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9

믿어라, MBTI가 아니라 너 자신을

검색창에 '심리테스트'라고 입력하면 수없이 많은 결과가 쏟아진다. 대부분 간단한 퀴즈와 오늘의 운세 같은 내용을 조합해놓은 심심풀이용 아이템이다. 하지만 종종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근본적인 고민에 답을 주겠노라는 것들도 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MBTI라는 약칭으로 더 잘 알려진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다.

독자들 중 상당수는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그 검사를 해보았을 것이다. INTP니 ENFJ니, 또는 논리적인 사색가니, 모험을 즐기는 사업가니 하는 결과를 내놓는 바로 그것 말이다. 그건 단순한 인터넷 퀴즈가 아니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 <Vox>의 보도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매년 200만명 가량이 회사 인사과, 대학, 정부 기관 등을 통해 MBTI 검사를 받고 있다. 테스트의 저작권자인 CPP사는 매년 그 2천만 달러 이상의 검사 비용을 벌어들인다. 말하자면 거대한 '심리테스트 산업'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대체 왜 사람들은 이렇게 심리테스트를 좋아하는 걸까? 곰곰히 따져보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심리테스트를 풀고 있을 때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한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고민이다. 하지만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은 몹시 피곤한 고역이다. 비싼 돈을 주고 예약을 해야 누울 수 있는 심리상담사의 안락의자에서나 털어놓을 수 있다. 나 혼자만 관심 있을 이야기이니 말이다.

그러니 클릭 몇 번으로 '나'의 마음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는 말에 우리는 쉽게 유혹을 느낀다. 그 결과를 SNS에 공유하며 즐거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엇비슷한 심리테스트를 찾아 클릭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원한다면 MBTI를 포함해 거의 모든 심리테스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융의 분석심리학과 신화론의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 구스타프 융은 그의 스승인 프로이트처럼 정신의학자였다. 히스테리나 발작 등 병적 현상의 원인이 정신적인 것에 있을 수 있다는 발상 하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적으로 억눌린 성적 억압을 해소함으로써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융은 사람이 속한 문화 내의 집단무의식이 존재한다는 발상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집단무의식은 문화권 내에서 일종의 '원형'을 이루며, 개인은 그 '원형'을 받아들이고 배척하는 등 상호작용 속에 성장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다수의 심리테스트가 바로 이 논의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MBTI가 대표적이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내향적인지 외향적인지 나눈 후, 심리적 기능에 따라 감각과 직관, 사고와 감정으로 나누어 16개의 성격 유형을 도출하는 논의는 융의 1921년작 <심리 유형>에 그 근거를 둔다. 이렇게 자아의 유형을 확인하면 본인의 장점과 단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이 죽기 전부터 심리학의 중심은 실험과 통계로 이루어진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융이 남긴 집단무의식과 원형이라는 개념은 신화학, 민속학, 종교학 등에 큰 영감을 주었다. 특히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그랬다. 어린 시절 접한 미 대륙 원주민의 신화에 감명받았던 그는 성인이 된 후 알게 된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캠벨에 따르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신화는 같은 구조를 반복한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위기에 빠진 영웅이 통과의례를 거치며 자아를 되찾고 한 단계 나은 존재로 성장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통해 주장한 이 내용은 시나리오 작가들에 의해 헐리우드 영화의 표준 서사 구조로 자리잡았다. 캠벨이 <스타워즈> 시리즈의 초기 구상부터 조지 루카스와 함께 논의해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영향을 받은 영웅 서사 구조를 보고 들으며 성장하게 된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 융의 분석심리학은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심리학'과 매우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담론의 힘은 여전히 세다. 심지어 조던 피터슨처럼, 자신이 오늘날의 대중문화에 대항하는 인물인 양 떠벌이는 사람조차 융의 분석심리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우리는 분석심리학과 신화 구조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마스터 요다의 알쏭달쏭한 말씀을 곱씹을 때조차, 융이 개척하고 캠벨이 가공한 온갖 신화의 가르침을 배우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니 '나에게 딱 맞는 심리테스트'라던가, '나를 가장 잘 설명해줄 어떤 이론' 같은 것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도착할 곳은 정해져 있고, 그 가르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너 자신을 믿어라. 그러나 네 자의식에 갇히지 마라. 네 한계를 인정하되, 극복하라. 다른 이들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잊지 마라.

이렇게만 끝내면 서운할 것 같다. 나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자.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것부터. 일기를 써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내가 기록한 나는 다르다. 그 간극을 보며,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어떤 존재일지 반추하고 내일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좀 더 '매운맛'을 원한다면 신용카드 명세서를 꼼꼼히 읽는 습관을 들여보는 것도 좋겠다. 무슨 이유로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다. 마치 확진자 동선 추적하듯 스스로를 뒤쫓아보자. 무턱대고 본인의 소비생활을 비난하라는 뜻이 아니다. 충동구매라고 생각했지만 요긴하게 쓰고 있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요점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이다.

심리테스트는 결국 '영웅'(Hero)의 길을 찾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여정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핸드폰을 보는 대신 스트레칭을 하는 것 같은 작은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내가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똑바로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인공(Hero)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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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스> 2020년 5월호에 실린 원고입니다. 잡지사에서 교정하지 않은 원고입니다.

2020-06-20

[노정태의 시사철] 삶은 소대가리, 요사스럽게 처먹… "이게 결국 北의 본성!"

삶은 소대가리, 요사스럽게 처먹… "이게 결국 北의 본성!"

이마누엘 칸트와 '영구 평화론'


강물을 앞에 두고 전갈과 개구리가 마주쳤다. 전갈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개구리에게 등에 태워달라고 부탁했다. 개구리는 거절했다. 너는 독침으로 다른 동물을 쏘는 전갈인데,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등에 태워주겠니? 전갈은 답했다. 강물을 건너는 중에 너를 독침으로 쏘면 나도 빠져 죽을 텐데 내가 너를 쏠 리가 있니?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쯤 물살이 거세지자, 그때까지 얌전히 있던 전갈은 불현듯 개구리의 등에 독침을 쏘았다. 전갈과 개구리는 물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개구리가 물었다. 이제 우리 둘 다 물에 빠져 죽게 됐다. 왜 날 독으로 쏘았니? 전갈은 답했다. 나는 전갈이야. 이게 내 본성이라고.

프랑스의 시인이며 우화 작가인 장 드 라퐁텐이 쓴 '전갈과 개구리'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아내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라든가, 술이나 도박 따위를 끊겠다고 다짐하면서 끊지 못하는 중독자 등, 도무지 고쳐 쓰지 못할 사람의 사례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좀 더 시각을 넓힌다면 라퐁텐의 우화를 통해 대북 문제 및 국제정치까지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읽어볼 때다.

칸트의 말년은 혁명의 시대이자 전쟁의 시대였다. 프랑스에서 왕의 목을 치고 민주정을 세우는 혁명이 벌어졌으며, 인근의 군주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이다가 역습을 당하는 등,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를 떠난 적이 없지만 온 세상의 흐름을 꿰고 있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이 바젤에서 프랑스와 강화조약을 맺었던 1795년의 일이었다. 그는 이듬해 내용을 추가하고 다듬어 2판을 내놓았다. '영구 평화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가 간의 영구 평화를 위해 일단 전제되어야 할 예비적 사항들이 있다. 평화조약에는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서는 안 되고, 상대방에게 위협을 가할 만한 상비군을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전쟁 비용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거나 정부 요인을 암살하는 등의 행동도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 모두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다.

철학적·정치적으로 중요한 대목은 그 후에 등장한다. 칸트가 볼 때, 전쟁 없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가 시민적 공화국이어야만 한다. 자유로운 시민들이 동일한 법의 지배하에 평등한 나라가 바로 시민적 공화국이다. 그런 나라의 시민들은 전쟁의 비용과 책임을 자신들이 짊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전쟁을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칸트의 생각이었다.

반면 공화제가 아닌 나라, 즉 전제정에서는 전쟁을 벌이는 게 너무도 쉽다. 칸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왜냐하면 이때 지배자는 국가의 한 구성원이 아니라 소유자이며, 전쟁으로 인해 식탁의 즐거움이나 사냥, 궁전의 이전, 궁전의 연희 등등에 최소한의 지장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즉흥적으로 적국을 향해 비난의 말을 쏟아내고 전쟁을 벌이지만 그 고통을 직접 감당하지는 않는 왕이나 귀족들이 다스리는 한, 전쟁의 위험은 늘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지난 주말부터 연이어 쏟아지고 있는 북측의 폭언과 위협에 대해 생각해보자.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통해 들여다보면 그 내막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을 지배하는 자들은 북한의 '구성원'이 아니라 '소유자'인 것이다. 그들은 북한 전체의 행복과 번영, 평화와 발전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들이 지배자로서 군림하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아무리 못살고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삶은 소대가리'니 '국수를 요사스럽게 처먹는다'느니, 북한에서 쏟아내는 온갖 폭언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을 비롯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는 평화를 위해 외교적 수사를 동원한다. 반면 북한의 언어는 전쟁의 언어다. 당장 상대의 무력 도발을 이끌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의 모욕을 선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애초에 가지고 있는 목적 자체가 다르니 말본새부터 같을 수가 없다.

칸트의 '영구 평화론'을 이어받아 일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민주평화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없으니 타국의 민주화를 돕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군사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타국을 '해방'시킨 후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은 미사일을 퍼붓고 독재자를 처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난제다. 내정간섭이나 공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전제와 어긋난 것이기도 하다.

칸트는 대의제를 통하지 않는 인민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법치주의에 따른 대의정치가 작동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사실상 왕이 제멋대로 폭권을 행사하는 전제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그런 주장이 싫다는 이유로 '영구 평화론'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북한의 공식 명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임을 놓고 볼 때 칸트의 혜안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정은과 김여정 남매, 그리고 소수의 특권층이 2500만 북한 주민을 공포와 폭력으로 지배하는 한, 북한은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국민의 권력을 합법적·민주적으로 이양받은 지도자가 아니라 폭군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져 죽을 줄 알면서도 전갈이 개구리에게 독침을 쏘듯, 그들은 한반도가 어떤 아수라장이 되건 핵을 개발하고 무력 도발을 저지르며 폭언을 퍼부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북한의 권력은 김씨 일가가 아닌 북한 주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북한 주민 스스로 자신들의 삶에 대해 결정권을 갖고, 합법적이고 민주적인 대표를 선발하며, 공정하고 평등하게 법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끔 하는 방향을 국제사회와 함께 모색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확고하게 지켜야 하겠다. 느리더라도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

원문: 조선일보 주말판(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19/2020061903042.html)

2020-06-14

근속별 임금격차가 차별의 핵심

"근속·성·학력별 임금격차, 한국이 유럽보다 훨씬 커", 한겨레, 2017년 7월 4일.

한국의 근속, 성, 학력별 임금격차를 살펴보자. "근속별 임금격차는 근속 20~29년과 근속 1년미만 비교"한 값인데, 무려 4배 차이가 난다.

한국 다음으로 심한 시프러스가 2.44배이고 그 다음으로 포르투갈이 2.09배. 이 그래프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한국의 근속별 임금격차는 독보적인 것이다.

한국 정규직과 공무원의 '자동 상승하는 연봉 시스템'이 낳는 누적효과. 일단 정규직 트랙에 올라가서 연차를 쌓으면 걍 연봉이 올라가고, 그 연봉 위에 또 연봉이 올라가고, 하다보면 근속 20년에서 29년차가 되었을 때 신입사원의 4배를 받는 것.

우리는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우리가 생각하는 선진국 중에 그런 나라는 없음.

여성과 남성의 임금 격차도 같은 논리로 설명 가능. 일단 대기업 뿐 아니라 중소기업에서도 여성을 정규직으로 잘 안 뽑음. 그런데 여성은 정규직으로 입사해도 출산 육아 과정에서 퇴직(당)하는 반면, 남성 직원들은 쭉 남아서 연차를 쌓는다. 저 '4배 월급'의 사다리에 올라가지 못하고 굴러떨어진다는 것.

이것이 한국의 '10대 90' 격차의 핵심. 10퍼센트 안에만 들어가면 그 다음부터는, 여자라서 애 낳느라 쫓겨나지 않는 한, 버티기만 하면 됨. 그러면 퇴직을 앞두고는 신입사원의 4배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으며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음.

참고로 포르투갈은 소위 '이중국가화'가 심각한 것으로 자주 언급되는 나라. 그런데 그 포르투갈보다 대한민국의 상태가 더 안 좋은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 그런데 그와 같은 임금 구조는 대기업 뿐 아니라 공무원 등 소위 '좋은 일자리'의 핵심이어서 아무도 감히 손댈 수 없을 것.

2020-06-12

[신동아] 조국·윤미향·최강욱 공통 QR코드 마오쩌둥 ‘모순론’

조국·윤미향·최강욱 공통 QR코드 마오쩌둥 ‘모순론’

帝国主义要的矛盾国家内部各阶级的一切矛盾要和服从的地位(마오쩌둥)
*제국주의가 주요 모순일 때 국가 내부 각 계급의 모든 모순은 부차적 복종적 지위로 추락한다

●반미주의자 딸의 미국 유학, 형사 피의자의 큰소리
●국가보안법보다 악랄한 민주당 ‘역사왜곡금지법’
●“주요 모순 결정적, 기타 모순 부차적”…졸작 ‘모순론’, 운동권 원리로
●‘토 달지 말고 따르라’는 권력투쟁 레토릭
●‘모순론’ 번안물 조성오 ‘철학에세이’는 스테디셀러
●불변의 주요 모순 “‘쟤들’이 더 심하지 않아?”
●‘친일파가 친미파 거쳐 지금도 기득권’이라는 역사소설

한때 순수했던 청년들이 나이를 먹고 권력을 잡으니 타락하고 말았다. 그들 스스로가 외치던 정의로운 도덕과 윤리를 내팽개친 채 자신들이 싸우던 상대와 다를 바 없는 기득권이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선 후 너무도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비판이다.

가령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모두가 개천에서 벗어나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아내와 함께 본인들의 자식만큼은 어떻게든 스펙을 쌓아주고 의학전문대학원에 부정 입학시켰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2015년 위안부 협상을 뒤집어엎은 반미 성향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기 딸을 미국에 유학 보내놓고 있었다. 최강욱 열린민주당 대표는 조 전 장관의 아들에게 허위로 인턴 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형사 고발을 당한 피의자인데, 재판 중 당 대표로서 기자회견에 참석해야 한다며 퇴정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물론 판사는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민주당과 ‘열린 사회의 적’


그 정도는 약과다. 현재의 여권은 야당 시절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고 비판하며 폐지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제21대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되자 양향자 의원을 대표로 한 여당 의원 31명이 ‘역사왜곡금지법’을 발의했다.

그 내용을 보면 국가보안법보다 더 악랄하다. 일제 식민통치 주장에 동조하거나 그들을 찬양·고무한 경우 징역형을 때리겠다는 거다. “일제 식민통치 옹호단체”를 대통령령으로 정해 판단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철학자 카를 포퍼가 말한 ‘열린 사회의 적’이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사람들을 옹호하는 이가 적지 않다는 데 있다.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40% 이하로 떨어진 일이 드물다. 여당 지지율 역시 야당과는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경제성장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구(舊)여권과 달리 현재의 집권 세력은 민주주의와 인권, 공정 사회 같은 가치를 자신들의 핵심 어젠다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가치를 내팽개친다. 하지만 그들의 지지층은 여전히 굳건하다.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중 잣대를 휘두르며 상대방을 겁박하는 여당과 청와대, 그리고 그 지지자들의 행태는 단순한 ‘내로남불’이 아니다. 그 내역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대학 시절 배웠거나 적어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공산주의 철학, 특히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을 발견할 수 있다.

‘모순론’은 마오쩌둥이 1937년 8월 옌안 항일군사 정치대학에서 한 강연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국공합작을 통해 일본군을 물리친 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다시 전쟁에 들어갔다. 적은 안팎으로 있었다. 소련에서 교육받고 온 다른 공산당원들과 노선 투쟁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사물의 모순 법칙, 즉 대립물의 통일 법칙은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변증법의 본래 의미는 대상의 본질 자체에 있는 모순을 연구하는 것이다.’”

‘모순론’의 첫 문장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보편적으로 모순이 내재하고, 그 모순 각각은 개별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특수성을 지닌다. 하나의 사물이나 과정에 모순이 하나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여러 모순이 있을 테고, 그중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유명한 ‘주요 모순’과 ‘기타 모순’의 구분법이 여기서 등장한다. 마오쩌둥의 말을 직접 읽어보자.

“따라서 어떤 과정이든지 그 속에 여러 모순이 존재한다면 그중에 반드시 주요 모순이 있어 지도적·결정적 작용을 하며, 기타 모순은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이든지 모순이 두 개 이상 존재하는 복잡한 과정을 연구할 때에는 주요 모순을 찾아내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는 지당한 말처럼 들린다. 가령 자동차가 여러 군데 고장 났다고 가정해 보자. 와이퍼가 작동하지 않고 블랙박스에 전원이 들어오지 않으며 엔진이 툴툴거린다. 엔진이 고장 나면 자동차가 멈춰버릴 테니, 카센터에 가면 엔진을 가장 유심히 살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면 와이퍼 고장이 주요 모순으로 등극할 수도 있고, 접촉사고라도 난다면 블랙박스가 안 켜진 것이 가장 뼈아픈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운동권 원리와 독재자 논리 사이
마오쩌둥이 이런 논리를 개발한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당과 내전을 벌이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국공합작을 펼쳤고, 일본군을 쫓아내고 난 후 다시 국민당과 싸우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한발 더 나아가, 공산당이 점령한 지역 내에서는 계급 해방을 앞세우지 말고 당면한 주요 모순인 국민당과의 전쟁에 집중하라고, 내부 분파들을 단속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모든 모순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되며, “주요 모순과 부차적인 모순 양자를 구별하고, 주요 모순을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은 이후 거의 모든 운동권 담론의 바탕에 깔린 원리가 됐다. 1980년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을 떠올려보자. 한쪽은 대한민국의 성격을 ‘식민지 반(半)봉건사회’로 보았고 다른 쪽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파악했다. 전자는 미군 철수 및 통일운동을 주요 모순으로 보았고, 후자는 신식민지 주변부 파시즘의 극복을 주요 모순으로 설정한 셈이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전자는 NL(민족해방), 후자는 PD(민중민주)의 세계관이다.

모순론은 운동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타 모순은 잠시 미뤄두고 주요 모순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는 내부의 이견을 묵살하려는 독재자에게 악용될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국내외로 명망 높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승만은 반일주의를 무기 삼아 야당과 시민사회를 탄압했다. 박정희와 그 뒤를 이은 군사정권은 반공주의를 대한민국의 주요 모순으로 설정하고는 인권, 민주주의, 법치주의, 경제적 평등 따위는 기타 모순으로 취급하거나 그런 요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 본토의 사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 정권을 대만으로 쫓아내더니 ‘내부의 모순’을 찾겠다며 눈을 번뜩거렸다. 학자마다 추산이 다르지만 공산당이 집권한 1949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7000만~8000만여 명이 정치투쟁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한민국과 북한의 인구를 합한 숫자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모순론이 내용 없는 형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요 모순을 파악하고 그에 집중하라는 말은 ‘중요한 문제를 중요하게 취급하라’는 소리와 사실 다를 바 없다. 평범한 자기계발서, 가령 스티븐 코비의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같은 책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차이가 있다면 마오주의(Maoism)는 모순의 해결 방법 중 하나로 폭력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은 “적대는 대립을 해결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라고 돌려서 말하고 있다. 폭력이 갈등 해결 방법 중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마오쩌둥의 어록을 뒷주머니에 꽂은 홍위병들이 죽창을 들고 설친 건 우연이 아니다.

철학 텍스트로서 ‘모순론’은 졸작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미완성작이다. ‘무엇이 주요 모순이고 무엇이 기타 모순인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판단의 원리를 전혀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모순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둥, 사물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둥, 중언부언이 이어질 뿐이다.

그 허술함은 의도된 것이다. 무엇이 주요 모순인지 미리 정해서 글로 써놓으면 마오쩌둥 본인의 권위가 훼손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주요 모순을 결정하는 것, 일관성 없이 뒤바꾸는 것, 기타 모순에 집착하는 분파주의자를 지목해 숙청하는 것, 그것이 마오쩌둥이 휘두른 권력의 본질이었다. 결국 ‘모순론’이라는 텍스트는 ‘내가 제시하는 모순이 주요 모순이고, 네가 주장하는 의제는 기타 모순이니, 토 달지 말고 지도부를 따르라’는 뜻이다. 영화 ‘곡성’의 유명한 대사처럼, “뭣이 중헌디!”를 외치며 상대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레토릭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쟤들은?”


문제는 이 내용 없는 형식이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유통되면서, 이제는 대학가를 넘어 일반 교양 차원에서 비판 없이 소비되고 있다는 데 있다. 1983년 초판 출간 이후 지금껏 꾸준히 팔리고 있는 조성오의 책 ‘철학 에세이’가 대표적이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송건호 등이 지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영화 ‘변호인’을 통해 한층 더 유명해진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과 더불어 386세대의 정신세계를 규정지은 대표적인 저작물로 꼽히는 이 책은, 마오쩌둥주의를 구어체로 풀어쓴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셋째 마당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모순론’의 번안물에 가깝다. 주요모순이라는 개념이 소개되고, 중국혁명과 만주사변, 국공내전 등이 사례로 제시되기까지 한다. 그 결과 도출되는 결론은 앞서 인용한 마오쩌둥의 말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처럼 우리는 주요 모순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심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모순을 일시에 전부 해결하려 한다면 우리의 노력은 분산되어 문제의 해결이 극히 어려워질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애초 익명으로 출간됐던 ‘철학 에세이’는 1993년 저자 조성오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다시 나왔다. 동구권의 몰락과 북한의 경제적 붕괴로 인해 기존의 운동권 사상은 힘을 잃는 듯했고 사회구성체(사구체)와 혁명을 논하던 왕년의 이론가들은 노마드(nomade·유목민)와 탈주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로 탈바꿈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철학 에세이’는 내용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새롭게 열린 논술 사교육 시장의 주요 입문 서적으로 소화됐고, 오늘날까지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며, 모순론은 철학적으로 완성도가 낮은 권력투쟁의 레토릭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물론 나는 자유주의를 내 삶의 신조 중 하나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철학 에세이’의 판매와 유통 등을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특정한 성향의 출판물을 비판 없이 수용해 왔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며, 그 내용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로 토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86세대, 혹은 그보다 더 젊은 고학력층에서 흔히 관찰되는, 여당과 청와대에 대한 ‘묻지마 지지’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결국은 ‘모순론’의 사고방식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직 감성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극렬 지지층이 아닌, 지적이고 사회적 지위를 갖추고 있는 교양인이면서도 선거 때마다 현 여권에 표를 던지는 사람과 정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 상대방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걸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도 쟤들 찍을 수는 없잖아.” 여기서 ‘쟤들’이란 당연히 현재의 미래통합당, 그 이전의 자유한국당, 과거의 새누리당, 그보다 앞서 존재했던 한나라당 등이다.

현 정권의 핵심 지지층에게 저 계보로 이어지는 ‘쟤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고 가능하다면 존재 자체를 말살해야 마땅한 절대악으로 간주된다. ‘쟤들’을 이기는 것이 주요 모순인 셈이다. 따라서 다른 모든 요소는 기타 모순으로 격하된다. 정경심 교수가 표창장을 위조했건 말건, 청와대가 울산시장 선거에 개입했건 말건,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과 댓글 조작을 했건 말건, 윤미향 의원이 위안부 할머니를 앞세워 자기 통장으로 성금을 모아놓고 어디에 썼는지 오리무중이건 아니건, 다 눈감아버린다.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봐야 돌아오는 건 이런 반응뿐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근데 쟤들은 더 심하지 않아?”

‘쟤들’의 어떤 부분이 문제냐고 물어보면, 광주에서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군사독재 세력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는 답이 가장 흔히 등장한다. 이미 김영삼 정권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웠고, 그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김대중이 두 사람을 사면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판단을 바꾸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친일파가 미군정 시기를 거치며 친미주의자로 탈바꿈했고, 그 친미주의자들이 한국 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했으며, 오늘날까지 힘을 잃지 않았다는 일종의 역사소설을 주요 모순의 주춧돌로 삼고 있기에, ‘쟤들’은 뭘 해도 나쁘고, 우리 편은 뭘 해도 ‘쟤들’보다는 낫다. 선악 이분법에 근거한 사고방식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한마디로 말이 안 통하는 상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철학적 차원에서 보자면 두 가지 해법이 있다. 첫째, 주요 모순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질 들뢰즈로 대표되는 일군의 현대 철학자들이 구좌파에 가까운 철학자들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택한 경로이기도 하다.

돈이 썩은 나라는 다 썩게 돼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앞서 말했듯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갈 곳을 잃은 왕년의 운동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장식 삼아 둘러대는 일이 많았다. 애초에 서양 현대철학의 복잡한 논쟁으로 들어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인 만큼 노력에 비해 소득이 크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 테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을 새롭게 설정하는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의 비리 혐의가 터져 나온 이후의 상황을 복기해 보자. 한국 운동권의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에 그토록 비판적이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가 팔을 걷고 나섰다. 윤미향과 정의연을 공격하는 것은 전쟁을 부추기는 한미일 동맹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주요 모순인 반미주의를 위해 횡령 같은 기타 모순은 잠시 접어둬야 한다는 소리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 저런 소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윤미향의 ‘내로남불’을 아무리 지적해 봐야 소용 있을 리가 없다.

여론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보하는 의제를 선점하고 지켜내야 한다. 이 경우는, 결국 돈 문제다. 2020년 대한민국의 시민들은 땀 흘려 번 한 푼의 가치를 안다. 등산 소모임을 해도 회비 걷고 쓴 내역을 정리해서 카카오톡으로 공유하는 게 일상화된 나라다. 돈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분위기도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시민들은 돈 문제가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논의돼 자신이 낸 세금과 기부금 등이 좋은 곳에 소중하게 쓰이는 나라에 살고 싶어 한다.

개인적인 삶에서는 그토록 탐욕스럽게 재산을 긁어모으면서도 공적인 발언의 장에서는 청빈과 자본주의 극복 따위를 떠들어대는 저들이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국민은 공산주의도 전민(全民) 항쟁도 원치 않는다. 도덕을 사유화한 특권 계층만 잘사는 위선과 모순의 나라가 아닌, 지금보다 좀 더 공정하고 여유로운 자본주의 국가를 원할 뿐이다.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다. 오늘날의 백성에게는 돈이 곧 밥이고, 밥이 곧 돈이다. 돈이 썩은 나라는 다 썩게 돼 있다. 건강하고 투명한 회계에 바탕을 둔 좋은 자본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싸움, 그것이 우리 사회의 주요 모순이 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 신동아 2020년 7월호(https://shindonga.donga.com/3/all/13/2088738/1)

2020-06-09

마이클 델, 이재용, 오너의 책임 경영

마이클 델이라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 회사에서 지급하는 컴퓨터나 모니터로 많이 쓰는 델 컴퓨터의 오너다.

마이클 델은 컴퓨터를 값싸게 조립하여 판매하는 생산 라인을 확보했지만, 오프라인 판로를 뚫지 못했다. 그는 거기서 좌절하는 대신, 온라인으로 컴퓨터 견적을 맞추고 주문하여 물건을 받는, 20세기 말로서는 가히 획기적이었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서 대박을 터뜨리고 델 컴퓨터를 상장한 후 소위 '엑싯'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델 컴퓨터는 기나긴 침체와 방황을 겪었다. 컴퓨터 산업에 대해 비전도 없고 꿈도 없고 그냥 숫자로 나오는 실적만 예쁘게 해서 자기들 수당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된, 소위 '경영충'들의 놀이터가 되고 만 것이다.

다행히도 마이클 델은 투자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엑싯'으로 번 돈을 허공에 날리지 않고 이리저리 굴려서 덩치를 더 키웠다. 그렇게 만든 시드 머니로 그는 희대의 결정을 했다. 자신이 상장했던 회사 주식을 다시 사들인 후 비상장기업으로 만들어 의사결정권도 독점한 것이다. 말하자면, '오너의 귀환'인 셈이다.

그 후 나온 첫 작품이 Dell XPS 13이었다. 랩탑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알텐데, (충격과 공포의 노란 봉투) 맥북 에어 이후 애플과 비벼볼만한 노트북으로 윈도우 계열에서 나온 첫 제품이라고 흔히들 평가한다. 극단적으로 베젤 크기를 줄여 거의 11인치 노트북에 가까운 본체 크기와 무게를 구현했다. Dell XPS 15는 15인치 화면을 13인치 크기에 우겨넣었다.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렇게 한번 되찾은 프론티어의 위상을, 델 컴퓨터는 이제 내려놓지 않고 있다. 올해는 17인치 화면을 15인치의 본체 크기에 끼워넣은 Dell XPS 17도 나왔다. 오너가 만들고, 상장했다가 '경영충'의 놀이터가 되어버렸던 과거의 혁신 기업을, 오너가 되찾은 후 혁신의 DNA를 재주입한 멋진 사례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너 경영'이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1) 어떤 '오너십'이냐 2) 그 '오너'에게 정말 비전이 있느냐 3) 그 '오너'의 '오너십'에 경제적, 법적으로 투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있느냐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말하는 것과 달리, 삼성의 미래에 대해 이재용만큼 근심하고 진지한 결정을 내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국민연금이 대주주가 된 후, 낙하산 타고 내려와 한탕 하고 사라질 정권의 수족들보다는, 소위 '경영권'이라는 것을 이재용이 행사하는 편이 삼성의 미래에, 더 나아가 한국의 경제 전체의 미래에 바람직할 가능성이 크다. (포스코라는 반례를 보면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재용이 편법 상속을 위해 동원한 다양한 '테크닉'에 대해 공정한 법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은 '오너 책임 경영' 그 자체가 아니다. 소위 '오너'라는 사람들이 주주의 이익을 실현시키지도 않고, 경영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기업의 의사결정과 이익만을 독점하는 잘못된 구조가 문제다.

삼성전자의 덩치가 너무 커져서 과연 '합법적'인 방법으로 '경영권' 방어가 될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이재용 부회장이 올바른 방식으로 정당하게 키워나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법은 만인에게 공정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시장경제의 초석이니 말이다.

2020-06-06

[노정태의 시사철] 폐기 처분된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이 울고 있다

[아무튼, 주말]

폐기 처분된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이 울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과 '대상화'


한 도시에 어떤 슬픔도 모른 채 살다가 죽은 왕자가 있었다. 평생 '행복한 왕자'라고 불렸던 그는 아름다웠던 모습 그대로 시내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동상이 되었다. 겨울이 왔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때를 놓친 제비 한 마리가 추위를 피하다가 왕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의 가난과 비참 때문이었다. 제비는 왕자의 명을 받아 처음에는 칼자루의 루비를, 나중에는 사파이어로 만든 왕자의 눈을, 마지막에는 왕자의 몸을 덮고 있던 금박을 하나씩 벗겨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흉한 모습이 되자 도시의 시장과 권위 있는 관계자들은 동상을 철거해버리고 만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의 내용이다.

일러스트 = 안병현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동화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일종의 교훈담으로 말이다. "틀렸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이다. 그는 "예술은 오직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유미주의자였다. '행복한 왕자' 또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화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대상화는 현대 철학, 특히 페미니즘 및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비롯한 페미니즘의 여러 고전을 만나게 되지만, 여기서는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논의에 기대보도록 하자. 그가 학술지 '철학과 사회 문제(Philosophy & Public Affairs)' 1995년 가을 호에 기고한 논문 "대상화(Objectification)"가 오늘날까지도 교과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누스바움은 고전 소설과 통속물, 잡지를 넘나들며 텍스트 여섯 개를 발췌한다. DH 로런스의 '무지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제임스 핸킨슨이라는 철학자가 로런스 세인트 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쓴 하드코어 에로 소설인 '이사벨과 베로니크', '플레이보이' 1995년 4월 호,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가 남자 동성애자들의 성생활을 다룬 '수영장 도서관', 헨리 제임스의 '황금 그릇'이 그것이다. 그 각각을 검토하며 대상화의 특징을 도구성, 자율성의 부정, 수동성, 대체 가능성, 침해 가능성, 소유권, 주체성의 부정이라는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말은 어렵지만 요지는 간명하다. 대상화란 인간 존재가 하나의 대상이자 사물로 취급되는 현상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어떤 수단을 위한 도구로, 혹은 사고팔 수 있는 재화로 취급하며, 때로는 약탈하고 어떨 때는 예찬하기도 하는 행위를 대상화라 부른다.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한 대상화가 주로 문제가 된다. 여성을 성욕 해소의 도구로 삼고, 인신매매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숭배'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다.

저 일곱 분류가 수학 공식처럼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맥락에 따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령 DH 로런스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서로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양자가 합의하에 계급적 위계를 뛰어넘는 성적 대상화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누스바움은 판단한다. 반면 '플레이보이'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해로운 대상화에 속한다. 이웃집 여자, 여비서, 학교 선생님 등 어떤 범주를 통째로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왕자'로 돌아가 보자. 왕자를 행복의 아이콘으로 삼아 성 안에 가둬놓고 있었던 도시는, 왕자를 섬기면서 동시에 대상화하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동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우는 아이에게 "저 행복한 왕자처럼 웃으라"고 훈계한다. 도덕적 교훈 전달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도시의 고위 관료들은 동상이 보기 좋고 예쁘니 쓸모가 없어도 괜찮다며 자신들의 취향을 뽐내지만, 정작 왕자가 흉측해지자 쓸모가 없어졌다며 폐기 처분해버린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장식품"으로 대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이 주도하여 전국에 세워진 소녀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녀상은 일제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차적으로는 대상화에 맞서는 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녀상은 각자의 삶과 목적과 꿈을 지니고 있었던, 정의연에 동의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그 모든 위안부 피해자를, '한복 입은 소녀'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치환했다.

앞서 누스바움이 제시한 대상화의 일곱 유형 중 특히 '소유권'이 의미심장하다. 대상화하는 자는 대상화된 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소녀상 제작자가 소녀상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하며 다른 조각가의 모방을 금하는 현실은 무엇을 뜻할까. 정의연이 일제에 의한 강압적 성적 대상화를 고발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반일 운동의 도구로서 대상화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젊은 시절 일제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되었고, 훗날에는 같은 민족에 의해 이념적으로 대상화되고 있었다.

대상화에 저항하는 자는 폭력과 처벌을 당하게 마련이다. 관부재판을 통해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와 피해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받은 고 심미자 할머니의 이름이 남산 '기억의 터'에서 배제된 것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정의연이 자신들의 뜻대로 대상화되지 않는 피해자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상당수의 기성 여성주의자들은 운동과 조직을 지키겠다며 피해자의 절규를 외면한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위안을 위해 다시 '행복한 왕자'를 펼쳐든다. 와일드는 주장한다. 예술은 도덕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유용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 대상화를 거부함으로써 예술은 참다운 가치를 얻는다. 쓰레기가 되어 소각로에 처박혔지만 왕자의 심장은 불 속에서도 녹지 않았다. 신은 죽은 제비와 그 심장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들을 천국으로 불러들인다. 대상화를 거부하며 존엄해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닐 것이다. 보석과 금박을 나누어주던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에 갇히기를 거부한 피해자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5/2020060502224.html