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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4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어쩌다보니 2009년 10월에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을 찾았습니다. 당시 맥락은 이렇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미디어법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는데, 합법적인 투표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습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그 법을 헌재에 제소했는데 헌재는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법학을 배웠던 사람으로서 의문을 품었습니다. 절차적 흠결이 명백함에도 왜 이런 법을 합헌이라고 결정하는가? 국회의원을 국민이 뽑았다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소위 '민주적 정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헌재는 '헌법적 정당성'을 따져야 하는 기구 아닌가?

제가 여기서 제시한 논제는 이후, 2020년 말 '검찰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검찰농단 검찰장악 시도를 했던 문재인 정권에 의해 반복됩니다. 문재인 정권 및 그 지지자들은 '민주적 통제'라는 말로 자신들의 법치주의 파괴를 정당화합니다만, 과연 그게 '민주적'이냐, 이 질문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쓴 글을 찾아서 공개하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연찮게 발견한 것을 혼자 보고 묵히기 아까워 이곳에 올립니다.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노정태/칼럼니스트 | 승인 2009.10.31 12:07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345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2020-12-06

검찰 문제 단상

나는 대깨문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진보, 심지어 윤석열에게 원한 품은 몇몇 보수 분들까지도 '검찰주의자'라는 말을 욕처럼 쓰는 걸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검사가 검찰주의자여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어떤 법조인을 검사로 만드는 건 그가 검찰에 있기 때문이다. 검찰에 있다면 당연히 검찰로서의 직업 윤리, 가치, 금기, 도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 걸 늘 새기고 지키는 게 왜 욕먹을 일인가?

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 수사하고 잡아넣어서? 그래서 '검찰주의자'가 나쁜 건가? 검찰총장이 우리편은 봐주고 저쪽편은 조져야 하는데 안 그래서 속상하다 이건가?

한국에서 원리원칙적인 자유주의자 해먹기 정말 힘들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말이 도깨비방망이처럼 쓰이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단 민주주의는 다수가 소수를 쪽수로 찍어누르는 게 아니다. 소수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다수가 의사결정권의 많은 부분을 갖되 그럼에도 소수를 존중해야 민주주의다.

게다가 법이란 근본적으로 '다수의 지배'가 성립하지 않고, 성립해서도 안 되는 분야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범인이라고 몰아붙인다고 해서 결백한 사람이 범인이 되지는 않는다. 증거와 법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검사는 판사와 마찬가지로 사법 기관이다. 국가를 대신하여 범죄자를 소추하고 기소하여 감옥에 넣는 것이 검사의 일이다. 따라서 검사 역시 '다수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하는 직종이다. 온 국민이 사랑하고 죄 없다고 박박 우겨도, 증거가 있고 해당하는 형법 규정이 있다면, 검사는 최대의 형량을 구형해야 한다.

이 난장판의 큰 부분은 우리 사회의 법에 대한 교양 수준이 너무 낮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다수의 법조인들은 아예 그런 대중 교양 함양에 관심이 없다. 글쓰기에 관심이 있거나 약간의 재주가 있는 법조인들은 그럴싸한 포우즈 취하고 깨시민 상대로 인기 끌 궁리 뿐이다.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무식해서 망할 것이다. 기층 민중이 아니라, 상위 중산층 레벨에 속하는 사람들이 무식하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악다구니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무말이나 갖다붙이면서 더 무식해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망할 것이다.

2020-05-22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기에

일제시대에 대해 사람들이 잘 말하지 않는 진실 중 하나. 독립운동한다고 도둑질, 강도질하는 자들, 또 반대로 도둑질이나 강도질하다 붙잡혀놓고 독립운동 한다고 둘러대는 범죄자들이 참 많았다.

물론 그들은 독립운동가가 아니었고,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칼 든 강도가 독립운동가 행세를 하는 세상에서 평범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독립운동가를 구분하기도 어렵거니와 안다고 해도 옹호하기 싫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니 말이다.

제아무리 좋은 대의를 갖다 대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지켜야 할 법칙이 있다. 그 중 정말 어기면 안되는 것은 이미 다 형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횡령 같은 것이 그렇다. 설령 전쟁중이어도 전투의 일부로서 벌어지는 인명 손실이 아닌 살인은 처벌받는다. 그래야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정의연 앞에 판단 중지'를 외친 한 기자 칼럼을 본 후, 구역질나는 기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바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포진하여 진정한 진보 운동의 출현과 정착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칼럼을 쓰는 사람, 이런 글에 동의하는 사람, 당신들이 소위 '적폐'와 다를 게 무엇인가.

2018-01-14

'흙수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하지 말라?

대체 어떤 악마가 '흙수저들의 자수성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했는지 모르겠다. 현실은 그와 정 반대다. '흙수저'를 보호하려면 소위 '암호화폐' 거래를 규제해야 하며, 최대한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하고, 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돈은 액수가 같아도 가진 사람에 따라서 절대 같은 돈이 아니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쪼들린 적 없이 자란 청년이 친척들로부터 넉넉하게 받아온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만든 500만원을 생각해보자. 날려먹어도 큰 상관이 없는 돈이다. 잘 사는 부모들은 심지어 자녀들한테 '투자 경험'을 안겨준다며 일부러 과하게 용돈을 주기도 한다더라. 그런 돈은 아무리 유입되어도 큰 문제가 될 건 아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열풍에 귀가 팔랑거린 빈곤계층 청년이 월세방 보증금을 빼온 500만원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 돈이 사라지면 그의 월세방도 사라진다. 주거의 질이 급감하고 삶의 질이 곤두박질친다. 더 나쁜 경우는 없는 돈 끌어모아 '가즈아~'에 동참한 경우.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거나, 기타등등. (회사 공금을 끌어다가 비트코인에 넣었는데 값이 안 올라서 큰일이라는 인터넷 게시물 캡쳐를 본 적도 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기록해둘만한 사안이다.)

이게 결국 돈 놓고 돈 먹기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흙수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하우스 입장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 아예 부자들은 돈을 날려도 된다. 하지만 가난하면 애초에 그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이 정권은, 청와대는, 그리고 코인판이 계속 이렇게 규제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또 잔인하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영혼까지 끌어올려 코인판에 갖다 부은 청년들이 대체 어떤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지 걱정되지도 않나?

처음부터 이건 돈놀이판이었다. 그냥 웃기는 장난으로 취급되던 비트코인이 진지하게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랬다. 페이스북의 창업에 자신들의 지분이 있다고 주장하여 마크 주커버그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가 '제미니'(라틴어로 쌍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거래소를 만들고 거액을 투자하면서부터 엉터리 아나키즘적인 몽상은 어엿한 투기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흙수저도 윙클보스 형제처럼 '존버'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흙수저'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탕 크게 먹어서 인생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과 완전히 반대되는 짓이다.

대체 대한민국의 국격이 어디까지 후퇴하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무슨 정당한 논의인 양 언론에 오르내리고 정치인이 왈가왈부하기에 이르렀는가? 자기 돈 갖다 박아서 한탕 하건 쪽박 차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게 마치 정당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인 양 포장하지 말라는 소리다.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마저 모두 망가져가고 있는 듯하다.

2017-11-10

"층간 내리사랑"과 국가의 역할

KBS 1FM 라디오를 듣던 중 공익광고가 흘러나왔다. 자기 집에서 살살 걸어다니고, 악기 연습을 자제하는 등 조심스럽게 생활하는 사례들을 죽 나열한 것이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이어지는 멘트.

"위층은 아래층을, 아래층은 그 아래층을 먼저 생각하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적어두었다. 위 인용문은 공영방송 KBS 라디오 공익광고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친 것이다. 층간소음이 심하니 이웃간에 서로 '배려'해야 한다며,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하자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은 광고를 하고 있다.

이 광고는 대한민국에서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실패가 어떻게 시민사회의 짐으로 전가되고 있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은연중에 강조하거나 미화한다.

아파트 층간소음은 구조적 문제다. 사회경제적 구조 이전에 건물의 구조상 발생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 중 대다수는 벽식 구조로 지어져 있다. 별도의 기둥 없이 아파트의 벽 자체가 중량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벽식 건물은 공사 속도를 내기 좋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인근의 진동이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층간소음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아파트가 애초부터 층간소음이 울려펴지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벽식 구조에서는 바닥 울림이 고스란히 벽을 타고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맹점이 있다. 쉽게 말해 진동을 일으킨 바닥과의 접점이 모든 벽으로 넓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달이 잘 된다. 특히 벽식 구조라면 7층의 쿵쿵대는 소리가 5층·4층까지는 물론, 거꾸로 위로 8층으로도 더 잘 전해진다. 반면 기둥식은 벽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핵심은 기둥과 보이다. 바닥의 충격음, 진동이 보와 기둥으로 분산된다. 바닥 충격이 기둥을 타고 전달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철승 연구원은 “네모난 상자를 두드리면 벽이 공진현상을 일으켜 진동이 증폭된다. 벽식 구조 아파트가 이런 형태다”라며 “구조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닥 두께나 차음재에 치중해 왔다”고 지적했다.

전병역, "‘구멍뚫린’ 층간소음, 대안은 기둥식인데…", 경향신문, 2016년 8월 20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01832011&code=940100

기둥식 건물은 벽식 건물에 비해 공사비가 많이 든다. 같은 높이의 건물을 지을 경우, 벽식으로 지어야 더 많은 세대를 우겨넣을 수 있다. 기둥식으로 지으면 층고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대별로 부담해야 할 돈 또한 늘어난다. 최종적으로 그 비용은 소비자인 주민이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답일까? 아이가 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자기 집에서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조심조심 까치발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 정상일까? 서울 시내 아파트의 경우 수억원씩 하는데, 그 돈을 들여가며 자기 집에서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해야 하나?

이것은 전형적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문제다.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분명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을만큼 확실한 기준을 만들어 건설사를 규제하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하면 모두가 편해지지만, 만들고 정착시키는 비용을 아무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역할을 하라고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으로 군대와 경찰과 행정 조직을 꾸려나간다. 공익을 위해 정부가 설정한 넓은 의미에서의 규제 외의 영역에서 국민은 자유롭게 거래하고, 영업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

KBS 1FM에서 흘러나오는 공익광고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따위 공익광고를 통해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오늘날 한국인의 거주 형태 중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의 건설에 있어서, 대체 어떤 구조적 하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층간소음에 의해 고통받는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을 규제함으로써 개인들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너희들끼리 친절하고 행복하게 지내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와중에 동원되는 수사법이 가족주의적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집 사는 사람은 아랫집 사는 사람의 손윗사람이 아니다.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꼭데기층 사는 사람은 단군할아버지라도 되는가?

이런 식의 '개혁'은 폼이 나지 않는다. 건설사 뿐 아니라 자신들이 내야 할 분양가가 높아질 우려를 느끼는 아파트 소비자들 역시 반발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재벌 회장 몇 명 불러놓고 꾸짖는 모습 보여주고, 감옥 보내고, "재벌 혼내느라 늦었다"고 공정위 위원장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은 '내리사랑'도 '치사랑'도 아니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수평적 관계다. 그건 국민들끼리 알아서 할테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엄격한 규제다. 물론 멋지지도 않고 폼도 나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

2017-11-03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지방분권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년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권한을 어떻게 지방에 넘겨줄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한 중 일부는 중앙정부가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덜컥 지방분권개헌을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적 행보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지역 사회가 위축되고 소멸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체 없는 이상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예산이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추진하는 백년지대계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다. 가령 탈원전 정책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놓고 본다면 탈원전이란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우리는 사실상의 섬나라에 살고 있으며, 석유도 LNG 가스도 나오지 않는다. 바람의 질도 형편없고 국토의 70%가 산이다.

국가 단위의 에너지 정책을 놓고 볼 때 최선의 선택지는 원전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여 더 안전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반면 개별적인 지자체의 시선에서 보자면 탈원전이 좋다. 위험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다들 싫어하는 기피시설인 원전은 어딘가로 쫓아내버리고, 우리 동네는 소위 '꿀 빠는 지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최선일테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은 바로 저런 식의 지역이기주의를 적극 부추기고 그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원자력만큼 안전한 전력 공급원이 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는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불편한 짐을 떠안고 있다고 느끼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설득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개 시장이나 도지사의 눈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라보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전공대의 건설과 유치에 대한 논의도 그런 식이다. 과연 지금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이 대학을 추가로 건설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의 숫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고, 멀쩡히 있는 대학들도 정원을 줄이는 이 판국에 말이다. 정상적인 대통령의 시각으로, 나라 전체의 살림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에서라면, 굳이 지금 대학을 더 지을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일개 지자체장의 눈으로 보자면 무슨 상관이랴? 일단 우리 지역에 번듯한 건물 가진 대학 하나 더 들어오는 게 급선무다.

정작 지자체의 운영을 보면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풍기인삼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10월 20일, 2.5미터 크기의 인삼 조형물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이런 꼴이었다.

축제의 주제를 나타내는 조형물로 축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남원천에 세워졌다. 문제는 인삼 조형물 중간 부분에 붉은 색을 띤 남자의 성기 모형이 부착돼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터장치를 해 성기 모형이 아래위로 계속 움직인다. 인삼 조형물에는 '인삼의 힘!'이라고 적힌 어깨띠가 걸쳐져 있다. 풍기인삼이 정력에 좋다는 뜻을 담기 위해 조직위가 설치했다. (이용호, "풍기인삼축제? 풍기문란축제!", 한국일보, 2017년 10월 23일.)

지자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돈을 펑펑 쓰고 있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고 기네스북에 등재하기 위해 1억1천6백만원을 소진했다. 울산시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에는 9천만원, 충북 영동군의 초대형 북에는 2억3천만원이 들었다. 지자체장이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고 했거나, 알량한 '관광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물건들일 것이다. (참고: 윤영현, "'세계 최대'가 뭐길래...지자체 '억' 단위 세금 펑펑", SBS, 2017년 10월 31일.)

이건 반드시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강남스타일 말춤 조형물'이 있다. 2016년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풍기인삼처럼 문란하지는 않지만 제작비는 총 4억원 가량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선웅 강남구의회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시 싸이측에서 동상 제작에 부정적이어서 완전한 말춤 동상을 제작할 수 없었다"며 "정상적이면 포기해야 되는데 기어코 손목이라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라고 조형물 관련 뒷얘기를 전했다"(김남중, "싸이, 코엑스 '강남스타일' 조형물에 "과하다"", 국민일보, 2017년 7월 24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유보될 수 없는 자유의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자의적 판단이나 폭력에 우리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의 확충은 지자체에 수많은 예산을 퍼주고 그것을 낭비하건 말건 수수방관하며, 큰 필요성이 있건 없건 아무 축제나 벌이고 대학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국가 전체의 역량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자유와 풍요는 훼손된다. 지방자치의 이상 하에 우리 개인들의 삶이 침해당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치경찰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위 '섬마을 주민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인 교사는 낙도의 경찰이 아니라, 그 경찰을 관할하는 목포의 지서까지 찾아가 신고를 했다. 왜일까? '섬마을 공동체'와 경찰은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는 이웃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신고해봐야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복을 당할 우려가 크다는 판단이었다. 공권력은 주민과 친근해야 하지만, 유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자치경찰제가 과연 지역 토호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 내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모든 지방자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에 대응해 훨씬 밀도 높고 '스마트'한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재정적으로 자립도 어렵고 산업 기반도 허물어진 가운데, 지자체들이 궁여지책으로 조잡하고 흉측한 조형물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대학 유치에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제동을 걸기는커녕 도리어 지방분권개헌을 덜컥 약속해버리는 오늘날의 모습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지자체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예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진다. 지자체는 내부의 범죄나 소요를 통제하지 못하면 군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 지자체는 남자 성기가 껄떡거리는 인삼 조형물 수천 개를 만들고 파산해도 중앙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반면 중앙정부가 재정적으로 파산하면 그 여파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권한과 책임의 범주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지자체적 시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지자체는 내후년의 산업 동향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지자체에게 돌아갈 몫을 어떻게 우리 지자체가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하지만 국가는 다르다. 국가의 경영은 미래를 바라보며 이루어져야 하고, 때로는 국민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도 추진하며 동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요컨대, 대승적 관점을 견지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주민 행복만을 위해 오직 그것만을 원칙으로 삼아도 큰 탈이 없는 지자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이게 나라냐?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많이 들려왔던 구호다. 당시 시위의 참여자들은 그 시위를 통해 '나라다운 나라'가 이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현재의 집권 세력은 '나라다운 나라'를 '촛불특별시'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대한민국은 국가다. 지자체의 연맹이 아니다. 청와대가 지자체의 눈으로 국가를 바라보지 말고, 국가의 눈으로 지자체를 바라보면서, 온 국민을 위한 미래의 계획을 수립할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2017-08-10

여성의 폭력과 법 앞의 평등

나의 검열삭제 경험담

2016년 10월 11일의 일이다. 경향신문 오피니언팀에서 연락이 왔다. 당시 오피니언팀을 담당하던 부장님 전화였다. 언론중재위원회 시정권고소위원회에서 8월 1일자 칼럼 "'물뽕'과 부동액"에 대해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시정 권고 조치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적된 문단을 삭제해야 할 상황이라고 말이다.

2008년 무렵부터 신문 지면에 글을 써온 사람으로서 언론중재위원회의 연락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기도 했거니와, 이미 작성한지 두 달이 넘은 글을 두고 무슨 소리냐 싶었다. 나에게 거부권이 없는 상황이므로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검열삭제'를 경험한 것이다. 성행위를 뜻하는 은어로서의 검열삭제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생각과 말을 제약당하는 검열삭제 말이다.

그렇게 잘려나간 문단은 다음과 같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경향신문, 2016년 7월 3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312051005&code=990100#csidxbdbdec283bdaff7aafb36493d4a385b 삭제되지 않은 원문은 내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basil83.blogspot.kr/2016/08/blog-post_4.html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저 고급 정보를 어떻게 알았을까? 자동차 부동액은 무색무취하기 때문에 타인을 독살하기에 아주 좋다는 정보는 SBS의 인기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한편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서 저런 논의가 오간다는 사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가령 이런 언론 보도를 통해서 말이다.

‘부동액 커피’ 사건은 지난 6월 워마드에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용어)을 재기시켜도(죽게 해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이거 먹여라’는 글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이 글에는 1일 1회 5ml씩 희석해서 먹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명시돼있으며 부동액은 마트에서 구매할 때 현금 결제를 해야 기록이 남지 않는다는 당부도 담겨 있다.

전종선, “남성에 부동액 타 먹였다” 워마드 경찰 수사 착수에 네티즌 “암덩이들 도려내야”, 서울경제, 2016년 7월 28일. http://www.sedaily.com/NewsView/1KZ1J58KL3

이제 두 문단을 비교해보자. 내 칼럼에 실렸다가 언론중재위원회의 권고를 받고 잘려나간 문단과, 아직도 인터넷을 통해 잘 남아있는 위 기사의 문단에서, 정보의 차이가 있는가? 1일 1회 5㎖라는 구체적인 용량까지 동일하다. 왜냐하면 나 역시 당시 쏟아져나온 수많은 언론 보도를 보고 저 칼럼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언론중재위원회는 내 칼럼을 "모방 범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어 사회적 법익을 침해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똑같은 내용이 담긴 다른 기사들에 대해서는 시정 권고 조치를 내리지 않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 위 기사를 포함해 당시 워마드의 게시물을 다루었던 대부분의 언론 보도는 워마드를 '꾸짖는' 것에만 중점을 두고 있었던 반면, 내 입장은 달랐기 때문이다. 삭제된 문단을 포함한 전문을 다시 올려보도록 하겠다. 검열삭제된 문단은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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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시선]‘물뽕’과 부동액

2015년 11월 중순, 서울 성동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집단강간 모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한 남자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소라넷에 올렸다. 술 혹은 약물에 의해 정신을 잃고 벌거벗은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작성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라를 잘 안 해서 랜덤 채팅 양톡으로 여태 3분 정도 와서 질사하고 가셨는데 ㅋㅋ 오늘은 소라에서 한번 해볼까요?”

‘골뱅이’란 술이나 약물 등에 의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여성을 상대로 한 강간을 뜻하는 은어다. ‘왕십리 골뱅이’의 작성자는 첫 게시물을 올리고 11분 후 두 번째 글을 업데이트했다. 역시 의식을 잃은 듯 보이는 여성의 나체 사진이 붙어 있었다. 게시물 아래에는 ‘줄 서봅니다’라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중이었다.

한편 2016년 6월, 여성 커뮤니티 워마드에 묘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정보] 진짜 한남 재기시켜도 죄책감 안 느낄 수 있는 년들은 이거 먹여라”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게시물에는, “자동차 부동액은 물이랑 에틸렌글리콜 + 색소가 주성분”이라며 “용법은 1일 1회 5㎖”라고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 내용에는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지만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과는 다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거나 하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다. 한남(한국 남자)을 재기(사망)시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라는 전제가 달린 가상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그 흔한 ‘인증샷’도 없이 인터넷에서 그냥 하는 소리, 시쳇말로 ‘드립’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부동액 섞인 커피를 마시고 누군가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원인이 밝혀지면서 실제 범행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 현실적 범죄의 정황이 없지만 경찰은 일단 수사를 개시했다. 허위 게시물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공권력은 작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면 2015년 11월, 인터넷 성범죄 사이트 소라넷을 모니터링하던 활동가가 “서울 왕십리 골뱅이 여친”을 신고했을 때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페미니즘 활동가 단체인 ‘(RPO) 리벤지 포르노 아웃’팀이 공개한 당시 통화 내용을 들어보면, 담당자는 “요거를 전체적인 댓글이나 글 게시된 걸 분석해 보니까 범죄혐의는 전혀 없”다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장난한 것 같애요. 이 소라넷 사이트 이용하는 애들이~ 반응 보려고~.”

설령 농담이라 해도 사람에게 독극물을 먹이자고 모의하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전복적 발화로서 긍정적 기능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나는 그런 ‘미러링’에는 반대한다. 하지만 사람을 기절시키는 약물을 누군가 먹였다는 제보를 받은 공권력이 그것을 장난으로 간주해버리는 것만큼 나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자는 발화자들의 개인적 존엄 및 품위의 문제인 반면, 후자는 우리 사회의 공권력이 얼마나 공정하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두 사건 모두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넷 게시물을 두고 신고가 들어갔다. 그런데 왜 여자가 남자에게 부동액을 먹였다는 신고와, 남자가 여자에게 ‘물뽕’을 먹였다는 신고에 대해, 경찰의 반응이 이토록 다른 것인가? 전자는 살인이지만 후자는 성범죄이므로 범죄의 무게가 달라서라면, 경찰은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저년 배를 칼로 쑤시겠다, 목을 졸라 죽이고 싶다’는 식의 살해 협박에 대해서도 일일이 수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인터넷에서는 “아무리 꼬셔도 안 넘어” 오는 그녀를 함락시키라는 광고 문구를 달고 버젓이 데이트 강간 약물이 유통되고 있다.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때리고 죽이고 강간하겠다고 하면 ‘농담’이라고 대충 넘어가면서, 여자가 남자를 대상으로 비슷한 말을 하면 곧장 공권력이 투입되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물뽕’과 부동액이 아니라,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근본적인 가치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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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를 죽이러 가겠다'는 경범죄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2017년 8월 현재까지도 법 앞의 평등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8월 9일 새벽, 아프리카 BJ 김윤태는 생방송을 진행했다. 유튜브 스트리머 갓건배의 집 주소를 알았다며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한 것이다. 경기도 부천, 서울 성북구 둘 중 하나라며 차를 타고 나가던 그의 모습은 실시간으로 7000여 명에게 중계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경찰에 신고를 하여,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울 성북경찰서에만 이날 새벽 1시30분께부터 총 3차례 신고가 들어왔다"고 한다.

해당 BJ는 스트리밍을 하면서 "그 주소에 갓건배가 살지 않아도 여성이라면 목졸라 죽이겠다"는 발언까지 했다는 것이 방송을 본 이들의 증언이다(링크). 특정한 피해자의 신원을 확보하지 못하더라도, 분풀이 삼아 여성을 살해하겠다는 의사를 공공연히 표명하였고, 어떤 여성을 공격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여 현장으로 향하던 중이다.

과연 이 사람에게 형법상 살인예비죄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가? 관련된 대법원 판례(2009도7150)는 다음과 같다.

형법 제255조, 제250조의 살인예비죄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형법 제255조에서 명문으로 요구하는 살인죄를 범할 목적 외에도 살인의 준비에 관한 고의가 있어야 하며, 나아가 실행의 착수까지에는 이르지 아니하는 살인죄의 실현을 위한 준비행위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준비행위는 물적인 것에 한정되지 아니하며 특별한 정형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단순히 범행의 의사 또는 계획만으로는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없고 객관적으로 보아서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

김윤태가 흉기를 준비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집에 갓건배가 살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를 목졸라 죽이겠다'고 발언했다. 흉기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갓건배를 살해하겠다는 의도가 없었고, 살인의 준비 행위가 없었다고, 확실히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방송을 보는 이들로부터 제보를 받아 갓건배가 살고 있을법한 위치를 좁히고 실제로 차를 타고 나갔다는 사실은 "살인죄의 실현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외적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가?

경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김윤태는 "한 파출소로 임의동행돼 아침까지 조사를 받았고, 경범죄처벌법상 '불안감 조성' 행위로 범칙금 5만원 통고처분을 받고 귀가했다." 경찰은 이 사건이 "형사과로 넘기기에는 사안이 경미하다고 판단했다"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주의시킨 후 귀가시켰다"고 설명했다."(이효석, ""죽이러 간다" BJ 생방송에 경찰 수사 소동…BJ에 범칙금 5만원 ", 연합뉴스, 2017년 8월 10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8/10/0200000000AKR20170810151500004.HTML)

설령 백번 양보해서 김윤태의 방송 행위가 살인예비죄를 구성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고스란히 남는다. 이미 지난달 벌어진 '왁싱샵 살인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소위 '1인 미디어'가 생산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폭력은 쉽사리 전염되기 때문이다. 김윤태의 방송을 보고 '나도 갓건배 죽이러 가겠다'고 나설 사람이 과연 단 한 명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작년 8월에 쓴 칼럼이 10월에 검열삭제된 사건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래서이다. 한국 사회와 그 사회의 법 체계는, 여성의 일탈에 유독 민감하고, 더 강한 처벌의 잣대를 들이댄다. 실제로 처벌이 불가능하다 싶어보여도 일단 경찰 수사를 해서 겁을 준다. 반대로 남성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삼아 폭력을 휘두르면 가장 엄격한 죄형법정주의와 절차중심주의를 통해 최대한 그 벌을 가볍게 한다.


여성들이 법 앞의 평등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앞서 내 칼럼의 소재가 되었던 워마드 부동액 사건을 되짚어보자. 부동액을 먹고 사람이 죽는 일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었다면 경찰이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경찰은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대략 알면서도 겁주기용으로 워마드 수사에 들어갔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반면 인터넷을 통해 남자들이 '인증'하려고, '리플' 받고 관심 끌려고 범죄 모의를 하고 그것을 공개하는 일은 심심찮게 벌어진다. 가령 지난 2월, 일간베스트(일베)에 자신을 39세 일용직 노동자라고 밝힌 누군가가 선화예고 학생을 납치해 성폭행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해당 학교는 2월 5일까지 임시로 학교 시설을 폐쇄했고, 서울 광진경찰서는 학교 인근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며 게시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했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방송을 하는 BJ의 행동이 범행을 불러온 사례가 최근에 또 있었다. 7월 초 한 남성이 왁싱샵에서 홀로 일하던 여성을 찾아가 살해하고 금품을 챙기며 강간까지 시도했던 사례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해자는 한 유명 BJ가 피해자의 가게에서 브라질리언 왁싱 시술을 받는 것을 소재로 한 자극적인 영상물을 보고 범행 정보를 수집했다. 그 결과 서울 역삼동 주택가에서 대낮에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여성이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당하는 폭력이 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이 남성의 폭력을 모방하여, 남자들에게 뭐가 폭력인지 가르쳐주기 위한 어떤 퍼포먼스가 있다. 그런데 법은 양자를 똑같이 '폭력' 취급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서서 법의 눈이 둔감하다고, 남성적 편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 언론중재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당한다. 그것이 내가 작년 10월에 겪었던 일이다.

2016년 강남역에서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졌지만, 2017년에는 역삼역 인근에서 혼자 일하는 여성이 살해당한다. 인터넷 방송을 하는 이들이 한 여성을 붙잡아 죽이겠다고 날뛰어도 고작 범칙금 5만원 처분을 받는다. 법 앞의 평등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2017-03-16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현재 오가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선거를 이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어차피 내각제를 해도 총리 해먹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체 왜 총선과 대선의 날짜를 맞추려 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영어로는 check and balace.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사법부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서로 분열해야 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말은 바로 저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자는 소리다. 4년에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도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그렇다면 행정부, 다시 말해 대통령의 전횡을 야당이 견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처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언론에 의해 발각된다 한들,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특검법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총선이 곧 다음 대선이므로 다음 총선/대선까지 야당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한다. 대체 이게 민주주의인가? 뭐 하자는 소리인가?

내각책임제를 하고 싶다면 대놓고 내각책임제를 하자고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내각제의 경우에는 '내각총사퇴'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고, 총선을 다시 치를 여지가 늘 열려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합의한 그 개헌은 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낳을 뿐이다.

애초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끔찍한 발상을 정치권에 처음 던진 인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체 이유와 목적을 알기 어려운 숱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모두 실패했는데,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개헌이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요컨대 그것은 노무현도 실패했던 일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독재국가'로의 지름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2010-03-16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미디어스에 올라온 제 칼럼입니다. 지난주 목요일에 업데이트되었는데, 정신이 없어서 블로그에 게시하지 못했네요. 전문을 올려둡니다.




[미디어스] 피의자 김길태와 페이스북 살인사건

지난해 10월, 영국. 한 소녀가 실종됐다.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고 하루종일 채팅하고 핸드폰으로 친구들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 17세의 소녀 애쉴리 미쉘 홀(Ashleigh Michelle Hall)은 한창 열을 올리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소년과 데이트 약속을 잡은 차였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그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고,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오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1996년 두 명의 성매매 여성을 흉기로 위협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은 피터 채프먼(Peter Chapman)은 2001년 가석방되었다. 그는 범행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페이스북에 접속했고, 어떤 잘생긴 젊은 소년의 사진을 통해 다른 사람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피터 카트라이트(Peter Cartwright)라는 가명으로 접속한 그는 여러 차례 채팅을 통해 홀 양의 환심을 샀고, 결국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33세지만 그보다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자신의 추한 외모를 역으로 이용해, 피터의 아버지 행세를 함으로써 피해자를 안심시켜 차에 타도록 했다. 홀 양은 차에 탄 후 곧바로 습격당하고 성폭행당한 후 살해되었다.

한편 2010년 2월 24일 한국, 밤 9시 무렵.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주택에서 이모(13)양이 실종되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을 발견한 경찰은 비공개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사흘 후 피해자의 집에 남아있던 족적을 토대로 김길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공개 수배에 나섰다. 김길태는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결백을 주장하였고 그 사실은 뒤늦게 언론에 의해 보도되었다. 3월 3일, 경찰은 김길태로 추정되는 사람을 발견하고 추적하였지만 체포에 실패하였고, 결국 3월 6일 사건 현장 인근 주택의 물탱크에서 이모 양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사건 발생 이후 10일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때부터 사건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비상근무에 돌입했고 피의자로 김길태를 특정했다. 결국 3월 10일, 시신 발견 후 5일만에 김길태는 부산 덕포시장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범행 동기, 과정, 이후 도주 경로 등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3월 11일 새벽 3시 현재까지 김길태는 범행을 부인하고 있다. 범인을 살해하고 은신하고 검거되기까지, 그의 동선은 현장에서 반경 300미터를 넘어서지 않았다.

전자의 사건은 후자의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국내 언론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사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단순한 형사사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범인 피터 채프먼에 대한 수사가 끝나고 그의 유죄가 확정된 후, 영국 경찰은 성범죄자에 대한 온라인 감시를 강화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영국 법정은 범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고, 사건을 담당한 피터 폭스(Peter Fox)판사는 범인이 “젊은 여성들에게 큰 위협이 되는 존재이며, 가석방될 것을 예견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앨런 존슨(Alan Johnson) 영국 내무부 장관은 “우리는 이 사건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며 “우리는 성범죄자들이 온라인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B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말했다.

바로 그 내용이 연합뉴스에 의해 인용(기사보기)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정을 내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이 코너, 『우물 밖 개구리』의 첫 꼭지에서 바로 이 사건을 다루겠다고. 이 인용은 영국에서 사건이 벌어진 맥락과 거의 무관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일종의 ‘사건의 약탈’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 내막을 들춰보도록 하자.

홀 사건의 범인 채프먼은 피해자를 차에 태워 성폭행하고 살해한 후 곧장 유기했다. 그는 범행을 저지른 후 하루도 되지 않아 검거됐다. 피의자의 시신을 버린 후 도주하다가 교통경찰에게 붙잡혔는데, 그 교통경찰은 채프먼이 제대로 면허 등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또한 채프먼의 언행 등에서 수상한 점을 발견한 경찰은 곧장 그를 경찰서로 연행하여 심문한 끝에, 바로 당일에 범인의 인도를 받아 피해자 홀 양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은 매우 짧고 간결했다. 경찰은 범인이 사건을 저지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사건을 수사했고 정의의 실현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딸을 잃은 분노에 ‘범인을 죽여야 한다. 사형제를 부활시켜라’고 외치던 홀 양의 어머니도 차츰 평정을 되찾았다. 채프먼에게 종신형이 선고되던 날 그는 ‘저런 사람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다. 피해자의 가족,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도 결국은 사형제가 아닌 종신형의 손을 들어주었다.

한국 언론에서 인용된 것처럼, BBC와의 인터뷰에서 앨런 존슨 내무부 장관은 성범죄자의 온라인 활동을 추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민주당의 쉐도우 캐비넷 중 한 사람인 크리스 헌(Chris Huhne)은 성범죄자 등록•관리에 인터넷 사용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우리는 미국에서 일반화된 것처럼 성범죄자들의 IP나 이메일 주소까지 등록할 것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한 정책은 경찰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검열하도록 할 것”이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정치권 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극적이게도, 혹은 너무도 당연하게도, 한국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다르다. 경찰은 사건이 벌어진지 10여 일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이모 양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이 발견된 위치와 범인이 거주하고 있던 곳이 모두 한 동네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국적으로 수배망을 넓히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사후적’으로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의자 김길태 씨가 진범이라는 것은 법원에 의해 확정된 사실이 아님에도, 경찰과 언론은 이미 그를 진짜 범인으로 가정한 채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정작 그 과정에서 완전히 어긋나버린 경찰의 초동수사 과정에 대한 책임은 사라져버렸다.

정치권과 경찰의 향후 대책 역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현재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전자발찌의 ‘소급 입법’만이 해답인 양 목소리를 드높이고 있다. 전자발찌 착용이 시행되기 전에 석방된 성범죄자들에게도 그것을 소급해야 한다는 것을 ‘해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성범죄 발생에 대한 사전적 예방은 매우 중요하고,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이 사건이 이렇게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았던 것의 상당부분은 경찰의 책임이다. 그 지점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채 전자발찌에만 매몰된, 그것도 여야를 막론하고 ‘의견 일치’를 보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차라리 공포스럽다.

에밀 뒤르켐은 범죄를 사회에 발생하는 질병과 같은 것으로 파악했다. 예방할 수는 있으되 온전히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모 양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깊은 애도와는 별개로, 그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올바른 사회적 에너지로 승화시킬지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전자발찌, 전자발찌, 전자발찌! 이것은 결코 답이 아니다.

2009-10-31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 2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미디어행동, 야당 등은 헌재 판결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곽상아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