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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9

[별별시선]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2008년 12월, 나는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비판했다. 그해 11월엔 바이오매스,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풍자성 칼럼을 썼다. 그러나 2017년 7월의 나는 당시의 나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9년쯤 됐으니 입장이 바뀔 법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첫째, 신재생에너지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기대치가 수정됐다. 둘째,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변하고 있다. 셋째, 환경오염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나씩 짚어보자. 내 입장이 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 가령 구글의 판단도 그렇다. 2007년 11월27일 구글은 google.org라는 비영리법인을 통해 ‘석탄보다 저렴한 재생가능에너지’(RE<C) 계획을 발표했다. 지열발전을 개량해 석탄보다 낮은 가격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유가가 하늘로 치솟고 수많은 기술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라는 난제에 덤벼들던 시절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2011년 11월22일, 구글은 RE<C 계획의 실패를 선언했다. 대신 그 외의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에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기대치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의 주요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가솔린 혹은 디젤이 아니라 전기를 동력원으로 삼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지난 5일, 스웨덴의 자동차 메이커 볼보는 2019년부터 전기차 혹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만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스마트폰 시장으로 바꿔놓았듯, 테슬라의 국내 진출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있어서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전기차는 전기를 연료로 삼는다. 따라서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발전량을 줄이고 냉장고를 없애자는 식의 주장은 너무도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2008년과 달리 미세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중이다.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으로는 석탄화력발전과 디젤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정부는 대신 액화천연가스(LNG)발전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석탄에 비해 비싸고 가격 변동이 심할뿐더러, 정도가 덜하다뿐이지 역시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은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LNG 등 화력발전소가 더 자주 가동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친환경적인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탈핵 선언 철회를 촉구한 환경단체 ‘환경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대표 마이클 쉘렌버거 역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입장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동시에 개인과 산업체가 모두 안정적으로 충분한 전기를 공급받으려면 ‘탈핵’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유지하고 늘려나가되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석탄에 비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은 현재까지 원자력뿐이다. 원자로 해체, 사용후 핵연료 처분,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 비용을 모두 포함해도 그렇다. 원전 사고의 우려는 최대한 안전성을 높이고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사회적 위험 요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저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했다고 여겨지는 이 말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유작인 「When The Facts Change」의 제목이 되었다. 그렇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비고: 탈핵 및 국제 정치에 대한 노선 차이를 이유로 경향신문은 이 칼럼을 끝으로 나를 별별시선 필자에서 제외시켰다.


입력 : 2017.07.09 20:53:00 수정 : 2017.07.11 17:13:33

2017-06-11

[별별시선] 한·미동맹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사드 배치에 대한 청와대의 태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대체 왜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일까? 어차피 미국은 사드를 못 뺀다는 전제하에 벌이는 벼랑 끝 전술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판단은 미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다. 하나씩 따져보자.

‘한반도는 미국에 이른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먼저 파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럴 리가.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가 결코 아니다. 미국에 전략적 요충지란 석유가 나오는 중동, 유럽을 향해 띄운 ‘항공모함’ 영국,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한 최대 거점인 일본 등이다. 과거에 그어졌던 ‘애치슨 라인’이 보여주었다시피 한반도는 그에 포함되지 않는다. 2002~2004년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한국통’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보자.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 전까지 한국은 미국에 전략적 중요성이 없었으며 아시아 본토에 미국의 병력이 존재할 경우 미국에 과도한 리스크만 안길 뿐이라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일치된 견해였다. (중략)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4만2000명에 이르는 미국 시민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이 때문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는 남한을 ‘잃어버려서’, 그런 희생을 헛된 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했다.”(50쪽) 미국에 한반도는 ‘중요하기 때문에 지키는’ 땅이 아니다. ‘지켰기 때문에 중요해진’ 곳에 가깝다. 한국 정부가 미국을 어떻게 대하건 미군이 남아 있으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 해도 북한은 한국을 선제공격할 수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게 진짜 문제다.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을 폭격해도 미군이 직접 반격을 당할 위험이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 병력의 손실 없이 폭격이 가능할 경우 결코 폭탄을 아끼지 않는 나라다. 주한미군은 북한보다 오히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안전핀이라는 뜻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의 반격은 주일미군을 향할까, 한국을 겨냥할까? 진보 진영 자주파들은 ‘북한의 주적은 미국이지 한국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북한은 미국이 아무 공격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연평도를 포격하고 천안함에 어뢰를 쏜 바 있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종교적 믿음을 안보의 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일 경우 발생하게 될 경제적 혼란을 미국이 원치 않으므로 북한 선제타격은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물론 미국은 혼란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사정이 다르다.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폭로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임기를 다 채워나간다고 가정해 보자. 형사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기 싫다면 무조건 재선에 성공해야 한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쇼’를 벌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지난 4월13일, 별다른 전략적 실익 없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가(IS) 지하기지에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지닌 GBU-43/B를 투하했다. 핵무기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폭탄이다. 그리고 언론 앞에서 우쭐거렸다. 트럼프가 재선용 카드로 북핵 문제를 ‘날려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고? 불과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트럼프의 당선 자체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자주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과 세계에 대한 관념은 1970년대의 리영희가 1960년대 일본 좌파들의 그것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2017년 현재, 반세기 전의 세계관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정책이 짜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의 정직한 입장 표명과 대국민 토론이 필요하다.


입력 : 2017.06.11 21:16:02 수정 : 2017.06.11 21:24:35

2017-05-14

[별별시선] 문재인 대통령, 국민을 실망시켜야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성공을 바란다. 동시에 그가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를 기원한다. 위 두 문장은 모순이 아니다. 향후 5년의 성패는 그가 얼마나 국민, 특히 자신의 지지층을 효과적으로 실망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정권은 국민들의 절망을 딛고 큰 기대를 받으며 출범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거 과정에서 유권자들이 불편해 할 수 있는 진실을 전하고 이해를 구하는 대신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바로 그 지점부터 문제적이다.

문재인은 자신의 공약을 전부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주변인들 역시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대다수의 심기를 거슬러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난 4월28일, 문재인 캠프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공약 실현을 위한 세율 인상의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문재인과 그의 대선 캠프는 선거 과정에서부터 국민들의 ‘기분’을 고려하여 복지 공약에 수반하는 증세 논의를 회피해왔다. 사드 배치를 철회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외교안보적 비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안으로는 경기침체, 밖으로는 북핵 위기와 싸워야 하는 지금, ‘불편한 진실’을 입에 담지 않으려던 대통령 후보와 캠프가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대통령은 권력자 맞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며,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도 없고,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들이 사방에 포진하고 연합해서 또 괴롭힐” 것이므로 ‘진보 어용지식인’이 되겠다는 유시민 작가는 그 우려를 배가한다. 얀 베르너 뮐러의 책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를 펼쳐보자. 유시민의 발언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집권한 포퓰리스트는 집권 기간의 실패를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기존 엘리트가 뒤에서 훼방을 놓은 탓으로 돌릴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결국 “일종의 종말론적 대립 상태를 꾸며내 국민을 계속 분열하고 동요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문재인이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아니다. 문재인이 내세운 온갖 ‘사이다’ 공약들은 현실 속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미리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수많은 이해당사자의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표출되고 어우러지는 민주주의의 본성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대통령이 그와 같은 현실적 한계를 수긍하고 국민들에게 설명하여 합의점을 찾는 대신, ‘수구 기득권’ 같은 가상의 적을 설정하고 모든 비난을 떠넘긴다면, 비로소 그때 문재인은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관을 지닌 집단과 개인을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 공존하는 과정이다. 어떤 정책이 구현된다면 누군가는 절대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 손해를 본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반대자의 입을 억지로 다물게 하는 대신, 그들의 불만을 끌어안고 함께 가야만 한다.

만약 문재인이 합리적 목표 설정과 달성을 위해 국민을 실망시키고 그로 인해 비판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옹호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어용 지식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그럴듯한 이상만을 내세운 채 소위 ‘기득권’의 피해자 행세를 한다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권리뿐 아니라 그 권력 행사의 방법과 목적을 국민에게 납득시켜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은 성공하기 위해 국민을 실망시켜야 한다. 자신들의 세상이 펼쳐진 양 의기양양한 지지자들을 진정시키고, 현실 속에서 가능한 일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며 국민을 설득해나가야 한다. 그와 같이 성숙한 민주적 정치 행보를 보일 때, 더불어민주당 정권은 참여정부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입력 : 2017.05.14 20:54:02 수정 : 2017.05.14 20:57:27

2017-04-16

[별별시선] 진보의 적폐, 음모론자들

나는 '적폐(積弊)'라는 개념을 사람에게 붙이는 화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종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이 폭력적인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표현을 꼭 써야 한다면, 상대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적폐 또한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진보에도 적폐가 있다. 음모론자들이 바로 진보의 적폐세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진보 개혁 세력의 현실 인식을 방해하며, 사안에 대한 상식적 토론을 가로막음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결과적으로 보수 적폐세력과 적대적 공존을 이어간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음모론자들의 개입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그 참사의 배후에 단일한 '악의 세력'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과적으로 인한 복원력 상실이라는 가장 합리적이고 단순한 이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국정원의 레이더 무기부터, 미국인지 이스라엘인지 알 수 없는 어떤 나라의 잠수함까지, 수많은 '아니면 말고'가 밑도 끝도 없이 던져졌다. 선박 및 교통안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대신,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을 검증하느라 귀중한 논의의 기회가 날아가버렸다.

세월호가 인양되고 난 후 속된 말로 가장 '멘붕'한 쪽도 다름아닌 일부 진보 세력이었다. 그들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잠수함과의 충돌이라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가 인양되면 모든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굉장한 음모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지만 정부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있다는 듯이 분위기를 조성하던 사람들. 세월호가 떠오르자 그들의 목소리는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계속 음모론을 생산하는 사람이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닻을 던져서 고의로 배를 침몰시켰다고 주장하던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세월호 인양 후에도 '고의침몰설'을 고수하더니, 4월 14일에는 18대 대선에서 개표 부정이 벌어졌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 <더 플랜>을 인터넷으로 공개했다.

<더 플랜>에서 인터뷰한 UC 버클리 통계학과 교수 필립 스타크의 말을 통해 <더 플랜>의 기본적 오류를 반박해보자.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종이 기록지가 남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기록지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전자투표는 오류를 확인하거나 수정이나 복원을 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한국의 선거는 정확히 "옵티컬 스캐너를 이용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전자투표가 아니다. 투표지분류기는 이름 그대로 투표지를 '분류'만 해줄 뿐이고, 실제 개표는 사람이 한다. 애초부터 한국의 선거는 애초부터 수개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다만 수개표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기계를 동원해 표를 '분류'할 뿐이다. 미분류표에 박근혜 표가 많았건 문재인 표가 많았건 결과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최종적으로 사람이 손으로 넘겨보고 눈으로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표소에는 각 후보 및 정당에서 추천한 참관인들이 있다. 18대 대선에서 여당에 유리하도록 부정개표가 이루어졌다면 민주통합당에서 추천한 참관인 중에 매수 혹은 협박당한 사람, 혹은 그런 상황을 목격한 증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런 사례는 확인된 바 없다.

김어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아니면 말고' 아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이 시점에서 음모론을 하나 던져보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19대 대선을 앞두고 18대 대선 개표부정설을 퍼뜨린다니 이게 무슨 짓일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불복 운동을 벌이려는 냄새가 나지 않나? 뭐, 아니면 말고.

누가 이기건 정권교체가 예정된 대선이다. 보수의 적폐세력은 무너졌다. 이제 범진보진영 역시 스스로의 적폐를 돌이켜보고, 반성하며, 청산해야 한다. 동쪽에는 트럼프, 서쪽에는 시진핑, 북쪽에는 김정은이 둘러싸고 있는 지금, 음모론 따위에 낭비할 여력은 없다. 진보의 고질병인 음모론, 적폐세력인 음모론자들을 떨쳐내고, 새로운 시대를 헤쳐 나가자.

입력 : 2017.04.16 21:28:04 수정 : 2017.04.16 21:32:33

2017-03-19

[별별시선] 태어나고 싶은 나라

'박정희 신화'가 허물어졌다. 재벌 중심 수출 경제의 신화 역시 동시에 무너지고 있다. 청년들은 절망하고 노인들은 폭주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침묵하거나 공회전하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라 대통령을 파면해낸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의 이상을 제시하고 토론해야 할 시점임에도 말이다.

그런데 대체 그 논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떤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해석하며 대안을 찾아나가야 하는가? 철학자 존 롤스가 제시한 '무지의 장막'을 드리워볼 때이다.

어떤 사회가 근본적인 규칙을 형성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떠한 조건에 처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보자. 특권층에게 유리한 사회 구조를 만든다 해도 내가 그 특권층이 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의 장막'이 쳐져 있다면, 사람들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을 수립할 것이라는 것이 존 롤스의 생각이었다.

무지의 장막을 쳐놓고 대한민국을 검토해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본인에게 어떤 조건이 주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자신의 성별, 성정체성, 신체적 장애, 부모의 재산, 교육, 가정환경, 신분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는 말이다.

무지의 장막에 싸여진 아기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태어나는 그 자체가 엄마의 경력 단절을 낳는 원인이다. 게다가 여자로 태어나면 내 엄마가 겪고 있는 차별이 내게 넘어올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확률은 반반이다. 운 좋게 남자로 태어났다 한들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사회의 일원으로 공정한 대우를 받기 위해 끝없이 투쟁해야 한다. 성소수자라면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며, 결혼 등 동등한 법적 제도를 누릴 수 없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목표가 되는데, 일단 그 속에 끼어들지 못한다면 경제적 궁핍을 각오해야 한다. 고소득 정규직 혹은 전문직이 된다 한들 워낙 긴 노동시간으로 인해 풍족하고 여유로운 삶은 그저 꿈일 뿐이다.

이런 나라에서 출산율이 높다면 그것은 너무도 이상한 일이 아닐까? 여론조사전문기관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6년 1월에 수행했던 여론조사에 의하면, 다시 태어나도 대한민국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 1000명 가운데 30.2%에 지나지 않았다. 11.9%는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유보했고 57.9%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응답했다. 같은 조사에 의하면 69.0%가 막연하게나마 이민을 꿈꿔보았다. 이미 대한민국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마음 속에서 이 나라를 버린 것이다.

출산율이 낮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론 수준'의 문화 컨텐츠를 만들자,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절반 이상의 한국인에게 대한민국은 태어나고 싶은 나라가 아니다. 이미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기회만 된다면 '탈조선'하겠다는 소리를 공공연하게 한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이 나라에서 많은 것을 얻고 누려왔던 사람들조차 자기 자식은 '탈조선' 시키겠다며 온갖 편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고, 그에 대해 사회적으로 지탄하기보다 오히려 부러워하는 듯한 분위기이다. 수십년에 걸쳐 대한민국에 '빨대'를 꽂아온 최순실 일당의 목적도 결국은 '탈조선' 아니었던가?

이 땅에 남아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고, 지키고, 일구고, 가꾸고, 이루어내고,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이미 정신적으로 죽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이 분위기 속에서 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야 하는지, 무지의 장막 너머의 아기를 설득해낼 수 있는가?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입력 : 2017.03.19 19:37:00 수정 : 2017.03.19 23:29:07

2017-02-19

[별별시선] 신화는 없었다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에 대해 특검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79년만에 처음으로 삼성그룹의 회장이 구속되었다고, '삼성 불구속 신화'가 깨졌다고 거의 모든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 물론 합법적으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역사를 바라보면, 이미 삼성그룹의 회장은 한 차례 권력에 의해 붙잡힌 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바 있다. 1961년 5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이병철 회장이 박정희 장군을 '만났다'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박정희는 쿠데타에 성공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지적하고 체포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 이병철은 일본에 있었고 한 박자 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감옥에 갈 줄 알았던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에 몸담았던 손병두 전 전경련 상근부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메트로호텔이라는 곳에서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어떤 '신화'가 이어진다. 박정희는 자신이 경제를 잘 모르므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병철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박정희에게 기업인들을 석방해달라고 직언한 후, 일본의 일본경제인연합회(게이단렌)를 모델로 삼아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된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설하였으며 국가중심의 경제개발 전략 수립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이들이 박정희 신화, 혹은 한국의 재벌 신화를 윤색하는 과정에서 이 사건을 일종의 평화로운 회의, 혹은 '이병철의 돌직구'가 한국 경제 성장의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분수령으로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당시 귀국한 이병철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계엄 상황이고, 상대는 바로 그 쿠데타의 주인공이다. 형무소가 아니라 호텔에서 만났다 해도 실질적으로 구금 상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박정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박정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큰 이익을 안겨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만 할 상황이다. 박정희를 오래도록 보좌해온 누군가를 익명으로 인터뷰한 후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병철은 모종의 방법으로 귀국하라는 설득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서울 모처에 감금됐다. 그러나 재능 있는 사업가이자 설득력 있는 화술의 소유자였던 이병철은 박정희 장군과의 협상 끝에, 그가 지닌 대부분의 재산을 국가에 '기부'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다른 기업가들이 박정희가 제시하는 경제개발 전략에 따르도록 설득하겠다는 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병철은 오늘날까지 존속하며 기업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36쪽)

대한민국의 기업과 정부의 관계란 바로 이렇게 형성되었다. 정권을 손에 쥔 자는 기업의 목에 칼자루를 들이댈 힘을 갖는다. 기업은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그 대신 정부의 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주요 사업에 참여할 권리와 더불어 해당 사업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시중 금리보다 훨씬 저렴하게 대출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대출받은 돈 중 일부는 다시 정치인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재용 측에서 최순실과 정유라의 말 구입 및 승마 비용을 지불해놓고도 그것이 뇌물로 제공된 것이 아니라 협박을 받아 내놓은 것이라고 항변하는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강제로' 돈을 내놓으면 권력으로부터 더 많은 이권을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 하에 행동했을 따름이다. 1961년 이병철이 불법적으로 '구속'될 때부터 2017년 이재용이 합법적으로 구속될 때까지 이어져온 게임의 법칙을 따른 것이다.

'삼성 불구속 신화'는 없다. 방금 깨진 것이 아니라 원래 없었다. 다만 우리에게는 재벌과 정권의 결탁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신화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이제는 가짜 신화가 사라진 자리에 공정하고 민주적인 시장경제를 수립할 때다.

입력 : 2017.02.19 20:24:01 수정 : 2017.02.19 20:30:13

2017-01-15

[별별시선] 출산율 대책, 여성이 먼저다

아닐 미(未), 죽을 사(死).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을 담아 은퇴 후 고령층을 국가에서 '미사자(未死者)'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대중매체는 '미사자 과잉 사회, 잉여 인구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식의 여론몰이를 일삼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부추기기라도 하는 듯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 미사자 지도'를 만들더니 지자체별로 순위를 붙여서 공개한다. 인터넷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늙은이들 잡으러 가자', '우리 도시를 고려장 특화 도시로' 같은 '농담'이 횡횡한다.

물론 이 모든 상황은 가정법이다. 하지만 위 문단을 읽는 내내 아마도 독자인 당신에게는 강한 불쾌함과 거부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국가 경제'를 앞세워 멀쩡히 살아있고 앞으로도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는 고령의 시민들을 '아직 안 죽은 짐짝' 취급하는 내용이 한가득 담겨있었으니 말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금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의 공론장에서 발언하는 그 누구도 '고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장을 부활시키자' 따위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 선택 가능한 대안으로 취급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대신 은퇴 연령 조정이라던가, 연금 정책, 그 외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고령층을 보호하고 그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령층은 '인구(人口)이기에 앞서서 '인간(人間)'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사회 정책은 용납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상식이 왜 출산율 문제 앞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일까? '대한민국 출산지도'가 공개된 후 얼마 되지 않아 한 인터넷 매체에서는 '남자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듯이 여성들도 출산의 의무를 지고 애를 낳도록 해야 한다'는 칼럼이 버젓이 개제되었다. 인간을 강제로 죽이는 사회 정책이 용납될 수 없듯, 인간을 강제로 낳게 하는 사회 정책 역시 용납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발언이나 정책에서 인권의 기준치가 확 낮아진다. 나치 독일에서나 시행했었던 '의무 출산' 정책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거론되는 그런 나라가 되어 있다는 말이다.

2017년 현재까지도 대한민국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 인구로, 인구를 재생산하는 도구로만 바라보고 있다. '가임기 여성'들은 단지 자신들의 숫자를 세어서 공개했다는 사실 때문에 분노한 게 아니다. 그 숫자, '빅데이터'를 취급하는 방식부터가 모욕적이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여성을 '주체'로, '주어'로 존중한다면, 대한민국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기 위해 '도와주는'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가임기 여성들의 숫자를 지자체별로 공개한다면 동시에 육아 시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성별 임금 격차가 어떠한지 등을 함께 제시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가임기 여성들이 어느 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를지 결정할 때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정부에서 자료를 공개한 방식은 그와 정 반대였다. 지자체별로 '순위'를 매겼다. 여성을 '목적어'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여성들을 보조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를 향해 '출산율을 높이라'는 지시를 내리고, 그 순위 경쟁을 위해 여자들이 아기를 '낳게 만들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 단순히 통계를 제시했을 뿐이지만 그 숫자가 제시되는 맥락과 방향 속에 너무도 많은 여성혐오와 멸시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절실한 것은 '출산율 대책'이 아니다. 여성을 온전히 주어의 자리에 놓는, 한낱 목적어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 않는 여성 정책이 먼저다. 여자들이 볼 때 이 나라가 아이를 낳아도 되는 나라라면, 아이를 낳을 것이다.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온갖 여성혐오적 발언을 내뱉는 것이 별 문제 아니라는 듯 받아들여지고 있는 한, 이 나라는 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출산율이 아니라 여성 인권이 문제의 본질이다.

입력 : 2017.01.15 20:54:01 수정 : 2017.01.15 20:55:47

2016-12-18

[별별시선]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의 한 장면을 펼쳐보자. 백정인 꺽정이는 양반인 덕순이와 죽이 좀 맞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로 존대와 하대를 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임꺽정이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대와 하대에 대해 논쟁이 오가던 중, 머리 깎고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 선생이 꺽정이의 성정을 좀 다스려 보려 한다. “우리말에 층하가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겠지. 그렇지만 어른 아이는 고사하고 양반이니 상사람이니 차별이 있는 바에야 말이 자연 그렇게 될 것 아닌가.”

계급 차별을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는 꺽정이의 반론에 대해 병해대사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응수한다. “벌써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에 차별이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임꺽정이 아니다. “못쓸 차별을 없애려면 영을 내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설령 영을 내린다 한들 그 차별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겠는가? 그러자 결국 임꺽정은 본인의 명성에 걸맞은 대답을 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면 될 것 아니오.” 병해대사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대화는 마무리된다.

이 대화에서 임꺽정과 병해대사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조선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 사이에 차별이 없다. 그게 바로 민주공화국의 본질이다.

우리 대한국민은 모두 같은 법의 지배를 받는다. 차별적 특권 계급의 존재는 용인되지 않고, 모든 이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누리며 동시에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할 의무를 진다. 그리고 그 법은 국민의 대표 기관인 입법부에서 만들고, 행정부에서 실행에 옮기며, 사법부를 통해 갈등을 법적으로 해결하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은 결국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결합된 법치주의의 핵심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박근혜 게이트는 왜 문제인가?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는 믿음을 뒤흔들었다는 점이 가장 심각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 내리는 사람’과 ‘영 받는 사람’이 궁극적으로는 동일하다는 가정을 깨뜨렸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리 사건이 아니다. ‘선출된 권력’ 박근혜의 뒤에 ‘선출될 생각도 없었던 권력’인 최순실 일당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설령 최순실이 ‘착한 비선 실세’였다고 해도 사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국민은 박근혜를 뽑았지 최순실을 대통령으로 뽑지 않았다. 그러므로 최순실이 기밀로 취급되는 대통령 연설을 주무르고, 온갖 인사에 개입한 것은, 그 자체가 민주공화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는 법의 지배를 ‘당하는’,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에 ‘복종’하는 임꺽정 같은 신분사회의 피지배계층이 아니다. 우리는 울화가 터진 꺽정이처럼 “영을 아니 좇는 놈은 깡그리 죽여버리”는 식으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헌법, 법률, 조례, 규칙 등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를 움직이고, 필요하다면 유권자를 대의하는 기관인 의회에서 법규를 바꾸거나 새로 만든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아니라 ‘비선 실세’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으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그의 권한을 정지시키고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은 그러므로 혁명이 아니다. 삼권분립이라는 민주적 법치주의의 근본 원리가 온전히 작동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민란’이나 ‘혁명’보다 급진적인 사건이다. 드디어 우리는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12.18 20:37:01 수정 : 2016.12.18 20:43:39

2016-11-20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

미국 대선 결과는 뜻밖이었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마치 페이스북을 통해 조작된 뉴스를 보고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미국인들처럼, 특히 일부 진보 인사들은 잘못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해 엉뚱한 방향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틀렸다. 현지시간으로 11월17일 현재, 힐러리 클린턴의 총득표는 6282만5754표, 반면 트럼프는 6148만6735표에 그치고 있다. 약 130만표 차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500만표가량 개표되지 않은 표가 남아있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국민들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미국이 연방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주의적 원칙보다 연방주의적 원칙이 우선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트럼프 지지층은 분노한 노동자들이다?’

천만에.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들이다. 숫자를 보자. 미국인의 중위소득은 5만6000달러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약 6만1000달러의 중위소득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중위소득은 7만2000달러로, 클린턴 지지층에 비해 1만달러가 높을뿐더러 평범한 미국인들에 비해서도 1만6000달러나 더 높다. 이것은 평균이 아니라 중위값이므로 ‘슈퍼 리치’들이 공화당을 지지해서 왜곡된 통계가 아니다. 주요 트럼프 지지층이 ‘가난하고 분노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샌더스가 나갔다면 이겼을 것이다?’

어림도 없다.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다. 특히 민주당의 ‘미래 지지 기반’인 히스패닉 및 소수자 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경선 패배의 원인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국 득표력이 필요하다. 샌더스는 백인 밀집 지역인 ‘러스트 벨트’에서만 상대적 우위를 갖는 약한 후보였다. 게다가 샌더스가 트럼프와 1 대 1 토론에서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해봐야 한다.

미국 대선 관련 주요 이벤트를 모두 시청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샌더스는 트럼프의 상대가 못된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잽 부시를 문자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닥쳐”(You shut up)라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목청을 높이는 트럼프를 부시 집안의 세번째 대통령 출마자는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온갖 부동산 거래뿐 아니라 리얼리티 쇼와 프로레슬링 무대 등으로 단련된 ‘미디어 인파이터’다. ‘남자 대 남자’로 맞대결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점잖게 나오면 말을 안 들어먹고, 똑같이 진흙탕 싸움을 하면 이쪽이 더 손해를 본다. 클린턴처럼 소수자에 속하는 누군가가 품위 있는 태도로 맞서는 것만이 해법이었다. 샌더스는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클린턴보다 최소 130만표 뒤졌지만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해 승리했다. 게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뿐 아니라 클린턴과 샌더스의 지지자들보다 잘사는, 교외에 거주하는 겉보기에 점잖은 백인 중산층들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키워드는 ‘분노한 민중’이 아니라 ‘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득권층’인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 대선을 ‘가난한 노동자의 반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까? 한국식으로 치자면 여성, 세월호 희생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환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외국인 노동자, 중국계 동포 등을 모욕하며 증오를 선동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베 스타’가 바로 트럼프다. 일부 인사들은 그러나 승자에게 감정이입하여, 트럼프의 승리에 어떤 ‘진보적 가치’를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시민들과 연대하여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입력 : 2016.11.20 21:16:01 수정 : 2016.11.20 21:18:55

2016-09-25

[별별시선] 거울도 안 보는 남자

남자들을 여장시키는 행사를 요즘에도 여기저기서 하는 모양이다. 일단 이 점을 분명히 해두자.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적용할 때 불편한 일이다. 남자들이 부끄러워하는 건 그다지 문제가 아니다. '여자같이 꾸민 모습'을 품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여성 비하라고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답지 않게 꾸민 남자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니만큼 동성애, 크로스드레싱, 트랜스젠더에 대해 적대적인 맥락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젠더 이분법적 세계관에 기반해, 하위 주체로서의 '여성'의 위치에 남자들을 억지로 구겨넣은 후 남자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행사다. '여자다운 꾸밈'은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며 그의 인격적 존엄은 짐짓 무시된다. 즉, 여성성을 조롱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 사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장을 한 남자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그 결과, 가부장제의 기득권층인 이성애자 남자들을 '여자'로 만드는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종종 역설적으로 해방구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다움'이 비하와 멸시의 대상으로 취급되지 않는 맥락에서는 어떨까? '여장남자 대회' 역시 품위를 획득한다. 미국의 유명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하나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에서 '남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성성'을 어떻게 현시하는가, 즉 '드래그'하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리얼리티 쇼다. 그곳에서 '남자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는 미적 도전 과제로 재탄생한다.

이러한 상식에 기반해 9월 2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역사학자 전우용의 칼럼을 검토해보자. 그는 자신의 막내아들이 고등학교에서 겪은 일을 소개한다. 위에서 설명한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바로 그것이다. 스스로가 여장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남자인 친구들이 당황하고 벌벌 떠는 모습과, 그런 꼴을 보고 웃어대는 여학생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전우용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전우용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설득에 실패했고, 오히려 내가 반성했다. 남자아이들에게 굴욕감과 분노를 느끼게 하고 즐기면서 여자아이들이 배운 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리고 전우용은 태세를 전환하여 '메갈리아'와 '미러링'을 두고 근엄한 태도로 훈계를 하는 것이다.

아주 원론적인 차원부터 말하자면, 자신의 아들마저 설득하지 못했다는 그의 경험담은 여성차별에 대한 전우용의 식견이 매우 얄팍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기 아들에게도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에 대해 가르치고 설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신문 지면에 해당 주제에 글을 쓴다니,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전우용의 막내아드님, 혹은 그와 유사한 분노를 느끼는 남자들에게, 내가 대신 대답해 주겠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가 열리고, 당신이나 당신의 친구들이 여자들에게 놀림감이 된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자처럼 꾸미는 행위' 자체를 천대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구조적 차별이 있기 때문에 남자인 당신이 '여장'을 할 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여장남자 외모 품평회'는 전략적 발화로서의 '미러링'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미러링'으로 받아들이고 화내는 남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 거울에 무엇이 비춰보이는가? '용모 단정'한 여직원을 뽑는다고 하면서, 동시에 '지하철에서 분가루 날리며 화장하는 여자'라는 상상 속의 마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이 사회의 여성 차별이 보이지 않는가?

'여자처럼 꾸미되 꾸밈을 드러내지 말라'는 모순된 사회적 요구에 여성들은 짓눌려 있다. 그러나 '거울도 안 보는 남자'들의 눈에는 이런 구조적 차별과 억압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남자들도 거울 좀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



입력 : 2016.09.25 21:02:04 수정 : 2016.09.26 09:59: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9252102045&code=990100&s_code=ao122#csidxcac882c268f09ea9f7f21300ee443a2

2016-08-28

[별별시선] '몰카'의 윤리학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여자 탈의실에 카메라를 설치해 알몸을 찍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대한민국은 큰 충격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남성 위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피해자인 여자 국가대표 수영 선수들이 누구일지 추측을 하며 시시덕거리기까지 했다. 물론 훨씬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대한민국은 '몰카'의 왕국이다.

이토록 '몰카 범죄'가 만연한 것은 기술적 이유 때문인가? 다시 말해, 스마트폰과 초소형 녹화 장비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탓에 벌어지고 있는 불가피한 현상인가? 자동차가 보급되면 교통사고가 늘어나듯, 인터넷에서 검색만 해도 CCTV부터 뿔테 안경까지 온갖 일상적 사물로 위장한 카메라를 구입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몰카'가 기승을 부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인터넷이라는 것이 이 땅에 도입된 후, 동의 없이 촬영하거나 유포한 성관계 영상은 언제나 어딘가의 하드디스크 속에 존재해왔다. 모 연예인의 성관계 장면이 담긴 'O양 비디오'부터,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청소년들의 성행위가 찍힌 '빨간 마후라' 등, 한국의 네티즌남(男)들은 '몰카' 혹은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겨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적잖은 남자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하고 싶을 것이다. 나와 내 친구들이 잘못한 게 아니라, 카메라와 인터넷이 잘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주요 국가들 가운데 스마트폰에 부착된 카메라로 촬영할 때 소리가 나도록 규제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뿐이다. 하지만 공공장소, 특히 대중교통에서 '몰카 범죄'가 기승을 부리는 나라 역시 한국과 일본이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특히 남자들의 문제다. '몰카를 찍는 것은 굉장히 비겁한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그걸 본다면 그 죄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는 도덕적 기준이 작동하지 않는 일종의 아노미 현상인 것이다.

그 남자들은 타인의 알몸, 성기, 항문, 성행위 장면, 심지어 배설 장면 등을 몰래 찍고 돌려보면서도 자신의 존엄성이 깎여나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남의 치부를 훔쳐봄으로써 상대방을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쾌감을 느낀다. 성적 쾌감 이전에 모욕하는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몰카 범죄'의 본질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몰카'를 문제로 인식하는지부터가 의심스럽다는 데 있다. 가령 <내부자들>은 결국 '몰카로 정의구현'하는 영화인데, 재개봉한 감독판을 포함할 때 대략 천만 명 가량의 관객이 그 작품을 보았지만, 문제의식은 커녕 대다수가 후련함과 통쾌함을 느꼈다고 한다. 최근 <뉴스타파>는 이건희 삼성그룹 명예회장의 성매매 현장이 담긴 '몰카'를 입수하여 공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이 회삿돈을 '오너'의 성매매 비용으로 썼다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몰카' 공개가 과연 독립언론의 품격에 어울리는 일인지, 그 영상을 편집해서 공개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지, 그런 도덕적 차원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성판매자가 아니라 성구매자를 처벌해야 성매매의 해악을 근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강경한 수요억제론자다. 이건희도 예외일 수 없다. 그를 옹호하기 위해 이 칼럼을 쓰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 중 하나인 그가 피해자가 되었는데도 '몰카'에 대해 이토록 무덤덤하다는 사실이 소름끼칠 뿐이다. 이건희가 당해도 다들 시시덕거릴 뿐이라면, 그 많은 '몰카'와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단 말인가.

'몰카'는 잠재적 피해자인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들의 인간적 품위와 존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엄정한 수사와 처벌이 요구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도덕적 기준이 삐뚤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사회적 당위를 추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몰카'에는 우리 사회의 곯아버린 내면이 찍혀 있는 것이다.


입력 : 2016.08.28 20:44:02 수정 : 2016.08.28 20:46:4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82044025&code=990100&s_code=ao122#csidxd58f4c73f0252b28b24c52e475ae150

2016-08-04

[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2015년 11월 중순, 서울 성동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단강간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소라넷에 올렸다. 술 혹은 약물에 의해 정신을 잃고 벌거벗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작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라를 잘 안 해서 랜덤 채팅 양톡으로 여태 3분 정도 와서 질사하고 가셨는데 ㅋㅋ 오늘은 소라에서 한번 해볼까요?”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입력 : 2016.07.31 20:51:00 수정 : 2016.07.31 20:53:24

덧붙임: "왕십리" 취중여성 강간 사건 경찰 녹취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 활동가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6-07-04

[별별시선]‘서프러제트’와 ‘비밀은 없다’

2012년 연말로 돌아가보자. 벌써 4년 전이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화 <레미제라블>은 그다지 훌륭한 작품이 아니었다. 소설이 가지고 있었던 모순과 복잡성은 평평해졌고, 뮤지컬이 가지고 있었던 본연의 에너지는 스크린을 찢고 튀어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관객들, 특히 정치적으로 ‘진보’라 분류되는 관객들은 열광했다. 작품 속에 묘사되는 실패한 혁명의 이야기를 보며 18대 대선 패배의 아픔을 달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극장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서프러제트>가 상영 중이다. 놀랍게도 이 작품은 서프러제트 운동을 다룬 최초의 장편 상업 영화인데, 그래서인지 해당 운동이 지니고 있었던 사회적 맥락을 최소화하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다양한 각도에서 대립하던 모습도 깊게 조명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그 작품을 철저한 ‘운동권 영화’로 만들어냈다.

주인공인 모드 와츠(캐리 멀리건 분)는 우연히 서프러제트의 시위 현장에서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고, 어쩌다가 운동권에 휘말려, 결국 투사로 거듭난다. 동료가 이탈하고, 배신의 유혹을 받고, 어떤 이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캐리 멀리건의 선한 눈망울을 잊을 수가 없다. 그저 착하고 순수했던 그가 한 사람의 ‘운동권’으로 재탄생하는, 꽤나 고전적인 서사가 2016년 극장가에서 상영 중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레미제라블>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왕년의 운동권’들은 왜 극장으로 몰려가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레미제라블>을 ‘운동권 영화’로 소비하는 데에는 일종의 비평적 곡예가 필요했다. 반면 <서프러제트>는 그럴 필요가 없다. 대놓고 ‘운동권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짱돌’ 좀 던져봤다고 으스대다가 ‘문화운동’ 한다고 방향을 돌렸던 수많은 남성 비평가들은 <서프러제트>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매년 극장가에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다룬 대체로 뻔한 영화들이 절찬 상영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내부자들>을 꼽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경상도 방언을 쓰는 ‘꼴통 검사’가 전라도 방언을 쓰는 ‘착한 건달’과 손을 잡고, 한국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내부자들’에게 한 방 먹인다는 줄거리이다.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내고 ‘치부’를 보여준다는 그런 작품들은 한 해에도 몇 편씩 나온다. 대체로 여성들은 피해자의 위치에서 폭언을 듣고, 두들겨 맞고, 강간당하고, 시신으로 발견되기 일쑤다. 그러면 남자인 주인공이 절규하면서 정의 구현을 위해 힘쓴다. 그리고 관객들은 폭력의 무신경한 재현 앞에 ‘날것’이라며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 맥락에서 이경미 감독의 신작 <비밀은 없다>를 생각해보자. 자신이 태어난 경북의 한 도시에서 처음 출마한 정치 신인이 해당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탈당파 현역 국회의원과 맞붙는데, 그의 아내가 호남 출신이라는 것이 ‘추문’으로 취급되며, 하나뿐인 딸은 실종됐다. 전라도 여자는 경상도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딸을 찾기 위해 광기 어린 추적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호남차별, 여성차별, 학교폭력, 동성애, 불륜 등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뜨거운 감자를 한꺼번에 씹어삼킨다.

그럼에도 <서프러제트>와 마찬가지로, <비밀은 없다>는 저평가 혹은 무(無)평가 당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가 매우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단지 희생자에 머무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주인공들은 어떤 일을 겪고, 위협을 당하고, 폭력에 노출된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판단하고, 책임을 진다.

그러자 관객뿐 아니라 비평가들 역시 형식적인 코멘트만을 남겨놓고 침묵을 지키는 중이다. 그 침묵은 열렬한 예찬보다 우리 사회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말해준다. 한국 사회는 피해자가 아닌 주체로서의 여성을 순순히 용납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주체-되기. 2016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뜨겁게 논의되어야 할 ‘정치적’ 주제다.


입력 : 2016.07.04 20:53:03 수정 : 2016.07.05 11:25:0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042053035&code=990100&s_code=ao122#csidx8a9de7b24f74d368a77c68193f19f35

2016-06-05

[별별시선]‘서프라제트’에서 배운다

20세기 초 영국. 그나마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자유당이 여당이었고, 자유당의 가장 큰 맞상대는 보수당이었다. 노동당과 아일랜드 자치파 등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와 비슷한 사회적 신분 및 교양 수준을 가진 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유당을 지지했다. 수많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처럼 말이다.

자유당은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여성들의 권리를 한없이 유보시켰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자신들이 ‘차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냐며 비난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른바 ‘잠재적 아군’들의 논리다. 너희들이 지금 뭘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지만, 당장 그것보다 시급한 일이 산적해 있다. 그러니 일단 너희들의 요구사항을 접어두고 ‘대의’에 복무하라. 우리 ‘잠재적 아군’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고 ‘조곤조곤’, ‘사근사근’하게 설득하는 태도를 보여라.

이런 주장에 혹하는 사람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여성 자유당원이나 합법적 참정권론자들 역시 이런 현명한 체하는 논의를 펼쳤다. 그들은 정당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충고했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는 콧방귀를 뀌며 자유당을 상대로 한 낙선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자유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후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한반도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사회적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면서 상스러운 여성혐오적 표현이 전국을 누볐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 약물에 정신을 잃고 나체가 된 사진, 원치 않게 촬영된 성관계 장면 등을 남자들은 돌려보고 시시덕거리며 자기들끼리 품평회를 즐겨왔다.

이 도저한 차별과 폭력과 혐오와 멸시의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몇몇 용감한 여성들이 바로 그 공격적인 언어를 되돌려주는, 이른바 ‘미러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김치녀’라고 10년 넘게 멸시당해오던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마세요’라고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남자들을 향해 ‘김치남’이라고 맞받아친다. 놀랍게도, 그러자 비로소 남자들이 ‘온라인 언어폭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도 맞아보고 이제서야 아프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나는 이 시위를 지휘할 것이고, 돌멩이야말로 내가 사용하려는 논쟁 방식입니다. 돌멩이야말로 가장 쉽고 직접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서프라제트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면서 여성 투표권을 외쳤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의 투표권은 바로 그렇게 쟁취된 것이다.

‘미러링’이 불편한가? ‘증오의 총량’이 늘어날까 우려되는가? 20세기 초의 서프라제트와 달리,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리창 하나도 깬 적 없다. 한없이 온건하게 포스트잇을 붙이고, 슬픔을 나누고, 지금까지 너무도 속 편하게 기득권으로 살아온 ‘한국 남자’들의 행태를 거울에 비춘 듯 되돌려 보여줬을 뿐이다. 혹자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이 ‘남녀 대결 구도’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니다. ‘남녀 대결 구도’가 맞다. 그리고 여자들이 이겨야 옳다. 여성혐오와 맞서는 여성들을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전적으로 지지한다.


입력 : 2016.06.05 20:35:01 수정 : 2016.06.05 20:38: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52035015&code=990100&s_code=ao122#csidx61e949ec133181684245e6a55eeafc2

2016-05-08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버나드 샌더스 상원의원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 이번 미국 대선은 힐러리 대 트럼프 구도로 전개될 예정이다.

그런데 미국 대선 경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도널드 트럼프, 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비웃거나 비판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동시에 ‘버니’ 샌더스를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트럼프는 극우적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인기몰이를 하는 포퓰리스트이고, 반대로 샌더스는 진정성 있게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쪽을 비판하고 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왜 ‘흥미로운’ 현상일까? 왜냐하면 트럼프와 샌더스는 모두 미국인들의 어떠한 정서를 좌우 양쪽에서 대변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인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문제는 그들이 대변하는 정서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억울함’이다. 1945년 역사학자 이안 브루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0년”부터 최근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인들은 억울해하고 있다. 트럼프 열풍, 샌더스 열풍은 동일한 대중적 에너지가 발현된 두 개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민자와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앞세운다. 샌더스는 무슨 질문을 받더라도 ‘그것은 월스트리트가 부를 독점하고 그 밖의 99%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전혀 만나는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그들이 의존하는 대중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방위력에 무임승차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샌더스는 미국이 일본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해 대기업의 배만 불리려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안보건 경제건, 바깥 세계와 담을 쌓자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을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여긴다. 전 세계의 기업들이 미국 시장 진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자국 영토 외의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잠자는 거인’이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그 거인은 깨어났고,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됐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와 그 안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무역 체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방위분담금을 전부 대한민국이 지불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보며 한국인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미국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공산품을 중국이나 그 밖의 저임금 국가가 아닌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샌더스의 말은 어떠한가. 전자만큼이나 후자 역시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열강들은 샌더스의 말처럼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식민지를 중심으로 ‘블록 경제’를 구축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세계 경제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고 있었기에 열강들 역시 불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고작 한 세기 전의 일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샌더스를 응원하는 것은 마치 ‘미국의 좌파’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들이다. 샌더스가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한가? 그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억울해하는 미국인들의 고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은 공포다.


입력 : 2016.05.08 20:56:03 수정 : 2016.05.08 21:02:0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82056035#csidx263ec9d886a4932b31dfcbfe1965d83

2016-04-11

[별별시선]이념대로 찍으려니…

나는 진보 정당의 고집불통 지지자였다. 진보 정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총선에서 자신이 속한 지역구에 진보 정당의 후보가 없으면 민주당 계열에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대선은 중요한 무대니까 잠시 내 정치적 의지를 접어두고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 역시 흔한 패턴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내가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 정당, 후보에게만 표를 주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백지 투표를 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그러한 신념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새삼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 정당들이 보여주는 ‘이념’ 중 그 무엇에도 전적인 동의를 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순서에 따라 기호 4번 정의당부터 짚어보자. 지난 7일, 경찰은 네덜란드와의 국제 공조수사를 통해 ‘소라넷’의 핵심 해외 서버를 폐쇄했다고 발표했다. 소라넷은 몰래카메라, 도촬, 사적인 모습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가 올라오는 성인 사이트다. 속칭 ‘골뱅이’라는, 심신상실 상태에 빠진 여성에 대한 강간 모의와 실행 ‘인증’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 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고, 정의당과 총선 홍보 영상 및 공식 테마송 협약을 맺은 ‘중식이 밴드’는 노래했다. ‘야동을 보다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노래는, 위에서 우리가 말한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를 보던 남자가 자신의 옛 여자친구를 발견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내용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의당은 여성위원회를 앞세워 사과의 말을 전했으나 어떤 후속 조치도 없다. 공개된 당원게시판에서 당원들이 목청 높여 반여성주의적, 심지어 성폭력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는데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고 있다. 정의당의 공식 홍보 밴드는 ‘소라넷 보는 남자’의 입장에서 쓰인 노래를 부른다. 소라넷에 대한, 여성 인권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투표용지를 한참 훑어내려가면 기호 14번 노동당이 나온다.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여성 인권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마포을 선거구에 출마한 하윤정 후보의 경우 대단히 적극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선거구는 마포을이 아니다.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을 평가하기 위해 선거 공보물을 펼쳐든다. 한숨이 나온다.

노동당은 “재벌증세 기본소득”을 핵심 구호로 내세우고 있다. 증세는 복지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므로 원론적으로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본질적으로 ‘작은 정부 옹호론’이다. 진보 진영에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절대악으로 상정하던 ‘신자유주의’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국가 기구를 축소하고 보다 효율적인 시장을 통해 복지를 실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판을 하면 기존의 복지는 그대로 두고 재벌에만 세금을 거둬서 나눠주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재벌증세 기본소득’이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5000만 국민에게 월 3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연간 180조원이 필요하다. 2015년에 정부가 고용, 보건, 복지에 지급한 총예산이 115조7000억원이다. 나는 노동당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이런 공약을 내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호 15번 녹색당도 마찬가지다. 녹색당은 ‘탈핵’과 ‘탈성장’을 정책의 근간으로 삼는다. 원론 차원에서 재생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탈성장’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녹색당은 실업률을 끌어내리고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20대 총선의 풍경이다. 진보 정당들이 여성 인권 문제를 회피하고, 구체성 없는 ‘대안’을 주워섬기며, 대중적 분위기만 좇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 구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 정치 운동을 희망한다.


입력 : 2016.04.10 20:52:00 수정 : 2016.04.11 10:21: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102052005&code=990100#csidxebeb33135be7959895cfac39f001e60


덧붙임: 2016년 7월 현재, 여성혐오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한층 더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다. 메갈리아4 소송 지원을 위한 후원 티셔츠를 구입했던 김자연 성우가 그 사실을 인증하였고, 넥슨은 다음날 김자연 성우가 녹음한 캐릭터 음성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넥슨측에서는 '계약금을 모두 지불했다'며 정당성이 있다는 듯 항변했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프리랜서가 생산물을 제공할 때에는, 그 창작물이 계약 기간동안 사용된다는 것 역시 계약의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부당한 계약해지이며, 진보 정당으로서의 정의당은 당연히 김자연 성우의 편을 드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에서 그렇게 온당한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한 다음 벌어졌다. 중식이밴드가 뭐가 문제냐고 난리를 치던 바로 그 정의당의 여성혐오적 남자 당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온라인 몰매를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노회찬 원내대표는 그 성명을 공식적으로 철회시켰고, 오늘 심상정 대표는 "당의 하부단위에서 부적절한 논평이 나가고, 또 논평으로 야기된 당 안팎의 파장에 대해 중앙당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질책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렸다. 결국 여성혐오적 당내 목소리에 그 당을 대표하는 두 거물이 굴복했거나, 애초부터 적극적으로 여성혐오와 맞설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칼럼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나는 '이념적'으로 현재의 진보 정당들과 함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본질적으로, '당 내의 옳지 못한 집단적 항의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적어도 정의당과는 함께할 수 없음을 밝혀둔다. 내부의 여성혐오에 굴북하는 정당이 무슨 국가적 악과 부조리에 저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칼럼들을 갈무리하는 도중에 적어둔다. (2016/07/29)

2016-03-13

[별별시선]박근혜 vs 알파고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인공지능 알파고와 박근혜 대통령이 바둑 대결을 한다면? 당연히 알파고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세돌 9단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알파고인 만큼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판을 키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삼아보는 것이다. 박근혜 대신 알파고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릇을 한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알파고가 화제라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이세돌 9단이 첫 고배를 마셨던 그 날부터 인터넷을 후끈 달군 주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이제 컴퓨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논문의 해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기존의 게임용 AI와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에 의존한다. 혁신적인 자기학습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의 바둑 기보를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례를 놓고 볼 때 좋은 수’를 추려낸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를 두고 계산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은 게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창의와 직관이 어떠한 종류의 계산 과정이다. 다만 사람은 그 계산을 “승부수, 감, 두터움” 같은 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에 대해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수 자체를 모르니까 그냥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이번 대국에서 확인된 것은 바둑 역시 하나의 게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포커, 화투, 체커, 체스, 오델로, 지뢰 찾기까지, 모든 게임은 규칙을 지닌 계산 과정에 의해 진행되므로,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컴퓨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층과 ‘여론 주도 세력’인 중장년층의 반응이 갈라진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었다고 주류 언론은 연일 호들갑이다. ‘알파고 쇼크’에 우울증에 빠졌다는 시민의 목소리,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우려 등이 이어진다.

반면 청년들은 비교적 덤덤하다. 바둑은 게임이고, 언젠가는 컴퓨터가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호들갑스러운 우려에 대해서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천연지능’보다는 우리를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우리 사장도 알파고로 바뀌면 좋겠는데?

자, 그러므로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박근혜 대 알파고. 과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다스릴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확인한바, 알파고는 기존의 선례를 충실히 검토하고, 그중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던 사례를 따른다. 그 속에서 최선의 미시적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의사결정권자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사람이 ‘인간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무서운가? 만약 당신이 의사결정권자에 가깝다면 인공지능이 두려울 것이다. 반대로 남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알파고가 박근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다며 기업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삭감하도록 한다거나, ‘증세 없는 복지’를 운운하는 것 등은, 알파고의 눈으로 볼 때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난센스다.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국정 운영을 기대한다.


입력 : 2016.03.13 21:01:11 수정 : 2016.03.13 21:1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132101115&code=990100#csidxb0730909049cf82913583dcda5ddbf8

2016-02-21

[별별시선]선비질을 위한 변명

오늘날 ‘선비’라는 말은 일종의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주로 인터넷 사용이 많은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용례가 확립되었다. 그냥 ‘선비’만 쓰이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 단어 앞에 쌍시옷으로 시작하며 성행위를 의미하는 욕설형 접두사가 붙거나, ‘용두질’ ‘요분질’처럼 비하의 뜻을 담는 접미사 ‘-질’이 붙는다. 그리하여 ‘선비질’이다.

‘선비질’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 ‘웃자고 하는 소리’에 정색하는 것이다. 인터넷 혹은 SNS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김치녀’, ‘오크녀’, ‘성괴(성형괴물)’ 등의 비하 발언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해보자. 어렵지 않게 ‘선비질 하지 마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호남 비하 발언, 외국인 노동자 혐오 발언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하는 순간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뉘에 뉘에 선비님 잘 알겠습니다아’라고 비아냥거리며 그러한 지적을 ‘선비질’로 몰아가는 것이다.

한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여성도 아니고, 호남 사람도 아닌 한국인들에게 저러한 경향성은 그저 남의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국가정보원이 일베를 거점으로 삼아 2012년 대선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전까지는 저 혐오발언들이 야권 혹은 진보진영의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를 타깃으로 삼는, 자신들의 문제를 지적하면 되레 ‘선비질’을 운운하는, 그 잘못된 ‘하위문화’가 뿌리를 내렸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새삼스럽게 생겨났다기보다는, 사회의 면면에 흐르던 차별이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가시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문제는 2016년 현재,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선비질’로 전락해버린 이 세상에서 말이다.

현실은 매우 비관적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펼쳐보자.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 인간과 사회라는 보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기존의 진리와 이 기존의 진리 위에 성립된 행위 전체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빌려 정의를 내린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의 지식인은 존재 자체가 형해화되어가는 중이다.

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지식인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가? 인터넷 때문이다, 일베를 필두로 하는 반지성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탓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게으른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크고 중요한 문제는,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식인으로서 제 기능을 다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다시 한 번 사르트르의 말을 빌려, 지식인을 “보편성은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보편의 전문가”라고 해보자. 보편성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서 추방당하고 그 존재와 권리를 부정당하는 이들의 편에 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특수성으로 ‘내몰리는’ 집단은 여성, 호남, 외국인처럼, 일베가 ‘웃자고 하는 소리’의 타깃으로 삼는 이들과 정확히 포개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진짜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한국의 지식인들은 ‘지식인’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가? 자신이 속하지도 않은 정당을 옹호하기 위해 호남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면, 과연 그는 지식인인가? SNS에서 확산되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운동을 비웃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들먹인다면, 그는 여성을 ‘보편적 인간’으로부터 추방하는 일베와 어떤 면에서 궤를 함께하는 것이 아닌가?

지식인이 어떤 정당이나 정파의 편을 화끈하게 들어주고 지지를 받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지식인의 본령은 ‘논객질’이 아니라 ‘선비질’이다. 중년의 논객들이 도덕과 윤리를 내버리고 ‘논객질’을 일삼는 사이, 일베에 모인 청년들은 온갖 혐오를 현실 속에서 ‘인증’하기 시작했다.


입력 : 2016.02.21 20:31:39 수정 : 2016.02.21 20:37:0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12031395&code=990100#csidx3edc1470c435ce3b14271e69cdef448

덧붙임: 이 칼럼은 트위터에서 온갖 호남 멸시 발언을 일삼던 진중권과, 여성혐오적 표현을 구사하며 페미니스트들을 조롱하던 고종석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트위터에 올린 어떤 트윗 때문에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유머에서 나를 비난하는 경향이 눈에 띄었다. 이 칼럼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선비질'에 대해 전혀 비판적이지 않고, 도리어 그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임을 밝혀둔다. 해당 커뮤니티의 유저들은 어설프게 '갓끈 풀지' 말고 체통을 지키기 바란다. (2016/07/29)

2016-01-24

[별별시선]헬조선의 비겁한 윗분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 거주하는 피지배층이 진정 이 땅에서 태어나길 잘했다고 느낀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살아가는 고통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최근 인터넷의 집단지성에 의해 그것은 ‘헬조선’이라는 신조어로 압축되었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에는 영어가 쓰이지 않았으므로, 한양을 향해 질주하는 일본군을 피해 자기 집안 위패를 싸들고 도망가던 선조를 바라보던 조선의 백성들이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취지의 분노와 원망의 언어는 다양한 기록에 남아 있다. 조선의 백성들이 영어를 알았다면 ‘헬조선’을 부르짖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병자호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외적이 북쪽에서 내려온 탓에 임금에게는 백성과 나라를 버리고 만주로 도망치는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고, 결국 남한산성에 틀어박혔다가 항복을 했다.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침략자들에게 집단으로 납치되었다가 그 중 일부가 무사히 돌아왔는데, 제대로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던 남자들이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에게 ‘환향녀’라고 손가락질을 시작했다. 역시 용어만 없다 뿐이지 ‘헬조선’이었던 것이다.

‘헬조선’의 역사는 조선왕조가 몰락하고 대한민국이 시작된 이후에도 지속됐다. 북한군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지만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요지부동이었다. 실제로 침략이 개시되자 그는 누구보다 민첩하게 도망길에 올랐고, 모두가 다 알고 있다시피 한강 철교를 폭파하며 자신의 도주로를 확보했다. 폭파되는 다리 위에서 목숨을 잃은 800여명의 국민들, 다리를 건너지 못한 채 발이 묶인 수많은 국민들에게 과연 이 나라가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이었겠는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나 일관되게 ‘헬조선’이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지 나는 한마디로 단정짓지 못하겠다. 하지만 ‘헬조선’은 그 성격이 매우 뚜렷하다. 의사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의사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지 않는 나라, 그것이 바로 ‘헬조선’의 본질이다. ‘윗분’이 되면 아무 판단이나 함부로 내려도 된다. 반면 당신의 신분이 ‘아랫것’으로 결정되어 있다면, 심지어 자신이 내리지도 않은 결정 때문에 덤터기를 쓰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가령 걸그룹 트와이스의 쯔위 사태를 되짚어보자. 애초에 문제의 씨앗을 뿌린 것은 MBC다. 소품으로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들고 와서 쯔위의 손에 쥐여주지 않았다면 그런 논란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인터넷 생중계 영상이 나왔고, 그것을 중국의 누리꾼들과 대만 가수 황안이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JYP엔터테인먼트에서 소속 가수를 보호해야 할 차례 아닐까 싶었는데, 그들은 초췌한 모습의 쯔위를 앞세운 사죄 동영상을 내보냈다. ‘어떻게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가수에게 저런 짓을 시킬까’ 놀랍지만, 다시 말하건대 ‘헬조선’의 문화적 전통을 염두에 둔다면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재벌 기업들이 앞장서서 벌이고 있는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1000만 서명운동’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팔을 걷어붙이자 총리부터 공직자들이 줄줄이 서명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입법부의 일원인 국회의원들까지 충성 경쟁에 나서는 추세다.

법과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라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헬조선’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이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윗분들’은 이 법이 필요하지만, 그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생각이 없다는 확고한 의사의 표현이다. 만약 이렇게 해서까지 법을 바꿨는데 경제가 안 살아나면 그건 서명운동에 참여한 1000만명의 국민 때문이지, 죽었다 깨어나도 박근혜 탓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는 권한과 책임이 따로 노는 ‘헬조선’에 대한 거부 선언이기도 하다. 국가, 기업, 기타 사회 모든 영역에서 ‘윗분들’이 책임을 지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다.


입력 : 2016.01.24 20:13:11 수정 : 2016.01.24 20:27:3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42013115&code=990100#csidxb078053b773fd869c67a2dbeaf0f6e7

2015-12-28

[별별시선]여자를 뭘로 보고?

2015년 현재 세계를 가르는 가장 큰 균열은 이른바 ‘게이 디바이드’(gay divide)라 불리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얼마나 존중하느냐에 따라 국가들을 분류해볼 수 있고, 그 경우 넘을 수 없는 간극이 관찰된다는 말이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서구 선진국에서는 동성결혼이 법제화됐거나 되어가는 중이다. 반대로 이슬람국가(IS) 점령지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법에 의해 처벌당하고,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는 국가가 동성애자들에 대한 린치를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 세계는 ‘동성애자 인권’이라는 지표를 두고 반으로 쪼개지고 있는 중이다.

‘게이 디바이드’라고 하지만, 그 격차는 여성 인권을 소재로 삼더라도 거의 동일하게 유지된다. 다시 IS의 사례를 들어보자. 그들은 공공연히 여성을 성노예로 사고팔면서, 그 과정에서 남자들이 공정한 거래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사기꾼을 처벌하기까지 한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동성혼이 법제화되어 있는 반면, 다른 곳에서는 여성 노예 매매가 합법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을, 본인이 소수자에 속하지 않는 이성애자 남자 지식인들은 ‘문화적 차이’로 일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다양한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고 목소리를 낸다. 젊은 진보, 새로운 진보를 떠받쳐줄 새로운 세대의 지지자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다른 사람들의 문화에 대해 훨씬 관대하다. 동시에 그들은 명백한 야만과 폭력이 ‘문화적 다양성’의 탈을 쓰고 유포되는 것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뜻을 표한다.

2015년의 가장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였던 페미니즘의 부활, 혹은 ‘새로운 페미니즘’의 가시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팝칼럼니스트 김태훈 덕분에, 혹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폭언을 퍼붓는 팟캐스트를 녹음해놓고도 사람들이 대대적으로 문제 삼기 전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던 개그맨 장동민을 디딤돌 삼아, 사람들은 SNS를 통해 “설치고 떠들고 생각”하며 그동안 한국의 진보 진영이 소홀히 해왔던 가장 큰 사회적 쟁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에는 여성혐오적 표현이 넘쳐나고 있다. 소라넷처럼 단지 언어 표현을 넘어 몰카와 ‘도촬’을 공유하며 강간 모의를 하고 실행에 옮기는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적잖은 남성 중심 웹사이트들은 오히려 소라넷을 문제 삼는 여성 커뮤니티들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다시 말해 2015년 이전까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의 여성 혐오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혹은 눈길이 닿더라도 ‘인터넷 하위문화라서 그렇다’는, 일종의 문화상대론적 입장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너무도 명백하게 여성과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정체성 중 일부로 삼는 무장집단이 국가를 참칭하고 있다. 더군다나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눈에 띄게 신장되고 있음에도,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를 포함한 사회적 차별이 개선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젊은 여자들에게 ‘애 낳아서 출산율을 끌어올리라’며 성화를 부린다. 그래놓고는 어린이집 이용 시간을 줄이고, 여성 노동자가 직장에서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불이익당하는 것을 방관하며, 취업 및 승진에서 남자에게 특혜를 주는 기업 관행을 묵인하고 있다. 여자, 특히 젊은 여자를 뭘로 보는 걸까? 지금까지 여성들의 불만이 터져나오지 않았던 것이 더욱 이상한 일 아닌가?

올해는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여성혐오에 맞서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그냥 참아왔던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불편’을 표현한 덕분이기도 하다. 시간은 절로 흐를지 모르지만, 역사는 바로 그렇게, 맞서 싸우는 이들 덕분에 진보한다. 2015년은 페미니즘의 해였다. 이런 움직임이 진보 진영을 넘어 한국사회를 이끄는 동력이 되기를 희망한다.


입력 : 2015.12.28 21:36:35 수정 : 2015.12.28 22:11: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282136355&code=990100#csidxda5a5459543056bb7b074ed5614c976

덧붙임: 내가 편집국에 보낸 제목은 "2015년, 페미니즘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