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02

당갈, 정글북, 여성 서사

당갈을 보면서 '이건 아버지가 중요 인물이니까 여성 서사 실격!' 이러는 분들이 있나보다. 얼마 전 듀나 님이 트위터에서 했던 말이 맞다. '나는 이 작품이 왜 완벽한 여성 서사로서 실격인지 안다'고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여성 서사의 흥행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마이너리티가 중심이 되는 서사는 원래 '완벽'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바로 『정글북』이다. 『정글북』은 키플링이 삘받아서 쫙 써갈긴 모글리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모글리는 '인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의 대표자 자격을 지닌다.

인간은 숫적으로 소수자이지만 서사의 중심이다. 그래서 『정글북』의 모글리 이야기는, 백인 남자애들이 아무런 거리감 없이 감정이입한다는 맥락에서의 '보편성'을 어렵지 않게 획득했고 영국을 지나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문제는 그 모글리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다음의 이야기이다.

펭귄클래식 『정글북』의 해설에 따르면, 키플링이 직접 쓴 그 후의 이야기에서 인도 북부의 삼림 관리원 기스본(당연히 백인)은 정글을 떠난 모글리를 순찰대원으로 채용하고, 모글리는 기스본의 딸과 결혼하며, 기스본의 하수인이 된 모글리는 잿빛 형제들을 기스본에게 사냥하라고 몰아주기까지 한다.

이 엄청난 간극은 대체 어디서 발생하는가? 『정글북』에서는 모글리가 '인간'의 대표이지만, 정글을 떠난 후의 이야기 속에서 모글리는 한낱 '인도인'이며 키플링이 보는 '인간', 즉 영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글을 떠난 모글리는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도 중심에 설 수 없는 소수자가 되고 만 것이다.

모글리가 정글 속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인간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남성 중심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독자를 매혹시키고 꾸준히 재창작을 불러오는 강렬한 에너지가 잠재해 있기도 하다. 거칠 것 없이 달려나가는 영웅 서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글리가 소수자가 된 다음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후련한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정글 밖 세상은 '영국인'들의 것이지 '인도인'의 것이 아니니까. 키플링은 모글리를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하인'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문제를 치워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소수자임을 인식하면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현실 속에서 주체적인 서사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그와 같은 조건 하에서 소수자인 주인공은 모글리처럼 단순명료한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세상이 완벽하지 않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더욱 완벽함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소수자가 소수자인 채로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만드는 사람과 수용하는 사람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고 듣고 보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서사 많이 봅시다.


예전에 썼던 트윗 타래를 갈무리한 게시물입니다.

2018-09-22

'맛 칼럼니스트'인가, '재료 근본주의자'인가

전체는 부분의 합과 동일할까, 아니면 그보다 더 클까?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인쇄 매체와 방송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중인 황교익에 대해 조사와 고민을 계속할수록, 내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저 철학적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 앞에 첫 선을 보인 다큐멘터리 〈트루맛쇼〉는 당시 급속히 번져나가던 '맛집'이라는 트렌드에 반기를 드는 영화였다. 당시 MBC의 PD였던 김재환이 일산의 한 쇼핑몰에 직접 점포를 낸 후, 극단적으로 매운 맛을 낸 '죽거나 말거나 돈까스'를 주 메뉴로 선정했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일부러 맛을 느끼기가 힘들만큼 맵게 만든 음식을 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는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되었다. 어떻게? 김재환 감독이 대범하게 폭로한 동종업계의 공공연한 비밀 때문이다. 식당 측은 방송 외주 제작자에게 돈을 주고, 외주 제작자는 그 돈을 방송국과 공유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소비자들은 음식 같지 않은 음식을 먹게 된다. 'TV에 소개된 맛집'이라는 가짜 정보에 속아가면서.

황교익은 바로 그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한국의 요식업계가 매운 맛, 단 맛, 짠 맛으로 범벅이 된 메뉴를 내놓으며 사람들의 입맛을 망치고 있다는 그의 평소 취지와 영화의 내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트루맛쇼〉가 개봉한 것은 2011년, 맛집을 찾아 다니는 새로운 유행이 꿈틀대는 가운데, 사람들은 '내가 먹는 이 음식이 과연 맛있는 음식인가'를 궁금해하며 누군가가 명확한 답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재환 감독은 'TV 맛집은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폭로를 했고, 그 이면에는 황교익이 『미각의 제국』에서 제시한 주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미각의 제국』의 취지는 단순명쾌하다. 우리는 매운 맛, 단 맛, 짠 맛 투성이인 양념에 가려져 온갖 재료들의 진정한 맛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맛, 양념에 가려지지 않은 재료의 맛에 대해 따로 신경을 쓰고 공부를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황교익은 단언한다. "단맛의 음식을 두고 맛있다 찬사를 보내는 것은 미식가로서 자질이 없다는 증거이다."(『미각의 제국』 35쪽), "고추에는 캡사이신이라는 매운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입 안에 들어가 통각을 자극하면 몸에서 이 통증을 잊기 위해 엔돌핀이라는 '생리적 마약'을 분비하게 되고, 따라서 기분이 좋아지게 되니, ...(중략)... 그러니까 매운 고추를 즐기는 우리 민족은 엔돌핀, 즉 '생리적 마약' 중독자들이라 할 수 있다."(같은 책, 28쪽)

단 맛과 매운 맛 외에도 '악당'은 더 있다. 다들 좋아하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역시 황교익의 비판 대상이다. 이렇듯 우리가 좋아하는 맵고 달고 짜고 참기름 냄새 고소한 양념들은 결국 "고기나 낙지, 배추, 생선, 떡 같은 주요 재료의 맛이 어떤지 파악할 감각의 여유"(같은 책, 28쪽)를 빼앗는다. 특히 "대박 음식점 주인들"은 바로 그 점을 악용해, "미성숙한 미각의 소유자"인 젊은이들로부터 "단맛에 대한 이런 '무뇌아적 반응'"(같은 책, 34쪽)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황교익의 비판이다. 〈트루맛쇼〉는 바로 이와 같은 미각 이론 위에 방송국과 외주제작사, 그리고 '방송에 소개된 맛집'의 공공연한 비밀을 다루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제 소위 '맛집'들이 다 맛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너무 달거나 맵거나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으며 즐거운 식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제는 상식의 영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적 인식의 개선에 황교익과 김재환이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는 꾸준히 대중과 불화하고 있다. 숱한 논쟁을 피하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로 불러오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사실 〈트루맛쇼〉에 출연하여 "우리나라의 맛집 방송이 왜 이러느냐?"는 질문에 "방송이 천박한 건 시청자가 천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이미 그 숱한 논란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는 직설적으로, 대단히 강한 표현을 써가며, 확신을 갖고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황교익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논란들을 몇 개만 추려보자. 2012년부터 2013년 무렵까지 그는 생선회를 활어회가 아니라 선어회로 먹는 것이 "과학적"으로 합당하다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2015년에는 천일염이 비위생적인 소금이며 정제소금을 먹는 것이 옳고, 관광상품으로 팔리는 게랑드 소금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식탁 위에 천일염을 올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2017년 7월에는 방송인 김어준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자폐적인 행동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사회적으로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2018년 현재까지 페이스북에서 떡볶이가 왜 맛없는 음식인지, 왜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지 등에 대해 잊을만하면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이 가운데 '사회적 자폐' 논란을 제외하고 나면,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논리는 동일하다. 떡볶이는 맛이 없다. 왜? 쌀로 만든 떡의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하는 고추장과 설탕 등의 양념 범벅 때문에. 활어회는 맛이 없다. 왜? 갓 잡아 사후경직이 온 단단한 생선살을 씹을 뿐이며, 그것을 씹어넘기기 위해 초고추장이나 묵은 김치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천일염은 맛이 없다. 왜? 천일염에 포함되어 있는 마그네슘이 만들어내는 쓴맛이 음식의 맛을 모두 망가뜨리기 때문에. 이 모든 논의는, 황교익이 동원하는 과격한 수사법을 제외하고 나면, 〈미각의 제국〉에서 제시된 그것과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재료 본연의 맛이라는 절대선이 있고, 그 길을 가로막는 양념이라는 방해물이 있는데, 한국의 많은 음식들은 심지어 제대로 된 양념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교익의 주된 논지는 그것이 특정한 재료에 국한되어 있을 때에는, 적어도 내게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소나 돼지의 고기와 마찬가지로 생선 역시 어느 정도 숙성해야 맛이 살아난다. 우리가 소금을 먹을 때 느끼는 짠맛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염화나트륨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국내산 천일염은 균질한 맛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김장을 담그기 전에 소금 자루를 매달아놓고 오랜 시간을 들여 간수를 빼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대체로 옳은 말이며, 누군가는 황교익처럼 다소 거친 표현을 써서라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황교익이 그쯤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식재료를 지나 요리를 거론하면서 인류학, 사회학의 초보적인 논의들을 자의적으로 동원한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사회적 자폐' 발언이다. 인간은 모여서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사회적 동물인데, 일부러 오랜 시간에 걸쳐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뇌에 손상을 주는 행위라고까지 그는 표현의 수위를 높였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황교익은 갑자기 박근혜 전 대통령을 거론하며 무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박근혜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편'이라는 제스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음식의 사회성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신경한 것은 황교익 본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가 공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비판의 예봉을 꺾지 않고 있는 대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떡볶이다. 우리가 '떡볶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는, 새빨간 국물에 떡과 라면과 오뎅과 약간의 야채를 넣어 끓인 바로 그 음식 말이다.

문제는 떡볶이야말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사교 음식'이라는 점이다. 떡볶이는 등하교길에 친구에게 사주고 얻어먹는 음식이며, 중고등학생들이 일부러 찾아다니는 최초의 맛집 메뉴이기도 하다. 워낙 재료가 간단하고 다들 좋아하기 때문에 손수 만들어서 집에 놀러 온 친구와 나눠먹기도 좋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출출할 때면 여지없이 떡볶이와 순대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의 '소셜 푸드'인 것이다. 떡볶이를 맛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황교익의 개인적 취향이지만, 다들 모여 즐기는 떡볶이 타임에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사회적 자폐'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황교익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확인한 것만 해도 2018년 5월, 7월, 8월에 연이어 떡볶이에 대한, 혹은 떡볶이를 맛있는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혹은 비아냥을 페이스북에 게재하며 여전히 그는 전쟁중이다. 그런데 그 전쟁이란 대체 무엇과의 전쟁인가? 황교익 스스로는 '한국인이라면 으레 떡볶이를 좋아하리라고 여기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저항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그 누구도 황교익에게 세상의 모든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지 않다. 황교익보다 떡볶이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야말로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맛없는 떡볶이집이 훨씬 많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크게 다를 바 없는 공장제 떡에 시판 고추장을 쓰는 떡볶이집의 순위를 매기며 최고의 떡볶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미세한 차이 속에,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은 재료의 맛에 기반을 두지만 단순히 재료의 맛을 다 합친 것을 넘어선다. 프랑스의 바게뜨와 이탈리아의 치아바타는 모두 밀가루와 소금, 물과 이스트만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게뜨를 치아바타와 같은 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바게뜨에 비해 치아바타는 밀가루 본연의 맛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재료는 같지만 다른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 제시했던 철학적 화두를 떠올려보자.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 요리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떡볶이는 재료도 고만고만하고 값도 거기서 거기인데 왜 어떤 떡볶이집은 성공하고 다른 곳은 폐업할까? 황교익은 재료의 맛에만 집착하면서 식중(食衆)이 무엇을 먹고 즐기는지에 대해 놓치고 있는 듯하다. 맛이란 차이에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 말이다.

황교익이 2008년작 『소문난 옛날 맛집』에서 스스로 밝힌 바, 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의 집에서는 인스턴트 라면이 금지된 음식인데, 자식들은 먹자고 조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맛이 제각각이어서 그의 부인은 세 명의 자식들이 먹을 라면을 각각 따로 끓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소 길게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

"어째 그리 입이 제각각이냐. 라면에 달걀 푸는 법이 다 달라요. 첫째는 라면 다 끓고 난 다음 달걀을 넣되 노른자 깨뜨리면 안 되고, 둘째는 라면 끓을 때 다른 그릇에다 푼 달걀을 부으면서 휘휘 저어야 하고, 셋째는 다 끓고 난 다음에 달걀 넣고 젓가락으로 깨뜨려 저어줘야 해."

인스턴트 라면에 달걀만으로도 그렇게 맛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인터넷에 라면 요리법을 검색해보면 인스턴트 라면 하나로 얼마나 다양한 '장난'을 치는지. 인스턴트 음식이 아이들에게 획일화된 입맛을 강제한다고, 이를 먹이지 말아야 한다고 내내 주장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맛의 세계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소문난 옛날 맛집』, 189쪽)

그렇다. 황교익이 모르는 또 다른, 더 넓고 풍요로운 맛의 세계가 있다. 2008년쯤에는 얼핏 그 사실을 인정할 듯도 하더니만, 『미각의 제국』을 출간하고 〈트루맛쇼〉에 출연한 후 날이 갈수록 그는 더욱 강경한 '재료 근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누가 우리의 음식 문화에 있어서 "우리의 미각 기준을 그들의 것과 같아지게끔 조작을 하고 있"(『미각의 제국』, 45쪽)는 '제국주의자'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황교익은 문화권력으로 자리매김해갔고, 그러던 중 2018년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북한의 평양냉면이 메밀의 고유한 향을 즐기기는 커녕 땅콩버터를 집어넣은 중국식 냉면처럼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달라지고, 차이가 생기며, 맛이 펼쳐진다. 인류 음식 문화의 진정한 수수께끼란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황교익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 《기획회의》 471호(2018년 9월 5일)에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입니다. 편집부에서 수정하지 않은 판본이니 정확한 인용을 원한다면 《기획회의》를 구입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입(알라딘).

황교익의 레퍼런스, 『맛의 달인』

『맛의 달인』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최고의 맛을 찾아 나선 신문사 기자 지로와 미식가인 아버지 우미하라가 요리 대결을 펼쳐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지로와 우미하라가 닭고기 요리를 놓고 대결을 펼치게 되면, 먼저 서로 가장 맛있는 닭고기부터 찾는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닭고기는 좁은 닭장에서 인공 사료를 먹이며 대량 사육되는 닭임을 확인시켜주고, 진짜 맛있는 닭고기는 자연 상태에서 천연 사료를 먹고 자라는 닭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후 닭고기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요리법을 연구하고 시식회를 열어 우열을 가린다.

몇 해 전 『맛의 달인』을 탐독하면서 지로 방식으로 맛의 세계를 깨쳐나가기로 작심하고 음식 재료 공부에 몰두한 적이 있다. 가령 '최고의 김치'를 상정하고는 그 작품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 황교익, 『소문난 옛날 맛집』(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225쪽. 강조는 인용자.

황교익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시피, 그의 '미식'은 일본 만화 보고 배운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책에 직접 써 놓은 내용이다.

2018-07-23

미 에너지국: 이제 세계는 원자력을 청정 에너지로 인식해야 할 때

옮긴이의 말: 미 에너지국(Department of Energy)의 차장인 댄 브리예트가 발표한 게시물을 번역합니다.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s://www.energy.gov/ne/articles/it-s-time-world-recognize-nuclear-clean-energy-source 세계는 탈원전과 반대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불볕더위 속에서 모두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며 건강을 지키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세계는 원자력을 청정 에너지로 인식해야 할 때


2018년 5월 21일

금주, 저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9차 클린에너지장관회의(Clean Energy Ministerial)에 참석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전지구적 청정 에너지 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정책과 프로개램을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촉진하기 위해 전 세계의 에너지 관련 고위직들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릭 페리(Rick Perry) 미 에너지부 장관이 지난해 지적했던 바와 같이, "청정 에너지"의 개념 정의에 원자력 에너지가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원자력은 탄소 배출량이 적은 순서대로 놓고 볼 때 2위로, 오직 수력발전소만이 원자력보다 탄소 배출량이 적습니다.

만약 세계가 진지하게 탄소 배출량을 줄이면서 경제 성장을 도모하고 싶다면, 각국의 장관들은 모든 선택지를 검토해야만 합니다. 깨끗하고 신뢰도 높은, 탄소 배출 없는 에너지인 원자력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NICE 미래 계획

미국, 캐나다, 일본은 원자력 혁신: 청정 에너지 미래 계획(Nuclear Innovation: Clean Energy (NICE) Future initiative)을 출범합니다.

미래의 발전된 청정 에너지 시스템과 혁신을 위한 논의의 장에 원자력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한 국제적 노력이라 하겠습니다.

혁신적인 원자력 시스템은 전지구적인 탈탄소화(decarbonization)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다음과 같이 높은 밀도로 에너지를 소비하는 장비를 포함합니다.

  • 담수화
  • 산업 내에서 사용되는 열 에너지의 처리
  • 원자력과 신재생에너지의 복합 시스템
  • 유연한 전력망
  • 수소 생산
  • (열, 전자, 화학적) 에너지 저장

NICE 미래 에너지 계획은 탄력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12개국 이상이 참가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이 중요한 계획에 다른 국가들도 참여해야 할 때입니다.

원자력의 깨끗한 힘

이미 전 세계 30개국에 449개의 상업용 원자로가 운용중입니다. 종합해보면 이 원자로들은 전 세계 에너지의 11퍼센트 가량을 제공합니다. 그 모든 에너지가 깨끗하고도 안정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99개의 원자로가 전체 전력량 중 20퍼센트를 생산하며, 이는 전체 청정 에너지 가운데 56퍼센트를 차지합니다.

원자력 에너지를 자원으로 활용함으로써 미국은 1995년부터 2016년까지 1400억톤 분량의 탄소 배출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30억 대의 차량을 없앤 것과 동일한 효과라 하겠습니다.

다름아닌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청정 에너지를 논의하는 장에 원자력의 설 자리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협력의 힘

트럼프 행정부는 에너지 정책에 있어서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습니다.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실입니다.

페리 장관이 천명한 바와 같이, 우리는 경제를 발전시키느냐 환경을 보호하느냐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접근법은 기술 혁신을 불러오고, 우리의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환경을 보호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자력은 깨끗하며, 신뢰도 있고, 탄력성을 갖춘 에너지원으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연이어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클린에너지장관회의에서 원자력을 포함하는 것은 이 기술에 더 큰 힘을 실어주는 일이 될 것이며, 전 세계의 우리 동맹국들에게 효용을 안겨주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공해 없는 미래를 그리는데 있어서 모든 청정 혁신 기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는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미래(NICE Future)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모두 함께 힘써야 합니다.

나이스 미래 계획에 대해 더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댄 브리예트(Dan Brouillette)

댄 브리예트는 미 에너지국의 차장입니다. 공공 및 민간 영역에서 에너지와 관련하여 30여년의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8-03-11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서동진의 이론적 왜곡에 대하여

서동진의 블로그에 새 글이 올라왔다. 본인이 페이스북에 쓴 글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인데, 내용을 요약하면 '나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옹호하면서 미투에는 반대하는 그런 일관성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적인 지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글 덕분에 우리는 서동진의 생각을, 혹은 서동진으로 대변되는 '남성 좌파 지식인'들의 성폭력 고발에 대한 생각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고 있구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서동진이 쓴 글로 돌아가보자. 이 글의 취지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성폭력'에 모종의 특수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에 대한 반발로서의 미투 고발과 연대가 '피억압자의 정당한 폭력'에 귀착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소리다.

일단 우리는 '정당한 폭력'의 논의가 좌파 진영에서 대체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대체로 그들은 벤야민과 아감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인용하는 지젝의 논의에 힘입어 폭력을 옹호한다. 자본가들이 국가 권력을 동원해 노동자를 탄압할 때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생산수단을 파괴하며 경찰 등 '자본의 하수인'에게 육체적 피해를 입히는 것은 정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혹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벌어져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정권이 '인민의 적'을 처단하는 과정에도 당연히 동원될 폭력을 미리부터 정당화하고 드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구성에 대한 평가는 별론으로 하자. 중요한 것은 한국의 좌파들이 '저항으로서의 폭력' 혹은 '신적 폭력' 등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의를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해왔다는 데 있다. 서동진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그가 3월 11일 본인의 페이스북 게시물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올린 블로그 게시물을 통해 우리는 그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동진 같은 좌파들이 무언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그것을 경멸한다. 요컨대 '폭력 시위는 절대 안 된다'거나, '도로교통법을 지키지 않는 불법 시위는 엄단해야 한다'는 식의 입장에 그는 결사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인용한 것은 그가 블로그에 쓴 글의 도입 부분이다. 그 이후로 몇 문단에 걸쳐 '폭력'에 대한 멋지구리한 '성찰'이 이어진다. 몇 대목 쭉 인용해보자.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난데없는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 정치철학의 테마로서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 에티엔느 발리바르의 제법 오랜 시간 동안의 사색을 떠올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 그는 사회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자본주의를 변혁시키고자하는 이들엑[sic.] 가장 중대한 질문이 폭력이라고 주장하려 할까. 왜 지금 대치시키고 토론해야 할 인물은 레닌과 간디일까?", "해방적인 열정으로서의 폭력과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반동적인 폭력을 엄격히 나눌 수는 없을까. 예수의 폭력성과 나치즘의 폭력성을 분할할 기준은 없을까."

이렇게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논의를 보고 있노라면 서동진은 억압당하는 자의 폭력만큼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옹호할 태세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메갈리아의 미러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폭발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해서도, 그 언어의 날선 에너지에 대해서도 응당 옹호해야 할 듯 싶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시피 그렇지 않다. '폭력'와 '혁명'에 대한 서동진의 우아한 성찰은, 그 분노와 증오의 에너지가 '남성 일반'을 향하는 순간, 딱 멈춰선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의 방향을 뒤틀어버리는 것이다.

미투운동에서 폭력성은 결정적인 쟁점은 아닐 것이다. 나는 미투운동에서 쟁점은 성폭력이란 점을 간과하고 그것을 폭력으로 호도한 채 성적 지배를 막연하게 나쁜 짓으로서의 폭력을 저지른 것으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여전히 믿는다. (강조는 인용자)

밑줄과 굵은 글씨로 강조한 대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서동진은 '성폭력'을 '폭력'과 구분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동진과 좌파 진영의 논의 속에서 폭력은 둘로 구분된다. 지배자의 폭력과 피지배자의 폭력. 그가 속한 좌파 진영의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자면 지배자의 폭력 역시 '존재론적 당위'까지 부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배자의 폭력은 비판하고 피지배자의 폭력은 옹호한다.

그렇다면 서동진 같은 좌파가 '미투 운동'에 동참하지 않을 방법은 둘 뿐이다. 첫째, 여성을 피억압자가 아니라 억압자의 위치에 놓는 것. 둘째, 여성에게 향하는 남성의 폭력, 남성을 향하는 여성의 분노를 그가 옹호하는 (이론적) '폭력'과 다른 무언가로 치부해버리는 것. 주지하다시피 첫번째 방법은 주로 '남성연대' 따위 반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전유되고 있다. 그들은 남자들이 '역차별' 당하는 세상이라고 울부짖으며 여성의 목소리를 억압하는데 기여하고 있으니 말이다. 서동진은 반면 두 번째 길을 택했다. 어떻게?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위 인용한 문장 뒤로는 다음과 같은 비문(非文)이 이어지고 있다. "그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은 그가 성폭력을 저지른 점을 무시하고 용서하는 나쁜 짓이라는 게 나는 한결같이 생각한다."[sic.] 숙달된 저술가가 비문을 내지르는 것은 그의 무의식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전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Freudian slip?). 그는 성폭력을 저지른 자를 악마로 비난하면, 해당 악행을 저지른 자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점을 무시하게 된다고, 그것은 결국 용서로 이어지게 되며 따라서 나쁜 일이라고 한결같이 생각해온 듯하다.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서동진에게 있어서 성폭력이란 '폭력'만큼 즉각적인 분노를 자아내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폭력 그 자체보다 성폭력을 저지른 자를 악마로 비난하는 것을 더 문제적으로 받아들인다. 믿기 어렵지만 서동진 본인이 블로그에 그렇게 써 놓았다. 물론 그는 곧이어 "가해자, 그를 은밀하게 혹은 드러내놓고 지지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는 온당하고 또 지지할 수 있다"고 면피성 발언을 하지만, 이미 속내는 분명히 드러나 있다.

서동진은, 가령 안희정같은 성폭력 가해자를, 노동조합 파괴 공작을 일삼아온 유성기업 유시영 회장 같은 자본폭력의 가해자와 같은 비난의 강도로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성폭력범이지만 후자는 자본을 동원한 폭력행위를 지휘한 사람으로, '성폭력'과 '폭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이 논리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이것은 '가정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는 고전적 부르주아 가정경제(및 착취 구조)를 지탱해오던 양대 궤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이 서구권에서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가정폭력은 폭력이 아니므로 남편에게는 부인을 '계도'할 권리가 주어져 왔다.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므로 강간 피해자는 스스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모두의 평온한 삶을 위해 피해를 고발하지 말아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부르주아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두 개의 착취 논리다.

서동진이 좌파인 만큼 마르크시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교집합을 이루는 가장 깊은 뿌리에는 엥겔스의 책 한 권이 파묻혀 있다.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 그것인데, 주지하다시피 엥겔스의 논지는 명확하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같은 배에서 나온 다른 자식이거나, 심지어 같은 놈인데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의 논의를 전제할 때, 어떤 '좌파 이론가'가,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미군 기지촌에서 벌어진 대한민국의 자국민에 대한 성적 착취와, 경제 개발을 위해 노동운동을 짓밟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에 대해 폭력을 저지른 것이며, 그에 맞선 운동권들 역시 (정당한)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회 속에서 강간, 성폭행, 성추행, 다양한 성적 억압을 통한 직업적 차별과 배제 등을 겪어온 여성들의 보편적 경험만큼은 '폭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 외에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성폭력은 폭력이 아니라는 서동진의 '이론적' 해석은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자들과 그에 연대하는 이들의 저항의 의의마저도 변질시킨다. 노동자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폭력적인 시위를 할 때, 서동진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사법을 이용하여 '이미 벌어진 일'을 정당화하려 든다. 하지만 여성들이 분노하고, 시위하고, 목청을 높이면, 그것은 좌파가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폭력'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그러한 논리 구조 위에서 서동진은 '미투 운동'과 연대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상식에 양보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는 폭력이라는 절망적인 주장에 기울어진 채 그 폭력의 해방적인 윤리를 보존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강조는 인용자)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여섯 글자로 줄이면 '착한 페미니즘' 아닌가? 그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2018년 3월 11일 현재의 대한민국 속에서, 존재하는가? 성폭력 고발은 좋지만 너무 심하게 하면 듣는 남자들 기분 나쁘니까 '비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해달라는, 남성 지배 사회의 요구다. 그것이 동성애 인권 운동가이며 이론가인 한 남자의 입에서 반복되고 있다.

성폭력은 폭력이다. 그것은 삐뚤어진 사랑도 아니고 굴절된 성애도 아니다. 이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페미니스트들은 수십년에 걸쳐 목숨 걸고 싸워왔고 그 투쟁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런데 한 남자가, 여성들의 분노가 쏟아지는 와중에, 여성들에게 현장 지도를 한다. "저항하는 자들의 폭력을 비폭력적인 것으로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그리고 영탄조로 내뱉는 것이다. "비판으로서의 페미니즘을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 대체하고 있구나!" 곱씹을수록 다양한 의미에서 기가 막힌 문장이다. 나는 저 말을 이렇게 되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적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페미니즘을 이론적 비판으로 대체하고 있구나!'

나는 지금 철학의 정치화, 정치의 철학화에 대한 벤야민의 문장을 떠올리고 있다. 결국 벤야민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부르주아 사회를 배신하며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옹호했다. 하지만 남자로 태어나고 자란 서동진은 남성 지배 구조를 배신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본국'과 '변방'의 차이가 아닐런지, 문득 아무말이나 떠올리며 이 글을 닫고자 한다.

2018-01-14

'흙수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하지 말라?

대체 어떤 악마가 '흙수저들의 자수성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했는지 모르겠다. 현실은 그와 정 반대다. '흙수저'를 보호하려면 소위 '암호화폐' 거래를 규제해야 하며, 최대한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하고, 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돈은 액수가 같아도 가진 사람에 따라서 절대 같은 돈이 아니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쪼들린 적 없이 자란 청년이 친척들로부터 넉넉하게 받아온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만든 500만원을 생각해보자. 날려먹어도 큰 상관이 없는 돈이다. 잘 사는 부모들은 심지어 자녀들한테 '투자 경험'을 안겨준다며 일부러 과하게 용돈을 주기도 한다더라. 그런 돈은 아무리 유입되어도 큰 문제가 될 건 아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열풍에 귀가 팔랑거린 빈곤계층 청년이 월세방 보증금을 빼온 500만원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 돈이 사라지면 그의 월세방도 사라진다. 주거의 질이 급감하고 삶의 질이 곤두박질친다. 더 나쁜 경우는 없는 돈 끌어모아 '가즈아~'에 동참한 경우.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거나, 기타등등. (회사 공금을 끌어다가 비트코인에 넣었는데 값이 안 올라서 큰일이라는 인터넷 게시물 캡쳐를 본 적도 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기록해둘만한 사안이다.)

이게 결국 돈 놓고 돈 먹기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흙수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하우스 입장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 아예 부자들은 돈을 날려도 된다. 하지만 가난하면 애초에 그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이 정권은, 청와대는, 그리고 코인판이 계속 이렇게 규제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또 잔인하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영혼까지 끌어올려 코인판에 갖다 부은 청년들이 대체 어떤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지 걱정되지도 않나?

처음부터 이건 돈놀이판이었다. 그냥 웃기는 장난으로 취급되던 비트코인이 진지하게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랬다. 페이스북의 창업에 자신들의 지분이 있다고 주장하여 마크 주커버그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가 '제미니'(라틴어로 쌍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거래소를 만들고 거액을 투자하면서부터 엉터리 아나키즘적인 몽상은 어엿한 투기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흙수저도 윙클보스 형제처럼 '존버'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흙수저'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탕 크게 먹어서 인생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과 완전히 반대되는 짓이다.

대체 대한민국의 국격이 어디까지 후퇴하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무슨 정당한 논의인 양 언론에 오르내리고 정치인이 왈가왈부하기에 이르렀는가? 자기 돈 갖다 박아서 한탕 하건 쪽박 차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게 마치 정당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인 양 포장하지 말라는 소리다.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마저 모두 망가져가고 있는 듯하다.

2018-01-06

〈1987〉은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인가

나는 〈1987〉이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586세대가 내뱉는 승리의 함성과도 같은 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온당히 받았어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허구의 서사를 창작하는 일에 대한 인식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적인 현상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여성 캐릭터에 대해 내린 판단을 보다 정확히 서술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픽션을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직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시점에서만 '현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있어야 할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대신 남은 것은 '그 모든 민중'의 대변자인 연희(김태리 분)라는 '순수한 여대생' 뿐이다.

김경찬 작가와 이우정 제작자가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의 한 대목. "나머지는 실존 인물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한 인물이다." 이우정 제작자도 그러한 인물 배치를 순순히 인정한다. "당시 사건에 말리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표상이 연희였다."

요컨대 연희는 도구적 인물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혹은 직·간접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남성들에게는 '시위 현장에서 마주쳤던 것도 같은 아련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 87년 6월 항쟁을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예정대로 작년 12월이 대선이었다면 '역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계속 훈계를 들었을 젊은이들에게는, 쉽사리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 요컨대 피와 살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아닌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는 좋은 캐릭터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내면으로부터의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폭발할 때, 배우 김태리의 단정한 용모와 선을 넘지 않는 연기 톤이 조화를 이루어 기대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문제는 연희가 '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학 새내기인 그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연희가 할 일은 그저 눈을 뜨고 거리에 나가 버스에 올라 깃발을 휘두르는 것 뿐이다.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세상을 낳기 위해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존재로 설정된 연희 말고는, 유의미한 여성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심각한 문제는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씨네21〉 인터뷰를 통해 확인하고 나니, 나도 이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6월 시위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선창을 하는 목소리는 배우 문소리씨다. 어떤 역할이든 캐스팅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배역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목소리만 썼다. <1987>은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 조금 더 조화롭게 여성 캐릭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김정남의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볼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우리는 실화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남성들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

이 대답은 실로 문제적이다. 감독은 "팩트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드라마적으로 윤택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서, "한병용 같은 경우 실제로 편지를 빼내오고 전달한 교도관은 두분이었는데 두 인물을 하나로 합쳤다"라고까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준환 감독과 제작진은 극적 긴장감을 위해 실존인물 두 명을 하나로 합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어도,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수많은 운동권 여성 캐릭터 한 두 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그들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교회건 절이건 성당이건 운동권이건, 어떠한 신념에 기반한 조직이 작동하려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제공하는 이들 중 상당수, 때로는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공식 기록에 충실하려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애초에 그 공식 기록으로부터 배제된 여성들을 끌어안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는 그러한 효과를 알면서도 선택을 했다. 현실 속에 존재했던 두 사람의 교도관을 하나로 합칠 때에는 '극적 재미'를 앞세우던 그들이,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내지는 않으면서 그 핑계로 '팩트'를 들이댄 것이다.

역사의 악역은 거의 모두 남자다. 왜냐하면 그들이 권력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 악과 맞서 싸우는 일에는 남녀가 없다. 따라서 역사의 선한 역할에는 남성과 여성이 고루 포진해야 한다. 문제는 그 싸움이 승리로 기록되건 패배로 기록되건, 역시 기록하는 자는 남성적인 시각을 전제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혹은 숫제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정착 과정에서 예수가 부활한 빈 무덤을 처음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어떻게 축소되었는지,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여인들의 이름은 왜 남아있지 않은지, 대신 우리가 아는 것은 12명의 남자 제자들 뿐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남자들끼리 뭉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여성들의 힘을, 마치 1단 로켓처럼 소진시켜버린 후 떨궈버리기 일쑤였다.

〈1987〉의 제작진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에 여성의 이름이 부족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건 조금만 생각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도 뻔한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해도 어차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서사화가 이루어지지만, 특히 픽션을 창작하는 중이었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어떤 의미에서건 (왕년의?) '운동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1987〉에는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야 했다. 선량한 교도관의 수더분한 누이, 시대적 각성을 하는 주인공과 덩달아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는 날라리 친구 같은 기능적 인물 말고, 그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내면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유의미한 입체적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를 만들었어야 한다. '팩트'로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밝히는 것, 그게 바로 픽션의 임무 아닌가?

역사는 전두환, 노태우, 박처원, 박종철, 이한열, 이부영, 김정남, 함세웅 등의 이름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도 매일 밥을 먹었고 세탁된 옷을 입었다. 그러한 돌봄노동은 자연스럽게 운동권 여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문건을 쓰고 몰래 인쇄하고 뿌리며 연락을 주고받던 것도 여성들이었고, 심지어 남자 운동권들의 자기 서사화와 달리, 여자들이야말로 용맹하게 돌을 던지고 전경들에게 얻어맞아가며 싸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런 기록의 부재를 〈1987〉의 제작진은 '팩트'로 받아들여, 영화로 만들었다.

이런 이중적 기준 앞에 나는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자들을 픽션의 세계에서마저 지워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 길게 말을 이어봐야 중언부언일 수밖에 없으니 시 한 편을 인용하면서 끝내도록 하자. 우리는 역사를 이런 식으로 기억해서도 안 되며, 이런 식으로 서사화해서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