이므로, 흑인 빈곤층 여성인 나의 경험을 대변할 수 없다'는 문장은, 오직 발화자가 흑인 빈곤층 여성일 때에만 제대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흑인 빈곤층 여성'이 무엇으로 바뀌더라도 결과는 비슷합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의 격차에 대해 온전히 경험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사자로서 그 삶을 살아본 한국 여성 뿐입니다.

결국 3세대 페미니즘은 페미니즘 그 자체를 해체하는 페미니즘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까 인용한 책을 조금 더 읽어볼까요. "1980~90년대 페미니즘 이론이 침체기를 맞이하고 '포스트페미니즘'이 거론되면서 페미니즘이 '젠더 연구'로 이행하는 동시에 동성애론이 성장한 것은 '차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2] 차이와 다양성을 논의하는 가운데 '여성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깨어져 나갔습니다.


4.

그것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혹은 201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온 분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주의는 보다 더 넓고 다양한 성차를 포함하는 젠더 연구로 이행했습니다. 그러니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은, 적어도 3세대 페미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들에게는, 꺼림직한 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것입니다. 국내에서 '여성학자'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평화학 연구자'로 소개하기도 하는 정희진 선생님의 책 <페미니즘의 도전>을 펼쳐볼까요.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3]

현재 진보 진영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한국인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님은,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정체성의 정치'가 되는 것을 거부합니다. "페미니즘은 정체성의 정치를 벗어나야 하고, 실제로 정체성의 정치 그 이상의 세계관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만의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철학인데, 왜 여성만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가."[4]

그러한 입장은 최근 그분께서 <한겨레>에 기고하신 서평에서도 유지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한다고 하시면서도,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5]라고, 아마도 최근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운동에 고무되어 당신께 문의 메일을 보냈을 수많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응답을 하신 것입니다.

페미니즘 그 자체를 어떤 강고한 '주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 "교차, 우회로, 가로지르기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횡단의(transversal) 정치"[6]로 여기는 이와 같은 발상은, 고종석 선생님께도 매우 친숙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한국의 페미니즘에 이러한 입장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성의 법적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제도적으로 노력해온 이태영 박사님과 그 후속 세대들의 노력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고종석 선생님께는 정희진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유가 매우 친숙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실 것이라고 봅니다.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엔본부에서 출범식을 가진 HeForShe, 그리고 2015년 트위터를 넘어 국내의 전반적인 여론에서 페미니즘을 주요 의제로 끌어올린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 이 두 가지 운동에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일한 범주가 공론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동시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어휘 역시 봉인을 뜯고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활발히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두 운동 모두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합니다. 3세대 페미니즘이 포스트페미니즘으로, 광범위한 젠더 연구로 발전적 해체를 거듭해온 맥락은 지금도 엄연히 존재합니다만, HeForShe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러한 맥락에서 한 발 비켜나 새로운 각도에서 새롭지만 익숙한 페미니즘을 제기합니다. '여성주의'로서의 페미니즘과, 그 페미니즘에 동참하는 외부 세력으로서의 '남성'이라는 범주를 재창출하는 것입니다.

앞서 제가 '지금까지의 맥락을 놓고 볼 때 HeForShe는 굉장히 이상한 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차이, 횡단, 교차, 가로지르기 등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 담론을 지배해온 용어들을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젠더 범주들을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던 '여성'이 복귀합니다. 

기존의 '차이'가 놓이던 자리에는 대신 '남성'이 들어가고요. 엠마 왓슨을 앞세워 HeForShe를 기획한 이들은, 젠더 연구의 주된 화두였던 다양한 성소수자 뿐 아니라, 암흑의 핵심이요 가부장제의 원흉이며 세상의 악이란 악은 모두 저지르는 테스토스테론의 노예인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을 페미니즘의 논의에 암묵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모르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시스젠더'란 스스로 생각하는 성정체성과 육체의 성정체성이 동일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즉 저처럼 스스로 이성애자 남자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성애자 남자들이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이 페미니즘 혹은 젠더 연구의 최근 경향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센 국제기구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배우를 자신들의 대변인으로 삼아, '그녀'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그'를 소환했습니다. 2014년 말에 벌어진 일입니다.


5.

자, 먼 길을 돌아 다시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에게 보낸 편지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미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경로로 비판했다시피, 그 편지는 전제부터 잘못 설정되어 있습니다. 엠마 왓슨을 앞세운 유엔의 페미니스트들이 고종석 선생님보다 페미니즘을 몰라서 '가난을 경험해본 적 없는 백인 여성 영화배우'에게 연설문을 넘겨준 게 아닙니다. 고종석 선생께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 맥락을 넘어서, 그간의 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HeForShe는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지만, 동시에 남성 운동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주어가 He, 즉 남자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저 구호를 접하고 '대체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마치 여성을 보호받아야 할 대상인 양, 그리고 남자들을 무슨 백마 탄 왕자인 양 포장해주는 것 같은데, 그게 유엔에서 추진하는 캠페인이라고?

그런 의문을 품었던 것은 저 역시 기존에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유통되어온 페미니즘, 혹은 포스트페미니즘, 아니면 젠더 연구 등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2015년이 되고, 다양한 여성 문제가 터져나올 때, 특히 고종석 선생님같은 남성 지식인들의 대응을 보니, 우리의 남성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편지에서 201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말랄라 유사프자이를 거론합니다. "지난해에 노벨평화상을 탄 파키스탄의 여성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당신보다 일곱 살이 젊지만, 당신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았"다며, 엠마 왓슨의 페미니즘은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허마이어니 역을 맡으며 벼려졌을 것"이지만 "말랄라의 페미니즘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온 경험의 소산"이라고 일침을 놓으시더군요. 이 대목을 읽고 저는 즉각적으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남자 지식인들의 버릇이 잘못 들어 있습니다. 맥락에 따라서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성차별을 당할 수 있다는 식의 상대주의적 논변이 득세한 탓에, 정작 남자 지식인들은 페미니즘에 대해 지식을 달달 외울지언정 그것이 자기 자신의 문제라고 인식하는 능력을 상실해버린 것 같습니다. 

세상에, 엠마 왓슨과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여성이고, 두 사람 모두 2015년 현재를 대변하는 페미니즘의 아이콘입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말랄라 유사프자이의 사례를 들어 엠마 왓슨을 가르치신다고요? 이건 부산 사람이 광주 사람더러 목포 사람보다 너는 덜 차별당한다 운운하며 호남차별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꼴입니다.

여성주의는 여성들이 겪는 차별의 경험을 이론화하여 형성되었습니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선각자가 있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였고, 심지어 자기 원고가 말이 되는 소리인지 부인에게 원고 검수를 받기라도 했지요. 그런데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원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여성들에게 '책을 더 읽어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이 상황이 이해도 납득도 되지 않습니다. 부산 사람이 목포 사람에게 호남차별에 대해 가르치다가, '책을 읽어봐라'라고 말하는 상황을 또 한 차례 상상하게 되네요. 이번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지겨우니까요.


6.

HeForShe라는 구호에는 인류가 성적으로만 구분된다는 함의가 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과 모든 남성을 동질적으로 여기는 거친 페미니즘은 아닐 것입니다.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에 당신도 동의할 것입니다.

글쎄요. 이런 식이라면 '여성주의'는 세상에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겠죠.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 '모든 폭력 반대주의', '착하게 살자주의'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3세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고종석 선생님의 이런 물타기성 발언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젠더 개념을 다각화하자는 것이지, 젠더가 폭력과 차별을 낳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자체를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니까요.

다시 호남차별을 예로 들어보죠. 누군가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은 평생토록 따라다니는 차별의 딱지입니다만, 그래도 세상에는 호남 출신 사장의 회사에서 일하는 영남 출신 직원이 있습니다. 그런 사례들을 나열한다 해서 호남차별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설령 그 호남 출신 사장이 영남 출신 직원의 임금을 떼어먹었다 해도 '영남차별'이라는 범주가 새롭게 탄생했다고 우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웬 영남 출신 지식인이 '호남이라는 말은 단지 그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들 뿐 아니라 차별당하고 억압당하는 모든 민중이다'라고 멋들어진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고종석 선생님, 이제 역지사지가 되십니까?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엠마 왓슨을 두고 가르치신 '페미니즘'은 역설적이게도 협소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어떤 식으로건 젠더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만 최소한의 요건이 성립되는데, 선생님께서는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알고 보면 남자도 희생자일 수 있고, 흔하다면 흔한 상대주의적 논변을 거쳐서 결국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야말로 진정한 페미니즘인 것처럼 말씀하시고 계실 따름입니다. 물론 어떤 페미니즘은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귀결될 수 있습니다만, 모든 페미니즘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페미니즘은 해당 사조 전반을 대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고종석 선생님의 페미니즘 강의 그 자체를 지칭하는 여성주의 용어는 존재합니다. 이미 들어보셨겠죠? '맨스플레인'이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이 쓴 에세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어, 독자적인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7]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맨스플레인이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고 싶어하는 수많은 남자들처럼, 이것은 단지 남자들이 '지식 자랑'을 더 좋아할 뿐이기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굳이 '맨'들의 과오라고 지적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이죠. 

하지만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가르치려 든다'는 사실 그 자체의 이면에 있는 중요한 성차별적 가정을 지적합니다.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가르치려고 드는 남자는, 상대가 자신보다 해당 주제에 대해 무지할 것이라고, 너무도 태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8]


7.

처음 이 편지를 시작할 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보겠습니다.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공개 편지는 누구를 '실질적 독자'로 염두에 두고 쓰여진 편지 형식의 칼럼일까요?"

고종석 선생께서 쓰신 편지는 결국 페미니즘을 가르치기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문제는 그 가르침을 받는 상대가 누구냐일 것입니다. 고종석 선생께서는 과대망상에 빠져 있거나 하지 않으시므로, 당신께서 한국어로 한국 신문에 쓰신 글이 엠마 왓슨 본인에게 가 닿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즉, 엠마 왓슨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엠마 왓슨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여성'으로서 무언가를 실천하려 하는 젊은이들이 실질적 독자로 상정되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리거든요. 그저 HeForShe 운동을 소개하고 더 많은 이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싶다면 굳이 '당신이 열 살이었을 때 벌어졌기에 몰랐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여성 미군 사병이 벌인 잔학행위' 등을 꺼내들 필요가 없습니다. 고종석 선생님은 당신의 머릿속에 어떤 페미니즘, 하지만 잘 따지고 보면 '나쁜 것은 나쁘다주의'로 수렴하는 무언가를 상정한 채, 요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에게 한 말씀 하신 게 아닌가요.

그런 맨스플레인을 화끈하게 풀어내셨으니, 트위터에서 실시간 트랜드에 등극하신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평생토록 맨스플레인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그 개념이 소개되자 다들 갓 말문이 트인 헬렌 켈러처럼 환호했던 여성들이, 고종석 선생님의 '편지'가 갖는 근본적인 속성을 설마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엠마 왓슨을 소환해놓고 여성들에게 '너희들에게 내가 페미니즘을 한 수 가르쳐주마'라고 하셨으니 반발이 쏟아지는 게 당연합니다.

아, 어쩌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젊으셨던 시절에는 남자가 여자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게 이상한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만, 옛날에는 운동권 남자들이 여자 후배에게 접근하면서 '너는 성적으로 해방된 주체니?' 같은 질문을 던져가며 '그러니까 나랑 섹스하자'는 암시를 던지곤 했다는군요. 또, 많은 '운동권 오빠'들이 여후배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쳤다고도 합니다. 운동은 운동대로 하고, 남자가 자자고 하면 군말 없이 같이 자고, 임신을 해도 혼자 알아서 잘 처리하는 게 페미니즘인 양 가르쳐온 인간 말종 운동권 오빠들의 전설은 제가 대학에 입학했던 21세기의 벽두에도 은은하게 전해져오고 있었습니다.

고종석 선생님께서 정확히 그런 '운동권 오빠'라는 말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저런 오빠들 조심해라'라고 말하는, 운동권에 속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페미니즘 가르치는 오빠. 하지만 이전과 달리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방향이 뭐가 됐건 '페미니즘 가르쳐주는 남자'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8.

HeForShe는 남자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합니다. 페미니즘의 개념과 정의 자체를 대단히 단순한 차원에 못박음으로써, 남자들이 '설명'을 할 필요조차 없는 일로 만들어버립니다. 동시에 남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아주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남자들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그 단순한 대의에 동참하고 묵묵히 참여하는 것 말입니다. 굳이 역할을 덧붙이자면 여성을 학대하고, 괴롭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공공연히 주장하고 떠드는 다른 남자들을 제어하는 것이겠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해 맨스플레인 하는 남자 지식인이 물의를 빚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것 역시 다른 남자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고종석 선생님께 공개 서한을 보내야 할 당위가 생깁니다. 맨스플레인을 하는 남자들은 여자들이 뭘 모른다고 전제하고 있기에, 어지간해서는 여자들이 하는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저와 비교하자니 머쓱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썼을 때의 상황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들의 말을 숫제 듣지 않으며 그들의 권리를 억압한다면, 다른 남자들이 나서서 말려야지요.

HeForShe가 갖는 실천적 의의도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페미니즘 내에서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상호 교차하는 가운데, 가부장적 억압의 구조를 제공하고 있는 남자들 중, 양심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반인 그 남성들이 동질적 무리가 아니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아는 사실"이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어떤 남자들은 성평등의 문제에서 자신이 속한 젠더 그룹이 아닌 억압받는 집단의 편에 섭니다. 그런 사람들이 더 늘어나야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은 곳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엠마 왓슨에게 보내신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지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페미니즘의 주체는 여성만이 아니라, 여성을 비롯한 모든 인류입니다. 남성과 LGBT를 포함한 모든 인류입니다. 인종과 계급과 장애 여부를 가로지르는 모든 인류입니다." 앞서 지적된 것처럼, 고종석 선생님께서는 저 "He"와 "She"의 범주를 아주 넓게 잡으셨죠. "HeForShe의 He에는 모든 범주의 강자나 가해자가 포함돼야 하고, She에는 모든 범주의 약자나 피해자가 포함돼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HeForShe 선언을 안 하실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이 칼럼을 읽으면서 가장 의아하게 느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페미니즘을 넘어, 사실상 젠더 이슈도 아닌 무언가로까지 '진정한 페미니즘'을 확장시켜놓으시더니, 정작 본인은 남들 다 하는 그 쉬운 HeForShe 선언조차 안 하셨으니 말입니다. 'He'가 모든 범주의 강자고, 'She'가 모든 범주의 약자라면, 고종석 선생님께서 HeForShe를 안 하실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슬쩍 하셨나요?

페미니즘이 후기구조주의적 비평과 이론에 의존하던 시절에는 남자들이 책 한 두 권 읽고 너의 무의식이 어쩌고 욕망이 저쩌고 하면서 개폼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습니다. 엠마 왓슨더러 '백인 중산층 여성'이라고 비난해봐야,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남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을 감내하고 살아가기에, 많은 여성들은 선생님이나 저 같은 한국인 남자보다는 백인 중산층 여성에게 동질감을 느낄 가능성이 큽니다. 성차별의 문제는 다시금 단순명료한 평등의 문제로 재정의되었고, 그렇게 단순화된 페미니즘의 구도 속에서 남자들은 차별에 찬성하는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문제는 남자입니다. 남자들이 여성 차별적인 사회를 만들고, 그 구조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설령 다 못 지킨다 하더라도, 더 많은 남자들이 여성들의 편에 서겠다고 약속하지 않는 한, 여성 뿐 아니라 모든 젠더 그룹이 겪는 폭력과 차별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아직 HeForShe를 하지 않았더군요. 이 편지를 쓰는 김에 동참합니다. 고종석 선생님도 조만간 함께하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옳은 일인지, 이미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가,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 HeForShe는 실천돼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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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조원,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테레사 드 로레티스, 이브 세지윅, 주디스 버틀러를 중심으로", 이희원, 이명호, 윤조원 외, 『페미니즘: 차이와 사이』(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2011), 19쪽.

[2] 같은 책, 20쪽.

[3]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서울: 교양인, 2013), 개정증보판, 초판 2005. 29쪽

[4] 같은 책, 30쪽.

[5] 정희진, "페미니스트", <한겨레>, 2015년 8월 21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5476.html

[6] 같은 곳.

[7] 리베카 솔닛, 김명남 옮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경기도 파주: 창비, 2015), 15쪽.

[8] 같은 책, 20쪽. 강조는 인용자. 맨스플레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트위터 사용자 미원(@umami_er)님의 트윗에서 도움을 받았다.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0075939135488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1786506366976 https://twitter.com/umami_er/status/646223730725666816 참고.

2015-09-20

귀족이냐 평민이냐

1.

정치는 갈등이다. 어떤 집단과 집단이 무슨 주제로 갈등하고 있느냐를 파악하면 정치적 구도가 그려진다. 유행어가 된지 10여년 만에 시쳇말이 되어버린 '프레임'도 결국 그런 맥락에서 쓰이고 있다. 조지 레이코프가 제시한 언어심리학적 개념의 섬세한 학술적 맥락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는 누가 누구와 왜 싸우고 있는지를 단번에 설명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개념으로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가깝게 잡아도 2008년 대선부터 야권은 늘 지고 있다. 대선에서 두 차례나 패배했고, 총선에서도 다수석을 점해본 적이 없다. 시계를 조금 더 돌려봐도 마찬가지다. 1997년, 2002년의 대선 승리는 주기적인 여야간 수평적 정권교체의 시작이 아니라 역사적 예외로 기록될 것만 같다는 불안감에 많은 이들이 시달린다. 현재의 야권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것은 오직 17대 총선에서만 가능했었고, 그 총선은 다들 기억하고 있다시피 탄핵 역풍 속에 치뤄진 '비상선거'였다.

요컨대 야권은 늘 불리한 상황 속에 처해 있었고, 최근에도 늘 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개념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쭉, 계속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것은 마치 지형지물처럼 주어진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야권이 패배하면 운동장이 기울어진 탓이라는데, 입장을 바꿔서 국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야권의 브레인 내지는 빅마우스라는 사람들이 '우리가 패배한 것은 원래 환경이 그래서 그렇습니다'라고 웅얼거리고 있는 꼴이다.

'프레임'을 바꿔야 이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현실을 설명할 때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프레임을 퍼뜨리고 있는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 전통적인 야권 지지층이 실망하여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도가 20퍼센트 대에서 맴도는 것도, 야당의 구성원들끼리 총선과 대선의 승리라는 단일한 목적 의식 하에 단결하여 일관된 지도 체제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이미 담론이 오가는 내용과 수준만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기울어진 운동장' 타령을 하며 국민들에게 징징거리고, '20대 개새끼론'을 들먹이며 본디 야권 지지 성향이 높은 청년층에게 표 내놓으라고 반 협박을 해서 도리어 심정적 지지도를 갉아먹고, 이중 삼중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투표장으로 이끌고 지지층으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기는 커녕 '아줌마들이 몰표를 줘서 박근혜가 당선되었다'는 여성혐오적 인식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야권에게 과연 미래는 있을까. 수많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매우 부정적이다.


2.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정치는 갈등이다. 이것은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정치학의 거장 E. E. 샤츠슈나이더의 통찰이다. 정치는 갈등의 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긋고 지지자를 확보하는 게임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갈등의 선이 불리하게 그어져 있는 한, 미시적인 노력으로는 그 한계를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거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령 지금까지 '지역감정'이라는 말로 호도되어 온 호남혐오, 호남포위 전략에 대해 생각해보자. 군사정권과 그들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는 정치 세력은 위협적인 대선 후보 김대중을 눌러앉히기 위해 끝없이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동시에 그의 지지 기반인 호남을 고립시키는 데 주력했다. 누군가 김대중을 지지한다면 그는 호남 사람이다, 이렇게 김대중이라는 개인과 호남을 1:1로 결부시킴으로써, 김대중을 둘러싼 갈등을 '호남 대 비호남'으로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대중이 어떤 새로운 정치적 갈등의 선을 제안하건, 그것을 빨갱이 아니면 호남이라는 두 개의 타자화된 개념틀에 포박지어 버림으로써 그를 1997년까지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전략은 현재 '친노 대 비노'라는 구도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다.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는 나중 문제고, 일단 그가 '친노'라고 분류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갈등의 선이 그어진다. 야권 내의 정치인을 '친노'와 '비노'로 분류하고 있으니, 당연히 갈등은 노무현이라는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을 중심으로 그어질 수밖에 없다. 비극적인 것은 노무현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기준선으로 그어진 갈등을 극복하거나 재설정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끝없이 갈등의 선으로 제시되며, 사실상 학대당하고 있다.

야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더 나아가 다가올 총선과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 혹은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며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고민은 좀 더 근본적인 곳을 향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갈등은 어디에 있는가?


3.

현재 야권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 매달려 있다. 이미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형식이 만들어진 나라에서, 2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민주 대 반민주'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선도 그래서 졌다. 정치인 박근혜의 가장 큰 자산이자 부채는 그가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더 이상 '갈등'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야권에서는 그 구도가 여전히 통용된다고 믿었고, 특히 이제는 50대에 접어든 386 세대 사이에서 그러한 믿음이 팽배했던 것 같다.

그들은 군사독재를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는 20대를 향해 '너희가 문재인을 찍지 않는다면 그것은 군사 독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협박했다. 20대는 꾸역꾸역 선거장에 나가 야당에 많은 표를 몰아주었지만, 정작 386들은 자신들의 동년배가 경제적 이유로, 혹은 잘난척하는 386들을 더는 참아주기 싫다는 이유로 도리어 박근혜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2년 대선 결과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대 이상에서 박근혜에게 몰표가 쏟아졌기 때문에 진 것이다. 그들은 숫자도 많고 표 결집도도 높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민주 대 반민주'라는 갈등은 거의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386들은 고장난 축음기처럼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붙들었고, 영남 득표에 올인하더니, 졌다.

대선 패배 이후 야당이 몇 번의 구조적, 혹은 명칭에서의 변화를 겪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제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갈등의 구조를 업데이트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친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선거에서 졌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 체계인 '민주 대 반민주'를 버리지 못한다. '비노'라고 부르는 세력은 심지어 그 정도의 이념적 틀거리도 갖추지 못한 채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을 간헐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듯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되겠지만, 정치는 갈등이다. 새로운 갈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새로운 정치도 있을 수 없다. 안철수의 새정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막연한 행복과 개혁을 약속하지만, 정작 한국 사회에서 당장 맞서 싸워야 할 핵심적인 갈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은 듯하다. 안철수 현상이 대선 직후 시들어버리고 만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새로운 정치는 새로운 갈등의 설정이어야만 한다.


4.

그렇다면 여권의 핵심적인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야당 성향의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 같은 말을 얼른 꺼내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빨갱이' 낙인 찍기로 압축되는 그러한 갈등 구도를 지금까지 즐겨 사용해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그러한 구도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성립하지도 않거니와, 애초에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부정적인 방향에서의 선 긋기를 가능하게 할 뿐 어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갈등을 창출해내지 못한다.

선진국 대 후진국. 그것이 지금까지 여권에서 국민 일반을 설득하기 위해 제시해온 가장 근본적인 갈등의 축이다. 보수 정당 중 하나의 이름이 '자유선진당'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누리당이라는 이름부터가 이미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를 새로운 어떤 차원으로 이끈다', 다시 말해 선진화시킨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후진국이 되지 말자, 가난에서 벗어나자, 경제를 발전시키자, 그렇게 선진국이 되자. 이것은 5.16 쿠데타 이후 군부와 신군부의 교체를 거치고, 3당 합당으로 입당한 김영삼이 당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이 되면서까지도 바뀌지 않은, 여권의 핵심 갈등이다. 지금까지 야당보다는 여당이 정치적 논의를 주도해왔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결국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 아주 최근까지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핵심 갈등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해방 직후 해외 원조에 의존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해외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가 된 것은, 그만큼 선진국 대 후진국의 대립 구도가 국민 전체의 뇌리에 강하게 자리잡아, 최선의 결과를 뽑아낼 수 있는 긍정적 갈등으로 기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오늘날 그 갈등이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는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이 되었지만, 과연 우리가 '선진국 대 후진국'의 갈등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그 갈등이 극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진국 대 후진국'의 구도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유효하다고 할 수도 없다. 분명 우리는 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선거로 대통령을 뽑고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심지어 국회마저도 '선진화' 되었으니 말이다.

선진국이 되어야겠다는 열망은 사라졌지만 개별적인 경제 주체들의 탐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나라가 모두 함께 더 잘 사는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선진국의 꿈'은, 어느덧 남들이야 망하건 말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각자도생의 꿈'으로 변질되어 버리고 말았다.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가 힘을 잃었지만, 그것을 대체할만한 전 국민적 도전 과제가 새롭게 제시되지는 않은 지금, 대한민국은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며 그저 표류하고 있다.


5.

한국 사회의 이상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 한국 사회를 바라보는 '프레임'을 다시 짜는 것은, 결국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갈등을 재정의함으로써 이루어진다. 1인당 국민 소득 2만불을 넘긴 나라, 평균 출산률이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 국민들이 밤낮 없이 일하지만 극소수의 특권층을 제외한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나라. 이 나라의 갈등은 어디에 있을까?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이냐, 평민이냐'의 갈등을 겪고 있다. 소수의 '귀족'들이 그들의 '가족'을 위해 국가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느냐, 아니면 절대 다수의 '평민'들이 틀을 깨고 연합하여 일 하는 사람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고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위대한 평민의 나라'로 향하느냐의 갈림길이다.

최근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젊은이들 사이의 유행어를 떠올려보자. '금수저'가 있고 '흙수저'가 있다. 앞으로 이 나라에서 수십년 더 살아야 하는 젊은이들의 눈에는 곧장 보이는 것이다. '상속받을 유무형의 재산이 있는 자'와 '부모로부터 빚이나 잔뜩 물려받지 않으면 다행인 자'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당신들이 함부로 순진하다고 치부하며 계도하려 드는 젊은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헬조센'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최근 언론에서 그 단어를 거론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은 섯불리 현실 속에서 절망하는 젊은이들을 꾸짖느라 바쁜 것 같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국 인생의 문제를 부모와 조부모의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채 태어난 평민 청년들의 울부짖음이다. 왜 그들은 자유롭고 평등한 대한민국에 살면서 '헬대한'이 아니라 '헬조선'이라고 말하는가? 젊은이들이 경험한 바, 이 나라는 신분제 조선에 더욱 가까운 무언가로, 다시 말해 양반이라는 특권 귀족 계층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던 그 수준으로 굴러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는 젊은이들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 '헬조선'을 외치는 젊은이들에게 '선진국 대 후진국' 구도는 그저 공허하게만 들릴 뿐이다. 이 나라가 아무리 '선진국'이 된다 한들 그 과실이 자신에게 돌아올 리 없다는, 남들은 행복하겠지만 자신은 끝없이 늘어나는 노동 시간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데, 선진국 타령이 말같은 소리로 들리겠는가?

게다가 오늘날의 청년들은 성장기에 2002년 월드컵을 일종의 원체험으로 경험했고, 전 세계인들이 케이팝을 듣고 한국 드라마를 보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지 말지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더 선진국이 된다 한들 자신에게 떨어질 이득이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청년 세대가 볼 때 대한민국은 지금도 어느 정도는 충분히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선진국의 작동 방식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귀족이냐 평민이냐. 오직 이 갈등만이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지닌다.


6.

현존하는 정치적 갈등을 귀족과 평민의 갈등으로 재편하는 것은 야권에도 한 가닥의 희망을 안겨준다. 기울어진 운동장이 기울어졌다고 불평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운동장을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물론 새누리당도 선거를 앞두고 '서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야권보다 좀 더 왼쪽에서는 '민중'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서민'이나 '민중'은 그러나, 그에 대립하는 개념이 없는, 정치적으로 오작동하기 딱 좋은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신학적 개념에 더욱 가까운 것이라고 하겠다.

생각해보자. '서민'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중산층'인가? 아니다. '서민과 중산층'은 마치 짜장면과 짬뽕처럼 한 세트로 취급될 뿐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둘 다 모든 정치 세력이 앞장서서 지켜줘야 할 누군가이며, 더 많은 연말정산 환급을 받아야 하고, 온갖 종류의 지원을 받아야 하며,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할 시혜자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언어 속에는 '서민과 중산층' 바깥의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서민 정당'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반서민 정당'을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민들의 이익'은 박근혜가 아니라 박정희가 돌아와도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된다. 그러므로 선거를 앞두고는 좋은 말을 아무 것이나 갖다 붙일 수 있는 것이다. 서민을 위해, 중산층을 위해.

그 결과 진정한 정치적 갈등은 실종되어 버렸다. 2012년 대선을 돌이켜보자. 여당과 야당의 경제 공약이 거기서 거기였다. 야당의 지지자들은 '어차피 저들은 실천하려는 진정성도 없이 공약을 마구 베꼈다'라고 불평한다. 하지만 애초에 공약을 '베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만약 야당의 공약이 진정으로 올바른 갈등을 설정하고, 자신들의 지지자들에게 올바른 혜택을 가져다주며 갈등선 너머에 있는 세력에게 불이익을 주도록 만들어져 있었다면, 그런 공약은 절대 도둑질당할 수 없다. 여당이 야당의 경제 공약을 베낀 게 아니라, 야당이 여당의 경제 공약을 대신 써준 셈이다. 어차피 양당 모두 한국 사회의 갈등을 올바로 파악하고 재설정하여 그에 맞춰 정치의 룰을 다시 짜는 대신, 그들에게 익숙하지만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갈등 위에서 기존의 지지층을 재결집하여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7.

'평민'은 '서민'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서민'은 '민중'처럼 그 외부가 존재하지 않는 막연한 선의 거대한 대변자이면서 수혜자인 반면, '평민'에게는 분명한 외부의 적이 있다. '귀족'이 바로 그것이다. 평민은 귀족과 맞서서, 단결하고, 스스로의 이익을 지켜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서민'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그 어떤 실존적 선택도 강요하지 않는다. 연봉 1억을 받아도,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별별 희한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이 서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반면 스스로를 '평민'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분명한 실존적 선택이다. '귀족 마케팅'이 넘실거리고 '없어보이는 것'이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하면 분명 그렇다.

바로 그렇기에 '평민'은 정치적인 힘을 갖는 단어다. '나는 평민이다, 그렇다면 너도 평민인가?'라고 유의미하게 물어볼 수 있는 그런 개념인 것이다. 스스로 평민이 아니라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당신은 귀족이겠군, 나는 다른 평민들과 함께 당신 같은 귀족에 맞서겠다'고 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나뉘는 세상에서, 너는 누구인지, 혹은 누구의 편인지 물어볼 수 있는, 현실과 맞물려 제대로 작동하는 대립적 언어의 쌍을 우리는 지금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저 '귀족'의 범위 안에 우리는 수많은 이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창업주 일가'의 이익을 위해 왜 국민들이 납부한 국민연금이 투입되어야 하는가? 그들 같은 귀족을 위해 우리 평민들이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건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귀족들은 땀흘려 일하는 평민을 내쫓고 권리금을 빼앗으며 임대료를 올려 자영업자들을 고사시킨다. 평민 집안의 자녀들은 날로 복잡해져가는 대입의 문턱에서 좌절하지만, 귀족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녀를 일찌감치 외국에 빼돌려놓은 상태다. 여차하면 평민들이 총알받이 하는 사이 귀족의 아들들은 검은 머리 외국인이 되어 돌아와 통치할 기세다. 평민과 귀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21세기 대한민국을 가르는 갈등의 선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 노동 시장의 이중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노동귀족'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고가 가능해진다. IMF 이후 대대적으로 비정규직이 늘어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작은 기득권을 사수하는데 급급하여 정규직 노동조합 조직률도 늘리지 않고, 비정규직은 아예 내팽개쳤다. 노사정 대타협을 통해 그 노동귀족들은 경영귀족, 관료귀족들이 평민들의 노동권을 침탈하는 것을 반쯤은 방조와 묵인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도 진보는 '노동귀족'들이 내팽개친 평민들의 손을 잡는 대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이런 귀족'과 '저런 귀족' 사이의 선택지만을 국민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공무원이나 대기업 사무직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잘 조직된 대규모 블루칼라 사업장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늘의 별 따기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청년들에게, 더 나아가 정치적인 변화를 원하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귀족들에 맞서 평민의 이익을 지켜줄 단단한 정치 조직이다.


8.

레드 컴플렉스는 통합진보당의 해산, 그리고 김정은의 뚱뚱한 몸매와 함께 정치의 장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선진국이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왔지만 지금 우리는 그 동력을 상실한 채 후진국으로 한 걸음씩 후퇴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야당은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만 끝없이 반복하면서 역사의 퇴행을 사실상 방조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정작 그 사이, 이제는 노력해도 안 되는 사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청년들은 '헬조선'을 외친다. 그것은 단순한 비관이나 풍자가 아니다. 신분제 사회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비명이다. 특권층, 양반, 귀족들이 지배했던 우울한 역사를 벗어나, 가까스로 노력한 만큼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절망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귀족과 평민이 대립하는 나라다. 회사를 물려받고 건물을 물려받고 학벌과 명성을 물려받는 귀족들이 있고, 자기 손으로 아등바등 벌어도 가까스로 먹고 살까 말까 하는 평민들이 있다.

평민들이 귀족을 이기는 것은 역사의 당위다. 올바른 정치 세력이라면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이기고 싶은 정치 세력이라면 더더욱 평민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귀족보다 훨씬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갈아엎고, '노령화 핵폭탄'을 맞은 인구 구조를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은 오직 그것 뿐이다. 갈등을 새로 짜라. 이제는 평민들이 힘을 합쳐 귀족과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