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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6

[서평] 로널드 드위킨, <신이 사라진 세상>

신이 없더라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늙은 법철학자의 마지막 질문] 로널드 드워킨의 <신이 사라진 세상>
프레시안Books, 2014년 4월 25일.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6656 

1.

법대에 들어간 것은 순전히 수능 성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저렇게 노닥거린 고등학교 내신 성적은 참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수능 점수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학교 중 제일 '좋은' 곳에 원서를 냈다. 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런 저런 경로로 입수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봤는데, 제목이 기억나는 것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밖에 없다. 일찌감치 백수처럼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생활을 반복했고,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 공부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민법총칙 교과서에는 스위스가 '瑞西(서서)'로, 오스트리아가 '墺地利(오지리)로 표기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책을 덮어버리고, 당시만 해도 여기저기 퍼져 있던 교내 행사들을 찾아다니며 귀동냥을 하고 술을 마시다가, 그마저도 시들해질 때쯤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그래도 법대에 왔는데 공부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법학에 대한 흥미를 북돋워줄 주변 서적들을 찾아 읽겠다는 발상이 깔려 있었다.

'단지 법학자를 넘어 사상가의 반열에 올랐다'고 평가되는 인물들이 몇몇 있다. 가령 독일의 형법학자이며 법철학자인 구스타프 라드부르흐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잠언집을 읽어보니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름다운 문장과 '통찰'이 담긴 에스프리들이 묶여 있었는데 적어도 당시의 내게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일종의 '진입 장벽'이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왜냐하면 라드부르흐의 법철학, 특히 "극도로 부정의한 실정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라드부르흐 공식' 등은, 나치 시대에 대한 독일 법학계의 평가와 반성이라는 맥락이 있어야 이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치가 '합법적'으로 '불법적' 행위를 저질렀다는, 따라서 그들이 만든 법이 문제였지 법조계는 비교적 결백하다는 항변이 그 이면에 깔려있기도 하다. 아무튼 당시에는 그의 말과 법철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른 법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법은 그 법이 통용되는 한 사회 내에서는 보편적인 규범력을 지니고, 따라서 그 법을 해설하거나 법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법학 역시, 대체로 특정 사회의 맥락 속에서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허버트 L. A. 하트의 <법의 개념>(오병선 옮김, 아카넷 펴냄) 같은 책을 읽어서 곧장 이해할 수 있는 한국 법학도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나는 당시의 나를 변호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의 법철학은 영미법 체계를 해석하면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흘러 로널드 드워킨이라는 이름을 만났지만, 역시 학부생이던 그 당시에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유일한 책이었던 <법의 제국>(로널드 드워킨 지음, 장영민 옮김, 아카넷 펴냄)은 그저 두껍고 어려웠을 뿐이다.

2.

대학원을 철학과로 진학하고 전공 대상은 칸트로 선정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렇다. 책을 그냥 쓱 읽어봤을 때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혹은 이해했다고 착각이라도 할 수 있는) 철학자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칸트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인데, 게다가 여러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드워킨의 마지막 책 <신이 사라진 세상>(김성훈 옮김, 블루엘리펀트 펴냄)도 그렇다. 법학적으로 응용되어 있는 부분을 빼고 나면, 이 책의 논의는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백종현 옮김, 아카넷 펴냄), 이른바 '그룬트레궁'의 그것과 거의 똑같다. 칸트의 핵심적 논지들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1) 윤리 법칙은 상대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객관적으로,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2) 그렇게 파악된 윤리 법칙은 이른바 '정언 명령'으로, 그것을 따르는 것은 인간의 의무이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정언 명령에 대한 경외심을 느낄 수 있고, 느끼는 것이 마땅하다.
(3) 신의 존재는 이러한 윤리형이상학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정언 명령의 최종 담지자로서 신의 존재를 '요청'할 따름이다.

<신의 사라진 세상>의 논리 전개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적 무신론자들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 종교의 과학 영역 그리고 의식을 통한 숭배 의무와 같은 신에 대한 책무를 거부한다"(43쪽)고 할 때, 드워킨은 칸트가 말한 (1)의 논지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어떤 인생을 사는가의 문제는 객관적으로 중요하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 잘살아야 할, 빼앗을 수 없는 윤리적 책임감을 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같은 곳)는 말은, 칸트가 말한 (2)의 논지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신 없는 종교의 가능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드워킨의 주장 가운데 '철학적'인 부분은, 사실상 일종의 탄탄대로 위에 놓여있는 셈이다. "우리는 처벌을 내리는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심판이 필요하다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오히려 신이 존재해야만 심판이 가능하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한다"(183쪽)고 말할 때, 드워킨은 '신의 요청'에 대한 칸트의 주장, 앞서 우리가 정리한 (3)번 논지를 되풀이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직전까지 영미 법철학계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던 그는 굳이 왜 이 책을 썼던 것일까? 칸트가 이야기한 윤리형이상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이른바 '전투적 무신론자'들(및 그들을 따르는 지식인들)과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는 대중들 혹은 그러한 성향의 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 1차적 목적이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가능하다면, 또한 무엇이 윤리적인 삶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때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면, '전투적 무신론자'들이 그렇게까지 전투적이어야 할 필요는 사실 딱히 없다. 반대로, '전투적 무신론자'들 또한 실은 일종의 종교적인 경외감과 진지함으로 삶을 바라보고 윤리적 판단을 내린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면, 유신론자들 역시 그들을 특별히 적개시해야 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드워킨은 일종의 중재자 역할을 자청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렇다. 그는 철학자이며 동시에 법학자이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신 없는 종교'가 가능하다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종교가 수행하는 윤리적, 도덕적 기능을 동일하게 구현한다면, 그 또한 종교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드워킨은 자신이 1992년에 쓴 책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종교를 정의한다. "종교는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인 객관적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더 심오한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다."(148쪽) 얼핏 듣기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렇게 종교를 정의할 경우, 자신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가령 낙태와 같이 기존 종교의 가치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 역시, 일종의 '종교적'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상 보호되는 권리가 과연 무엇을 보호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드워킨은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또 답변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는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감정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사람들의 윤리적 독립성을 지켜주는 것인지, 드워킨은 묻는다.

가령 내가 우리 집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를 (마치 고대 이집트인처럼) 신으로 숭배한다면, 그것은 나의 종교의 자유 중 첫 번째 의미에 해당할 것이다. 반면 내가 종교적 환각 상태를 넘나들기 위해 국가에서 금지한 약물을 복용하고자 한다면, 그럴 때 나는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를 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나의 윤리적 독립성을 위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해야만 한다.

첫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는 종교적 광신 등으로 향할 우려가 있다. 또한 국가가 두 번째 차원에서의 종교를 종교의 자유로 보호한다면, 종종 '자신만의 윤리'를 세워나가며 기존의 법과 질서를 어기는 자들을 법으로 지켜줘야 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섣불리 해답을 내리는 대신, 드워킨은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이 두 가지 종류의 믿음은 모두 좀 더 근본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지만, 서로 독립적이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은 깊은 종교적 포부의 영역에서는 유신론자들을 완전한 파트너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유신론자들은 무신론자가 자신들과 똑같은 도덕적,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도저히 메울 수 없을 듯 보이는 간극이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도덕적, 정치적 함의가 담겨 있지 않은 과학적 의견의 불일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부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 정도도 너무 큰 욕심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174쪽)

4.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낙태와 성에 대한 문제들이 그렇다. 낙태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의료 기관은 환자에게 필요한, 환자가 요구하는 의학적 처치를 베풀어야 한다. 그것은 의료 기관의 의무다. 하지만 일부 종교적 성향을 지니는 병원들은 가령 낙태처럼 종교적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시술을 거부하고, 그럴 때 자신들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의 특정 주에서는 종교 단체들이 자신들의 로비력을 발휘해, 동성애 행위(이것은 좀 오래 전 이야기이겠으나), 동성결혼, 조기 낙태 등을 불법화하는 법을 만들려고 시도하거나 종종 성공하기도 한다. 그럴 때 연방대법원은 대체로 위헌 판결을 내리는데, "대법원은 그 판결의 근거를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종교의 자유 보장 조항이 아니라 미국 헌법의 평등한 보호와 적법한 절차의 조항에서 찾아냈다."(171쪽)

대법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근거로 신의 의지를 자주 언급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이런 문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남성이나 여성 중에서 자신의 욕구가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미국 헌법의 상태와는 별개로, 우리가 종교의 자유를 윤리적 독립성의 일부로 대한다면, 진보주의적 태도가 필요하다.(172쪽)

그러니까 한 쪽은 타인의 생명 및 삶에 대해 함부로 간섭하고 침해하는 법안을 만들면서 종교의 자유를 들이밀고, 다른 한 쪽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저 '평등'과 '적법절차'라는, 다소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헌법 원리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종교와, 종교가 담지하는 진지하고 신실한 삶이라는 가치 자체를 장기적으로 훼손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로널드 드워킨의 유작이 된 것은, 계산한 것은 아니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우며 심지어 아름다운 결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평생토록 진보적(인 입장에 가까운 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미국의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법학자의 눈으로, 또 철학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해왔다. 단지 해석에서 머무는 것뿐만 아니라, 실용학문인 법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답게, 논의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어 의견을 개진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원제 ‘Religion Without God’을 <신이 사라진 세상>으로 옮긴 것은 좋은 판단인 것 같다. 신이 사라진 세상도 아름답고 윤리적일 것이라는 그의 낙관적 믿음이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5.

철학을 공부하고 석사 학위를 딴 후 군대에 갔다. 다행히도 카투사가 되었고, 책을 읽을 시간이 있었다. 특히 훈련을 나가면, 나는 통신병이었으므로, 대기 시간이 길었다. 경기도 북부의 어딘가에 있는 탁 트인 벌판에서, 사령부에 인공위성을 통해 인터넷을 연결해놓고, 나는 책을 읽었다. 그 중 하나가 드워킨의 《Life's Dominion》이었는데, 내가 한창 읽어내고 난 후에야 <생명의 지배영역>(박경신·김지미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펴냄)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판이 나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내가 읽었지만, 혹은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알아보지 못했던 대가의 문장과 논증을 접하고 새삼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드워킨은 생의 말년에 접어들어 더욱 치열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오바마의 건강보험 개혁안이 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한다는 논지가 등장했을 때, 그는 특히 《New York Review of Books》 지면을 통해 치열한 반박에 나섰다. 이른바 '오바마 케어'가 통과되고 작동하기 시작한 것에 그가 얼마만큼이라도 영향을 미쳤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실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싸우는 지식인의 한 표상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킨들에 넣어둔 그의 책을 언제 다 읽나 하고 있을 때쯤, 드워킨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설령 그가 더 오래 살았다 한들 내가 그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문득 아쉬웠고, 어떤 면에서는 슬프기도 했다.

법학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학문 중 하나이지만 동시에 그 근거가 대단히 부실한 학문이기도 하다. 최종적인 판단의 근거와 권위가, 한국 같은 성문법 국가의 경우 결국은 법조문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미법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법은 왜 법인가? 법이 왜 정당한가? 같은 질문에 대해 통상적인 법학의 범위 내에서는 답하기 어렵다. 법의 정당성과 지엄함은 법 바깥의 세계로부터 출발하고 있고, 종종 눈에 뻔히 보이는데, 그것을 끝내 모른척하고 오직 실정법에서 출발하는 법학만을 배우고 공부하는 것은 실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끔, 드워킨 같은 사람의 책을 읽는다. 철학적인 원칙과 논리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법한 논증을 만들고, 그것이 현실의 법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혹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지 유려하게 기술한다.

지적인 기반도 없고, 토대도 약하고, 심지어 판사마저도 걸핏하면 '국민의 법 감정'을 운운하며, 검찰은 국정원과 손을 잡고 무리한 기소를 벌이다가 그들 말에 따르면 '간첩임에 분명한' 유우성 씨를 놓아주는 일이 벌어지는 이 한국의 법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과 이상, 시궁창과 별이 빛나는 밤, 그런 차이가 또렷하다.

칸트의 잘 알려진 문구로 이 서평을 끝내도록 하자. “내 마음을 늘 새롭고 더 한층 감탄과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속에 있는 도덕률이다.” 드워킨과 나와 당신은, 그런 면에서 모두 같은 별과 같은 도덕률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명복과,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을 빌어본다.

2020-07-01

'불쌍한 괴물' 20대, 본인이 자초한 것? '박정희' 부모 세대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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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론의 다음 단계]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  2014.01.24. 18:52:39

1.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라고 누군가 당신에게 말을 꺼낸다고 쳐보자. 이럴 경우, 대부분 그 '친구 이야기'란 말하는 사람 본인의 사례일 가능성이 크다. 그거 실은 네 이야기 아니냐고 캐물었을 때, 절대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더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누구냐고, 네 친구 중에 내가 모르는 친구도 있냐고까지 묻기 시작하면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다. 우리는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약한 존재들이기에,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는 일마저도, 때로는 버거워한다.

〈애완의 시대〉(이승욱·김은산 지음,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이 책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와 함께 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거는 전혀 없었다. 당시 내가 두 책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제목과 저자 이름 정도였으니까. 혹은 간간히 트위터를 통해 들려오는 독자들의 단편적인 반응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튼 나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쓴 채(막상 책을 읽었더니 두 책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하면 곤란하다), 서평을 준비하기 위해 독서에 들어갔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는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갖추고 있으며, 오늘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자 시도한 좋은 책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과 단점 너머에서 이 책들은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라면서 말을 꺼내는 바로 그런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책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20대, 혹은 대학생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2.

〈애완의 시대〉의 저자인 이승옥과 김은산은 프롤로그에서 "'대물림'에 관해 말하고 싶었"(프롤로그, 〈애완의 시대〉)다고 자신들의 의도를 밝힌다. "한국의 부모가 한국의 아들딸에게 물려준 것, 그리고 또 그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바라보고자 했"(같은 곳)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세대를 호명하고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세대들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지어서 분석적으로 파헤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세대들 사이에서 대물림되어가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책 표지에 적혀있는 바와 같이, "길들여진 어른들의 나라"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인가? 대물림되어 내려온 무언가를 최종적으로 짊어지고 있을 젊은이들, 특히 대학교 졸업 및 취직을 앞두고 있거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대의 청년들을 저자들은 우선 살펴본다.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이른바 에코 세대(베이비부머의 자녀)"(16쪽, 〈애완의 시대〉)에게 청진기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들 중 특히 젊은 남성에게서 엿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삶의 중요한 가능성조차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후 끝내버린다는 것이다."(같은 곳)

한편 스스로를 '유리 멘탈'이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들이 있다.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분노와 죄책감에 휩싸여, 평생에 걸쳐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입장에만 서는 그 여성들 또한, "모두 베이비붐 세대인 부모 밑에서 자란, 서른 살에서 두어 살 많거나 적은, 이른바 에코 세대다."(36쪽) 이 '유리 멘탈'의 따님들에게, 어머니들은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차별과 고통을 안겨주고, 그리하여 대물림의 역사는 이어진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1장이 끝난 후,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 대리인, 애완견으로 남게 할 것인가.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나? 공동체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이것이 애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다. (71쪽)


3.

그러나 〈애완의 시대〉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 '에코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 않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386, 혹은 486을 중심에 놓고 한국 사회를 읽어내는 책도 아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애완의 시대〉에서 '에코 세대'를 논하는 1장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세 장은 모두 베이비부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대물림'을 받는 '에코 세대'보다는, '대물림'을 전해주는 위치가 된 베이비부머에게 훨씬 더 큰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분량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저자는 '에코 세대'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지도 않다. 물론 그들에게 만화 〈미생〉의 장그래를 본받아 자신만의 직감으로 세상과 맞서보라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결국 질문의 형식은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로 돌아온다.

요컨대 〈애완의 시대〉는 '에코 세대'와 베이비부머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대물림을 다루고 있지만, 그 문제 해결의 열쇠는 베이비부머가 쥐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인 셈이다. 혹은, 이 책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청년들을 향해 '애완견이여, 네 목줄을 끊어라!'고 외치는 '뜨거운' 책이 아닌 것이다.

대신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좁은 의미에서의 베이비부머를 벗어나, 박정희가 독재자로 돌변하여 경제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아버지' 행세를 했던 1970년대를 거쳐 간 거의 모든 기성세대를 자신의 독자로 소환한다. 물론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는 오늘날의 486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언급을 내놓지만, 자신이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의 폭을 함부로 좁히지는 않는다. 부모 세대, 50대와 60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부르며, 저자는 정신과 의사처럼 혹은 정신과 의사로서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베이비부머는 퇴행해버렸다고 말이다.

2012년의 베이비부머는 왜 퇴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어떤 '과잉'이, 아니 어떤 '결핍'이 그 시절로 퇴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시절에 넘치던 것은 '잘 살아보세'였고, 씨가 마른 것은 민주주의였다. 가장 센 놈이던 박정희, 그 센 놈이 다시 21세기의 기아를 경험하는 우리를 다시 잘살아볼 수 있게 해주리라고 믿었으리라. (178쪽, 같은 책)

이러한 '의학적' 진단은, 결국 2012년 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40대 후반을 포함한) 베이비부머가 주도한 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같은 곳)이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애완의 시대〉가 이른바 '20대 문제'를 다루는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어조를 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의 분석의 초점과 비난의 화살은 바로 그 20~30대의 부모 세대인 베이비부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든 비유를 끌어오자면, 〈애완의 시대〉는 '이건 내 친구가 겪었던 일인데'로 시작하여, '그러니까 나 이제 마음 똑바로 잡고 살아보려고'로 끝나는, 신세한탄이자 반성문인 셈이다.

4.

20대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실은 베이비부머의 '퇴행'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애완의 시대〉와 달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는 스스로가 20대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은 대다수 내 강의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특히 학생들의 공감을 많이 받았던 사안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의 연구가 아니라 '이십대들 스스로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7쪽)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20대는 그렇다면 (저자의 입을 빌어)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주제가 잘 요약되어 있는 문단을 인용해보자.

내가 이들에게서 발견한 또 다른 반쪽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더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괴물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이십대이다.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란 얘기다. (5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일 수 있다. 즉, '우리 20대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그 20대는 어떤 차별에 어떻게 찬성하고 있는가? 언론 서평 등을 통해 많이 인용되었던 에피소드가 책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한다.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이 계약된 2년을 채운 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였고 사측은 거절했다. 그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 사례를 들은 "경영학과 4학년 학생 K(당시 나이 27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했던"(17쪽) 바로 그 사례 말이다.

다른 학생들이 K를 '수구꼴통'으로 몰아갈까봐 걱정했지만, 도리어 술렁거리며 K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20대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미 이 책에도 나와 있다시피, 애초에 사측은 2년간의 비정규직 고용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20대가 '괴물'이 되었다고 경악하기에 앞서, '바보'가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이 순서에 부합하는 일 아닐까? 계약을 지키지 않는 회사를 탓하는 것이 먼저지, 그 계약을 이행하라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을 탓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논점을, 적어도 책의 지면 속에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그 강의실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인성의 문제라기보다 지능의 문제다. 한 사람의 교육자라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충격과 경악에 빠지더라도, 자신의 '멘탈'을 관리하며 학생들의 부족한 지식을 채워주는 것이 온당할 처사일 터이다.

그러나 오찬호는 당시의 토론 수업을 "노동자들이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혹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의 위반에 맞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벌이는 파업에 "도둑놈 심보"와 같은 단어가 붙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논쟁"(20쪽, 같은 책)이라고 요약한다. 그리하여 결국, 계약을 지키지 않는 쪽을 먼저 탓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 문제가, 정규직 자리 날로 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는 20대의 '인간성'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 토론 수업에서 20대가 '괴물'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싶다면 토론 진행자인 오찬호의 질문이 훨씬 더 정교해져야 한다. 가령 '그렇다면 회사는 비정규직을 뽑을 때에는 2년 근무 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것을 나중에 안 지켜도 되는 것인가?'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K라는 돌대가리 복학생이 '그렇다, 시험을 안 봤으면 무조건 비정규직이다'라고 우긴다고 해보자. 그 경우 교육자라면, '그렇다면 회사는 정규직 사원의 월급을 2년 후에 올려주겠다는 약속도 안 지킬 수 있는가?'라든가, '2년간 KTX 승무원으로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기간 동안 도서관에 앉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취업준비생 중, 누가 더 KTX 정규직 승무원으로서 일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등의 소크라테스적 문답을 통해 학생의 무지를 깨우쳐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종류의 질문에도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학생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시장주의자, 아니 '사장주의자'일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의 본성, 혹은 가치관의 문제이며,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로서 '괴물'이라고 불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그 어떤 정의의 원칙보다, 시험 봐서 점수 따고 그에 맞춰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존재일 테니 말이다.

5.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등장하는 사례가 부족해서, 혹은 그에 대표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례들을 저자가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책이다. 가령 오찬호는 고려대학교에 다니지만 자신의 학벌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학교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는 '승원이'라는 학생의 사례를 들며,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데 승원이의 이런 자제심에 감춰진 속내는 은근한 우월감이다. '너희들 안 부끄럽게 내가 대학 이름 안 말할게'라는. 그 배려의 기저에는 '무시'라는 감정이 당당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114쪽, 같은 책)

헌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가 공지영이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한 표현을 빌리자면, 80년대 학생들은 "연·고대라는 타이틀로 사람이 평가받는 것이 싫어서 그 뱃지를 한강물에 던져버리고자 했고" 지금은 이를 노골적으로 유지하려 한다."(150쪽, 같은 책) 80년대 대학생이 뱃지를 한강물에 던져버리는 그 자의식이야말로, "은근한 우월감" 뿐 아니라, 저자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연·고대생, 연·고대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보장되는 것이 워낙 많았"던, '실질적 우월감'에 바탕한 행동 아닐까?

앞서 우리가 검토해본, 어떤 실패한 토론 수업 이야기가 지나가고 나면, 요즘 대학생들의 학교 차별 문제가 주요 소재로 부상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을 봤고, 그렇게 얻은 성적표로 얻어낸 학교의 학벌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한 나머지, 그것으로 남을 평가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길 뿐 아니라, 마치 공작새가 깃털을 뽐내듯 '과잠'을 입고 돌아다니게 된다고 오찬호는 주장한다.

단체로 돈 내서 맞춘 학교 과 점퍼라면, 일종의 교복 역할을 해서, 소득이 낮은 학생일수록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저자가 '옛날의 학벌주의'와 '지금의 학벌주의'를 굳이 분류하여, 후자를 비판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전자에 막연한 긍정적 뉘앙스를 덧붙이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는 데 있다.

공지영 소설에 나오는 80년대 대학생과, 오찬호가 만나본 2000년대 대학생은, 모두 은근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오직 후자만을 비판한다. 요즘의 학벌주의는 "동문들끼리 끈끈한 정이 부활해서도, 구성원들끼리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도 아니다. 동문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과거의 '학벌' 행태와도 결이 완전히 다르다"(162쪽, 같은 책)고 그는 단언한다. "과거엔 학벌이란 말에 약간의 공동체적 측면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학력위계주의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167쪽)는 말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대학 정원도 적었고, 같은 과 학생이라면 모두 얼굴을 알고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좁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사이니만큼 당연히, 좋건 싫건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반면 지금의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한 학과 내에서도 몇 반 몇 조 같은 식으로 단위를 쪼개야 겨우 얼굴을 익힐 수 있을만한 숫자가 된다. 그나마도 한 두 해 지나면 전공이 결정되며 헤어질 운명이다. 학내 동아리 등은 모두 파탄이 났거나, '운동권 냄새'가 나서 선뜻 택하기 어렵다. '학내 사회'가 사라진 상태에서, 대학생들이 '대학의 이름'에 더욱 집착하는 것은, 어쨌건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모든 문제는 최근의 것이요, 과거에는 문제가 있었어도 이렇지 않았다는 선입견이 이 책을 지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입학한지 6년이 지났어도 "저 친구와는 수능점수 차이가 상당하다"(156쪽, 같은 책)는 식으로 말하는 '석준이'라는 학생의 사례를 들며 오찬호는 '괴물이 된 요즘 대학생'을 성토하지만, 입학한지 30년이 지났어도 학력고사 점수와 전국 석차를 외우고 있는 사례도 존재하는 것이다. 대학의 학벌주의가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1980년대, 서울대 외교학과 82학번 강철 김영환 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학력고사 점수 기억하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던 것이다. "340점 만점에 318점. 문제가 어렵게 나왔다. 문이과 합쳐서 전국 25등."([심층인터뷰]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신동아〉, 2012년 9월 25일)

6.

나는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모두, 20대 혹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등 젊은이들의 문제를 통해, 결국 저자 자신 혹은 그가 속한 세대의 문제를 실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 서평을 시작했다.

〈애완의 시대〉의 경우 그 점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베이비부머를 향해 저자들은 '정신 속의 아버지'인 박정희를 떠나보내라고, 자식뻘 되는 '에코 세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놓아주라고, 간곡한 어조로 호소한다.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다음 문단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약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혹자는 거슬러 거슬러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나 광복 전후의 혼란기 또는 남북 분단이나 6·25 전쟁을 그 시기로 거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 시기는 아마도 1970년대와 IMF 때일 것이다. (232쪽, 〈애완의 시대〉, 강조는 인용자)

1970년대의 경제성장에서 '산업역군'으로, 혹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자식들 낳고 어느 정도 키웠다 싶을 무렵 IMF를 맞은 후, 이후 20여 년간 급격히 '다시 가난'해져버린 한국 사회를 보고 '멘붕'하여 '퇴행'하는 베이비부머들에게, 〈애완의 시대〉의 저자는 '당신이야말로 오늘날의 문제를 바로잡을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실패를, 박정희가 갑자기 죽어버리며서 비판받지도 않고 성역에 올라버렸다는 그 사실을 비판하고 곱씹으며, IMF 이후 급격히 각박해진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저자들은 베이비부머를 향해 호소한다.

반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좀 더 깊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저자 오찬호는 자신이 '20대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는 것을, 사실상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20대 문제'로 어떻게든 못 박으려 한다. 이것은 다소 까다로운 논의가 될 것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사실 지방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문제 삼는 것은 쉽지 않다. "인서울 대학 학생과 지방대 학생 간에 역량 차이,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누구라도 되물을 듯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차별은 해서는 안 되지만 차이는 있다'는 식으로 대학교의 역량차를 인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어떤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오십대 경영자나 기업의 사십대 인사담당관은 대학서열과 업무 능력의 객관적 차이를 나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설명할지도 모른다. 물론 업무 능력에 한정된 것이지만, 어쨌든 학교별 차이에 대한 어떤 경험이 분명히 존재해서 (그것이 편견이든 아니든) 나름의 근거를 갖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직생활을 하는 보통의 삼사십대 직장인이라면 어떤 업무를 수행할 때 높은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많다는 것을 경험하고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 출신들을 낮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누군가의 경험들이 이십대에겐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전해진다. 쉽게 말해, 이십대들이 대학교의 위계화된 질서를 받아들이는 이유에는 어떤 특정한 자신만의 직접적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기성세대의 '살아보니까, 그렇더라!'는 식의 평가를 그저 수용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면, 이제 고작 고교를 졸업한 이십대 대학생들이 '별로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셈인데 말이다. (116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강조는 인용자)

'그럼 충분히 살아본 사람이 학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괜찮다는 말이냐'는 식으로 말꼬리를 잡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일부러 운동권에 투신하거나 하지 않았던 이상, '좋았던 시절'에 '인 서울' 졸업한 후 대기업의 관리직 등으로 입사한 사람이라면, 그가 '전문대 출신'을 만나서 뭘 해보고 어쩌고 했을 경험의 폭이 그렇게까지 넓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사람의 경험이라는 것을 살아온 시간과 삶의 범위를 곱해서 나오는 면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취업하기 전부터 치열하게 '스펙 다툼'을 하면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이력서에 넣기 위해 공모전도 넣고 하는 요즘 대학생들이야말로 더욱 경험의 폭이 넓을 수도 있다.

시대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리고 학벌 등 제반 사회 신분적 조건이 더 '좋아질'수록, 그보다 더 '나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날의 20대, "이제 고작 고교를 졸업한 이십대 대학생들"이 별로 경험한 게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찬호의 화법은, 아주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그저 '꼰대질'이라고 비난받지 않을 여지가 별로 없다.

단 한 번의 시험, 혹은 그 시험 이후 몇 차례의 시험을 더 거쳐, 만나는 사람들의 폭을 좁혀가며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문화적, 제도적 전통이다. 별로 겪어본 것도 없는, 고작 수능 한 번 봤을 뿐인 학생 여러분이 '지방대'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오찬호가 비난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학력을 통한 인간 차별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상식'임을 거꾸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우리'는, 이 책의 소재가 되는 20대라기보다는, 맞아 맞아 20대가 다 그렇지 뭐,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 책의 잠재 독자층 전부가 아닐까.

7.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모두, 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결국 외환위기 이후 아노미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준다. 역사의 큰 목표가 사라지고, 더 이상 기업과 국가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상태다.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 이후 그토록 많은 책이 나와서 20대에 대해 이런 저런 분석을 내놓고 해답을 제시하며 '힐링'까지 해준 것은 바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청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화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깔려있었을 수도 있겠다. 20대를 향해 '싸우라'고 외치는 과거의 386은 결국 자신이 싸우고 싶었던 것일 테며,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고 내뱉던 이는 본인이 깊은 절망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애완의 시대〉는 주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어낸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고난이 기성세대로부터 비롯하였다고, '대물림'되었다고 인정할만한 용기를, 이제서야 비로소 한국의 기성 세대들이 꺼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1970년대의 고통이 어떻게 IMF의 고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분석 등에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젊은이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 말을 하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라는 당연한 진실을 인정하는 책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30대가 된 오늘날까지 종종 '20대 논객'으로 불리는 내 입장에서는 특히 흡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모든 차별적 구조는 그 참여자를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상황'으로 몰아간다. 대한민국이 능력주의에 중독되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공정한 시험의 판타지에 기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그런 사회라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것은 20대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20대 또한 '순결한 피해자'가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화자가 얼마나 명료한 자기 인식을 보여주는가는 별도로 판단되어야 할 문제인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그 지점에서 실망스러운 면을 여러 차례 노출하고 있다.

20대가 됐건 30대가 됐건 386 세대가 됐건,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조롱하기도 하는 그런 책은, 앞으로도 많이 나와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 집단을 포함하고 있는 한국 사회 전체가 얼마나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가, 그 과정 또한 저자의 또렷한 자기 인식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가일 것이다.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함께 읽는 것은, 그런 면에서 더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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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북스에 실렸던 서평입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3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