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29

[기고] 저 민주당과 무슨 연합을 할 것인가? - 이재오, 엄기영, 심상정

이재오는 은평구 토박이다. 문국현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하기 전까지 쭉 그곳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왔다. 지역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그런 이재오가 재보선에 출마했다. 이미 6·29 지방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의 단물은 많이 빠진 상황. 이재오가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가?

민주당은 신경민 전 MBC 앵커를 영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민 본인이 고사했다. 민주당에게는 '다음 카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선된다면 70세의 초선 의원이 되는, 땅투기 의혹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장상이 후보로 나왔다. 국민참여당의 천호선 후보는 줄기차게 단일화 협상을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곱게 뺨을 대준 민주노동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진보신당은 사회당의 금민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지만 그 결과는 458표. 은평을 재보선의 결과가 이렇다. 이재오를 뺀 모든 선거 참여자가 패배했다.

한편 신경민의 직장 상사였던 엄기영 전 MBC 사장은 선거를 앞두고 강원도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들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개인적인 친분에 따라 지지 방문을 하였을 뿐이라고,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인이 유죄 확정을 받으면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치뤄질 것이므로, 그것을 노린 포석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정권의 외압으로 신경민 앵커가 마이크를 놓을 때, 그것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던 엄기영이다. 그 엄기영이 한나라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두 사례를 종합하여 볼 때 우리는 민주당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민주당과의 적극적인 선거 연대를 통해 진보정치의 외연을 확장한다거나, 심지어 진보정당이 민주당의 '진보 블록'이 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식의 이른바 '빅 텐트'론의 현실을 가감없이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당은 애초에 빅 텐트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도 없다.

만약 민주당이 파격적인 후보 선택을 통해 은평을 선거에서 승리하고 싶었다면, 장상같은 '그냥 홀딱 깨는' 후보가 아니라, 한 장의 유의미하고 강력한 카드가 존재했다.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왔다가 후보 사퇴와 함께 유시민 후보 지지를 요청했던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를 영입하면 된다. 지역에 깊게 뿌리내린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완전히 신선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후보가 필요하다. 이미 그런 전략으로 이재오는 문국현에 의해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만약 그런 제안이 실제로 심상정 측에 전달되었다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의 대표까지 역임한 간판 스타에게 진보신당 경기도당은 '1년 당직 정지'이라는 징계를 선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이 은평을을 제시했다면 심상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지 민주당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런 적극적인 전략을 세우고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심상정의 의도에 대한 어떤 단정적 추론을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떠나거나 버리려고 했다면 더 좋은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심상정이라는 대중성과 인지도를 갖춘 진보 인사를 영입할 수 있었던 기회는, 오직 이번 재보선 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장상을 데려왔고, 국민참여당 측에서 끈질기게 요구한 단일화 요구를 결국 선거 직전에서야 수락하였으며, 참패하였다.

말하자면 '빅 텐트'를, 민주당의 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칠 수 있는 기회는 이번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재오를 꺾으면 '이명박 정부 심판'이라는 민주당의 기조를 꾸준히 유지할 수도 있고, 독자세력을 유지하려 하는 진보신당과 그 외 세력들의 기세를 완전히 허물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민주당이 진보정당이거나 진보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그들이 정치적 승리를 위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집단이냐 아니냐는 것을 문제삼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민주당은 철저히 몇몇 지도부의 손아귀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스스로의 영역을 더 개척할 능력을 잃어버린 지도부가 지휘하는 정당에서 공천을 받는 것은, 그래서, 특히 정치 신인으로 무대에 데뷔하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엄기영은 왜 본인의 이미지를 망쳐가면서까지 한나라당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가? '진보 개혁'적 성향을 지닌 분들께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민주당의 현실이다. 이념적으로는 사실 한나라당과 크게 다를 바 없고, 하지만 당선가능성은 형편없이 낮고. 그게 민주당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진보진영 내에서 '빅 텐트' 같은 공상정치소설이 절판되기를 소망한다. 현재의 민주당은 과거의 민주당의 유산을 갉아먹으며 존속하는 이익결사체일 뿐이다. 정권심판론의 바람이 몰아치지 않는 한, 그들은 이재오같은 토박이 거물을 이길 능력이 없다. 그런 판세를 읽고 엄기영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고 싶은 뉘앙스를 풍기며 바바리 코트를 여민다. 결국 남은 것은 심상정과 같은 진보정치인들의 선택과 결단이다. 썩은 기둥 밑에서 아직도 '빅 텐트'를 부여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남은 2년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를 시작할 것인가?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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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5

그냥 몇 가지 의문

군대가 사람 죽이는 곳 아니면 대체 뭐 하는 곳이란 말인가? 특히 전략 전술의 결정에 참여하지 않는 사병들이 군대에서 배우는 것은, 질서를 유지하면서 타인의 무력 집단을 살해하는 법 아닌가? '대한민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결국 시험 보는 기술일 뿐이다'라는 말과 논리적으로 다를 게 뭐가 있단 말인가?

2010-07-17

김규항 - 진중권 논쟁

김규항은 진중권이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자유주의자로 지칭하고 있다. 애초에 이 '논쟁'이 시작되게 된 배경을 보면 그렇다. 문제가 된 칼럼 "오류와 희망"의 단락을 읽어보도록 하자.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 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①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②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③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원문자 강조는 인용자.


굳이 원문자 강조를 해가면서까지 이 문단을 적시하는 이유는, 이 속에 등장하는 논리적 비약을 정확하게 잡아내기 위해서이다. 하나씩 따져보기로 한다.

김규항이 말하는 '자유주의자'의 개념 정의가 '전진'이라는 진보신당 내 정파와 입장을 달리하느냐 하지 않느냐라면, 진보신당은 촛불 이전에도 자유주의 정당이었다. 당내 정치에는 과문하지만, 적어도 전진이 촛불 이전부터 다수파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①에 등장하는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같은 그룹"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진보신당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애매했고, 그 약점은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공식 명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매우 잘 드러나고 있다.

①과 같은 이유로 자유주의자로 규정된 진중권은 ②와 같이 촛불 현장에서 활약하여 대중들의 이목을 끌었고, 그 결과 정당의 인지도를 높이고 신규 당원들을 끌어모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유입된 당원들 중 상당수가, 굳이 말하자면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의 실험이 실패한 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던 구 여당의 지지층에 가까운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현재 진보신당의 당내 여론은 당내 과격파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한 현실을 놓고 본다면 ③과 같은 비판은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문장만을 놓고 본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진보신당 내에서도 진보신당이 이른바 '빅 텐트'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심상정의 경기도지사 탈퇴를 그러한 차원에서의 사전 포석으로 해석할 여지가 존재하므로, 김규항의 비판은 그 말 자체로서는 충분히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③에 등장하는 '자유주의 정당'이라는 어구의 '자유주의'와, ①과 ②에서 진중권을 지칭할 때 쓰인 '자유주의자'의 '자유주의'가 같은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냐이다. 그 지점에서 이 칼럼이 내재하고 있는 자연스러운 논리적 비약을 관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중권이 자유주의자라고 비판받은 이유는 전진과 생각이 비슷하거나 '전진과 나는 생각이 비슷한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지 않아서이다. 그러한 수준의 자유주의를 편의상 '자유주의 A'라고 부르기로 하자. 한편 진보신당의 정체성과 어긋난 정책 및 선거 전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심상정 뿐 아니라 노회찬도 선거 후보 때려치우고 '반 MB 전선'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는 그런 소리 말이다. 김규항이 ③에서 비판하는 신규 유입 당원들 중 적잖은 수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자유주의 B'라고 해보자.

자유주의 A와 자유주의 B사이의 간극은 대단히 크다. 전자는 진보신당의 정체성 내에서 그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이견을 놓고 생기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진보신당의 존립 이유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규항은 '자유주의자' 진중권의 활약으로 인해 진보신당이 숫제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두 개념 사이의 차이를 슬쩍 모른채 뒤섞어버린다.

문제는 김규항 식으로 정의된 자유주의 A에 나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다. 전진의 이념적 정체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진보신당에 들어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규항이 자유주의 A를 지칭할 때처럼 말한다면 진보신당 내에 자유주의자가 아닐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게에서 심상정 자진탈당하라고 목소리 드높이는 그 20여 명?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심상정 노회찬 두 사람 모두 전진 소속이 아니니까 그 둘도 자유주의자일 테고, 흐음….

말하자면 김규항은 '자유주의'라는 테마에 대한 논쟁의 수준을 대단히 유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사회주의 만세, 라고 선언하지 않으면 자유주의라는 식이다. 그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김규항과 같은 식의 잣대를 누군가 들이밀 때, 울컥 하는 심정에 '그래, 나 자유주의자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에 휩싸이지 않을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그 사회주의, 결국 누구 좋으라고 하는 걸까?

김규항 식 기준을 놓고 볼 때, 심지어 그 비난을 무릅쓰고 선거를 완주한 노회찬조차도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실천이 아니라 선언에서 제 정체성을 찾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선거와 투표는 후보자와 유권자가 임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체성 시험의 장이고,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실질적 정치적 지향성을 명확하게 판가름해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진보신당 내에 존재하는 '자유주의 B'의 문제점이다. 그런데 김규항이 비판하는 '자유주의자' 진중권 및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려"운 노회찬만 해도, 그 '자유주의 B'와의 갈등을 뼈가 시리도록 겪어왔고 또 이번 선거에서도 겪지 않았던가.

선언의 대상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닌 정치적 목표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정한다면, 그것이 '자유주의 A'가 되어버리는 것은 현실 속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일이며 정치 세력 및 정치인으로서는 그것을 감내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그 어떤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정당으로서의 정체성과 존립 이유를 포기하는 결정과 혼동될 필요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김규항의 '자유주의자'라는 비난은, 한 칼럼니스트로서 택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하고 게으른 선택일 뿐 아니라, 진보신당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심지어 최장집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자유주의에 대한 재평가 흐름과도 무관한, 한낱 사변적 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010-07-16

군대등급제

대체 이런 발상을 어떻게 떠올렸고 왜 추진하는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도입된다면 사병 인권 문제는 이전에 비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군대는 군인들의 부모 입장에서 '무사히 갔다 오기만 하면 되는 곳'이었다. 그래서 훈련소에서 똥을 먹이는 것 같은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어지간한 군대 내부의 문제 등에 대해 굳이 부모들이 날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모들이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낼 경우 자녀들이 보복적 조치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에서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가 자녀의 취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보자. 부모들은 자녀의 군생활 그 자체에 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물론 아주 힘있고 돈있는 집에서는 군대에 자녀를 아예 보내지 않겠지만, 핵심은 어중간한 중산층 자녀들과 그들의 장래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는 부모들이다. 그런 부모들이 자녀들의 군생활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는다면, 그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일일 수 있다.

군대등급제 자체를 찬성한다는 말은 아니다. 애초에 저런 발상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국민에게 왜 국가가 등급을 매기고 그것을 사기업에 제공하기까지 하는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정책적 결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낳을 또 다른 효과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군대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사병들의 현실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군대등급제는 본의 아니게 바로 그 지점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10-07-01

중국과 인도의 육식 문제

나야스님이 지적해주신 글에서 얻은 자료를 통해 중국과 인도의 육식 상승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세계식량농업기구의 2009년 보고서(PDF)를 인용한 나야스님은 "중국인들은 2005년 기준으로 1인당 59.5kg의 육류와 23.2kg의 우유, 20.2kg의 계란을 섭취하였다.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 세 품목 각각 48.9kg/26.8kg/9.9kg을 소비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PDF 파일의 135-139페이지에 등장하는 표에 바로 그 내용이 적혀 있다.

문제는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 세 품목 각각 48.9kg/26.8kg/9.9kg을 소비하였"다는 것을 확인한 나야스님이 중국인들은 "이미 더 많이 먹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이 한국인만큼" 고기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 소비량만을 놓고 보면 2005년 현재만 놓고 보더라도 중국인들이 한국인보다 약간의 육류를 더 소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안의 본질과는 큰 관련이 없다.

중국의 육류 소비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본토'와 그 외의 다른 지역을 우선적으로 비교해야 한다. 중국요리는 한국과 달리 동물성 지방, 특히 돼지기름을 많이 사용하며 그 외에도 다양한 육류 첨가가 많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으로 볼 때 중국 본토에서는 1인당 고기를 59.5킬로그램, 우유를 23.2킬로그램, 달걀을 20.2킬로그램 소비하였다. 반면 홍콩에서는 각각을 무려 134.2킬로그램, 58.2킬로그램, 11.6킬로그램 소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외 다른 중화권과 비교해 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달걀을 제외한 다른 육류의 소비에서 중국 본토는 대만, 마카오, 홍콩의 소비량에 미치지 못한다.

동시에 중국 본토의 육류 소비량이 1995년 기준 1인당 38.2 킬로그램에서 2005년 기준 59.5킬로그램으로 성장한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매년 4.5퍼센트씩 성장하여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육류 섭취 증가를 이루어낸 것이다. 하지만 앞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경제성장을 충분히 이룬 다른 중화권과 비교했을 때, 중국인들의 육류 섭취는 (비록 그것이 현재의 한국보다 많다고 해도) 아직 충분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고기만 놓고 보면 38.1 킬로그램에서 48.9 킬로그램으로 그리 큰 변화가 없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육류 섭취량이 어느 정도 안정세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우유와 달걀의 섭취량 증가 역시 그리 괄목할만한 수준이 아니며, 이것은 한국이 양적 경제성장을 달성한 후 이른바 '웰빙'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자료만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한국과 중국의 경제 성장 및 식생활의 패턴이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표에서 인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138페이지 중간 부분에 등장하는 표에서, 인도의 육류 소비는 인상적인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인도인들은 고기와 달걀 모두를 거의 먹지 않으며, 다만 우유만을 집중적으로 마신다. 1995년 기준으로 1인당 우유 소비량은 57.7킬로그램인데, 2005년에는 그것이 69.5킬로그램으로 증가하였다. 아무튼 고기를 많이 먹지는 않고 있다.

대신 인도에서는 닭과 오리 종류의 육류 소비가 크게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물론 닭은 대단히 효율적인 단백질 공급원이며 오리 역시 그와 비슷하겠지만, 인도인들이라고 해서 '모든 육류'를 안 먹거나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인도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5년 연간 닭고기 소비량은 47만 8천 톤이었지만 2001년이 되면 그 수치는 140만 톤으로 늘었다. 나머지 육류 소비가 제자리에 머물고 있긴 하지만 매년 20퍼센트씩 상승하는 닭고기 소비 증가에 힘입어 인도의 육류 소비는 1995년 이후 매년 4.8퍼센트 가량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출처: "Indian Meat Consumption", Free wheeling

1995 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에서 매년 4% 가량 육류 소비가 증가한 결과 10년만에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육류 소비를 보이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소를 키우지만 숭배하기 때문에 잡아먹지 않는 인도라고 해서 사정이 그렇게 밝지는 않다고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식용으로 소를 키우는 과정이 가장 많이 비판받고 있으며 닭고기는 쇠고기에 비해 훨씬 '효율적'인 단백질 공급원이지만, 17억 인구가 먹기 시작한다면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를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고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도는 중국에 비해 지금도 훨씬 덜 육류를 섭취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계 인구순위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는 두 나라에서 이토록 빠른 속도로 육류 섭취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긴장할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